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Yuanshiren 2011. 5. 24. 16:45

     

    청사 [清史, History of Qing]

     

    <청사고(清史稿)>를 바탕으로 1961년 대만(臺灣) 정부가 편찬한 청(清) 왕조(王朝)의 기전체(紀傳體) 사서(史書).

    [장제스[蔣介石, 1887~1975]의 대만(臺灣) 국민정부(國民政府)가 신해혁명(辛亥革命) 50주년(周年)인 1961년에 편찬한 청(清) 왕조(王朝)의 기전체(紀傳體) 사서(史書)이다. 1927년에 자오얼쉰[趙爾巽, 1844~1927], 커사오민[柯劭忞, 1848~1933] 등이 완성한 <청사고(清史稿)>의 내용을 수정하여 중국 역대 왕조의 정사(正史)인 ‘24사(史)’를 잇는 청(清)의 정사로 편찬했으나, 중국에서는 국민 정부를 정통(正統)으로 하려는 정치적 의도에 따라 <청사고>의 내용을 왜곡했다고 비판하며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신해혁명으로 청(淸, 1616~1912)이 멸망한 뒤, 중화민국(中華民國) 정부의 대총통(大總統)이 된 위안스카이[袁世凱, 1859~1916]는 1914년 청사관(清史館)을 설립해 <청사고>의 편찬을 시작했다. <청사고>는 1920년에 초고(初稿)가 완성되었으며, 재정난 등의 어려움을 겪다가 1926년에 교정 작업이 재개되었고, 1927년에 완성되어 1928년에 출간되었다. 그러나 1928년 베이징[北京]을 점령한 장제스의 국민정부는 <청사고>가 신해혁명을 부정적으로 서술하고, 청조(淸朝)의 복벽운동(復辟運動)을 옹호하고 있다며 간행본을 모두 몰수하고, 출판 금지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청사고>를 수정하여 <청사(清史)>를 편찬하려 했지만, 국공내전(國共內戰) 등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추진하지 못했다.

    1949년 중국 공산당에게 패해 타이완[臺灣]으로 쫓겨난 장제스의 국민정부는 신해혁명 50주년인 1961년을 목표로 정사 편찬 계획을 추진했고, 1961년 계획대로 <청사고> 관내본(關內本)을 개정하여 <청사>를 간행했다. <청사고>는 모두 536권으로 되어 있지만, <청사>는 본기(本紀) 25권, 지(志) 136권, 표(表) 53권, 열전(列傳) 315권, 보편(補編) 21권 등 모두 550권으로 되어 있다.

    <청사>는 <청사고>에서 신해혁명이나 국민정부에 대해 부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부분들을 삭제하거나 수정했는데, 보편(補編)에서 타이완에서 명(明)의 부흥 운동을 전개한 정씨(鄭氏) 정권을 다룬 ‘정성공재기(鄭成功載記, 2권)’나 청(淸)에 저항한 명(明)의 유신(遺臣)을 다룬 ‘명유신열전(明遺臣列伝, 2권), 남명(南明) 정권을 다룬 ‘남명기(南明紀, 5권)’ 등을 포함해 타이완으로 쫓겨난 국민정부의 정통성(正統性)을 뒷받침하려 했다. 또한 태평천국(太平天國)에 대한 홍수전재기(洪秀全載記, 2권)와 청(淸)의 억압에 맞선 혁명가들을 다룬 혁명당열전(革命黨列傳, 8권) 등을 포함하였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청사>가 정치적 의도에 따라 집필이 왜곡되어 사료적 가치를 인정할 수 없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청사(清史)>가 아니라 <청사고>의 관내본(關內本)을 24사를 잇는 청(淸)의 정사(正史)에 준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출처] 청사 [清史, History of Qing ] | 네이버 백과사전

     

    청나라

     

    청나라(淸—) 또는 대청제국(大淸帝國) 또는 다이칭 구룬(Daicing Gurun)은 일반적으로 중국이 여진족(만주족)의 지배를 받은 시기를 말한다. 원래 청나라는 1616년에 여진족의 누르하치가 동북 지역에 건국한 이민족의 나라를 말하는데, 초기에는 금(흔히 “후금”이라 부름)이었다가 후에 세력을 강화하여 청으로 국호를 바꿨다.

    이민족의 나라 청나라는 한족의 중국 명나라뿐 아니라 주변의 몽골, 위구르, 티베트를 모두 정복하여 몽골 제국(원나라)을 제외한 역대 중국 왕조 중에서 가장 큰 영토를 이루게 되며, 이민족으로써는 가장 오랫동안 중국을 지배하였다. 1912년 선통제 푸이 대에서 서구열강 세력 등의 영향으로 국력이 약해져 청나라는 멸망하고, 중국 역사에서 2천여 년 간 이어졌던 제국의 시대가 끝나게 된다.

    중국에게 있어 이 시기는 만주족에게 식민 지배를 당한 시대라고 할 수 있는데, 청나라 초기에는 만주족에 의한 학살로 인구가 급감하기도 했었고, 피지배계층 한족들은 만주족의 풍습을 따르는 것을 거부하다 학살과 탄압을 당했으며, 이로 인해 말기에 만주족의 중국 지배를 반대하는 '멸만흥한(滅滿興漢)'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역사

     

    청나라의 건국1616년 만주족인 누르하치가 만주를 통일하고, 예전에 만주족의 다른 이름인 여진족이 세웠던 금나라를 잇는다는 뜻에서 후금(後金)이란 이름의 나라를 세우며 시작되었다. 그 후계자 홍타이지는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 주변 각국을 침공하여 영토를 확장함과 동시에 군사·행정 제도인 팔기(八旗) 체제를 확립하였다. 홍타이지의 다음에 즉위한 순치제(順治帝)때 청의 팔기군이 산해관을 넘어서 명나라 수도였던 베이징을 점령하고 수도로 삼았다.

    청나라 군대가 만리장성을 넘어서 중국에 들어올 때 ‘양주십일(揚州十日)’, ‘가정삼도(嘉定三屠)’와 ‘머리카락을 기르면 목을 자른다(留髮不留頭)’는 등의 사건을 일으켰다. 당시 만주의 중원을 정복한 만주족은, 피지배층 한족들로부터 오랑캐라고 극심한 저항을 받았는데, 이들을 기선 제압하려는 목적으로 많은 학살을 자행하였다. 양저우 한 곳에서만 약 80만 명을 학살한 것으로 추정된다.[1][2] 이 때 학살당한 인원수는 보수적으로 계산해도 약 5,000만 명에서 최대 1억 명의 중국인이 만주족에게 학살되었다는 주장도 있다.[3] 이 주장이 완전히 맞는다고 할 수는 없어도, 학살로 인한 인구 감소가 있었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하지만 정복 초기에만 학살이 있었을 뿐, 이후에 체제가 안정되고, 경제가 발전 하면서 인구는 큰 폭으로 증가하게 된다.

     

    청나라의 성장과 강건성세

     

    만주족이 세운 청은 원나라와는 달리, 한족을 중용하였으며 그들의 선진 문화를 수용하기에 힘썼다. 순치제에 이어 강희제(康熙帝)가 즉위한 초기까지 오삼계(吳三桂)등 3명의 번왕 세력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청나라에 걸림돌이 되는 세력들이 있었으나 1683년 모두 진압되고, 대만도 청나라 영토로 편입되었다.

    청나라의 제4대 황제인 강희제(1661~1722)는 순치제가 사망하자 8세로 즉위한다. 15세 때부터 친정을 시작하여 오배의 난, 삼번의 난을 진압하고 대만을 복속함으로써 진정한 중국 통일을 이루게 된다.

    또한 러시아가 강점한 네르친스크를 회복하기 위한 전쟁에서 승리하여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하고, 스타노보이 산맥과 흑룡강을 따라 러시아와 국경을 확정한다. 또한 아직까지 완전히 충성을 맹세하지 않던 외몽골을 정복하여 영토를 넓혔고 자신에게 반항하던 준가르의 군세를 크게 꺾어놓았다.

    문화적으로는 한자 5만여 자를 부수별, 획수별로 분류한 《강희자전》을 편찬케 하였고,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으며, 예수회 선교사(대표적으로 아담 샬을 들 수 있다.)들을 총애하였다.

    강희제 치세에 이르러 광동 성을 중심으로 서양과의 무역이 크게 발달한다. 그러나 강희제는 적장자 윤잉을 황태자로 세운 뒤 폐해가 일어나 윤잉을 두 번 황태자에 책봉하고 두 번 폐위하였으며 뒤이어 자식들이 황태자 자리를 놓고 권력 투쟁을 벌여 말년에는 그리 평온하지 못하였다. 그는 6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며, 아들 35명과 딸 20명이 있었다.

    강희제가 사망하자 넷째 아들 옹정제 (1722~1735)가 45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옹정제는 형제의 난에서 승리하여 부황의 후계자가 되었으며, 청나라의 통치체제를 완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옹정제는 세금을 단일화하여 국민들의 부담을 덜어주었으며 문화적으로는 강희제 때 시작한 백과사전 고금도서 집성을 완성한다. 그러나 만주족을 비방하는 것을 억누르는 문자의 옥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옹정제는 하루 4시간밖에 자지 않고 정무에 너무 몰두하다가 과로 때문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하지만 옹정제의 최후에는 아직도 의혹이 많이 남아있다.

    옹정제의 뒤를 이은 건륭제 (1735 ~ 1795)는 몽골 제국을 제외한 중국의 역대 왕조 중에서 가장 큰 영토를 완성하였다. 이 당시의 영토는 몽골, 신강, 티베트를 모두 포함한 것이었다. 또한 미얀마, 태국, 베트남 등의 종주권를 확보 했다. 이 시기의 중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인구가 3억 명을 넘어섰으며, 이는 명나라의 인구가 6천만 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적으로는 사고전서를 편찬, 경전과 역사서, 철학서, 문집을 모두 모아 10만권을 만들었다. 청조는 이 편찬 사업을 한족 지식인을 감시하는 방법으로 사용하였고, 청조통치에 문제가 있는 내용들은 폐기하였다. 또한 이러한 편찬사업은 금석학의 발전을 가져왔다.

    그러나 많은 해외정벌과 계속되는 황실의 사치로 인한 천문학적인 경비가 국가재정에 부담을 주게 되어 국운이 기울어지기 시작하게 되었고, 정치적으로도 건륭제의 총신(寵臣)이었던 화신(和神)의 전횡과 관리들의 부패로 인해 건륭제 말기에는 청나라 각지에서 백련교의 난(白蓮敎─亂)을 비롯한 여러 반란이 일어났다.

     

    청나라의 쇠퇴와 멸망

     

    강희제 이후 옹정제(雍正帝)·건륭제(乾隆帝)까지 3대에 걸쳐 주변 각국을 침공·정복하여 더러는 직접 지배하고 더러는 조공국(朝貢國)으로 삼아 일대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리하여 이 전성기를 강건성세(康乾盛世)로 불렸다. 그러나 건륭제 말기부터 백련(白蓮, 1796년-1804년),·천리(天理, 1813년)의 난을 계기로 청나라는 점차 쇠퇴로 기울었다.

    한편, 영국은 1792년 매카트니를 시작으로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중국에 사절단을 보내 문호 개방을 권유하였으나, 오직 광저우만 개항되었을 뿐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세기 무렵에 영국계 동인도 회사가 삼각 무역(아편 무역)으로 경제적 이익을 보려고 했으나, 청조는 이를 반대하여 아편 무역을 금하였다. 그러자 영국은 아편 전쟁(1840년-1842년)을 시작하여 승리하였다. 1842년 난징조약으로 홍콩은 99년간 영국에 넘어갔고 상하이 등 5개 항구가 강제 개항되었다. 이후 중국에서의 이권 확보를 위해 서구 열강이 쇄도해옴으로써 중국은 역사상 유례없이 휘청거렸다.

    1851년 홍수전(洪秀全)이 기독교 성격의 사회운동인 태평천국 운동을 일으켰다. 태평천국은 외형상 홍수전이 야훼의 자식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아우라 자칭하면서 기독교를 표방했으나, 내면에서는 만주족 지배로부터의 한족의 독립, 토지의 균등한 분배, 만민 평등을 주장한 사회혁명이었다. 또한 당시 청나라는 영국·프랑스와의 제2차 아편 전쟁(1856년-1860년)이 일어나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제2차 아편 전쟁이후, 청나라는 휴전에 중재역할을 한 러시아 제국에 1860년 베이징 조약을 통해 연해주지방을 할양해야만 하는 서구열강세력들로부터 이권 침탈이 더욱 심화되어갔다.

    태평천국의 위세는 그러나 흥수전에 대한 우상화를 경계한 서구 열강과 이홍장과 같은 한족계 신사층을 앞세운 청나라 조정의 협공으로 태평천국은 1864년 수도 천경(天京: 태평천국이 난징을 고쳐 부른 이름)이 함락되고 홍수전도 자살함으로써 그 막을 내렸다.

    1860년대 이후에 전개된 양무운동(洋務)은 증국번(曾國藩)·이홍장(李鴻章) 등의 주도하에 일어났으며, 군함과 서양식 대포 등 신식 무기를 제조하고 관련 공업을 진흥시켜 중국 산업화의 기원이 되었다. 이홍장은 영국을 방문하여 빅토리아 훈장도 받았다. 사실 양무운동은 정부의 감독을 받았기 때문에 한계 요인을 안고 있었다. 1894년-1895년의 청일전쟁이 청나라의 패배로 끝나자 양무운동은 수포로 돌아가고 중국을 둘러싼 열강의 각축은 더욱 치열한 양상을 띠었다.

    1898년 캉유웨이(康有爲)·량치차오(梁啓超) 등은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모델로 하여 무술개혁(戊戌)으로 입헌군주제를 확립하고자 했으나 서태후(西太后)·이홍장 등 기존세력의 반격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이후 1899년에 일어난 의화단(義和團)과 열강 8국의 연합군이 1900년 베이징에서 격돌한 북청사변과 그 수습을 위한 베이징 의정서(1901년)를 체결하며 청조는 쇠퇴해갔다. 또한 1904년-1905년의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제국은 러시아 제국을 물리치고 남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하였다.

    서태후는 유학생을 일본 등에 보내 선진국의 헌법과 의회 제도에 대해 알아보게 했으며, 국내적으로도 낡은 과거 제도 대신 각지에 대학을 세워 신학문의 연구 기반을 조성하는 한편 최신식 군대도 만들었다. 그러나 이미 각지에서 만주족을 비난하고 한족의 공화국을 지향하는 혁명세력이 움트고 있었다. 이들 모두는 일본의 일부 지식인이 주장한 중일연대론(中日聯帶論)과도 상호 연계되기도 했다.

    결국 청은 신해혁명(1911년)으로 인해 1912년 멸망하였고, 위안스카이가 중화민국의 대총통으로 취임하면서 그 영토를 계승하였다. 그 이후, 1949년에 중국 본토가 중화인민공화국이 되고, 타이완 섬은 분리되어 중화민국이 된다.

     

    청나라의 경제

     

    청나라 시대에는 외국 무역이 더욱 활발해져, 은의 유입도 크게 증가하였다. 청은 18세기 초에 인두세(정은)를 따로 거두지 않고, 토지세(지은) 속에 포함시켜, 세금 제도를 단순화한 지정은제를 시행하였다.

    18세기 중엽에 선교사를 앞세운 서구열강이 교역을 원하자, 청나라는 교역항을 광저우로 한정하여 서양 상인들을 통제하고, '공행'이라는 특허 상인의 조합에 대외 무역의 독점권을 주었다. 공행무역 등으로 서양 상인들의 무역량이 적었을 거라 생각하겠지만, 오히려 그 반대로 청나라의 차와 생사는 유럽에서 많은 이익을 올릴 수 있었기 때문에 서구 열강과 청의 무역량은 날이 갈수록 증가하였다. 한편, 이시기에 유럽의 상인들 중에서는 영국 동인도 회사가 청나라와의 무역을 독점해 가고 있었을 무렵이었다. 무역량이 늘어남에 따라 영국은 청나라와 무역에서 '무역 역조 현상'이 두드러졌다. 막대한 양의 은을 청에 지불하게 된 영국은 이를 개선하기 위해 청나라에게 무역 제한조치의 철폐를 요구하였다.

    19세기가 되자, 영국은 무역적자를 메우기 위해 동인도 회사를 앞세워 인도에서 생산되는 아편을 중국에 수출하였다. 매년 급격히 영국 동인도 회사의 아편 수출양이 증가하자, 청나라는 국내의 아편중독자가 늘어나는가 하면, 막대한 양의 은이 빠져나가게 된다. 이무렵 청나라는 '은본위제'를 실시했었는데, 청나라는 영국과의 '아편 무역'으로 인해 은의 급격한 감소로 국가체제의 위기를 맞게 된다. 1830년대에는 은의 가격이 두 배 이상 폭등하고, 그결과 은으로 세금 납부하던 농민들과 상인들은 부담이 두 배로 늘어났고, 결국 세금이 제대로 징수되지 않아, 국가 재정이 곤란한 지경에 빠져 버린다.

    1840년 제1차 아편전쟁 이후, 외세 열강세력들의 침탈이 본격화 심화되면서 청나라의 경제상황은 더욱 더 악화되어만 가게 된다.

    청나라 때에는 양자강 중류 지역이 최대의 쌀 재배 지역이 되고, 감자, 양파, 땅콩, 옥수수 등의 외래작물이 재배되었다. 이러한 농업에서의 상품 작물 재배와 함께 면, 제지, 제당 등의 분야에서 매뉴팩처가 발달하였다.

     

    청나라의 문화

     

    비(非)한족 지배자인 청조는 방대한 한족 지배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때문에 중국의 전통문화와 여러 제도를 답습하고 한족의 협력을 얻어 지배체제를 확립코자 하였다. 특히 한족의 지식인층을 회유하여 관심을 정치와 사회문제로부터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서 그들을 동원하여 대편찬사업을 추진하였다. 강희 연간의 『강희자전(康熙字典)』, 옹정의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건륭의 『사고전서』는 그렇게 하여 생긴 것이다.

    반면에 반청적(反淸的)이라 판단한 사상에는 용서 없는 탄압을 가하여 이른바 문자의 옥을 일으켰다. 실증주의(實證主義)에 투철한 실사구시(實事求是) 학풍인 고증학(考證學)은 이미 명대에 시작을 보았지만 청조의 사상 탄압은 한인 학자로 하여금 더욱더 고증학으로 나아가게 하여 정치 문제로부터 도피시켰다. 그러나 고증학은 그 자신 일종의 과학적 객관주의이며, 서양 과학문명의 영향도 더해져 학문의 전 분야에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었다. 가령 실제의 측량으로 제작된 황여전람도(皇與全覽圖) 등은 이러한 학풍의 소산인 것이다.

    또한 청대에는 소설과 희곡의 발달이 한층 더 현저하여 『홍루몽(紅樓夢)』 『유림외사(儒林外史)』 『요재지이(聊齊志異)』 등 걸작이 나왔고, 희곡도 풍성하게 연출되었다. 회화에서는 중국의 전통적 기법 외에 카스틸리오네에 의하여 서양의 화법(畵法)이 받아들여졌고, 건축은 원명원(圓明園)과 같이 베르사유 궁전에도 비길 만한 훌륭한 건축물들이 건설되었다.

     

    종교

    기독교

     

    경교와 천주교중국에서는 일찍이 당나라 시대에 네스토리우스파(京敎)선교사들이 입국하여 대진사라는 교회를 세우고 선교활동을 하였다. 천주교는 명나라 때부터 마테오리치 신부(1552년-1610년)등의 예수회 선교사들의 전교활동으로 소개되었다. 천주교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전교하면서 겪었던 어려움중 하나는 조상제사문제였다. 조상제사문제는 1704년 조상제사에 반대하는 도미니쿠스 수도회와 조상제사를 중국인의 전통으로 존중하는 예수회간의 신학논쟁으로 이어지는데, 결국 교황청에서 조상제사를 천주교 교리에 어긋나는 것으로 규정하여 금지함에 따라 중국의 천주교 신자들과 선교사들은 탄압을 받게 되었다.[4] 천주교 선교사들은 유럽에 중국 문화가 소개하여 유럽 지식인들의 중국연구열을 높이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중국인들과 똑같은 옷을 입는 등 중국의 전통문화를 존중하였다.

     

    개신교

     

    개신교도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18세기 독일에서 태동한 모라비안 교인들은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였으며, 1860년에는 영국의 제임스 허드슨 테일러와 그의 아내 마리아 테일러가 선교활동을 하였다. 이들은 중국 사람들과 똑같은 옷을 입음으로써 중국인들에게 다가섰는데, 당시 개신교 선교사들에게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허드슨 테일러는 1865년 중국내륙선교회(영어: China Inland Mission, CIM)를 결성하여 1898년 중국 후난성을 마지막으로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의 뒤를 이은 중국 내지선교회 선교사들은 1949년 중국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정부를 수립하여 1951년에 철수할 때까지 활동하였으며, 1964년 OMF(영어: Overseas Missionary Fellowship)으로 선교회의 이름을 바꾸었다. [5]

    청나라의 중앙 관제이 부분은 역사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서로 지식을 모아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청나라의 행정구분이 부분은 역사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서로 지식을 모아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통치 행정 구역의 구분: 성-부-주-현-청 (省 府 州 縣 廳)

     

    역대 황제

    건주 여진(建州 女眞) 추장

    건주여진 추장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재위기간

    -

    청 시조(淸始祖)

    (청 태조 추숭)

    -

    애신각라포고리옹순(愛新覺羅布庫里雍順)

    -

    -

    청 조조(淸肇祖)

    (청 태조 추숭)

    원황제(原皇帝)

    애신각라맹특목(愛新覺羅孟特穆)

    1405 ~1433

    -

    -

    순황제(順皇帝)

    (청 태조 추숭)

    애신각라충선(愛新覺羅充善)

    1433~ 1467

    -

    -

    흥황제(興皇帝)

    (청 태조 추숭)

    애신각라탈라(愛新覺羅脫羅)

    1467~ 1481

    -

    -

    정황제(正皇帝)

    (청 태조 추숭)

    애신각라석보제편고(愛新覺羅錫寶齊篇古)

    1481~ 1522

    -

    청 흥조(淸興祖)

    (청 태조 추숭)

    직황제(直皇帝)

    애신각라복만(愛新覺羅福滿)

    1522~ 1542

    -

    청 경조(淸景祖)

    (청 태조 추숭)

    익황제(翼皇帝)

    애신각라각창안(愛新覺羅覺昌安)

    1542~ 1571

    -

    청 현조(淸顯祖)

    (청 태조 추숭)

    선황제(宣皇帝)

    애신각라탑극세(愛新覺羅塔克世)

    1571~ 1583

    제1대

    청 태조(淸太祖)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

    (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

    애신각라노이합적(愛新覺羅努爾哈赤)(누르하치)

    1583 ~1616

     

    후금(後金, 1616년 ~ 1636년)

    후금 대칸과 연호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제1대

    청 태조(淸太祖)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

    (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

    애신각라노이합적

    (愛新覺羅努爾哈赤)

    (누르하치)

    천명(天命)

    1616~1626

    제2대

    청 태종(淸太宗)

    응천흥국홍덕창무관온인성예효경민소정융도현공문황제

    (應天興國弘德彰武寬溫仁聖睿孝敬敏昭定隆道顯功文皇帝)

    애신각라황태극

    (愛新覺羅皇太極)

    (홍타이지)

    천총(天聰)

    1626~1636

     

    청(淸, 1636년 ~ 1912년)

    청나라 황제와 연호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제2대

    청 태종(淸太宗)

    응천흥국홍덕창무관온인성예효경민소정융도현공문황제

    (應天興國弘德彰武寬溫仁聖睿孝敬敏昭定隆道顯功文皇帝)

    애신각라황태극(愛新覺羅皇太極)(홍타이지)

    숭덕(崇德)

    1636~1643

    -

    청 성종(淸成宗)

    (청 세조 추숭)

    무덕수원광업정공안민입정성경의황제

    (懋德修遠廣業定功安民立政誠敬義皇帝)

    (예충친왕<睿忠親王>)

    애신각라다이곤(愛新覺羅多爾袞)(도르곤)

    -

    -

    제3대

    청 세조(淸世祖)

    체천융운정통건극영예흠문현무대덕홍공지인순효장황제

    (體天隆運定統建極英睿欽文顯武大德弘功至仁純孝章皇帝)

    애신각라복림(愛新覺羅福臨)

    순치(順治)

    1643~1661

    제4대

    청 성조(淸聖祖)

    합천홍운문무예철공검관유효경성신중화공덕대성인황제

    (合天弘運文武睿哲恭儉寬裕孝敬誠信中和功德大成仁皇帝)

    애신각라현엽(愛新覺羅玄燁)

    강희(康熙)

    1661~1722

    제5대

    청 세종(淸世宗)

    경천창운건중표정문무영명관인신의예성대효지성헌황제

    (敬天昌運建中表正文武英明寬仁信毅睿聖大孝至誠憲皇帝)

    애신각라윤진(愛新覺羅胤禛)

    옹정(雍正)

    1722~1735

    제6대

    청 고종(淸高宗)

    법천융운지성선각체원입극수문분무흠명효자신성순황제

    (法天隆運至誠先覺體元立極敷文奮武欽明孝慈神聖純皇帝)

    애신각라홍력(愛新覺羅弘曆)

    건륭(乾隆)

    1735~1795

    제7대

    청 인종(淸仁宗)

    수천흥운부화수유숭문경무광유효공근검단민영철예황제

    (受天興運敷化綏猷崇文經武光裕孝恭勤儉端敏英哲睿皇帝)

    애신각라옹염(愛新覺羅顒琰)

    가경(嘉慶)

    1795~ 820

    제8대

    청 선종(淸宣宗)

    효천부운입중체정지문성무지용인자검근효민관정성황제

    (效天符運立中體正至文聖武智勇仁慈儉勤孝敏寬定成皇帝)

    애신각라민녕(愛新覺羅旻寧)

    도광(道光)

    1820~1850

    제9대

    청 문종(淸文宗)

    협천익운집중수모무덕진무성효연공단인관민장검현황제

    (協天翊運執中垂謨懋德振武聖孝淵恭端仁寬敏莊儉顯皇帝)

    애신각라혁저(愛新覺羅奕詝)

    함풍(咸豊)

    1850~1861

    제10대

    청 목종(淸穆宗)

    계천개운수중거정보대정공성지성효신민공관명숙의황제

    (繼天開運受中居正保大定功聖智誠孝信敏恭寬明肅毅皇帝)

    애신각라재순(愛新覺羅載淳)

    동치(同治)

    1861~1875

    제11대

    청 덕종(淸德宗)

    동천숭운대중지정경문위무인효예지단검관근경황제

    (同天崇運大中至正經文緯武仁孝睿智端儉寬勤景皇帝)

    애신각라재첨(愛新覺羅載湉)

    광서(光緖)

    1875~1908

    비정통

    -

    대아가(大阿哥)

    (대황자<大皇子>)

    애신각라부준(愛新覺羅溥儁)

    보경(保慶)

    1899년

    제12대

    청 공종(淸恭宗)

    배천동운법고소통수문경부관예정목체인입효민황제

    (配天同運法古紹統粹文敬孚寬睿正穆體仁立孝愍皇帝)

    (말대황제<末代皇帝>, 손황제<遜皇帝>)

    애신각라부의(愛新覺羅溥儀)(푸이)

    선통(宣統)

    1908~1912

     

    참조

    ↑ 杜文凯 (1985年 6月版). 《清代西人见闻录》. 中国人民大学出版社(중국인민대학출판사), 53页(페이지)쪽

    ↑ 司徒琳 著 (1992年 12月版). 李荣庆等译《南明史》. 上海古籍出版社(상하이고적출판사), 131页(페이지)쪽

    ↑ 明熹宗实录 卷4 “明代中国人口,最后的全国官方统计,为5,165.5459人,时间为明光宗泰昌元年。”

    ↑ 《5시간만에 읽는 교회사》/유현덕 지음/작은 행복 p.181

    ↑ 한국 OMF홈페이지에 올라온 OMF역사 설명문

    같이 보기

     

    만주족

    청대의 문화

    중국의 역사

    중국의 역사 

    신화와 고대

    선사 시대

    신화·삼황오제

    황하・장강 문명

    기원전 2000?~기원전 1600?

    기원전 1600?~기원전 1046

    기원전 1122~기원전 256

    서주

    기원전 1122~기원전 771

    동주

    기원전 771~기원전 256

    춘추 시대

    기원전 771~403

    전국 시대

    기원전 403~221

    제국의 시대

    기원전 221~기원전 206

    기원전 206~서기 220

    전한

    기원전 206~서기 8

    8~23

    후한

    25~220

    삼국 시대

    220~280

    220~265

    221~263

    229~280

    265~420

    서진

    265~317

     동진

    317~420

    오호 십육국 시대

    304~439

    남북조 시대

    420~589

    581~618

    618~907

    무주

    690~705

    오대십국시대

    907~960

    916~1125

    960~1279

     

    북송

     960~1127

    서하

    1038~1227

    남송

     1127~1279

    1115~1234

    1271~1368

    1368~1644

    1644~1912

    현대의 중국

    중화민국 (본토)

    1911~1949

    중화인민공화국

    1949~현재

    중화민국(타이완)

    1945~현재

     

    청 [淸]

     

    명(明)나라 이후 만주족 누르하치[努爾哈赤]가 세운 정복왕조(征服王朝)로서, 중국 최후의 통일왕조(1636∼1912).

    만주인은 수렵·어로를 주된 생업으로 하는 퉁구스족의 일파로서 본래 여진(女眞) 또는 여직(女直)이라 불리었다. 그 일부는 12세기에 화베이[華北]로 진출하여 금(金)왕조를 세웠으나, 만주에 잔류한 대부분은 점차 정착농업을 영위하였으며, 명조 말기에는 해서(海西)·건주(建州)·야인(野人)의 3부로 나누어져 명나라의 간접통치를 받고 있었다. 명나라는 여진족의 여러 부족에 대하여 시종 분열정책을 취하였으나, 조선의 임진왜란(1592∼98)을 전후하여 만주에 대한 명나라의 통제력이 이완된 틈을 타서 건주좌위(建州佐衛)의 수장(首長) 누르하치가 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1616년 스스로 한(汗)의 위(位)에 올라 국호를 후금(後金)이라 하고, 흥경(興京)에 도읍하였다. 이 사람이 청의 태조이다.

     

    명나라는 이를 제압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사르후의 싸움에 대패하여(1619) 랴오허 강[遼河] 동쪽을 잃었다. 이어 일어난 황타이지[皇太極: 太宗]는 먼저 명과 조선의 연합을 막기 위해 두 번에 걸쳐 조선에 침입하였다(1627·1636). 또 내몽골로 진출하여 차하르부(部)를 정복하여 대원전국(大元傳國)의 새(璽)를 얻음으로써 1636년 새삼스레 황제의 위에 올라 국호도 대청(大淸)으로 고쳤다. 이 시기에 명왕조의 사회적 모순은 궁정의 당쟁과 농민반란으로 집중되어 나타났는데, 1644년 이자성(李自成)을 지도자로 하는 농민군은 드디어 베이징[北京]에 진입, 명나라를 멸망시켰다. 이때 농민군을 두려워한 지배계급은 청군과 강화(講和), 산하이관[山海關]을 지키고 있던 오삼계(吳三桂)는 자진하여 청군을 관내로 안내하여 베이징을 회복시켰다.

     

    태종의 아들 순치제(順治帝)는 재빨리 이자성 토벌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그를 후베이[湖北]로 몰아내 궁사(窮死)시킴과 동시에 중국 본토 지배의 대의명분을 획득하였다. 이민족 지배에 대한 저항은 그 후 복왕(福王)·노왕(魯王)·당왕(唐王)·계왕(桂王) 등 구왕족 소위 남명(南明)의 움직임으로 나타났는데, 농민군을 적대시하여 제휴하지 않았으므로 그 명운이 짧아 대세를 회복시키지는 못하였다. 오히려 청조의 중국 통일에 있어서의 적은, 중국 정복에 협력한 평서왕(平西王) 오삼계, 평남왕(平南王) 상가희(尙可喜), 정남왕(靖南王) 경중명(耿仲明)의 삼번(三藩)이었으며, 수년에 걸친 삼번의 난의 진압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명나라 최후의 유신(遺臣) 정성공(鄭成功)의 자손이 귀순함으로써 청나라는 제4대 황제 강희제(康熙帝)에 이르러 비로소 전 중국을 통일하였다.

     

    더구나 강희제는 1689년 러시아제국과 네르친스크조약을 맺음으로써 19세기 중엽까지, 러시아제국이 동진(東進), 남하하는 것을 억제하였다. 또 간간이 분쟁이 일던 조선과의 경계도 정하여 백두산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웠다(1712). 또 계속되는 옹정(雍正) ·건륭(乾隆)의 3대에 걸쳐 중앙아시아의 중가르부(準部)를 토벌하고 이에 따라 칭하이[靑海]의 속령화(屬領化)와 티베트 보호와 평화를 촉진시키면서 1759년에는 중가르부·위구르(回紇: 후의 新疆省)의 지배를 확립하였다. 이리하여 이 3대에 걸쳐 청왕조는 오늘날의 중국 영토의 조형(祖型)이 되는 중국 사상 최대의 판도를 확립함과 아울러, 동아시아 거의 전역을 그 위령(威領)하에 두었고, 내정의 충실에도 힘입어 그 극성기(極盛期)를 가져왔다.

     

    그러나 건륭 말년, 이미 변경에서 조짐을 보이고 있던 이슬람교도·먀오족[苗族] 등의 여러 반란은, 얼마 안 되어 가경(嘉慶) 연간에 이르자 백련교(白蓮敎)의 후베이[湖北] 등 5개 성에서 대반란으로 폭발하였다. 백련교의 난은 10년(1796~1804)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이를 통하여 국가 권력의 지주인 8기(八旗: 軍隊)의 무력함이 폭로되었으며, 거기다 권신(權臣) 화신(和珅)의 미증유의 수회사건이 상징하듯, 관료정치의 부패로 인하여 청왕조의 지배는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유럽 자본주의의 세계 지배의 파두(波頭)가 중국에 들이닥침으로써 결정적인 청왕조의 쇠퇴를 가져왔다.

     

    이미 건륭 연간의 매카트니, 가경 연간에 애머스트 등 두 차례의 특사(特使)를 통해 산업자본의 판로 개척을 기도하다가 거절당한 영국은, 1840년 아편문제로 발단된 분쟁을 계기로 무력에 의해 중국을 개국시켰으며(아편전쟁), 프랑스 ·러시아 ·미국도 그 뒤를 따랐다. 이후 열강의 청조 지배는 중국에 대한 반식민지적 지배의 매체로서의 성격을 짙게 하였고, 따라서 열강의 자본주의(제국주의)에 대한 직접·간접의 저항이 중국사 전개의 원동력이 되기에 이르렀다. 아편전쟁을 발화제로 발발한 중국 사상 최대의 농민전쟁인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에서, 홍수전(洪秀全) 등이 봉건적 제관계의 폐기를 지향하여 싸우면서, 궁극적으로는 청왕조를 예속시킨 외국 세력과 대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이미 그러한 상황을 뜻하는 것이다.

     

    ‘태평천국의 난’은 청왕조의 정규군이 아닌, 사실상 증국번(曾國藩)·이홍장(李鴻章) 등 지방의 한인(漢人) 관료가 조직한 개인집단, 즉 향용(鄕勇: 湘軍·淮軍)의 힘에 의존하여 진압되었는데, 이 때문에 지방분권적 경향이 강화되고 후의 군벌(軍閥)할거의 소지를 만듦과 동시에 관계(官界)에서의 한인의 지위를 높이는 결과를 낳아, 그들이 주체가 되어 위로부터의 중국 근대화의 최초의 시도인 ‘양무운동(洋務運動)’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통적 체제를 옹호하고 보수(保守)하기 위한 군사공업의 이식을 주안으로 하였을 뿐만 아니라 양무파 관료가 기업을 사물화(私物化)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 오히려 민족자본주의의 발전을 저해하였다. 청·일전쟁에서의 패배는 이 같은 양무파 노선의 파산을 결정적으로 만들었다.

     

    한편, 제국주의시대로 이행(移行)해 가는 심각한 위기감은, 단순히 유럽 선진국의 기술 이식뿐 아니라, 전통체제 그 자체를 변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캉유웨이[康有爲] 등의 변법자강운동(變法自强運動)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광서제(光緖帝)까지 동조한 변법자강운동도 서태후(西太后) 등 수구파의 반대로 겨우 100일 유신(維新)으로 막을 내렸고, 의화단(義和團)운동을 계기로 한 외국 군대의 베이징 진주로 수구파가 최종적으로 몰락하였을 때는 입헌안(立憲案)을 비롯한 여러 개혁안이 처음으로 채용되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서 중국 민중의 동향은 혁명의 기운으로 향해 달려가고 있었으며 멸만흥한(滅滿興漢)의 민족주의는 화교·유학생·민족자본가의 반(反)봉건주의와 합류, 쑨원[孫文]이 주도하는 중국혁명동맹회(中國革命同盟會)에 결집되어 신해혁명(辛亥革命: 1911)을 성공으로 이끌었으므로 1912년 선통제(宣統帝) 푸이[溥儀]의 퇴위와 함께 청왕조는 종말을 고하였다. 그것은 또한 중국 민중의 전제군주제와의 결별이기도 하였다. 중국의 근대사는 청왕조 말기부터 시작된다.

     

    행정

     

    뒤떨어진 소수민족이었던 만주인이 광대한 중국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민족을 개병(皆兵)으로 만들어 압도적인 군사력을 바탕으로 하는 한편, 재래 중국사회의 계급지배 위에 타고 앉아 그것과 기본적으로 유착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8기의 병제와 중요한 관직에 있어서의 만한병용(滿漢倂用) 정책을 제외하고는 청나라는 명왕조의 관제를 거의 그대로 답습하였다.

     

    우선 중앙에 최고 정무기관인 내각 대학사(內閣大學士), 그 집행기관인 6부·5시(寺) 및 감찰기관인 도찰원(都察院)을 두어 각각 황제 직속으로 하였으나, 얼마 안 되어 중가르부 토벌 때에 용병의 신속과 군사기밀 보장을 위해 내각의 실권자를 선발, 군기처(軍機處)가 신설되자 실권은 그 곳으로 넘겨졌으며, 건륭 초기에는 독립된 기관으로서 군사·국무의 최고 권한을 겸유하기에 이르렀다. 또 이번원(理藩院)이 신설되어, 몽골·신장[新疆]·시짱[西藏] 등 소위 번부(藩部)의 일을 관장하였다.

    서양 제국과의 교섭도 당초에는 그 밑에서 조공국(朝貢國)과 같은 대우로 전락했으나, 말엽에 이르자 업무의 확대와 제국의 압력에 따라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이 설치되었고, 곧 이어 1901년에는 외무부로 승격하였다. 말기 몇 년 동안에는 이 밖의 관제개혁도 시행되었으나, 만인(滿人) 중심의 집권주의는 한인(漢人) 관료의 이반을 초래하여, 오히려 붕괴를 재촉하기만 하였다.

     

    지방 관제에서는, 최고 행정구획인 성(省) 밑에 부(府)가 있고, 부는 다시 주(州)·현(縣)·청(廳)으로 나누어졌으며, 별도로 성 직속의 주·청이 있었다. 성에는 포정사(布政使)·안찰사(按察使)가 있어 민정(民政)·감찰을 분담하였으며, 전대(前代)에 임시 관직으로 나타났던 총독·순무(巡撫)를 최고의 지방관으로서 두었는데, 총독을 1, 2개 성에 1명, 순무를 거의 1개 성에 1명씩 둔 것은 청왕조의 특색이었다. 성에는 또한 제독(提督)·총원(總員)·학정사(學政使)·도원(道員) 등이 있어서 각각 군사·교육·성 내의 업무를 분담 처리하였다. 부·주·현에는 지부(知府)·지주(知州)·지현(知縣)이 있었으며, 이들 밑에 백성은 주로 보갑제(保甲制)로 조직되어 있었다.

     

    백성으로부터 수탈을 일삼던 정부는 커다란 역사적 변화로서 재래의 인두세(人頭稅)와 같은 계보의 정은(丁銀)을 폐지하고, 토지의 단일체계, 즉 지·정은제(地丁銀制)가 옹정(雍正) 초년을 계기로 거의 전국적으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왕조가 전통적인 일군만민(一君萬民) 체제를 사실상 폐기하고, 기초과정에 있어서의 지주제(地主制)의 진전을 용인한, 그 위에 기초를 둔 것을 의미한다. 지·정은이 국가 세입 전체에 차지하는 비중은 건륭 연간에는 거의 70 %에 달하였으나, 이에 버금가는 주요 세목인 염과(鹽課:제염업자와 그 상인에 대한 과세) ·관세(關稅: 통과세)의 2가지가 점차로 증가하였는데, 특히 청 말에는 관세가 현저히 늘어났다. ‘태평천국의 난’ 진압의 군비로 신설되어, 양무운동(洋務運動)의 재원으로도 쓰던 이금(釐金)도 이 일종이다.

    이와 같은 국가재정의 수탈을 가능케 하는 경제외강제(經濟外强制)의 기초를 이루고 이민족 지배를 지탱케 한 것은 청왕조 특유의 병제인 8기(八旗)였다. 즉 만주인을 모

     

    두 병사로서 홍(紅)·백(白)·황(黃)·남(藍) 및 그것에 테두리가 달린 8가지 기색(旗色)으로 나눈 세습적인 단체로 편성하였다. 뒤에는 만주인뿐만 아니라 몽골·한군(漢軍)의 8기까지 더하여 합계 24기(旗)로, 기적(旗籍) 20만에 이르렀으나, 그래도 광대한 영토를 경략(經略)·수비하기에 부족하였으므로, 한인만으로 편성된 녹영(綠營: 綠旗)을 설치하고 총독과 순무에 의해 통솔되었다. 팔기의 구성원, 즉 기인(旗人)에게는 기지(旗地)가 지급되어 경제적 자급이 배려되었다.

    그러나 경작자로는 한인이 진출, 빈궁해진 기인(旗人)은 기지를 전당잡히거나 팔아넘기는 일이 많아짐으로써 8기제도는 붕괴되기 시작하였고, 그 무력함은 백련교의 난에서 백일하에 드러났다. 이 때 민간의용군인 향용(鄕勇)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태평천국의 난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그 후 청왕조도 뒤늦게나마 연군(練軍: 8기와 녹영에서 선발)과 서양식으로 편성한 신군(新軍)을 양성하였으나, 연군과 신군 사이에서 혁명파의 반란이 일어나 신해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사회경제

     

    청대의 사회는 소수의 기인(旗人) 및 지배계급인 관료층(鄕紳 포함)과 피지배계급인 양민(良民: 農工商 기타)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경제적으로 볼 때 관료층은 거의 모두 지주였으며, 양민 가운데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은 자작농(自作農)과 전호(佃戶: 小作農)로 나뉘어 있었다. 이 가운데 지주와 전호가 기본적 계층이었으며, 양자 사이의 봉건적 관계가 사회구성의 기축(基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제국가 체제하에서는 지주층도 또한 지배당하는 존재이며, 관료체계 속에 파고들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특권의 유무가 생겼고, 명왕조 말엽 이래의 상품화폐경제의 전개와 때맞추어 재지(在地) 중소 지주층의 몰락과 관료지주·상인지주의 부재지주로서의 발전이 두드러졌다. 이 같은 지주의 존재 형태의 변화는 전호에 대한 통제력을 약화시킴과 함께, 원래 그것이 전호측에서 지주에게 의존하지 않고 그들이 서로 협력 ·제휴함으로써 재생산 가능한 체제를 만들어냈다는 변화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기 때문에, 전호층의 계급투쟁, 즉 항조(抗租)의 발생을 용이하게 하였다.

     

    이미 강남(江南) 일대의 농촌에는 명나라 말 이래로 목면·비단[絹]을 중심으로 하는 섬유공업과 기타 수공업이 발달하여, 중국의 기본 경제지대가 되고 있었는데 이에 따르는 쌀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하여 청왕조 초에는 후난[湖南]·쓰촨[四川] 지방이 새로운 곡창지대로 등장하였다. 또 푸젠[福建]의 사탕수수 재배에 대하여 ‘만주’의 콩깻묵이 비료로서 강남·푸젠으로 이입되는 등, 각지의 특산적 상품생산을 통하여 일종의 지역적 분업이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강남의 면직물은 국내 시장뿐만 아니라 ‘난징[南京]목면’의 이름으로 널리 해외로도 수출되었다.

     

    이 같은 수공업은 대부분 전호층의 영세한 부업경영이었기 때문에 유통과정은 상인 자본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산시[山西]상인과 신안[新安]상인의 2대 동향(同鄕)상인단은 전국 시장을 양분하여, 서로 동업조합으로서의 회관(길드)을 만들어 중간적 이익을 옹호하였다. 화폐경제의 침투와 상품생산의 전개는 전호층의 자립화를 지탱하는 한편, 농촌에 있어 새로운 무산자(無産者)를 탄생시키기도 하였다. 그들은 인구가 희박한 변경으로 이주하거나, 만몽(滿蒙)의 봉금지(封禁地)를 잠식하고, 또는 해외로 이민하여 화교(華僑)가 되거나 혹은 비밀결사에 들어가 반사회적 행동을 하였는데, 그 일부는 백련교의 난을 비롯한 청나라 말의 여러 반란에서 일정한 혁명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청왕조는 처음에 엄하게 해금(海禁)하여 외국무역은 광저우[廣州]항 한 곳에 한하였고, 공행(公行)이라 불리는 특허상인의 조합에 독점을 허가했다. 무역은 차 ·생사 수출을 주로 하는 편무역(片貿易)으로서 19세기 초에는 연간 4,500만 달러의 은이 유입되었다. 이 형세를 역전시킨 영국의 인도산 아편 밀수입은 중국 경제를 혼란에 빠뜨렸는데, 아편 그 자체의 해악은 물론, 아편전쟁의 직접 원인이 되었다. 아편전쟁의 패전에 따라 강제로 개국을 하게 된 중국에는 면제품을 비롯한 영국 산업자본의 제품들이 밀려들어왔으나, 계속 아편수입과 은의 유출은 중국 경제를 피폐시켰을 뿐만 아니라, 농업과 결합하여 놀랄 만한 경제성을 지닌 견고한 가내공업제품이 저항하였기 때문에, 산업자본의 근본 의도는 어긋났다.

     

    그렇지만 흥륭기의 자본주의는 장기적 경쟁을 통하여 점차 중국 가내공업을 압도, 농민경영을 파괴하고 대량의 무산대중을 낳게 하였다. 1880년대에 이르자 면제품의 수입은 결국 아편을 능가하였고 거꾸로 면화가 수출 초과로 바뀌어 쌀의 수입이 급증하는 등 무역구조는 명료하게 원료 식민지적인 형태를 나타내었다. 그 무렵, 양무파(洋務派)는 군사공업뿐만 아니라 상하이[上海]에 기기직포국(機器織布局) 등을 설치, 민수기업에도 진출하였으나 민간기업을 압박할 뿐이었다.

     

    한편 청·일전쟁 후 제국주의 단계로 들어간 구미(歐美) 열강의 대중(對中) 침입은 차관(借款), 철도 이권의 획득, 기업의 직접 진출의 형태로 강화되면서, 중국은 완전히 반(半)식민지화하였다. 의화단의 저항을 계기로 하여 청왕조도 겨우 식산흥업(殖産興業) 정책을 취하여, 제국주의 침략과 혁명세력의 대두에 대비하였으나, 그 지배체제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 사이에 지방 향신층(鄕紳層)이 앞장선 기업의 설립(방적 ·성냥제조 등)과 이권회수 운동은 신해혁명을 지향하여, 부르주아적 성격을 떠받치고 있었다.

     

    문화

     

    청왕조의 학문을 대표하는 것은 고증학(考證學)인데, 이것의 지나친 발달은 이민족 지배를 유지하기 위하여 청왕조가 취한 사상통제의 산물이었다. 처음에 강희제(康熙帝)는 반만(反滿)사상을 억압하고, 민심 수습을 위하여 명왕조에 이어 주자학(朱子學)을 정통적인 관학(官學)으로 삼았으며, 스스로도 여러 학문을 익히고 한문화(漢文化)에 친숙해졌으나, 명왕조 말 이래의 학자 고염무(顧炎武) ·황종희(黃宗羲) 등 야(野)에 있으면서 반만적인 민족의식이나 정치관을 가득 담은 《일지록(日知錄)》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 등을 저술하였다.

     

    청왕조는 얼마 안 있어 그 지배가 확립됨과 동시에 이들에 대하여 엄격한 태도로 임하였으니(‘文字의 獄’, 禁書), 그로 인하여 반만사상은 지하로 숨어들었고, 고염무에게서 시작되는 고전의 실증적 ·비판적 연구는, 고전이 지녔던 격렬한 경세(經世)의 염을 잃고 학술의 주류가 되었다. 대진(戴震) ·단옥재(段玉裁) ·전대흔(錢大昕) 등의 학자가 배출되었고, 《사고전서(四庫全書)》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張之洞] 등이 나타나서 송학(宋學)을 재흥시켰다. 그들을 중심으로 하여 수행된 양무운등의 편찬이 잇따라 이루어졌다.

     

    고증학은 중국 학술사상의 한 정점이었다. 또한 근대과학정신에 대한 싹도 보호 ·육성되었으나, 곧 그 비실천성에 대한 비판은, 도광제(道光帝) 이후 청왕조의 쇠퇴와 중국 전체의 위기 가운데서 공양학(公羊學)의 발흥으로 나타났으며 그것은 공자진(龔自珍) ·위원(魏源) ·캉유웨이[康有爲] ·량치차오[梁啓超]로 이어지면서, 드디어 변법자강의 실제운동을 불러일으키기에 이르렀다.

