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사진·답사기/성북구·강북구

도봉산고양이 2018. 5. 15. 13:54



' 도심 속에 자리한 고즈넉한 사찰 ~ 안암동 개운사 '


▲  개운사 대웅전 뜨락



올해도 변함없이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 4월 초파일, 이하 초파일)의 아침은 밝아왔다.

설레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초파일 절 투어 코스를 근사하게 닦은 다음, 오전 11시에 길을
나섰다.
이번 초파일에는 서울 동북부 지역(동대문구, 성북구, 노원구)의 오래된 절과 문화유산을
간직한 현대 사찰 등 여러 곳을 둘러보았는데 초파일의 꿀재미인 공양밥과 후식도 배불리
챙겨먹으며 정신없이 신나게 절투어를 즐기니 어느덧 안암동(安岩洞)에 있는 개운사에 이
르렀다. (먹는 재미 때문에 초파일 절투어를 벌이는 것은 절대로 아님;;;)

개운사는 정말 10여 년 만에 방문으로 같은 서울 하늘을 이고 있음에도 인연이 참 지지리
도 없던 절이다. 그렇다고 이곳이 역사가 짧거나 없는 듯 자리한 것도 아니다. 엄연히 서
울에 이름난 고찰이자 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한 절로 일주문부터 사람들로 봐글봐글하다.


♠  조선 초기에 창건된 도심 속의 사찰, 우리나라 불교 교육의
중심지로 명성을 날렸던 ~ 개운산 개운사(開運山 開運寺)

개운산<안암산(安岩山)> 남쪽 끝에는 서울의 주요 고찰(古刹)의 하나인 개운사가 고즈넉하게
자리해 있다. 안암동로터리에서 개운사로 이어지는 길(개운사길)은 고려대를 낀 서울의 주요
대학가로 학생과 청춘들로 늘 마를 날이 없는 번잡한 곳이다. 예전에는 개운산에서 발원하여
성북천(城北川)으로 흐르던 개천을 옆에 끼고 있었으나 그 졸졸졸~♪ 소리도 듣지 못하게끔
말끔히 봉인해버렸고, 고려대가 개운산과 개운사 사이를 끊고 건물을 지으면서 겨우 가늘게
개운산을 붙잡고 있다.

고려대와 주택가의 확장으로 절의 북쪽과 서쪽은 고려대에 감싸여있고, 남쪽과 동쪽은 주택들
이 빼곡히 자리를 채웠다. 허나 그 동쪽도 얼마 안간 보타사부터 고려대에 막히니 자연히 3면
이 고려대에 포위된 꼴이다. 게다가 절 주변은 하숙집과 고시원, 식당, 술집, 피시방, 갖은
편의시설이 즐비해 고요함을 추구하는 절과는 너무 맞지가 않다. 완전 절과 밖이 180도 딴 세
상인 것이다.
허나 경내 주변에 나무가 그런데로 무성해 바깥과는 그런데로 다른 색채를 보인다. 그리고 경
내로 들어서면 여기가 대학가의 한복판이 맞는지 고개가 갸우뚱거릴 정도로 나름 고즈넉한 분
위기를 자아내며, 속세의 소음은 절을 둘러싼 나무들과 풍경 물고기가 모두 우걱우걱 씹어먹
는다.

그럼 개운사는 언제 법등(法燈)을 켰을까?
개운사는 조계종 소속으로 조계사(曹溪寺)의 말사(末寺)이다. 1396년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동대문 밖 5리 정도 되는 지금의 고려대 이공대학과 대광아파트 자리에 절을 세우고 영도사(
永導寺)라 했다고 전한다. 허나 창건 이후 400년 가까이 적당한 사적을 남기지 못해 창건 시
기가 썩 개운치가 않다.
과연 무학이 세웠는지는 개운하게 확인할 길이 없으나 인근에 쟁쟁한 절(보문사, 미타사, 청
룡사, 연화사 등)이 적지 않아 창건 이후 오랫동안 사세가 신통치 못했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1779년 절은 강제로 개운산 남쪽인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게 된다. 정조(正祖)의 후
궁인 원빈(元嬪) 홍씨<홍국영(洪國榮)의 누이>의 묘역, 명인원(明仁園>을 바로 절 옆에 잡았
기 때문이다. 하여 인파당 축홍(仁波堂 竺洪)은 절을 옮겼다. (또는 1730년에 이전했다고 함)

