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6일과 7일의 역사 - 달러채택, 공화당창당, 푸른눈의 목격자, 미셸콴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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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2014. 7. 6.

 

 

 

 

 

 

 

[위르겐 힌츠페터]

푸른눈의 목격자, 그는 진실을 보았다.

 

 

 

 

 

- 링 크 -

 

7월 7일과 8일의 역사

- 솔로몬 제도 독립과 한글, 코난 도일과 셜록 홈즈

http://blog.daum.net/smileru/8888300

 

 

 

- 순 서 -

 

229년전, 1785년 7월 6일

달러가 미국의 통화 단위로 채택되다.

 

160년전, 1854년 7월 6일

미국 공화당이 창당됐다.

 

77년전, 1937년 7월 6일

독일 언론인 위르겐 힌츠페터 탄생.

 

34년전, 1980년 7월 7일

중국계 미국인 피겨 스케이트 선수 미셸 콴 탄생.

 

  

 

 

 

 

 

 

7월 6일과 7일의 역사

Wikipedia

 

7월 6일 : 국제 키스의 날(International Kissing Day)

1535년 - 토머스 모어반역죄로 처형되다.

1599년 - 조선의 군인 권율 별세.

1609년 - 보헤미아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다.

1785년 - 달러미국통화 단위로 채택되다.

1854년 - 미국 공화당이 창당됐다.

1885년 - 루이 파스퇴르광견병 백신 실험에 성공하다.

1937년 - 독일 언론인 위르겐 힌츠페터 탄생.

1964년 - 말라위영국으로부터 독립하다.

1971년 - 미국의 음악가 루이 암스트롱 별세.

1999년 - 에후드 바라크이스라엘의 총리에 취임했다.

2013년 - 아시아나항공 214편 보잉 777여객기가 샌프란시스코 공항 활주로에서 추락하였다.

 

 

7월 7일

1456년 - 잔 다르크화형당한 지 25년 만에 사면받다.

1898년 - 미국하와이를 자국의 영토로 병합하다.

1930년 - 영국의 추리소설 작가 아서 코난 도일 사망.

1937년 - 노구교 사건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한다.

1970년 -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이 개통되다.

1971년 - 백제 무령왕릉이 발굴되었다.

1978년 - 솔로몬 제도영국으로부터 독립하다.

1980년 - 중국계 미국인 피겨 스케이트 선수 미셸 콴 탄생.

2005년 - 영국에서 G8 정상회의가 개최되던 중 런던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하다.

2009년 - 한국미국사이트를 향해 DDoS 공격 (7.7 DDoS 공격) (~ 7월 11일)

2011년 - 2018 평창 동계 올림픽 개최가 확정되다.

 

 

 

 

 

 

 

1785년 7월 6일

달러가 미국의 통화 단위로 채택되다.

 

 

   오늘은 깊이 다룰 만한 소식이 없으니 짧게 짧게 다뤄봐야 할 듯 하다. 일단 달러에 관해... 뭔가 어마어마하게 굉장한 역사인 것 같지만 사실 특별한 것은 없다.

 

   일단 1500년대에, 오늘날의 체코 요아힘 계곡에서 큰 은광이 발견된다. 그곳에서 나온 은으로 은화를 만들어 '요아힘스탈러'라고 불러 사용하게 되는데, 이를 줄여서 '탈러'라고 불렀고 후에 '달러'로 불리게 되었다. 이 은으로 만들어진 달러는 유럽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후에 아메리카 대륙에 건설된 식민지에서도 사용되다가, 후에 미국이 독립한 뒤 1785년에 공식적인 미국의 화폐 단위로 채택된다. 100센트를 1달러로 규정하는, 근대 국가 최초의 십진법 회폐였다고. 사실 이걸로 달러에 대한 이야기는 끝...

 

   하지만 사실 달러에 대해 유명한 사건은 미국이 달러를 사용하기 시작했을 때가 아닌, 1971년 8월 15일에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금본위제를 포기했을 때가 아닌가 싶다. 미국만 금본위제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 굉장히 상징적인 사건이었는데, 이로 인해서 화폐라는 '종이쪼가리의' 가치는 각국이 소유한 금이라는 자산을 기반으로 하지 않고, 해당 국가의 경제력 그 자체와 신용도 등에 대해서 결정되게 되었다. 변동환율제의 시작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동시에 경제적 가치를 지닌 돈을 '찍어낼 수' 있게 되었으니, 어떤면에서는 천지개벽이었다.