     

    한편 고문학파(古文學派)에서도 실천성을 강조하는 증국번(曾國藩) ·장즈둥[張之洞] 등이 나타나서 송학(宋學)을 재흥시켰다. 그들을 중심으로 하여 수행된 양무운동 사상은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으로 특징지어지는데, 장즈둥의 《권학편(勸學篇)》은 그 대표적인 저작이다. 이들은 모두 청왕조 체제를 옹호하는 것이었으나 이에 반하여 옌푸[嚴復] 등은 유럽 근대사상을 본격적으로 소개했고, 이에 입각한 새로운 사회기반에 지탱된 쑨원[孫文]은 기성의 틀을 벗어난 독특한 시야에서 독자적인 혁명사상을 고취했는데, 그 사상이 민족 ·민권(民權) ·민생(民生)으로 집약되는 3민주의(三民主義)였다. 그 내용은 다소 유동적인 것이지만 청왕조 말기 제계급의 동향과 위기의식을 가장 심각하고 포괄적으로 반영한 사상이 되었다.

     

    청대의 문학은 원(元) ·명(明)에 이어 희곡 ·소설의 발달이 뚜렷한데, 희곡에서는 《장생전(長生殿)》 《도화선(桃花扇)》이 2대 명작으로 손꼽히고, 소설에서는 《요재지이(聊齋志異)》 《부생육기(浮生六記)》 외에 《유림외사(儒林外史)》 《홍루몽(紅樓夢)》의 2대 장편이 당시의 사대부나 관료귀족의 생태를 폭로하여 쌍벽을 이루었다. 또 청나라 말에는 린수[林紓] 등을 통하여 유럽의 근대소설이 소개되어, 계몽사조의 일환을 짊어짐과 동시에 《관장현형기(官場現形記)》 《노잔유기(老殘遊記)》 《20년목도지괴현상(二十年目睹之怪現狀)》 등 관계의 부패를 폭로한 정치소설이 나타나 소설의 역할에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였다.

     

    미술

     

    청 미술의 특징을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는 것은 회화이다. 그것은 명 회화의 연장이지만, 명대뿐만 아니라 중국 4000년 회화사의 종장(終章)을 장식하기에 알맞은 것으로써, 오랜 전통을 보유한 정통파가 이민족의 정복하에서도 그대로 화계(畵系)를 바꾸어나가, 양상을 변화시키며 최후의 빛을 발하면서 지평선 너머로 꺼져가는 듯한 느낌이다.

     

    그 최후의 빛을 발한 화가로 석도(石濤)와 주탑(朱耷)이 있다. 이들은 명왕조의 왕실 출신으로, 명왕조 멸망 후 출가하여 선승(禪僧)이 되었으나 마음속에 불타는 치열한 저항정신으로 화필을 구사, 기성 화가와는 전혀 다른 자유롭고 독특한 중국 문인화의 예술을 쌓아올렸다.

    이들과 같은 시대인 청초(淸初), 왕시민(王時敏)·왕감(王鑑)·왕휘(王翬)·왕원기(王原祁)·오력(吳歷)·운수평(惲壽平:南田) 등 소위 4왕오운(四王吳惲) 등은 한 파를 형성하고 당시 화단을 이끌었는데, 석도·주답에 비하면 형식의 틀에 얽매여 예술적 감동은 적다.

     

    청왕조 화원(畵院)은 궁정화가를 거느리고, 양식에 통일이 없이 송원화(宋元畵) ·남화(南畵) 혹은 서양화까지 끌어들였으나 화단(畵壇)의 구석으로 밀려난 듯, 권위도 실력도 없었다. 중기에 이르자 상업도시 양저우[揚州]에 문인화를 전문으로 하는 일단이 나타나 남화의 전통을 이어 개성의 표현에 주력, 이단적인 존재로서 주목을 받았으나 너무 주관에 치우쳐서 신경지를 개척하지는 못하였는데, 화암(華:新羅山人) ·김동심(金冬心)만은 확실히 별격의 존재라 할 수 있다.

     

    청나라 초의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은 명왕조 판화의 흐름을 받은 금릉(金陵:南京)의 출판이지만, 금릉판화가 청대에 와서 쑤저우[蘇州]로 진출, 훌륭한 판화의 성행을 보게 되자 서양화의 원근법과 음영법(陰影法)을 받아들여 서민예술로서 뿌리를 내리기에 이르렀다. 청왕조 공예의 대표는 도자기인데, 강희 ·옹정 ·건륭의 3대, 백 수십 년간에 징더전요[景德鎭窯]를 비롯하여 여러 곳의 관요(官窯)에서 제작된 도자기는 일품으로서 서유럽 여러 나라에 수출되었다.

     

    칠공예(漆工藝)로는 건륭·가경(嘉慶) 연간에 궁정 용구로서 대소 갖가지의 제품이 만들어졌으나 명왕조 작풍(作風) 답습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였는데, 기교를 부리고 의장(意匠)도 부질없이 번거로운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인간의 재능이라고는 볼 수 없을 만큼 섬세한 기법으로 정성들여 만든 칠공예품은 유럽 각국으로 수출되어 진중히 간직되었다. 그 밖에 중국 특산의 옥(玉)이나 비취(翡翠)를 가공, 옥기와 세공물을 만들었으며, 이와 관련 있는 것으로는 유리를 재료로 한 화병 ·공기 ·향로 등도 만들었는데, 그중에서도 ‘건륭유리[乾隆硝子]’라 불리는 작품은 특히 유명하다.

     

    한국의 관계

     

    한반도 북변에 할거하면서 17세기 초 중국 본토에 진출하여 통일왕조 청(淸)을 세운 여진은 조선 개국 초부터 북방개척에 힘을 기울였던 조선 정부의 가장 부심(腐心)거리로 등장하여 때로는 무력으로, 때로는 회유책을 써서 이들의 조공(朝貢) ·귀화(歸化)를 권장하였다. 조선 정부는 이들이 노략질하는 동기의 하나가 생활 필수품의 결핍에 있음을 감안하여 함경도의 경성(鏡城)과 경원(慶源)에 무역소를 설치하고 그들이 필요한 물건을 바꾸어 가도록 하였으며, 여진 추장들에게는 중추원지사(中樞院知事)를 비롯하여 호군(護軍) ·사직(司直) ·만호(萬戶) ·천호(千戶) 등의 명예 군직(軍職)을 주기도 하였다.

     

    특히 청을 일으킨 건주여진은 1467년(세조 13) 남이(南怡) 등이 이끄는 조선군의 정벌을 당해, 추장 이만주(李滿住) 부자가 살해되어 그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명나라와 조선의 힘이 만주에 미치지 못하는 틈을 타서 세력을 크게 확장하여 조선 선조가 의주(義州)에 피란하였을 때 건주 여진의 추장 누르하치는 조선에 구원병을 보내겠다고 제의하기도 하였으나 조선 정부는 그 속셈을 알 수 없어 거절하였다.

     

    그 후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의 아들 태종은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을 일으켜 조선과 형제의 맹약을 맺고, 1636년(인조 14)에는 다시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의 항복을 받음으로써 종래의 수직 또는 수평 관계는 전도(顚倒)되어 청나라가 조선의 종주국이 되었다. 이로부터 조선은 약 250년간 해마다 정기 ·부정기적으로 사절과 조공품을 보내어 사대(事大)의 예를 하였으나, 조선은 내정의 간섭을 받지 않고 대체로 독자성을 유지하여 청나라의 종주국 행세는 극히 형식적인 것이었으며, 양국 관계도 별 어려움이 없이 무난하게 보냈다.

     

    1842년 난징조약[南京條約]으로 조선에 앞서 개국한 청나라는 조선이 일본과의 강화도조약으로 쇄국의 둑이 무너지자, 1882년(고종 19) 조선과 미국의 통상을 권유하고 조미 ·조독 수호통상조약을 돕는다는 구실로 마건충(馬建忠) ·정여창(丁汝昌)이 군함을 끌고 들어와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였다. 또한 같은 해에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군함 3척에 4,500명 병력을 끌고 와서 흥선대원군을 납치하였고, 청나라의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은 독일인 묄렌도르프 및 마건충 등을 조선 정부의 정치 ·외교 ·세관 등의 고문으로 앉게 함으로써 청나라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1884년 갑신정변을 계기로 청 ·일 양군이 충돌해 톈진조약[天津條約]을 맺자 위안스카이[袁世凱]를 주조선 총리로 임명해 정치 ·경제 등 모든 분야에 걸쳐 간섭하는 등 종주국 행세를 하였다. 청나라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군대를 파견하여 동학군을 진압하는 데 협력하였으나, 이를 계기로 일본과 충돌하여 청 ·일전쟁을 일으켰는데 이 전쟁에서 패함에 따라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조선은 1896년 250년간 사용하여 온 청나라의 연호를 버리고 ‘건양(建陽)’을 연호로 사용함으로써 최초로 자체의 연호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1897년에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쳐 청나라와 대등한 황제국임을 선포하였다.

     

    조선 사회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는 동안에 ‘숭명배청(崇明排淸)’의 모화사상(慕華思想)이 더욱 일어 당시의 학자는 물론 일반 민중에까지 뿌리깊이 스며들었는데, 학자로서는 송시열(宋時烈)에 이르러 그 극에 달하였다. 이는 중국 본토의 ‘중화(中華)’만이 문화 ·가치이고 일본 ·베트남 ·거란 ·몽골 ·흉노 및 여진[淸]은 야만의 ‘이(夷)’이니 비문화 ·비가치(非價値)라는 화이론적(華夷論的) 세계관의 소산이어서, 중국 변두리의 오랑캐 여진족이 형성한 청나라의 문화는 배척되고, 주자학(朱子學)만이 국가사회 유지의 규범으로 정치와 결합되어 숭상되었다.

     

    그러나 주자학이 형식적 ·관념적 ·배타적인 면만이 강화되어 학문으로서의 자유로운 비판을 거부하자, 그 반동으로 실학(實學)이 일어났고, 영조 ·정조 때에는 청나라 고증학(考證學)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박학(樸學)이 일어나서 정약용(丁若鏞) 등 실학파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청나라를 경유하여 서학(西學:유럽의 자연과학과 천주교)이 유입되어 과학기술과 종교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전성기를 맞이한 강희∼건륭 연간(1662~1795)에 부연사(赴燕使) 일행에 끼어 청나라의 물질문명을 보고 돌아온 박지원(朴趾源) ·박제가(朴齊家) 등은 청나라의 문화를 들여와 문화를 개발하고 산업을 일으키자는 ‘북학(北學)’운동을 벌였다.

     

    이와 같이 청나라의 근대문화는 조선의 학자들을 자극하여 그 고증학적 방법과 과학사상을 바탕으로, 역사학 ·지리학 ·언어학 ·금석학(金石學) 및 천문학 ·지도제작 등에 많은 역작이 나왔고, 이와 같은 학문의 방법은 백과사전파에도 영향을 끼쳐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1770)가 편찬될 정도로 근대문학의 발달을 가져왔다.

    [출처] 청과 한국의 관계 | 네이버 백과사전

     

    여진

     

    금나라 때의 목조불상여진(女眞, 중국어 정체: 女眞, 간체: 女真, 병음: nǚzhēn) 또는 주션(jušen)은 만주 일부와 한반도 북부에서 거주했던 퉁구스 계통 민족으로, 17세기에 만주족으로 불리게 되었다.

     

    정체성

     

    여진(女眞)은 본래 갈족, 말갈족, 선비족이 융화된 민족이다. 삼국 시대 갈족과 선비족이 대륙에 침투하여 세력을 형성하고 5호 16국 시대 나라를 세웠다. 선비족은 6개가 강성하다 탁발부가 5호 16국을 정리하고 화북을 통일 북위을 세운다. 이후 말갈, 갈족은 선비족의 예하 부대가 되어 그들과 융화되었다가 점차적으로 요동으로 이동하였다. 갈족이 처음 한반도에 등장한 것은, 서기 3세기경으로 관구검이 고구려를 함락할 때 그 예하부대가 갈족, 말갈족이었고, 유연을 죽이고 후조을 세운 석륵(石勒)도 갈족이었다. 북위, 북주 시대 갈족과 선비족은 융화되었고 당나라 시대 거란족의 일파가 되었다가 요나라가 성립할 무렵에 요동에서 만주 동남부로 일부가 이동하였다.

    이들은 금나라를 1115년과 1122년 사이에 세웠으며 이 왕조는 1234년까지 건재하였다. 금나라가 거란을 통합하자, 거란과 여진의 민족 통합 과정이 있었다. 금나라는 거란이 반란을 일으키지 못 하도록 그 주위에 여진인을 이주시켰다. 본래 여진의 정체성에서 거란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 시기에 거의 동일한 민족으로 융화된다. 금나라 멸망 이후, 여진은 야인여진(野人女眞) 해서여진(海西女眞) 건주여진(建洲女眞)으로 나뉘었는데, 이때의 여진은 거란 민족의 요소가 강했다.

    그 후 1586년 누르하치가 여진의 세 부족을 통합하고 연합된 부족의 이름을 만주족으로 바꾸었다. 누르하치는 유목 법령을 통합하여 강력한 제도를 만드는데, 이는 후금(後金)과 중국을 점령한 후의 청(淸)제국이 된다.

     

    금나라

     

    여진족이라는 표현은 10세기 여진언어의 jušen(주션)이라는 단어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나 이 단어의 기원은 현재 학계에서 합의되지 않은 상태이다. 숙신(肅愼)과 동일 기원을 가진 단어일 수 있다는 가정이 제기되었으나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다. 영미권에서는 Jurchen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몽골어에서 여진족을 가리킬 때 사용했던 단어인 Jürchen(주르첸)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북만주의 여진 부족들은 원래 거란의 신하들이었다. (요나라참고) 1115년 완안아골타가 요나라를 정복하고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고 금나라를 건국하였다. 그 후 요나라의 잔당들과 함께 자신들을 공격하려고 하였던 송나라를 공격하였고, 마침내 1126년 송나라의 수도 카이펑을 점령하자 이들은 화북지역에 대한 패권을 쥐게 되었다.(정강의 변) 금군은 장강까지 남하하였으나 회하 부근에서 저지되고 남송은 일단 국경을 방어하게 되었다.

    여진족은 자신의 왕조를 고향에 있는 강의 이름을 따라 금(金)이라고 지었다. 여진 부족들은 전쟁에 뛰어났으나 정착하여 수십 년을 지내게 되자 자신의 유목 정체성을 잃게 되었다. 결국 여진족은 점차 한족화 되어갔으며, 남송과의 평화를 공고히 하였다. 금나라의 지배자들은 유교를 따르게 되었다. 1189년 금나라는 몽골과 남송을 상대로 두 개의 전선에서 싸우게 되었다. 1215년 몽골 군대의 압력 하에 이들은 수도를 베이징에서 카이펑으로 옮겼으나 1234년 몽골 제국에 의해 멸망되었다.

     

    명대의 여진족

     

    명왕조의 역사가들은 여진족을 세 분파로 나누어 파악하였다.

    야인여진(野人女眞) : 만주 최북방

    파아손 (巴兒孫)

    착화(著和)

    홀라온 (忽剌溫)

    호(胡)

    해서여진(海西女眞) : 현대 헤이룽장성에 거주

    하다 (哈達) : 왕타이(萬汗/王台: 1548-1582년)

    후이파 (輝發)

    우라 (烏拉)

    예허 (葉赫)

    건주여진(建洲女眞) : 지린성에 거주

    오도리 (斡都里, 斡朵里, 吾都里, 斡朵怜)

    호리개로 (胡里改路)

    도은 (桃温 혹은 桃溫)

    발고강 (荸苦江)

    탈알령 (脱斡怜)

    이들은 유목과 농경을 병행했으며 사냥과 낚시 그리고 제한된 농업을 생업으로 삼았다. 1388년 홍무제는 오돌골과 훌리가이 그리고 퉁비족들과 조공 관계를 맺었으며 이리하여 여진족의 한화(漢化) 과정이 시작되었다.

    영락제는 북원과 대항하기 위해 여진 부족 중에서 동맹자를 찾았다. 영락제는 부족장에게 작위를 수여하거나 성을 하사하는 방법을 통하여 그들이 주기적으로 조공을 해 오기를 바랐다. 요동의 북변에서는 무역을 위한 말시장이 열리기도 했다. 뒤에 이일과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군은 여진족을 조선의 강역으로부터 몰아내게 된다.

    1586년 30년이 지나 건주 여진의 우두머리였던 누르하치가 여진의 세 부족을 통합하고 연합된 부족을 만주족으로 개명한다. 누르하치는 유목 법령을 통합하여 강력한 제도를 만드는데, 이는 후금과 중국을 점령한 후의 청(淸)의 기반이 된다.

     

    문화, 언어 그리고 사회

     

    여진족은 일반적으로 초기 조상들의 유목 전통을 따랐다. 거란과 몽골족들처럼 이들은 힘과 말을 다루는 기술 그리고 궁술과 사냥을 즐겼다. 그들은 샤먼 의식을 행하였으며 하늘 신(abka-i enduri, 압카이 언두리 또는 abka-i han, 압카이 한)을 섬겼다.

    초기 여진 문자는 1120년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의 명에 따라 완안희윤(完顔希尹)에 의하여 발명되었다. 이것은 거란 문자에 기반을 두었으며 거란 문자는 다시 한자에 기반을 두었다. 그러나 중국어는 고립어이며 여진 및 거란의 언어는 교착어이기 때문에 이러한 표기 방식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여진 문자는 금나라가 멸망하자 급속히 사라졌고 여진어는 입말로만 살아남게 된다. 이후 16세기 말까지 여진족은 몽골어와 중국어를 이용해서 문자 생활을 하다가 만주어가 문어로 정리되기 시작하면서는 만주어를 이용한 문자 생활을 하게 된다.

     

    여진 사회의 문화는 몽골족의 큰 영향을 받았다. 몽골족과 여진족 둘 다 정치적 지도자에게 "한"(Khan: 문어몽골어로는 qaɣan, 만주어로는 han으로 표기됨.)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였으며 이는 왕이든 부족장이든 가리지 않고 사용되었다. 아주 강력한 부족장은 "beile"[bəilə, 버일러](왕자, 귀족)라고 불리었는데 이는 몽골의 "beki"(베키)와 터키 민족의 "beg"(베그) 또는 "bey"(베이)에 해당한다. 또한 몽골족과 터키 민족처럼 여진족은 맏아들 제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통적으로 능력이 있는 아들 또는 사촌은 누구든지 지도자로 선택받을 수 있었다.

     

    명나라 시대 동안 여진족은 고대적인 씨족(姓: hala, 할라)의 소규모 씨족(氏: mukun, 무쿤, 또는 hala mukun, 할라 무쿤)적인 사회 단위에서 생활했다. 여진족 씨족의 일원들은 동일 조상에 대한 인식을 공유했으며 단일한 장(mukunda, 무쿤다)의 통치를 받아들였다. 모든 씨족들이 혈연으로 얽혀져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들 사이에는 자주 분쟁과 합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여진 가정 (boo, 부)은 하나의 가족 (booigon, 부이곤)처럼 살았으며 일반적으로 혈연으로 맺은 다섯 개에서 일곱 개의 가족원들과 노예들이 살았다. 가정들은 소대 (tatan, 타탄)를 형성하여 사냥을 하며 음식을 구하였다. 전쟁 등의 대규모 활동을 위해서는 기업 (niru, 니루)을 조직하였다.

     

    참고 문헌

    托克托 등. 원나라때 저술된 역사서. 금사(金史)

    王全興, 「洪晧與《松漠紀聞》」『黑龍江文物叢刊』, 1982-1

    안정복. 연도 불명. 동사강목(東史綱目)

    서몽신(徐夢莘). 날짜 불명. 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

    세종의 어명으로 만들어진 조선의 국가편찬 역사서. 1451년(문종 1년) 8월 완성. 고려사

    아골타. 연도 불명. 고려 예종에 보내는 국서

    박은식. 연도 불명. 몽배금태조전(夢拜金太祖傳)」-

     

    더 보기

    만주족

    금나라

    청나라

     

    바깥 고리

    야인여진(野人女眞), 해서여진(海西女眞), 건주여진(建洲女眞)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The Qing Empire To 1800

    野人(イエヘ)部の系譜

    ヌルハチ以前一族の系譜の系譜

    분류: 여진 | 금나라 | 청나라 | 만주의 역사 | 한국의 역사

     

    야인여진

     

    야인여진(野人女眞)은 여진족의 세 분파중의 하나로의 4부족으로 구성된다.

    여진족은 현대 헤이룽장성에 거주하던 해서여진(海西女眞), 지린 성의 건주여진(建洲女眞) 그리고 만주 최북방의 야인여진(野人女眞)으로 분류된다. 이들은 유목과 농경을 병행했으며 사냥과 낚시 그리고 제한된 농업을 생업으로 삼았다.[출처 필요]

    야인여진의 4부족

    파아손 (巴兒孫)

    착화(著和)

    홀라온 (忽剌溫) :1436년 (함경도)

    호(胡), 오랑케 (瓦爾哈/兀良哈三卫(泰宁、朵颜、福余)) =올랑합; 이인(夷人); 돌궐; 이족(夷族); 동이(東夷傳); 蠻夷; 戎狄; 夷狄; 서융(西戎); 이제(夷齊); 남만(南蠻): 매독(每毒)

    1436년 함경도

    1460년 (세조)함경도: 북적(北狄) = 북쪽/북방 오랑캐: 낭패아한/낭발아한 (浪悖兒罕/浪孛兒罕); 동속로첩목아 (童速魯帖木兒)

    ca. 1583-7년: 이탕개/니탕개(尼湯介)& 번호(藩胡), 울지내(鬱只乃)

     

    해서여진

     

    해서여진(海西女眞)은 여진족의 세 분파중의 하나로 4부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6세기에서 17세기에 걸쳐 명나라 말기에 개원, 길림 등지에 거주하고 있던 여진족이다. 해서여진은 명나라 측에서 부르는 이름이며, 다른 부족들은 그들을 여진어(만주어)로 후룬 굴른(후룬국, 홀랄온 또는 호륜으로도 표기)이라고 불렀다. 후룬은 우라(烏拉), 후이파(輝発), 하다(哈達), 예허(葉赫) 4개의 부족으로 구성된 부족이며, 만주사에서는 후룬사부라고 불렀다.

    명왕조의 역사가들은 여진족을 세 분파로 나누어 파악하였다: 만주 최북방의 야인여진(野人女眞)과 현대 헤이룽장성에 거주하던 해서여진(海西女眞), 그리고 길림성의 건주여진(建洲女眞)이다. 이들은 유목과 농경을 병행했으며 사냥과 낚시 그리고 제한된 농업을 생업으로 삼았다.

    해서여진(海西女直)은 16세기에서 17세기의 명말 청초 경에 개원, 길림에 거주하고 있던 여진의 집단이었다. 해서여진은 명나라 측에서 분류한 이름으로 후룬국 (忽剌國, 扈倫)으로 불리는 집단이었다. 후룬국은 우라(烏拉), 후이파(輝発), 하다(哈達), 예허(葉赫)의 4개 정치 체제로 구성되어 있으며 만주사의 후룬 4부로 불렸다.

    16세기 말에 누르하치가 건주여진을 통일하고 후금을 세우자, 해서여진의 후룬 4부는 1593년 이후 후금과 싸움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후룬 4부는 상호 불화 때문에 협력하지 못하고, 건주여진을 통일 세력으로 정리한 누르하치 앞에서 각개 격파되어, 1599년에 하다, 1607년에 ‘후이파’, 1613년에 ‘우라’가 차례로 멸망되어 후금에 흡수되었다.

    홀로 남아 있던 ‘예허’는 후룬 4부의 가장 강력한 부족으로 누르하치와 격렬하게 싸웠다. 명나라의 후원을 업고 누르하치의 여진 통일 운동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지만,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명과 예허의 연합군이 누르하치에게 패배하여 저항하지 못하고, 멸망당했다.

    후룬 4부는 후금에 병합이후 팔기에 편성되어 청나라의 지배 민족인 만주인의 일부가 되어갔다.

    해서여진의 4부족

    우라 (烏拉 > 1613년)

    후이파 (輝發 > 1607년)

    예허 (葉赫 > 1619년) :

    하다 (哈達 > 1601년) : 왕타이(萬汗/王台: 1548-1582년)

     

    건주여진

     

    명나라의 역사가들은 여진족을 세 분파로 나누어 파악하였는데, 그것은 만주 최북방의 야인여진(野人女眞)과 현대의 헤이룽장성에 거주하던 해서여진(海西女眞), 그리고 지린성의 건주여진(建洲女眞)이다. 이들은 유목과 농경을 병행했으며 사냥과 낚시 그리고 제한된 농업을 생업으로 삼았다.

    1388년 홍무제는 오도리와 후리가이 그리고 퉁비족들과 조공 관계를 맺었으며 그는 몽골에 대해 동맹을 시도하였다. 이리하여 여진족의 중화 과정이 시작되었다. 당시에 그들은 두만강 근처에 모여 있었다. 오래지 않아 다양한 여진족이 명나라의 문화를 수용하였다.

    아하추(阿哈出)는 후에 이사성(李思誠)으로 알려졌으며 후리가이의 부족장이었다. 1403년 그는 건주의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 사령관이 되었다. 오도리의 몽케테무르(猛哥帖木儿)는 건주 좌지휘사의 지도자가 되었고 중국인의 성씨인 동(童)을 하사받았다.

    영락제는 북원과 대항하기 위해 여진 부족 중에서 동맹자를 찾았다. 영락제는 부족장에게 작위를 수여하거나 성을 하사하는 방법을 통하여 그들이 주기적으로 조공을 해 오기를 바랐다. 요동의 북변에서는 무역을 위한 마(馬)시장이 열리기도 했다.

    홍치제는 건주여진(建州女眞)과 하미(哈密), 달단(韃靼)과의 관계를 개선한 황제로 평가되고 있다.

    1500년대에 이르러 건주여진의 세력은 점차 요동과 조선의 강역으로 확장되려는 모습이 보였다. 특히 1586년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군은 녹둔도에 침입한 여진족에게 큰 피해를 입은 뒤, 여진족을 다시 공격하여 조선의 강역으로부터 몰아내기도 하였다.

    같은 해 건주여진의 우두머리였던 누르하치는 여진의 세 부족을 통합하고, 연합된 부족을 만주족으로 개칭한다. 누르하치는 유목 법령을 통합하여 강력한 제도를 만드는데, 이는 후금(後金)과 중국을 점령한 후의 청나라(淸)의 기반이 된다.

     

    건주여진의 5부족

     

    오도리 혹은 알도리 (斡都里, 斡朵里, 吾都里, 斡朵怜) (지금의 회령지방에 거주)

    몽케테무르(孟特穆, 猛哥帖木耳, 1405년 ~ 1433년)

    충선(充善, 1419년 ~ 1467년)

    각창안 (覺昌安, ? ~ 1583년)

    호리개로 (胡里改路)

    아하추 (阿哈出, ? ~ 1410년), 후일 이사성(李思誠)으로 알려졌다.

    석가노 (釋加奴), 후일 이현충(李顯忠)으로 알려졌다.

    이만주 (李滿住, 1407년 ~ 1467년)

    도은 (桃温 혹은 桃溫)

    발고강(荸苦江)

    탈알령(脱斡怜)

    올적합 (兀狄哈, 영고탑 지방을 근거로 하였다.)

    왕고 (王杲, ? ~ 1575년)

    아타이 (阿台, ? ~ 1583년)

    니칸 와일란 (尼堪外兰, ? ~ 1586년)

     

    퉁구스족 [Tungus]

     

    동쪽은 사할린으로부터 서쪽으로는 예니세이강에 걸치고, 또 북쪽은 야쿠티아자치공화국의 극한(極寒) 툰드라 지대로부터 남쪽으로는 중국 동북(만주) 지방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분포하여 만주-퉁구스어계(語系)의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

    일반적으로 만주어파(滿洲語派)의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을 제외하고 퉁구스어파의 각 방언을 사용하는 민족을 퉁구스라고 한다. 많은 그룹이 있는데, 그 중의 시베리아 분파(북방)에는 에벤크·라무트·네기달·솔론이 속하며, 아무르(남방)파에는 나나이(골드)·올차·오로크·오로치·우데헤 등이 포함된다. 에벤크는 위에 예거한 거의 모든 지역에 걸쳐 조금씩 분포하여 약 4만에 이른다. 싱안링[興安嶺]과 그 부근에 사는 오로촌은 이 그룹의 일부이다. 인종학적으로는 몽골인종에 속하며, 신장은 크지 않고, 두형(頭形)은 단두(短頭) 내지 중두(中頭), 코는 작고 낮으며 광대뼈가 솟아 있다. 눈과 모발은 검거나 암색(暗色)이고 두발은 직모(直毛)이며, 수염과 체모는 적다. 피부는 누런빛을 띠고 있으나 비교적 흰 편이다. 영아의 엉덩이에는 몽골반점이 나타나는 율이 높다. 분포지역의 자연적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지역에 따라 생활양식의 차이가 있다.

    북방의 툰드라에 사는 사람들은 토나카이[馴鹿]를 기르고, 그 고기와 젖을 식용하고 있으며, 가죽은 옷감으로 쓰고 있다. 또한 이 짐승을 탈것으로 이용하거나 썰매를 끌게 하기도 한다. 이런 생활양식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타이가(침엽수림) 지대에 들어가 수렵을 하지만 농경생활은 하지 않는다. 그것은 토나카이의 사료인 이끼류(類)를 찾아서 이동하기 때문이며, 주거에도 원뿔 모양의 간단한 텐트를 이용한다. 야쿠티아와 부랴티야에 인접한 에벤크의 일부는 이미 말 사육으로 업종을 바꾸고 농경을 경영하면서 정주생활(定住生活)로 이행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 또한 오호츠크해(海) 연안의 에벤이나 아무르강·쑹화강[松花江] 유역의 나나이처럼 어획(漁獲)을 주된 생활수단으로 하면서 개를 가축으로 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회구성의 단위는 부계적 씨족이고, 결혼은 혈연적 외혼제(外婚制)를 따르고 있다. [출처] 퉁구스족 [Tungus ] | 네이버 백과사전

     

    사르후 전투(薩爾滸之戰)

     

    사르후 전투(薩爾滸之戰)는 1619년 명나라에 쳐들어오는 후금에 대항하기 위해 명나라, 조선, 여진족까지 참전한 대전투로 이 전투에서 명나라가 크게 패해 명나라가 쇠퇴했고 후금은 만주 지역을 차지했으며, 군대를 파병한 강홍립의 조선군 부대는 전체 투항하여 광해군의 중립 정책을 보여주었다.

     

    배경

    명나라의 누르하치 토벌 작전

     

    건주 여진을 통일하고 1616년에 한으로 즉위하여 후금을 일으킨 누르하치는 1618년 명나라에 대해 "일곱 큰 원한"을 내걸고 선전 포고를 하고 요동의 명 거점인 무순을 공격했다. 명나라는 이에 대해 양호를 요동 경략으로 임명하고 여진을 토벌하게 했다.

    그러나 명군은 예산 부족으로 군사의 결집에 시간이 걸렸으므로, 양호는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후금에 북쪽에 접해 있는 예허와 남쪽에 있는 조선에도 원병을 요청했다. 예허는 여진을 통일하기 위해 누르하치와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에 응했다. 한편의 조선의 국왕 광해군은 출병을 꺼렸지만, 임진왜란 때 명에 도움을 받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거절하지 못하고, 조선은 도원수 강홍립에게 1만의 병력을 주어 압록강을 넘게 했다.

    1619년 10만 명군은 전군을 4개의 군단으로 나누어 네 곳으로 누르하치의 본거지 헤투알라(싱징, 赫圖阿砬 Hetuala)를 포위하기 위해 진격을 시작했다. 북로는 개원 총병관 마림이 예허의 원군과 함께 개원에서, 서로는 산해관 총병관 두송이 심양에서 출발하여, 양군은 헤투알라와 무순의 중간에 있는 사르후(薩爾滸, Sarhu)에서 합류하여 헤투알라를 목표로 진격했다. 또한 조선로에서 요동 총병관의 이여백이 요양에서 청하를 넘어 진격했고, 동남로에서 요양 총병관 유정이 조선 군대를 대동하고 단동 부근에서 북상하여 각각 서남과 동남에서 직접 헤투알라로 진격했다. 총사령관 양호는 예비 병력과 함께 후방인 심양에서 대기하면서 전군을 총지휘 하였다.

     

    명나라의 군대 편성

    총사령관 양호는 예비 병력과 함께 후방인 심양에서 대기하면서 전군을 총지휘 하였고, 10만의 명군은 전군을 4개의 군단으로 나누어 네 곳으로 누르하치의 본거지 헤투알라(싱징)를 포위하기 위해 진격을 하게 했다.

     

    좌측 북로군

    북로는 개원 총병관 마림이 예허의 원군과 함께 개원에서 출발하여 헤투알라와 무순의 중간에 있는 사르후에서 합류하여 헤투알라를 목표로 진격했다.

     

    좌측 서로군

    서로는 산해관 총병관 두송이 심양에서 출발하여, 양군은 헤투알라와 무순의 중간에 있는 사르후(薩爾滸, Sarhu)에서 합류하여 헤투알라를 목표로 진격했다.

     

    우측 동로군

    동남로에서 요양 총병관 유정이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 군대와 함께 단동 부근에서 북상하여 각각 서남과 동남에서 직접 헤투알라로 진격했다.

     

    우측 남로군

    요동 총병관의 이여백이 요양에서 청하를 넘어 진격했다.

     

    전투 과정

    사르후 전투

     

    이에 대해 누르하치는 헤투알라에서 명군 전체와 싸우는 것을 피하고, 각개 격파를 시키기 위해 먼저 헤투알라 북방에서 첫 번째 공방의 거점이 되는 사르후 산 및 강 맞은편에 있는 쟈이휘안 산에서 명군을 방어하기 위해성을 쌓았다.

    군의 진군은 눈 때문에 지연되었고, 3월 1일, 두송의 서로군만 사르후 근처에 도착했다. 사르후(薩爾滸) 및 자이피안(吉林崖)에서 후금군이 성을 쌓고 있는 것을 본 두송은 마림군의 도착을 기다리지 않고 2월 29일 사르후 앞의 혼하를 건너 사르후 산에 공격을 개시했다. 병력이 더 많았던 두송군은 사르후 산을 즉시 점령하고 2만 5000의 병력 중 1만 명을 수비를 위해 남겨두고, 나머지 주력 1만 5000명을 쟈이피안 산 공격에 투입했다.

    한편, 주력 함께 헤투알라 있었던 누르하치는 명군의 도착 소식을 듣고, 바로 사르후를 향해 출발하여 저녁에 사르후의 남쪽에 도착했다. 누르하치가 도착했을 때, 자이피안을 지키는 후금의 수비병은 방어를 하지 못해 후퇴를 하였고, 후방의 키린하다에 들어가 있었다. 누르하치는 8기(8군단)로 구성된 후금군 주력 중 2기를 자이피안의 적 주력에 대한 견제로 파견하는 한편, 자신은 6기의 군단을 이끌고 땅거미를 타고 사르후에 육박했다.

    사르후를 지키는 명군은 적군이 키린하다 수비대와 합류하여 쟈이피안으로 향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완전히 기습을 받은 형태가 되어, 혼란과 어둠으로 인해 화력을 거의 살리지 못한 채 접근전에 의해 괴멸 당했다. 후방 부대의 괴멸로 자이피안에 있는 명군 주력은 동요를 했고, 견제를 위해 파견된 2기의 키린하다 수비대와 사르후에서 전진한 후금군 주력 6기의 군사에 의해 세 방향에서 공격을 받았다. 결국 속수무책으로 괴멸당하고, 두송과 휘하의 주요 장령들은 전사를 했다.

    사르후 전투의 실연은 심양 동쪽 교외에 있는 기반산 국제관광구의 선양 세계박람회회 공원(2006 중국 심양 세계 원예 박람회의 회장 뒤)에서 볼 수 있다.

     

    상간하다 전투

     

    한편, 두송 서로군과 합류하기 위해 북쪽에서 사르후로 향하고 북로군 마림군은 두송이 전사했을 때 사르후 북쪽에 있는 상간하다(尚間崖)라는 지점에 있었다. 3월 2일, 두송군의 괴멸 소식을 듣고 마림군은 상간하다로 후퇴하여 참호를 파고, 대포를 거치시켜 후금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후금군은 명군의 화기에 대한 대책으로 말을 타지 않은 병사가 참호를 돌파하고, 그 뒤를 기병이 공격하는 전법을 내놓았으며, 이 전투에서도 그 전략을 취하려고 했다. 그러나 상간하다에 도착한 누르하치가 이끄는 후금군은 본대가 고지를 점령하고 명군의 참호를 위에서 공격하였고, 명군은 이를 방어를 하면서 후금군을 공격했다. 이후 후금군이 기마대로 공격을 감행하여 난전이 되었지만, 마림과 불화를 겪던 반종안을 사령관으로 하는 명군의 후방 부대는 마림의 본대에 구원부대를 보내지 않았고 곧 마림은 패주했다.

    이어 반종안의 진을 공격한 후금군은 말을 타지 않은 병사들이 적의 화기를 제거한 후에 기병을 돌격시켜 반종안도 패주를 시켰다. 마림과 반종안의 패전 소식을 들은 예허 원군은 후금군과 전투를 포기하고 자국으로 철수했다.

     

    아부달리 전투

     

    북서로군의 패전 소식을 접한 양호는 살아남은 이여백과 유정, 양군에게 진격 중지를 알렸다. 이여백군은 원래 천천히 진격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즉시 퇴각했지만, 유정군은 이미 적지 깊숙이 진격하여 중단 명령을 받지 못하였다.

    유정군은 〈상간하다 전투〉가 있었던 3월 2일 헤투알라의 남쪽을 방어하는 후금의 수비대를 격파하고 순조롭게 북진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 정보를 얻은 누르하치는 사르후 방면에서 북로 군과 싸우고 있던 후금군을 재집결하여 헤투알라(赫圖阿拉)로 돌아가는 유정군을 맞아 차남 다이샨(代善)이 이끄는 주력을 파견했다. 3월 4일, 유정군은 헤투알라의 남쪽, ‘아부달리’(阿布達裡)라는 지점에서 다이샨 군과 조유하여 즉시 진을 고착시켰다. 이에 다이샨 그 동생 홍타이지(8남), 그리고 별동대를 이끌고 유정의 후방에 있던 누르하치의 부장 다르한 희야와 함께 세 방향에서 유정의 진지를 포위, 공격하여 명군을 괴멸시켰고, 유정도 전사했다.

     

    부차 전투

     

    아부달리 전투가 있었을 때, 조선군과 명나라 유정군 후방 부대는 자금 부족으로 유정의 주력보다 늦게 출발하여, 아부달리 남쪽 ‘부차’(富察, 현재의 환런 만족 자치현)라는 지점에 머물고 있었다. 다이샨은 즉시 진격을 시작하여 홍타이지를 선봉으로 하는 후금군이 부차에 육박했다. 조선군의 강홍립은 조총과 장창으로 전면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이를 맞아 싸웠으나, 강한 역풍으로 인해, 불이 꺼지고, 화기의 연기에 시야를 빼앗겼다. 그 틈을 이용해 후금군 기병이 돌격하여 선봉부대를 돌파하였다. 이때 좌영을 방어하던 조선군 장수 김응하가 전사를 하였다.[1] 명군도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으며, 밤이 되자 조선군 중영 본영은 5000명만이 고립되어 포위되었다. 후금은 조선군에 항복을 권했고, 결국 이틀을 굶은 강홍립과 조선군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누르하치에게 투항했다.[1] 조선군의 투항 사실을 알게 된 명군의 장교는 자살하고 동남로군은 소멸했다.

    (정조는 이 전투를 《심하전투》(深河戰役)라고 언급했으며[2], 이때 전사를 한 김응하는 충무공의 시호를 추서 받았고, 명나라 신종 황제는 그를 요동백에 추서한다.)

     

    결과 및 영향

     

    명군의 패인은 여러 장수가 서로 떨어져 있어 완전히 연락을 취하지 못했고, 공을 다투어 후금의 각개 격파를 허락한 것이 가장 치명적인 용인이다. 이 전투 이후 요동의 명군은 후금에 밀리게 되어 개원, 선양, 요양이 잇달아 후금의 손에 떨어지게 된다. 결국 조정은 양호를 파면하고, 웅정필을 감찰어사 겸 대리사승으로 임명하여 요동을 지키게 한다.

    노추(후금)에게 항복한 강홍립은 1619년 4월 2일 명나라의 사대주의에 물든 신하들의 압력으로 관직을 삭제 당하였다.[3] 또한 그들은 강홍립, 김경서, 정응정, 여눌 등의 가족까지 구금을 요청했지만, 광해군은 끝까지 그를 감쌌다. [4] 1620년 이들은 강홍립이 귀국을 하면 옥에 가두고 명나라로 보낼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5]

    1620년 명나라 만력제가 사망하였다. 뒤를 이어 태창제(광종)가 즉위했으나 29일 만에 신하에게 독살당하고 천계제(희종)가 즉위하였다. 1621년 3월에는 후금군이 명군을 만주에서 완전히 몰아냈고, 그해 5월에는 선양을 점령하고 그곳을 수도로 삼았다.

    조선이 1619년 파병을 한 지 4년 후 국내에서도 신하들과의 광해군의 갈등은 점점 더 깊어졌고, 1623년 인조반정을 통해 중립정책을 펼치던 광해군이 폐위되고, 친명 정책을 펴는 인조가 즉위하였다. 조선 인조는 권력의 변화가 일어나는 국제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친명정책으로 전환하였으며, 결국 1627년 정묘호란을, 1636년 12월에 병자호란을 겪게 되고, 이듬해 1637년에는 치욕적인 항복으로 삼전도의 굴욕을 겪게 된다.

    1626년 누르하치가 영원성 전투에서 원숭환의 공격으로 전사하였고, 그의 여덟째 아들 홍타이지가 후금 황제로 즉위하였다. 이듬해 1627년 천계제가 죽고 숭정제가 즉위하였는데, 1629년 6월 누르하치를 죽인 원숭환이 모문룡을 처형하자, 1630년 8월 숭정제가 원숭환을 처형하였다.

    1636년 홍타이지는 국호를 청나라로 선포하였다. 그해 12월 홍타이지가 12만 8,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공하였다.

     

    병력

    단위

    지위관

    총계

    총수

    요동 경략 양호

    15,000

    서로군

    산해관 총병 두송

    보정 총병 왕선

    원임 총병 조몽린

    경략표하우익 영관유격사도사 류우절

    원임 참장 시국동

    원임 유격 왕호

    원임 유격 장대기

    원임 유격 양흠

    원임 유격 왕해룡

    관무순유격사비어양여달

    원임 참장 공념수

    원임 참장 이희필

    감군위 분순 병비부사장전

    2,000

    5,000

    6,000

    약 2,000

    약 2,000

    약 2,000

    약 2,000

    약 2,000

    약 2,000

    약 2,000

    약 2,000

    총   약29,000

    북로군

    개원 총병 마림개원 관부총병사 유격 마암관해주참장사유격 정벽유격 갈세봉관신병우영원임 유격 조계정관신병중영원임 참장 이응선원임수비 강만춘찬리위수암통판 동이려개원도검사 반종안철령 유격정국량경운관유격사도사 두영징(감엽혁군),

    마연, 마습

    5,500약2,0006,050약2,000약2,000약2,000약500총약22,050

    예허부 원군 패륵 김태길, 포양고

    약10,000명조, 총 약34,050

    동로군

    요양 총병 유정관관전유격사도사 조천정남경륙영도사 요국보산동관도사사 주문원임부총병 강만화애양수비서구은석병관비어주익명찬리위동지 황종주관진강유격사 도사 교일기(감조선군)해개병비 부사 강응건류초손

    1,838약2,0003,0001,500약2,000약5001,500총 약1,2338

    조선도원수 의정부 좌참찬 강홍립중군 관원임절 도사 이계선총령대장 부원수 평안도 절도사 김경서중군 관우후 안여눌분령변비 방어사 문희성좌 조방장 김응하우 조방장 이일원

    총 약13,000명조, 조선 총 약 27,338

    남로군

    요동총병 이여백관료양부총병 사참장 하세현경략 표하좌일영관 유격 사도사 장응창관의주참장사 부총병 이회충총진좌영 유격 대유광총진 우익영관 유격 사도사 풍응괴무정영유격 왕세공서평비어 서성명가함도사 이극태원임 유격 오공경원임 유격 우수지원임 유격 장창윤찬리위추관 정지범감군위수 병비참의 염명태

    약2,000약2,000약2,000약2,000약2,000약2,000약2,000약500약2,000약2,000약2,000약2,000총 약20,500명

     

    참고

    소설 태조(누르하치, 만주국 민생부 大臣賞), 1940년 3월 1일 《삼천리》 제12권 제3호

    1626년 영원성 전투

    1627년 정묘호란

     

    주석

    가 나 광해군일기(1619년 3월 12일). 평안 감사가 중국군과 조선군이 삼하에서 패배했다고 치계하다. 조선왕조실록.

    ↑ 정조실록 48권, 1798년 3월 19일, 충무공 김응하 등 충신의 자손들을 포상하다

    ↑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일기 141권 11년 6월 6일

    ↑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일기 139권 11년 4월 2일

    ↑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일기 150권, 12년 3월 28일, 1620년

     

    바깥 링크

    사르후 전투

    분류: 1619년 분쟁 | 1619년 중국 | 명나라의 전투 | 청나라의 전투 | 조선의 전투

     

    누르하치

     

    누르하치(愛新覺羅 努爾哈赤 - 애신각라 노이합적, 만주어: - Aisin-gioro Nurhaci, 1559년 ~ 1626년 9월 30일, 재위 : 건주여진 1583년 ~ 1616년, 후금 1616년 ~ 1626년)는 중국 후금의 초대 황제이자 뒤의 청나라의 초대 건국 태조이다. 누르하치라는 이름은 여진어로 `멧돼지 가죽'이라는 뜻이라고 하며, 그 이름은 그의 조부인 기오창가(愛新覺羅 覺昌安 - 애신각라 각창안, 만주어: - Aisin-gioro Giocangga)가 지어준 이름인데, '멧돼지 가죽만큼 질기고, 그만큼 뜨거움과 차가움을 잘 이겨내라'는 의미라고 한다. 묘호는 태조(太祖)이고, 연호는 천명(天命)이며, 시호는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이다.

     

    생애

     

    1559년 2월 21일 누르하치는 애신각라(愛新覺羅)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누르하치가 태어났을 무렵의 여진 부족은 건주여진 5부족, 해서여진 4부족, 야인여진 4부족으로 분열되어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여진

    통일

     

    명나라는 이것을 이용하여 조공의 권리를 분산시킴으로써 여진족들이 강해지는 것을 억제하고 있다. 즉, 건주, 해서여진의 유력자 300명에게 칙서를 전달했다. 그러나 누르하치가 태어났을 때, 토목의 변으로 에센의 하안 칸이 침공하여 칙서가 무자격자에게 전달되는 등 혼란을 기대한 공작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건주여진에 1,000통, 해서여진에 500통을 수장들에게 전달하고, 권력의 집중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전략을 전환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명나라도 컨트롤 할 수 없을 만큼 무력 항쟁이 치열해지고 있었다.

    명나라의 요동사령관 이성량은 명나라가 제어할 수 있을 정도의 큰 세력을 하나 만들고, 그 세력의 후원자가 되어 여진을 컨트롤 하려고 했다. 이렇게 선정된 것이 건주여진 중 누르하치이다. 이성량의 의도를 잘 알고 있는 누르하치는 여진 중 강대 세력이 되었고, 1589년(만력 17년)에 건주여진 5부족을 통일하였다. 그와 동시에 이성량의 주머니에 들어가는 뇌물의 양도 크게 늘었기 때문에 명나라는 누르하치의 감시를 게을리 했다.

    누르하치의 급격한 부상에 위기감을 느낀 해서여진은 뭉쳐서 누르하치에게 영토 할양을 요구했지만, 누르하치는 이 요구를 묵살해 버렸다. 또한 이 무렵부터 누르하치는 자신의 세력을 만주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1593년(만력 21년) 누르하치가 이끄는 만주군은 해서여진을 중심으로 한 아홉 부족 연합군과 격돌하여 완승을 거뒀다. 이 전투는 《그레 전투》 불린다. 이때부터 여진의 여러 부족이 누르하치를 따르게 되고, 명나라는 누르하치에게 엄호장군이라는 관직을 하사했다. 또한 이성량은 2년 전에 부패로 인해 탄핵되어 경질 당했다.

    이 시기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에 대응하느라 명나라가 정신이 없었던 시기이기 때문에 명나라의 관심을 덜 끌 수 있었다.

    1599년 누르하치는 자신을 적대하던 해서여진을 멸망시켰다. 직후 히데요시 군이 철군하자, 명나라는 누르하치에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해서여진의 예허 부족을 지지함으로써 누르하치의 대항마로 삼으려 했다.

     

    후금의 건국과 명과의 전투

     

    1616년(만력 44년) 누르하치는 본거지를 허투알라(혁도아랍, 赫圖阿拉)로 옮기고 한(만주식 군주 칭호. 칸과 같은 의미이다.)의 지위에 올라 국호를 금(金), 연호를 천명(天命)이라 선포했다. 이후 누르하치는 여진족의 이름을 문수보살을 딴 만주(manju 滿州)로 고치고 어르더니(額爾德尼)와 가그(噶盖)에게 명하여 몽골 문자를 개량한 만주 문자(無圏點点字)를 정비하게 했다. 또한, 팔기제라는 군 조직을 만들었다. 이것으로 만주가 세력을 확대하는 기반을 다졌다.