절 이름이 언제 개운사로 바뀌었는지는 역시나 개운치가 않다. 인파당이 절을 옮기면서 이름
을 갈았다는 설도 있고, 고종(高宗)이 어린 시절 영도사의 도문 처소에서 잠시 양육된 적이
있었는데, 그가 1863년 왕위에 오르자 나라의 운명을 새롭게 열었다는 뜻에서 개운사로 고쳤
다는 설도 있다.
1870년 송담 수훈이 지장탱, 시왕탱, 사자탱 등을 봉안했고, 1873년에 명부전(冥府殿)을 중건
했다. 1880년에 이벽송(李碧松)이 대웅전을 중건했으며, 1883년 불상 2개를 개금하고 감로탱,
팔상도, 신중탱, 산신탱 등을 봉안했다. 그리고 1885년에 아산에서 1712년에 제작된 범종 1구
를 가져왔는데 1935년에 왜정(倭政)이 국방 헌납을 이유로 강탈해 갔다.

1912년 왜정이 사찰령(寺刹令)을 시행하자 봉은사(奉恩寺)의 수반말사(首班末寺)가 되었고 김
현암(金玄庵)이 제1대 주지로 부임했다. 1913년 조선 황실 소유의 산림 4정 6반보를 사찰 소
유로 등록했으며, 1926년 김동봉(金東峰)이 강원(講院)을 개설하면서 불교 개혁 및 교육의 근
원지로 역할을 하게 된다.
1929년에 권범운(權梵雲) 등이 독성전을 중건했고, 1932년 이벽봉(李碧峰)이 노전을 지었으며,
한때 태고종(太古宗) 소속으로 1955년 대처승(帶妻僧) 주최로 전국포교사대회가 열리기도 했
다. 허나 이후 조계종으로 갈아탔고, 조계종 종정(宗正)의 정통성을 내세우며 총무원(總務院)
간판까지 달았다. 또한 1981년 중앙승가대학을 경내로 이전해 오랫동안 불교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다. (현재 중앙승가대학은 경기도 김포시에 가 있음)

넓은 경내에는 1993년에 새로 지은 대웅전을 비롯해 삼성각, 명부전, 미타전, 종각, 선방, 중
앙승가대학 건물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다. 이중 선방은 수도권에서 제법 큰 규모
를 자랑한다.
허나 절 건물은 죄다 근래에 손질되거나 새로 지어진 것이라 오랜 내력에 걸맞지 않게 고색(
古色)의 농도는 매우 얇은 실정이다. 하지만 겉과 달리 속은 오래 숙성된 문화유산이 풍부하
여 절의 오랜 내력을 그런데로 가늠케 해준다. 비록 다른 곳에서 가져오긴 했지만 보물로 지
정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발원문을 비롯해 지방문화재인 감로도와 신중도, 팔상도, 지장시
왕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일괄 등 보물 1점, 지방문화재 5점을 간직하고 있으며, 1879
년에 제작된 괘불이 있다.

부속 암자로는 동쪽에 대원암과 보타사가 있다. 대원암(大圓庵)은 구한말과 왜정 때 활약했던
고승 박한영(朴漢永)이 불교전문강원을 개설해 불교계 석학을 배출했던 현장이며, 보타사(普
陀寺)는 옛 칠성암(七星庵)으로 승가대학 숙소로 사용된 것을 절로 바꾼 것이다. 이곳에는 국
가 보물로 지정된 하얀 피부의 마애보살좌상과 고운 자태의 금동보살좌상이 있으니 꼭 둘러보
기 권한다.


▲  개운사 일주문(一柱門) (2014년)

개운사에 이르면 제일 먼저 장대한 모습의 일주문이 마중을 한다. 문짝도 없는 열린 모습으로
어느 누구든 가리지 않고 초파일 향연의 장으로 중생들을 맞이하고 있는데, 문의 머리인 맞배
지붕이 너무 육중해 문 기둥이 애처롭게 보일 정도이다.
지붕과 평방(平枋) 사이에는 금색으로 쓰여진 개운사 현판이 이곳의 정체를 알려주고 있으며,
문 좌우로 절과 속세의 경계를 가르는 돌담이 빙 둘러져 속세의 기운을 경계한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넓게 닦여진 주차장이 펼쳐지는데 그 너머 북쪽 언덕에 선방과 종각, 나무
로 경내를 꽁꽁 가린 개운사가 모습을 비춘다. 그리고 일주문 안쪽 동쪽에는 비석들이 옹기종
기 모여있으며, 주차장 서쪽에는 중앙승가대학으로 쓰였던 정진관이 있다. (공양간은 정진관
옆 건물에 있음)


▲ 개운사의 20세기 역사를 머금고 있는 비석들
지붕돌을 지닌 비석부터 대머리 비석까지 10여 기의 비석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이들은 왜정과 20세기 중/후반에 세워진 공덕비와 기념비로 가장 이른 것은
1931년에 지어진 승려 경허의 공덕비이다.

