신앙의 신비여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31 2022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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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홍성식 시인 / 길 위의 방 외 1편

홍성식 시인 / 길 위의 방 소진한 기력으론 신(神)을 만나지 못한다 황무지에 달이 뜨면 갸르릉 도둑고양이 울고 집 나간 누이는 오늘도 돌아오지 않았다 식은 밥상에 마주 앉은 데드마스크들 시간은 석고처럼 창백하게 굳고 조롱의 숟가락질, 싸늘한 만찬이 끝나면 표정 없이 젖은 침대에 드는 사람들 어쨌거나 창 너머 달은 또 뜨는데 째각대는 시계 소리에 맞춰 계단을 올라 어둡고 축축한 방, 문을 열면 나신의 엄마 그녀로부터 시작하는 하얀 비포장길 꿈에서도 달맞이꽃은 흐드러졌는데 길을 잃은 자, 길 위에는 방이 없다 홍성식 시인 / 노량진 사는 행복한 사내 강에서 바닷고기의 비린내가 온다 어둠 깔리는 수산시장이 생선의 배를 갈라 새끼의 배를 불리는 사내들 악다구니로 끓는다 보기에도 현란한 사시미칼 서슬 아래 펄떡..

31 2022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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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장정욱 시인 / 물속에 꽂아둔 책 외 2편

장정욱 시인 / 물속에 꽂아둔 책 그는 물속에서 책 한 권을 건져내었다 물빛에 바랜 에필로그와 물빛에 녹아든 마지막 구절을 찾고 있다 제목과 지은이 모두 지워진 책은 바닥의 평온을 읽기 시작했는지 오랫동안 물속에 고립되었다 의미가 다 빠져나간 줄거리 흐르고 흐르면 다음의 봄이 오고 말 텐데 텅 빈 페이지를 들여다보며 무릎이 허물어지도록 흐릿해진 밑줄에 몰두하는 뻑뻑한 밤 건져 올린 책 모서리에서 여백마저 흩어지면 더는 기억하지 못할 눈망울로 책 속 주인공이 그를 바라보았다 - 『여름 달력에 종종 눈이 내렸다』(달아실, 2019) 장정욱 시인 / 종이 인형 가끔 입체감 없는 어린 시절이 튀어나오면 도화지 위에 당신을 그려 넣어요. 조심스럽게 목이며 몸통을 오려내지요. 납작한 엄마가 태어났어요. 아주 작은 ..

31 2022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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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현상연 시인 / 비대한 슬픔 외 2편

현상연 시인 / 비대한 슬픔 문득,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 뒤돌아보면 차디찬 심장의 보고픈 이 보이지 않아 흐트러진 목소리 모을 수 있다면 허공에 떠도는 환영, 만질 수 있다면 슬픔은 점점 뚱뚱해지는데 담담하게 지내라는 공기들의 후덥지근한 말들 간절한 게 죄라면 하늘에 심장을 내 걸고 실컷 울겠어 나 대신 울어주던 비는 간간이 끊어지고 추적거리던 잔비 사이로 그림자를 끌고 온 햇빛의 발목 어디로 갔을까 과녁을 뚫던 화살은 꺾이고 허공에 빈 족적만 어지럽게 찍힌 길 잃은 기억 염소자리 하나 늘어난 북쪽 하늘을 보며 말없는 말이 벼랑을 기어오를 때 부재라는 단어에 고립된 나, 후회의 부표는 표류를 반복하고 눈물이 떨어지면 멀리 못 간다는 누군가 전언에 마지막 인사 옷깃으로 찍어 내네 ― 현상연 시집 {가마우지..