    1618년(천명 3년) 누르하치는 "일곱 가지 큰 원한"(七大恨)이라는 격문을 발표하고 명나라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 문서에는 명나라가 예허에 가담하여 만주를 공격한 것, 조부와 부친이 명나라에 죽은 것 등이 적혀 있다.

    1619년 3월 명나라는 예허부와 조선에 원군을 요청하여 47만에 이르는 만주토벌군을 결성하고 이듬해 무순 가까운 ‘사르후’(薩爾滸)에서 10만이라 칭하는 만주군과 격돌했다. (10만이라고 했지만, 실제 수는 그 절반이었다고 한다.). 수적으로 불리한 후금이었지만, 공을 탐한 명나라 장군 두송이 후속 부대를 기다리지 않고 성급하게 공격을 했기 때문에 각개 격파할 수 있었다. (《사르후 전투》)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도 《부차 전투》에서 포위되어 김응하가 전사하고, 항복을 하게 된다.

    사르후에서 명군에 큰 타격을 준 누르하치는 후원자를 잃은 예허를 흡수하여 여진을 완전히 통일했다.

    1621년(천명 6년), 기세가 오른 누르하치는 심양, 요양을 잇달아 함락시켰고, 요양 옆의 심양으로 천도했다. 이 때 후금의 세력권은 요동 전역에 미쳤다.

    1626년(천명 11년), 연전연승하던 누르하치는 명나라의 본토를 공격하기 위해 산해관을 함락 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그 앞에 있는 영원성(현재의 흥행성 현성)에서 장군 원숭환이 포르투갈에서 건너온 홍이포를 대량으로 거취하고 만주군을 맞아했다. 홍이포의 위력에 만주군은 패배하고, 퇴각했다.(영원성 전투) 이 과정에서 누르하치도 부상을 당해, 그해 몽골에 원정을 나가던 중 상태가 호전되지 못하자 사망하였고 뒤를 아들인 홍타이지가 이었다.

    원래 누르하치의 목표는 명나라로부터 독립이었고, 명나라를 정복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후계자를 결정하지 않았던 것도 그때까지 부족 합의 체제를 유지하려고 한 큰 이유기도 했다.

    1636년 후금은 국명을 청으로 개칭하였고, 누르하치는 청나라의 태조로 불린다. 사후 태종 숭덕문황제는 부친인 누르하치를 복릉(福陵)에 안장하였다.

     

    가족

    황후

    효자고황후 엽혁나랍씨(孝慈高皇后 葉赫那拉氏 1575~1603)

    효열무황후 오랍나랍씨(孝烈武皇后 烏拉那拉氏 1590~1626): 태조 사후 순장됨

     

    후궁

    원비 동가씨(元妃 佟佳氏 ?~?)

    계비 부찰씨(繼妃 富察氏 ?~?)

    수강태비 박이제길특씨(壽康太妃 博爾濟吉特氏)

    측비 합달납라씨(側妃 哈達納喇氏)

    측비 이이근각라씨(側妃 伊爾根覺羅氏)

    측비 엽혁나랍씨(側妃 葉赫納喇氏)

    서비 조가씨(庶妃 兆佳氏)

    서비 뉴호록씨(庶妃 鈕祜祿氏)

    서비 가목호각라씨(庶妃 嘉穆瑚覺羅氏)

    서비 서림각라씨(庶妃 西林覺羅氏 ?~1646)

    서비 이이근각라씨(庶妃 伊爾根覺羅氏)

    서비 아제근(庶妃 阿濟根 ?~1626) : 태조 사후 순장됨

    소복진 덕인택(小福晉 德因澤 ?~1626) : 태조 사후 순장됨

    낙비 이씨(樂妃 李氏)

     

    자녀들

    아들들

    장남 광략패륵 저영(廣略貝勒 褚英 1580~1615) : 원비 동가씨 소생

    차남 예열친왕 대선(禮烈親王 代善 1583~1648) : 원비 동가씨 소생

    3남 진국근민공 아배(鎭國勤敏公 阿拜 1585~1648) : 서비 조가씨 소생

    4남 진국극결장군 탕고대(鎭國克潔將軍 湯古代 1585~1640) : 서비 뉴호록씨 소생

    5남 망고이태(莽古爾泰 1587~1632) : 계비 부찰씨 소생

    6남 보국각후공 탑배(輔國愨厚公 塔拜 1589~1639) : 서비 뉴호록씨 소생

    7남 요여민군왕 아파태(饒餘敏郡王 阿巴泰 1589~1646) : 측비 이이근각라씨 소생

    8남 태종 홍타이지(太宗 皇太極 1592~1643) : 효자고황후 엽혁나랍씨 소생, 제2대 황제 태종 숭덕문황제(太宗 崇德文皇帝)

    9남 진국각희공 파포태(鎭國恪僖公 巴布泰 1592~1655) : 서비 가목호각라씨 소생

    10남 덕격류(德格類 1596~1635) : 계비 부찰씨 소생

    11남 파포해(巴布海 1596~1643) : 서비 가목호각라씨 소생

    12남 영친왕 아제격(英親王 阿濟格 1605~1651) : 효열무황후 오랍나랍씨 소생

    13남 보국개직공 뇌모포(輔國介直公 賴慕布 1610~1646) : 서비 서림각라씨 소생

    14남 예충친왕 도르곤(睿忠親王 多爾袞, 1612~1650) : 효열무황후 오랍나랍씨 소생, 추존 황제 성종의황제(成宗義皇帝)

    15남 예통친왕 다탁(豫通親王 多鐸 1614~1649) : 효열무황후 오랍나랍씨 소생

    16남 16남 비양과(費揚果 1620~1639) : 계비 부찰씨 소생

    딸들

    장녀 고륜동과공주(固倫東果公主 1578~1652)

    차녀 화석눈철공주(和碩嫩哲公主 1587~1646)

    3녀 망고제격격(莽古濟格格 1590~1635)

    4녀 목고십격격(穆庫什格格 1595~1659)

    5녀(1597~1613)

    6녀(1600~1646)

    7녀 고륜공주(固倫公主 1604~1685)

    8녀 총고도격격(聰古圖格格 1612~1646)

    양녀 화석공주(和碩公主 1590~1649)

    바깥고리

    네이버 캐스트 : 오늘의 인물 - 누르하치

    원본 주소 ‘http://ko.wikipedia.org/wiki/%EB%88%84%EB%A5%B4%ED%95%98%EC%B9%98’

    분류: 1559년 태어남 | 1626년 죽음 | 청나라의 황제 | 전사한 사람 | 문자 발명가

     

    누르하치 [努爾哈赤(노이합적), Nurhachi, 1559~1626.9.30]

     

    중국 청나라의 창건자, 초대 황제(재위 1616~1626). 여진의 대부분을 통일하여 한(汗)의 지위에 올라 국호를 후금(後金)이라 하였는데 이는 명나라에 큰 위협이었다. 명과의 싸움 중 병사하였지만 그가 확립해 놓은 기초 위에 아들 홍타시가 대업을 완수하였다.

    성 아이신줴뤄[愛新覺羅]. 시호 처음에는 무황제(武皇帝), 나중에는 고황제(高皇帝). 묘호 태조(太祖). 만주의 푸순[撫順] 동쪽 훈허강[渾河], 싱징[興京] 분지의 한 곳에 위치한 건주여진(建州女眞)의 한 추장에 지나지 않았지만, 1583년 처음으로 독립을 위한 군사를 일으켜 수 년 사이에 건주여진을 통일하고, 1587년 쑤쯔허[蘇子河] 상류에 후대에 ‘옛 노성(舊老城)’이라는 뜻의 퍼아라[佛阿拉, 지금의 新賓縣 永陵鎭 二道村]라고 불리는 성을 쌓고 근거지로 삼았다. 이후 1603년에는 ‘허투아라[赫圖阿拉, 赫圖阿喇, 黑秃阿喇, 黑圖阿拉 등으로도 표기, 지금의 遼寧 新賓縣 永陵鎭 老城村]’에 성을 세우고 근거지를 옮겼다.

    1589년 명으로부터 도독첨사(都督僉事)로 임명되었으며, 1595년 용호장군(龍虎將軍)의 칭호가 수여되었다. 1599년에 해서여진(海西女眞)의 하다[哈達]를 멸망시키고, 이어 1607년에는 후이파[輝發], 1613년에는 우라[烏拉] 등을 병합하여 여진의 대부분을 통일하였고, 1616년 한(汗)의 지위에 올라 국호를 후금(後金), 연호를 천명(天命)이라 하였다. 그동안 여진문자를 발명하고 팔기제도(八旗制度)를 제정하는 등 제도를 정비하였다.

    후금의 성립은 명에 커다란 위협이 되어 마침내 명과 충돌하게 되었는데, 1618년에 명의 푸순[撫順]을 급습하여 취하고, 이어 칭허[淸河]를 공략하여 빼앗았다. 1619년에는 명과 일대 결전을 각오하여 진격, 푸순 관외의 살이호(薩爾滸)전투에서 명군 10만을 격멸하여 대승하였고, 1621년에는 랴오둥[遠東]을 공략하여 랴오허강[遼河] 이동 지역을 지배하였으며, 랴오양[遼陽]에 천도하였다가, 1625년에 다시 선양[瀋陽]으로 도읍을 옮겼다. 1626년에 명의 영원성(寧遠城)을 공격하였으나 명장 원숭환(袁崇煥)의 고수로 실패, 부상만 입고 후퇴하였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그 해 4월 몽고의 파림(巴林)부를 직접 공략하다가, 도중 9월에 병사하였다. 그가 확립한 기초 위에 그의 아들 홍타시가 더욱 세력을 확장하였고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고치고 연호를 숭덕(崇德)이라고 했다.

    [출처] 누르하치 [努爾哈赤(노이합적), Nurhachi ] | 네이버 백과사전

     

    토목의 변

     

    토목의 변(土木之變) 또는 토목보의 변(土木堡之變)은 명나라 정통제 14년(1449년)에 발생한 명나라와 몽골 부족을 통일한 오이라트와의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영종은 친정을 하다가 오이라트의 포로로 잡혀 중국 역사상 야전에서 포로로 잡힌 유일한 황제로 기록되었다.

     

    배경

    환관 왕진의 전횡과 더불어 명나라 초기의 안정적인 조정은 정통제 영종에 이르러 해이해지기 시작했고, 1449년에는 몽골계 부족인 오이라트(Oirāt)가 세력을 형성하고 무역의 확장을 위해 명과 교섭하였으나 여러 차례 결렬되었다.

    1406년 영락제는 몽골 부족들에게 조공무역을 허락하였는데, 마시(馬市)라는 형태로 교역을 하여 영종까지 관례화되었다. 명나라는 이들로부터 말과 가축 등 그 부산물을 수입하고, 비단 등의 의류와 식량 등을 수출하였다. 처음에는 50명 정도의 사절단 규모가 에센 때에 이르러 3,000명까지 늘어났고, 주변 위구르의 상인들까지 가세하여 무역량이 늘어나고 밀무역도 성행하였다.

    이에 심각한 문제를 겪던 명나라는 오이라트 부족에 대한 무역을 제한하였고 1448년 사례감 왕진은 실제 인원에 대한 조공무역만 허용했으며, 말 값도 오이라트가 제시한 가격의 20%만 지급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오이라트는 정통제 14년(1449년) 명나라 변방인 산시 성 다퉁(大同)으로 침입하였다.

    이에 환관 왕진(王振)은 영종에게 직접 친정(親征)을 간청했으나 이부상서와 병부상서는 친정을 만류했다. 하지만 영종은 왕진의 건의를 받아들여 오이라트족을 친정하고자 50만의 군대를 이끌고 북진했으나, 50만 명의 군사 중에는 문신(文臣), 귀족(貴族) 등 전쟁과 무관한 이들을 포함시켜 군대의 규모를 과시하였다.

    전투에서 비정예군이 오이라트족에게 대패하였음에도 여러 군신들의 말을 듣지 않은 채 왕진이 국정을 농단하였다. 이들의 패전소식은 북경(北京)조정에 큰 충격을 주었고, 남경(南京) 천도설이 나왔지만 병부시랑 우겸(于謙)이 "남쪽으로 도망하여 멸망한 송(宋,960 ~ 1279)의 예를 못 보았느냐며 북경은 천리이므로 사수하여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여 조정을 안정시켰다.

     

    결과

    한편 에센족은 명군의 수급로를 차단하고 연승하였으나 환관 왕진은 이 와중에도 신하들의 충고를 무시하는 등 전횡을 일삼다가 피살당하였으며, 결국 에센군은 토목보(土木堡)를 포위하여 명나라 황제 영종을 잡아갔다. 중국 역사상 외적과의 전쟁 중 황제가 포로로 잡혀 간 것은 명나라 영종이 처음이다. 이 사건을 토목의 변이라고 한다.

    황제를 포로로 잡아간 에센족은 전세의 유리함을 알고, 명과의 교섭을 시작하려 하였으나 북경 조정은 영종의 이복동생인 주기옥(朱祁鈺)을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니 대종 경태제(代宗 景泰帝)이다. 에센족은 포로로 잡은 영종이 협상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자 아무런 조건 없이 1450년에 명나라 조정에 송환했다. 하지만 이미 이복동생인 대종이 즉위하여 황제가 되었으므로 영종은 태상황(太上皇)이 되었으나 궁에 유폐되었다.

     

    참고

    영종 (명)

    분류: 명나라의 전쟁 | 몽골의 전쟁 | 북원 | 오이라트

     

    이성량

    이성량(李成梁, 1526년 - 1615년) 은 명나라의 무관이다. 요동총병(遼東總兵)으로서 요동(遼東) 일대를 통괄해, 여진족의 진무에 해당된다.

    자는 여계(如契). 일찍이 명나라로 건너간 조선인(조선으로부터 망명한 여진족이라는 설이 있지만 신빙성이 낮다.) 이영(李英)의 자손으로, 요동철령위(랴오닝 성 톄링)의 지휘첨사의 자리를 대대로 세습하고 있었지만, 융경 4년(1570년)에 요동총병이 되어, 당시 침입이 격렬했던 여진족에 대한 방어에 임하게 되었다. 이성량은 군비를 확충하면서, 건주여진, 해서여진 등에 나누어져 있던 여진족이 명과의 교역권을 둘러싸 싸우고 있는 것에 개입해 내부 분열을 도모한 것으로, 요동의 안정에 큰 공적을 올렸다. 이 시기, 이성량의 후원을 얻어 세력 확대에 성공한 것이 후의 청 태조 누르하치다.

    오랜 세월에 걸쳐 요동을 통괄해, 지방의 실력자로서 할거한 이성량은, 한편으로 군비의 유용 등 독직이나 전단이 많아, 만력 19년(1591년)에 탄핵되어 실직되었다. 잠시 복직했지만, 만력 36년(1608년)에 파면되었다.

    소생으로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과 싸운 이여송, 임진왜란과 사르후 전투에 참가한 이여백(李如柏) 등 9명의 자식이 있는데, 당시 사람들은 그들 일가를 이가구호장(李家九虎將)이라 불렀다 한다.

    분류: 1526년 태어남 | 1615년 죽음 | 명나라의 군인 | 한국계 중국인

     

    이여송

    이여송(李如松, 1549년 ~ 1598년)은 명나라 말기의 장수이다. 요동(遼東) 철령위(鐵嶺衛) 출생이다.

    명나라로 귀화한 조선인 출신의 명나라 요동총병관(遼東總兵官) 이성량(李成樑)의 아들이다. 이성량은 서자 출신이었는데 조선 사회의 서자에 대한 심한 차별을 견디지 못하고 명나라로 귀화하였다고 한다. 1592년 이여송은 닝샤(寧夏)에서 발배(틋拜)의 난이 일어났을 때 동정제독(東征提督)으로서 이를 평정하여 장수로서의 명성을 높였다. 이 장수는 항상 말을 타고 다니면서 한쪽 손에는 커다란 창을 항상 들고 다녔고, 임진왜란 때의 명나라 장수 대장이었다고 한다.

    1592년 조선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간쑤성(甘肅省) 영하(寧下)에서 반란을 평정하고 명나라의 제2차 원군으로 방해어왜총병관(防海禦倭總兵官)으로 부하 천만리(千萬里), 이여백(李如柏) 등과 4만 3천의 병력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에 들어왔다. 그러나 이여송은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조선을 도와주러 왔다는 원군이라는 명분하에 거들먹거리며 갖가지 횡포를 자행하면서 정작 일본군과 싸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런 태도에 분개한 유성룡(柳成龍)과 이항복(李恒福), 이덕형(李德馨)은 이여송에게 트집을 잡아 제대로 싸울 것을 재촉하였다.

    1593년 1월 드디어 남하하여 유성룡 등이 이끈 조선군과 합세하여 일본군을 대파하여 평양을 탈환하였다. 평양을 탈환하고 그 길로 남진하여 서울로 향하던 도중 벽제관(碧蹄館) 전투에서 매복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정예병에게 기습 공격을 당해 패한 후로는 기세가 꺾여 더 이상의 진격을 중지하고 후퇴하여 평양성을 거점으로 화의 교섭 위주의 소극적인 활동을 하다가 그 해 말에 철군하였다. 이때 조선 측에서 재차 공격을 하라고 했으나 이여송은 무시하며 듣지 않았다.

    1597년 요동총병관이 되었으나 이듬해 1598년 토번(土蕃)과의 전투 도중에 전사하였다.

    한편, 이여송은 조선에 주둔 중일 때 한 무명(無名)의 조선 여인을 통해 아들을 낳았는데 현재 경상남도 거제시에 그 후손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함께 보기

    진린

    분류: 1549년 태어남 | 1598년 죽음 | 명나라의 군인 | 육군 군인 | 임진왜란 관련자 | 한국계 중국인 | 전사한 사람

     

    홍타이지

    숭덕제(崇德帝, 1592년 11월 28일 ~ 1643년 9월 21일)는 청나라의 제2대 황제(재위 1626년 ~ 1643년)이다. 휘는 황태극(皇太極). 만주어로는 홍타이지(만주어: - Hong Taiji)라고 한다. 묘호는 태종(太宗)이다. 아바하이(阿巴海)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나 이는 만주식 연호인 '압카이 수러'가 서양에 잘못 알려져서 탄생한 별명이다. 부황인 천명제가 세운 후금을 이어받아 연호를 천총(天聰)이라 하다가 1636년 나라 이름을 청(淸)으로 바꾸고 연호 역시 숭덕(崇德)으로 바꾸었다. 시호는 응천흥국홍덕창무관온인성예효경민소정융도현공문황제(應天興國弘德彰武寬溫仁聖睿孝敬敏昭定隆道顯功文皇帝)이다.

    생애 및 치세1592년 11월 28일 만력 20년 애신각라 황태극은 엽혁나랍씨 소생으로, 누르하치의 여덟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누르하치의 차남 다이샨(代善, Daišan), 슈르하치의 차남 아민(阿敏, Amin), 누르하치의 5남 망굴타이(莽古爾泰, Manggūltai) 등과 함께 사대왕 중 한 사람으로 활약하여 버일러(貝勒)로 알려지게 되었다.

    1626년 천명 11년 영원성 전투에서 부상을 당한 누르하치가 죽자, 후계자로 지목되어 한(만주식 군주 칭호. 칸과 같은 의미이다.)의 보위에 올랐다.

    1627년 천총이라는 연호를 개원하였다. 즉위 당시 명나라와 교전 상태에 있어 주변 상황이 다소 어려웠으나 만주족과 한족과의 관계 등 국내의 융화를 꾀한 후 외정에 나섰다. 당시 조선 가도에 들어가 후방을 어지럽히는 모문룡과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적대적인 정책을 펼치고 있던 조선을 침입하여 정묘호란을 일으키고, 항복을 받아 후방의 안정을 꾀한다.

    1631년 차하르의 링단 칸에게 승리를 하였다. 1635년 천총 9년 주변의 여러 국가를 침공 및 정복하여 속국으로 삼았으며, 내몽골를 평정하여 링단 칸이 소유하고 있던 원나라의 전국 옥새(大元傳國 玉璽)를 손에 넣게 된다. 이것을 계기로 국호를 대청(大淸), 즉 청나라를 개국하였고, 연호를 다시 숭덕(崇德)으로 바꿨다.

    1636년 12월 여전히 적대 정책을 펼치는 조선을 침공하여 병자호란을 일으킴으로서 1월 30일 부로 전쟁을 끝내고, 조선의 항복을 받아냈다. 조선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치욕스런 항복을 하고, 명나라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한다.

    그 후 중국 본토를 노리며, 산해관을 공격하였으나 중원 제패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1643년 9월 21일 뇌출혈로 인하여 사망하였다. 재위기간 동안 내삼원(內三院)과 6부(六部), 군사 및 행정제도인 팔기군체제를 재정비하여 대청제국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사후 심양의 소릉(昭陵)에 안치되었다.

     

    가족

    황후

    효단문황후 박이제길특씨(孝端文皇后 博爾濟吉特氏 1600~1649)

     

    효장문황후 박이제길특씨(孝莊文皇后 博爾濟吉特氏 1613~1688)

    후궁

    민혜공화원비 박이제길특씨(敏惠恭和元妃 博爾濟吉特氏 1609~1641)

    의정대귀비 박이제길특씨(懿靖大貴妃 博爾濟吉特氏 ?~1674)

    강혜숙비 박이제길특씨(康惠淑妃 博爾濟吉特氏 ?~?)

    원비 뉴호록씨(元妃 鈕祜祿氏 ?~?)

    계비 오랍납라씨(繼妃 烏拉納喇氏 ?~?)

    측비 엽혁납라씨(側妃 葉赫納喇氏 ?~?)

    측비 찰로특 박이제길특씨(側妃 扎魯特 博爾濟吉特氏 ?~?)

    서비 납나씨(庶妃 納喇氏 ?~?)

    서비 기루씨(庶妃 奇壘氏 ?~?)

    서비 안찰씨(庶妃 顔扎氏 ?~?)

    서비 이이근각라씨(庶妃 伊爾根覺羅氏 ?~?)

     

    자녀들

    아들들

    장남 숙무친왕 호격(肅武親王 豪格 1609~1648) : 계비 오랍납라씨 生(철모자왕)

    차남 낙격(洛格 1611~1621) : 계비 오랍납라씨 生, 10세에 요절

    3남 낙박회(洛博會 1611~1617) : 원비 뉴호록씨 生, 6세에 요절

    4남 보국공 엽포서(輔國公 葉布舒 1616~1690) : 서비 안찰씨 生

    5남 승택유친왕 석새(承澤裕親王 碩塞 1628~1654) : 측비 엽혁납라씨 生(철모자왕)

    6남 진국각후공 고새(眞國慤厚公 高塞 1637~1670) : 서비 납나씨 生

    7남 보국공품급 상서(輔國公品級 常舒 1637~1699) : 서비 이이근각라씨 生

    8남(1637~1638) : 민혜공화원비 박이제길특씨 生, 1세에 요절

    9남 세조 복림(世祖 福臨 1638~1661) : 효장문황후 박이제길특씨 소생, 제3대 황제 세조 순치장황제(世祖 順治章皇帝)

    10남 보국공 도새(輔國公 韜塞 1639~1695) : 서비 生

    11남 양소친왕 박목박과이(襄昭親王 博穆博果爾 1641~1655) : 의정대귀비 박이제길특씨 生

     

    딸들

    장녀 고륜오한공주(固倫敖漢公主 1621~1654) : 계비 오랍납라씨 生

    차녀 고륜온장공주(固倫溫莊公主 1625~1663) : 효단문황후 박이제길특씨 生

    3녀 고륜정단공주(固倫靖端公主 1628~1686) : 효단문황후 박이제길특씨 生

    4녀 고륜옹목공주(固倫雍穆公主 1629~1678) : 효장문황후 박이제길특씨 生

    5녀 고륜숙혜공주(固倫淑慧公主 1632~1700) : 효장문황후 박이제길특씨 生

    6녀 고륜공주(固倫公主 1633~1649) : 측비 찰로특 박이제길특씨 生

    7녀 고륜단헌공주(固倫端獻公主 1633~1648) : 효장문황후 박이제길특씨 生

    8녀 고륜단정공주(固倫端貞公主 1634~1692) : 효단문황후 박이제길특씨 生

    9녀 공주(公主 1635~1652) : 측비 찰로특 박이제길특씨 生

    10녀 현군(縣君 1635~1661) : 서비 납나씨 生

    11녀 고륜단순공주(固倫端順公主 1636~1650) : 의정대귀비 박이제길특씨 生

    12녀 향군품급(鄕君品級 1637~1678) : 서비 生

    13녀 공주(公主 1638~1657) : 서비 납나씨 生

    14녀 화석각순장공주(和碩恪純公主 1641~1704) : 서비 기루씨 生

    양녀 화석공주(和碩公主 1615~1637)

    양녀 화석공주(和碩公主 1611~1648)

     

    주석

    바깥 링크

    원본 주소 ‘http://ko.wikipedia.org/wiki/%ED%99%8D%ED%83%80%EC%9D%B4%EC%A7%80’

    분류: 1592년 태어남 | 1643년 죽음 | 청나라의 황제

     

    태종 [太宗, 1592~1643]

    청(淸)나라의 제2대 황제(재위 1626∼1643). 내몽골을 평정하여 대원전국(大元傳國)의 옥새를 얻고 국호를 대청(大淸)이라 고쳤다. 문관 ·육부의 설치 등 조직정비에 힘썼고, 청나라의 기초 확립에 공적이 컸다.

    이름 홍타이지[皇太極]. 시호 문황제(文皇帝). 태조 누르하치[奴兒哈赤]의 여덟째 아들. 4대왕(四大王)의 한 사람인 두이치 베이레[四貝勒]라 불렸다. 너그럽고 어질며 도량이 커서 중망(衆望)을 얻고 있었으므로, 1626년 태조가 죽자 후금국(後金國)의 칸[汗]으로 즉위하고 이듬해 천총(天聰)이라 개원(改元)하였다. 즉위 당시에는 명(明)나라와 교전상태에 있었으므로 국사 다난하였으나, 만주인과 한인(漢人) 관계 등 국내의 융화를 꾀한 뒤 외정에 나섰다.

    1635년 내몽골을 평정하여 대원전국(大元傳國)의 옥새를 얻은 것을 계기로 국호를 대청(大淸)이라 고치고, 숭덕(崇德)이라 개원하였다. 1636년에는 명나라를 숭상하고 청나라에 복종하지 않는 조선을 침공하였으며, 중국 본토에도 종종 침입하였으나, 중국 진출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죽었다. 그는 문관(文館) ·육부(六部)의 설치 등 조직 정비에 힘썼고, 청나라의 기초 확립에 공적이 컸다. 선양[瀋陽] 북릉에 묻혔다.

    [출처] 태종 [太宗 ] | 네이버 백과사전

     

    효장문황후

    효장문황후 박이제길특씨(孝莊文皇后 博爾濟吉特氏, 1613년 3월 28일/음력 1613년 2월 8일-1688년 1월 27일/음력 1687년 12월 25일)는 청나라 태종(太宗) 홍타이지(皇太極)의 비이며, 순치제의 모후, 강희제의 조모이다. 이름은 포목포태[1](布木布泰). 존호는 소성자수공간안의장경돈혜온장강화인선홍정태황태후(昭聖慈壽恭簡安懿章慶敦惠溫莊康和仁宣弘靖太皇太后)이고, 시호는 효장인선성헌공의지덕순휘익천계성문황후(孝莊仁宣誠憲恭懿至德純徽翊天啓聖文皇后)이며 청나라 유일의 그리고 중국 최후의 태황태후(太皇太后)이다.

     

    생애

    1613년 몽고 과이심(科爾沁)에서, 과이심패륵 화석충친왕 채상(科爾沁貝勒 和碩忠親王 寨桑)의 막내손녀로 태어났다.

    1625년(천명 10년)에 누르하치(努爾哈赤)의 8번째 아들인 홍타이지의 처가 되었고, 1636년(숭덕 원년), 홍타이지가 연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황제를 칭하면서, 그녀는 영복궁 장비(永福宮 莊妃)에 봉해졌다.

    이후 아들 복림이 즉위하여 순치제가 되면서 황태후에 책봉되었다. 홍타이지 사후 순치제의 섭정이었던 도르곤과 재혼하였으나 소생은 없다. 그뒤 다시 손자 현엽이 즉위하여 강희제가 되면서 태황태후에 책봉되었다. 그녀는 이 기간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존호를 받으며 소성태황태후(昭聖太皇太后)로 불렸다. 1688년(강희 27년)에 76세를 일기로 사망하여, 시호는 효장문황후(孝莊文皇后)로 추존되었으며, 1723년(옹정 원년)에는 옹정제가 강희제의 유언대로 소릉(昭陵)에 묻히지 않고, 새로운 능인 소서릉(昭西陵)에 안장되었으며 지덕(至德)이라는 시호를 가상하였다. 그 후 건륭제는 위대한 업적을 칭송하기 위하여 순휘(純徽)라는 시호를 추가하였다.

    참고로 홍타이지의 정실 부인이자 황후인 효단문황후(孝端文皇后) 박이제길특씨 철철은 그녀의 고모이고, 홍타이지의 비(妃)인 민혜공화원비(敏惠恭和元妃) 박이제길특씨 해란주는 그녀의 친언니이다. 즉 남편인 홍타이지는 그녀의 고모부가 되기도 한다.

     

    자녀

    고륜옹목장공주 아도(固倫雍穆長公主 雅圖) (1629년~1678년) - 필이탑합이(弼爾塔哈爾)에게 하가.

    고륜숙혜장공주 아도(固倫淑慧長公主 阿圖) (1632년~1700년) - 색포등(色布騰)에게 하가.

    고륜단헌공주 숙철(固倫端獻公主 淑哲) (1633년~1648년) - 견길이격(堅吉爾格)에게 하가.

    애신각라 복림(愛新覺羅 福臨)(1638년~1661년?) - 숭덕제의 제9황자, 세조 순치장황제(世祖 順治章皇帝).

     

    중국의 드라마

    대청풍운

    숭덕제

    예친왕

    순치제

    주석

    ↑ 간혹 대옥아(大玉儿)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야사에서 전해지는 이름인지 실제 그녀의 이름인지 불분명하다.

    전임 효단문황후

    청나라의 황태후1646년 ~ 1688년1월 27일

    후임 효혜장황후

    분류: 1613년 태어남 | 1688년 죽음 | 청나라의 황후 | 보르지긴

     

    태황태후

    태황태후(太皇太后)는 현 황제의 조모뻘이며, 주로 선대 황제의 정실 부인이다. 궁중에서 가장 높은 여인이며, 황실의 위엄을 상징한다. 태황태후는 그다지 정치적 실권은 없었으나, 궁중에서 가장 배분이 높기 때문에 언제나 존중의 대상이 되었다.

    태황태후는 황제가 조모뻘임을 살필 때 실가(實家)의 항렬은 치지 아니하고 황통(皇統)만 치며, 반드시 전전 황제의 정실 부인이지도 않다.

    하지만 태황태후는 황태후처럼 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상당수의 태후들이 황태후대에 사망하는 경우가 많기에 장수해서 태황태후까지 되는 것은 매우 드물었다. 어떤 때에는 황실의 최고 어른으로서 수렴청정을 행하기도 하였다. 황제의 증조모, 즉 태황태후의 위는 태상황태후(太上皇太后)라고 불린다.

    한국에서는 조선시대에 대왕대비로 불리었다.

    유명한 태황태후

    고황후 여씨 : 전한 고조의 정비.

    효장문황후 : 청 태종의 측실.

    함께 보기

    황태후

    대왕대비

    분류: 칭호 | 왕족

     

    효단문황후

    효단문황후 박이제길특씨(孝端文皇后博尔吉济特氏, 1600년 5월 13일 ~ 1649년 5월 17일)는 홍타이지의 정후이다.

    생애

    본명은 철철(哲哲)이며, 1614년 5월 28일 홍타이지와 가례를 올렸고, 1636년에 황후로 책봉이 되었다. 그리고 훗날 홍타이지는 효단문황후의 조카인 포목포태(후의 효장문황후, 1625년 결혼)와 해란주(민혜공화원비, 1634년 결혼)와도 결혼을 하였다. 슬하에 3녀를 두었으며 홍타이지 사후 '모후황태후'(母后皇太后)에 봉해졌으며 나중에 '성모황태후'(聖母皇太后)에 봉해지게 된다. 순치 6년에 50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된다. 사후 효단정경인의철순자희장민보천협성문황후(孝端正敬仁懿哲純慈僖莊敏輔天協聖文皇后)라는 시호를 받았다.

    전임 효자고황후

    청나라의 황후1636년 ~ 1643년9월 21일

    후임 폐후 박이제길특씨

    전임-

    청나라의 황태후1643년9월 21일 ~ 1649년

    후임 효장문황후

    황후

    경효충공의황후

    부친

    천명제

    모친

    효열무황후

    묘호

    성종(成宗)

    시호

    무덕수원광업정공안민입정성경의황제

    (懋德修遠廣業定功安民立政誠敬義皇帝)[1]

    분류: 1600년 태어남 | 1649년 죽음 | 청나라의 황후 | 보르지긴

     

    도르곤

    예친왕(睿親王, 1612년 11월 17일 ~ 1650년 12월 31일)은 휘는 도르곤[2](중국어: 多爾袞 duō ěr gǔn[*] 둬얼군; 만주어: )으로 청나라 초기의 황족이자 섭정(1643년 - 1650년)이며 군인이다.

    도르곤은 누르하치의 14남이자 홍타이지의 이복 동생으로 예친왕(睿親王)의 직위에 있었다. 홍타이지 사후 황부섭정왕으로 봉해져 순치제의 섭정이 되었고, 청나라가 건국된 때부터 지도력을 발휘했다. 사후 황제로 추숭되었다. 추존된 묘호는 성종(成宗)이고 시호는 무덕수원광업정공안민입정성경의황제(懋德修遠廣業定功安民立政誠敬義皇帝)이다.

    생애도르곤의 어머니는 누르하치의 4번째 왕비였고 오랍나랍 씨 출신의 황후로, 누르하치가 죽을 때에는 순사를 명령받았다. 1626년 예친왕(睿親王)에 봉해졌다.[3] 홍타이지 치하에서 몽골의 차하르를 토벌하는 것으로 공적을 올려서 실력자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에서 조선을 정벌하는 데 기여하였다.

    순치제는 부황의 갑작스런 붕어로 제후회의에서 황제로 선출되었는데 그때 순치제의 나이 6세였다. 제후 회의는 순치제의 나이가 어려 정치를 제대로 할 수 없었기에 도르곤과 누르하치의 동생인 슈르하치의 6남 정친왕 지르하랑(濟爾哈朗)을 각각 좌우 섭정왕으로 삼아 정무를 대리케 하였다. 득히 순치제가 즉위하게 된 것은 숙부인 도르곤이 강력하게 추천한 덕분이었다.

    1643년 어린 순치제가 즉위하자 도르곤은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의 지위로 섭정을 하였다.[3]

    도르곤은 1644년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죽고 명이 멸망하자, 투항한 명의 장수 오삼계의 도움으로 산해관을 넘어 함께 이자성을 공격, 어부지리로 중국 대륙을 거의 통일하였고, 명의 수도 베이징에 들어가 자신들이 명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황조라고 선포하였다. 도르곤은 이자성을 체포하라 명령하였고, 이듬해인 1645년 이자성은 쫓기는 도중 살해당한다.

    도르곤은 1650년 12월 31일에 사냥 갔다가 급서했다. 그가 죽자 순치제는 그를 추숭하여 묘호를 성종(成宗) 의황제(義皇帝)로 추숭하였다.[3] 그러나 곧 도르곤에게 올려진 모든 묘호와 시호를 추탈하고 서인으로 삼아 부관참시하였다. 도르곤은 건륭제 때 복권되었으나 황제로 복권되지는 못하고 예충친왕(睿忠親王)의 시호를 받았으며, 태묘에 배향되었다.

    가계

    조부친 : 현조선황제 애신각라 탑극세(顯祖宣皇帝 愛新覺羅 塔克世)

    조모친 : 현조선황후 희탑랍씨(顯祖宣皇后 喜塔拉氏)

    부친 : 태조 고황제 애신각라 노이합적(太祖 高皇帝 애신각라 노이합적)

    모친 : 대복진 효열무황후 오랍나랍씨(大福晉 孝烈武皇后 烏拉那拉氏)

    이복형 : 태종 숭덕문황제 애신각라 황태극(太宗 崇德文皇帝 愛新覺羅 皇太極)

    조카 : 세조 순치장황제 애신각라 복림(世祖 順治章皇帝 愛新覺羅 福臨)

    부인 & 자녀들

    경효충공정궁원비 박이제길특씨(敬孝忠恭正宮元妃 博爾濟吉特氏 1611~1649), 시호는 경효충공의황후(敬孝忠恭義皇后)

    측복진 동가씨(佟佳氏) : 상서 몽아도(蒙阿圖)의 딸

    측복진 박이제길특씨(博爾濟吉特氏) : 이름 찰이망(紮爾莽) / 찰로특부 태길 근두이(紮魯特部 台吉 根杜爾)의 딸

    측복진 박이제길특씨(博爾濟吉特氏) : 과이심 태길 납포희서(拉布希西)의 딸

    측복진 박이제길특씨(博爾濟吉特氏) : 과이심 태길 색낙포(索諾布)의 딸, 원래 호격의 적복진이었다

    측복진 이씨(李氏 ?~1662) : 조선 종실 금림군 이개윤(錦林君 李愷胤)의 딸, 의순공주(義順公主)

    첩 공제특씨(公齊特氏) : 찰합이 태길 포연도(布延圖)의 딸

    첩 박이제길특씨(博爾濟吉特氏) : 태길 두사갈이탁농(杜思噶爾卓農)의 딸

    첩 제이막특씨(濟爾莫特氏) : 방도무(幇圖武)의 딸

    첩 이씨(李氏) : 조선 여인, 이세서(李世緖)의 딸, 도르곤의 외동딸을 낳았다.

    첩 오이고예(吳爾庫霓) : 과이심친왕 오극선(吳克善)의 노비, 도르곤 사후 순장됨

    주석

    ↑ 추존황제이다.

    ↑ 도르곤이란 말은 만주어로 곰(熊)이라는 뜻이라 한다.

    ↑ 가 나 다 [明亡清興六十年]攝政王多爾袞爭皇位案

    같이 보기

    대청풍운

    오삼계

    순치제

    숭덕제

    분류: 1612년 태어남 | 1650년 죽음 | 청나라의 황자 | 청나라의 군인 | 중국의 섭정 | 육군 군인 | 사형된 사람 | 청나라의 황제 | 추존왕

     

    도르곤 [多爾袞(다이곤), Dorgon, 1612~1650]

    청나라 초기의 황족. 베이징에 천도하였으며 중국 전토를 무력으로 평정하였다. 또한 한인(漢人)관료와의 타협 아래 청의 중국 지배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태조 누르하치[奴兒哈赤]의 14번째 아들. 태조에게 사랑받고, 태종 밑에서 중용되어 예친왕(睿親王)으로 봉해졌다. 태종이 죽고 순치제(順治帝)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정친왕(鄭親王)과 함께 보정왕(輔政王)으로서 섭정하였으나, 드디어는 정친왕을 누르고 실력자가 되어 정국(政局)을 담당하였다. 1644년에는 명장(明將) 오삼계(吳三桂)를 선도(先導)로 하여 베이징[北京]에 천도하였으며, 이어 중국 전토를 무력으로 평정하였다. 한편으로는, 한인관료(漢人官僚)와의 타협 아래 청의 중국 지배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이러한 공으로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으로 봉해졌으며, 죽은 뒤에는 의황제성종(義皇帝成宗)으로 추존(追尊)되었다.

    [출처] 도르곤 [多爾袞(다이곤), Dorgon ] | 네이버 백과사전

     

    순치제

    순치제(順治帝, 숭덕(崇德) 3년 음력 1월 30일 (1638년 3월 15일) ~ 순치(順治) 18년 음력 1월 7일 (1661년 2월 5일)?)는 청나라의 제3대 황제(재위 1643년 ~ 1661년)이다. 휘는 복림(福臨),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체천융운정통건극영예흠문현무대덕홍공지인순효장황제(體天隆運定統建極英睿欽文顯武大德弘功至仁純孝章皇帝), 연호는 순치(順治), 법명은 행치(行痴)이다. 만주어로는 이지슌 다산 한(Ijishūn Dasan Han)[1]이라 하고, 몽골어로는 아이비어 자사크 칸(Eyebeer Zasagch Khaan)[2]으로 불리기도 한다. 홍타이지의 9남으로 어머니는 그의 후궁이었던 효장문황후(孝莊文皇后)이다.

     

    생애

    1638년(숭덕 2년) 3월 15일에 성경(盛京) 고궁 영복궁(永福宮)에서 장비(莊妃) 박이제길특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복림은 학문을 좋아하고 불교에 심취하여 홍타이지의 사랑을 받았다. 복림이 학문에 열중하던 도중, 1643년(숭덕 8년) 8월 9일 홍타이지는 명나라로 출정하기 위해 대신들을 모아 연회를 베푼 후 갑작스럽게 52세의 나이로 급사하였다. 평소 아무런 질병을 앓지 않던 강골의 홍타이지는 생전에 어떠한 유서도 남기지 않아 조정이 매우 혼란스러워졌다. 당시 다음 황제를 정하기 위해 모든 친왕과 군왕, 패륵, 패자, 그리고 조정의 대소 신료가 모여서 회의를 가지고 이 중 가장 세력이 컸던 7인은 다음과 같다.

    예친왕 대선(禮親王 代善) - 누르하치의 차남, 홍타이지의 이복형.

    정친왕 지르하란(鄭親王 濟爾哈朗) - 누르하치의 아우 수르하치의 6남, 홍타이지의 사촌동생.

    예친왕 도르곤(睿親王 多爾袞) - 누르하치의 14남, 홍타이지의 이복동생.

    숙친왕 호격(肅親王 豪格) - 홍타이지의 장남.

    영군왕 아제격(英郡王 阿濟格) - 누르하치의 12남.

    예군왕 다탁(豫郡王 多鐸) - 누르하치의 15남.

    영군왕 아다리(潁郡王 阿達禮) - 대선의 손자, 샤하린(薩哈璘)의 장남.

    이 의정회의에서 각 친왕은 최연장자인 대선을 의장으로 만장일치로 정하고 서로 황제가 되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심지어는 자신에 수하로 있는 팔기군을 동원하여 무력시위를 벌이기도 하였으나 대선의 강력한 중재로 수포로 돌아갔다. 그 중 공이 많던 2인으로 좁혀졌는데 도르곤과 호격이다.[3] 두 사람 다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공이 컸으나 조정에서의 위치는 도르곤이 호격보다 위였다. 그러자 호격은 형제승계가 아닌 부자승계로 황제를 뽑아야 한다며 도르곤의 의견을 반박했다. 도르곤은 이에 부자승계에 동의하는 대신 9황자 복림이 황위에 오르고 또한 도르곤 자신과 호격을 지지하는 정친왕 지르하란을 각각 좌우 섭정왕으로 삼아서 정무를 보는 조건을 내걸었다.[3] 호격과 의정회의 의장 대선은 이에 동의하였고 뜻하지 않게 복림이 겨우 6세의 나이로 황위에 오르니 이가 청나라의 제3대 황제 세조 순치장황제(世祖 順治章皇帝)이다.

    그가 즉위하게 된 것은 숙부 도르곤이 강력하게 추천한 덕분이었다. 도르곤은 1644년(순치 원년)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죽고 명이 멸망하자, 투항한 명의 장수 오삼계의 도움으로 산해관을 넘어 함께 이자성을 공격, 어부지리로 중국 대륙을 거의 통일하였고, 명의 수도 북경에 들어가 자신들이 명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황조라고 선포하였다. 도르곤은 이자성을 추포하라 명령, 이듬해인 1645년(순치 2년) 이자성은 쫓기는 도중 살해당한다. 1650년 도르곤이 죽자 순치제는 비로소 청나라를 통치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치세에 독일인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이 대포 기술과 고딕 양식의 건축 기술을 들여와 북경에 고딕 양식의 성당을 지었다.

    순치제는 몽골 출신의 어머니 효장태후를 싫어하여 당시 역시 싫어하던 몽골 출신인 황후를 폐하고 새로운 황후 효혜장황후를 세웠는데, 그녀 역시 몽골 출신이었다. 그는 현비 동악씨라는 후궁을 총애하였는데, 그녀가 1660년(순치 17년)에 사망하자, 정치에 뜻을 잃었다. 얼마 안가 순치제는 그녀를 황후로 추시하였으나, 대신들은 국법에 어긋난다 하여 이에 강하게 반대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661년(순치 18년)에 황위를 황태자인 3황자 현엽에게 물려주고 24세 때 천연두로 붕어하였다 했는데, 일설에는 동악씨의 죽음과 동악씨의 황후 추서 반대에 순치제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자진해서 제위에서 물러난 뒤 오대산으로 출가를 했고, 1669년(강희 8년), 1707년(강희 46년), 1712년(강희 51년), 심지어는 손자인 옹정제 초기까지 살고 입적하였다고는 하나 분명하지는 않다.[출처 필요]

     

    가족

    황후

    폐후 박이제길특씨(廢后 博爾濟吉特氏 ?~?)

    효혜장황후 박이제길특씨(孝惠章皇后 博爾濟吉特氏 1641~1717)

    효강장황후 동가씨(孝康章皇后 佟佳氏 1640~1663) - 도통 동도라의 딸, 동국유의 누나.

    효헌단경황후 동악씨(孝獻端敬皇后 棟鄂氏 1639~1660)

     

    후궁

    정비 동악씨(貞妃 蕫鄂氏 ?~1661) : 세조 사후 순장

    숙혜비 박이제길특씨(淑惠妃 博爾濟吉特氏 ?~1713)

    공정비 박이제길특씨(恭靖妃 博爾濟吉特氏 ?~1689)

    단순비 박이제길특씨(端順妃 博爾濟吉特氏 ?~1709)

    영각비 동악씨(寧慤妃 蕫鄂氏 ?~1694)

    도비 박이제길특씨(悼妃 博爾濟吉特氏 ?~1658)

    각비 석씨(恪妃 石氏 ?~1667)

    서비 파씨(庶妃 巴氏)

    서비 진씨(庶妃 陳氏)

    서비 당씨(庶妃 唐氏)

    서비 뉴씨(庶妃 紐氏)

    서비 목극도씨(庶妃 穆克圖氏)

    서비 왕씨(庶妃 王氏)

    서비 양씨(庶妃 楊氏)

    서비 오소씨(庶妃 烏蘇氏)

    서비 납라씨(庶妃 拉喇氏)

     

    자녀들

    아들들

    장남 우뉴(牛鈕 1651~1652) : 서비 파씨 生, 2세에 요절

    차남 유헌친왕 복전(裕憲親王 福全 1653~1703) : 영각비 동악씨 生

    3남 성조 현엽(聖祖 玄燁 1654~1722) : 효강장황후 동가씨 소생, 제4대 천고일제 성조 강희인황제

    4남 영친왕(榮親王 1657~1658) : 효헌황후 동악씨 生, 3개월만에 요절

    5남 공친왕 상녕(恭親王 常寧 1657~1703) : 서비 진씨 生

    6남 기수(奇授 1659~1665) : 서비 당씨 生, 7세에 요절

    7남 순정친왕 융희(純靖親王 隆禧 1660~1679) : 서비 뉴씨 生, 19세에 요절

    8남 영간(永幹 1660~1667) : 서비 목극아씨 生, 7세에 사망

     

    딸들

    장녀(1652~1653) : 서비 진씨 生

    차녀 화석공각공주(和碩恭慤公主 1653~1685) : 서비 양씨 生

    3녀(1653~1658) : 서비 파씨 生, 16세에 요절

    4녀(1654~1661) : 서비 오소씨 生, 8세에 요절

    5녀(1654~1660) : 서비 왕씨 生

    6녀(1654~1661) : 서비 납라씨 生, 5세에 요절

    양녀 화석화순공주(和碩和順公主 1648~1691)

    양녀 화석유가공주(和碩柔嘉公主 1652~1674)

    양녀 고륜단민공주(固倫端敏公主 1653~1729)

    주석

    ↑ ᡳᠵᡳᠰᡥᡡᠨ ᡩᠠᠰᠠᠨ ᠾᠠᠨ로 쓴다.

    ↑ ᠨᠠᠢᠷᠠᠯᠲ ᠤᠺᠬᠠᠨᠨᠺ ᠺᠬᠠᠨᠨ로 쓴다.

    ↑ 가 나 염숭년. 청나라 12명의 황제의 진짜 모습(正說淸朝十二帝) (중국어) (HTML). 2008년 9월 18일에 확인.

    분류: 1638년 태어남 | 1669년 죽음 | 청나라의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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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희제

    강희제(康熙帝, 순치(順治) 11년 음력 3월 18일 (1654년 5월 4일) ~ 강희(康熙) 61년 음력 11월 13일 (1722년 12월 20일))는 청나라의 제4대 황제(재위 1661년 ~ 1722년)이자, 산해관 입관(入關)[주해 1] 이후 통일 황조[주해 2]로서의 두 번째 황제이기도 하다. [주해 3]

    성은 애신각라(愛新覺羅), 휘는 현엽(玄燁)[주해4] 또한 만주어로는 얼허 타이핀 한(Elhe Taifin Han)[주해5][주해6], 몽골어로는 엔크 암갈란 칸(Enkh Amgalan Khaan)[주해7][주해8]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묘호는 성조(聖祖), 시호는 합천홍운문무예철공검관유효경성신중화공덕대성인황제(合天弘運文武睿哲恭儉寬裕孝敬誠信中和功德大成仁皇帝, 한국어 한자음으로 듣기 (도움말·정보), 중국어로 듣기 (도움말·정보) ), 짧은 시호로는 인황제(仁皇帝)이다.[1] 연호는 강희(康熙)[주해 9]이다. 제3대 황제인 순치제(順治帝)의 셋째 아들이자 순치제의 후궁 출신인 효강장황후 동가씨(孝康章皇后 佟佳氏)의 소생으로서 자금성(紫禁城)에서 태어난 최초의 청나라 황제이다.