▲  개운사 석조관음보살입상

주차장을 지나 가운데 계단을 오르면 날씬한 자태의 관음보살입상이 나온다. 이 석불은 20세
기 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얼굴 주변에 검은 때가 조금 피어있어 약간 고색이 느껴진다.
두 손으로 감로수가 담긴 정병(政柄)을 꼭 쥐어들고 있어 그가 관음보살임을 알려주고 있는데
눈을 지그시 감고 명상에 잠긴 모습으로 대학가로 떠들썩한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 주변에
는 연등이 가득 매달려 그의 임시 광배(光背) 역할을 한다.

             ◀  개운사 3층석탑
관음보살입상 바로 옆에는 잘생긴 3층석탑 1기
가 자리해 있다.
개운사의 유일한 석탑으로 20세기 후반에 조성
되었는데 반듯한 바닥돌과 2중의 기단(基壇),
3층 탑신(塔身), 머리장식을 두루 갖추어 안정
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보통 탑은 법당 앞에 두기 마련이나 이곳은 무
슨 사연인지 경내 외곽에 두었다.


▲  경내로 인도하는 오르막 길 (종각 남쪽)
오색 연등이 허공을 메우며 초파일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킨다.

▲  범종(梵鍾)을 품은 종각과 연등으로 뒤덮힌 선방 옆길
일주문과 주차장에서 경내로 들어서려면 반드시 선방 옆구리를 지나야 된다.

▲  2층 규모의 선방(禪房)

선방 옆구리를 오르면 대웅전과 선방, 명부전, 미타전에 감싸인 대웅전 뜨락에 이른다. 뜨락
에는 영가(靈駕)들을 위한 하얀 연등이 추가되어 6색 연등이 하늘과 땅을 가르고 있는데, 뜨
락을 기준으로 남쪽에 대방이라 불리는 선방이 장대한 덩치로 남쪽을 굽어본다.
선방은 1921년에 중창된 것으로 20세기 후반에 지금의 모습으로 크게 지어졌다. 밑층에는 종
무소 등이 들어있으며, 윗층은 선방으로 이 땅에서 가장 큰 선방으로 꼽히는데, 한참 개운사
가 교육과 불교 개혁에 나섰을 때, 선방은 그 공간으로 분주한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선방 앞에는 중생들에게 떡과 수박, 커피, 녹차 등을 제공하는 공간을 두어 초파일의 훈훈한
인심을 보여주었다. 이곳에서도 공양밥을 먹으려고 했으나 절 도착 직전(16시)에 그만 마감이
되버려 꿩 대신 닭으로 간단히 떡과 수박을 섭취하였다.


▲  연등이 하늘을 훔친 대웅전 뜨락
연등의 두터운 물결 앞에 그 장대한 대웅전도 눈치를 살살 보며 간신히 그 일부만
드러내 보이니 그 모습이 마치 구름 위에 자리한 하늘 세계의 궁궐 같다.

▲  관불(灌佛) 의식의 현장과 깨알 같은 복전함들

대웅전 계단 앞에는 초파일을 맞이하여 1년 만에 외출을 나온 어린 부처가 온갖 꽃으로 치장
된 관정대(灌頂臺)에 서서 중생들의 인사를 받고 있었다. 다른 절의 아기부처상은 그래도 키
가 좀 있으나 여기는 난쟁이 반바지 반 접은 것보다 훨씬 작다.

사람들은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아줌마 신도의 도움과 권유를 받으며 나무 바가지에 물을 가
득 담아 아기부처의 머리에 물을 껴얹은 관불(관정)의식을 행한다. 날이 날인지라 나도 그 의
식에 동참해 그를 냉수마찰을 시켜주니 물을 맞은 그의 표정이 잠시 환해진 듯 보였다. 하지
만 저녁이 오고 신나던 초파일이 저물면 아기부처는 강제로 어두컴컴한 창고로 돌아가 내년을
고대해야 된다. 이렇게 1년 만에 나온 외출이니 그의 희열(喜悅)은 대단할 수 밖에...


