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사진·답사기/아차산·용마산 고구려유적

도봉산고양이 2021. 1. 1. 05:14


1. 망우리공원
(망우저류조공원에서 접근하는 길)

망우리공원은 아차산의 북쪽 식구인 망우산(282m)에서 망우리고개까지 펼쳐진 공원으로 그 유명한 망우리묘지 일대

일컫는다.

중랑구 망우동과 구리시 교문동 사이에 넓게 자리한 망우리공원은 면적 832,800㎡ 규모로 서울 관내의 유일한 공동묘지

데, 왜정 시절(1930년대) 서울에는 이태원와 미아리에 공동묘지가 있었다. 왜정은 미아리공동묘지의 과포화에 대비하

고 이태원공동묘지 일대에 주택을 조성하고자 경기도 양주군 땅이던 망우산 일대 임야 70여 만 평을 확보해 경성부(서울

)의 공동묘지로 정하고 1933년 5월 27일 개원했다.
37,000여 기를 지닌 이태원공동묘지는 1935년부터 미아리와 망우리로 이장되었는데, 연고자가 있는 묘는 망우리로, 무

묘 28,000여 기는 평구 신사동으로 보내 화장처리하고 망우리묘지 북쪽에 합장하여 위령비를 세웠다. (이태원공동

지를 옮기는 과정에서 유관순열사의 묘가 사라짐) 왜정이 이렇게 망우산에 공동묘지를 쓴 것은 망우리고개 동북쪽에
동구릉의 기운을 유린하고자 함이라고 한다.

 

1971년 8월 7일 건교부고시 465호로 공원결정고시가 떨어졌고 1973년 3 분묘 한계치인 28,500여 기(봉분 47,754기)
이르자 더 이상
자리가 없어 묘지쓰는 것을 금했다. 이후 이장과 납골을 장려하면서 무덤은 계속 감소하여 지금은 7,400

기 정도가 남았고, 앞으로도 계속 줄어들 전망이다.

1977년 4월 도시계획시설 공원으로 지정되어 망우묘지공원(망우공원)이란 간판을 내걸었으며, 1998년 8월 서울시지명위

원회에서 망우리공원으로 이름을 갈았고, 그해 공원 내에 산책로인 사색의길(4.7km)를 닦았다.
2005년 12월 27일 서울시고시 제2005-403호로 망우묘지공원 조성계획이 수립되었으며 2013년 망우리묘지를 서울미래

산으로 지정했다. 또한 2015년에서 2016년까지 망우리공원 인문학길을 조성하여 지금에 이른다.

비록 망우리공원으로 이름을 세탁(?)했으나 본바탕은 망우리묘지(망우리공동묘지)이다. 이곳에는 구한말에서 20세 초/

중반에 활동했던 애국지사와 문학가, 정치가들이 많이 묻혀있는데, 많이 이장되어 지금은 30기 남짓 남아있다.

또한 사색의길(4.7km)과 인문학길 등 산책로가 잘 닦여져 있는데, 길이 아주 상큼해 거닐기에 좋으며, 고구려가 심어놓은
망우산1보루와 2보루, 3보루가 망
우산 능선에 남아있어 볼거리도 넉넉하다.

2. 무덤들이 수북히 자리한 망우리묘지 북쪽 부분 (망우저류조공원 동쪽)

3. 사색의길 시작점에서 바라본 중랑구와 봉화산

사색의길은 망우리공원의 둘레길로 그 거리가 4.7km이다. 숲에 감싸인 상큼한 길로 길 주변에 20세기 초/중반 애국지사와

유명 인물의 무덤이 많이 자리하고 있어 사색의길을 중심으로 둘러보면 된다.

4. 사색의길 입구에서 바라본 망우산
가운데 봉긋 솟은 산이 망우리공원을 품고 있는 망우산이다.

5. 망우리공원 사색의길 입구(유명인사 안내가벽 앞)

6. 사색의길 동쪽 구간으로 들어서다.

망우리공원의 백미인 사색의길은 사색의길입구(유명인사 안내가벽)에서 길이 동서로 갈린다. 허나 순환 산책로이기 때문

에 열심히 걷다보면 결국 제자리로 오게 된다.

7. 늦가을에 잠긴 사색의길 동쪽 구간

8. 은행나무 밑을 지나는 사색의길 동쪽 구간
길 중간에 망우산2보루와 3보루로 인도하는 산길이 있다. (이정표가 있음)

9. 상큼하게 펼쳐진 사색의길 동쪽 구간

10. 사색의길 동쪽 구간에서 만난 망우리묘지 식구들

11. 사색의길 동쪽 구간에서 바라본 구리시와 한강, 하남시

12. 송촌 지석영 선생묘와 지성주묘
송촌 지석영(1855~1935)은 종두법으로 매우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의사이기도 하지만 한글학자이자 관료까지 지낸

라에서 들어온 서양 의학서의 번역본을 통해 의학과 우두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1879년 부산으로 넘어가 왜인이 운영하는 제생의원에서 2달간 우두법을 익혔으며 처가집이 있는 충주에서 40여 명

게 우두 시술을 하여 성공했다. 이후 종두법 보급에 크게 힘쓰면서 천연두는 슬슬 사라지게 되며, 1899년 관립학교(서울

의대의 전신)의 초대 교장을 지내는 등 의학계의 선구자로 크게 활동했다.

 

1883년 문과에 붙어 형조참의, 대구판관, 동래부 관찰사 등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인 지성주는 경성의전을 나와 내과의사로

크게 활동했고, 손자인 지홍창은 서울의대 출신으로 박정희대통령의 주치의를 지냈다. 그리고 증손자 또한 내과를 경영해 5

대가 의사로 활동하고 있다. (지석영의 부친은 한의사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