    1661년(순치 18년) 아버지가 죽자 8세의 어린 나이에 황제로 즉위하여 1722년(강희 61년)까지 61년간 재위함으로써 중국 역사상 가장 긴 재위기간을 가진 황제이다.[2] 즉위 초에는 어린 나이로 인해 병부상서 오배 등의 네 명의 보정대신들에게 국정을 일임하였다. 만주족의 예법에 따라 1667년(강희 6년), 14세에 친정을 시작하였으며 2년 뒤에 발생한 오배의 난을 평정하여 실질적으로 조정을 장악하였다. 이후에는 1673년(강희 12년)에 8년 동안 지속된 삼번의 난을 평정하고 이어 1683년(강희 22년)에 대만을 청나라에 복속시켰으며 북방의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만주와 연해주 쪽의 국경을 확정하였다. 한편 1696년(강희 35년)에는 청나라에 대항하던 몽골 오이라트로 친히 원정하여 준가르의 칸 가르단의 군사를 격파하여 북방을 안정되게 하였으며, 1721년(강희 60년)에는[가르단을 지원했던 티베트에 군대를 보내 정복함으로서 티베트를 청나라 영토에 편입시켰다. 이렇듯 강희제는 오배의 난과 삼번의 난과 같은 재위 전반기의 위기를 극복하고 대외 정책에서의 외교적, 정치적 성공을 거둠으로써 강력한 절대 황제권을 수립하였다.

    강희제는 단호한 외정과는 달리 내정에서는 선정을 베풀었는데 황하와 장강의 치수에 성공하여 농사에 차질이 없도록 하였으며 전란의 와중에도 세금을 줄이고 인두세 역시 영원히 동결하여 백성들의 노고를 덜어주었다. 한편으로는 《강희자전》, 《고금도서집성》 등 대규모 편찬사업을 벌여 당대의 문화발전과 현대 중국어 어법의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지배층인 만주족과 피지배층인 한족을 고루 등용하여 조정의 화목을 꾀하였다. 또한 중국 역대 황조 중 마지막 태평성대인 강건성세(康乾盛世)를 일으켜 아들인 옹정제(雍正帝), 손자인 건륭제(乾隆帝)까지 태평성대가 지속되었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자 명군, 즉 천고일제(千古一帝, 천 년에 한 번 나올 만한 황제) 또는 연호를 따서 강희대제(康熙大帝)로 칭송받으며 아직도 많은 중국인에게 크게 존경받는다.

    그는 당시 서양에서 역시 절대 왕정을 수립한 루이 14세, 러시아 근대화에 박차를 가한 표트르 1세 등 업적이 많은 유럽의 여러 군주들과 더불어 당시 아시아를 대표하는 통치자였다. 또한, 황후 4명 등 총 64명의 후비(后妃)와 잉첩(媵妾)을 거느려서 청나라의 역대 황제 중 가장 많은 후궁을 둔 황제이며 아들 35명과 딸 20명을 두어 중국 역대 황제 중 가장 많은 아들들을 둔 황제이기도 하다.

     

    생애

    초기 생애

    1654년(순치 11년) 5월 4일에 북경 자금성의 동쪽 후궁 동육궁 중 하나인 경인궁(景仁宮)에서 순치제의 후궁인 강비 동가씨에게서 태어났다.[1] 현엽은 강비 동가씨의 유일한 소생이라, 태어나면서부터 경인궁에서 어머니에게 금지옥엽처럼 키워졌다. 현엽은 어릴 때부터 학문에 남달라 책을 읽으면 바로 암송하고 그 뜻을 능히 꿰뚫어 즉시 풀이하였고 궁술에 뛰어나 말을 타면서 토끼를 바로 쏘아 맞히는 등 문무를 겸전하여 부황 순치제와 조모인 효장태후의 총애를 받았다.[주해10] 5살 때부터 제대로 황자들이 배우는 학문을 배우는데, 인시(寅時, 새벽 4시)에 일찍 일어나 부황과 조모 그리고 적모(嫡母)인 황후, 모비에게 문안을 올리고 진시(辰時, 아침 8시)에 나가 밤늦은 술시(戌時, 저녁 8시)까지 문연각에서 스승의 지도 아래 공부하였다.

     

    7살 때인 1660년(순치 17년)에 자신의 이복동생이자 순치제의 4남[주해 11]이 죽자 뒤이어 황태자 자리에 올랐으나 공식적으로 선포되지 않았다. 현엽이 황태자에 지명된 이유는 어머니 동가씨가 승은공 동도라의 딸로 개국공신 집안 출신이고 다른 후궁에 비해 품계가 가장 높은 황귀비(皇貴妃)이였으며[3] 당시 순치제의 황후였던 효혜장황후(孝惠章皇后)가 아들이 없자 총명한 현엽을 눈여겨보던 순치제는 그를 황태자로 삼은 것이다. 순치제는 억지로 혼인한 효혜장황후를 멀리하였고 오히려 궁녀 출신의 동악씨를 총애하여 현비(賢妃)로 삼아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가 사는 승건궁(承乾宮)을 찾았다.[4]

     

    그 해 11월에 자금성 안에 천연두가 퍼지고 현비 동악씨가 천연두에 걸리자 순치제가 총애하던 현엽을 동악씨의 양자로 주려 했으나, 효장태후와 생모인 동가씨가 황위 계승자인 현엽이 천연두에 옮을 것을 염려하였기에 이에 완강히 반대하여 실패하였다. 그러나 현엽이 갑자기 천연두에 걸려 사경을 헤맸으나 얼마 안 되어 다행히 나았다. 그리고 두 달 뒤인 1660년(순치 17년) 12월, 동악씨는 결국 차도가 보이지 않고 죽자 순치제는 즉시 동악씨를 효헌단경황후(孝獻端敬皇后)로 추서하고 태묘에 그 신주를

    모셨다. 그리하고 나서, 순치제는 이례적으로 자신이 총애하던 태감을 오대산에 있는 청량사(淸凉寺)에 보내어 동악씨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동악씨의 출신이 높은 귀족 집안이 아니고 또한 죽은 황자, 그것도 서출 출신의 황자가 이례적으로 황태자의 작위를 받고 그 어미는 황후에 봉하자 만주족과 한족 대신들의 반대가 매우 컸다. 반대가 심하자 순치제는 그에 대한 항의와 황태자였던 자신의 4남을 잃은 슬픔까지 겹쳐 1661년(순치 18년) 1월 하순,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제위에서 물러나 승려가 되려고 이미 자신의 태감이 있는 오대산 청량사로 출가하고 주지 옥림수(玉林秀)에게서 행치(行痴)라는 법명을 받았다.[주해12][5][6]

    당시 대신들은 순치제에게 빨리 돌아오라 종용하였으나 순치제는 끝내 듣지 않고 머리카락을 자르기까지 하였으나[5] 〈세조장황제실록〉에 따르면 순치제는 다시 황궁으로 돌아왔고 회궁 도중 천연두에 걸려 1661년(순치 18년) 2월 5일 24세의 나이로 붕어하여 황위가 유고 상태가 되었다. 당시 황태후이자 순치제의 어머니 효장태후는 순치제가 붕어하자 매우 놀라며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조정의 최고 신료인 영시위내대신(領侍衛內大臣) 6인[주해 13]과 각지의 친왕·군왕들을 불러들였다.[7] 그 중 미리 지어진 유조에 따라 조정의 수장인 정황기 출신의 감국대신 겸 이부상서 색니, 양황기 출신의 병부상서 오배, 정백기 출신의 형부상서 소극살합, 역시 양황기 출신의 호부상서 알필륭에게 일단 황궁을 봉쇄하고 궁인들에게 입단속을 하게 하였다.

     

    조정은 그 해 2월 7일에 순치제의 붕어를 공식 발표하였고, 국상을 준비하였다. 2월 17일에 효장태후는 순치제에게 세조(世祖)라는 묘호와 장황제(章皇帝)의 시호를 올리고 순치제의 시신을 효릉(孝陵)에 안장하였다. 뒤이어 순치제의 유조를 낭독하니 현엽을 황태자로 책봉하라 쓰여있었다. 유조의 내용은 이러하였다.

    “ 짐의 아들인 강비 동가씨 소생의 제3황자 현엽은 연치가 겨우 8살이나 그 용모가 단정하고 영민하니 이 나라 종묘사직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고로 현엽을 황태자에 책봉하여 다음 황제에 올리도록 하라. 27일 동안 상복을 입다가 그 뒤 옷을 대례복으로 갈아입고 즉위식을 치르도록 하라. 특히, 영시위내대신 색니, 소극살합, 알필륭, 오배는 조정의 원훈이자 개국공신으로 짐이 언제나 신뢰하던 대신들이니 충성을 다하여 신제를 보좌하고 정무를 처리하라. [8]

     

    이에 따라 8살의 황태자 현엽을 청나라의 새 황제로 추대하니 이가 청나라의 제4대 황제인 성조 강희인황제(聖祖 康熙仁皇帝)이다. 어머니 강비 동가씨를 황태후에, 당시 순치제의 황후였던 효혜장황후 역시 황태후로 격상하고, 조모인 효장태후는 태황태후로 격상하였으며 이듬해인 1662년에 연호가 순치(順治)에서 강희(康熙)로 바뀌었다. 이 새로 정한 연호인 강희의 ‘강’(康) 자는 안녕과 평화, ‘희’(熙) 자는 조화와 흥성을 뜻하므로, 강희는 바로 평화로운 조화를 뜻한다.[9]

    만약 효장태후가 빨리 영시위내대신을 부르지 않고 수수방관하였다면, 황궁에 보위를 놓고 쟁탈전이 일어났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효장태후는 이를 신속히 대처하고 황태자 현엽을 제위에 올려 화를 막을 수 있었다. 황위에 오를 당시 정치적으로 매우 급변적이던 상황과 8살이라는 정치를 하기에는 너무나도 어린 나이가 악재로 작용하여 제왕학 수업도 제대로 받지 않은 채 즉위하였으나 자신이 평생 황제로 살아야 할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틈틈이 제왕학 수업을 지속하면서 일찍 정치를 깨닫기 시작하였다.1662년(강희 원년)에 중국 서남부 운남으로 쫓겨가 겨우 명맥만 유지한 남명(南明)의 황제 영력제가 청군과 평서왕 오삼계에게 처참히 죽임을 당해 명나라의 황통을 이어받아 청나라에 비협조적인 여러 한족에게 은밀히 지지받던 남명은 명나라 멸망 후 18년 만에 이렇게 멸망하였다.

     

    친정과 오배의 난

    강희제는 8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기 때문에 아직 친정은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보정대신들이 그를 보필하였다. 본래 어린 황제가 즉위하였으면 황태후나 태황태후가 수렴청정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이미 황태후였던 자화황태후(慈和皇太后), 즉 강희제의 생모인 효강장황후 동가씨는 강희제가 등극한 지 얼마 안 되어 병에 걸리고 2년 만인 1663년(강희 2년)에 24세의 나이로 요절한다. 다른 황태후이며 강희제의 적모인 인헌황태후(仁憲皇太后), 즉 순치제의 황후인 효혜장황후는 황태후 서열로는 효강장황후보다 위였으나 엄연히 위에 시어머니인 효장태황태후가 있어서 수렴청정할 권한은 쥘 수 없었다. 대신들 사이에서 수렴청정할 것이라 예상하던 효장태황태후는 수렴청정을 직접 하는 대신 네 명의 보정대신들에게 정책 최고 의결권을 내렸다.[9]

     

    보정대신들은 어린 황제가 훗날 환관들에게 농락될까 봐 순치제 때 설치된 명나라의 동창(東廠, 환관의 수뇌부이며 황제 직속 정보기관)과 비슷한 기구인 십삼아문(十三衙門)을 폐지하여[주해14] 환관들을 정무에서 축출하고 원래 순치제 때 폐지된 내무부를 다시 설치하여 황제에게 충성스러운 만주족 충복들로 하여금 환관들을 대신하게 하였다.[10] 보정대신은 모두 꽤 상당한 권력을 누렸으나, 그중에서도 병부상서 오배가 제일 권력이 막강하였다. 오배는 백성들의 땅을 불법으로 획책하는 등 갖은 전횡을 일삼았다. 하지만 병권을 틀어쥐고 있어서 아직 친정의 권한이 없는 강희제와 오배의 세력에 비하여 매우 미약한 대신들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주해15] 일단 강희제는 오배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일부러 장정들을 불러 몽골 씨름을 하도록 하였다. 또한, 틈틈이 제왕학 수업을 잊지 않고 배웠다. 강희제의 그 스승이 바로 명나라의 마지막 진사시(進士試)에서 장원을 한 제세(濟世)였다.

     

    강희제는 오배를 견제하기 위해 또 다른 보정대신인 색니의 손녀를 황후로 맞아들이기도 하였다. 그녀가 바로 강희제의 정궁황후이며 첫 번째 황후인 효성인황후(孝誠仁皇后) 혁사리씨다.[11] 1667년(강희 6년) 7월 조상의 예법에 따라 14살이 된 강희제는 친정을 시작하였고 성인 의례와 함께 정식 즉위식을 치렀으나, 그 해에 자신을 보호해준 색니가 소극살합에게 강희제를 돌봐 달라는 말을 남기고 죽는다. 소극살합이 권력을 잡으려 하였으나 이에 위기감을 느낀 오배는 소극살합에게 날조된 역모죄를 뒤집어씌워 교수시키고 자신이 조정의 전권을 장악하였다.[12] 오배는 소극살합을 죽이는 과정에서 이에 반대하는 강희제를 강압하여 결국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강희제는 아직 오배의 세력에 대응할 수 없어 굴복하고 말았다. 오배의 이러한 행동은 분명 군주 기만죄(기군죄)였으나 아직 힘이 약한 강희제는 그를 그냥 내버려 두었다. 다른 보정대신인 알필륭은 오배의 편에 붙었으나 오배의 전횡을 부추기지도 그렇다고 비난하지도 않았다.[13]

     

    선황 순치제의 유조를 받은 고명대신 중 한 명인 소극살합을 죽이고도 계속 더 많은 횡포를 일삼는 오배를 보고 강희제는 군사를 이끌고 선수를 치려했다. 그러나 조모인 효장태황태후가 이를 말리고 사태를 지켜보라 일렀다.[12] [14]하루는 소극살합을 죽인 오배가 병을 핑계로 두문불출하는데 강희제가 문병을 갔다. 오배는 강희제에게 위문을 받은 뒤 다시 자리에 누우려 할 때, 그의 품속에서 단도가 발견되었다. 강희제는 만주족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단도를 찬 것은 조상들로부터 내려온 전통이라며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었으나, 분명 오배가 선수를 틈타 자신을 죽이려 한 것을 안 강희제는 치밀하게 오배를 제거하기 위한 작전을 본격적으로 세웠다.[15]

    강희제는 색니의 아들 색액도 등을 규합하여 무술 수련을 한다는 명목으로 선복영이라는 이름의 친위병을 양성하였다. 1669년(강희 8년) 5월 16일 오배가 궁정에 알현하러 오자 강희제는 기회를 틈타 선복영을 앞세워 오배를 체포하였다.[16] 강희제는 오배가 군주 기만죄인 기군죄 등 30개의 대죄로 30번 처형되어야 마땅하지만 선황인 태종과 세조를 전투에서 온몸으로 막은 공을 참작하여 가산을 적몰하고 목숨만 보전하게 하고 유배형을 내렸다.[15] 그러나 언제 다시 반기를 들지 모른다는 여러 대신들의 주장으로 귀양을 보내기도 전에 결국 사약을 받아 처형되었다. 강희제는 오배의 죽음으로 뒤숭숭한 조정에 색니의 차남 색액도(索額圖)를 대신으로 삼아 조정을 안정시켰다. 이로써 강희제는 진정한 친정을 하게 되었으며, 신하들에게 막중한 권한을 맡기지 않고 강력한 황권을 확립하기에 이른다.[17]

     

    삼번의 난

    오배를 축출한 이후, 강희제는 오배보다 더 큰 세력인 삼번(三藩)을 염려하기 시작하였다.[18] 원래 번(藩)은 청나라의 특수 행정구역으로 주로 변방에 설치되었는데[19], 그중에서도 삼번은 남명에 대비한 것으로 운남, 귀주 지역을 담당한 평서왕의 오삼계(吳三桂), 광동의 평남왕(平南王) 상가희(尙可喜), 복건의 정남왕(靖南王) 경중명(耿仲明)이 관할하였다.[20] 이들은 모두 한족 출신이었으나, 순치제 때 청나라의 중국 통일을 크게 도와 번왕에 책봉됨과 동시에 막강한 군사권과 남해에서 다른 나라들과의 무역으로 엄청난 돈을 축적하고 있었다.[21] 강희제가 친정을 시작할 무렵 정남왕의 직위는 경중명의 손자 경정충(耿精忠)이 승계하였다. 강희제 즉위 무렵에는 이미 남명이 멸망하고 반청 세력이 일소된 상황이었으나 삼번은 여전히 막강한 세력을 유지하고 자신이 다스리는 지방에서의 행정권, 사법권까지 모두 가지고 있었다.[22] 삼번이 사실상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자 중앙집권제를 강화하려는 청 왕조와의 대결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23] 특히, 오삼계는 삼번왕 가운데 품계가 가장 높았고 홍타이지의 막내딸이자 강희제의 막내 고모인 화석건녕공주를 며느리로 둔 황실 인척이어서 쉽게 통제할 수도 없는 위치에 있었다. 또한 조정이 걷은 세금 가운데 백은 2천만냥이 오삼계에게 제공되었는데 이는 국가 총 수입의 절반이 넘는 양이었기 때문에 중앙정부의 재정 약화를 가져오는 원인이 되었다.[21]

     

    평남왕 상가희는 아들 상지신과 불화를 겪자 고향인 요동으로 돌아가고자 은퇴를 요청하며 자신의 작위를 아들에게 물려달라고 상소하였다. 청 왕조는 은퇴는 허락하되 작위의 세습은 불허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스스로를 독자적 정치세력으로 여기고 있던 삼번의 왕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오삼계와 경중명은 청왕조의 진의를 확인하기 위해 모두 은퇴를 요청하였다. 청 왕조는 이들이 모반을 일이키려한다고 판단하여 대책을 논의 하였다. 강희제는 철번을 승인하여도 모반할 것이고 불허하여도 모반할 것이라면 일찌감치 모반을 확인하는 것이 좋다는 이유로 삼번의 철번을 명하였다. 강희 12년(1673년) 7월 철번의 명이 내려지자 오삼계 등은 모반을 결정하였거 그 해 11월 오삼계는 명나라의 갑옷을 입고 영력제의 능에서 반청복명(反靑復明)을 이유로 거병하였다. 그러나, 영력제를 죽인 사람이 다름 아닌 오삼계 자신이었기 때문에 모반의 명분은 공감을 얻지 못하여 명나라 왕족을 옹위하지는 못하였다. [24] 삼번의 난이 일어나자 화중 이남은 물론이고 섬서 몽골 등 여러 지역의 반청세력이 가담하여 전란이 확대되었다. 삼번의 난은 9년 동안 계속 되었다.[23]

     

    강희제는 오삼계에게 조정에 진출해 있던 오삼계의 장남이자 평서왕세자 오응웅을 건네줄 테니 회군하라 권유하였으나 삼번 연합군은 이를 듣지 않고 계속 진군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에 오응웅과 그 아들 오세림은 체포되어 참수되었다. 한편, 평남왕 상가희는 오삼계의 호응 요청을 거절하고 이를 강희제에게 알려 자신의 결백함을 입증하고자 했으나, 이에 반발한 아들 상지신이 상가희를 연금시키고 오삼계와 합류하였다.[25]

     

    평서친왕 오삼계3개월 내에 삼번 연합군은 중국 남부를 거의 점령하였고, 지금의 섬서성과 하남성까지 진군하였다. 섬서와 하남 지역을 지키는 녹영의 장군들은 거의 삼번에게 협조적이어서 삼번 연합군의 진군에 큰 저항은 없었다.[주해 16][24] 그 군세가 엄청나 몽골의 칸들이 반역자인 오삼계에 대항하기 위해 지원을 해주겠다 하였으나 강희제는 이를 거절하고 자신의 힘으로 국난을 헤쳐가려 하였다. 그러나 오삼계는 돌연 북경으로 향하는 군사들의 진군 속도를 늦춘다. 청나라 조정의 군사를 너무 만만히 봐서 거만해졌기 때문이다.

     

    당시 섬서성, 감숙성을 관장하던 제독인 왕보신은 오삼계의 삼번 연합군을 잘 막았으나, 오삼계를 물리쳤다는 자신을 역시 너무 과신하여 조정에 반대하고 독자 세력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뒤이어 양기륭(楊起隆)이란 사람이 자신을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셋째 아들인 주자형(朱慈炯), 즉 주삼태자(朱三太子)로 자칭하고 사람을 모아 북경을 몰래 기습하였고 강희제는 효장태황태후를 모시고 옛 수도 성경(盛京)으로 도망가려 하였다. 그러나 양기륭이 북경에 쳐들어올 것이란 정보를 알아챈 청군이 양기륭의 군대를 기습 공격하여 와해하였다. 삼번의 난 역시 곧 시간이 갈수록 물자가 많은 조정에 유리해져 갔고, 곳곳에서 도해(圖海)·주배공(周培功) 등 훌륭한 장수들과 팔기군의 활약으로 나태해진 삼번의 군사들을 대파할 수 있었다. 강희제는 삼번의 군사들을 물리치는 데 한족 장수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이들 한족 장수들은 만주족이 잘 모르는 삼번의 약점들을 잘 알아 더욱 손쉽게 격파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1676년(강희 15년) 상가희의 아들 상지신은 겁을 먹고 자살하고 경정충이 관군에 항복하였다. 그러나 경정충은 곧 청군에게 끌려와 1681년(강희 20년)에 반역에 공모한 죄로 사형당한다.

     

    1678년(강희 17년)에 삼번의 맹주 오삼계는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주(周), 연호를 소무(昭武)라고 하였으나 노환으로 그 해 8월에 죽었다. [26] 이로 말미암아, 오삼계군의 군세는 크게 약해졌고, 1681년(강희 20년)에 오삼계의 손자이자 오씨의 주나라, 즉 오주(吳周)의 두 번째 황제인 오세번이 곤명(昆明)에서 자살을 하고 청군이 곤명을 함락시킴으로써 9년에 걸친 삼번의 난은 끝이 났다.[27] 이 반란 이후에 강희제는 번 제도 자체를 폐지하고 친왕들과 군왕들에게 최소한의 사병만을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녹영이나 팔기군에 배속시켜 친왕들의 군 지휘권을 거의 뺏어 버렸다. 이 반란은 강희제의 황권과 군 통수권을 더욱 강화하였다.[28]

     

    한편, 청나라는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지는 않았으나 역대 중국 왕조와 같이 사대관계에 의해 번국에 준하여 대하였고[19], 삼번의 난이 일어나자 조선의 북벌론을 문제삼으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숙종은 청나라를 안심시키기 위해 남인 정권을 물리치고 대표적인 북벌론자 윤휴를 처형하는 고육책을 써야 했다.[29] 삼번의 난 중에 조선은 큰 기근이 들었는데 강희제는 1671년(강희 10년, 현종 12년) 조선에서 온 동지사 복선군 이남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였다.[30]

     

    “ 너희 나라 백성이 빈궁하여 살아갈 길이 없어서 다 굶어 죽게 되었는데 이것은 신하가 강한 소치라고 한다. 돌아가서 이 말을 국왕에게 전하도록 하라.[31][주해 17] ”

    흔히 군약신강(君弱臣强)이라고 하는 이 말은 당시 조선의 왕권이 약하고 신권이 크다하여 청나라가 조선을 비웃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대만 복속

    배로 순행 길에 오른 강희제삼번의 난을 끝으로, 중국 본토는 일단 잠잠해졌다. 그러나 오직 대만, 팽호 제도, 금문, 하문 등 동남 36개 섬들이 아직 청나라의 소속이 아니고 대만 호족인 정성공이 통치하고 있었다. 정성공은 남명의 융무제에게서 연평군왕(延平郡王)의 작위를 받고 명나라의 황실 성씨인 주(朱)씨의 성을 하사받고 국성야(國姓爺)로 불렸다.[32] 1662년(강희 원년)에 정성공이 사망하자 장남인 정경이 뒤를 이어 지배하고 있었다. 대만 군사들은 삼번의 난 때부터 때때로 본토로 쳐들어와 해안가 마을을 약탈하고 백성들을 죽이는 등 피해가 났다.[33] 청나라 수군이 여러 차례 대만 수군과 해전에서 싸웠으나 바다에서 노련하고 네덜란드의 기술을 받아들였으며 함선까지 빠른 대만 수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였다.

     

    한편, 대만에서 네덜란드를 몰아내고 정씨 왕조가 들어서자 청나라를 등진 많은 사람들이 대만으로 건너갔다. 대만은 땅이 비옥하고 물산이 풍부하여 많은 사람들을 받아들일 여력을 갖고 있었다. 강희제는 대만의 반란을 우려하여 대만과 가까운 광동, 복건, 강소, 절강 등 동남 4성의 주민들을 해안에서 30리 이상 떨어진 곳으로 옮기며 동남 4성과 대만의 무역을 금지하는 해상 금지령을 선포하여 대만을 고립시켰다. 하지만, 이 해상 금지령도 청나라 쪽에 피해가 컸다. 당시 해안가 주민들은 대만과 무역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해안가 주민들을 내륙으로 옮길 때, 이들의 불만을 컸으나 강희제는 특별히 이들에게 세금을 3년간 전부 면제하고 내륙에서 살 돈까지 줘서 무마시킬 수 있었다.

     

    대만은 원래 정성공 사망 이후부터, 정경을 비롯한 정성공의 친족들이 후계자 쟁탈로 사정이 매우 피폐해져 있었다. 이 사이에 정경은 사망하고 그의 아들들인 정극장(鄭克藏)과 정극상(鄭克塽)이 연평군왕 자리를 놓고 싸워 결국 정극상이 왕위에 올랐다. 강희제는 과거 정경의 부하였던 시랑(施琅)을 수군 총제독으로, 중국 동남부와 대만 쪽 전문가인 요계성(姚啓聖)을 병부상서급의 권한을 가진 복건, 절강 총독으로 삼아 대만을 점령할 작전을 세웠다. 강희제는 잘 훈련된 팔기 수군과 서양 선교사로부터 자문을 구해 만든 최신식 대포를 동원하여, 대대적으로 대만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청군의 대대적인 공격과 그에 따른 대만 상륙에 결국 정극상은 1683년(강희 22년) 7월에 변발과 호복 차림으로 청에 항복하여 강희제는 진정한 중국 통일을 달성하였다.[34] 강희제는 대만의 민심을 의식하여 관용을 배풀어 이들을 반란 세력이 아닌 과거 왕조에 대해 충절을 바친 것으로 규정하여 정극상을 한군공(漢軍公)에 봉하는 한편[35], 정성공에게 충절이란 시호를 내렸다.[36]

     

    러시아와의 갈등

    러시아의 차르 표트르 1세1680년대에 러시아 제국은 로마노프 왕조가 지배하고 있었다. 또한 강희제가 러시아와의 갈등이 있던 당시는 러시아의 근대화와 최전성기를 이루어낸 표트르 1세의 초기 시대였다.[37] 이미 이전부터 러시아는 군대를 동원하여 만주로 내려왔다. 과거 순치제 때 러시아와의 국지적인 전쟁으로 청나라는 러시아와 국경을 마주한 조선에 러시아와 싸울 군사를 요청하였다. 조선은 1654년(순치 11년)과 1658년(순치 15년)에 군사를 두 번 파병하여 러시아군과 싸웠는데, 이것이 조선의 나선 정벌이다.[38]

     

    그로부터 30여 년 뒤, 러시아는 표트르 1세가 강력한 개화 정책 아래 근대식으로 바뀐 군대로 계속 청나라의 동북쪽을 침략하였고 일부는 북만주에 주둔한다. 러시아인들은 시베리아와 만주의 토착민에 대해 약탈과 부녀자 강간, 살인을 일삼곤 하였는데, 러시아 측에서는 이를 주변 야만인과의 싸움으로 여겼고[39], 청나라의 북만주 주민들은 이러한 러시아인들을 생사람을 잡아먹는 나찰이라 불렀다.[40] 강희제는 이에 분노하여 러시아에 사과를 요구하였으나 러시아는 그에게 선물을 보내고[주해 18] 통상 자유의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러시아가 계속 송화강까지 세력을 넓히려 하자, 강희제는 먼저 국경에 애혼성(愛琿城, 아이훈 성)을 쌓았으나 계속 러시아가 야욕을 드러내자 그에 강경책을 써서 러시아의 국경 요새인 아르바진을 공격하였다. 아르바진을 점령하였으나 러시아군은 물러나지 않고 뺏긴 아르바진 요새를 수복하려 하였다.[39]

    그리하여 청군과 러시아군이 흑룡강 부근에서 국지적으로 싸우고 휴전하기를 반복한 뒤에, 1689년(강희 28년)에 강희제는 영시위내대신이자 자신의 처숙(妻叔)인 색액도를 흠차대신으로 명하여 러시아와 협상을 보게 하였다. 러시아와 청나라 대표가 네르친스크에서 만나 헤이룽강의 지류인 고르비트사 강과 스타노보이 산맥을 청나라와 러시아의 국경으로 확정 지으니, 이것이 네르친스크 조약이다. 이 조약은 중국사 이래 처음으로 국가간의 평등한 위치에서 맺은 조약으로서 당시 동양 국가들이 맺는 대국-소국 간의 조약과는 다른 유럽식 조약이었다.[41] 여기서 청나라의 제안이 대부분 수용되어 청나라는 동북쪽의 넓은 영토를 얻게 되었다. 또한, 청나라와 러시아 간의 무역에도 자유를 보장하였으나, 러시아에는 그다지 득을 볼 만한 조항은 많지 않아 훗날 함풍제의 치세 때, 러시아가 애로호 전쟁에서 청나라의 원조를 빌미로 만주와 연해주의 많은 땅을 도로 가져가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39]

     

    몽골과 티베트 원정

    강희제의 시대에 늘어난 청나라의 영토몽골 초원은 홍타이지 이후 청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나, 조공을 올리고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이미 1675년(강희 14년) 차하르 부족이 당시 삼번의 난으로 청나라에 생긴 혼란을 틈타 중원으로 쳐들어왔다. 이에 노한 강희제는 몽골을 내몽골과 외몽골로 나누어서 부족 간의 규합을 막으려 하였다.[42]

     

    몽골이 청나라에 복속된 지 수십 년이 지나고, 몽골의 여러 부족 중 일부는 절대 복종하고 일부는 표면적으로나마 청나라에 충성을 바쳤다. 그러나 그중 몽골의 한 부족인 오이라트 부족에 뿌리를 둔 초로스 칸가 출신의 준가르 부족의 칸인 가르단이 세력을 모아 몽골과 티베트를 통일하여 라마 제국을 건설할 포부를 품고 청나라에 대항할 조짐을 보였다. 이미 가르단은 1677년(강희 16년) 오이라트 부족을 통합하고 1682년(강희 21년)에는 타림 분지까지 점령하였다. 그런 다음 이들은 동투르키스탄을 점령하였고 이제 청나라가 다스리는 중원을 노렸다.[43] 준가르는 자신들이 군사를 일으킨 명분으로 옛 원나라의 대칸은 만주인이 아닌 몽골인으로 옹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준가르는 청나라를 견제한 러시아와 티베트에 원조를 받기도 하였는데 심지어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는 가르단에게 보슈그투 칸, 즉 대칸의 직함을 내렸다.

    40대의 강희제또한 1688년(강희 27년), 준가르는 몽골 초원의 다른 부족인 할하 부족의 땅을 점령하고 거의 모든 부족민을 죽였다. 살아남은 할하족은 고비 사막을 넘어 강희제에게 군사적 원조를 요청하였다. 준가르의 군사들이 청나라의 영토를 침략하자, 1690년(강희 29년) 7월 강희제는 자신의 이복형이자 순치제의 차남 유친왕 복전(裕親王 福全)과 이복동생이며 순치제의 5남 공친왕 상녕(恭親王 常寧) 등을 대동하고 친히 팔기군을 이끌고 몽골로 원정길에 올랐다.[44] 이것은 명나라의 영락제 이후 황제가 최초로 친히 고비 사막을 넘어 몽골 원정을 감행한 원정이며 중국 역사상 황제가 군사를 이끌고 나간 마지막 친정이었다. 이 원정에서 강희제는 할하족의 공식적인 합병 서약과 충성 서약을 받았다. 강희제는 몽골의 복속에 매우 만족하여 "옛날의 진은 돌과 흙으로 만리장성을 쌓았지만 짐은 객이객에게 은혜를 배풀어 그보다 더 견고한 성을 쌓았다"고 말했다.[45]

     

    뒤이어 청군은 준가르군과 내몽골에서 맞붙었으나 전염병과 계속되는 패배로 사령관이었던 이복 형제들에게 책임을 묻고 군사를 물려 북경으로 환도하였다. 강희제 자신도 전염병에 걸려서 한동안 고생하였다. 그러나 1696년(강희 35년)에 강희제는 8만의 팔기군 군사를 이끌고 몽골로 진입, 차오모도 전투에서 준가르군과 싸워 대승하였다. 패한 가르단은 이듬해인 1697년(강희 36년)에 알타이 산맥 기슭에서 음독자살하였다.[46][47]

    강희제 치세 후기인 1712년(강희 51년), 강희제는 준가르 부족을 견제하기 위해 남러시아에서 살던 투르쿠트 족에 사절을 보냈다. 이러한 강희제의 강한 견제에도 준가르 부족은 여전히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며, 1717년(강희 56년)에 준가르 부족의 신임 칸이자 가르단의 조카 체왕 아랍단은 6천 명의 적은 군사를 이끌고 과거 동맹이었던 티베트를 점령하였다. 준가르군은 수장 달라이 라마라 칭하던 티베트의 왕 랍장을 폐위시킨 뒤 살해하였고 1718년(강희 57년)에 청군을 격파하였다. [46]

    준가르군은 여전히 그 세력이 막강하였으나 1720년(강희 59년)에 강희제가 보낸 팔기군의 대대적인 원정에 준가르군은 결국 패퇴하였고 티베트에 원정 온 체왕 아랍단은 몽골로 돌아가 은둔하였다. 그 이듬해인 1721년(강희 60년)에 청군은 켈장 갸초를 모시고 와서 제7대 달라이 라마로 만들고 티베트를 청나라의 영토에 정식 편입시켜 티베트는 안정되었다.[48] 하지만, 준가르 세력은 청군의 티베트 원정 이후 결정타를 맞았으나 완전히 멸하지는 않았다. 강희제의 손자인 건륭제 때에야 위구르와 함께 청군에게 항복하여 그 세력이 완전히 와해되었다.[49]

     

    팔기군 개편과 군사 정책

    갑옷을 입은 강희제이미 팔기군에 관한 정책은 조부인 숭덕제가 만주족 팔기군, 한족 팔기군, 몽골족 팔기군으로 나누고 아버지 순치제 때 비로소 완성이 되어 있었으나, 강희제를 이를 다시 개편하였다.[50] 당시 팔기군 아래에 녹영(綠營)이라는 군단이 있었는데 이 휘하에 삼번의 난 때 활약한 주배공이나 대만 수복 때 정씨 휘하 군사들을 대파한 시랑 등 한족 장군들이 바로 여기에 속하였다.[51] 강희제는 이들 녹영을 팔기군이나 황제 직속 부대의 예하로 편제하여 한족에 대한 만주족의 지배를 강화하면서 동시에 한족을 포용하는 방식을 택하였다.[50]

     

    강희제는 전통적인 팔기군 체계에 엄격한 규율을 적용하는데 만약 장군이 병사들과 같이 돌아오지 않으면 장군을 참하고, 병졸이 자신의 부대와 같이 돌아오지 않으면 그 병졸 역시 참하도록 명하였다. 강희제는 장병이 모두 일심동체라 생각하여 책임 역시 같이 져야 한다 생각하였고 이런 엄격한 규율 덕분에 강희 시대의 팔기군은 후대인 옹정, 건륭 시대의 팔기군보다 더 훈련이 잘 되어 있고 용감하였다. 특히 강희 시대의 팔기군은 강희제의 여러 전쟁 때 큰 활약을 하며 승리를 안겨주었다.

    후대에 가서는 팔기군의 기강이 많이 흐트러지는데, 강희 시대엔 통일을 위한 전쟁을 많이 하였으나, 후대에 들어가 전쟁이 별로 없고 군사들의 수도 갑자기 늘어나 통제를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자 자연히 흐트러지게 되었던 것이다.[주해 19]

     

    문화 발전과 기독교 전례 문제

    예수회 선교사들과 함께 천문을 보고 있는 강희제강희제는 소년 시절부터 많은 학문을 배웠다. 그중에서도 유학, 즉 성리학을 좋아하였으며 그 자신이 훌륭한 유학자로서 유학의 가르침에 따라 살기를 노력하였다. 서예 역시 매우 달필이어서 소림사의 현판을 바로 강희제가 썼다. 어린 시절 강희제가 쌓은 학식은 그에게 크게 도움이 되어 경연이나 조회 등에서 신료와 유학자들과 논의를 펼치고 난 뒤에, 이들은 강희제에게 꼼짝도 하지 못하였다 한다. 심지어 강희제가 크게 병이 난 도중에도 결코 책을 멀리하지 않았다 한다. 강희제는 자신이 만주족이라는 것을 항상 잊지 않았으나, 중국의 문화가 자신들의 문화보다 매우 월등한 것을 알고 그것을 만주족 대신들에게 융화시키려 하였다.

     

    강희제는 예수회 선교사들을 신임하여 그들에게서 서양의 지리, 천문, 수학, 음악 등을 배웠고, 중국 황제 중 처음으로 피아노를 쳤으나 가톨릭교회의 교리는 전혀 배우려 하지 않았다 한다.[주해 20] 이러한 이유로 선교사들의 중국 포교에 위기가 닥치기도 하였다.[주해 21] 이미 아버지 순치제 때 중국에 와서 흠천감 장관을 재직했던 아담 샬 폰 벨을 시작으로 한때 러시아와의 전쟁 때 간접적으로 러시아를 돕기도 했던[주해 22] 서양의 선교사 조아생 부베·마테오 리파·페르디난드 페르비스트·주세페 카스텔리오네·장 당빌 등이 계속 유럽에서 와서 새로운 학문을 강희제와 대소 신료들에게 전래하였다. 페르비스트는 아담 샬 폰 벨의 뒤를 이어 흠천감 장관을 역임하여 새로운 천문학을 중국에 전파하였고, 부베는 강희제에게 기하학을 가르쳐주었으며, 장 당빌은 정밀한 중국 지도인 《황여전람도》(皇與全覽圖)를 만들었다. 또한, 마테오 리파는 12년간 궁정에 있으면서 강희제에게 서양화를 그려 주었다. 리파는 1723년에 그의 고향 나폴리로 돌아와 나폴리 동부 대학에 ‘중국 학회’를 세웠다. 이 학회는 유럽 최초의 중국학 학회였으며, 유럽인들에게 중국과 동양을 알려주는 총본산이 되었다.[52] 다른 선교사들은 강희제의 통치와 학문에 대한 열정을 곁에서 지켜보고 그를 ‘기독교만 믿으면 완전무결한 군주’라고 칭하였다.

     

    교황 클레멘스 11세강희제는 선교사들을 황실 천문대 등의 요직에 두는 한편 초기에는 청나라에서 가톨릭교회의 포교를 허가하였다. 1692년(강희 31년)에 청나라의 어느 곳에서도 포교를 허락하고 조정의 가톨릭교회에 대한 박해를 엄금한다는 칙령을 내렸다. 몽골 원정 때 말라리아에서 걸렸다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강희제는 선교사들에게 더 많은 호의를 가지게 되었고, 북경 내성에 교회를 짓는 것을 허락하여 선교사들과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보호하였다. 그러나 그 뒤로 당시 예수회를 제외한 청나라에 들어간 종파들이 중국의 조상 숭배, 우상 숭배에 대해 비판적으로 변해갔고, 곧 이들 종파의 말을 들은 로마 교황청에서 중국의 전례(典禮)를 문제로 삼음으로서 중국의 전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1704년(강희 43년)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하느님을 상제(上帝)나 천주(天主)로 표기하는 것이 서양에서 뜻하는 조물주라는 말과 그 뜻이 서로 다르고, 매년 봄과 가을마다 지내는 공자의 제사와 조상의 제사가 우상 숭배이므로 중국의 전례를 금지한다는 회칙을 발표하고 1715년(강희 54년) 이를 재확인하였다. 강희제는 이에 대해 매우 불쾌하게 여겨 교황의 회칙을 가지고 온 특사인 교황청 소속 추기경을 체포하거나 본국으로 강제 송환하였다. 1706년(강희 45년) 강희제는 예수회에 찬동적이지 않은 선교사들을 모두 국외로 추방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특단의 상응 조치로 1721년(강희 60년) 교황의 회칙 수렴을 거부하고 교황청이 더 많은 선교사들을 파견하고 백성들에게 선교·선동해서 청나라를 가톨릭 국가로 만들려 한다며 교황의 회칙을 비판하였고, 선교사들의 청나라 출입을 허가하는 대신 포교는 불법화하였다. 그러나 강희제가 붕어하고 난 다음에 1724년(옹정 2년), 강희제의 아들인 옹정제는 포교와 선교사들의 청나라 출입을 모두 불법화하고 예수회 선교사들 역시 당시 포르투갈인들이 많이 살고 있던 오문(澳門, 마카오)으로 추방하였다.

     

    광희서국 판본 《강희자전》, 20세기 초또한 강희제는 당나라·송나라 때의 과거의 일부분이었던 전시(殿試)를 발전시킨 박학홍유과(博學鴻儒科)를 실시하여, 많은 인재, 특히 강남의 한족 출신 학자들을 모아 박학홍유로 삼았고 이 중에서 뛰어난 이들은 한림원 학사로 삼았다.[53] 그리고 이 인재들로 하여금 명나라 시기의 실록인 《명사》(明史)를 편찬하여 초기의 명 태조와 명 성조 때 번창하였으나 후에 여러 황제의 실정을 부각시켜서 청나라가 명나라의 정통성을 확실히 계승하였다는 것을 알리려 하였다. 또한, 박학홍유로 하여금 백과사전인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연감유함》(淵監類函), 《패문운부》(佩文韻府), 《역상고성》, 《수리정온》, 《전당시》 등을 편찬케 하였다. 여기서 가장 돋보이는 문화적 업적은 바로 1711년(강희 50년)에 시작하여 5년 뒤인 1716년(강희 55년)에 완성된 《강희자전》(康熙字典)인데, 이것은 박학홍유 수십 명과 대신 진정경(陳廷敬) 등이 수년 동안 공을 들여 만들었다. 4만 2천여 개의 한자가 수록된 《강희자전》의 출판은 현대 중국어의 어법과 단어를 확립시킨, 강희 시대 문화 사업의 완성이었다.

     

    하지만, 강건성세 3대에 걸쳐 많은 한족 학자들을 숙청한 문자의 옥이 일어났는데, 이미 문자의 옥은 춘추 전국 시대 제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다.[54] 문자의 옥은 오랜 세월을 거쳐 계속되었는데 청나라에 들어와서는 도르곤을 황숙(皇叔)이 아닌 왕숙(王叔)으로 써서 도르곤과 당시 황제인 순치제를 왕(王)으로 모독한 이유로 한족 학자가 교살되었다.[54] 이들 학자는 만주족인 청나라의 중국 통치의 정통성을 강력히 부인하여 중국의 평화적이고 자애로운 통치를 지향하던 강희제의 분노를 샀다. 문자의 옥에 연루된 학자들은 대역죄로 다스려져 능지형을 받았다. 또한, 그 구족의 16세 이상의 남자는 모두 참수시키고 16세 이하의 남자와 모든 여자는 노비로 삼아 변방으로 보냈다.[54] 실제로 1711년(강희 50년)에 대명세라는 한족 학자가 자신의 저서인 《남산집》(南山集)에 망한 명나라의 연호인 영력(永曆)을 사용하여,[주해 23] 대명세의 삼족이 모두 처형된 사건이 발생하였다.[53] 이 사건을 계기로 청나라는 옹정제와 건륭제를 거쳐 만주족에 비판적인 학자를 더욱 탄압하여 유배를 보내거나 처형하였고, 비판한 책들은 모두 불태워 버리거나 금서로 지정하였다.[53]

     

    내정

    강희제의 순행 환궁 행렬1677년(강희 16년) 강희제는 중국 전통의 고유 내각인 상서방(尙書房)을 개편하여 남서방을 설치하여 자신의 경연장으로 사용하였으며 전 황조인 명나라처럼 여러 명의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를 두어서 조정의 일을 의논하였다.[55] 이 내각대학사의 남서방은 훗날 강희제의 아들인 옹정제 때에 군기처로 발전하게 된다. 황궁의 살림을 아끼려고 명나라 때에 10만 명이나 되던 환관과 궁녀의 수를 400명으로 대폭 줄였으며, 비용 역시 명나라 시절에 비해 40분의 1로 줄였다. 강희제 스스로 옷이 완전히 낡지 않은 이상 그 옷을 기워서라도 입을만큼 크게 검소하였고 자신의 침전에도 10명 안팎의 환관과 궁녀밖에 두지 않았다. 치수 공사에도 뜻이 있어 1677년(강희 16년)에 황하 치수 공사에 착수, 근보(靳輔)를 그 책임자에 명하였으며 1684년(강희 23년)에 완성해 황하가 범람하지 않도록 하여 농민의 피해를 줄였다. 또한, 대운하 역시 보수·증축하여 많은 배가 물량을 대량 수송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로써 황하가 안정되어 많은 물자가 장강과 황하를 잇는 대운하를 타고 범람 걱정 없이 북경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팔기군의 둔전지로 쓰던 권지(圈地)를 모두 몰수하고 그 땅을 모두 소작농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었으며, 소작지와 소작농을 함께 매매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해 소작농들을 보호하였고, 백성들이 지주의 수탈 없이 편안히 살 수 있게 하였다.[56] 또한, 흉년이 들었을 때는 흉작의 정도에 따라 세금을 일부 감면, 또는 전원 감면하였다.

     

    강희제는 황하의 치수 공사가 완성된 1684년(강희 23년)을 시작으로 1689년(강희 28년), 1699년(강희 38년), 1703년(강희 42년), 1707년(강희 46년), 1712년(강희 51년) 등 총 6번 남방으로 순행하여 장강 이남의 많은 지역 유지들에게 신뢰를 얻었고, 이남의 학자들에게 학문을 사사하기도 하였다. 또한, 남방 순행 때, 정해놓은 예산을 제외한 별도의 비용은 가져온 내탕금으로 모두 지출하여 남쪽 백성들의 재산 착취를 막았다.

     

    강희제 때 쓰인 화폐 강희통보(康熙通寶)강희제는 세수입을 전시(戰時)에도 늘리지 않아 민생이 전시에도 평상시를 유지하도록 하였고, 치세가 지속할 때마다 세금을 올리기는커녕 점점 감면하여 백성의 존경과 칭송을 한몸에 받았다. 1711년(강희 50년)에는 성세자생인정(盛世滋生人丁) 제도를 공포하여 성인의 인두세를 당시의 값에서 영원히 동결시키고 그 값을 받는 장정의 수 또한 2,450만 명으로 한정하고 그 이상은 받지 않겠다고 천명하였다. 또한, 이 제도가 시행된 지 얼마 안 가 지정은제를 북경과 하북성 일대에서 시행하기도 하였다. 대만 수복 이후에는 4개의 항구를 열어 대외 무역업을 활성화하여 많은 은자를 국고에 가져오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강희제의 선정은 청나라와 만주족에 대한 한족 백성의 인식을 바꾸어 놓았으며, 한족을 융화하기 위한 강희제의 피나는 노력에 자연히 한족 백성은 스스로 청나라를 따르게 되었다. 또한 몽골의 소수 민족과의 관계에도 힘을 기울여 1703년(강희 42년) 성경과 가까운 곳인 승덕 지방에 피서산장이라는 큰 이궁을 지었고 그 곳에서 각기 다른 소수 민

    족의 족장 등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거나 부족의 의식도 행하게 허락하였다.

     

    재정 정책 역시 기존에 비해 수정하여, 세금을 적게 하였어도 무역 등으로 이미 은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국고도 그다지 별문제가 없었다. 1668년(강희 7년)에 1,500만 냥, 1710년(강희 49년)에 5천만 냥이 넘는 은자가 있었으나, 강희제의 말년인 1722년(강희 61년)에는 은자가 7백만 냥도 채 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국고의 거의 모든 은자가 군비로 들어갔으며, 강희제 역시 정무를 보기에는 이미 너무 늙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강희제는 이것을 타개하기 위해, 재정에 재능을 가진 4남 옹친왕 윤진(胤禛)에게 조언을 하고 새로운 정책을 찾으라 명하였으나, 강희제는 그 정책의 실현을 보지 못했다.

    강희제의 정책을 바탕으로 인구도 크게 상승하기 시작하였다. 1644년(명 숭정 17년) 명나라가 멸망할 때 기나긴 전쟁과 반란, 기근으로 중국의 인구는 1억 명 이하로 내려갔으나 전쟁을 끝내고 강희제의 강력한 내정에 백성들의 삶의 질이 나아지자 인구가 다시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강희제가 죽을 때에는 다시 1억 명에서 올라가 1억 5천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고 옹정제, 건륭제를 거쳐 계속 인구는 늘어났다.