♠  개운사의 보물창고, 미타전(彌陀殿)과 대웅전(大雄殿)

▲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미타전

대웅전 뜨락 동쪽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인 미타전이 자리해 있다. 미타전
의 주인장은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로 절의 제일 보물인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이 홀로 봉안되어 있다. 그는 원래 명부전에 얹혀 살았으나 1995년 몸 속에서 온갖 진귀한 보
물이 쏟아져 나오자 지금의 미타전을 손질해 그의 전용 공간으로 삼았다.


▲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 보물 1649호

서방정토가 있다는 서쪽을 바라보고 앉은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나무를 조각하여 금색으로 도
금을 입힌 것으로 높이 118cm, 무릎 너비는 92cm이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근래 조성된 것처럼 젊어 보이나 그런 겉모습과 달리 고려 후기에 조성
된 나이 지긋한 불상으로 개운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다. 특히 1995년에 그의 몸 속에서
발원문을 비롯한 고려시대 문서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오면서 그의 오랫동안 숨겨졌던 정체가
드러나게 되었고 그로 인해 그의 가치도 몇 곱절이나 높아졌다.

우선 불상의 모습을 살펴보면 머리는 검은색으로 꼽슬인 나발이며, 머리 정상에 무견정상(無
見頂相, 육계)이 두툼히 솟아있다. 이마에는 하얀 백호가 찍혀있고, 눈썹은 무지개처럼 구부
러져 있으며, 눈은 지그시 떠서 정면을 바라본다. 코는 작고, 입술은 붉으며, 검은 수염이 얕
게 표현되었는데, 얼굴은 갸름하면서도 살이 있어 보이며, 두 귀는 어깨까지 축 늘어져 중생
의 고충에 귀만 기울인다.
두꺼운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고, 두 손은 아미타9품인(阿彌陀九品印)의 하나인 하품
중생인(下品中生印)의 변형을 짓고 있으니 이는 화성 봉림사(鳳林寺)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물 980호
) 등 고려 후기 아미타불 수인과 비슷하다.

개운사에서 마련한 목조 대좌(臺座)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는데, 체격이 당당해 보이
며, 오른발을 왼쪽 무릎 위에 올려 발바닥을 드러낸 이른바 길상좌(吉祥坐)를 취하고 있어 눈
길을 끈다.
불상의 몸을 가린 법의(法衣)는 통견의(通肩衣)로 신라시대 법의보다 두터워 보이며, 옷 주름
은 그럴싸하게 접혀 있다. 양쪽 어깨를 옷으로 가리고 가슴 부분은 드러냈는데, 가슴 밑에 표
현된 승각기는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띠 매듭이 없다. 이런 형태는 화성 봉림사 목조아미타
여래좌상과 서산 개심사(開心寺) 목조아미타여래좌상(보물 1619호), 서울 수국사(守國寺) 목
조아미타여래좌상(보물 1580호, ☞ 관련글 보러가기)과 거의 동일한 것으로 착의법과 주름이
거의 일치한다.
이 불상은 이렇게 단엄(端嚴)한 상호와 세련된 조각 기법, 장중하면서도 균형감 있는 조형 감
각, 긴장감 넘치는 선묘(線描), 보존 상태 양호로 완성도 높은 고려 후기 불상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그가 순도 100% 고려 후기 불상임이 밝혀진 것은 바로 그의 몸 속에서 나온 유물들 덕
분이다.


▲  아미타여래좌상 뱃속에서 나온 중간대사 원문 (문화재청 사진)

불상 뱃속에서는 3장의 귀중한 발원문(發願文)이 나왔다. 이중 '중간대사 원문(中幹大師 願文
)'은 1274년에 작성된 아미타여래좌상 개금(改金) 발원문으로 문서의 크기는 '54x56cm'이다.
이 문서는 1274년에 아산 축봉사(竺鳳寺)에 있던 본 불상을 개금하면서 남긴 것인데, 이를 통
해 불상의 원래 위치를 알려주고 있으며, 그의 조성 시기는 늦어도 1273~1274년, 이르면 13세
기 초/중반임을 귀뜀해 준다. (1274년 이전에 제작됨)
특히 이 땅에 남아있는 고려 후기 불상 중 가장 오래된 중수원문(重修願文)으로 개심사 목조
아미타여래좌상 중수원문(1280년)보다 6년이나 빠르며 13세기 불상이 거의 없는 현실에서 더
욱 가치를 발한다.