 

 

금가격과 관련 역사들

 

 

 

   그런데 금본위제, 즉 금의 소유양과 가치를 기반으로 한 화폐발행이 전세계 물가 안정에 도움이 되었다는 말이 많다. 또 돈이라는걸 금 보유량에 상관없이 찍어낼 수 있게 되면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그로 인해 돈을 계속 굴리기보다는 모으는 쪽인 서민계층에 타격이 갔다는 주장이 있다. 자본가들을 위한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금본위제 폐지는 물론 애초에 달러가 등장한 것에도 거대 자본가들과 가문의 음모가 있다는 말이 나오고 있는데...

 

   나도 처음엔 그런 쪽을 믿는 편이었고 여전히 그런 주장의 일부는 맞다고도 생각하지만, 금본위제의 경우는 확실히 유지되기 어려운 게 맞는 듯 하다. 누가 음모를 꾸며 닉슨이 금본위제를 폐지하게 만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금'이라는 한정된 광물로는 폭발적인 경제성장으로 늘어나는 화폐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1980년대 레이건 정부, 심지어 2012년 오바마 정부에서의 공화당에서도 금본위제의 부활을 논의다고는 하는데...

 

   여하튼 참 이 화폐에 대한 역사와 작동원리... 알면 알수록 오묘하다. 정말 '음모'가 개입되었을 만한 부분도 없지 않은 것 같고 말이다. 글쎄 또 모르지, 누군가는 전세계 부자들의 재산을 다 합친 것 만큼의 재산을 숨기고 있을지...

 

 

 

 


1854년 7월 6일

미국 공화당이 창당됐다.

 

 

   2012년에 금본위제의 부활을 검토했던 공화당... 공화당의 전신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명이자 제3대 대통령이었던 토마스 제퍼슨의 '민주공화당'이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이 민주공화당은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의 전신이다. 결국 쪼개졌다는 이야기인데...

 

   민주공화당이 쪼개지게 된 계기는 1824년의 대통령선거였다. 원래 민주공화당의 경쟁자는 '연방당'이었는데, 2대 대통령 '존 애덤스'를 당선시키며 미국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일조한 연방당이었지만, 정치적인 무능과 파벌정치, 뚜렷한 색깔이 없는 무분별한 타협정치로 자멸하며 해체되어 버린다. 그런 가운데 진행된 1824년의 선거... 사실상 민주공화당 단독 후보 출마의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권력의 유혹은 이런 아름다운 상황을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다. 민주공화당 정치인들이 대통령 후보로 난립하게 된 것이다. 4명의 민주공화당 정치인들이 대통령에 출마하기에 이르는데, 상위권에 있던 '존 퀸시 애덤스'와 '앤드루 잭슨'간의 경쟁이 심했다. 그런데 또 여기에서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결국 선거 결과에서는 '앤드루 잭슨'이 41%의 표를 얻어 '존 퀸시 애덤스'의 30%를 크게 앞질렀는데, 50% 이상의 과반득표를 하지 못하게 되면서 당시 법에 따라 하원 의회에서의 표결로 대통령을 결정하게 된 것이었다.

 

 

20달러 지폐 속 앤드류 잭슨

 

 

 

   그런데 13%로 3위의 득표를 했던 '헨리 클레이'가 '존 퀸시 애덤스'를 지지하는 변수가 발생하면서 상황은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 결국 212명의 하원의원이 참가한 표결에서 '존 퀸시 애덤스'가 87표, '앤드류 잭슨'이 71표를 얻으면서 선거 결과를 뒤집는 결과가 나오게 된다.

 

   당연히 내부갈등이 폭발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민주공화당은 '친 앤드류 잭슨'파와 '반 앤드류 잭슨'파로 분열되었는데, 다음 1828년 대통령 선거에서 아쉽게 낙선했던 '앤드류 잭슨'이 비로소 당선되자 반 앤드류 잭슨파가 민주공화당을 대거 탈당, '휘그당'을 결성한다. 이 휘그당은 말그대로 '무조건 앤드류 잭슨 까기'를 내건 정당이었는데, 그러다보니 연방당이 말기에 보여주었던 것과 비슷하게 그들만의 정치적 색채와 정책이 없었고, 결정적으로 노예제도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표명하지 못하면서 국민들로부터도 지지를 잃고 만다.

