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사태의 진실탐구

역사학도 2007. 6. 3. 14:50

 

 

   위 동영상은 김일성과 김정일 지령으로 조총련이 제작하여 국내 방송국들과 해외에 518민주화운동 장면으로 선전되어 왔던 동영상의 한 장면이다.  그런데 일본인 기자 신분으로 입국하여 촬영하던 조총련이 아무리 발포 선전 자료를 찾아도 저 장면이 전부였던 듯하다.  광주기동경찰이 최류탄을 발사하는 불과 1~2초의 장면이 전부이다.  그럼에도 위 영상물은 공수부대가 5천명을 학살한 장면으로 국내와 세계에 유통되고 선전되어 왔다. 

    조총련이 편집 제작하여 빨리 스쳐가는 장면이기에 여태껏 국민은 저 영상물에 보이는 진압군 모습이 광주기동경찰인지 공수부대인지 구분하려 하지 않고 나레이션에게 속아왔었다.  그러나, 5번 반복되게 한 위 장면을 찬찬히 살펴보라.  분명히 그들은 광주기동경찰의 모습이다.  이때가 5월 18일 오후 2시 반경이며, 저 광주기동경찰 아저씨들의 연령대는 4~50대였으며, 최류탄을 시위대가 아니라 공중을 향하여 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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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이 발포 장면으로 왜곡되어 온 장면의 진실이다.  그리고 그 직후 어떤 일이 있었는지가 중요하다.

그리고 30분 후 광주기동경찰복장으로 위장한 518 폭도들의 모습을 우리가 보기 때문이다.  아래 사진에서 518광주시민군이 광주시민들을 강제로 시민군에 징집하기 위해 총구를 겨누며 위협하는 장면이 나오고, 바로 그 아래 5월 18일 3시경 광주기동경찰복장으로 위장한 518 폭도들의 모습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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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총련이 편집한 518영상물은 진압장면만을 보여주지만 실은 광주기동경찰이 약자였고, 518폭도들이 강자였다.  금방 나이 4`50대의 광주기동경찰 40명이 납치되어 옷을 벗기우고 묶인채 각목으로 맞았으며, 나머자 경찰은 모두 광주를 빠져 도망갔다.  아래 사진에서 우리는 기동경찰을 납치한 뒤 기동경찰복을 입고 있는 폭도들의 모습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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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폭도가 광주기동경찰로 위장한 사진 중 맨위 사진 왼편끝 폭도가 요 밑 사진에서도 왼편끝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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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듯 광주기동경찰로 위장한 518폭도들의 특징은 총기를 소지한 무장폭도들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진짜 광주기동경찰들은 폭도들에게 납치되거나 모두 광주 외곽으로 도망갔으며 폭도들이 광주기동경찰복장차림을 한 시간대가 5월 18일 오후 3시에서 3시반경이었다.

 

  이렇듯 가까이서 두발을 확인하지 않으면 누가 진짜 광주기동경찰이고 누가 가짜인지 알 수 없었던 상황에서 광주시장, 전남 치안본부장, 광주경찰서장은 광주향토사단장 정웅 소장이 시위진압 요청을 하게 된다.  여기서 의문점은 도대체 518폭도들이 광주기동경찰복장으로 위장한 의도이며, 또 최튜탄 발사기를 들고 있던 광주기동경찰들과 달리 518폭도들은 어떻게 총기로 무장할 수 있었느냐 하는 점이다.

 

   강제진압이 불가능한 것이 그날도 진압의 주체가 광주였어요. 지금 여기서 중요한 질문은 진압의 주체가 누구였느냐 하는 것입니다. 진압의 주체는 분명 광주였습니다. 광주를 대표하는 광주시장, 전남 치안본부장, 광주경찰서장의 요청으로 광주향토사단장 정웅 소장이 시위진압 결정을 하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시위 진압 결정의 주체가 광주였으며, 시위 진압 명령의 주체도 광주였습니다.

 