그리고 '최춘 원문(崔椿 願文)'은 금불복장조성 발원문으로 '56x55.5cm' 크기이며, '천정 혜
흥 원문(天正 惠興 願文)'은 불상을 개금하면서 작성한 10종의 대원(大願)을 담은 발원문으로
'37x220cm' 크기인데 이들 2장은 1322년에 작성되었다. 현재 중간대사 원문을 비롯한 발원문
3장은 신변 보호를 위해 조계사 옆에 있는 불교중앙박물관에 가 있으며, 목조아미타여래좌상
과 발원문 3장은 한 덩어리로 보물 1649호로 지정되었다.

발원문 외에도 전적(典籍)류 28점, 문서 13점도 발견되었다. 불상 뱃속에 나온 유물을 복장유
물(腹臟遺物)이라 부르는데, 1995년 아미타여래좌상이 있던 명부전에 정신 나간 도둑이 들어
와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의 절반 정도를 훔쳐갔으며 아미타여래좌상 뱃속까지 손을 대어 사리
장치가 든 후령통(候鈴筒)까지 가져갔다. 이로 인해 본의 아니게 불상의 뱃속이 강제로 개방
된 것이다. 이때 개방된 뱃속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오래된 경판(經板) 15점, 옛 사경(寫經) 7
점, 조선시대 목판본 불서(佛書) 6책, 다라니 8종, 탁본 1점, 족자 1점, 그리고 발원문 3점
등 총 41건 58점이 빛을 보았다. 실로 엄청난 유물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전적 28점 중 22점은 9세기부터 13세기에 간행된 오래된 경전이고, 나머지 4종 6책은 조선 때
간행된 목판본이다. 오래된 22점 가운데 목판본 도장(道藏)인 '영보경(靈寶經)'과 필사본 '보
살보행경(菩薩本行經)'을 제외하고 모두 대방광불화엄경으로 지금까지 수습된 단일 불상의 복
장유물 가운데 가장 수량이 많다.
이들 유물을 통해 1274년 개금 이후 4번 이상 중수를 벌였음이 밝혀졌으며, 신라 후기부터 고
려시대를 거쳐 조선까지 다양한 시대의 불경과 문서들이 들어있어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특히 신라 후기와 고려 초에 간행된 불경들은 그 수량이 매우 적은 상태로 그 부족분을
채워줄 수 있는 귀중한 존재이다. 그래서 발원문과 별도로 전적류 21점은 '개운사 목조아미타
여래좌상 복장 전적
'이란 이름으로 보물 1650호로 지정되었다. 이들은 현재 발원문을 따라 불
교중앙박물관에 가 있다.
그리고 나머지 16건 33종은 별도로 '개운사 목 아미타불좌상 복장일괄'이란 이름으로 서울 지
방유형문화재 291호
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원래 복장유물 전체가 이 등급에 있었으나 2010년
4월에 발원문과 전적 21점을 따로 떼어내 보물로 지정하면서 3개의 다른 이름과 등급을 지니
게 된 것이다. 그만큼 이 불상과 불상 뱃속에서 튀어나온 유물이 유별나고 대단하기 때문이다.
현재 지방문화재 복장 유물은 개운사와 불교중앙박물관에 있으며, 아쉽게도 복장유물 어느 것
도 만나지 못했다. 보존 관리상 개방을 거의 안하기 때문이다.


▲  초파일이 준 고마운 선물, 개운사 괘불(掛佛)

대웅전 뜨락에는 아기부처상 외에도 매우 보기가 힘든 괘불까지 왕림을 하여 나를 무척 들뜨
게 하였다. 그렇다면 괘불이 도대체 무엇이건데 나를 그렇게 기쁘게 했을까?
괘불은 조선 중기부터 등장하는 커다란 불화(佛畵)로 초파일과 절의 주요 행사일에만 잠깐씩
외출을 나온다. 그러기 때문에 왠만한 운으로도 만나기가 어려우며 그나마 만날 확률이 높은
날이 초파일이다. 내가 평소에도 많은 오래된 절을 돌아다님에도 초파일에 무조건 절 답사에
나서는 이유 중 하나도 바로 레어템<raretem, rare(희귀한)+item(물건)의 합성어>인 괘불을
보고자 함이다.
허나 초파일이라고 100% 외출을 하진 않는다. 이번 초파일에 4곳의 절집을 갔지만 겨우 개운
사에서만 괘불을 봤을 뿐이다. 확률로 따지면 1년에 정말 1번 정도 보는 꼴이다. 그러니 괘불
을 만났다면 꼭 복권을 사기 바란다. 레어템 중의 초레어템을 만났으니 말이다. (당첨은 장담
못함)