     

    황태자 책봉 문제

    중년의 강희제훌륭한 정치를 펼친 강희제였지만, 그의 자식들은 그다지 큰 그릇이 되지 못했다. 강희제는 황자들 모두를 자신의 경연 토론장인 남서방에서 교육시켜 유학의 사상이 몸에 밴 황자로 만들려 하였으나 대부분 그리 되지 못하였다. 제2황자이며 강희제의 유일한 적자이자 적장남인 윤잉(胤礽)은 첫 번째 황후인 효성인황후의 소생으로, 효성인황후가 1674년(강희 13년)에 윤잉을 낳은 직후 난산으로 붕어하자 이를 슬퍼한 강희제가 이듬해인 1675년(강희 14년)에 바로 황태자로 책봉하였다[57]. 이것은 본래 가장 유능한 아들을 후계자로 삼는 만주족의 전통을 깨고 한족의 전통을 도입하는 것이었기에 만주족 대신들 사이에서 논쟁이 있었으나, 유학을 숭상한 강희제는 이런 논의를 단호히 일축하였다. 이에 서장자이고 제1황자의 작위를 받았으며 윤잉보다 두 살이 많은 윤시(胤禔)가 대신들 사이에서 윤잉의 경쟁 상대로 떠올랐으나 강희제는 여러 번 공식석상에서 윤잉을 후계자로 천명하여, 제위는 윤잉이 승계받는 것으로 확정되어 갔다.

     

    강희제는 윤잉의 거처를 과거 명나라 때 황태자들이 머물던 동궁인 종수궁(鍾粹宮)으로 선택하지 않고 역대 황제와 가문의 조상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인 봉선전 옆에 새로 궁을 지어 육경궁(毓慶宮)이라 이름짓고 이곳을 윤잉의 거처로 정하였다. 또한 강희제는 다른 어느 황자들보다 그 위상을 높였으며, 그리고 황제에게만 입히는 황포를 윤잉에게 특별히 입을 수 있도록 허락하고, 황궁 어디서든 가마나 말을 탈 수 있게하였다. 또한 당시 어느 친왕들보다 더 많은 봉토와 식읍을 받는 등 큰 특전을 베풀어 주었다. 당시 윤잉이 받았던 봉토와 식읍은 역대 청나라 친왕 중 가장 많은 봉토를 받은 도르곤보다도 더 많이 받았다. 강희제는 윤잉이 훗날 황자들에게 핍박받을지도 모를까봐 윤잉을 제외한 나머지 자식들의 작위를 올려주는 것을 꺼려하였고 실제로 1700년대까지 윤잉을 제외한 황자들은 모두 친왕에 오르지 못하였다. 마지막으로 강희제는 윤잉에게 다른 황자들이 받는 교육보다 더 수준높고 엄격한 교육을 시켰다. 윤잉을 가르치는 사부 역시 당대 최고의 학자 중 한 명인 왕섬을 임명하여 윤잉을 완벽한 차기 황제로 만들려 하였다. 머리가 총명하던 윤잉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공부하여 이미 4살 때 한문을 쓰기 시작하여 7살에는 사서오경을 다 떼었다 한다.[57]그리고 강희제의 순행과 몽골 원정 때에도 황태자로서 조정을 장관, 대소사를 처리하여 정치 분야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백성들에겐 따뜻하던 강희제는 자식, 특히 자신이 가장 총애하고 아끼던 자식인 윤잉에겐 더없이 냉정하고 혹독하게 대하였다.[57]

     

    윤잉은 20대까지만 해도 아버지의 뜻을 받들고 빈틈없이 일을 처리하였으나 30대가 넘어서부터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주색잡기를 좋아하였다.[57] 속으로는 윤잉을 매우 아꼈으나 겉으로 내색을 하지 못한 아버지의 냉정함과 혹독함, 어머니를 태어나자마자 여읜 모정의 갈망, 그리고 형제들간의 암투 등으로 인해 점점 타락하기 시작한 윤잉에게 실망한 강희제는 3황자 윤지, 4황자 윤진, 8황자 윤사 등 다른 황자들에게 각기 부서를 책임지고 도맡게 하였다. 다른 황자들은 모두 육부를 관리하여 강희제의 신임을 얻고 군왕, 친왕으로 승승장구하였으나, 윤잉은 어떠한 부서도 맡지 않은 채, 부황의 눈밖에 나고 정신질환에 가까운 비행까지 일삼았다 한다. 그리고 이미 조정은 황자들과 신료들의 야심으로 인해 사분오열이 되었는데, 이 중 윤시는 자신이 장자인데 언제나 차남이며 황태자인 윤잉의 뒤에 서야 되고 윤잉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절을 해야 했으며 자신이 아우들에게 “형님”이라 불리는 반면 윤잉은 이복 형인 윤시를 비롯한 형제들에게 “황태자 전하”라는 존칭으로 불리는 것이 큰 불만이라 반윤잉 세력에 적극 가담하였다. 윤잉이 황태자로 있을 당시 윤잉을 포함한 9명의 황자가 파벌에 참여하였는데 그 계보와 파벌에 참가한 주요 대신들을 보면 이러하다.

     

    황태자당(皇太子黨)

    차남 황태자 윤잉(皇太子 胤礽)

    영시위내대신 색액도(領侍衛內大臣 索額圖)

    황장자당(皇長子黨)

    장남 직군왕 윤시(直郡王 胤禔)

    영시위내대신 납란명주(領侍衛內大臣 納蘭明珠)

    황사자당(皇四子黨)

    4남 옹군왕 윤진(雍郡王 胤禛)

    13남 패자 윤상(貝子 胤祥)

    사천순무 연갱요(四川巡撫 年羹堯)

    황팔자당(皇八子黨)

    8남 패륵 윤사(貝勒 胤禩)

    9남 패자 윤당(貝子 胤禟)

    10남 패자 윤아(貝子 胤䄉)

    14남 패자 윤제(貝子 胤禵)

    영시위내대신 동국유(領侍衛內大臣 佟國維)

    보군통령 융과다(步軍統領 隆果多)

    중립파[주해24]

    3남 성군왕 윤지(誠郡王 胤祉)

    5남 항군왕 윤기(恆郡王 胤祺)

    7남 순군왕 윤우(淳郡王 胤祐)

    12남 패자 윤도(貝子 胤祹)

     

    황태자 윤잉그중 이미 황태자 윤잉의 위치가 흔들리고 있다는 걸 알아챈 윤잉의 작은외조부이자 이미 40여 년 전에 죽은 색니의 차남, 색액도(索額圖)는 자신을 위시로 한 태자당(太子黨)의 결성과 황장자인 직군왕 윤시와 그 외숙부 납란명주(納蘭明珠)를 위시로 한 황장자당의 결성으로 붕당이 시작되어 서로 조정의 주도권과 황위 후계권을 잡으려 하였고, 심지어는 태자당이 윤잉에게 알리지 않고 강희제를 암살하려 하자 진노한 강희제는 1703년(강희 42년)에 색액도를 사사하고 그 일파를 척결해 처형하거나 유배보낸 뒤 윤잉에게 엄중한 경고를 내렸으나,[58] 여전히 윤잉은 달라지지 않고 나태하였으며 조회에도 참석치 않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1708년(강희 47년)에 강희제는 윤잉을 폐위시키고 서인으로 삼아 종인부(宗人府)에 가두어 버렸다. 윤잉을 폐위하고 태묘(太廟)에 고할 때, 강희제는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그 후 6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우울하게 지내다가 중풍에까지 들었다고 실록은 기록하였다. 그러나 본래 윤잉을 총애하였고 황태자를 자리에 두고 골육상쟁을 염려한 강희제는 이듬해인 1709년(강희 48년)에 윤잉이 직접적으로 대역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황태자로 복위시키고 도리어 납란명주를 하옥시켰다. 색액도와 납란명주는 40년 동안 강희제의 곁에서 정치를 도와주던 조정의 수반들이자 영시위내대신이었으나 황위를 놓고 당쟁이 시작되자 강희제는 이들을 단호히 조정에서 혁파하여 당쟁의 불씨를 끄려 하였다. 하지만 윤잉이 복위되자 안심하였던 황장자당을 중심으로 황팔자당까지 합세한 반황태자파는 다시 윤잉을 폐위시킬 음모와 이간책을 꾸몄다. 황팔자당은 8황자 윤사가 주축이 되었고 이에 가담한 대신으로는 또다른 조정의 영수이며 강희제의 외삼촌이자 세 번째 장인인 동국유와 그 아들인 융과다가 윤사를 도왔다.

     

    자금성의 건청궁 중앙에 있는 옥좌와 정대광명 편액그럼에도 윤잉이 반성을 하지 않고 다시 주색잡기를 좋아하였으나, 문제는 윤잉이 강희제의 후궁인 서비 정씨를 건드려 황실에 충격을 던져주었다. 1712년(강희 51년)에 강희제는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장강 이남으로 순행을 떠났는데 아직도 윤잉을 못미더워한 강희제가 윤잉이 북경에서 딴 마음을 품지 않나 관찰하기 위해 일부러 북경을 비운 것이다. 그리고 황제가 궁을 비웠으니 황태자였던 윤잉이 임시로 정무를 돌보았다. 그러나 윤잉은 음모를 꾸며 강희제가 북경으로 환도하면 강희제에게 태상황으로 물러나고 자신이 찬위하겠다는 쿠데타를 기도하였는데, 이 사건은 확실히 윤잉이 주도한 역모였다. 이것을 눈치챈 북경의 대신들은 순행 중인 강희제에게 돌아올 것을 요청하였고 강희제는 북경으로 돌아오자마자 윤잉을 바로 황태자에서 폐위시켜 냉궁인 함안궁에 가두고 폐서인하여 영원히 서인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또한 두 번이나 폐태자시킨 이 사건을 다시 언급하는 자가 있으면 참수할 것이라 엄중히 명하였다. 이 사건의 폐단을 계기로 청나라는 멸망할 때까지 죽은 황자를 황태자로 추서만 하였을 뿐, 생전에 어느 황자도 황태자로 지명받지 못했다. 강희제는 얼마 뒤 전위조서를 건청궁 ‘정대광명’(正大光明) 편액 뒤에 보관토록 하고 자신이 붕어한 뒤에 열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저위비건법(儲位秘建法)이다.[주해 25]

     

    이로 인해 형제들 간의 후계자 다툼이 발생하였다. 그중 4남 옹친왕 윤진, 8남 염친왕 윤사(胤禩), 14남 순군왕 윤제(胤禵)가 가장 실력있는 아들들이었다. 장자인 직군왕 윤시는 과거 윤잉이 처음 폐위되었을 때 폐태자 윤잉을 저주하고 몰래 자객을 보냈으며, 윤잉의 방에다 칼이 꽂힌 윤잉의 인형을 숨겨놓기도 하였다. 심지어 윤시는 부황 강희제 앞에서 윤잉을 죽이겠다 하였으나, 오히려 크게 혼나고 윤잉처럼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당시 8남 윤사가 인정이 많고 공명정대하여 가장 많은 신료의 신망을 받았으나 실제로 윤사는 간교하였고 이간질에 뛰어나 황자들간의 분란을 부추겼다. 심지어 윤사는 심복을 시켜 점쟁이를 매수하여 자신이 다음 황제가 될 것이란 소문을 공공연히 내어 강희제의 분노를 사서 강희제 말기에 윤사는 조정에서 중책을 맡지 못하였다. 이들은 서로 공적을 다투고 부황인 강희제의 총애를 받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특히 강희제는 만년에 14남인 윤제를 총애하여 그에게 북방의 만리장성을 수호하는 중책인 무원대장군(撫遠大將軍)의 작위와 병부의 지휘권을 내렸다. 병권을 내려주면 황위를 물려주는 것으로 생각하던 황자들간의 암투는 더욱 격화되었고, 8남 윤사와 14남 윤제가 손을 잡고 파벌을 형성하자 4남 윤진 역시 파벌을 형성하여 조정의 주도권을 잡으려 하였다.

     

    천수연과 노황제의 붕어

    강희제의 죽음 이후 공석인 황위 상태와 황위 집권 과정에 대해서는 옹정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말년의 강희제1722년(강희 61년) 5월 4일 강희제는 자신의 68번째 생일을 맞는 것을 기념하여 65세 이상의 만주족, 한족, 몽골족, 회족 현직 관리들 및 퇴직 관리들 1천여 명을 자금성 건청궁(乾淸宮)에 초대하여 큰 주연을 베풀었다. 이것이 바로 천수연(千叟宴)이다. 천수연은 이미 1713년(강희 52년) 강희제의 나이가 육순이 넘은 것을 기념하여 자신의 동년배인 대신들을 불러 축하를 해주었다. 그 이후 두 번째로 열린 이 천수연에선 3000명 정도의 각기 다른 민족 출신의 신하들을 불러모았다. 천수연에서 강희제는 이들 전직 재상들과 대신들, 원로 관리들과 함께 강희 시대의 성공과 완성을 자축하였다. 이후, 천수연은 손자인 건륭제도 여러 번 베푸는 등 궁중의 주요 행사가 되었다. 천수연을 베푼 강희제는 곧 병에 걸렸고, 황위를 노리는 황자들은 이를 호기로 삼아 점점 세력을 확장하였다. 얼마 뒤인 1722년(강희 61년) 12월 20일에 이궁인 창춘원(暢春園)에서 붕어하였는데 이때 나이가 69세였다.

     

    강희제의 정식 사인은 오한과 호흡 곤란이라 하나, 일설에 따르면 강희제의 병세는 그리 심하지 않았고 며칠 뒤에 돌연사했다 하여, 여전히 강희제의 죽음에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또한 강희제 붕어 당시 강희제를 모신 신하가 야심 많은 4남 윤진의 휘하이자 자신의 외사촌동생이며 자신의 세 번째 황후인 효의인황후의 동생 구문제독 겸 보군통령 융과다(隆科多)라는 점으로 강희제가 윤진의 사주로 융과다에게 독살당하였다는 설도 있다.[주해 26][59] 본래 융과다는 8남 윤사의 수하였으나 윤진의 설득과 매수로 결국 윤진의 수하로 들어갔다.

     

    능호는 경릉(景陵)으로 부황 순치제의 황릉인 효릉(孝陵) 옆에 있으며, 청동릉(淸東陵)의 하나이다. 묘호는 성인의 뜻으로 국가를 다스려 진정으로 통일시킨 큰 업적이 있는 황제라 하여 성조(聖祖), 시호는 생전에 강희제가 인과 덕을 중시한 것을 따 인황제(仁皇帝)로 명명하였다. 정식 시호는 합천홍운문무예철공검관유효경성신중화공덕대성인황제(合天弘運文武睿哲恭儉寬裕孝敬誠信中和功德大成仁皇帝)로 이 긴 시호에서도 그의 업적을 확인할 수 있다. ‘합천’(合天)은 분열된 천하를 다시 통일시켰다는 뜻이고 ‘홍운’(弘運)은 국운을 크게 넓혔다는 뜻이다. ‘문무’(文武) 역시 나라의 기틀을 잡고 문과 무를 고루 이용하여 전성기를 이룩한 황제에게 올리는 시호로 나라를 세운 개국 황제에게 올려지는 ‘고’(高) 자와 더불어 황제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시호이며 그리고 ‘중화’(中和)와 ‘대성’(大成)은 청나라를 중흥시켜서 나라를 더욱 번창시키고 여러 민족을 하나로 모아 크게 이루었다는 뜻이 담겨 있다.

     

    강희제가 묻힌 청동릉의 경릉 침전강희제의 붕어 이후에도, 황자들의 황위 다툼은 계속되었고 8남 윤사와 14남 윤제는 강희제의 붕어와는 상관없이 각기 자신이 황위에 오르려 하고 군대 동원을 명령하는 등 갖가지 수단을 부렸다. 강희제 붕어 당시, 강희제는 ‘4’자를 희미하게 말했다고 한다.[58][59] 그리고 강희제 붕어 후, 8황자 염친왕 윤사, 9황자 혁군왕 윤당, 10황자 돈군왕 윤아 등은 훗날 목숨이 위태로울까 봐 그들의 넷째 형 윤진이 황위에 오르는 것에 절대 반대하여 그 대안으로 역시 ‘4’자가 붙어 있는 14황자 순군왕 윤제를 후계자로 우겼으나 강희제의 전위 조서에는 후계자가 4남 윤진으로 표기되어 있었다.[59] 당시 강희제의 유조의 내용 중 황위 승계에 대한 내용을 보면 이렇다.

     

    “ 제4황자 옹친왕 윤진은 인품이 귀중하고 사려가 깊으니 짐이 생각하건대 필히 대통을 이을 자격을 갖추었다. 고로 짐이 죽은 후 짐의 뒤를 이어 즉시 황제의 자리를 잇도록 하고 예법에 따라 상복을 입다가 27일에 평복으로 갈아입고 새 황제의 즉위를 만천하에 알려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알게 하라.[60] ”

    그리고 4황자 옹친왕 윤진은 유조에 쓰여 있는대로 황위에 오를 명분을 세우고 자신의 이복동생이자 강희제의 13남 패륵 윤상에게 원래 윤사의 파가 장악하고 있는 북경 근교의 풍대병영의 군사를 포섭·동원하도록 명령하고 이 군사들을 동원해 반대 세력을 모두 제거하고 황위에 오르니, 이가 청의 제5대 황제인 옹정제이다. 그러나 옹정제가 황제에 오른 이유는 유조개위설, 개조찬위설, 무조탄위설 등 여러 설로 나뉘어져 있는데, 일단 당시 강희제는 황위를 물려주려면 당사자인 옹정제를 직접 불러서 황위를 넘긴다는 얘기를 했어야 하나 옹정제나 다른 황자들 및 중신들에게 말하지 않고 곁에 있던 융과다에게만 말을 하였다 한다. 또한 만약 옹정제를 후계자로 점찍었다면 옹정제에게 황위를 잘 부탁한다는 얘기를 하기는커녕 자신의 병세에 대해서만 얘기를 하였다. 다른 유명한 가설로는 옹정제의 명령으로 융과다가 강희제가 원래 점찍어 놓은 ‘14황자 윤제에게 물려준다’(傳位十四皇子) 대신 ‘4황자 윤진에게 물려준다’(傳位于四皇子)라고 교묘히 바꾸고 조작된 이 유조를 공포하여 황위에 올랐다는 설이다.[59] 그러나 이것은 단지 가설일 뿐이며 정확히 황제에 오르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는 지금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주해 27]

     

    통치 철학과 사상

    책을 읽는 노년의 강희제강희제는 유교적 사상으로 국가를 통치하려 하였다.[61] 아버지 순치제와 아들 옹정제가 만주족이 믿던 불교, 즉 라마교를 중요시하였다면 강희제는 오히려 불교를 억제하고 유교를 더욱 중시, 즉 숭유억불을 국시로 삼았는데 그 방식은 청나라 이전에 중국을 다스린 한족 출신의 황제와 그 통치 이념이 비슷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자신도 불교를 믿어 불교를 그리 심하게 탄압하지는 않았다. 강희제는 군주가 모범을 보여야 백성이 군주를 믿고 따를 것이라 하여 백성을 위해 헌신하는 이른바 ‘섬기는 리더십’을 자신의 통치 철학으로 삼았다.[62] 삼국 시대 때 촉한의 승상 제갈량의 후출사표의 한 구절인 ‘국궁진력’(鞠窮盡力), 즉 ‘모든 것을 쏟아 붇는다’와 국궁진력한 후 ‘안거낙업’(安居樂業), 즉 ‘백성을 편안하게 살게 해주고 즐겁게 일에 종사하게 해준다’를 자신의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은 것이 좋은 본보기이다. 유교적 사상을 중시한 강희제는 백성들에게 언제나 효를 중시하여 백성에게 유교 지침서를 내렸고 아버지 순치제와 어머니 효강장황후가 떠난 후 자신의 양육을 책임진 조모 효장태황태후를 모시는 데에도 부족함이 없이 효도를 다하려 노력하였다. 효장태황태후는 1688년(강희 27년)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강희제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며 손자인 강희제와 증손자들인 황자들에게 큰 존중을 받았다.[주해 28] 또한 강희제는 인(仁), 덕(德), 예(禮) 중심의 인자한 정치를 펼치고 되도록 과격한 정치를 펴지 않으려 주력하였다. 강희제는 본래 명나라 홍무제가 만들고 순치제가 바꾼 〈육유(六諭)〉를 확대한 〈성유십육조(聖諭十六條)〉를 1667년(강희 6년)에 반포한 뒤 백성들에게 이 내용을 토론하고 실천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강희제의 뒤를 이은 넷째 아들 옹정제는 성유십육조의 매 조마다 친히 설명을 붙이고 그 의의를 보다 알기 쉽게 해설한 〈성유광훈(聖諭廣訓)〉을 편찬하여 전국에 반포하여, 유교통치이념을 더욱 굳건히 하였다.[63][64]

     

    강희제는 강화된 황권으로 거의 황제 중심의 독단적으로 나라를 이끌어 갔기에 자칫 전제 독재의 가능성이 보일 수도 있었으나, 스스로 황권을 조절하고 정치의 일부는 재상들이나 대신들과 의논하였으며 당시 궁핍하게 살고 있는 한족들의 사정을 잘 알고 있던 한족 대신들의 의견을 수용하여 정책을 실행하고 선정을 베풀었다. 프랑스의 예수회 선교사 부베는 루이 14세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65]

    “ 강희제는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군주입니다. 그럼에도 황제인 그의 생활용품들은 사치스러움과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못해 소박하기 그지없습니다. 역대 제왕들 가운데 전례없는 일입니다. ”

     

    강희제 스스로도 자신이 직접 쓴 《근검록》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65]

    “ 모든 비용은 백성들의 피땀으로 얻어진 것이니 주인된 황제로서 절제하고 절제함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

    이런 강희제의 인자한 정치는 한족이 만주족의 청나라를 지지하게 만드는 데에 크게 일조하였다. 1717년(강희 56년) 강희제는 〈고별상유〉(告別上諭), 즉 마지막으로 백성들에게 바치는 글을 남겼는데 강희제는 “한 가지 일에 부지런하지 않으면 온 천하에 근심을 끼치고, 한 순간에 부지런하지 않으면 천추만대에 우환거리를 남긴다.”라고 역설하였다. 또한 “제왕이 천하를 다스림에 능력이 있는 자를 가까이 두고, 백성들의 세금을 낮추어 주어야 하며,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고, 위태로움이 생기기 전에 나라를 보호하며, 혼란이 있기 전에 이를 먼저 파악하여 잘 다스리고, 관대하고 엄격함의 조화를 이루어 나라를 위한 계책을 도모해야 한다.”라고 후대의 황제에게도 이를 훈계하였다. 강희제는 황제로서 자식과 같은 백성들에게 이런 당부의 말을 남겨 황제로서의 도리를 다하려 하였다. [65]

     

    시위들과 함께 사냥터에 나선 강희제강희제는 자신에게 올려지는 상소문과 보고서, 비망록 등 하루에 무려 300개에서 400개의 문서들을 모두 보고 그것을 결재하고 일일이 그 상소에 대한 비답도 적어주었는데, 심지어는 전시에도 하루에 200개 이상에 문서들을 결재하였고 정무에 대한 엄청난 정력을 보여주었다. 삼번의 난 때에는 무려 하루에 500여 개의 문서들을 본 뒤 다 처리하고 때로는 밤을 새울 때도 많았다 한다.[66] 학식이 높은 황제의 적절한 대안은 성지가 내려오는 즉시 수행되었고, 그로 인해 백성들은 살기 편안해졌다. 그의 학식은 경연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는데 그의 학식과 논리정연한 질문을 듣고 경연에 참가한 재상들과 대신들이 모두 대답을 제대로 못하였다 하며, 수학 등 서양 학문까지 습득한 강희제는 더욱 학식이 풍부해져서 당시 그가 습득한 학식은 당시 루이 14세 치하 프랑스 왕족들의 평균 학식보다 훨씬 우월하였다고 평하기도 한다.[67] 만주족과 한족의 구별을 없애려 하였듯이 선교사들에게도 큰 호의를 베풀어준 강희제는 남방 순행에도 선교사들을 대동하고 떠났다.

     

    이렇게 만주족으로서 중국의 사상, 즉 한족의 사상인 유교에 적극적이었던 강희제였으나 만주족으로서의 근본도 잊지 않았다. 그는 유교를 숭상하였으나 독실한 불교 신자이기도 하였다. 강희제는 엄청난 양의 정무의 스트레스를 타파하기 위해 자주 사냥에 나갔으며 피서산장 근처의 황실 사냥터에서 대신들과 외국 사신들에게 자신의 사냥 솜씨를 마음껏 뽐내어 자신이 정무에만 시달리는 문약한 군주가 아님을 보여주었다.[68] 실제로 그가 몽골에 친히 원정을 간 것 역시 그의 강건함을 볼 수 있는 좋은 예이다.[69]강희제는 노년기에 스스로 자신이 셀 수 없이 많은 사냥감을 잡았다 하였는데, 실제로 강희제는 강궁을 자유자재로 다룰 만큼 활의 명수였다. 그는 노년기에 자신이 평생동안 사냥해서 잡은 맹수들을 열거하기를 호랑이 135마리, 멧돼지 132마리, 늑대 96마리, 표범 25마리, 곰 20마리, 그리고 원숭이 10마리를 잡았다 한다. 또한 하루에 토끼 310마리를 잡았으며 꿩, 너구리, 사슴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잡았다고 전한다.[68] 강희제는 문(文)과 무(武)를 모두 중시하고 문이 필요할 땐 문사를, 무가 더 필요할 땐 무사를 더 썼지만 언제나 힘의 균형을 잃지 않게 하였다. 이렇게 그는 한쪽에만 치우침이 없이 고루 그에 걸맞은 인재들을 등용하였기에 태평성대를 이룩할 수 있었다.

     

    영향과 평가

    사후의 영향과 업적

    책을 읽는 강희제현재 강희제는 역사학자들에게 대부분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강희제의 훌륭한 정치는 후대에게도 큰 본보기가 되었다. 아들인 옹정제는 부황 강희제가 이룩한 태평성대에서 내치를 더욱 다져서 청나라를 안정시켰으며, 강희제의 손자이자 옹정제의 아들인 건륭제는 조부인 강희제처럼 내정에 신경을 썼지만 역시 외정에도 적극적이어서 위구르와 준가르를 완전히 복속시켰다. 강희제에서 건륭제에 이르는 이 시기를 흔히 강건성세라 한다.[70]

    건륭제는 강희제를 평생 모범으로 삼고 감히 조부를 뛰어넘을 수 없다하여 강희제의 재위 기간인 61년보다 적은 재위 60년 만에 퇴위를 하였다.[71]

    강희제의 정치는 백성들을 중심으로 그에 맞는 정치를 펼치면 역사 또한 그를 성군으로 평가하게 되는 좋은 예였다. 강희제의 붕어가 세상에 알려졌을 때, 당시 많은 백성들과 대신들이 부음을 접하자마자 바로 무릎을 꿇고 엎드려 대성통곡을 하였다 하는데, 이것도 바로 그가 성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의 정책 역시 강건성세 시기에는 대체로 변하지 않았으나, 점차 해외 열강들이 청나라의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강희제가 추진하고 이룩한 정책들은 결국 폐기되었다.

     

    청나라 이전에 한족을 제외한 다른 유목 민족들이 중국을 통치할 때, 그들은 언제나 백성들에게 폭압을 가하였으나, 강희제는 오히려 방법을 달리하였다. 그는 언제나 자신보다는 공익이 먼저였고 자신의 재위 기간인 61년간의 기나긴 희생으로 당시 백성들의 삶은 그 뒤로 70여 년간 윤택해지고 안정되었다.[72] 강희제는 당시 아직까지 중국 곳곳에서 반대가 심하였던 만주족의 황조를 굳건히 다졌고 만주족들에게 한족의 문화를 대거 소개함으로써 만주족의 지식과 예절 수준을 높였으나, 훗날 만주족들은 너무 한족의 문화에 동화되어 자신의 정체성과 전통을 거의 잃어버리고 만다. 또한 청나라 멸망 때에는 강희제의 동화 정책 때문이었는지, 만주어를 잘 아는 만주인은 흔치 않았다 한다. 그는 평생 배움에 뜻을 두어 학식 역시 뛰어났다. 명나라의 역사서인 《명사》를 편찬하여 명나라의 정통성을 계승하였으며, 오배와 오삼계 등의 내부의 반대자를 처단하고 황제권을 강화하여 자신의 오랜 재위 기간 동안 신하들이 함부로 넘보지 못할 절대 황제권을 확립하였다.

     

    강희제는 황하와 장강을 보수하여 근처 백성들의 근심을 덜어주었다. 당시까지도 이 두 강은 여름에 계속 범람하여 많은 인명 피해를 냈다. 그러나 재빨리 이에 대한 대처를 마련한 후 완성시키자 한 해에 범람 횟수가 아예 없거나 그 전에 비하여 현저히 줄어들었다. 또한 강희제는 자금성에만 머무르지 않고 중국 곳곳을 돌아다니고 장강 이남으로 순행을 많이 떠나 북방과 남방의 교류를 활발히 만들었으며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청나라의 동북방에 있던 소요를 잠잠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강희제는 자신이 실정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겸허히 수렴하여 즉시 시행하였고 황제로서의 책임을 솔선수범하여 군주의 모범을 보였고 스스로 자신에게 맞는 통치 환경을 조금씩 만들어나갔다.[72]

     

    비판

    그러나 중국 역사상 최고의 태평성대인 강건성세를 만들면서 세금을 줄이고 백성들을 배부르게 하는 등 청나라를 너무 태평히 잘 완성시켰기 때문에, 후대에 가서 사람들이 점점 나태해지고, 군대 역시 소동에 관한 대처 능력이 떨어지게 되었다. 또한 강건성세 3대에 걸쳐 문자의 옥을 시작시켜서 한족 학자들을 대거 숙청함으로써 문화를 일시적으로 후퇴시켰고, 명나라의 수녀제(秀女制)[주해 29]를 따르라는 부황 순치제의 유명을 받들었고 그에 충실히 따라 많은 자식들을 두어 황실을 번성시키기는 하였으나 그들의 교육에 실패하여 황태자를 자리에 놓고 황태자였던 윤잉과 쟁탈전을 벌이는 자식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편애까지 일삼아 훗날 강희제 말년과

     

    옹정제 초기의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잔의 원인이 되었다는 비판도 있다.[59] 본래 유교를 숭상하던 강희제는 자식들에게 주입식 유교 교육을 시켰으나 완전히 한족의 문화에 동화되지 않은 황자들은 적장자가 황위를 갖는 것이 아닌 가장 유능한 아들이 황위를 갖는 것이라는 전통을 저버리지 않고 끝내 아버지의 교육에 순응하지 않았다.

    처음 강희제는 윤잉에게 매우 큰 기대를 하며 자신의 뒤를 이을 현군이 되길 바랐으나 윤잉이 성인이 되면서부터는 그 기대가 점차 작아지기 시작하였다.[73] 그리고 강희제는 윤잉이 황태자로 있을 때, 많은 황자를 조정과 군의 요직에 임명하였다. 서자이며 능력 있는 황자들에겐 요직을 내렸으나 정작 유일한 적자이며 황위를 계승할 한 명의 황자에게는 자신의 순행 때 대리청정을 맡겼으나 황자들 사이에 황위를 놓고 골이 맺혀 형제들은 윤잉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강희제의 비난은 언제나 총책임자인 윤잉에게 돌아갔고 바로 이것이 윤잉을 압박하여 윤잉의 비정상적인 기행을 낳았다. 자신도 나름대로 노력했던 윤잉도 자신의 뜻이 언제나 다른 형제들이나 적대시하는 대신들에게 좌절되자 우울증이 생기고 부황의 비빈을 건드리는 등의 기행으로 스스로를 달랬다.[73] 또한 평생 동안 너무 정무에 매진하였기에 자식들을 제대로 돌볼 여가가 없었고 강희제와 자식들간의 소통은 그리 원만치 않았다. 그로 인해 많은 학자들은 강희제를 수신(修身),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에 성공하였으나 제가(齊家)에서 실패한 군주라 말한다.

     

    일부 학자들은 강희제가 펼친 선정에 대해 단지 전쟁으로 피폐해진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정책을 채택한 것으로 백성을 ‘생각했다’는 것이지 결코 정책에 백성을 ‘사랑한다’는 애민(愛民)의 마음은 녹아 있지 않았다고 강희제의 정책을 깎아내리기도 한다.[58]

     

    현대의 영향과 평가

    현재는 대만 문제와 맞물려서 ‘하나의 중국’ 정책을 내세우고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에서 강희제의 대만 수복과 몽골 정복 등 그의 민족 융합 업적과 백성을 중히 여기는 이른바 ‘섬기는 리더십’을 높이 사 크게 추켜세운다.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인 장쩌민과 후진타오, 국무원 총리를 지낸 주룽지 역시 중국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강희제에게서 본받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과거 한족들이 오랑캐라 멸시하던 만주족 출신이고 그들의 지도자였던 강희제를 지금은 한족 중심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정치 스타일과 대만 수복 등에서 크게 추켜세우는 인물로 둔갑되었다며 이러한 열렬한 강희제 숭배 운동을 비판하였다.

     

    이러한 중국의 적극적인 강희제 홍보는 문화·예술 방면에서도 나타난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작가 얼웨허(이월하, 二月河)가 쓴 소설 《강희대제》는 중화인민공화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후속작들인 소설 《옹정황제》·《건륭황제》 등도 독자 사이에서 높은 인기를 구가하였다. 2001년에 중국중앙방송에서 소설 《강희대제》를 원작으로 한 《강희왕조》(康熙王朝)가 방송되어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사극 드라마 중 하나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강희제 역을 맡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견 배우인 천다오밍(진도명, 陳道明)은 어린 나이에 즉위한 강희제의 파란만장한 인생과 그의 리더십, 자식들로 인하여 골치를 앓는 모습 등을 잘 보여주었다. [74]이로 젊은이들에게 강희제의 모습과 그의 이름을 더욱 많이 각인시켜, 중국의 국민 배우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강희왕조》를 시작으로 강희제를 다룬 많은 작품들이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에서 방송되었고, 이 작품들의 인기 역시 높았다. 《강희왕조》 전에 방송하였으나 강희제의 다음 세대인 옹정 시대를 시대적 배경을 다룬 드라마 《옹정왕조》(雍正王朝)에서도 강희제는 현명하지만 《강희왕조》 때보다 자식들의 일로 피곤한 삶을 산 황제의 모습을 잘 보여주었다. 그러나 홍콩 무협 드라마 《군림천하》(君臨天下)에서는 차남인 윤잉과 14남 윤제만을 편애하다가 이것이 한 번도 부정을 받지 못하고 자란 4남 윤진에게 자극제가 되어 결국 윤진에게 염주로 목 졸려 살해당하는 비운의 군주로 나온다.

     

    무협소설가 김용(金庸) 역시 청년의 강희제가 오배, 오삼계, 정경 등과 마찰을 빚을 때를 배경으로 한 무협소설 《녹정기》(鹿鼎記)를 썼는데, 여기에서 강희제는 매우 호방한 군주로 나온다. 이 소설은 여러 차례 중국 및 홍콩특별행정구역 그리고 대만의 방송국에서 제작·방영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과거 iTV에서 방영되었던 《회옥공주》(懷玉公主)에서 명나라 영력제의 공주를 사랑하는 황제로 나왔으나 이 드라마에서 전개되는 내용은 거의 허구였다.[주해 30] 아직도 강희제는 그의 손자 건륭제, 할머니인 효장문황후, 그리고 청나라의 문을 닫는 서태후와 함께 청나라를 배경으로 한 역사 예술 작품 중 가장 많이 다루어지는 인물이다.

    2008년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 만든 게임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아시아 왕조에 나오는 문명 중 하나인 중국의 지도자가 강희제이기도 하며 게임 역사에 그의 이력과 통치 철학 등의 내용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는 등 유럽 및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성군으로 알려져 있다.

     

    외모와 식이 요법

    당시 청나라 궁정에서 강희제에게 신임을 받던 프랑스 선교사 조아생 부베는 강희제의 외모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 황제의 키는 조금 크며, 약간 살이 포동포동 찐 얼굴에는 마마 자국이 있고 이마는 넓고 코와 눈은 한족처럼 작으며, 태도와 예절은 매우 부드럽고 정중하였다.[67]

    강희제는 또한 폭식을 하지 않고 자신의 체질에 맞는 음식을 적당히 먹었다 한다. 그는 신선한 채식 중심의 음식을 많이 먹었고 노년에는 술과 담배를 전혀 하지 않았으며 음식을 먹은 후에는 좋은 생각만 하거나 서양에서 가져온 문물을 보기도 하였고 후원을 산책하며, 또는 독서에 전념하는 등 음식의 소화에까지도 신경을 썼다 한다.[67]

     

    가족

    이 부분의 본문은 강희제의 가족입니다.

    강희제는 4명의 황후와 3명의 황귀비, 3명의 귀비 등을 두었으며 첩지를 받은 후비가 모두 64명으로 중국의 역대 황제 중 가장 많은 후비를 거느렸다. 슬하에는 35남 20녀를 두었으나 이 중 아들 11명은 영·유아 때 요절하여 작위를 받지 못하였다.

     

    조부모와 부모

    조부: 태종 숭덕문황제(太宗 崇德文皇帝) 황태극(皇太極)

    조모: 효장문황후 박이제길특씨(孝莊文皇后 博爾濟吉特氏)

    부친: 세조 순치장황제(世祖 順治章皇帝) 복림(福臨)

    모친: 효강장황후 동가씨(孝康章皇后 佟佳氏)

     

    황후

    효성인황후 혁사리씨(孝誠仁皇后 赫舍里氏, 1653년 ~ 1674년) - 보정대신 색니의 손녀이자 갈포라의 딸. 색액도의 조카딸.

    효소인황후 뉴호록씨(孝昭仁皇后 鈕祜祿氏, 1653년 ~ 1678년) - 보정대신 알필륭의 딸.

    효의인황후 동가씨(孝懿仁皇后 佟佳氏, 1657년 ~ 1689년) - 효강장황후의 조카딸이자 강희제의 외사촌. 동국유의 딸.

    효공인황후 오아씨(孝恭仁皇后 烏雅氏, 1660년 ~ 1724년) - 원래 칭호 덕비(德妃), 호군통령 위무의 딸.

     

    아들들

    제1황자 직군왕 윤시(直郡王 胤禔, 1672년 ~ 1734년) - 혜비 납란씨 소생, 윤잉이 황태자에서 폐위된 직후 패자(貝子)로 작위가 격하됨.

    제2황자 황태자 윤잉(皇太子 胤礽, 1674년 ~ 1725년) - 효성인황후 소생, 황태자에서 폐위된 후 황실 대동보에서 제명, 사후에 이밀친왕(理密親王)에 봉해짐.

    제3황자 성은친왕 윤지(誠隱親王 胤祉, 1677년 ~ 1732년) - 영비 마가씨 소생. 옹정 연간에 군왕으로 작위가 격하되나 사후 복권됨.

    제4황자 옹친왕 윤진(雍親王 胤禛, 1678년 ~ 1735년) - 효공인황후 소생, 제5대 황제 세종 옹정헌황제(世宗 雍正憲皇帝).

    제5황자 항온친왕 윤기(恆溫親王 胤祺, 1679년 ~ 1732년) - 의비 곽락라씨 소생.

    제7황자 순도친왕 윤우(淳度親王 胤祐, 1680년 ~ 1730년) - 성비 대가씨 소생.

    제8황자 염친왕 윤사(廉親王 胤禩, 1681년 ~ 1726년) - 양비 위씨 소생, 옹정 연간에 폐서인됨. 황실 대동보에서 제명.

    제9황자 혁군왕 윤당(奕郡王 胤禟, 1683년 ~ 1726년) - 의비 곽락라씨 소생, 옹정 연간에 폐서인됨. 황실 대동보에서 제명.

    제10황자 돈군왕 윤아(敦郡王 胤䄉, 1683년 ~ 1731년) - 온희귀비 소생, 옹정 연간에 폐서인됨. 황실 대동보에서 제명.

    제12황자 이의친왕 윤도(履懿親王 胤祹, 1685년 ~ 1764년) - 정비 만류합씨 소생.

    제13황자 이현친왕 윤상(怡賢親王 胤祥, 1686년 ~ 1730년) - 경민황귀비 소생.

    제14황자 순근군왕 윤제(恂勤郡王 胤禵, 1688년 ~ 1756년) - 효공인황후 소생. 패륵으로 작위가 격하되나 건륭 연간에 복권됨.

    제16황자 장각친왕 윤록(莊恪親王 胤祿, 1695년 ~ 1768년) - 순의밀비 소생.

    제17황자 과의친왕 윤례(果毅親王 胤禮, 1697년 ~ 1738년) - 순유근비 소생.

    제21황자 신정군왕 윤희(愼靖郡王 胤禧, 1711년 ~ 1758년) - 희빈 진씨 소생.

    제24황자 함각친왕 윤비(諴恪親王 胤祕, 1716년 ~ 1773년) - 목빈 진씨 소생.

     

    함께 보기

    강희(康熙, 1622년 ~ 1722년) - 강희제의 연호.

    효장문황후

    순치제

    효강장황후

    옹정제

    건륭제

    청나라

    중국의 기독교

    《강희왕조》

    《군림천하》

    《회옥공주》

    다이아몬드 쥬빌리

     

    참고 자료

    한국어

    자료조나선 D. 스펜스, 《현대 중국을 찾아서 1》, 이산출판사, 김희교 옮김, 1999년 ISBN 89-87608-07-7

    조나선 D. 스펜스, 《강희제》, 이산출판사, 이준갑 옮김, 2001년 ISBN 89-87608-17-4

    조관희, 《한권으로 읽는 이야기 중국사》, 청아출판사, 2003년 ISBN 89-368-0100-7

    등예쥔, 《수신제가 (강희 원전)》, 시아출판사, 허유영 옮김, 2004년, ISBN 89-8144-146-4

    김희영, 《이야기 중국사 3》, 청아출판사, 2006년 ISBN 89-368-0437-6

    정진홍, 《인문의 숲에서 경영을 만나다》, 21세기북스, 2007년 ISBN 978-89-509-1276-5

    중국사학회, 강영매 역, 중국역사박물관 10, 범우사, 2005년, ISBN 890804308X

    중국어 자료

    《청사고》(淸史稿) - 〈성조인황제실록〉(聖祖仁皇帝實錄)

    《청사고》(淸史稿) - 〈세조장황제실록〉(世祖章皇帝實錄)

    閻崇年 《康熙大帝》(中華書局)

    劉波濤 《企業家傳記:大淸CEO康熙回憶錄》(南海出版公司)

    張姸 《大淸朝一代英主:原來康熙》(重慶出版社)

     

    주해

    1.↑ 산해관을 넘어 중국 대륙에 들어가 지배하기 시작하였다는 뜻이다.

    2.↑ 중국 대륙과 청의 근거지를 모두 다스리는 의미에서의 통일 황조

    3.↑ 순치제 때 산해관에 입관했기 때문에 순치제 다음 황제인 강희제를 청나라의 두 번째 황제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 견해이다.

    4.↑ 만주어로는 히오완예이(Hiowan Yei, ᡥᡳᠣᠶᠠᠨ ᠶᡝ)로 읽는다.

    5.↑ 만주어에서 얼허는 ‘강’(康), 타이핀은 ‘희’(熙)를 뜻한다.

    6.↑ ᡝᠯᡥᡝ ᡨᠠᡳᡶᡳᠨ ᠾᠠᠨ라고 쓴다.

    7.↑ ᠧᠨᠺᠬ ᠠᠮᠭᠠᠯᠠᠨ ᠻᠠᠭᠠᠨ라고 쓴다.

    8.↑ 몽골어에서 엔크는 ‘강’(康), 암갈란은 ‘희’(熙)를 뜻한다.

    9.↑ 표기에 따라서 康煕, 또는 康熈라 쓰기도 한다.

    10.↑ 청사고 본기 권6 聖祖本紀一 에서는 다음과 같이 협엽의 영민함을 기록하고 있다. 天表英俊,岳立聲洪。六齡,偕兄弟問安。世祖問所欲。皇二子福全言:「原為賢王。」帝言:「原效法父皇。」世祖異焉。

    11.↑ 이름은 전해지지 않았으나, 순치제가 제일 총애하던 현비 동악씨의 소생이었으며 1657년(순치 14년)에 황태자로 지명되었으나 1658년(순치 15년)에 요절하고 난 뒤에 영친왕(榮親王)으로 추봉, 곧 황태자로 정식 추봉되었다.

    12.↑ 흔히 순치제가 이 때 천연두로 붕어하였다 하나, 그때엔 이미 천연두가 진정되었고 조정에서 급작스럽게 붕어 사실을 발표하여 순치제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하는 주장이 만만치 않았다. 이로 인해 불심이 깊어던 순치제가 스스로 황위를 버리고 출가하였다는 설이 있다.

    13.↑ 팔기군 가운데 정황기, 양황기, 정백기 출신만 뽑았으며 각 기당 2인씩 배출할 수 있는 정1품의 최고 관직이었다.

    14.↑ 보정대신들은 과거 환관들이 여러 번 나라를 망치는 데 주범이었다는 것과 당시 환관들은 모두 한족 출신이라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을까 봐 신속히 십삼아문을 폐지하였다.

    15.↑ 당시 오배의 전횡으로 많은 백성들이 조정과 관아에 탄원하였으나, 오배의 권력이 워낙 막강하였기에 들어주지 못하고, 심지어는 오배의 하수인들이 탄원한 백성들의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죽이기까지 하여 백성들의 눈총을 받았다. - 등예쥔 외 다수의 출처 (참고문헌 참조)

    16.↑ 당시 섬서와 하남 지역을 지키던 장군들은 거의 한족이었는데 이들은 삼번에 대해 동족감을 느꼈으며, 군부에서 오배 다음으로 실세였으며 막강한 군세를 지닌 오삼계에게는 적수가 되지 못하여 스스로 삼번 연합군에게 무기를 내려놓았다.

    17.↑ 강희제의 이러한 말에 동지사 복선군 이남은 "어찌 신하가 강하여 이렇게 백성이 굶주리게 되었을 리가 있습니까. 근년 이래로 저희 나라에 홍수와 가뭄이 잇달아서 연이어 흉년을 당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국가의 재정이 바닥나고 백성이 도탄에 빠졌으므로 임금과 신하가 밤낮으로 황급해 하고 심지어는 대내에 진공하는 물건까지도 모두 줄여 가면서 죽어가는 백성을 구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사대(事大)의 예를 폐기하지 않고 이번 진헌(進獻)에 힘을 다해 장만하여 겨우 거르는 것을 면하였는데, 어찌 신하가 강하여 백성의 빈궁을 가져오는 일이 있겠습니까."하고 대답하였고 강희제는 "정사가 국왕의 친척이여서 저리 말하는 것"이라 반응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의 같은 기사

    18.↑ 당시 서양 사회에서 보내는 선물을 동양의 강희제는 이것을 조공으로 오해하고 러시아가 자신의 신하국이 되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였다.

    19.↑ 강건성세 이후 후대에 들어 백련교도의 난이 일어나자 팔기군은 이미 제기능을 상실하여 난을 제압할 수 없었다. - 이윤섭,다시 쓰는 한국근대사, 평단문화사, 2009년 ISBN 8973433016, 51쪽

    20.↑ 현세적인 유교를 숭상한 강희제는 내세를 따지는 기독교의 교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21.↑ 선교사들은 부유한 궁정에서 설교하는 대신, 청나라의 한족 서민들에게 포교하려 하였으나 현세적인 한족과 만주족 등은 포교에 잘 응하지 않았다.

    22.↑ 선교사들은 같은 서양인인 러시아인들에게 청나라의 정보와 중국의 지도 등을 건네주는 간첩 역할을 맡기도 했다고 한다.

    23.↑ 강희 50년인 1711년을 대명세는 영력 65년으로 표기하였는데 당시 정통 연호를 쓰지 않는 것은 매우 커다란 중죄였다.

    24.↑ 3남 윤지는 강희제의 문화 사업을 총괄하였으나 따로 당파를 만들지 않았고, 윤기, 윤우와 윤도는 정치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25.↑ 흔히 이 방법은 강희제의 아들인 옹정제가 처음 했다 하나 옹정제는 이 승계 방법의 체계를 완성하였고 사실은 강희제부터 저위비건법을 통한 황위 승계가 시작되었다.

    26.↑ 당시 황자들의 황위 다툼으로 정국이 혼란스러웠고 또한 강희제마저 노쇠하여 정사를 돌보기 어려웠으며 편애를 일삼은 강희제를 원망한 윤진이 강희제가 평소에 신임하던 융과다를 매수·사주하여 독살시키고 북경 근방의 풍대병영의 군대를 동원하여 북경의 내성을 폐쇄하고 황궁인 자금성과 이궁인 창춘원을 순식간에 장악하였다는 설이다.

    27.↑ 일설에는 강희제가 옹정제는 탐탁치 않게 여겼으나 손자인 건륭제를 아껴 옹정제를 선택했다고도 한다. - 이즁텐, 박주은, 품인록, 에버리치홀딩스, 2007년 ISBN 8992708068, 365쪽

    28.↑ 효장문황후는 강희제가 오배를 제압하는데 결정적인 조력을 하였고 강희제는 평소 "할머니가 없었다면 나도 없다"고 존중하였다. - 바이하이진, 김문주 역, 《여왕의 시대:역사를 움직인 12명의 여왕》,미래의 창, 2008년, ISBN 8959890901,289

    29.↑ 궁녀의 이름이 새겨진 표를 황제에게 바치고 황제가 하룻밤을 보낼 궁녀를 선택하는 제도이다.