    BBC 동영상 뉴스 대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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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습니다.
핵펭귄과 노시계의 마도천하 아래에서 이런 글이 나왔다는 것도 놀랍고
팩트도 뒷받침할 증거도 없이 비아냥과 욕설을 난무하는 홍어들에게도 의연하게 대처하시는 모습도 그렇습니다
제가 고등학교때 사회교사가 5.18 영상물을 보여줄때 무슨 평화시위하는 광주민을 공수부대가 총우로 무차별 학살해서 몇만명씩 죽인 것 마냥 묘사하던데
그때 당시에는 그냥 그런가보다 했지만 성인이 되고 여러가시로 접해보니 영 아닌걸 알게되고 또 저는 이과라 1년만 들었는데 그런식으로 3년간 세뇌가 됐으면 어땠을지 섬뜩합니다 일단 학생들의 날개를 꺾고 세뇌하는 전교조 교사부터 뿌리를 봅아햐 할텐데 말입니다
http://www.study21.org/518/ 상단 왼편에 북한이 광주사태 32주년을 맞이하여 공개한 영상물이 있습니다. 님이 고등학교 때 보신 영상물과 어떤 점이 비교될는지 궁금합니다. 5월 18일부터 평화시위란 없었습니다. 아마 그 영상물에서 시위하는 장면은 14~16일의 가두시위일 것입니다. 그때는 공수부대가 전혀 등장하지 않았었는데 5.18측에서 영상물을 조작할 때는 전혀 다른 사건 장면들을 섞어 조작 편집하여 시청자 착시현상을 일으키게 히였을 것입니다.
최규하가 광주를 한번 방문했었다는 말이 있던데... 그게 사실인가요? ~카더라는 식이 아니라 구체적인 근거를 좀 알려주실 수 있는지요? 만약 사실이라면 최규하가 단순 전두환의 바지사장이지 않았으며 대통령으로서 역할을 실행하고 있었다는 근거로 활용될 수도 있을듯해서요.
당시 무장시민군 대부분이 청소년들이었습니다. 최규하 대통령이 5월 25일 광주를 방문하여 청소년들은 무기를 반납하여 달라고 방송으로 호소하였습니다. 그런데 광주사태 주동자들이 "80만 광주시민" 명의로 낸 답 성명서에서 최 대통령을 유신잔당이라고 부르며 찢어죽이라고 선동하였으므로 최 대통령이 그 다음날 새벽 자위권 발동 재가를 해 주는 대안밖에 남지 않았던 것입니다. 광주에서의 최 대통령 연설문 일부를 여기 인용합니다. 필요하실 때 연설문 스캔파일을 드릴 수 있습니다.

어떠한 문제 때문에 일시적인 감정이나 또는 흥분으로 말미암아 난동게 가담한 사람들, 특히 청소년들은 그 결과가 어떠한 것이 될지 이성을 되찾고 냉정히 다시 생각해 주셔야 되겠습니다……
아무쪼록 냉정과 이성을 되찾고 일시적 흥분과 격분에 의해서 총기를 들고 다니는 청소년 여러분들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총기를 반환하고 집으로 돌아가서 부모, 형제, 자매들을 안심시켜 주셔야 될 것입니다
……청소년 여러분들은 조속히 냉정을 되찾아 주시기 바랍니다. 일시적인 흥분과 또 일시적인 감정에 의해서 잘못된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정부는 최대의 관용을 베풀고 불문에 붙일 것을 말씀드려 두고자 합니다 (김영택 1996, 204).

중고생 무장시민군을 보신 충격이 너무 크셨기 때문에 6월 12일에도 이렇게 연설하셨습니다:

또한 정부는 학생들의 면학 풍토를 조성하는 한편 학원부조리를 시정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문제가 있다면 순리적으로 해결해 나가야 할 것이며 공부나 연구를 제쳐놓고 불법적인 집단 시위나 폭력 행위를 한다는 것은 학생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학생들은 우리나라의 내일의 주인공이며 장차 국가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실력을 기르기 위해 지금은 시간을 아껴 열심히 배우고 공부할 때인것입니다 (대통령비서실 1980, 230)
역사학도님 혹시 이 블로그의 내용을 객관적 근거들로서 반박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http://blog.naver.com/jangsp11?Redirect=Log&logNo=100129799966&from=postView
제가 보기에 억지로 짜맞춘 부분이 보이긴 하는데 이에 대해 확실히 반박하기 위해선 출처가 분명한 근거가 필요할것 같습니다.
"1200명 정도의 특수부대를 차출해서 남한의 광주에 침투시켜서 사태를 격화시키고자 시도했었다."는 제가 강명도 책에서 못 보았기 때문에 페이지 번호를 알아야 답변할 수 있습니다. 혹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북한개입설에 대한 강력한 증거입니다.

무장봉기가 광주시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는 상황 판단을 북한세력이 한 때는 5월 26일이었으며 그 날 여러 조로 구성된 북한군은 광주에서 철수하였습니다. 27알 아침 이후가 아니라 26일 이전에 북한 스스로 추가 병력 지원을 포기하였습니다.