개운사 괘불은 1879년에 제작된 것으로 석가불과 지장보살, 나한(羅漢) 등이 그려져 있다. 저
녁이 다가옴에 따라 그 큰 그림이 절반 정도 둘둘 말려져 있는데 괘불 밑에는 그의 거처인 길
쭉한 괘불함이 입을 벌리며 그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린다. 하지만 괘불은 그리 들어가고 싶은
눈치는 아닌 것 같다. 함에 들어가면 긴 시간을 갇혀 지내야되기 때문이다. 괘불 앞에는 중생
이 진상한 과일과 떡이 놓여져 있고 복전함이 무려 2개씩이나 설치되어 적지 않게 옥의 티를
선사한다.


▲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본 괘불의 뒷모습
붉은 색의 문자는 무엇인지 모르겠다.


▲  개운사 대웅전

개운사의 법당인 대웅전은 1993년에 새로 지은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
다. 2006년에 단청 불사를 했으며, 선방 다음으로 큰 건물(정진관 등의 현대식 건물은 제외)
로 뜨락보다 3~4m 정도 높게 석축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다진 탓에 무척 우람해 보인다. 건
물 내부에는 석가3존불과 후불탱화, 팔상도 등의 여러 그림이 깃들여져 있는데, 이중 팔상도
와 신중도, 현왕도, 지장시왕도는 지방문화재이니 꼭 살펴보기 바란다. (그림이 봉안된 위치
는 변경될 수 있음)


▲  대웅전 가운데 칸에서 굽어본 뜨락과 관불의식의 현장
개운사의 좁은 하늘을 가득 채운 연등이 저 밑에 보이니 마치 오색 구름 위에
올라선 기분이다.

▲  대웅전 석가3존불과 후불탱화
조그만 석가불이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좌우에 거느리며 중생들의 하례를 받는다.
그 앞에는 불단이 무너질 정도로 온갖 음식과 과일들이 진상되어 있다.

▲  개운사 감로도(甘露圖) - 서울시 지방유형문화재 212호

감로도는 물과 육지에서 방황하는 영혼과 아귀(餓鬼)를 위로하고자 부처의 법을 강론하고 음
식을 베푸는 수륙재(水陸齋)를 위한 그림이다.
신중도 이상만큼이나 등장 인물이 많고 무대가 넓어서 복잡하기 그지 없는데 그림 상단에는 7
명의 여래(如來)와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 아미타내영도(阿彌陀來迎圖)를 배치했고, 하단에
는 의식 장면과 아귀상, 지옥상, 윤회하는 중생도 등 6도중생이 담겨져 있다. 산수와 구름으
로 적절히 경계를 그었고, 다채로운 모습의 인물들과 적/녹/청/황/백색이 어우러진 색감과 안
정적인 필치(筆致), 충실한 풍속 묘사 등이 돋보인다.

이 그림은 1883년에 조성되었으며, 원래가 영가(靈駕)를 위한 그림이라 그 앞에는 죽은 이들
의 위패와 영정이 가득해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한다.


▲  개운사 신중도(神衆圖) - 서울시 지방유형문화재 213호

대웅전 동쪽 벽에는 법당 수호용으로 걸린 신중도가 걸려있다. 신중도란 불법(佛法)을 수호하
는 신들의 무리를 담은 것으로 등장 인물이 너무 많아 그야말로 정신을 쏙 빼놓는다. 그림 중
앙에는 제석천(帝釋天)과 천룡(天龍) 등이 자리해 있고, 그 주위로 무장을 한 신들이 배치되
어 있는데 1870년에 제작된 것으로 액자 안에 소중히 담겨져 있다.


▲  개운사 팔상도(八相圖) - 서울시 지방유형문화재 214호

팔상도는 부처의 일대기를 출생부터 열반까지 8개의 그림으로 정리한 것으로 1883년에 조성되
었다. 그림의 보호를 위해 액자 안에 담겨 있으며, 각 부분에 대한 설명은 쿨하게 생략한다.


▲  개운사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 서울시 지방유형문화재 215호

지장시왕도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중심으로 도명존자(道明尊者), 무독귀왕(無毒鬼王), 저승
의 10왕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멤버들이 담겨진 것으로 1870년에 제작되었다. 지장보살
밑에는 동자 2명이 그의 육환장(六環杖)과 두건을 들며 서로를 바라본다.