    30.↑ 사서인 《청사고》에는 강희제가 명나라 공주와 사랑을 나누었다는 내용은 없다.

     

    주석

    ↑ 가 나 청사고 본기 권6 聖祖本紀一 : 聖祖合天弘運文武睿哲恭儉寬裕孝敬誠信功德大成仁皇帝,諱玄燁,世祖第三子也。母孝康章皇后佟佳氏,順治十一年三月戊申誕上於景仁宮。

    ↑ 중국사학회(2005), 중국역사박물관 10, 34쪽

    ↑ 두산동아, 다산문선, ISBN 9050068050, 1299쪽

    ↑ 바이하이진, 김문주 역, 《여왕의 시대:역사를 움직인 12명의 여왕》,미래의 창, 2008년, ISBN 8959890901, 281-282쪽

    ↑ 가 나 천수쥔 (2006년 6월 20일). 청나라 궁정의 비사: 순치제의 출가와 옹정제의 황위 찬탈(揭秘清宮檔案:順治出家、雍正簒位皆屬戲說 / 解放日報) (중국어) (HTML). 2008년 9월 23일에 확인.

    ↑ 김희영, 《이야기 중국사 3》, p.295, 청아출판사, 2006년 ISBN 89-368-0437-6

    ↑ 장유유, 허유영 역, 황제 배후의 여인, 에버리치홀딩스, 2007년, ISBN 8995825197, 347-348쪽

    ↑ 청사고 본기 권6 聖祖本紀一 : 朕子玄燁,佟氏妃所生也,年八歲,岐嶷穎慧,克承宗祧,茲立為皇太子,即遵典制,持服二十七日,釋服,即皇帝位。特命內大臣索尼、蘇克薩哈、遏必隆、鰲拜為輔臣,伊等皆勛舊重臣,朕以腹心寄託,其勉天忠盡,保翊沖主,佐理政務。

    ↑ 가 나 염숭년. 청나라 12명의 황제의 진짜 모습(正說淸朝十二帝) (중국어) (HTML). 2008년 9월 18일에 확인.

    ↑ 장진범 주편, 중국법제사, 소나무, 2006년, ISBN 8971395486, 563쪽

    ↑ 장유유, 허유영 역, 황제 배후의 여인, 에버리치홀딩스, 2007년, ISBN 8995825197, 348쪽

    ↑ 가 나 바이하이진, 김문주 역, 《여왕의 시대:역사를 움직인 12명의 여왕》,미래의 창, 2008년, ISBN 8959890901, 288쪽

    ↑ 둥예쥔, 허유영 역, 강희원전-수신제가, 시아출판사, 2004년, ISBN 8981441464, 22쪽

    ↑ 장유유, 허유영 역, 황제 배후의 여인, 에버리치홀딩스, 2007년, ISBN 8995825197, 장유유, 허유영 역, 황제 배후의 여인, 에버리치홀딩스, 2007년, ISBN 8995825197, 350쪽

    ↑ 가 나 리정, 이은희 역, 제왕과 재상, 미래의 창, 2006년, ISBN 8959890499, 225-227쪽

    ↑ 둥예쥔, 허유영 역, 강희원전-수신제가, 시아출판사, 2004년, ISBN 8981441464, 25쪽

    ↑ 둥예쥔, 허유영 역, 강희원전-수신제가, 시아출판사, 2004년, ISBN 8981441464, 28쪽

    ↑ 이나미 리츠코, 김석희 역, 배신자의 중국사, 작가정신, 2002년 ISBN 8972881651, 281쪽

    ↑ 가 나 宋慧娟, 〈康熙帝对朝鲜政策透析〉, 《社会科学战线·2005年第6期》·中国古代史研究

    ↑ 김희영, 《이야기 중국사 3》, 297쪽

    ↑ 가 나 박덕규, 《중국역사이야기 4》, 일송북, 2008년, ISBN 8957320776, 462-463쪽

    ↑ 김희영, 《이야기 중국사 3》, 298쪽

    ↑ 가 나 조영록 외, 국학자료원, 동양의 역사와 문화, 1998년, ISBN 8982062734, 204-205쪽

    ↑ 가 나 김희영, 《이야기 중국사 3》, p. 298-301

    ↑ 김희영, 《이야기 중국사 3》, 301-302쪽

    ↑ 이나미 리츠코, 김석희 역, 배신자의 중국사, 작가정신, 2002년 ISBN 8972881651, 282쪽

    ↑ 박덕규, 《중국역사이야기 4》, 일송북, 2008년, ISBN 8957320776, 467쪽

    ↑ 둥예쥔, 허유영 역, 강희원전-수신제가, 시아출판사, 2004년, ISBN 8981441464, 76쪽 - 강희제는 삼번의 난 이전 부터 황족의 군사권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삼번의 난 와중에 황족과 패륵이 잘못을 범하면 군법으로 엄히 다스리고 군사권을 빼앗았기 때문에 난이 끝나자 대장군에 임명되었던 8명의 친왕, 군왕, 패륵들 가운데 군사권을 계속 가지고 있었던 사람은 3명에 불과하였다. 결국 강희 37년 군사권을 가지고 있었던 마지막 황족이 사망하자 어전회의에 참석하는 황족은 한 명도 남지 않게 되었다. 이후 《청성조실록》은 이전까지 〈의정왕대신회의〉로 기록하던 어전회의의 이름을 〈의정대신회의〉로 고쳐 적고 있다.

    ↑ 이상각, 화경 숙빈 최씨, 케이엔제이, 2010년, ISBN 899408004X, 92쪽

    ↑ 이상각, 화경 숙빈 최씨, 케이엔제이, 2010년, ISBN 899408004X, 64쪽 - 이는 효종 사후에 벌어진 예송 논쟁을 두고 왕의 장례에 신하가 예를 논한다고 비웃은 것이기도 하다.

    ↑ 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 권19 2年(1671 辛亥 / 청 강희(康熙) 10年) 2月 20日(壬寅) 2번째기사 : 汝國百姓貧窮, 不能聊生, 皆將餓死, 此出於臣强之致云, 歸傳此言於國王。

    ↑ 박덕규, 《중국역사이야기 4》, 일송북, 2008년, ISBN 8957320776, 438쪽

    ↑ 김흥식, 세상의 모든 지식, 서해문집, 2007년 ISBN 8974833174, 96장 정성공(428-431쪽) - 정씨왕국은 해상을 기반으로 무역을 하여 성장하였으나 그 실상은 해적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들은 일본 남부에서 동중국해에 이르는 넓은 영역에서 활동하였다.

    ↑ 둥예쥔, 허유영 역, 강희원전-수신제가, 시아출판사, 2004년, ISBN 8981441464, 240-246쪽

    ↑ 강영수, 《신 이야기 중국사 3》, 좋은글, 2001년, ISBN 8988790278, 281쪽

    ↑ 김흥식, 세상의 모든 지식, 서해문집, 2007년 ISBN 8974833174, 431쪽

    ↑ 이윤섭, 다시 쓰는 한국 근대사, 평단문화사, 2009년 ISBN 8973433016, 68쪽 - 당시 표트르 1세는 미성년으로 이복 누이인 알렉셰예브나 소피아가 섭정을 하고 있었다.

    ↑ KBS 역사야 놀자 제작팀, 《역사야 놀자 1 : 조선시대》, 경향미디어, 2009년, ISBN 899099179X, 189-198쪽

    ↑ 가 나 다 송금영, 러시아의 동북아 진출과 한반도 정책 (1860-1905), 새미, 2004년, ISBN 8954102417, 27-28쪽

    ↑ 박덕규, 《중국역사이야기 4》, 일송북, 2008년, ISBN 8957320776, 476쪽

    ↑ 이윤섭, 다시 쓰는 한국 근대사, 평단문화사, 2009년 ISBN 8973433016, 68-69쪽 - 네르친스크 조약은 만주어, 러시아어, 한문, 라틴어의 네 개 국어로 작성되었으며 중국의 역사에서 이러한 형식을 갖춘 것은 이 조약이 처음이다.

    ↑ 웨난, 심규호/유소영 역, 《열하의 피서산장 1》, 일빛, 2005년, ISBN 895645079X, 27-28쪽

    ↑ 김후,활이 바꾼 세계사, 가람기획, 2002년, ISBN 8984351148, 327-328쪽

    ↑ 중국사학회(2005), 중국역사박물관 10, 32쪽

    ↑ 둥예쥔, 허유영 역, 강희원전-수신제가, 시아출판사, 2004년, ISBN 8981441464, 221-222쪽

    ↑ 가 나 중국사학회(2005), 중국역사박물관 10, 33쪽

    ↑ 둥예쥔, 허유영 역, 강희원전-수신제가, 시아출판사, 2004년, ISBN 8981441464, 223쪽

    ↑ 웨난, 심규호/유소영 역, 《열하의 피서산장 1》, 일빛, 2005년, ISBN 895645079X, 156쪽

    ↑ 조영록 외, 국학자료원, 동양의 역사와 문화, 1998년, ISBN 8982062734, 150쪽 - 건륭제는 세로 편입된 이 지역을 신강(新疆)으로 명명했다.

    ↑ 가 나 조영록 외, 국학자료원, 동양의 역사와 문화, 1998년, ISBN 8982062734,206쪽

    ↑ 심종문, 장재서 역, 변성, 황소자리, 2009년, ISBN 8991508545, 27쪽

    ↑ 에블린 S. 로스키, 제시카 로슨, 《중국, 세 명의 황제》, 왕립 예술 학회, 런던, 2005년, ISBN 1-903973-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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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둥예쥔, 허유영 역, 강희원전-수신제가, 시아출판사, 2004년, ISBN 8981441464, 290-291쪽 강희제는 친정을 시작한 강희 8년 태학을 세우고 공자를 모시는 한편 한족 사대부의 요청에 따라 과거에 팔고문을 체택하였다.

    ↑ 로버트 K. 그린리프 《서번트 리더십 원전》, 참솔, 강주현 옮김, 2006년 ISBN 89-88430-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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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 나 웨난, 심규호/유소영 역, 《열하의 피서산장 1》, 일빛, 2005년, ISBN 895645079X, 28-36쪽

    ↑ 전국역사모임, 《살아있는 세계사교과서 1》, 휴머니스트, 2005년, ISBN 8958620706, 292쪽

    ↑ 전국역사모임, 《살아있는 세계사교과서 1》, 휴머니스트, 2005년, ISBN 8958620706, 292쪽

    ↑ 정진홍, 인문의 숲에서 경영을 만나다, 21세기북스, 2007년, ISBN 8950912767, 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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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 나 미야자키 이치시다, 《옹정제》, 차혜원 옮김, 이산출판사, 2001년, ISBN 89-87608-18-2

    ↑ 후동 강희왕조 “강희왕조”. 후동. 2010년 2월 17일에 읽어봄.

     

    참고 자료

    한국어 자료

    조나선 D. 스펜스, 《현대 중국을 찾아서 1》, 이산출판사, 김희교 옮김, 1999년 ISBN 89-87608-07-7

    조나선 D. 스펜스, 《강희제》, 이산출판사, 이준갑 옮김, 2001년 ISBN 89-87608-17-4

    조관희, 《한권으로 읽는 이야기 중국사》, 청아출판사, 2003년 ISBN 89-368-0100-7

    등예쥔, 《수신제가 (강희 원전)》, 시아출판사, 허유영 옮김, 2004년, ISBN 89-8144-146-4

    김희영, 《이야기 중국사 3》, 청아출판사, 2006년 ISBN 89-368-0437-6

    정진홍, 《인문의 숲에서 경영을 만나다》, 21세기북스, 2007년 ISBN 978-89-509-1276-5

    중국사학회, 강영매 역, 중국역사박물관 제10권, 범우사, 2005년, ISBN 890804308X

    중국어 자료

    《청사고》(淸史稿) - 〈성조인황제실록〉(聖祖仁皇帝實錄)

    《청사고》(淸史稿) - 〈세조장황제실록〉(世祖章皇帝實錄)

    閻崇年 《康熙大帝》(中華書局)

    劉波濤 《企業家傳記:大淸CEO康熙回憶錄》(南海出版公司)

    張姸 《大淸朝一代英主:原來康熙》(重慶出版社)

    읽을 거리

    송미령 ( Mi Ryung Song ), 청(淸) 강희제(康熙帝)의 황태자(皇太子) 경정과 그 위상(位相), 명청사학회, 명청사연구, 2010년

    송미령 ( Mi Ryung Song ), 강희제(康熙帝)의 청(淸) 제국(帝國) 구상과 만주족(滿洲族)의 정체성 -예수회 선교사들의 기록을 중심으로- 역사학회, 역사학보, 2007년

    조영헌 ( Young Hun Cho ), 강희제(康熙帝)와 휘상(徽商)의 조우 -흡현 잠산도(岑山渡) 정씨를 중심으로-, 동양사학회, 동양사학연구, 2006년

    송미령, 청(淸) 강희제(康熙帝) 동순(東巡)의 목적과 의미, 명청사학회, 명청사연구, 2005년

    신봉승, 청년세종(靑年世宗)의 리더십 -청(淸)나라 “강희제(康熙帝)”의 염원(念願)이 의미하는 것-, 대한산부인과학회, 연수강좌,2008년

    박정상, 강희제칙명찬본의 여운, 한국장서가회, 상서, 1983년

    안대옥, 만문(滿文) 『산법원본(算法原本)』과 유클리드 초등정수론(初等整數論)의 동전(東傳), 중국사학회, 중국사연구, 2010년

    임계순 ( Im Gye Sun ), 18세기 청조 제2의 정치중심지, 승덕 피서산장, 명청사학회, 명청사연구, 2004년

    이영옥, 대청회전(大淸會典) -명문화된 만주인의 중국지배,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구 역사학연구회), 사총, 2010년

    안대옥, 청대(淸代) 전기(前期) 서학(西學) 수용(受容)의 형식과 외연, 중국사학회, 중국사연구, 2010년

    송미령, 합의(合議)에서 지명으로 -청대 황위계승방식의 변화-, 이화사학연구소, 이화사학연구, 2005년

    구만옥 ( Mhan Ock Koo ), 동서(東西)의 만남과 실학: 동아시아 지식세계와 마테오리치 ; 마테오 리치(利瑪竇) 이후 서양 수학에 대한 조선 지식인의 반응, 한국실학학회, 한국실학연구, 2010년

    박기수 ( Kee Soo Park ), 근대 중국의 해관(海關)과 『중국구해관사료(中國舊海關史料)(1859-1948)』, 수선사학회, 사림(성대사림), 2010년

     

    외부 링크

    네이버 캐스트 : 오늘의 인물 - 강희제

    N. Kauda 글, 李鍾麟 옮김, 브리태태니커백과: 강희제 Nate.com에서 2011년 2월 20일 최종 확인

    Doopedia 두산백과: 강희제 Naver.com에서 2011년 2월 20일 최종 확인

    분류: 1654년 태어남 | 1722년 죽음 | 청나라의 황제 | 베이징 출신

     

    오배

    과이가오배(瓜爾佳鰲拜, 1614년 ~ 1669년)또는 구왈기야 오보이(Guwalgiya Oboi)는 청나라 초기의 대신이다.

     

    생애

    그는 만주 양황기 사람으로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워 홍타이지에게 만주 제일의 용사라는 칭호를 얻었다. 1661년 순치제의 유명을 받들어 색니·소극살합·알필륭 등과 함께 황태자 현엽을 황위에 올리니 그가 강희제이다.

    오배는 조정의 군권을 장악하여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으며 백성들의 땅을 불법으로 획책하는 등 안하무인으로 행동하였다. 심지어 다른 보정대신인 소극살합을 역모죄로 처형해버리자, 분노한 강희제는 오배를 치려 하였으나 잠시 사태를 지켜보았다. 1669년(강희 8년) 오배는 자신의 사병을 이끌고 자금성에 침입, 강희제를 죽이려 하나, 도리어 강희제의 친위대에게 군대가 전멸당하고 자신도 붙잡혔다. 강희제는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곧 구금으로 형을 낮췄다. 몇몇 기록에 따르면 오배는 사로잡히는 순간 강희제에게 누르하치를 지키면서 생긴 수많은 상처를 보여줬고, 이 때문에 강희제는 마음이 흔들려서 형을 낮추었다고 한다. 오배는 사후인 1713년이 되어서야 명예를 회복하였다. 그때서야 강희제는 그의 죄를 용서하였고 옹정제는 그에게 최고의 장군 급인 벼슬과 함께 초무(超武)라는 시호를 내렸다. 하지만 후에 건륭제가 그의 치적을 살펴보고 벼슬을 강등시켰다.

     

    같이 보기

    강희제

    색니

    소극살합

    분류: 1614년 태어남 | 1669년 죽음 | 청나라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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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색니

    혁사리색니(赫舍里索尼, 1601년 ~ 1667년) 또는 허서리 소닌(Heseri Sonin)은 청나라 초기의 대신으로 청나라의 개국공신이다. 만주 정황기(正黃旗) 사람이다.홍타이지를 모시고 많은 공을 세웠으며 그 공으로 청나라 조정을 관장하는 내무부총관(內務部總官), 영시위내대신, 감국대신 등을 역임하며 청나라 조정에서 없어서는 안될 인물이 되었다. 1661년(순치 18년) 순치제가 붕어하기 전 오배·소극살합·알필륭 등과 순치제의 고명을 받아 고명대신이 되었으며 황태자 현엽을 제위에 올리니 현엽은 강희제가 된다. 강희제 초기에 강희제와 효장태황태후를 많이 도왔으며 다른 고명대신인 오배를 견제하기도 하였다. 1667년에 노환으로 6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아들 혁사리색액도{赫舍里索額圖, 또는 허서리 송고투(Heseri Songgotu)}는 오랫동안 강희제를 보필하였고, 색니의 손녀는 강희제에게 시집가 황후가 되니, 그녀가 강희제의 첫 번째 황후 효성인황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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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 1601년 태어남 | 1667년 죽음 | 청나라의 정치인 | 중국의 섭정

    숨은 분류: 중국 사람에 관한 토막글

     

    소극살합

    납란소극살합(納喇蘇克薩哈, 1607년경 ~ 1669년) 또는 나라 숙사하(Nara Suksaha)는 청나라 초기의 대신이다. 만주 정백기(正白旗) 출신이다. 원래 순치제 때, 섭정왕 도르곤을 모셨으나, 도르곤이 죽은 이후, 순치제에게 적극 협조하여 순치제의 신임을 얻었다. 1661년(순치 18년) 순치제의 임종 시, 색니·오배·알필륭 등과 함께 고명대신으로 임명되어 황태자 현엽(강희제)을 황위에 올렸다. 당시 대만에서 문제를 일으키던 장수 정지룡의 살해를 명하여 강희제의 신임을 얻었다.

    1667년 보정대신 색니가 죽자, 색니의 부탁과 함께 강희제를 보호하는 대신 다른 보정대신인 오배를 견제하려 하였으나, 이미 군권을 장악한 오배는 소극살합이 선황 순치제의 황릉을 돌보지 않아 선황을 배반하였다는 이유 등 모두 24개의 죄목으로 소극살합을 모함, 강희제를 어쩔 수 없이 소극살합을 처벌하였고 소극살합은 1669년에 교수형당했다.

    분류: 1607년 태어남 | 1669년 죽음 | 청나라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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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필륭

    뉴호록알필륭 (鈕祜祿遏必隆, , ? ~ 1673년)또는 니오후루 에빌룬(Niohuru Ebilun)은 청나라 초기의 대신으로 누르하치의 심복이자 개국공신인 어이도(額亦都)의 16번째 아들로, 어머니는 누르하치의 딸이다. 순치제가 후계자 강희제를 위해 임명한 보정대신 중 한 명이다. 알필륭은 오배에게 협조하여 소극살합을 모함하여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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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 1673년 죽음 | 만주족 | 청나라 사람

    숨은 분류: 중국 사람에 관한 토막글

     

    辅政大臣 fǔzhèng dàchén

    从中国历史上来看,幼主与辅政大臣之间基本上是一对政治上的矛盾体。儿童皇帝作为名义上的最高统治者,却没有实际的决断能力和才华,离不开一些老臣子的帮助,实际的权力基本掌握在辅政大臣手中。一般来说,辅政大臣是老皇帝用惯了的人,资历才干都没有什么大的问题,但关键是品德。在老皇帝的权力威望之下,这些臣子小心谨慎,不敢有什么想法,可老皇帝去世小皇帝登基,昔日的臣子慢慢掌握了实际权力后,就尝到了权力的甜蜜滋味,位高权重,多半会自我膨胀起来,或者干脆就有了别的想法。即使没有“想法”,可把持朝政时间长了,难免有些不够检点的地方,对上不够恭敬,对下不够谦和,得罪之处在所难免。等到皇帝大了,积累的怨气找个机会撒出来,也非同小可。

     

    所以说,在这个位置上,基本上是在以二三把手的名义,行使一把手的权力,即使自己没有谋逆篡位的想法和初衷,也多半会落下个权臣的名声。在这个位置上,管多了不是,干少了也不是;小皇帝顽皮胡闹或者是扶不起的阿斗不好办,太能干了也不好办——这是一个绝对尴尬的二把手位置,真正是无限风光在险峰——显赫却难得善终。司马光曾说:“夫威福者,人君之器也;人臣执之,久而不归,鲜不及矣。”

    历史上曾处于这个位置而留下好名声的不过周公、诸葛亮等极少数品德高尚能力出众者而已。而即使是这些人,事实上也一直为最高权力者所忌惮。周公辅佐周成王,被孔子誉为圣人,然而周成王实际掌握权力之后,就逼迫周公回到他儿子所在的封国“致仕养老”。而诸葛亮,虽然在世的时候深受刘禅信任和敬重,然而在他死了之后,刘禅一直压抑的不满却在多处流露出来。再如汉时的霍光拥立昭帝、宣帝,为西汉王朝权力的平稳过渡立下莫大功勋,然而当他为汉宣帝赶车时,汉宣帝看着他的背影却坐立不安如芒刺在背,后来换了车骑将军张光世赶车,汉宣帝就很轻松了。霍光去世后不久霍家灭亡,史家有人曾说“霍氏之祸在于骖乘”。明时的张居正也是一个例子。这些品德高尚为后人所景仰的人物尚且只能得到这样的结果,更何况其他那些人。

     

    就大清朝而言,这样的情况也发生过好几次,前有多尔衮,后有肃顺等人。

    康熙皇帝即位后的辅政大臣是四个,原意是让其互相牵制,以防再出现多尔衮的前车之鉴,但这四人中却有一个大大的刺头,就是号称满州第一勇士的鳌拜。

    当时在四位辅政大臣中,索尼资格老,威信高,是顾命大臣之首。遏必隆是名门之后,屡立战功,却与鳌拜交好。苏克萨哈原本依附多尔衮,多尔衮死后,他立刻站出来告发刚刚死去的多尔衮,这才获得顺治信任,但其威信却不高,爵位也在他人之下。因此名列第四、功勋卓著的鳌拜对排在他前面的苏克萨哈很不服气。

    在这种不服气之中,其实还有着更深的因素。原因在于苏克萨哈隶属于正白旗,而另外三人却属于两黄旗(镶黄旗和正黄旗)。当初正白旗旗主多尔衮擅权之时,曾对两黄旗多加打压。多尔衮去世之后,朝局一变,黄旗抬头,白旗失势。苏克萨哈虽以白旗投靠黄旗,但索尼、遏必隆、鳌拜都瞧不起他。词条图册更多图册

    开放分类:人物,历史,皇帝,权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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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옹정제

    옹정제(雍正帝, 강희(康熙) 17년 음력 10월 30일 (1678년 12월 13일) ~ 옹정(雍正) 13년 음력 8월 22일 (1735년 10월 8일))는 청나라의 제5대 황제(재위 1722년 ~ 1735년)이자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한 직후 청나라 군대의 산해관 입관(入關) 뒤 중국 대륙을 실질적으로 통치한 정통 황조로서의 세 번째의 중국 청나라 황제이기도 하다. 성은 애신각라(愛新覺羅), 휘는 윤진(胤禛)[1], 묘호는 세종(世宗), 시호는 경천창운건중표정문무영명관인신의예성대효지성헌황제(敬天昌運建中表正文武英明寬仁信毅睿聖大孝至誠憲皇帝), 짧은 시호로는 헌황제(憲皇帝)이며, 연호는 옹정(雍正)이다. 또한 만주어로는 후왈리야순 톱 한(Hūwaliyasun Tob Han)[2], 몽골어로는 나이랄트 퇴브 칸(Nairalt Töv Khaan)[3]이라 불리기도 한다. 제4대 황제인 강희제(康熙帝)의 넷째 아들이며[4] 강희제의 후궁 출신인 효공인황후 오아씨(孝恭仁皇后 烏雅氏)의 소생이다.

    아버지처럼 치밀하면서 거기에 성실하기까지 한 성격의 소유자로 이미 황자인 옹친왕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어 정치적 세력을 모으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8황자 윤사, 9황자 윤당, 10황자 윤아, 14황자 윤제 등과 정치적으로 크게 부딪혔다. 1722년(강희 61년)에 부황 강희제가 붕어하자 군사들을 동원하여 황궁을 장악, 형제들을 철저히 창춘원에 감금시키고 강희제의 고명대신들인 장정옥·융과다 등의 추대를 받아 황제에 오른다. 13년간의 짧은 치세였으나 그의 정책으로 청나라는 강희제 말기 약간 부실하던 황권을 다시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특히 황실의 안정과 강력한 황권을 수립하기 위해 과거 황위를 놓고 다툰 형제들은 죽이거나 감금하는 등 철저히 배제시켜 놓고 대신들과 정사를 의논하였다.

    그의 정책으로 국가는 더욱 안정이 되었고 내실 역시 튼튼해졌으며 재정 개혁을 통하여 기강 단속과 재정 정비를 일거에 실행하는 정책을 추진함과 더불어 조세제도 자체에도 개혁을 단행했다. 또한 군기처를 세우고 황권을 더욱 강화, 재상들의 정치 발언권을 규제하였고 재상들의 정치 참여를 규제한 대신 자신에겐 재상들이 본래 결재하던 문서의 양까지 합하여 어마어마하게 많은 양의 문서를 검토, 이에 일일이 답하였고 하급의 지방관이라도 자신에게 상소를 올리면 이 역시 받아주어 주필로 써서 보내주어서 명군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재상들과 대신들을 군기대신으로 삼고 같이 정사를 의논하였으나 이미 그들의 권세는 명나라 때의 대신들인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에 비하여 크게 축소되어 있었기에 신권은 크게 위축되었다. 강희제 때 일어난 문자의 옥을 다시 대대적으로 실시하여 청나라의 정통성에 반대하는 학자들과 한족을 엄정히 다스렸으며 지방관들에 대한 철저한 감시로 부정부패를 크게 줄였다. 그러나 강희제가 죽은 직후 군사들을 동원하여 황제에 올랐기 때문에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황위를 찬탈한 권력 지향적 독재자라는 평판과 지칠 줄 모르고 늦은 밤까지 정치에 몰두하고 백성들을 생각한 훌륭한 군주라는 평가의 양면에 서있기도 하다.

     

    생애

    초기 생애

    1678년(강희 17년) 12월 13일에 북경 자금성 동육궁 중 하나인 영화궁(永和宮)에서 덕비(德妃) 오아씨에게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윤진은 학문에도 관심이 있어 황자들의 교육 기관인 상서방(上書房)에서 유교의 경전과 불경을 고루 암송하였고 무예와 사냥을 학문보다 더 좋아하는 전형적인 무인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안 강희제는 윤진을 비롯한 황자들이 깊숙한 궁궐에서 살면 유약해지고 자신만 알게 되어 욕심만 많아지며 퇴폐적으로 변할 것을 염려하여 밖에 자주 데리고 나갔다. 부황인 강희제는 윤진을 엄격히 가르쳤으며, 모험심이 강한 윤진은 중국 전역을 여행하며 식견을 넓혔다. 그의 활솜씨는 가히 황자들 중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여 80근의 강궁을 능히 다루어 백발백중이었고 이를 곁에서 본 강희제가 사냥에는 언제나 그를 데리고 나갔다 한다. 또한 윤진은 황자로서 강희제의 북경의 민정시찰 미행과 남쪽 순행을 수행하였다. 강희제의 셋째 황후인 효의인황후(孝懿仁皇后)는 윤진을 매우 총애하여 자식이 없던 그녀는 윤진을 양자로 삼기도 하였다.[5] 효의인황후는 1689년(강희 28년) 죽을 때까지 윤진의 교육에 신경을 쓰고 강희제가 정무를 보는 도중에 붓을 놓거나 옥새를 가져오는 등 강희제의 잔시중을 들게 하여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다.[5] 12살이 되는 그 해에 윤진은 황족 중 세 번째로 높은 작위인 패륵(貝勒)에 봉해졌고, 1696년(강희 35년) 강희제의 몽골의 칸 가르단 원정 때 정홍기(正紅旗) 부대의 명예대장이 되어 몽골에서 크게 활약하였고 알타이 산맥에 숨어 있던 가르단을 추격하여 도중에 가르단의 군사의 기습이 있었으나 이를 물리치고 역으로 가르단의 군대를 섬멸하였다.

    1698년(강희 37년)에 윤진은 가르단의 군사를 찾아내어 섬멸한 공을 높이 사서 군왕에 봉해지고 옹군왕(雍郡王)이라 불렸다. 이후에는 주로 내정(內廷)에서 활약하여 병부와 호부의 일을 관장하기도 하였다. 1704년(강희 43년)에 장강과 황하가 크게 범람하자, 강희제는 윤진과 13남 윤상을 흠차대신으로 파견하여 세금을 걷어오게 하였다. 윤진은 강희제의 순행 때 여러 번 부황을 수행하여 강남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 능력을 믿은 강희제는 윤진을 보냈다. 그 당시 청의 국고는 50만 냥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재민 구제와 치수를 위해 당시 부유한 강남에서 세금을 징수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탈세를 하고 윤진에게 비협조적이던 30여 명의 강남 관리들을 모조리 파면하거나 멀리 내쫓아버렸다. 이에 독단적이라는 일부 신료들의 비판이 있었으나, 오히려 강희제는 그러한 일엔 상벌을 엄중히 다루어야 한다며 부정부패를 일삼던 관리들을 척결한 윤진을 비호하였다. 윤진은 이들을 파면한 후 압류하거나 일부 부자들이 자발적으로 낸 세금을 이용하여 이재민들에게 신속히 구호물자를 전달하였다. 1707년(강희 46년)에 다시 장강과 황하가 크게 범람하자, 3년 전의 경험을 살려 다시 좋은 성과를 냈다.

    이로 인해 부황 강희제의 총애를 더욱 많이 받았으며 1709년(강희 48년)에 황자들 중 최고위 작위인 화석친왕(和碩親王)을 제수 받고 옹친왕(雍親王)이라 불리게 되었다.

     

    세력 형성

    황태자 윤잉의 폐위와 황자들의 다툼의 자세한 배경에 대해서는 강희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708년(강희 47년)에 강희제는 주색잡기에만 빠져 있으며 정신이 이상해져 자신의 기대를 저버린 차남인 황태자 윤잉을 내몽골의 여러 칸들과 신료들이 모인 자리에서 폐위시킨다. 그러나 이때 폐위되었을 때 윤잉이 군사를 이끌고 강희제가 묵던 천막을 힐끔거리며 강희제를 시해하려 하였다는데, 사실 이것은 윤잉의 이복형인 윤시가 자신이 슬쩍 군사를 움직이고 그것을 윤잉의 잘못으로 모함하였던 것이다. 강희제는 사실을 알고 나자 크게 후회하며 이듬해인 1709년(강희 48년)에 강희제는 자신의 죽은 황후인 효성인황후에 대한 마음과 사실 윤잉이 대역죄를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복위시켜 주지만, 윤잉은 반성하지 않고 심지어 부황의 비빈들까지도 노렸고 더군다나 일부 비빈을 범하기도 하였다. 이에 분한 강희제는 천인공노할 패륜을 저질렀다 하며 윤잉을 크게 비난하였다. 또한 강희제가 남쪽으로 순행을 갈 당시 강희제를 몰아낼 정변을 주도했다 하여 윤잉을 다시 황태자에서 폐위시키고 영원히 서인으로 삼아 함안궁에 유폐하니 그 때가 1712년(강희 51년)이었다.[6]

    그러나 윤잉의 폐위에는 그의 많은 반대파들, 그중에서도 만주족 대신들이 크게 일조하였는데 이들은 본래 만주족 전통에 따라 가장 실력 있는 아들이 황위를 이어야 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강희제의 이러한 중국식 황위 승계를 비판해 왔다. 또한 이들은 강희제에게 윤잉이 언제나 부황을 죽일 기회만 엿보고 주색잡기만 밝히며 밤마다 기방에 몰래 가서 수십 명의 기녀와 동침한다고 하며 밤마다 강희제의 인형을 만들어 그 인형을 칼로 내리찍는다는 등 유언비어를 써서 강희제와 윤잉의 사이를 멀어지게 만들었다. 심지어 윤잉의 이복 동생들, 즉 강희제의 여러 아들들은 각기 자신들이 가장 실력 있는 황자여서 황위를 물려받아야 한다고 우기며 윤잉의 반대파인 신료들의 뒤를 봐주고 윤잉을 모함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어머니인 효성인황후를 태어나자마자 잃고 어머니의 모정을 못 받고 자라며 부황 강희제의 과잉보호로 큰 윤잉이 자신 스스로 강해지지 못하고 그를 벗어나기 위해 이상한 행동을 하였다 한다. 어찌되었건 이러한 전례를 끝으로 청나라는 죽은 황자를 황태자로 추서만 했을 뿐 황제가 살아있을 때 특정 황자를 황태자로 책봉하지 않았다.

    정국을 읽는 눈이 빨랐던 4황자 옹친왕 윤진은 원래 유일한 적자이자 황태자로서의 정통성을 가진 윤잉을 지지하였으나, 윤잉이 폐위되자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13황자 윤상(胤祥), 17황자 윤례(胤禮), 자신의 양모였던 효의인황후의 동생인 대신 양외숙부 융과다(隆科多)와 사천 순무로 있던 장군 연갱요(年羹堯), 그리고 자신의 집사인 이위(李衛) 등을 자신의 세력 안에 두고 부황의 신임을 얻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다른 황자들과는 달리 은밀히 세력을 넓히려 하였고 공식 석상에서도 정치에 관한 얘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7] 그 중 융과다는 본래 아버지 동국유와 함께 윤진의 8번째 동생 윤사의 파당에 속하였으나 내성과 황성의 안위를 책임지는 융과다가 중요한 것을 안 윤진은 치밀한 계산 하에 융과다를 매수하고 그를 자신의 파당으로 영입하였다.

    윤진의 가장 큰 경쟁자들은 서장자이자 황장자인 직군왕 윤시, 3남 성친왕 윤지, 8황자 염친왕 윤사, 14황자 순군왕 윤제였다. 형제들이 자신도 의심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던 윤진은 자신의 관저인 옹왕부에 틀어박혀 승려들과 불도를 논하여 정치에 미련이 없는 것처럼 위장하였다.[5] 그로 인해 윤진은 강희제에게 파당을 만든다는 핀잔을 다른 형제들보다 더 적게 들을 수 있었다. 또한 부황에게는 언제나 충효를 다하며 형제들과는 우애가 깊은 척 하여 강희제가 마음을 놓고 윤진을 허물없이 대하였다. 당시 이부의 관리였던 임백안(任伯安)이라는 사람은 《관가백추도》(官家百醜圖)라는 책을 지었는데, 이 책에는 당시 조정에서 근무하는 고관대작에서부터 무명의 미관말직이 받는 뇌물과 그 양, 그에게 청탁 뇌물 등을 바친 자들의 이름이 상세하고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당시 황자들은 이 책을 이용하여 신료들과 조정을 장악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윤진은 이 책 상자를 찾아내어 불태워 버리고 임백안을 능지처참하였다. 부황 강희제는 처음에 크게 화를 내며 윤진을 나무랐으나 윤진은 오히려 이것을 불태우지 않으면 나라에 대혼란이 오고 이것을 악용하여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피를 보게 된다고 간언하여 강희제는 앞일을 내다볼 줄 아는 윤진을 칭찬하였다.[8]

    그러나 황장자 윤시는 부황에게 폐태자 윤잉을 자기 손으로 죽이겠다는 말을 하여 부황의 분노를 샀고, 이로 인하여 윤시의 작위는 박탈되고 윤시는 유폐되었다. 3남인 윤지는 윤시와 윤잉이 유폐된 이후로 장자 행세를 하였으나 강희제의 대편찬사업을 총괄하기만 할 뿐, 정치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윤사는 윤진과 함께 황자들 중 가장 영특하였으나 윤잉이 폐위당한 이후 노골적으로 태자직은 물론 황위를 노렸고 이 소문이 들리자, 강희제는 윤사를 매우 싫어하고 윤사의 문안 받기를 거부하였다. 강희제가 윤사를 불러들여 조용히 살라고 말을 하였음에도 윤사는 자신의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고 이에 대한 조치로 강희제는 윤사를 한 달간 냉궁에 유폐시키기도 하였다. 14황자 윤제는 윤진의 동복 아우였으나 강희제와 같이 많은 원정을 다녀왔고, 북쪽의 국경을 지키는 무원대장군(撫遠大將軍)을 관직으로 받았다. 무원대장군직은 흔히 황위를 이어받을 후계자나 다름없는 자리었기에 일부 학자들은 강희제가 황위로 앉힐 윤제에게 미리 대장군의 직함을 내려준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강희제는 군사적인 일은 모두 윤제와 의논하였으나 정치와 내정에 관한 일은 이미 오랫동안 조정에서 활약하던 윤진에게 물어보고 춘계와 추계에 곡부에서 열리는 공자의 제사를 그에게 맡겼다.[5]

     

    강희제의 유조와 정변

    1722년(강희 61년) 12월 초, 강희제는 병이 들어 북경의 이궁인 창춘원(暢春園)에 있었다. 이때 강희제는 모든 백성들과 대신들이 쇠약하진 자신을 보면 자신의 병세를 눈치 챌까 두려워 모든 대신들의 출입을 통제시키고 황자들 역시 자신의 허락 없이는 창춘원에 들어오지 말라 명하였다. 그 당시에 대신들 중 유일하게 출입이 가능했던 자는 윤진의 심복 중 심복인 구문제독 겸 보군통령 융과다와 영시위내대신 장정옥(張廷玉)이었다. 공식 기록인 《청사고》(淸史稿) 〈성조인황제실록〉에 따르면 1722년(강희 61년) 12월 20일 강희제는 3남 성친왕 윤지, 7남 윤우, 8남 윤사, 9남 윤당, 10남 윤아, 12남 윤도, 13남 윤상 등 7명의 황자들과 대신들을 불러 모았고 후계자로 4황자 윤진을 지명한 후 붕어하였다. 당시 강희제의 전위 조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 제4황자 옹친왕 윤진은 인품이 귀중하고 사려가 깊으니 짐이 생각하건대 필히 대통을 이을 자격을 갖추었다. 고로 짐의 뒤를 이어 즉시 황제의 자리를 잇도록 하고 예법에 따라 상복을 입다가 27일에 평복으로 갈아입고 새 황제의 즉위를 만천하에 알려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알게 하라.[9]

    당시 후계자로 4황자 옹친왕 윤진과 14황자 순군왕 윤제 중 고심하던 강희제는 성격이 치밀하고 신중하여 황위를 물려받을 수 있는 재목이라 여기고 윤진에게 넘긴 것이다. 그러나 강희제의 죽음과 후계자로 윤진을 지목한 것에 대해 많은 가설들이 있다. 역시 아버지를 죽이고 황제에 올랐다는 수 양제는 부황인 수 문제를 시해하였다는 증거가 정사인 《수서》와 《자치통감》에 상세히 나와 있어서 그가 부황을 죽이고 황위에 올랐다는 것이 정사와 야사 모두 일치하나, 야사에서 주장하는 윤진의 강희제 시해는 청나라 정사인 《청사고》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 특히 야사에서는 그 당시 강희제의 침전을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던 융과다는 윤진을 황위에 올리기 위해 강희제의 유조를 변조하고 강희제를 시해했다는 가설이 있으나, 증거가 불충분하다.[6] 또는 윤진이 직접 강희제를 죽였다 하나 이 역시 증거가 불충분하다.

    그러나 분명 강희제의 붕어와 윤진의 즉위에 대해서는 여러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대개 다음 황위를 한 황자에게 넘겨주면 조정이나 군을 장관하는 황자에게 넘겨주었어야 하는데 윤진은 강희제 붕어 당시 아무런 군사적 권한이 없었다. 또한 가장 총애 받던 14남 윤제는 무원대장군의 작위를 받아 막강한 군권을 손에 넣었기 때문에 강희제의 진정한 후계자는 윤진이 아닌 윤제라는 소문이 널리 퍼지기도 하였다. 이 소문을 뒷받침하는 가장 유명한 설은 바로 강희제의 유조가 융과다에 의해 ‘14황자 윤제에게 물려준다.’(傳位十四皇子)에서 ‘4황자 윤진에게 물려준다.’(傳位于四皇子)로 고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설에도 약간의 황당한 점은 있다. 당시 ‘어조사 우’(于) 자가 널리 쓰이지 않았고 황실 문서에서는 ‘어조사 어’(於) 자만이 쓰였다는 점과 유조같이 중요한 공식 황실 문서에서는 만주 문자와 한자를 다 써야 하나, 이 유조는 한자로만 쓰였다는 점, 황자들에게는 반드시 태어난 순서에 따라 그 앞에 황(皇) 자를 붙여 써서[10][6] 만약에 윤진에게 넘겨준다 하였으면 황사자(皇四子)로 표기했어야 하나 이렇게 표기하지 않고 사황자(四皇子)로 표기하였다는 점이다. 또한 윤진이 즉위하자 은근히 윤제만을 편애하던 윤진의 모비 덕비 오아씨도 윤진이 아버지를 시해하고 황제에 오르자 윤진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1723년(옹정 원년) 초에 목을 매 자살하였다고도 한다.[11] 그리고 당시 북경 내성의 9개 성문은 당시 내성을 통괄하던 융과다의 명으로 강희제의 사망일인 12월 20일을 기준으로 6일 동안 굳게 닫혀 있었다 한다.[6]

    또한 윤진이 즉위하게 된 것은 재빨리 정국을 이용하여 즉위하게 된 것이라 한다. 윤진이 비록 부황의 총애를 받았으나 후계자까지는 아니었고 야심이 컸던 윤진이 군사들을 이용하여 부황과 형제들을 살육 또는 감금하여 황제에 올랐다는 설 역시 존재한다. 일부 사람들은 강희제는 결코 황위 계승의 유조를 남기지 않고 후대 사람이 조작하였다라고 주장하지만[6] 어쨌든 윤진이 강희제의 유조로 인하여 즉위하였으므로 더 이상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즉위와 형제 숙청

    강희제 붕어 후 3일 뒤인 1722년(강희 61년) 12월 23일에 융과다가 유조를 발표하고, 12월 27일에 4황자 옹친왕 윤진이 결국 황위에 오르니 이가 청나라의 제5대 황제인 세종 옹정헌황제(世宗 雍正憲皇帝)이다. 연호는 옹정(雍正)이라 칭하였는데, 여기서 ‘옹’(雍) 자는 자신이 받았던 작위인 옹친왕(雍親王)에서 비롯된 것으로 조화로움을 뜻하며, ‘정’(正) 자는 정의로움과 바름을 뜻하니 옹정은 바로 조화로움 속의 올바름이라는 뜻이다.[6] 많은 사람들은 강희제가 분명 가장 총애한 14황자 윤제를 후계자로 점찍을 것으로 예상하였으나 말수가 없이 조용하던 4황자 윤진으로 후계자로 낙점했다는 것에 의아하였다 한다.[12] 아버지 강희제가 69세까지 재위하여 옹정제는 이미 즉위 당시 45세의 중년이어서 황제에 오르기에는 조금 늦은 나이였으나 자신의 정치 역량을 서서히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옹정제는 즉위하자마자 자신에게 반대한 형제들을 제거하기 시작하였다. 형제들이 자신을 너무나 많이 음해한 것을 잘 아는 옹정제는 자신의 정책 실행과 그 안정을 위해 형제들을 제거하려 하였다.[7] 일단 그는 자신을 제외한 모든 형제들의 돌림자인 ‘윤’(胤)을 역시 발음이 같은 ‘윤’(允) 자로 고치게 하였다.[13]

    그 후, 옹정제는 어머니인 덕비 오아씨를 황태후로 존숭하고 자신에게 반대하던 윤사, 윤당, 윤아 등을 각각 염친왕(廉親王), 혁군왕(奕郡王), 돈군왕(敦郡王)에 봉하여 안심시킨 뒤, 윤사를 총리왕대신(總理王大臣)으로 임명하여 같이 정사를 의논하게 했다. 특히 옹정제는 윤사를 자주 불러 정사를 의논하는 척 했으나 사실은 윤사와 그 파당간의 연락하는 시간을 줄여서 함부로 모의하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윤사가 여전히 자신의 파당과 음모를 꾸미자 옹정제는 형제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옹정제의 형제 숙청에 13제 윤상과 17제 윤례를 제외한 거의 모든 형제들은 홀대를 받다가 좋지 않은 최후를 맞이하였다. 13황자였던 윤상은 이친왕(怡親王)으로 봉해져 총리왕대신으로 옹정제와 정사도 논의하는 등 승승장구하였으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인 동복아우 14황자 윤제는 옹정제의 심복 연갱요의 감시를 받아 군권을 강제로 회수당하고 북경으로 돌아와 모든 작위를 빼앗기고 강희제의 능침인 경릉(景陵)으로 내쫓겨 능지기로 살았고 8황자 염친왕 윤사와 9황자 윤당은 옹정제에게 사사건건 반대하였던 것을 계기로 제일 불행한 말년을 보냈다.[12] 윤사는 이미 오래 전부터 옹정제의 제위 계승에 대해 불만이 많았으며 설상가상으로 옹정제의 3남 홍시(弘時)를 황제로 세우려 하였으나 옹정제에게 덜미를 잡힌 윤사는 태묘에서 관직을 삭탈당하고 폐서인된 채 특별 독방에 하옥되었다.

    윤당 역시 옹정제에 대해 크게 불평하여 이를 안 옹정제가 윤사와 떨어뜨리려 일부러 자신의 심복인 연갱요가 있는 청해성으로 보내 연갱요로 하여금 감시하게 하였다가 다시 불러들여 특별 독방에 하옥되었으며 둘 다 1727년(옹정 5년)에 옥에서 독살당하였다. 윤사와 윤당과 같이 행동하던 10황자 돈군왕 윤아는 1723년(옹정 원년), 옹정제가 몽골에 사신으로 가라 명을 내렸으나 병을 핑계로 가지 않다가 윤사의 역모 사건이 터지자 잡혀서 작위를 뺏기고 가택에 구금되었다가 1737년(건륭 2년)에야 석방되었다. 한편, 이들과 같이 음모를 모의한 옹정제의 3남 패륵 홍시는 당시 옹정제의 후계자로 급부상하고 있던 4남 홍력(弘曆)을 두려워하여 이에 가담하였으나 결국엔 실패로 돌아가고, 그 역시 1727년(옹정 4년)에 옥사하였다.

    또한 폐황태자였던 옹정제의 둘째 형 윤잉은 함안궁에 갇힌 지 13년째인 1725년(옹정 3년), 유폐된 곳에서 나오지도 못한 채 병사하였다.[12] 옹정제의 큰 형인 윤시도 1734년(옹정 12년), 유폐된 곳에서 생을 마감하였고 셋째 형인 성친왕 윤지는 과거 윤잉을 도왔다는 죄로 윤제와 함께 경릉의 능지기로 살다가 후에 이친왕 윤상의 죽음 때, 아우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작위마저 추탈되고 자금성 뒤쪽 경산(景山)에 유폐되어 1732년(옹정 9년)에 사망하였다.

    윤사의 윤당의 죽음 이후 옹정제는 윤사를 만주 이름인 아기나(阿其那), 즉 돼지로 이름을 바꾸었고 윤당을 색사흑(塞思黑), 즉 개로 이름을 바꾸어 부르도록 하였다.[12][6]

     

    티베트 원정과 군사 정책

    옹정제는 아직도 자신에게 순종하지 않고 있는 여러 민족들이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천성·청해성 분지와 티베트에는 아직도 청나라에 반대하는 세력이 존재하였다. 티베트는 이미 1717년(강희 56년)에 팔기군이 원정을 다녀와 승리하였으나 반대 세력은 아직 완전히 와해되어 있지 않았다. 1727년(옹정 5년), 옹정제는 일단 자신의 심복이자 과거 사천 순무로 그 곳 사정을 잘 알던 연갱요를 무원대장군으로 삼고 23만의 군사를 보내 티베트군과 싸우게 하였다. 얼마 안 가 연갱요는 티베트와 싸워 대승을 하였고 티베트군은 다시 높은 티베트 고원 지대로 숨었다. 이 승리가 계기가 되어 훗날 옹정제의 아들 건륭제는 군사를 보내어 준가르와 위구르를 모두 평정하고 중국 역사상 몽골 제국을 제외하고 영토를 최대로 넓힌다.[7] 옹정제는 소수의 군사를 보내 준가르군과 싸우게 하였으나 도리어 청군이 전멸당하고 북몽골 고원을 일시적으로 점령당하였다. 하지만 할하 부족의 군사들이 준가르군을 물리쳐 땅을 수복하였다.