19일부터 26일까지 광주에서 활동했던 북한군을 영웅으로 기리는 광주관에 대한 장진성의 증언 동영상은 http://cafe.daum.net/issue21/3IBb/712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제가 국사 수행평가로 역사주제하나를 선택해야하는 숙제에서 5.18을 택했는데 인터넷에 쳐보니까 모두다 신군부의 행패다 전두환 찢어죽여라 말만있어서 고민이였는데...이런글들도 잇엇군요 ㅠㅠ..좋은자료 감사합니다..ㅜㅜ!!!
여전히 인터넷에 그런 자료들만 있던가요? 님의 숙제가 자못 기대됩니다.
하나만 더 여쭙겠습니다ㅠㅠ저 12.12와 5.17사건에 대해서도 궁금한데 거기에 대한 자료나 말씀좀 해주실수 있나요..?ㅜㅜ
http://www.study21.org/518/ 에는 가보셨나요? 그리고 궁금한 것 있으면 무엇이든 질문해 주세요.
정말 감탄하고갑니다.
제가 정말.. 잘못알고 있었어요
왜 이렇게 뒤바뀐 건지. 어디부터 꼬인건지 답답하기만합니다.
제 주위 사람들에게라도 알려야겠어요
감사합니다. 많이 알려 주세요.
역사학도님! 반갑고 존경스럽습니다. 얼마전 알게되어 한번씩 배우고 가곤했는데.
등록일이 2007년이라.. 비활동 게시판인줄 알고 아쉬운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2012년도 댓글을 보고는 많이 반갑습니다.
아프리카의 잼여사 게시판에 역사학도님의 글을 발췌하여 게시했습니다.
역사의 엉킨부분을 많이 배우겠습니다.
우황청심환님의 닉이 상당히 낯에 익은 것으로 보아 전에도 우리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 듯합니다. 윗글은 2007년도 글이고, 제가 아직 공개하지 않은 방대한 자료들이 있습니다. 광주사태의 진실은 이제 거의 다 밝혀졌습니다. 아직 자료 공개를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대부분의 광주사람들은 아직도 공수부대원이 무자비 하게 진압한걸로 기억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겐 논리가 필요 없지요..그런데는 야당측과 언론의 책임도 큽니다..
저기 학생의 신분으로써는. 솔직히 일반인들도 이해를 잘 하지 못할 내용이라 도대체가 무슨소리인지 모르겟네요. 정보의 깊이도 너무 깊어서 아무것도 모르는사람은 정말 곧이 곧대로 믿을수밖에 없는 자료들입니다. 진실처럼 보이기도하고. 별 개소리가 가득한 선동자료로 보이기도하고

여하튼 이 질문에 답해주셧으면 합니다.


1.전땅크시절 안보는 장난이 아니었을텐데. 어떻게, 어떠한 방법으로 특수부대? 를 보낸거죠?

2. 만일 그랬다면. 저기 보면 700명? 정도의 북한군 특수부대가 개입하였다고 그러는데

계엄군 사망자는 총 21명? 이고 그중 10명이 총살인데.


북한군 700명이 개입한것 치고는 매우 적은 인명피해 아닙니까?


3. 이러한 자료들은 직접 알아내시고 찾으신 건가요 아니면 어디 책에서 발췌하신 건가요?



4. 증언만으로는 단정지을 수 없는문제 아닌가요? 그런데 상당부분의 근거들이 증언으로 바탕이 되어있는것 같습니다. 구체적인 증거는 없나요?


5. 518을 폭동이라 치면. 뭐 지난 10년간은 야권이 집권해서 그러했다 쳐도. 지금 한나라-새누리당의 보수진영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5.18의 재진상규명을 하지 않는것은 물론이고 5.18을 추모하는건가요