♠  개운사 마무리

▲  명부전(冥府殿)

대웅전 뜨락 서쪽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지닌 명부전이 자리해 있다. 지장보
살상을 중심으로 무독귀왕과 도명존자, 저승의 시왕(10왕), 금강역사(金剛力士) 등이 봉안되
어 있는데, 1995년에 도둑이 침투해 잠시 쑥대밭이 되었던 우울한 현장이기도 하다. 이때 지
장보살상과 시왕상의 절반, 그리고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의 후령통 등이 사라졌다.
이후 지장보살상과 없어진 시왕상 등을 다시 만들어 채웠고 뱃속이 열린 아미타여래좌상을 미
타전으로 옮겼으며, 뱃속 유물은 불교중앙박물관으로 가져가 정밀 연구를 벌여 그 정체를 밝
혔다.


▲ 지장보살상과 지장후불탱(지장시왕도)
1995년 이후에 새로 만든 지장보살상 뒤쪽에는 고색이 물오른 지장후불탱이 걸려있다.
이 그림은 19세기 말에 제작된 것으로 명부전 식구를 그림에 옮겨 놓은 것이다.

▲  모습도 제각각인 시왕상과 시왕탱
시왕상 뒷쪽에 걸린 시왕탱 4점은 1870년에 제작된 것이다.

▲  개운사만의 특별한 초파일 이벤트, 부처되기 포토존
저 앞에 앉아 포즈를 취해보자. 그러면 누구든 부처가 된다. (물론 무늬만~~~) 광배
부분을 더 그럴싸하게 만들었으면 실감이 좀 컸을 텐데 그 점이 참 아쉽다.

▲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삼성각(三聖閣)

명부전에서 북쪽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그 계단의 끝에 삼성각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아 있는데, 특이하게도 각 칸마다 다른 이름의 현
판을 내걸고 있다. 가운데 칸은 칠성(七星, 치성광여래)의 공간인 금륜전(金輪殿)으로 특별히
전(殿)으로 대우했으며, 서쪽은 산신(山神)의 공간인 산령각(山靈閣), 동쪽은 독성(獨聖, 나
반존자)의 공간으로 그가 몸을 일으킨 천태산(天台山)의 이름을 따서 천태각(天台閣)이라 했
다. 허나 각 칸마다 이름만 달리 했을 뿐, 하나의 삼성각으로 봐도 무관하다.

이 건물은 1929년에 중건했는데, 처음에는 독성각(獨聖閣)이라 불렸으며, 이후 산신과 칠성이
추가되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  독성상과 독성탱
독성탱은 1930년에 제작된 것으로 붉은 계통의 옷을 입은 독성 할배와 문관(文官),
승려, 천태산, 소나무, 폭포 등이 그려져 있다. 그림 앞에는 머리가 유난히도
큰 독성 할배상이 지팡이를 들고 앉아있다.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돋보이는 산신상과 산신탱

그림에 윤기가 나는 것을 보니 아마도 20세기 후반에 제작된 듯 싶다. 그림 중앙에는 붉은 옷
을 입은 산신이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앉아 있고, 그 좌우로 귀엽기 그지 없는 모습의 호랑이
와 동자가 있으며, 그들 뒤로 산과 소나무, 폭포 등이 그려져 산신탱의 기본 요소는 모두 갖
추고 있다. 그리고 산신탱 앞에는 호랑이를 탄 산신 할배상이 별도로 닦여져 있다.


▲  그림만 홀로 있는 칠성탱

칠성탱은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를 중심으로 일광보살(日光菩薩), 월광보살(月光菩薩), 칠성
불(七星佛), 칠원성군(七元星君), 노인성(老人星), 삼성(三星) 등 칠성의 주요 식구들이 복잡
하게 담겨져 있다. 칠성은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존재로 오랫동안 이 땅의 토속 신앙으로
있었는데, 조선시대에 어엿하게 불교의 일원이 되면서 그를 봉안하지 않은 절이 거의 없을 정
도로 인기가 대단하다. (아무래도 인간의 수명을 관리하는 존재다보니)