 

   결국 휘그당에서 노예제도에 대한 폐지를 강력하게 주장하던 당원들이 만든것이 바로 지금의 '공화당'이다. 한편 꾸준하게 유지되어오던 민주공화당은 당명을 '민주당'으로 바꾸게 되는데, 남북전쟁 당시 북부와 남부의 민주당원들이 대립하면서 국민들에게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게 되고, 결국 노예제도 폐지를 내건 공화당이 남북전쟁 직전 대통령을 당선시키게 된다. 그 대통령은 바로 에이브러햄 링컨이었다. (1861~1865 재임)

 

   이로 인해 공화당, 아니 휘그당, 아니 '반 앤드류 잭슨'파는 화려하게 부활한다. 링컨 이전 휘그당이 대통령을 당선시키지 못했던 것은 아니나 주로 민주공화당, 민주당의 인물들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링컨 이후에는 거의 압도적으로 공화당이 대통령을 당선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공화당은 노예제 폐지로 흑인들이 표를 얻을 수 있었고, 반대로 민주당은 남부세력을 잠시 지지했던 일로 곤혹을 치뤄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1900년대 초의 경제 대공황으로 끝이었다. 이후에는 민주당과 공화당이 거의 번갈아가며 대통령을 당선시키고 있는 형국이 이어지고 있다.

 

   뭐 이런걸 보면 어느나라나 정치발전 초기의 역사는 어쩔 수 없는 느낌이다. 그 멋진 이상과 가치를 가지고 새로운 국가를 세운 미국인들도 정치적 혼란과 분열, 야합을 겪어야 했으니 말이다. 물론 어쩔 수 없다며 방관해서는 안되겠지만 말이다.

 

 

 

 

 

 

 

 

1937년 7월 6일

독일 언론인 위르겐 힌츠페터 탄생.

 

 

   이 사람에 대해서 전혀 몰핬는데 이번에 다룰 소식이 별로 없어 링크를 하나하나 클릭해보다 알게 되었다. 독일 언론인 위르겐 힌츠페터... 1937년 7월 6일에 태어난 그는, 본래 의사가 되고자 준비했고 의대까지 진학했으나 갑자기 기자로 진로를 바꿨다고 한다. 1963년에는 서독의 제1공영방송 'ARD'에 TV방송국 카메라맨으로 입사하였는데, 1967년 홍콩으로 발령받아 베트남 전쟁을 취재하던 중, 부상을 당해 도쿄 지국으로 옮겨가 1973년부터 1989년까지 17년간 특파원으로 일하게 된다.

 

   그렇게 도쿄에서 특파원으로 지내던 중 사건이 벌어진다. 바로 1980년 5월 18일의 광주민주화운동이 그것이다. 애초에 박정희 정권하에서의 실상과 가택연금 중이던 김영삼과의 인터뷰 등으로 한국을 방문했던 그는, 5월 19일에 위험을 무릅쓰고 광주 현장을 방문해 광주의 참상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후 도쿄로 가 화면을 편집한 뒤 독일로 보내고 23일에 다시 광주에 들어와 계엄군이 일시 퇴각한 상태에서의 광주를 담았는데, 이 때의 자료는 ARD 방송국을 통해 전세계로 보도되었고, 9월에는 '기로에 선 한국'이라는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져 방송되었다고 한다. 이 다큐멘터리는 국내에서도 비밀리에 상영되었다고...

 

   그가 찍은 영상들은 2003년 5월 18일에 KBS 일요스페셜을 통해 소개되었는데, 그 때의 프로그램 제목이었던 '푸른눈의 목격자'가 그의 별명이 되었다. (해당 프로그램은 Youtube나 KBS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으니 한번 보시길) 2004년 심장병으로 생명이 위독했던 그는 5.18 국립묘지에 묻히기를 희망했고 광주민주화운동 단체들도 그를 추진했으나, 극적으로 건강을 회복, 2005년 광주민주화운동 25주년 기념식에 참가하기도 하기도 했고 회고록도 집필했다 한다.