    군사 정책으로 옹정제는 원래 친왕들이 주도하고 있던 팔기군[14]을 더 이상 황족이 기주(旗主)가 되어 거느리지 못하게 하였으며 황제 직속에 두고 장군들이 이를 관리하게 하여 황족들이 군사적 수단을 이용하여 황위를 노리지 못하게 하였다. 많은 황족들이 이에 반대하였으나 옹정제는 이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강행하였다. 덕분에 황제가 단독으로 최고 군사 지휘권을 가지게 되어 전선에서 황제의 직속 기관인 군기처로의 보고가 더욱 쉬워졌다.

    연·융 사태와 국내 정치

    옹정제는 가장 먼저 자신을 황제로 올리는 데 크게 기여한 융과다가 은근히 아기나로 불려 모든 권력과 작위가 박탈된 윤사와 다시 접촉하자 군주 기만죄(기군죄(欺君罪))를 이유로 들어 가택 연금된 채 1728년(옹정 6년) 화병으로 사망하였다. 막강한 군권을 틀어쥐고 오만방자하게 굴던 서북의 대장군 연갱요는 그 작위를 박탈하고 1726년(옹정 4년) 스스로 독주를 마시고 자결하게 명하였는데 자신이 어떻게 황제에 올랐는지를 다 아는 두 사람을 제거해 입을 막아 내막이 새어나가지 않게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안으로는 1729년(옹정 7년) 군수방(軍需房)을 설치하였으나 곧 군기처로 확대·개편하였다. 처음에는 대신들이 교대로 군사에 관한 기밀의 사무를 도맡아보는 곳이었으나 점차 대신들이 교대로 각지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수집하는 곳으로 변모하여 정보를 시시각각 황제에게 보고하게 하였다.

    개인적으로는 밤 12시에 자서 새벽 4시까지밖에 자지 않고 이외의 시간은 모두 정무에 할애하는 등 정치에 매우 의욕적인 황제였다. 또한, 지방 총독과 순무 등, 지방 관리들의 보고서를 꼼꼼히 살펴보고 그 의견을 다시 보냈는데, 이때 옹정제는 황제만이 쓸 수 있던 붉은 먹으로 쓴 글씨, 즉 주필(朱筆)로 답장을 보냈고 그 답장을 주비유지(朱批諭旨)라 부른다. 이 주비유지는 보내지자마자 바로 시행되었고 이것은 옹정제와 말단인 신하들까지도 연결하는 중요한 매개체가 되었다. 옹정제는 공식적인 보고 경로와 독자적인 보고 경로를 함께 활용하여 양쪽이 맞지 않으면 추궁하는 식으로 지방관들을 장악하였으며, 이 주비유지를 나중에 모아 책으로 묶어 옹정주비유지(雍正朱批諭旨)로 부르고 지방 관리의 참고서로 삼게 하였다. 또한 자신과 같이 검소한 사람을 좋아하던 옹정제는 자신에게 충성스럽고 검소한 신하들에게 양렴전(良廉錢)을 지급하여 가난 걱정 없이 편히 살 수 있게 도와주기도 하였다. 옹정제는 아버지 강희제처럼 유학을 그리 신봉하지는 않았고 대신에 어릴 때부터 크게 믿던 불교를 일으켜 과거 자신이 황자 시절에 살던 잠저인 옹친왕부를 크게 중수하여 반은 행궁으로 반은 라마교 사원으로 만드니 이것이 옹화궁이다.

    옹정제는 아버지와는 다르게 역시 선교사를 그리 총애하지 않았는데 1724년(옹정 2년), 기독교 포교 규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또한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마카오로 추방당하여 더 이상 궁정에서 일하지 못하였으나 오랫동안 궁정에서 일하며 중국어에도 능통하였던 주세페 카스틸리오네 등 일부 선교사들은 자리를 지켰다.

    옹정제는 아버지인 강희제가 세운 청나라의 전성기인 강건성세(康乾盛世)를 더욱 발전시키고 안정시켜 명군으로 칭송받았다. 아버지의 정책을 잘 이어갔으며 세금을 단일화하여 백성들의 노고를 덜어주었고, 강희제 말기부터 시작되어 온 재정 개혁을 단행하여 1721년(강희 60년) 700만 냥밖에 없던 국고가 1730년(옹정 8년)에는 3천만 냥, 그 후 말년인 1735년(옹정 13년), 국고에는 은자 6천만 냥이나 있었다고 한다. 옹정제의 치세동안 원정이 있었고 1년 동안의 군비가 100만 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강력하고 안정적인 내치로 세수가 금방 걷히게 되어 재정위기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강희제가 이미 부분적으로 시행한 지정은제도 그의 치세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문자의 옥

    옹정제는 아버지 때에 비해 대대적인 문자의 옥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는데 1726년(옹정 4년), 강서성 과거를 책임지는 관리로 내려가 있던 시험관 사사정(査嗣庭)이 과거의 시제로 《시경》의 ‘유민소지’(維民所止)를 택하였다. 그러나 이 시제는 엄청난 파란을 몰고 왔는데 바로 ‘유’(維) 자와 ‘지’(止) 자가 옹정제의 연호인 ‘옹정’(雍正)에서 위의 변만 뺀 것인데 이것이 바로 옹정제의 목을 베겠다는 뜻으로 들려 분노한 옹정제는 사사정과 그 구족을 처형하였다. 또한 한림원 학사 서준(徐駿)은 올리는 상소문 중 ‘폐하’(陛下)의 ‘폐’(陛) 자를 들개를 뜻하는 ‘폐’(狴) 자로 바꾸어 써서 삭탈관직 되었으나 도리어 문자도 모르면서 자기 마음대로 뜯어고친다면서 옹정제를 비아냥거리는 내용의 시를 짓자, 진노한 옹정제는 서준을 참수형에 처하였다.

    한편 강남의 선비 중 증정(曾靜)이란 자가 남송의 명장 악비의 후손으로 절강총독으로 있던 악종기(岳鍾琪)에게 옹정제의 즉위 과정을 찬탈이라 하며 옹정제를 신랄하게 비난하는 내용의 편지를 쓰자 악종기는 증정을 잡아 북경의 옹정제에게 보내 누가 그런 짓을 사주하였는지 심문하였다.[15] 증정은 이에 이미 죽은 명나라 말엽의 학자 여유량(呂留良)의 화이론에 감명 받아 날조하였다고 실토하였다.[15] 옹정제는 증정과 나눈 대화를 바탕으로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이라는 책을 지어 청나라가 왜 중국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지 정당한 이유를 주장하였다. 옹정제는 모든 것을 말해주고 반성한 증정을 살려주었지만 그에게 영감을 준 여유량의 가문을 모두 잡아들여 그 구족을 멸하고 여유량의 시체를 그 무덤에서 파내어 부관참시 하였다.[16]

    또한 교육도 중요하게 여겨 서당에 《성유광훈》(聖諭廣訓)이라는 헌장을 내려 시험 때마다 암송하게 하였다.[16] 그리고 옹정제는 지주의 착취 등으로 부당하게 천민이 된 사람들을 조사한 뒤 그 호적을 제거한 후 모두 양민으로 그 신분을 높여주었다. 반면 악덕 지주에게는 징역형, 유배형을 내리기도 하였고 심지어 그 수탈과 착취가 상당한 지주에게는 사형을 내리고 그 재산을 천민이 된 양민들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옹정제는 아버지 강희제의 후계자 선출 문제 실패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일 능력이 뛰어난 황자의 이름을 각기 건청궁 ‘정대광명’(正大光明) 현판 안에 봉인된 상자와 자신의 품에 집어넣고 자신이 죽은 후에 그 이름이 맞으면 그 황자를 즉시 다음 황위에 올리는 방법을 택했는데, 이것이 유명한 저위비건법(儲位秘建法)이다. 본래 강희제부터 시작되어 온 것을 옹정제는 봉인된 교지와 내무부에 역시 봉인되어 있는 밀지가 모두 맞아야 황위를 승계할 수 있는 방법으로 바꾸었다. 이때 이미 옹정제는 자신의 후계자로 제4황자 홍력을 낙점하고 홍력을 보친왕(寶親王)으로 삼아 국사를 처리하게 하였다.

    의문의 최후

    1735년(옹정 13년) 10월에 옹정제는 과로로 인하여 심신이 많이 지쳐 있었다. 그리하여 이궁인 원명원에서 요양을 하며 지냈다. 옹정제는 아버지가 매우 좋아하던 창춘원 대신 아버지가 자신에게 하사한 원명원을 더욱 좋아하였다. 그는 황위에 오른 이래 한 번도 순행을 떠난 적이 없고 북경에서 정사를 의논하였다. 그리하여 심신이 지쳐 있을 때는 남방에서 가져온 식물들을 보면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러나 오랫동안 4시간밖에 자지 않고 정무에 몰두한 탓인지 급격히 기력은 쇠약해져갔다. 〈세종헌황제실록〉에 따르면 1735년(옹정 13년) 10월 5일까지는 건청궁에서 조회를 주관하며 일일이 대신들에게 질의를 하였으나 다음 날인 10월 6일에 병세가 나타나, 그 다음 날인 10월 7일에는 걷잡을 수 없이 위독해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1735년(옹정 13년) 10월 8일 새벽에 옹정제는 58세로 붕어하였다고 공식 발표되었으나, 이에 대해서 암살설과 독살설 등 여러 설이 제기되었다. 암살설 중에선 옹정제에 대하여 비판적인 글을 기고하여 문자의 옥으로 멸문을 당한 산동성 출신의 학자 여유량의 손녀 여사랑(呂四娘)이 명나라 말기의 학자 황종희의 아들과 명나라 황실의 후손인 여협 오인법사에게 무술을 배워 원명원에 궁녀로서 잠입, 옹정제의 목을 베어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는 설이 가장 유명하고 유력하지만 공식적으로 밝혀진 것은 아직 아무것도 없다.[17] 다른 설로는 도교의 가르침에 심취해 진 시황제처럼 불로장생을 꿈꾸다가 수은이 들어간 단약(丹藥)에 중독되어 사망하여 뒤이어 즉위한 건륭제가 도사들을 궁정에서 몰아내었다는 설 등이 있다.[6]

    묘호는 국가의 전성기를 이어가고 조부와 부황의 뜻을 이어받았다 하여 세종(世宗), 시호는 경천창운건중표정문무영명관인신의예성대효지성헌황제(敬天昌運建中表正文武英明寬仁信毅睿聖大孝至誠憲皇帝)인데 옹정제 역시 아버지처럼 나라를 전성기를 지키고 이어갔다 하여 ‘문무’(文武)의 시호를 받았으며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은 공을 사서 헌황제(憲皇帝)라 명명하였다.

    옹정제는 무슨 일인지 조부 순치제와 부황 강희제가 모두 묻힌 청동릉을 버리고 북경에서 서남쪽으로 300리 떨어져 있는 곳에 묻혔는데 이후의 황제들은 이곳과 청동릉에 번갈아가며 묻혔다. 청동릉과 구별하기 위해 이 황릉군을 ‘청서릉’(淸西陵)으로 불렀다.

    능호는 태릉(泰陵)이다.

    통치 철학과 사상

    옹정제는 아버지 강희제와 더불어 학문을 매우 좋아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와 다른 점이 있었는데 강희제는 유교를 숭상하였지만 옹정제는 오히려 불교를 숭상하였다. 옹정제는 어릴 때부터 참선을 닦고 승려들과 불도(佛道)에 대해 토론하였고 불가의 학문에 모두 정통하여 못 외우는 불경이 없었다 한다.[18] 강희제의 탄신일 때, 다른 황자들은 언제나 고가의 진귀한 보물들을 부황에게 바친 반면, 옹정제는 자신이 손수 금가루로 쓴 불경을 강희제에게 선물하였다는 것은 그의 불심과 성실함, 그리고 검소함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그의 불교에 대한 믿음은 조부인 순치제와도 비슷하다. 옹정제는 정책의 기초로 언제나 불법을 생각하여 민생을 중요하게 여겼다. 또한 1712년(강희 51년)과 1713년(강희 52년) 사이에는 무려 7번이나 법회를 주관하여 자신의 깊은 불심을 증명하였다.[18]

    또한 옹정제는 강력한 황권을 주창하여 설령 형제나 아들이라도 황제인 자신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절해야 하는 신하임을 강조하여 사적으로는 형제나 아들이나 공적으로는 엄연히 군신지간임을 강조하였다.[19] 그러나 염친왕 윤사와 혁군왕 윤당이 군신지간의 예를 허물어 다른 황족들과 모의를 꾸며 옹정제를 음해하자 옹정제는 형이 아닌 황제로서 그들의 엄벌을 내리고 유교적 질서를 바로잡으려 하였다.[19] 옹정제의 이러한 조치 이후 황족들은 정무에서 큰 규제를 받게 되어서 황족들의 입지가 크게 위축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불심도 깊던 옹정제는 성실함에 있어서도 누구에게 뒤지지 않았는데 4시간에서 5시간밖에 자지 않고 정무에 몰두하고 1년 내내 쉬는 날이 없이 바쁘게 지냈다.[18]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옹정제의 사인을 과로사로 보기도 한다. 그는 황제가 열심히 일해야 밑의 신하들과 백성들도 자신의 일에 근면할 거라 생각하고 그 어려운 정무를 열심히 처리하였다. 그리고 후대의 학자들은 옹정제를 비난하건 칭송하건 모두‘역사상 가장 근면한 황제’로 부른다.[18] 옹정제는 자신이 거처하던 양심전(養心殿)의 대청에 ‘원이일인치천하 부이천하봉일인’(原以一人治天下 不以天下奉一人), 즉 ‘천하가 다스려지는 데에는 한 사람의 책임에 달린 것이며 자신의 한 몸을 위해 천하를 희생시키지는 않으리라’라는 글귀를 걸어놓으며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고 묵묵히 정무를 이행하였다. [20] 한편 옹정제는 양심전에 ‘중정인화’(中正仁和)라는 편액을 남겨 대청 중앙에 걸어놓았는데 황제는 중립적이고 정직하며 인자하고 화애로움을 갖춰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평가

    사후의 영향과 업적

    옹정제는 아버지 강희제가 이뤄놓은 전성기를 더욱 발전시켜 아들인 건륭제에게 안전히 넘겨주었다. 옹정제 역시 걸출한 황제이나 문자의 옥을 일으켜 독재성을 강화한 황제라는 이유와 아버지 강희제와 아들 건륭제가 각각 61년과 60년간 재위하였으나 자신은 13년이라는 짧은 재위기간을 가지고 있기에 그리 눈에 띄지는 않았다.[12] 그러나 옹정제의 즉위에 관하여 여전히 석연찮은 점 때문에 아직도 그가 아버지 강희제를 죽이고 황위를 찬탈하였다 한다. 그의 티베트 원정은 훗날 건륭제가 모두 마무리하고 영토를 몽골 제국 이후 중국의 영토를 최대로 늘린다. 그리고 이러한 배경에는 옹정제 특유의 끈기와 카리스마가 있었다. 옹정제는 통치 체제를 완성하고 황제의 독재권을 강화하여 신하들의 권한을 줄였다. 아버지 강희제는 일하면서 여가를 즐겼으나 옹정제는 그리하지 않았다. 그는 하루에 20시간을 모두 정무에 매진하였고 밥 먹을 때에도 언제나 결재 서류를 머리맡에 두고 먹었을 정도였다. 당시 강희제 이후로 선비들, 즉 신사층의 힘이 강해져 백성들의 착취가 심하였는데 옹정제는 선비들을 억압하고 역시 착취를 일삼는 대상인들도 경제적으로 제제하여 백성들에게 좋은 정책을 펼치려 하였다. 그러나 선비들과 돈을 가지고 있던 부유한 대상인들은 자신들을 억압한 황제를 미워하여 옹정제와 관련된 나쁜 소문을 퍼뜨리고 대표적으로, 옹정제가 부황을 시해하고 즉위하였다는 소문도 이들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비판

    옹정제는 강희제 말엽 자신도 정치적인 세력을 구축하였기에 강희제 말기의 황위를 놓고 다툰 형제들간의 붕당에 약간의 책임이 있다. 또한 군사들을 동원한 석연치 않은 즉위 과정은 두고두고 세인의 입에 오르내렸다. 이 과정은 뒷날 옹정제가 부황 강희제를 독살 또는 교살하고 황위에 올랐다는 소문이 파다하였고 만주족의 통치를 아직도 부정하던 한족들은 옹정제 집권 내내 이 소문을 전국에 퍼뜨려 그를 수 양제와 다름없는 패륜아로 불렀다. 이러한 소문과 만주족에 반항하던 한인을 다스리기 위해 옹정제는 문자의 옥을 다시 시작하였으나 오히려 이 사건은 강희제 이후 청나라에 협조하려던 한인들을 다시 결속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서는 학자들이 옹정제를 재평가함에 따라 옹정제가 아버지를 죽였다고 믿는 학술적 근거나 이론 역시 줄어들었다.

    그러나 자신을 과신한 나머지 옹정제는 철저히 독선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열성 가운데에서도 다분히 독선적인 요소가 많았고[21] 그의 뜻에 따라 지나치게 압제적으로 이루어진 문자의 옥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현대의 영향

    현재 옹정제에 대한 평가는 과거에 비하여 많이 나아진 편이다. 과거에는 오로지 옹정제의 집권 과정, 그 중 야사에서 강조한 강희제의 시해와 형제들의 숙청 등만을 부각시켜 그를 잔인하고 나쁜 군주로 내몰았으나, 지금은 청사고에 적힌 정사와 야사를 적절히 따지는 재평가도 이루어지고 있으며 정사에 적힌 옹정제의 치세와 그의 통치 스타일까지 고루 따져 그를 성군은 아니지만 적어도 명군으로 보고 있다. 옹정제의 황위 집권 과정은 몇 세기를 거친 후 텔레비전 드라마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작가인 얼위에허(二月河)는 《강희대제》의 후편으로 옹정제를 다룬 《옹정황제》를 써서 전작 《강희대제》와 같이 중국에서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랐다.

    1995년 홍콩 aTV(亞洲電視)는 《군림천하》(君臨天下)를 방영, 옹정제가 부황 강희제를 목 졸라 죽이고 황위에 오른 것을 그려 옹정제의 나쁜 면, 즉 야사를 토대로 만들어졌으나 옹정제의 성격이 비뚤어진 게 강희제가 둘째 형인 윤잉만 편애하고 자신에게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베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콤플렉스가 결국 아버지와 둘째 형 윤잉을 죽인 것이다. 군림천하와 비슷한 줄거리의 영화로는 1977년 대만에서 제작된 구양준(歐陽俊) 감독, 서풍(徐楓), 나열(羅烈), 악화(岳華) 주연의 《강남팔대협》(江南八大俠)이란 영화가 있는데, 이 작품 역시 옹정제의 야사 기록을 토대로 만들어졌으며 결말은 옹정제가 여사랑에게 목이 잘려 죽은 장면으로 끝이 난다.

    1997년 중국중앙방송은 얼위에허의 《옹정황제》를 각색한 《옹정왕조》(雍正王朝)를 방영, 옹정제의 좋은 면과 그의 치세를 다뤘는데 여기서 강희제는 노환으로 붕어한 것으로 나왔는데, 바로 정사인 《청사고》를 토대로 만들었다. 이처럼 한 사람의 이야기가 극명하게 내용이 대조되는 드라마 두 개로 만들어졌을 만큼 옹정제의 진짜 모습은 어느 것이 진짜이고 어느 것이 가짜인지 찾기 힘들다.

    가족

    옹정제는 2명의 황후와 2명의 황귀비, 4명의 비를 두었으며 슬하에 10남 4녀, 양녀 3녀를 두었으나 이 중 3명은 영·유아기에 요절하여 작위를 받지 못하였다.

    조부모와 부모

    조부: 세조 순치장황제(世祖 順治章皇帝) 복림(福臨)

    조모: 효강장황후 동가씨(孝康章皇后 佟佳氏)

    부친: 성조 강희인황제(聖祖 康熙仁皇帝) 현엽(玄燁)

    모친: 효공인황후 오아씨(孝恭仁皇后 烏雅氏)

    황후

    효경헌황후 오라나랍씨(孝敬憲皇后 烏喇那拉氏, 1679년 ~ 1731년) - 내대신 비양고의 딸.

    효성헌황후 뉴호록씨(孝聖憲皇后 鈕祜祿氏, 1692년 ~ 1777년) - 원래 칭호 희귀비(熹貴妃), 전의 능주의 딸.

    아들들

    제1황자 단친왕 홍휘(端親王 弘暉, 1697년 ~ 1704년) - 효경헌황후 소생.

    제3황자 패륵 홍시(貝勒 弘時, 1704년 ~ 1727년) - 제비 이씨 소생, 후일 황실 대동보에서 제명.

    제4황자 보친왕 홍력(寶親王 弘曆, 1711년 ~ 1799년) - 효성헌황후 소생, 제6대 황제 고종 건륭순황제(高宗 乾隆純皇帝).

    제5황자 화공친왕 홍주(和恭親王 弘晝, 1712년 ~ 1770년) - 순각황귀비 소생.

    제7황자 과공군왕 홍첨(果恭郡王 弘瞻, 1733년 ~ 1765년) - 겸비 유씨 소생, 과의친왕 윤례(果毅親王 允禮)에게 입적.

    함께 보기

    옹정(雍正, 1723년 ~ 1735년) - 옹정제의 연호.

    강희제

    건륭제

    청나라

    군기처

    《군림천하》

    참고 자료

    《청사고》(淸史稿) -〈세종헌황제실록〉(世宗憲皇帝實錄)

    《청사고》(淸史稿) -〈성조인황제실록〉(聖祖仁皇帝實錄)

    미야자키 이치시다, 《옹정제》, 이산출판사, 차혜원 옮김, 2001년, ISBN 89-87608-18-2.

    조나선 D. 스펜스, 《반역의 책 (옹정제와 사상통제)》, 이산출판사, 이준갑 옮김, 2004년, ISBN 89-87608-38-7.

    둥예쥔, 《치국 (옹정 원전)》, 시아출판사, 황보경 옮김, 2004년, ISBN 89-8144-147-2.

    김희영, 《이야기 중국사 3》, 청아출판사, 2006년 ISBN 89-368-0437-6.

    정진홍, 《인문의 숲에서 경영을 만나다》, 21세기북스, 2007년 ISBN 978-89-509-1276-5.

    셰가오더, 《수완 (사람을 부리는 기술)》, 아라크네, 류방승 옮김, 2007년, ISBN 978-89-92449-13-7.

    주석

    ↑ 만주어로는 인젠(In Jen, ᡳᠨ ᠵᡝᠨ)으로 읽는다.

    ↑ ᡥᡡᠸᠠᠯᡳᠶᠠᠰᡠᠨ ᡨᠣᠪ ᠾᠠᠨ라고 쓴다.

    ↑ ᠨᠠᠢᠷᠠᠯᠲ ᠲᠥᠤ ᠺᠬᠠᠨᠨ라고 쓴다.

    ↑ 작위를 받은 기준으로 하면 황사자(皇四子)의 작위를 받은 옹정제가 강희제의 넷째 아들이나 유아기에 죽은 강희제의 아들들까지 합치면 옹정제는 강희제의 열두 번째 아들이다.

    ↑ 가 나 다 라 소동자 (2008년 6월 1일). 예언 속의 ‘원명거사’, 옹정제 (한글) (HTML). 2008년 9월 5일에 확인.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염숭년. 청나라 12명의 황제의 진짜 모습(正說淸朝十二帝) (중국어) (HTML). 2008년 9월 18일에 확인.

    ↑ 가 나 다 위안타이, 《윤진의 27년 - 胤禛二十七年》, 신랑원창파(新浪原創派), 2006년

    ↑ 고정일 (2005년 8월 4일). [시론] X파일 관가백추도 (한글) (사설). 2008년 9월 21일에 확인.

    ↑ 雍親王皇四子胤禛, 人品貴重, 深蕭朕躬:必能克承大統。著繼朕登基卽皇帝位卽傳位於皇四子胤禛, 即遵典制持服。二十七日釋服,釋布告中外,咸使聞知。

    ↑ 예를 들어 4황자인 윤진은 황사자(皇四子)로 쓰는 것이 올바른 표현이었다.

    ↑ 그러나 실제로 윤진이 황위에 오른 것은 1722년(강희 61년) 12월 27일이고, 오아씨가 황태후로 존숭되고 죽은 것은 그 다음 해인 1723년(옹정 원년) 5월 23일이라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 해 초에 죽었다고 하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 가 나 다 라 마 진만러우, 《강희제의 교육 방식 - 向康熙學習》, 하남문예출판사(河南文藝出版社), 2008년.

    ↑ ‘윤’(胤) 자는 후계자를 뜻하기 때문에 강희제의 후계자로 황위에 오른 옹정제가 자신이 유일한 후계자로 선포하고 모두 형제들의 돌림자를 바꾼 것이다.

    ↑ 양백기·정람기·양람기·정홍기·양홍기 등 하오기(下五旗)였다.

    ↑ 가 나 김희영, 《이야기 중국사 3》, 319쪽

    ↑ 가 나 김희영, 《이야기 중국사 3》, 320쪽

    ↑ 강효백, 《협객의 나라 중국》, 한길사, 2002년, ISBN 89-356-0109-8.

    ↑ 가 나 다 라 소동자 (2008년 6월 11일). 마음을 비웠기에 황제가 되다 (한글) (HTML). 2008년 9월 6일에 확인.

     제5대 청나라 황제          

    전 임

    아버지 성조 강희제 현엽

    1722년 ~ 1735년

    후 임

    4남 고종 건륭제 홍력

    천명제 ·숭덕제 ·순치제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가경제 ·도광제 ·함풍제 ·동치제 ·광서제 ·선통제

    ↑ 가 나 장옌, 《옹정 시대의 의심스러운 미스터리: 옹정제의 원래 모습 - 揭秘雍正朝重重疑案:原來雍正》, 중경출판사(重慶出版社), 2006년.

    ↑ 주경철,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41. 옹정제 조선일보, 2010년 1월 15일.

    본명

    애신각라홍력(愛新覺羅弘曆)

    재위

    1735년 ~ 1796년

    별명

    십전노인(十全老人)

    출생일

    1711년(강희 50년) 9월 25일

    출생지

    청나라북경옹친왕부

    사망일

    1799년(가경 4년) 2월 7일 (향년 89세)

    사망지

    청나라북경자금성 양심전

    황후

    효현순황후계황후효의순황후

    부황

    옹정제

    모후

    효성헌황후

    이전 황제

    옹정제

    다음 황제

    가경제

    묘호

    고종(高宗)

    시호

    법천융운지성선각체원입극수문분무흠명효자신성순황제

    (法天隆運至誠先覺體元立極敷文奮武欽明孝慈神聖純皇帝)

    ↑ 김희영, 《이야기 중국사 3》, 318쪽

    바깥 고리

    원본 주소 ‘http://ko.wikipedia.org/wiki/%EC%98%B9%EC%A0%95%EC%A0%9C’

    분류: 1678년 태어남 | 1735년 죽음 | 청나라의 황제

     

    건륭제

    건륭제(乾隆帝, 강희(康熙) 50년 음력 8월 13일 (1711년 9월 25일) ~ 가경(嘉慶) 4년 음력 1월 3일 (1799년 2월 7일))는 청나라의 제6대 황제(재위 1735년 ~ 1796년[1])로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한 직후 청나라의 팔기군이 산해관으로 들어간 다음 중국 대륙을 실질적으로 통치한 정통 황조로서의 네 번째의 중국 청나라 황제이기도 하다. 성은 애신각라(愛新覺羅), 휘는 홍력(弘曆)[2], 묘호는 고종(高宗), 시호는 법천융운지성선각체원입극부문분무흠명효자신성순황제(法天隆運至誠先覺體元立極敷文奮武欽明孝慈神聖純皇帝), 짧은 시호로는 순황제(純皇帝)이며, 연호는 건륭(乾隆)이다. 또한 만주어로는 압카이 워히여허 한(Abkai Wehiyehe Han)[3], 몽골어로는 텡게린 테트게센 칸(Tengeriin Tetgesen Khaan)[4]이라 불리기도 한다. 제4대 황제 강희제(康熙帝)의 손자이자 제5대 황제인 옹정제(雍正帝)의 넷째 아들이며[5], 옹정제의 후궁 출신인 효성헌황후 뉴호록씨(孝聖憲皇后 鈕祜祿氏)의 소생이다.

    어릴 때부터 제왕으로서의 자질이 보여 할아버지 강희제와 아버지 옹정제에게 인정을 받았다. 1735년(옹정 13년), 옹정제가 급사하자 저위비건법에 따라 황위에 올라 먼저 만주족과 한족 대신들의 갈등을 조정하며 내치를 다진 후 대규모 정복 사업과 문화 사업을 펼쳤다. 문화 사업으로는 옹정제 때 마카오로 추방된 예수회 선교사들을 다시 불러들여 북경에 서양식 건물을 짓도록 허락한 것과, 특히 예수회 수도사인 주세페 카스틸리오네에게 서양식 궁전인 원명원을 개·보수를 감독하게 한 것이 있다. 그 자신 역시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아 시와 서화를 즐겼고 각지의 시인과 화가들을 독려하였다. 특히 10년의 세월을 들여 고금의 도서를 수집하여 중국 역사상 최대의 대편찬사업인 《사고전서》를 편찬함으로서 고서적들을 많이 발굴케 하였으나 문자의 옥도 단행하여 청나라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책들은 모두 금서로 만들었다.

    또한 10차례에 걸친 정복 사업을 펼쳐 준가르와 위구르를 복속시키고 티베트, 버마, 베트남, 네팔까지 진출하는 등 현재 중국 영토의 틀을 만들었다. 그러나 집권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시대착오적인 정책을 내놓고 여기에 사치, 반란, 서방과의 부실한 외교, 그리고 희대의 탐관오리로 평가받는 화신을 20여 년간 총애하여 말년엔 매관매직과 부정부패가 빈번히 일어나고 국고가 비어 결국 청나라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1795년(건륭 60년) 말, 자신은 감히 할아버지인 강희제의 재위 기간을 넘을 수 없다며 재위 60년째에 태상황제로 물러났지만 막후에서 정책 최고 결정권을 행사하여 여전히 실권을 쥐고 있었다. 재위기간 60년에 태상황제로서 실권을 장악한 4년까지 합치면 건륭제는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실권을 장악한 황제였다. 스스로를 십전노인(十全老人, 열 번의 원정을 모두 승리로 이끈 노인)이라 칭하고 그렇게 불리기를 좋아하였으며, 중국 최후의 태평성세인 강건성세(康乾盛世)의 마지막을 장식한 황제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 중 가장 장수한 황제이며 중국 최후의 태상황제로 그의 생모와 신분, 즉 한족의 피가 흐르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어서 중국의 역대 황제 중 가장 민간의 전설과 야사가 많은 황제이기도 하다.

    생애

    초기 생애

    1711년(강희 50년) 9월 25일, 자금성 인근 옹친왕부에서 당시 옹친왕(雍親王)이던 옹정제 윤진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홍력의 어머니 뉴호록씨는 만주족이었지만 출신이 미천하여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가 수녀(秀女)가 된 뒤 옹친왕부에 배속되어, 윤진의 후궁인 측복진(側福晉) 이씨[6]의 시녀로 있었다. 어머니의 미천한 신분에 의하여 그다지 부각되지 않던 홍력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천자문과 사서오경을 꿰뚫어 암송하고 시를 잘 지어 1720년(강희 59년) 겨울에 할아버지인 강희제가 특별히 궁정에서 기르기 시작하였다.

    황손인 홍력은 황자들만 교육받을 수 있던 상서방(上書房)에서 공부하였는데 이곳에선 홍력 이외에도 자질이 남다른 여러 황손들과 홍력과 동갑인 숙부 윤희(胤禧)도 같이 공부하고 있었다. 당시 강희제에게는 20명의 황자와 100명 안팎의 손자가 있었는데 강희제는 손자들의 상당수를 알지도, 심지어는 얼굴 한 번 본 적도 없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 많은 황손들 중 궁정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특별히 뽑힌 홍력이 문재에도 탁월하였고 사냥에서는 어린 나이에 곰을 두려워하지 않고 화살로 힘들이지 않고 잡자 이를 매우 기특하게 여긴 강희제는 어릴 때의 자신을 닮았다며 홍력에게 기본적인 제왕학을 가르치기 시작하였고[7] 특별히 자금성을 지키는 금군 무관에게 명해 홍력에게 무예를 전수해줄 것을 명하였다. 어떤 때에는 노구의 강희제가 직접 홍력의 무술을 보고 가르치고 같이 수련하였다. 궁정에서 살면서 할아버지의 총애를 받았으나, 한편으로는 자주 자신이 살던 옹친왕부로 가 부왕인 옹친왕 윤진과 적모인 적복진 오라나랍씨, 그리고 어머니에게 문안드렸고 이러한 성실한 모습을 본 강희제가 더욱더 총애하였다.

    1722년(강희 61년) 12월, 홍력의 조부이자 청나라의 제4대 황제인 강희제가 노환으로 붕어하자, 당시 정국을 면밀히 관찰하던 홍력의 아버지 옹친왕 윤진이 군사들과 대신들을 이용하여 황위에 오르니 이가 옹정제이다. 강희제는 임종 직전, 윤진을 불러서 미래의 황제는 홍력이니 황위를 반드시 홍력에게 물려주라 명하였다고 전해진다.[8] 그에 따라 황위에 오른 옹정제는 미리 황태자로서 홍력의 이름을 써서 그 함을 건청궁의 정대광명(正大光明) 편액 뒤에 올려놓았다.

    강희제와 같이 홍력의 재주를 귀히 여기던 옹정제는 상서방에 계속 보내어 공부를 시키게 하였고 홍력을 지도하였다. 이듬해인 1723년(옹정 원년) 옹정제는 13살의 홍력에게 자기 대신 선황제인 강희제의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데 세간에서는 이미 옹정제가 홍력을 후계자로 눈여겨보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홍력이 나이가 들수록 학식 또한 깊어지자 옹정제는 홍력의 제왕학을 손수 가르치고 홍력이 정치를 배우는 데에 잘못된 것이 있으면 이를 바로 잡아주었다. 홍력은 오전에는 서화에 몰두하였고 정오에서 유시(酉時, 오후 6시)까지 정무에 매달리며 한편으로는 쉬운 국정을 처리하면서 정치를 배워갔다.

    그러나 옹정제의 셋째 아들이자 홍력의 이복형인 패륵 홍시(弘時)[9]는 이러한 움직임에 불만을 품고 옹정제와 척을 지고 있던 숙부이자 강희제의 8남 염친왕 윤사(廉親王 胤禩)와 손을 잡았다.[10] 윤사가 노골적으로 부추기자 홍시는 홍력을 모함하였으나, 옹정제는 오히려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홍력을 몰아붙이는 홍시를 의심하였다. 1725년(옹정 3년), 홍시가 홍력을 암살하려던 일이 발생하자 진노한 옹정제는 홍시를 윤사의 아들로 입적시켜버렸고 1727년(옹정 5년)에는 윤사 일당이 역모를 꾀하려 한다는 이유로 모두 잡아들여 하옥시키고 아들인 홍시마저도 잡아들인 후, 황실 대동보에서 그의 이름을 제명하였다. 이 때 잡힌 윤사, 윤당은 곧 옥에서 독살당하고 홍시 역시 얼마 안 가 감옥 안에서 사망하였다.[10] 같은 해에, 홍력은 부찰씨를 아내로 맞아들였고 더 이상 홍력에 맞서 황위를 노리는 경쟁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홍시가 죽고 난 후, 홍력이 당시 옹정제의 아들들 중 가장 연장자였기에, 대다수 대신들은 이변이 없는 한, 홍력이 황위를 승계할 것이라 믿었다.[10] 1733년(옹정 11년), 홍력은 화석친왕(和碩親王) 직을 제수 받고 보친왕(寶親王)이라 불렸고 이때부터 정치의 전면에 나서면서 군기처에서 지내며 아직 완전히 섬멸되지 않은 몽골의 준가르 부족에 관한 일을 도맡았다. 또한 태묘, 사직 대제나 공자와 관우의 제사 등 황제가 주관해야 할 국가의 중요 대사를 옹정제를 대신하여 주관하였다. 1734년(옹정 12년), 옹정제가 연로해져 정사를 돌볼 수 없을 때에는 홍력이 나서서 섭정으로서 국사를 처리하였다.

    즉위와 개혁

    1735년(옹정 13년) 10월, 옹정제의 몸이 나빠지자 보친왕 홍력은 이복 동생 화친왕 홍주(和親王 弘晝)와 함께 옹정제를 간병하였다. 그러나 동년인 1735년(옹정 13년) 10월 8일, 홍력의 아버지이자 청나라의 제5대 황제인 옹정제는 급격히 병세가 악화되어 58세를 일기로 북경의 원명원에서 과로로 의한 피로 누적으로 붕어하였다. 대학사 장정옥과 악이태(鄂爾泰), 그리고 홍력의 숙부인 장친왕 윤록(莊親王 允祿), 과친왕 윤례(果親王 允禮) 등이 고명대신이 되어 옹정제의 유조를 건청궁 정대광명 편액에서 꺼낸 뒤 유조를 읽었다. 유조에는 제4황자 홍력을 황태자로 책봉하여 황제로 즉위시키라는 내용이었다.

    “ 제4황자 보친왕 홍력은 성품이 인자하고 효성과 우애가 깊어 아바마마이신 성조인황제(강희제) 폐하께서 특별히 총애하여 궁중에서 기르셨다. 홍력은 친왕이 된 후에도 나태하지 아니하고 오랫동안 준비하여 정사에 능숙하며 식견이 깊으니 가히 대사를 맡겨 짐의 뒤를 이어 황위를 이을 자격을 갖추었도다. [11]

    이 유조에 따라, 홍력은 황태자로서 책봉의례를 받은 후, 곧 황위에 오르니 이때 그의 나이 25세였으며 이가 제6대 황제인 고종 건륭순황제(高宗 乾隆純皇帝)이다. 연호를 ‘건륭’(乾隆)이라 정하였는데 여기서 ‘건’(乾)은 하늘, ‘융’(隆)은 높음과 영광이라는 뜻이니, 건륭이란 하늘의 영광이라는 뜻이다.[10] 과거 조부인 강희제나 부황인 옹정제의 즉위 과정이 순탄치 않았던 데에 비하여 이미 황자 시절에 경쟁자가 없어진 건륭제의 즉위 과정은 매우 빠르고 안정적으로 진행되었다.

    즉위하자 건륭제는 먼저 아버지 옹정제가 연금하거나 귀양 보낸 자신의 숙부들을 사면하였다. 특히 강희제의 14남이자 옹정제가 황위에 오르기 전 경쟁자로 불리던 순군왕 윤제(恂郡王 允禵)는 건륭제의 배려로 풀려날 수 있었다. 그 후 건륭제는 아버지가 재위기간 내내 추진하던 종친들을 정치 일면에서 배제시키는 정책에 박차를 가했다. 강희제나 옹정제 때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황자들과 일부 세력 있는 방계 황족들은 군이나 육부를 통솔하였으나 그 당시의 골육상쟁을 잘 알고 있던 건륭제는 황족들을 대부분 군과 육부, 군기처에서 배제시켰고 그의 아우들마저도 정치적 발언을 규제하여 공사를 구별하였다.[12] 혈기왕성한 청년의 건륭제는 인시(寅時, 새벽 4시)에 일어나 조회에서 대신들이 올린 각지에서의 보고를 받고 이를 수결하였다.

    그러나 1736년(건륭 원년) 당시 조정에서는 두 개의 파가 있었는데 한 파는 영시위내대신 겸 군기대신 악이태로 군부의 신망을 얻고 있었고, 다른 파는 군기대신 장정옥으로 한족 출신의 대신들 중 가장 연장자로 당시 명나라의 정사인 《명사》를 쓰고 있었다. 이들 두 대신은 강희제와 옹정제 때부터 조정에서 활약하던 실력자들이어서 기세가 모두 등등하였다. 건륭제는 악이태와 장정옥 모두 고령이라 머지않아 세상을 뜰 것이라 예상하여 방치해둔 채 서로를 견제하게 만들어 서로의 세력을 약화시켰고 그 사이에 자신을 따를 신료들을 조금씩 만들어 나갔다.[12] 하지만 건륭제는 이들 둘의 정치적 역량과 실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들이 죽을 때까지 내치지는 않았다.

    건륭제는 곧 보갑제(保甲制)와 이갑제(里甲制)라는 제도를 뜯어고쳤는데 보갑제는 100 가구를 모아서 갑(甲), 그리고 그 10개의 갑을 모아 보(保)로 나누어 같은 공동체에서 사는 사람끼리 서로 질서와 치안의 책임을 지게 하는 제도였고 이갑제는 보와 갑에서 세금을 인구에 따라 모아서 재정을 충당하는 제도였다. 본래 북송의 왕안석이 신법으로 쓰려다가 수포로 돌아간 이후 명나라를 거쳐 청나라 이후 강희제는 부분적으로 시행하다가 옹정제 때에 들면서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보·갑의 장들은 자신이 맡은 구역의 백성들의 호적을 조사하고 그 기록을 관아에 바쳤고 수상한 촌민들을 감시하기도 하였다.[7] 그러나 지방 관리들이 인구와 세수를 일부러 줄여서 보고하고 뒤로는 세금을 무겁게 매겨 막대한 사익을 취하자, 1740년(건륭 5년), 건륭제는 정확한 인구조사를 위해 각지의 보·갑장에게 가구당 세는 사람의 수를 군역을 지는 장정이 아닌, 집안의 여자들까지 모두 다 계산하였는데 계산한 백성들의 수는 나이, 성별과 이름을 패에다 적어 각자의 집 문 앞에 걸어놓고 매년 인구조사를 하여 북경의 군기처와 호부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정책으로 건륭제는 청나라의 총인구수를 보다 정확히 알게 되었고 지방 관리들이 인구와 세수를 일부러 줄여서 보고하여 사익을 취하려 한 경우를 차단하여 또한 이를 방치하거나 세금을 빼돌린 총독이나 순무에게도 중징계를 내려 특히 이 중 그 행태가 심한 자는 참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건륭제의 강력한 정책은 청대 후기까지 지속되었으나 사실상 부정부패가 시작되는 건륭제의 치세 후기까지만 지속되었다. [13]

    십전무공

    보갑제와 이갑제의 덕으로 어느 정도 내치를 다져서 그 성과를 본 건륭제는 국고의 은자가 풍족하고 인구도 크게 늘어나 농작도 잘되어 백성들의 호응을 받았다. 나라가 부유해지자 건륭제는 자신의 위엄을 더욱 떨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다. 이러한 마음에는 건륭제가 평생 존경한 할아버지 강희제에 대한 동경심도 포함되어 있었다.

    1747년(건륭 12년), 대금천(大金川)을 시작으로 1755년(건륭 20년), 1757년(건륭 22년) 두 번에 걸쳐 강희제 이후 세력이 미미해졌으나 여전히 몽골 고원을 호령하던 준가르를 완전히 복속시켰고 1769년(건륭 33년)에는 버마, 1776년(건륭 41년)에는 대금천과 소금천(小金川), 뒤이어 1788년(건륭 53년) 대만, 1789년(건륭 54년) 베트남, 1791년(건륭 56년), 1792년(건륭 57년) 두 차례에 걸쳐 네팔을 원정함으로서 자신의 권위와 청나라의 국위를 선양하였다. 그러나 그 자신은 몽골의 군사를 직접 지휘해 격파한 조부와는 달리 전선 근처를 순시하며 병사들을 독려하였다. 이때 당시 청나라의 군사 상당수는 개국 때 혁혁한 공을 세운 팔기군이 아닌 강희제 때 신설된 한족 출신의 군대 녹영(綠營)의 군사들로서 남송의 명장 악비의 후손인 사천총독 악종기(岳鍾琪)와 만주족 출신의 장수 아계(阿桂)가 주지휘관으로 활약하였다.

    그 중 가장 성과가 있었던 원정은 바로 두 번에 걸친 준가르 원정과 대·소 금천 원정이었다. 준가르 원정으로 청나라는 외몽골을 얻었고, 이 기세를 몰아 위구르족을 공격해서 그들을 복속시킴으로써 크나큰 영토를 얻게 되었다. 건륭제는 새로 얻은 영토를 새롭게 번성하라는 뜻의 신강(新疆)으로 명명하였다.[7] 또한 티베트 일대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대·소 금천 원정에서도 소수의 병력으로 공격하여 성과를 보았으나, 금천의 영토는 몽골에 비하여 턱없이 작았고, 군비도 예상에 비해 너무 많이 지출되었다. 또한 금천 일대에는 1747년(건륭 12년) 금천의 일부 영토를 점령하였음에도 현지 주민들의 반란도 빈번히 일어났다. 주민들은 암도 지구의 티베트인들의 지원을 얻어서 항쟁을 계속하였고, 건륭제는 꼭 29년 후에 유럽의 선교사들이 제작한 최신형 대포로 대금천과 소금천을 초토화시킨 다음에야 강제로 주민들의 항복을 받아내어 조공품을 얻은 뒤 완전히 통치할 수 있었다.[14] 이로서 건륭제는 청나라의 영토를 약 460만 km² 늘려 중국 역사상 원나라 이후 가장 큰 영토를 가진 제국의 통치자가 되었다.

    버마에서는 콘바웅 왕조가 다스리고 있었으나 청나라와는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 청군이 쳐들어오자 버마도 역시 군사를 내보내 대응하게 하였으나, 시암의 국왕 딱신이 군사를 내보내 버마와 싸워서 버마군을 대파하였다. 이 덕분에 청나라는 어부지리 격으로 버마를 손쉽게 평정하고 버마를 조공국으로 삼았다. 그 후 대만에 천지회(天地會)라는 종교적 색채를 가진 단체가 반란을 주도하여, 청나라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군사를 일으켜 대만의 여러 도시를 점령하였으나, 건륭제의 빠른 대처로 천지회 반란군은 궤멸되었으며 그 지도자들은 잡혀 처형되었다.

    대만을 진압하고 그 다음해인 1789년(건륭 54년) 베트남에서는 후 레 왕조 말기에 접어들었으나 떠이선 왕조가 잠시 들어서면서 후 레 왕조를 멸망시켰다. 레 왕조의 마지막 왕인 쯔이에우 통은 광서성으로 도망쳐 청나라로 망명하여 건륭제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건륭제는 그의 요청을 수락하여 대군을 보내 하노이를 공략한 다음 다시 쯔이에우 통을 왕위에 앉혔으나, 그는 이미 건륭제에게 조공을 맹세하고 실권을 청나라에 넘겨 허수아비 왕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에 분개한 떠이선 왕조의 국왕 응우옌훼(阮惠)는 1789년(건륭 54년) 기습적으로 하노이를 공격하여 청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놀란 쯔이에우 통은 다시 청나라로 망명하고 응우옌훼는 왕에 즉위한 후 청나라의 승인을 받아 조공국이 되었다.

    네팔을 점령할 때는 이미 네팔의 구르카 부족이 쳐들어와 1788년(건륭 53년) 티베트 남부를 점령하고 라사를 향해 진격해오고 있었다. 티베트 주재 청군은 판첸 라마 텐페이 니마를 납치하여 다른 곳에서 요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한편 건륭제는 사천성에 주재하던 군사들에게 티베트 남부에 있는 구르카 군사들을 몰아내라 명령하였으나 이미 구르카 부족은 퇴각한 상태였다. 그러나 1791년(건륭 56년) 겨울, 구르카는 다시 티베트로 진격해 들어왔다. 이에 맞서 건륭제는 팔기군과 녹영의 군사들을 파병하고 그 사령관에 자신의 처조카인 복강안(福康安)을 임명하여 구르카군을 몰아내도록 하였다. 복강안의 군대는 청해성으로 진격해 티베트 분지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날씨가 춥고 고지 분대라서 눈이 녹지 않아 날이 풀릴 때까지 기다리다가 봄이 되어 다시 진격한 후 1792년(건륭 57년) 여름에 구르카군을 섬멸하고 그들을 히말라야 산맥의 카트만두 계곡으로까지 압박하였다. 1793년(건륭 58년) 복강안은 구르카족의 항복을 만주식으로 받고 철군하여 북경으로 돌아갔다.

    건륭제는 자신이 이긴 모든 10번의 원정을 십전무공(十全武功)이라 하고 이를 기념해 책을 썼는데 그 책이 《십전무공기》로 청군의 강력한 군사력과 자신의 군사적 지도력을 스스로 칭찬한 저서였다. 또한 자신을 십전노인이라 스스로 칭하였고 자금성 안의 무영전(武英殿)에 청군이 원정에서 얻은 화려한 진상품이나 조공품 등을 전시해 놓았다.

    강남 순행

    조부 강희제와 같이 건륭제는 여러 곳을 순행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순행은 황제가 백성들에게 부와 위엄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좋은 행동이었다. 건륭제는 개인적인 여가를 보낼 때나 중대한 정책을 결정할 때 심신을 달래러 주로 떠났는데 1751년(건륭 16년), 1757년(건륭 22년), 1762년(건륭 27년), 1765년(건륭 30년), 1780년(건륭 45년), 1784년(건륭 49년) 등 대대적인 강남 순행, 즉 남순(南巡)을 모두 여섯 번 단행하였다. 건륭제는 순행할 때 황자와 공주, 대신, 환관, 시녀, 요리사, 호위병 등 3,000명을 대동하였는데 여기에다가 건축가, 화가, 시인 등까지 데리고 가 그들과 더불어 강남의 절경을 논하였다. 그동안 북경에서는 장성한 황자나 여러 명의 군기대신이 남아서 국사를 처리하였다.