삼성각을 끝으로 약 1시간 반 가량 이루어진 개운사 답사는 마무리가 되었다. 이곳에 깃든 문
화유산은 아미타여래좌상 복장유물을 제외하고 모두 눈과 사진에 담았고, 거기에 생각치도 못
했던 괘불까지 친견하면서 당초 계획했던 볼거리를 100% 초과 달성했다.
이렇게 개운사를 배부르게 둘러보고 동쪽에 자리한 보타사로 이동했다. 주차장 동쪽으로 나있
는 문을 이용해 3분 정도 들어가면 그 골목길의 끝에 보타사 정문이 나온다. 아쉽지만 본글은
여기서 끝~~~ 보타사는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안암동 개운사 찾아가기 (2018년 5월 기준)
* 지하철 6호선 안암역 2번 출구를 나와서 180도 뒤로 돌아서면 바로 안암역교차로이다. 교차
  로에서 북쪽 길(개운사길)로 3~4분 정도 가면 일주문이 나오며 그 문을 들어서면 개운사 경
  내이다.
* 서울시내버스 273, 1111, 2115번을 타고 안암역에서 하차하여 도보 5분 (2115번 서경대 방
  향은 개운사입구에서 하차)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5가 산4-11 (개운사길 73 ☎ 02-926-4069
* 개운사 홈페이지는 아래 연등길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개운사를 뒤로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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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8년 5월 15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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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지성의 전당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경허선사에 대한 글이 있어서 댓글을 남겨 보았습니다.

인문학 도서인데,
저자 진경님의 '불멸의 자각' 책을 추천해 드리려고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와 죽음에 대한 책 중에서 가장 잘 나와 있습니다.
아래는 책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제 블로그에 더 많은 내용이 있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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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할 수가 있는 ‘태어난 존재’에 대한 구성요소에는, 물질 육체와 그 육체를 생동감 있게 유지시키는 생명력과 이를 도구화해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의식과 정신으로 나눠 볼 수가 있을 겁니다.

‘태어난 존재’ 즉 물질 육체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 역할을 다한 도구처럼 분해되고 소멸되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육체를 유지시키던 생명력은 마치 외부 대기에 섞이듯이 근본 생명에 합일 과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육체와의 동일시와 비동일시 사이의 연결고리인 ‘의식’ 또한 소멸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에 보충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총체적 단절작용을 ‘죽음’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존재의 일부로서, 물질적인 부분은 결단코 동일한 육체로 환생할 수가 없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의식’ 또한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은 모든 물질을 이루는 근간이자 전제조건으로서, 물질로서의 근본적 정체성, 즉 나타나고 사라짐의 작용에 의한 영향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타날 수도 없고, 사라질 수도 없으며,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불멸성으로서, 모든 환생의 영역 너머에 있으므로 어떠한 환생의 영향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에 대한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자 실체로서, ‘있는 그대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체에 의한 작용과정으로써 모든 창조와 소멸이 일어나는데, 누가 태어나고 누가 죽는다는 것입니까?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을 하고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윤회를 합니까?

정신은 물질을 이루는 근간으로서의 의식조차 너머의 ‘본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윤회의 영역 내에 있는 원인과 결과, 카르마, 운명이라는 개념 즉 모든 작용을 ‘본체’로부터 발현되고 비추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태어난 ‘한 사람’, 즉 육신과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진 ‘지금의 나’로 여기며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착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한 사람’은 스스로 자율의지를 갖고서,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한다고 믿고 있지만 태어나고 늙어지고 병들어지고 고통 받고 죽어지는, 모든 일련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어느 것 하나 스스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책임을 외면하기 위해 카르마라는 거짓된 원인과 결과를 받아들이며, 더 나아가 거짓된 환생을 받아들이며, 이 과정에서 도출되는 거짓된 속박, 즉 번뇌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환영 속의 해탈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거짓된 자기견해 속의 환생과 윤회는, 꿈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내리려면 반드시 비교 대상이 남아 있어야 하며, 대상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그 어떠한 자율성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는 꿈속의 꿈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뚜렷하고 명백하다 할지라도 ‘나뉨과 분리’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나’에 대한 그릇되고 거짓된 견해만을 바로잡았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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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운사가 어디에 있는 사찰인지 잘 몰랐다. 순례 때 개심사는 가보았지만, 낯선 절이다. 오늘 법성스님의 인생역정을 읽으면서 서울에 있는 절이라는 것을 알았다. 더구나 일엽스님이 불교정화를 위해 머물렀던 곳이다. 개운사에 대해 소상하게 글과 사진을 올려주신 데에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아직은 불교 지식이 부족해 잘 모르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조금 나아지겠죠.
이렇게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불교 지식은 조금조금씩 익히면 됩니다. 급할 필요도 없지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