31 2022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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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임동확 시인 / 입춘 무렵 외 3편

임동확 시인 / 입춘 무렵 그악스럽게 도토리, 상수리를 주워가던 지난겨울에도 살아남은 청설모 새끼 두 마리가 스트로브 잣나무 가지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는 해발 73M 궁산 공원 삭정이로 얼기설기 아카시아나무 우듬지에 엮어놓은 까치집이 마치 시대를 훌쩍 앞서간 예언자처럼 뜻하지 않은 초속 21M 강풍에도 끄떡없이 잘 버텨내고, 저마다 혹독한 생존의 비밀을 풀려는 듯 도끼이자 숟갈인 부리를 가진 딱따구리는 선 채로 썩어간 지 오래인 밤나무 둥지를 연신 쪼아대고 있다 굽은 허리에 지팡이를 짚은 채 정상을 향해 한 걸음씩 걸어가는 할머니가 오르막에서 잠시 눈길을 돌리며 쉬는 동안 제주 삼다수 2L병에 담아 연민하듯 뿌려주는 흰 쌀을 거부하듯 멧비둘기 한 마리 노오란 개나리 울타리 그늘 아래 부엽토를 연신 ..

31 2022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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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명림 시인 / 횡재 외 5편

김명림 시인 / 횡재 산 중턱 으슥한 무덤가 별빛 산허리 부여잡고 사랑 고백하는 밤, 낮잠 실컷 즐긴 난봉꾼 나비 슬슬 바람기 발동하는데 마음에 품었던 가시 붓꽃 남편 집 비운 사이 오늘 밤 기어이 품고 말리라 밤눈 어두운 나비 이 집인가, 저 집인가 자꾸 헷갈리는데 마음은 급하고 에라! 모르겠다 불 꺼진 집으로 들어가 덮치 긴 했는데 어째 표정이 영 신통치 않더라 날이 밝자 할미꽃 고목에 꽃이 피었다며 지팡이 산 아래로 냅다 집어 던지고 허리 곧추세우며 빨강 저고리 옷고름 풀었다 매었다. 요염한 미소 짓더라 김명림 시인 / 풍경 콩잎 비단 금침 깔고 오뉴월 땡볕 아래 정사 벌이고 있는 무당벌레 보랏빛 야릇한 눈으로 몸 비비 꼬며 훔쳐보던 콩꽃 허연 엉덩이 내리까고 참았던 오줌보 쏴 쏟아내고 마른 침 꿀..

31 2022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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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허정애 시인 / 조지아 오키프* 외 1편

허정애 시인 / 조지아 오키프* ― k 선생님께 선생님을 뵌 지 오래되었습니다. 지인들을 통해 듣는 소식이 밝지 않으니 늘 웃음을 잃지 않으시던 선생님의 상황이 얼마나 암담한지 짐작하고 있습니다. 저는 요즘 카쉬가 찍은 오키프의 사진에 붙들려 있습니다. 흑백의 공간, 흙과 모래의 결이 그대로 드러난 뉴멕시코 아비키우의 집 벽에는 하얗게 육탈된 수사슴의 머리뼈가 장식되어 있고, 말라 비틀린 고목 둥치를 팔걸이로 노년의 오키프가 앉아 있습니다. 자연광을 비스듬히 받고 있는 그녀의 단정한 모습이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나무문과 무척 닮아 보입니다. 검은 벨벳 느낌의 옷소매 끝에 부각된 강인한 듯 섬세한 손이 그녀의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키프는 주변의 적대적 시선과 편견, 예술 권력에 맞서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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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한지혜 시인 / 저녁에 오는 사물들 외 1편