    건륭제의 순행의 주요 동선은 남경, 양주, 항주, 그리고 소주였다. 이 네 도시에서 건륭제는 대운하나 다른 명승고적을 돌아다니며 담론을 즐겼고 저녁에는 호화로운 행궁에서 지역 유지들과 관리들이 주최하는 호화로운 만찬을 즐겼다. 그리고 매일 거르지 않고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만찬을 벌려 자신이 가져온 내탕금이나 상인들과 지역 관리들이 바친 돈까지 모두 떨어지자 지역 관리들과 상인들의 하수인들이 자원하여 백성들로부터 돈을 뜯어내어 충당을 하였고 몇 개의 행궁을 짓는 데에도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큰 원성을 샀다. 조부인 강희제가 순행 때 가져간 내탕금만으로 모든 걸 충당하고 북경으로 돌아올 때도 다 쓰이지 않았던 것과 상반된다. 실제로 건륭제는 순행 때 강희제가 쓰던 비용의 평균 열 배 이상을 써서 국고의 돈을 지나치게 낭비하였다.

    남순 이외에 사천성, 청해성 인근을 돌아보는 서순(西巡)을 4번 하였고 산동성, 호북성 인근을 도는 동순(東巡)도 5번이나 진행하며 각지의 교류를 트게 하였다. 건륭제는 자신을 수행하는 시인, 화가 등을 불러 황실에서만 마시는 좋은 차를 대접하며 시 한 수를 읊거나 써 줄 것을 권유하였다. 특히 자신이 데려온 시인과 강남에서 살던 시인들과도 문예 대결을 펼치게 하는 등 문예 활동을 활발히 벌이고 자신의 탁월한 예술적 안목으로 예술가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또한 강남의 골동품을 모으는 것을 좋아하여 환관들로 하여금 특정한 골동품을 수소문하여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사서 가져오라 할 만큼 수집 욕이 매우 컸다.

    그러나 순행을 하면서 그는 가정적으로 큰 일을 두 번 겪었다. 1748년(건륭 13년) 건륭제는 자신의 정실부인인 효현순황후 부찰씨와 더불어 동순을 나가 제남을 거쳐 공자의 고향 곡부까지 내려가 공림을 참배하였으나 효현순황후는 배 위에서 연회를 즐기는 도중에 강물에 빠져 북경으로 급히 가다가 덕주에서 오한에 걸려 사망하였다. 그녀를 매우 사랑하고 아꼈던 건륭제는 크게 상심하여 순행을 떠나는 것을 몇 년간 중지하였고 동순을 갈 때에도 덕주를 경유하지 않고 우회하여 갔다. 그 후 건륭제는 한황귀비 오랍나랍씨를 황후로 새로 맞아들였으나 1765년(건륭 30년) 네 번째 남순 때, 연회 후 함부로 머리를 자르고 여승이 되려 하였다는 이유로[15] 건륭제의 노여움을 사서 강제로 북경으로 보내졌다. 그 후 오랍나랍씨는 황후로서의 권위를 박탈당한 채 유폐되어 1768년(건륭 33년)에 사망하였고 황후가 아닌 귀비로서의 장례로 지내지고 황후로서의 시호도 받지 못하는 등 건륭제로부터 홀대를 받았다.

    문화·예술 발전과 문자의 옥

    건륭제는 시를 짓는 것을 좋아하여 정무를 본 오전과는 달리, 오후와 저녁에는 시를 지으며 낙으로 삼아 평생 4만 수가 넘는 시를 지었으나 그 중 상당수는 어법이 틀리고 질도 낮아 잘 지어진 시는 아니었다.[14] 간행된 시문집으로는 《낙선당전집》, 《청고종어제시집》 등이 있다. 그러나 서예에는 실력이 뛰어나 자금성 안의 여러 편액들을 썼으며 대신들의 생일 때에는 자신이 손수 쓴 글귀를 그 대신에게 선물해주기도 하였다. 그림을 그리기 좋아하여 여러 그림을 남겼는데 주로 자신이 좋아하던 후원과 정자를 주로 그렸다. 건륭제는 순행에서도 그러하였듯이 황궁인 자금성에서 예술가들을 초대하여 역시 차를 대접하며 그들의 학식과 예술성에 감탄하였다.

    건륭제는 청나라 각지의 궁전, 행궁, 도로, 운하, 성벽, 사원 등을 새로 짓거나 증축하는 데에도 힘썼다. 건륭제는 본래 자신이 태어난 잠저인 옹친왕부였으나 옹정제 때 라마교 사원과 행궁으로 개축된 옹화궁을 대폭 증축하였고 명나라 때 지어진 자금성이 너무 인위적이고 낡아서 자신의 쉼터가 될 만한 곳, 즉 큰 연못과 나무 등이 많은 거대한 후원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는 최고의 장인, 석공, 목공 등을 불러 후원을 만들었는데 그때 처음 만들어진 후원이 북경 서북쪽에 있는 청의원(淸漪園)으로 훗날 이화원으로 개명되었다. 다른 한 후원은 바로 원명원으로 본래 아버지 옹정제가 가지고 있던 작은 후원을 대폭 증축하고 옆에는 그 부속 후원인 장춘원(長春園), 기춘원(綺春園)을 새로 지였다. 건륭제는 원명원을 서양과 동양이 만나는 궁전이 되길 원하여 조부 때부터 궁정에서 일하던 예수회 선교사 중 최연장자 주세페 카스틸리오네(중국 이름 랑세녕(郞世寧))와 프랑스에서 온 천문학자 미셀 베누아에게 원명원의 개·보수를 명하였다. 카스틸리오네는 베르사유 궁전의 바로크 양식과 로코코 양식을 본떠 지었는데 지붕은 중국식, 건물 외벽은 서양식으로 지어 혼합 양식을 따 지었고 안에는 유럽 왕실에서 쓰는 진귀한 물건을 가져다 놓아 전시하는 등 매우 화려하였다. 북경 밖으로는 강희제 때 지어져 승덕 땅에 있던 피서산장을 1743년(건륭 8년)에 대대적으로 정비하기 시작하여 49년 후인 1792년(건륭 57년)에야 완성을 하였다.

    건륭제는 이미 전임 황제들인 강희제, 옹정제와 같이 궁정의 선교사들을 우대하며 그들에게 부분적인 선교 활동을 허락하였다. 하지만 건륭제 자신은 조부와 부황과 같이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선교사들의 예술적, 과학적 지식만을 이용하려고 하였다. 건륭제의 증조부인 순치제부터 이미 아담 샬 폰 벨을 시초로 건륭제 때에도 이그나츠 쾨글러, 안토 고가이슬 등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천문대인 흠천감을 이끌며 중국의 천문학과 지리학에 도움을 주었다. 1769년(건륭 34년) 이들의 도움으로 완성된 《건륭황여전람도》(乾隆皇與全覽圖)는 서양식으로 그린 지도로 청나라의 강역을 세밀히 그려냈다. 프랑스 선교사인 조제프마리 아미오는 여러 개의 황실 정원을 프랑스식으로 꾸며주고 《손자병법》과 같은 중국의 유명한 고서적이나 건륭제가 지은 시 등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출판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 건륭제는 1770년(건륭 35년), 중국에 있는 모든 고서적들을 수집할 것을 칙령으로 반포하였다. 이에 따라 건륭제는 학자들에게 모든 고서적들의 이름을 목록으로 작성하고 고서적들을 사서오경과 같은 고전인 ‘경’(經), 역사서인 ‘사’(史), 제자백가를 포함한 철학서인 ‘자’(子), 그리고 문집인 ‘집’(集) 등 모두 네 분류로 나누었다. 모은 서적을 모두 학술 기관인 한림원과 문연각(文淵閣)에 비치한 후 조사하여 분류하고 일람에 적어놓는 작업만도 2년이 넘게 걸렸다.[14] 건륭제와 군기처는 이러한 사업이 세금도 적게 들고 국가의 문화적 위치를 한층 발전시킬 것이라 여겨 전폭적으로 지원하였다. 1773년(건륭 38년), 이렇게 모인 3,503부에 79,337권 33,054책의 서적을 한데 모아 3,800여 명의 학자들이 필사를 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사고전서》(四庫全書)이며 이 《사고전서》에 실린 서적들을 분류해 놓은 일람을 《사고전서총목제요》라고 한다. 《사고전서》는 9년 뒤인 1782년(건륭 47년)에 가서야 완성이 되었다. 건륭제는 《사고전서》의 양이 매우 방대하기 때문에 자금성의 문연각, 심양의 문소각(文溯閣), 열하의 문진각(文津閣), 원명원의 문원각(文源閣) 등 4곳에서 보관한 뿐만이 아니라 양주, 진강, 항주 등으로 보내 한림원의 원로 학사가 책임을 지고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때 만들어진 《사고전서》는 명나라 영락제 때 만들어져 당시까지만 해도 중국 역사상 최대의 편찬사업인 《영락대전》의 3배를 훌쩍 뛰어넘는 양이었으며 강남에 보존된 3부는 남방의 학자들이 언제든 열람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밖에도 건륭제는 《대청일통지》, 《황조문헌통고》, 《대청회전》 등 방대한 도서를 많이 편찬하게 하였다.

    건륭제의 치세에도 문자의 옥은 계속되었다. 건륭제는 《사고전서》를 편찬하기 시작한 1773년(건륭 38년)부터 모든 책들을 2년간 24번 조사하여 청나라의 정책과 그 뿌리에 정통성을 제기하는 서적은 모두 불온서적으로 지정하고 불태워버렸다. 소각된 책들은 모두 538종에 13,860부에 달하는 상당한 양이었다. 이 책들은 대부분 명나라 말엽에 쓰인 것으로 선황인 태조 누르하치의 근본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북방 민족은 한족을 다스릴 권리가 없다’, ‘명나라만이 중원을 다스릴 유일한 정통 황조이다’라는 등 청나라의 중국 지배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비난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건륭제는 이러한 행위를 대역죄로 처리하여 책을 쓴 저자와 그의 가족들을 변방으로 유배 보내거나 노예로 삼았고 노골적으로 공격한 경우에는 주동자는 능지형에 처하고 그 삼족이나 구족을 멸하는 등 엄정하게 다스렸다. 이에 건륭제는 한족에게도 만주어를 가르치기 위해 《청문감》(淸文鑑)이라는 책을 지어 보급하였다.[16]

    경제와 부의 완성

    건륭 시대 초기부터 선대인 강희제·옹정제의 강력한 내치와 더불어 새로운 작물과 농작 방식이 도입됨에 따라 농업 수확률이 대폭 상승함에 따라 상업이 번창해져 경기가 활성화되었다. 특히 신대륙에서 전래되어 유럽 선교사들이 가져온 작물들이 서서히 재배되기 시작하였는데 그 중 고구마는 어느 땅에서나 잘 자라서 백성들의 기근을 면하게 해주어 이때 들여온 작물 중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밖으로는 무역을 늘렸는데 면, 칠기, 도자기, 비단 등이 주요 특산품으로 세계에 수출되었고 이에 따라 재정은 물론 백성들의 삶의 질도 크게 상승하였다. 차의 생산량도 크게 많아져 영국에 수출하는 차의 생산률이 건륭제 즉위 80년 후인 1815년(가경 20년)에는 50배까지 증가하였고 유럽 선교사와 상인들은 고가인 칠기 가구나 질 좋은 종이, 서적에 큰 관심을 가져 구입한 후 본국에다 다시 팔았다. 건륭제는 이러한 무역 정책을 크게 장려하여 유럽 상인들로부터 은이 많이 들어와 1760년(건륭 25년) 총 85,000kg의 은이 국고에 있었으나 20년 후인 1780년(건륭 45년)에는 450,000kg의 은이 국고에 들어와 있었다.

    이러한 부와 새로운 농작 방식을 바탕으로 인구도 크게 늘어났는데 1722년(강희 61년) 1억 5천만 명이었던 인구가 68년 뒤인 1790년(건륭 55년)에는 3억 명을 넘어서 배가 되었다. 18세기로 들어서면서 백성들이 문화·예술을 즐기기 시작하면서 여가 시간은 많아지고 각지가 부유해져 인구가 급속도로 상승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건륭제 시대 이후 가경제 시대에 접어들면서 경기는 악화되어감에도 불구하고 인구는 폭증하면서 경제적 부양력이 인구 상승률보다 현저히 떨어지게 되어, 이에 불만을 가지게 된 일부 백성들을 중심으로 반청(反淸) 세력이 싹트기도 하였다.

    부정과 부패

    건륭제가 청년, 중년 때에는 부황 옹정제처럼 주필(朱筆)을 하여 관리들을 항상 감찰하는 등 기강을 엄정히 하여 관리들의 횡령이나 탈세 같은 일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고 일어나더라도 그 금액은 적었다. 그러나 건륭제가 나이가 들면서 중앙과 북경 주변의 정무만 처리하고 주필을 쓰는데 소홀해졌으며 각 성의 탄원이나 정책은 각 성의 총독, 순무가 재량껏 처리하게 내버려 두는 등 느슨하게 대하였다. 이에 따라 건륭제의 감시망에서 벗어난 지방 관리들이 백성들과 상인들을 상대로 착복과 횡령, 탈세를 자주 하였고 그 연관된 금액도 매 건당 수십만 냥을 웃돌았다. 건륭제의 치세 동안 황하에서 7건의 홍수 범람 사태가 발생하여 건륭제가 구호 자금을 보내주었으나 중간에서 관리들이 모두 횡령한 바람에 치수 공사가 진척을 이루지 못한 적도 있었다.[10] 그 이후로는 점점 심해져 중앙에서 처리해줄 강력하고 청렴한 고위 관리들이 나타나지 않아 지방의 말단 관리부터 수상급인 수석군기대신(首席軍機大臣)까지 연관되어서 집단 뇌물수수 사건까지 발생하는 등 심각해졌다. 건륭제 치세 중기 때부터 군기대신 우민중은 청렴과는 거리가 멀고 스스로 막대한 사익을 취하며 대신들 사이에서도 뇌물이 오가기 시작하였다. 이에 하급 관리들 역시 서로 뇌물수수를 눈감아주고 과거에서도 일정한 돈을 지불한 응시자에게는 합격시켜 주는 등 그 폐해가 계속되면서 감숙성에서 청나라 최대의 뇌물수수 사건인 감숙모진안(甘肅冒賑案)이 발생하였다.[17]

    1774년(건륭 39년) 당시 감숙성은 가난한 지역으로 매년 북경의 군기처나 호부로부터 구호 자금을 받아서 사무를 처리하였다. 그리고 감숙 순무인 왕단망(王亶望)이 매년 그러하듯 건륭제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구호 자금을 얻었으나 돈은 정작 구호에 쓰이지 않고 왕단망의 창고로 넘어갔다. 그러나 왕단망은 이러한 사실을 숨기고 구호 내역을 조작하여 건륭제에게 올렸고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건륭제는 왕단망을 절강성 순무로 바꿨으나 후임자에 이르러 뇌물수수 사건이 밝혀졌는데 1774년(건륭 39년)에서 1781년(건륭 46년)까지 7년 동안 왕단망 개인이 착복한 돈은 2백만 냥이 넘었고 감숙성의 전체 관리가 축적한 돈은 1,500만 냥이나 되었다.[17] 순무가 자신을 속였다는 것을 안 건륭제는 대노하여 왕단망을 비롯한 2만 냥 이상을 빼돌린 감숙성의 관리들은 모조리 사형에 처하는 등 강수를 두었다. 그 이후 건륭제는 군기처에게 각 성의 총독·순무가 제대로 보고를 올리는지 그 작년의 것과 대조하라 지시하였으나 자신이 직접 진두지휘하지는 않았기에 흐지부지되었다.

    그리고 건륭제는 자신의 재위 후반기 내내 큰 영향력을 행사한 화신(和珅)에게 절대적 신임을 보냈다. 화신은 금군의 삼등시위로 시작하여 27세인 1776년(건륭 41년) 호부시랑이 된 이후로 계속 호부를 장악하며 국고를 책임졌고 왕단망의 뇌물수수사건을 철저히 밝혀내어 그 돈을 국고로 환수하는데 일조하였다. 이에 힘입어 1780년(건륭 45년)에는 불과 31세에 호부의 수장인 호부상서가 되면서 각지의 총독·순무에게 일정한 돈을 지불하면 대역죄를 제외한 모든 죄를 사면하는 방식으로 돈을 모아 자신의 창고에다가 쌓아두었으나 호부상서의 직분을 게을리 하지는 않아 국고가 비었을 시에는 자신의 창고를 열어 국고에다가 돈을 보내어 메웠다. 백성들의 세금을 대폭 올리고 관리들에게 자주 뒷돈을 받고 반대파 신하에게는 중상모략을 일삼는 부정부패의 원상이었으나 중국어, 만주어, 몽골어, 티베트어 등 4개 국어에 능통하여 건륭제가 내리는 국서를 직접 번역하여 보내는 등 업무 처리 능력이 뛰어나 수상급인 영시위내대신, 수석군기대신과 여러 문관과 무관의 관직을 겸직하며 크나큰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강희제와 옹정제 내내 크게 위축되어 온 신권을 다시 강화하였다. 또한 화신의 장남인 풍신은덕이 건륭제가 65세에 얻은 가장 총애하던 막내딸인 고륜화효공주와 혼인함으로서 황실의 인척이 되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부정부패가 계속되자 반청 세력이 계속 나타났는데 1774년(건륭 39년) 왕륜(王倫)이라는 자가 관리들의 부정부패, 무거운 세금 등으로 사람들을 규합하고 이미 쇠망한 백련교를 다시 일으켰으나 건륭제의 대처로 손쉽게 진압되었다. 그러나 백련교를 비롯한 다른 반청 세력들도 은밀히 세력을 규합하는 등 건륭제 말년까지 계속 지방에서 산발적인 분쟁이 일어났다.

    유럽과의 관계와 사절단

    건륭제는 부분적으로나마 예수회 선교사들의 선교를 허락하였고 선교사들은 이에 따라 교세를 확장시키고 가톨릭으로 개종한 신자들에겐 조상의 제사 등 본래의 관습을 어느 정도 지킬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그러나 1742년(건륭 7년) 교황 베네딕토 14세는 〈엑스 쿠오 싱굴라리〉(Ex quo Singulari)라는 칙서를 내려 가톨릭으로 개종한 신자들이 풍습을 유지할 수 있던 관행을 금지시키고 1744년(건륭 9년) 다시 또 다른 칙서 〈옴니움 솔리키투디눔〉(Omnium solicitudinum)를 내려 이를 재확인하였다. 교황의 칙령이 내린 후로는 가톨릭 신자의 수가 늘어나지 않았고 예수회 선교사들도 제대로 선교 활동을 펴지 못하였다.[18] 그 후 중국 내의 가톨릭 교세는 조정의 탄압과 유학자들의 공격으로 청나라 멸망 때까지 크게 성장하지 못하였다.

    매카트니의 영국 사절단을 접견하는 건륭제한편으로 유럽 상인들은 1750년대에 이미 광동성에 들어와 거주하며 중국식 길드인 공행(公行)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여서 청나라의 관세도 덜 지불하였고 현지 상인들과의 신뢰도를 쌓았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청나라 상인들도 유럽인들에게 뒷돈을 받는 등 부정한 행위를 하였다. 특히 청나라에 관심을 가지던 영국은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위해 1759년(건륭 24년) 영국 동인도 회사는 직원을 북경으로 보내 개항을 요구하였고 건륭제는 이를 허락하였으나 갑자기 이를 거절하고 대외 무역 규제를 대폭 강화하였다. 또한 영국인들이 주로 활동하고 있던 주산(舟山)과 하문(아모이)의 항을 폐항하고 개항을 광주항만 허락하였다. 추가로 건륭제는 유럽 상인들은 반드시 공행과만 매매를 하도록 규정하고 그 시기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로 엄격하게 설정하였다.

    이에 유럽 국가, 그 중 영국은 무역을 늘려 자신들의 세력을 강화하고자 여러 번 특사를 파견하여 건륭제에게 진귀한 선물을 주어 이를 타개하려 하였고 또 공사를 상주시켜 청나라의 동정을 항시 살펴보려고 하였다. 1788년(건륭 53년) 영국은 전권 대사로 카스카트(Cathcart)를 파견하였으나 카스카트가 청나라로 가는 도중 병사하여 뱃머리를 돌려야 했다. 1792년(건륭 57년) 9월 26일, 영국 정부는 다시 특별 사절단을 편성, 건륭제의 82번째 생일을 축하한다는 명분으로 특사로 조지 매카트니 백작을, 부사로 조지 스턴튼(George Staunton)을 명하여 파견하였다.[19] 하지만 본래 매카트니는 청나라뿐만 아니라 일본까지 가서 쇼군을 만나 일본이 청나라에게 주로 수출하는 상품인 차를 직접 거래할 수 있도록 요청을 하려 하였다.[20] 사절단은 대서양, 인도양을 거쳐 1793년(건륭 58년) 5월에 오문(마카오)에 도착하고 이를 알리는 서신을 건륭제에게 보내 알현의 허락을 받고 다시 출발하여 그 해 7월에 북경의 항구인 천진에 닻을 내렸다.

    자금성에서 대신들을 면담하는 이삭 티칭과 사절단당시 건륭제는 막 완공된 여름 별장인 열하 피서산장으로 가서 지내고 있었다. 그렇기에 천진으로 온 다음 북경에서 여독을 풀고 다시 만리장성을 넘어 1793년(건륭 58년) 8월에야 피서산장에 도착해 건륭제를 알현하였다. 건륭제는 화신에게 사절단을 대접하는데 소홀하지 않도록 명을 내렸으나 도중 접견의 예의문제로 난항을 빚게 되었다. 본래 외국의 사신은 황제를 접견할 때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 즉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예를 취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매카트니는 자신은 청나라의 속국의 신하가 아니라며 거절하였으나[19] 합의 끝에 건륭제의 정식 만찬에서는 삼궤구고두를, 그 밖의 접견에선 영국식 예[21]를 취하도록 하였다. 매카트니는 건륭제의 탄신 만찬에서 삼궤구고두를 올리며 건륭제에게 당시 영국 국왕 조지 3세의 친서와 영국에서 가져온 여러 진귀한 선물을 받았다. 친서에서는 무역을 늘리고 공사를 상주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22] 그러나 친서에서는 영국에게 주산 근처의 작은 섬을 할양해 영국인들이 사용하게 해달라는 내용도 쓰여 있자 건륭제는 진노하며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영국 사절단의 일체의 행동을 금하였다. 건륭제는 그 다음 달인 9월에 영국 사절단의 귀국을 강제 조처하였다.[22]

    2년 뒤인 1795년(건륭 60년) 초에는 네덜란드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대표하는 전권 특사 이삭 티칭(Issac Titsingh)이 건륭제의 재위 60년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로 왔다. 광주를 거쳐 북경으로 와서 원명원에서 건륭제를 접견하였는데 노골적으로 청나라의 땅의 할양을 요구한 영국과는 달리 네덜란드 사절단은 그러한 행동을 보이지 않았으며 영국 사절단이 거부하던 삼궤구고두를 바로 올려 건륭제의 호감을 샀다.[23] 건륭제는 네덜란드 사절단을 영국 사절단보다 더 우대하였고 그에 대한 선물도 더 많이 챙겨주어 보내주었다.

    퇴위와 반란

    1795년(건륭 60년) 말 건륭제는 스스로 황위를 물러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즉위할 때 한 약속이기도 하였는데 1735년(옹정 13년) 당시 즉위할 때 쓴 칙서에서는 즉위 60년째에 황위에서 물러나겠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 짐의 할바마마(강희제)께서는 61년간 재위하셨으나 짐은 감히 그 기록을 깰 수 없도다. 짐이 그 정도로 오래 살아있으면 건륭 60년 째 되는 해, 즉 짐의 나이 85세 되는 해에 황자에게 황위를 넘기고 물러나겠다.[24]

    본래 건륭제는 즉위할 때 첫 번째 부인 효현순황후 소생의 차남 영련(永璉)을 후계자로 염두에 두었으나 영련이 1738년(건륭 3년)에 죽은 이후로는 건저(建儲jiànchǔ)를 오랫동안 보류하였다. 그 후 건륭제는 한족 출신 후궁인 영의황귀비를 사랑하여 그 아들인 15남 영염(永琰)을 1773년(건륭 38년) 은밀히 후계자로 세우고 영염의 이름이 담긴 함을 건청궁 정대광명 편액 뒤에 넣어놓았다. 1789년(건륭 54년) 건륭제는 영염을 가친왕(嘉親王)에 봉한 뒤 정무와 군무를 처리하도록 하였고, 1795년(건륭 60년) 9월 4일 편액에 넣어놓은 유조를 꺼내어 영염을 황태자로 봉하였다. 그리고 1795년(건륭 60년) 음력 12월 30일, 즉 양력으로는 1796년 2월 9일 건륭제는 황위에서 내려왔고 그 다음 날인 1796년 음력 1월 1일(양력 1796년 2월 10일)에 자금성 태화전에서 열린 양위식에서 전위조서를 내리고 황위를 황태자 영염에게 넘겨주니, 이가 가경제이다.

    “ 짐은 감히 할바마마의 재위기간을 뛰어넘을 수 없는 바 이에 조칙을 반포하여 병진년(1796년)을 가경 원년으로 정하노라. 황태자 영염을 병진년 정월 초하룻날 황제에 즉위토록 할 것이며 짐이 직접 태화전에 나가 황상에게 옥새를 건네는 그 순간부터 짐을 태상황제로 칭하도록 하라. 그러나 아직 중요한 정무와 군무, 인사권은 짐이 직접 처리할 것이다. [25]

    조서에서도 언급했듯 건륭제는 태상황제로 물러남에도 여전히 군국대사를 처리하는 등 막강한 위세를 자랑하였다. 비록 가경제 역시 친정을 할 수 있었으나 중요한 일은 반드시 태상황제에게 물어보고 실행하였다. 이렇게 건륭제는 중국 역사상 태상황제 중 유일하게 금상(今上) 황제보다 더 많은 실권과 책임을 가졌다. 덕분에 가경제가 증오하던 탐관 화신은 건륭제의 비호로 조정에서도 아직 쫓겨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5일 뒤인 1796년(가경 원년) 정월 6일, 건륭제는 가경제, 친왕·군왕, 그리고 조정의 전·현직 원로대신들을 모두 불러 조부 강희제가 열던 천수연(千叟宴)을 열며 대신들에게 만수무강의 축원을 받았다.

    건륭제가 물러나고 가경제가 즉위하자 다시 백련교가 활개를 쳐서 백련교도의 난이 발발하였다. 이미 20년 전 한 번 일어났으나 건륭제의 빠른 대처와 내분으로 금방 진압되었기에 교도들은 백련교에 나오는 미륵불이 영생을 허락할 것이라는 교리와 계속 늘어나는 인구와 반비례되는 경기, 그리고 부정부패의 영향으로 일반 백성들에게는 무거웠던 세금 등을 내세워 교도들간의 유대를 강화하였다. 이때 이들을 이끈 총대장은 제림이었으나 제림은 1796년(가경 원년) 정월 역모 사실이 탄로나 능지처참당하고 그의 아내로 스물의 젊은 여인 왕총아(王聰兒)가 뒤를 이었다. 왕총아의 백련군은 호북성, 사천성 등에서 궐기하여 청군을 상대로 섬서성까지 진군하며 지구전을 펴는 등 오랜 기간 끌었으나 건륭제가 수석군기대신 화신을 호북성 녹영을 이끄는 대장군으로 파견하였고 청나라에 호의적인 호족들을 중심으로 민병대인 향용이 녹영과 협공을 하여 백련군을 대파하였다. 수세에 몰린 왕총아는 1798년(가경 3년) 전투 도중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진하였으나 백련교도들은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켰고 6년 뒤인 1804년(가경 9년)에야 전멸하였다.

    노황제의 최후

    건륭제는 이미 80이 넘은 노구였으나 여전히 정무를 처리하고 조회에도 자주 참가하는 등 왕성히 활동하였다. 그러나 태상황제가 된 후로 점점 기력이 쇠약해져 갔고 여러 번 피접을 갔으나 차도가 그리 있지는 않았다. 1799년(가경 4년) 2월 7일, 음력으로는 1월 4일에 60년간 재위하고 4년간 태상황제로서 황제보다 더 많은 실권을 장악하였던 건륭제는 노환으로 89세를 일기로 자금성 양심전(養心殿)에서 붕어하였다. 건륭제의 붕어를 가장 슬퍼한 것은 바로 건륭제의 비호로 20년 넘게 조정을 장악하던 화신이었다. 건륭제가 죽고 난 다음 비로소 최고 권력자가 된 금상황제 가경제는 화신을 장의도감으로 명하여 국상을 처리하게 하였으나 파직하고 곧 권력을 농단하고 부정 축재하였다는 등의 20개의 죄목을 발표하고 건륭제 붕어 보름 뒤인 2월 22일에 화신에게 자진 명령을 내렸다. 화신은 비단으로 목을 매고 자살하였고 화신이 평생 모아놓은 재산은 모두 국고로 환수되었다. 이때 처분된 화신의 재산은 모두 9억 냥이 넘어서 12년의 국가 총예산을 훌쩍 뛰어넘는 금액이었다.[14]

    건륭제의 묘호로는 오랫동안 재위하여 전성기를 지켜 성조와 세종의 뜻을 계승하였다 하여 ‘고종(高宗)’, 시호로는 ‘법천융운지성선각체원입극수문분무흠명효자신성순황제’(法天隆運至誠先覺體元立極敷文奮武欽明孝慈神聖純皇帝)로 정하였는데 여기서 ‘융운’(隆運)과 ‘입극’(立極)은 국운을 높게 일으켜 세웠다는 뜻이며 나라를 평온히 다스렸다 하여 ‘순’(純) 자의 시호를 붙였다. 가경제는 아버지의 국상을 성대히 치러주고 1799년(가경 4년) 9월에 청동릉 안에 매장하니 능호는 유릉(裕陵)이다.

    통치 철학과 사상

    건륭제는 생애 전반에 걸쳐서 조부인 강희제를 존경하였다. 강희제의 정책인 자생인정 정책을 확장시키거나 치수에도 노력하는 등 조부의 뜻을 이어받으려 노력하였고 자신의 서재에는 강희제의 어진을 걸어놓고 본보기로 삼았다. 할아버지를 의식하여 재위 60년 만에 내려온 것 역시 건륭제가 강희제를 매우 존경한 대목 중 하나이다. 또한 건륭제는 일생에 걸쳐서 풍류와 독서를 좋아하였다. 그 스스로도 여행을 매우 좋아하여 순행을 자주 다니면서 문인, 예술가들과 담론을 하였다. 건륭제는 문화·예술 분야로는 상당한 지식을 지녔고[26]서첩, 도자기, 칠기, 그림 등 모든 예술품에 관심을 가지며 예술가들을 크게 독려하였다. 건륭제는 오전에 격무로 쉴 틈이 없었으나 오후에는 정무는 일체 보지 않고 독서, 서화 등의 여가 활동에 치중하여 자신의 예술성과 지식을 동시에 늘렸고 정무에 시달리던 머리를 식혀주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건륭제는 음식에도 큰 관심을 가졌는데 중국 음식의 집대성이라 불리는 만한전석(滿漢全席)이 완성된 때가 바로 건륭제의 치세 때였으며 차를 애호하여 용정차를 자주 마셨다. 그는 용정의 찻잎을 끓인 약수에 우유를 넣어 마셨으며 자주 대신들을 불러서 차를 대접하기도 하였다.[26]

    또 건륭제는 가족을 매우 중히 여겨 자신의 모후인 효성헌황후에게 효도를 다 하였는데, 매일 거르지 않고 3번 어머니가 거처하는 자녕궁에 가서 문후 드렸고, 여러 순행에도 효성헌황후를 모시고 가는 등 어머니를 크게 봉양하였다. 효성헌황후는 1777년(건륭 42년) 86세로 사망할 때까지 내명부를 오랫동안 통솔하며 아들과 며느리, 손자들, 대신들에게까지 큰 존중을 받았으나 정치에는 일체 간섭하지 않았다. 또한 건륭제의 황자들은 선대인 강희제의 황자들이나 옹정제의 황자들과는 달리 황위를 놓고 세력 다툼을 벌이지 않아, 가경제가 황태자가 되고 황제에 즉위할 때까지 별다른 항의를 하지 않고 가경제의 등극을 받아들였다.

    건륭제는 미복을 하고 잠행하는 것을 좋아하였는데 민간의 소문에도 귀를 기울이거나 대신들의 집을 불시에 방문하여 대신들이 눈여겨보는 인재들을 발굴하기도 하였다.[26] 이렇게 하여 건륭제는 대신들이 평소 어떻게 지내는지 또 황제가 불시에 왔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관찰하려 하였다. 건륭제는 세 명의 대신을 가까이 두며 자문을 구하였는데 그들이 바로 유용(劉墉), 기윤(紀昀), 그리고 화신이었다. 유용과 기윤은 건륭제 치세 초·중기에 활약을 하며 조정에 검소한 바람을 불어넣어 주었으나, 후기에 화신이 두각을 나타내면서 유용과 기윤은 모두 자청하여 지방의 한직으로 내려가 화신을 견제할 사람이 없어졌다. 위의 예를 볼 수 있듯 화신은 축재를 많이 하는 탐관이었으나 부정부패를 한다 하여도 국고의 돈을 비우게 하지 않았으며, 그 능력을 높이 사던 건륭제는 화신의 뒤에서 하는 일은 상관없이 조정의 영수로까지 성장하는데 힘이 되어주는 등 사람을 쓸 때 그 이력에 대해서 편견을 가지지 않았다.

    평가

    사후의 영향과 업적

    건륭제가 죽은 후 청나라는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 아들인 가경제는 건륭제와 화신이 죽은 후 부정부패를 일소하려 노력하였으나 여전히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횡행하였고 그에 따라 청나라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빈번히 일어났다. 1804년(가경 9년) 백련교도의 난은 진정되었으나 1813년(가경 18년) 백련교의 일파인 천교(天敎)도들이 난을 일으켰고, 천리교도들이 황궁인 자금성에까지 난입하는 계유지변이 일어나는 등 내란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이러한 내란을 진압하는데 돈이 많이 들어 군비를 2억 냥 이상 지출하는 등 청나라의 재정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당시 내란, 재정 악화보다도 더 큰 문제는 외란으로 건륭제 때부터 시작된 청나라와 영국의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는 후대에서도 지속되었다. 건륭제의 손자인 도광제 때에 영국 상인들은 건륭제가 정한 상업 정책을 무시하고 아편을 유통시켰으나 청나라 정부가 이를 금하고 아편을 폐기하자 함대를 이끌고 청나라로 쳐들어가 남경 조약을 맺고 향항(홍콩)을 가져가는 등 청나라는 계속 열강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외란과 더불어 민란의 불씨는 점점 커져서 1851년(함풍 원년) 청나라를 더욱 쇠약하게 만든 태평천국의 난이 발발하여 13년간이나 청나라 조정을 괴롭혔다. 당시 건륭제가 지나치게 원정을 한 이후로 쇠락해진 팔기군은 태평천국군을 진압하는데 공이 없었고 이러한 군대 세력의 약화는 지방에서 조직된 민병대 향용이 큰 세력을 얻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향용이 결정적으로 태평천국군을 멸망시키고 태조 때부터 혁혁한 공을 세운 팔기군은 신식 무기의 등장과 향용의 대두로 더욱 쇠락해져 갔다. 또한 건륭제는 할아버지 강희제와 같이 한족의 문화를 흡수하는데 적극적이어서 그 문화를 발전시켰으나 만주족은 동화된 탓인지 자신들의 고유문화를 잃기 시작하였다. 건륭제 이후 만주어를 사용하는 인구수는 점점 줄어들었고 청나라 멸망 때까지 계속 하락세를 보였다.

    한편으로는 건륭제 사후 많은 전설이 생겼는데 그 중 건륭제의 생모에 관한 설과 향비와의 사랑이야기가 많이 회자되는 전설이다. 정사인 《청사고》〈고종순황제실록〉에서 기록된 건륭제의 모친은 옹정제의 후궁 출신인 효성헌황후라고 나와 있다. 그러나 전설에 따르면 건륭제는 옹정제와 효성헌황후의 아들이 아닌 강남 출신 한족 문인의 아들이며 옹정제가 본래 얻은 아이는 아들이 아닌 딸이었는데 마침 같은 날, 같은 시에 한족 문인의 아들이 태어나 서로 자신의 자식을 맞바꾸었고 이때 맞바꾸어져 옹정제의 아들이 된 남자 아이가 건륭제라는 것이다. 또한 건륭제가 남순을 떠난 목적은 바로 생모를 만나기 위한 목적이라고 하나[10], 대부분의 남순 때 효성헌황후가 건륭제를 따라 동행하였기 때문에 사실성이 떨어진다. 향비에 대한 전설은 본래 실존하던 위구르족 출신의 건륭제의 비 출신인 용비(容妃)가 모델로 실제로 오랫동안 살다가 자연사한 용비와 달리, 전설 속의 향비는 건륭제의 끊임없는 구애를 받으나 동침을 거부하고 절개를 지켰다. 건륭제가 사냥을 간 사이 황태후인 효성헌황후가 향비를 불러 자진을 권유하자 향비는 이에 자진하고 그녀가 죽은 뒤 그녀의 몸에선 아름다운 향기가 나왔다는 전설이다.[10] 이 두 전설은 건륭제가 강남 순행, 그리고 십전무공 중 하나인 위구르 원정에 끼친 영향에서 비롯된 전설로 당시 민간에서의 건륭제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비판

    건륭제 자신은 초, 중기 40년간 조부 강희제와 부황 옹정제의 정책을 계승하고 개혁을 단행하며 문화를 부흥시켰으나 후기 20년 동안에는 화신을 지나치게 편애하고 자신의 딸을 화신의 아들에게 시집보내면서 화신의 세력을 너무 방관하였다. 또한 건륭제의 비호로 화신은 자신의 집에 엄청난 양의 돈을 저장하는 등 화신의 전횡을 방치하여 화신을 비롯한 여러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내버려두는 실책을 범하였다. 즉위 당시 나쁜 정치 상황과 국고의 돈마저도 넉넉지 않던 강희제, 옹정제와는 달리 건륭제 때에는 국고의 돈이 풍족하였기에 불필요한 사치가 잦았다. 건륭제 역시 연회, 후원 건설 등에 막대한 비용을 쓰고 재위 기간 내내 원정을 단행하는 등 국고의 돈을 크게 낭비하여 청나라의 재정 상황은 악화되어갔다. 그리고 건륭제는 베트남, 네팔 등 정복한 영토에는 무단 통치를 단행하여 현지인들에게 분란의 싹을 틔웠으며 실제로 건륭제가 죽은 뒤, 베트남과 버마는 독립하였다.

    건륭제의 또 다른 실책으로는 외국에 대한 시각이었는데 영국의 특사 조지 매카트니는 동등한 입장에서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건륭제는 영국이 먼 나라에서 조공을 하러 온 것이라고 생각하며 영국 사절단이 올 때 전국에 “영국 오랑캐들이 항복하였다”라는 방문을 보냈다. 건륭제는 영국 사절들에게 시종일관 거만한 태도를 보이며 “천자의 나라에는 부족한 것이 없다”라는 말을 하여 영국 사절단을 당황하게 만들었다.[26]

    현대의 영향과 평가

    현대 이전만 해도 건륭제는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던 풍류군주라고 평가했으나, 근래에 들어서는 건륭제를 기점으로 청나라가 쇠퇴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을 주로 들며 건륭제에 대해 호의적인 평가를 잘 내리지 않는 편이다. 특히 그의 오만함과 과도한 사치, 낭비를 비판하였고 이러한 재화 유출은 훗날 청나라가 열강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하여서 멸망 때까지 강건성세의 번영은 다시 오지 않았다.[7] 건륭제를 유명하게 만든 민간의 설화는 후대에 들어서도 드라마·영화화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만든 드라마 시리즈 《황제의 딸》은 건륭 시대를 다룬 작품으로 건륭제가 황자 시절 강남에서 만난 여인과 하룻밤을 지낸 후 떠나자, 수십 년 뒤 그 딸이 나타나 아버지를 찾으려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그 밖에도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에선 이러한 야사 외에도 건륭제 후반의 이야기, 즉 건륭제와 화신을 다루는 내용의 드라마도 많이 나오는 등 건륭제를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본 작품이 많이 나오게 되었다.

    책으로도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이 있는데 《강희대제》, 《옹정황제》를 쓴 작가 얼위에허(二月河)는 그 완결판인 《건륭황제》를 써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등 다시 한 번 큰 히트를 쳤다. 이 소설을 토대로 2002년 중국중앙방송이 다시 《건륭왕조》(乾隆王朝)라는 드라마를 만들어 건륭제와 화신의 관계를 다루었으나 전작인 《강희왕조》, 《옹정왕조》보다 다소 부진하였다. 한편 야사를 토대로 쓴 책으로는 중국의 무협 작가 김용이 쓴 《서검은구록》(書劍恩仇錄)이 있다. 여기서 건륭제는 강남에서 태어난 한족 출신으로 풍류를 좋아하는 황제로 나왔으며 여러 번 드라마로도 제작되어서 인기를 누렸다.

    가족

    이 부분의 본문은 건륭제의 가족입니다.

    건륭제는 3명의 황후와 5명의 황귀비, 5명의 귀비 등을 두었고 슬하에 17남 10녀를 두었다.

    조부모와 부모

    조부: 성조 강희인황제(聖祖 康熙仁皇帝) 현엽(玄燁)

    조모: 효공인황후 오아씨(孝恭仁皇后 烏雅氏)

    부친: 세종 옹정헌황제(世宗 雍正憲皇帝) 윤진(胤禛)

    모친: 효성헌황후 뉴호록씨(孝聖憲皇后 鈕祜祿氏)

    황후

    효현순황후 부찰씨(孝賢純皇后 富察氏, 1712년 ~ 1748년) - 차하르총독 이영보의 딸. 복강안의 고모.

    계황후 오랍나랍씨(繼皇后 烏拉羅拉氏, 1718년 ~ 1766년) - 원래 칭호 한황귀비(嫻皇貴妃). 좌령 나이포의 딸.

    효의순황후 위가씨(孝儀純皇后 魏佳氏, 1727년 ~ 1775년) - 원래 칭호 영의황귀비(令懿皇貴妃). 내관령 위청태의 딸.

    아들들

    제1황자 정안친왕 영황(定安親王 永璜, 1728년 ~ 1750년) - 철민황귀비 소생.

    제2황자 단혜황태자 영련(端慧皇太子 永璉, 1730년 ~ 1738년) - 효현순황후 소생, 사망 후 황태자로 추봉.

    제5황자 영순친왕 영기(榮純親王 永琪, 1741년 ~ 1766년) - 유귀비 소생.

    제6황자 질장친왕 영용(質莊親王 永瑢, 1743년 ~ 1790년) - 순혜황귀비 소생.

    제7황자 철친왕 영종(哲親王 永琮, 1746년 ~ 1747년) - 효현순황후 소생.

    제8황자 의신친왕 영선(儀愼親王 永璇, 1743년 ~ 1832년) - 숙가황귀비 소생.

    제10황자 성철친왕 영성(成哲親王 永瑆, 1752년 ~ 1823년) - 숙가황귀비 소생.

    제15황자 가친왕 영염(嘉親王 永琰, 1760년 ~ 1820년) - 효의순황후 소생, 후에 옹염(顒琰)으로 개명. 제7대 황제 인종 가경예황제(仁宗 嘉慶睿皇帝).

    제17황자 경희친왕 영린(慶僖親王 永璘, 1766년 ~ 1820년) - 효의순황후 소생.

    같이 보기

    건륭(乾隆, 1736년 ~ 1795년) - 건륭제의 연호.

    강희제

    옹정제

    가경제

    청나라

    화신

    《사고전서》

    《황제의 딸》

    참고 자료

    《청사고》(淸史稿) - 〈고종순황제실록〉(高宗純皇帝實錄)

    《청사고》(淸史稿) - 〈인종예황제실록〉(仁宗睿皇帝實錄)

    周遠廉, 《乾隆皇帝大傳》

    조나선 D. 스펜스, 《현대 중국을 찾아서 1》, 이산출판사, 김희교 옮김, 1999년 ISBN 89-87608-07-7.

    미야지마 히로시, 《조선과 중국 근세 오백년을 가다 (일국사를 넘어선 동아시아 읽기)》, 역사비평사, 김현영 옮김, 2003년, ISBN 89-76967-07-0.

    둥예쥔, 《평천하 (건륭 원전)》, 시아출판사, 송하진 옮김, 2004년, ISBN 89-814-4148-0.

    김희영, 《이야기 중국사 3》, 청아출판사, 2006년, ISBN 89-368-0437-6.

    정진홍, 《인문의 숲에서 경영을 만나다》, 21세기북스, 2007년 ISBN 978-89-509-1276-5.

    시앙쓰, 남경사범대학 중한문화연구센터, 《건륭황제의 인생 경영》, 세종서적, 2007년, ISBN 978-89-84072-35-0.

    주석

    ↑ 1796년은 양력의 세년법을 따른 것이다. 건륭제는 1735년(건륭 60년) 음력 12월 30일, 즉 양력으로는 1796년 2월 9일에 황위에서 퇴위하였다.

    ↑ 만주어로는 훙리(Hung Li, ᠾᠦᠨᠭ ᡀᠢ)로 읽는다.

    ↑ ᡥᡡᠸᠠᠯ ᡳᠶᠠᠰᡠᠨᡨᠣ ᠾᠠᠨ라고 쓴다.

    ↑ ᠨᠠᠢᠷᠠᠯᠲᠲᠥ ᠤᠺᠬᠠᠨᠨ ᠺᠬᠠᠨᠨ라고 쓴다.

    ↑ 작위를 받은 기준에 따라 황사자(皇四子)로 불리나, 유아기에 죽은 옹정제의 황자까지 포함시키면 건륭제는 옹정제의 다섯 번째 아들이 된다.

    ↑ 측복진 이씨는 훗날 제비(齊妃)가 되는 인물이다.

    ↑ 가 나 다 라 브리태니커 건륭제 “건륭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2010년 1월 17일에 읽어봄.

    ↑ 진만러우, 《강희제의 교육 방식 - 向康熙學習》, 하남문예출판사(河南文藝出版社), 2008년

    ↑ 제비 이씨의 아들로 당시 살아있던 옹정제의 황자들 중 가장 연장자였다.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염숭년. 청나라 12명의 황제의 진짜 모습(正說淸朝十二帝) (중국어) (HTML). 2010년 1월 17일에 확인.

    ↑ 寶親王皇四子弘歷,秉性仁慈,居心孝友,聖祖皇考於諸孫之中,最為鐘愛,撫養宮中,其後仍封親王者,蓋令備位藩封,諳習政事,以增廣識見,今既遭大事,著繼朕登極,即皇帝位。

    ↑ 가 나 이시바시 다카오, 홍성구 옮김, 《대청제국 1616~1799 - 100만의 만주족은 어떻게 1억의 한족을 지배하였을까?》휴머니스트, 2009년 ISBN 9788958622673.

    ↑ 구성회 저, 《리더들의 리더가 된 중국의 제왕들》, 신서원, 2009년, ISBN 9788979400847

    ↑ 가 나 다 라 “건륭제”. 후동. 2010년 1월 27일에 읽어봄.

    ↑ 당시 만주족 풍습 중 머리를 자른다는 것은 남편이나 부모, 시부모가 죽었을 때에만 자르는 것으로 건륭제가 죽지 않은 상황에서 자르는 것은 저주를 뜻한다.

    ↑ “건륭제”.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2010년 6월 15일에 읽어봄.

    ↑ 가 나 탄광룽 (2002년 12월 10일). 왕단망의 뇌물수수사건(王亶望貪縱牽出連環窩案) (중국어) (HTML). 2010년 2월 6일에 확인.

    ↑ “베네딕토 14세”. 엔싸이버. 2010년 1월 27일에 읽어봄.

    ↑ 가 나 워드, 존. 건륭제가 매카트니를 만나다(Qianlong Meets Macartney) (영어). 2010년 2월 10일에 확인.

    ↑ Harlow, Vincent, Frederick Madden (1953). 《British Colonial Developments, 1774-1834》 (영어). Oxford

    ↑ 신하가 왕에게 머리를 숙이고 한쪽 무릎만을 꿇는 예를 뜻한다.

    ↑ 가 나 스턴튼, 조지 레너드. 영국의 왕이 중국의 황제에게 보낸 사절단(An Authentic Account of and Embassy from the King of Great Britain to the Emperor of China) (영어). 2010년 2월 10일에 확인.

      제6대 청나라 황제          

    전 임아버지 세종 옹정제 윤진

    1735년 ~ 1796년

    후 임15남 인종 가경제 옹염

    천명제 ·숭덕제 ·순치제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가경제 ·도광제 ·함풍제 ·동치제 ·광서제 ·선통제

    ↑ 반 브람 후키스트, 안드레아스 에베라두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중국의 황제에게 보낸 사절단(An authentic account of the embassy of the Dutch East-India company, to the court of the emperor of China, in the years 1974 and 1795) (영어). 2010년 2월 11일에 확인.

    ↑ 昔皇祖禦極六十 一年,予不敢相比,若邀穹蒼眷佑,至乾隆六十年乙 卯,予壽躋八十有五,即當傳位皇子,歸政退閒

    ↑ 朕不敢仰希皇祖以次增載。 特宣布詔旨,明定儲位,以丙辰為嘉慶元年。 皇太子於丙辰正月上日即皇帝位。朕親禦太和殿,躬授寶璽,可稱朕為太上皇帝。凡軍國重務、用人行政大端,朕未至倦勤。

    ↑ 가 나 다 라 권삼윤 (2003년 2월 1일). 그믐밤엔 궁녀, 보름엔 황후와 ‘雲雨之情’ (한글) (사설). 2010년 2월 13일에 확인.

    외부 링크

    네이버 캐스트 : 오늘의 인물 - 건륭제

    원본 주소 ‘http://ko.wikipedia.org/wiki/%EA%B1%B4%EB%A5%AD%EC%A0%9C’

    분류: 1711년 태어남 | 1799년 죽음 | 청나라의 황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