 

   아무튼 우리가 오늘 보는 5.18 당시 광주의 영상들은 거의 모두 그가 촬영한 것으로 보면 된다고 하는데, 말그대로 '후덜덜'한 업적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미국이 전두환을 압박하게 된 것에 영향을 미쳤을수도 있고, 오늘날까지 광주가 기억되고, 일부 왜곡 움직임에도 그 가치를 유지하고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5.18 기록물들이 인정받는데까지 그의 영상 기록들이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정말 대단하다고 할 수 있겠다.

 

   아, 그리고 그는 아직까지 생존해 있다. 모든 것을 떠나 진정한 기자정신을 보여준 그가 많은 기자들의 귀감이 되었으면 좋겠다.

 

 

 

 

 

 

 

 

1980년 7월 7일

중국계 미국인 피겨 스케이트 선수 미셸 콴 탄생.

 

 

   미셸 콴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중국계 이민자인 '대니 콴'과 '에스테야 콴'사이에서 태어난 셋째 자녀이다. 미국 역사상 최고의 피겨스케이터로 추앙받고 있으며, '토냐 하딩'이 '낸시 케리건'의 습격을 사주했던 '토냐 하딩 사건'으로 급락한 피겨스케이팅의 인기를 끌어올린 인물이다.

 

   무엇보다 대한민국 사람들 거의 모두가 그렇겠지만, 김연아의 등장 이전에 피겨스케이팅에 큰 관심을 가졌던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은데, 나도 그랬지만 '미셸 콴'과 연기를 동계올림픽에서 봤던 기억이 나는 것을 보면 그는 확실히 굉장한 인물이었음에는 분명해보인다.

 

   찾아보니 난 내 기억에 미셸 콴이 있어서 올림픽 금메달이라도 땄나 했는데 그러지는 못했더라. 은메달 한번, 동메달 한번을 땄는데, 그럼 그가 왜 유명한가 찾아보니, 피겨스케이팅 대회중에서 가장 권위가 높다는 '세계 피겨스케이팅 선수권'에서 다섯번이나 금메달을 땄더라. 흥미로운 부분은, 보통 금메달을 여러번 딴 선수들은 연속으로 금메달을 따기 마련이었는데 미셸 콴은 다섯번을 따는 사이에 세명이나 더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5번 자체도 많지만 8년동안 금메달 기량을 유지한 셈이었다. 경이적인 수치인데, 그래서 그가 유명했고 올림픽 때도 조명을 받았었기에 내 기억속에도 있는 듯 하다.

 

 

   미셸 콴 이후 피겨계에는 이제 우리에겐 옆집 사람처럼 친숙한 '안도 미키'와 '아사다 마오'가 등장하게 된다. 이후 김연아가 부상하게 되고 올림픽 금메달도 따게 되는데, 세계대회에 등장한 2005년 이후 '안도 미키'와 '김연아'는 2번, '아사다 마오'는 2014년까지 포함하여 3번을 우승했으니, 미셸 콴이 8년간 5번 우승한 기록은 실로 대단하다 할 수 있겠다.

 

   아무튼 미셸 콴 이야기를 하다보니 김연아 선수가 생각난다. 뭔가 김연아 선수의 마지막 올림픽 종료와 은퇴선언 이후 피겨에 대한 관심은 완전히 사그라 들어버린 듯 하다. 열애사실이 확인되면서 김연아 선수 개인에 대한 관심도 식어버려서 아쉬운데...  딱히 스타 선수나 유망주가 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지만, 지금 주춤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골프에서는 '박세리 키즈', 축구에서는 '2002 월드컵 키즈' 들이 후에 급성장한 것을 볼 수 있었는데, 피겨 역시 수년안에 갑자기 툭 튀어나올 선수들이 육성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을 육성하고 지원하기 위해 국가와 우리는 준비를 할 필요가 있다. 더 뭔가 바라긴 그렇지만, 혹시라도 생각이 있다면 김연아 선수도 빨리 그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말이다. 이번 글은 여기까지다.

 

 

 

 

 

 

 

 

7월 6일과 7일의 역사

Wikipedia

 

- fin -

 

 

 

 

 

 

 

현재까지 수정 내용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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