한지혜 시인 / 저녁에 오는 사물들 모른팔의 어둠이 오고 왼팔의 빛은 택시를 타고 갔어 이후 반복되는 망각의 경험들 유리 썬팅필름 가운데 식탁으로 모이기 시작해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이 접히는 세계 척추로 미끄러지다 부서지는 소소한 기척을 피로 봉합하기 오믈렛으로 시작하는 순환 우연에 맘을 기울였던 관계 아직 지킬 수 없는 나이프와의 약속 복도를 지나 롤빵의 계단을 자꾸 내려가 차가운 문 뒤 쪼그리고 앉은 구석, 경계 트라우마의 신호마다 포개지는 기이한 감각 빛 속에 녹은 얼룩 허브티 다른 허무로 태어나려 충동이 출몰해 충돌 충만을 알지 못해서 증거물과 흔적들을 꺼내 아스파라거스처럼 펼쳐놓아 얼굴 불안한 표정 거짓말이라고 말을 해 레코드 조각을 조합해 가슴으로 돌아와 화이트 성좌로 나타나 와인처럼 흩뿌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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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 산책 [글로벌칼럼] (107) 때늦은 도착을 기다리는 예수님께 가는 길

[글로벌칼럼] (107) 때늦은 도착을 기다리는 예수님께 가는 길 윌리엄 그림 신부 가톨릭신문 2022-07-31 [제3305호, 5면] 교황의 주교부 여성 위원 임명 가톨릭교회 역사상 이례적 일 모든 성별에 평등했던 예수님 따르는 데 오랜 시간 걸려 프란치스코 교황이 여성 3명을 교황청 주교부 위원으로 임명했다. 주교부는 교황에게 주교 후보를 추천하는 등 전 세계 주교 임명과 주교 관련 업무 일체를 관할한다. 여성이 공식적으로 이처럼 가톨릭교회의 중요하고 권위있는 지위에 임명된 것은 역사상 처음이다. 물론, 교회 운영에서 여성들에게 의미있고 중요한 일을 맡기고자 하는 교황의 의중에 따라 이 여성들이 주교부 업무에 참여해 실제로 큰 영향을 미칠 것인지, 아니면 그저 ‘장식용 선물’이 될 것인지는 지켜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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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혜경 시인 / 이미 보았다 외 4편

황혜경 시인 / 이미 보았다 보고 싶다 이미 보았다 그쪽을 생각하면 체한 것 같고 이쪽은 좀 낫고 나의 모든 것 본 것 중에 있을 텐데 그쪽과 이쪽이 시간인지 공간인지 희미해지고 더 깊은 골짜기 데자뷰 이끼 낀 계단 더 밀림(密林)과 유폐(幽閉) 즐겁던 일들이 즐겁지 않고 예민해지던 이유가 무감각의 부메랑으로 되돌아올 때 단독적으로 한껏 겉돌면서 영향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아무리 더 가보아도 이미 보았다 보고 싶다 이미 보았다 상사(相思)는 기다림의 어디쯤에서 병(病)이 되려는가 이것을 다른 것이 치유할 수 없고 이것은 당신에게만 허용하는 나의 한정된 상처 끝을 보고 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이 끝과 이어져 또 보고 싶다 이미 보았다 눈이 선한 사람 눈앞에 선해 시력은 어디쯤으로 확장되려는가 또 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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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재영 시인 / 떠도는 부족 외 1편

한국문학방송 2014 신춘문예 당선작 최재영 시인 / 떠도는 부족 말(言)로써 그려진 지도가 있었다 아이의 첫 울음으로 운명의 등고선을 점치고 짐승들의 귀도 처음인 듯 열리던 곳 누대 몸속으로 유전해 온 길이 있어 아슴하니 눈길 닿는 곳까지 획을 그었는지 그들의 생을 축척해도 영역은 가늠되지 않았는데, 몸에 길을 들여 가는 곳마다 부족의 영토는 새로이 확장되곤 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 좌표를 그렸으므로 어디에도 경계선은 없었으므로 간혹 돌아오지 못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그들은 탯줄의 울림으로 지도의 노래를 배우고 가장 먼 별자리에 방점을 찍어 매일 웅장한 족적을 기록했으리라 모든 문명이 부족을 비껴갔으므로 말(言)의 사원을 짓고 탑을 올렸으리라 무지개를 필사하여 후세에 전하기를 수백 번 몸으로만 익혀 온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