객관적인 답변 부탁합니다
1980년 5월은 최규하 대통령 시절이었습니다. 최규하 정부는 과도정부였기에 안보가 몹시 불안했었습니다.
아. 그리고 지금까지 하신 발언들의 출처를 제시해주셧으면 합니다.
하나씩 구체적으로 물어주시면 출처를 드리겠습니다.
아니. 지금 님 블로그에 적으신 정보들과 댓글에 언급한 근거들의 출처들이요
저는 어느것이 진실인지는모릅니다.. ㅇㅂㅇ;;
저는 역사학도 님의 글을 처음 읽어서 광주 사태가 민주화 운동이 아니라고 생각을 했는데요.
http://blog.naver.com/chiyahn?Redirect=Log&logNo=20171304853
여기에 글 올리신 분은 막 목차들에 주제와 그 밑에 소주제를 많이써서 그 소주제 마다 반박하는 뉴스 기사들의 링크를 달고 반박하는 글을 썼는데 이 분은 잘못된 지식을 말하고 있는건가요 ?
5.18에 대한 거는 예전에 중학교때 본 동영상 뿐이고 현재도 이과 학생이라서 자세한 것에 대해는 그렇게 많이 배우지 못해서 저 블로그에 글을 쓰신분에게 논리적으로 답을할수가 없네요 올바르지 않은 지식이라면 고치라는 댓글을 달아주고 싶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거기 첫번째 반박에서 그 분은 힌츠페터의 영상과 사진을 혼동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힌츠페터는 5월 19일에 광주로 내려갔다가"는 그분이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조총련 조직이 전남대 학생회장 박관현이 죽었다는 유언비어로 힌츠페터를 선동하여 그가 광주로 갈 준비를 한 때가 19일이지만 광주에 도착한 시간은 20일 오후였습니다. 20일 광주에 도착하였을 때는 영상촬영기사와 함께 왔지만 23일 다시 왔을 때는 홀로 왔습니다. 따라서 그의 영상물 촬영은 20일 오후부터 21일 정오 무렵까지만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KBS가 2003년에 방송한 "푸른 눈의 목격자" 중 영상물은 20일 오후부터 21일 정오 무렵의 시간대에 촬영되었다는 것은 나레이션 및 대본에도 분명히 밝혀져 있어 그분이 도저히 딴소리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단, 사진은 별도입니다. 20일에 찍은 사진도 있고 23일에 찍은 사진도 있습니다. // 구체적으로 하나씩 의문점을 질문해 주시면 제가 자세히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그래도 역사학도님의 글을 읽으면서 오히려 올바른 역사지식에 대해서 배운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친일파와 뭐가 달라 이 사이트에 글적어놓은 넘들
광주사태를 민주화운동이라고 주장하는 글을 읽다보니 의문점이 생겨 질문 올립니다.
양측 중 먼저 발포한 측은 어디인가요?
5월 21일 오후의 사건에 대해서 질문하시는 거죠? 시민군의 일방적 발포였고, 계엄군측 발포는 없었습니다. 발포 명령자를 찾지 못하는 이유가 실탄이 지급된 사실이 없기 때문입니다. 발포 명령은 실탄이 지급된 후에먄 가능합니다. 그런데 실탄 30만발을 보유하고 있던 시민군과 달리 그 날 계엄군에게는 전혀 실탄이 지급되지 않았습니다. 그 날 오후 한동석 중위가 인솔하는 광주향토사단 병력이 헬기를 타고 철수할 때 이틀 동안 먹지도 자지도 쉬지도 못한 채 사지에 남은 공수부대원들에게 미안하여 자기 소대가 경계근무용으로 보유하고 있던 실탄 이백 발을 넘겨주었습니다. 그때 시민군 진영에서 총성이 울리면서 시민군 장갑차가 공수부대원을 깔아죽이자 놀란 공수부대원이 그 실탄으로 1분간 공포탄을 몇 발 쏘았습니다. 그런데 그 공포탄 실탄은 광주향토사단의 한동석 중위가 전해 준 것이었으며, 사단장은 김대중 인맥의 정웅 소장이었기 때문에 발포 명령자를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날의 총기 사망자들은 시민군 총기 오발 사고에 의한 사망자들이었습니다.
5.18은 민주화 운동이 아니라 폭동이군요 잘보다 갑니다
네, 민주화운동이란 명칭은 어불성설입니다. 그 용어는 1988년에 등장하였고 1980년 광주사태 당시에는 그런 용어도 그런 개념도 전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민주화 운동이 1988년에 등장한 개념이므로 1980년에 일어난 사건은 폭동? 여기서 뿜었네요. 후대에 와서 당시 사건을 그렇게 평가한것 아니겠습니까. 재야 사학자들의 소수 의견이 세월이 지나 정설이 되는 경우도 있으니 열심히 해보세요. 근데 박정희와 전두환이 사건의 전개에 핵심에 있는데 그에 대한 서술이 있다면 참고할거 같은데요.
독재자인지 아닌지 그것만 말해주면 되는데.
진실을 위해 싸워 주시는 모습 정말 본받아야겠습니다.
이미 민주화 운동으로 평가받은 사실이다. 물론 극소수의 사람들은 반론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정설,통설이 있으면 소수설도 있는거다. 여기 역사학도라는 분의 설도 하나의 소수설일 뿐. 소수설이 정설이 되려면 뒤엎을만한 증거를 제시하여야 한다.
간단히 말해 이 블로그에 나온 자료들의 사실검증을 할 필요도 없이 정설을 대체할만 하지 못하단 뜻 되겠다.
이땅의 사학자들, 교수들이 바보가 아니지 않은가.
누가 언제 민주화운동으로 평가하였나요?
2011년 유네스코가 5.18민주화운동이라고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했는뎁쇼
5.18을 33년 왜곡시킨 사실은 영정사진의 주인공 조 천호의 홈 페이지에.....
호남인들은 조 사천 시민군[민주화 운동] 이 분이 진압군의 총에맞아 사망했다고하나
그 것은 새 빨간 거짓말. 수사기록:카빈총 사망.
외국기자가 사진으로 기록.가까운거리에서 불순분자[시민군]총에 사망함.
이웃주민;도청 앞에서 장갑차타고 목에 총을맞아 구멍이 뻥...
사망 즉시 자택으로 연락이와 그 분의 처에게 직접전해주었건만
그 여자는 가슴에 맞았다고 거짓증언을....
그러기에 5.18은 제조명하여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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