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사진·답사기/아차산·용마산 고구려유적

도봉산고양이 2021. 1. 2. 22:30

 

1. 송촌 지석영선생묘와 지성주묘

송촌 지석영(1855~1935)은 종두법으로 매우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의사이기도 하지만 한글학자이자 관료까지 지낸 인

라에서 들어온 서양 의학서 번역본을 통해 의학과 우두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879년 부산에서 왜인이 운영하는 제생의원에 머물면서 2달간 우두법을 익혔으며 처가집이 있는 충주에서 40여 명에

두 시술을 하여 성공을 하게 된다. 이후 계속 종두법 보급에 힘써 천연두는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으며, 1899

년 관립의(서울의대의 전신)의 초대 교장을 지내는 등 의학계의 선구자로 크게 활동했다.

 

1883년 문과에 붙어 형조참의, 대구판관, 동래부 관찰사 등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인 지성주는 경성의전을 나와 내과의사

로 크게 활동했고, 손자인 지홍창은 서울의대 출신으로 박정희대통령의 주치의를 지냈다. 증손자 또한 내과를 경영해 5대

가 의사로 활동하고 있다. (지석영의 부친은 한의사였음)

2. 춘우거사 지성주묘 
내과의사로 활동했던 지성주는 지석영선생의 아들로 아비 묘 옆에 자리해 있다. 

3. 망우산 북쪽 능선 숲길 (사색의길에서 망우산3보루로 이어지는 길)

4. 망우산 북쪽 능선 '역사의 전망대'

서울의 거대한 동쪽 지붕인 아차산과 용마산, 망우산, 용마산과 망우산은 아차산의 일원으로 고구려가 달아놓은 보루 유적

이 가득 서려있고, (신라가 만들거나 중수한 보루도 여럿 있음) 백제가 쌓은 아차산성이 있으며, 왜정 시절부터 20세기 후반

까지 망우리묘지가 망우산 자락에 가득 들어섰다. 그 묘지에는 구한말과 왜정, 20세기 중반에 활동했던 애국지사와 정치인, 

문학가들이 많이 묻혀있다. 하여 아차~용마~망우산 산줄기에 오랫동안 켜켜이 쌓인 역사의 상징성을 반영해 역사의 전망

대란 간판을 지니게 되었다.

5. 역사의전망대에서 바라본 구리시 지역과 한강, 하남시, 강동구 지역

역사의전망대는 동쪽으로 확 트여 있어 구리시와 한강, 강동구, 하남시 지역이 훤히 시야에 들어온다.

6. 역사의전망대에서 바라본 아차산 산줄기와 구리 아천동, 강동구, 하남시 지역

7. 화가 이인성 묘

이인성(1912~1950)은 대구 출생으로 미술에 소질이 뛰어나 16세 때 방정환 등의 색동회가 주최한 세계아동예술전람회에

나가 '촌락의 풍경'으로 특선에 뽑혔다. 이것을 계기로 화가로 데뷔를 하게 된다.

왜열도 유학 시절이던 19살에 제국미술전람회에서 수채화 '여름의 어느 날'로 입선했으며, 23살에는 조선미술박람회에서 

'경주의 산곡에서'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1937년 제16회 선전에서 최연소 추천작가가 되었다. 

1945년 이후 이화여중과 이화여대에서 미술을 가르쳤으며, 1949년 가을 국전 창설의 주역으로 활동했으나 1950년 38세의

나이로 병사하고 만다. 

 

월간미술 1998년 2월호에는 그를 근대 유화가 1위로 꼽았으며, '경주의 산곡에서','가을 어느 날'을 각각 공동 1위와 7위로

선정해 그를 기렸다.

8. 애국지사 김봉성 묘터

김봉성(1900~1943)은 도산 안창호의 조카사위(도산의 형인 안치호의 사위)이다. 그는 1919년 3월 1일 평북 선천군에서 전

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해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 왜열도로 넘어가 1922년 주오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그리고 1927년

미국 남캘리포니아대학 경제학과를 수학했으며, 1930년 흥사단에 가입해 활동했다.

1933년 동아일보 선천지국 기자가 되었고, 1934년 3월 안치호의 딸인 '안맥결'과 혼인하여 부부가 안창호가 세운 점진학교

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1938년 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했으며, 1943년 12월 18일 불의의 연탄가스 중독사고로 딸 김

자영과 사망하고 말았다. (2005년 건국포장을 추서 받음)

 

그의 묘는 도산 묘 오른쪽인 이곳에 있었으나 2016년 4월 28일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장되어 지금은 낙엽이 뒤덮힌 묘터

와 비석만 남아있다.

9. 도산 안창호 묘터

도산 안창호(1878~1938)는 평남 강서 출생이다. 1895년 구세학당(경신고)에 들어가 기독교인 되었으며, 1897년 독립협회

에 가입해 평양에서 만민공동회를 열어 약관의 나이에 명연설가로 명성을 날렸다.

1902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교포들의 권익보호와 생활향상에 진력했으며, 1905년 을사늑약 이후 귀국하여 1907

년 항일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했다. 1911년 105인사건으로 신민회가 해체되자 1913년 흥사단을 조직했으며, 3.1운동 이

후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해 내무총장, 국무총리서리를 지내며 1919년 9월 통합임시정부 출범에 크게 공헌했다.

1924년 미국으로 건너가 흥사단 조직을 강화했고, 1926년 상해로 가 독립운동단체 통합에 진력하다가 1932년 왜경에 체포

되어 2년 6개월을 복역하다가 가출옥하여 휴양 중 동우회사건으로 다시 투옥되었다. 이후 1938년 병보석으로 풀려나 휴양

하던 중 6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아들처럼 아끼던 유상규묘 옆에 무덤을 썼으며, 조카사위인 김봉성이

오른쪽에 묻혔다. 

 

1973년 서울 강남구에 도산공원을 닦으면서 도산의 유택과 1955년에 세운 지붕돌 묘비는 그곳으로 이장되었으며, 2005년

도산 부부 합장묘 앞에 새 비석을 세우자 서울시와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도산기념사업회가 협의하여 2016년 3월 1일 구

비석(지붕돌 비석)을 이곳으로 옮겨 도산의 옛 무덤터를 지키게 했다.

10. 태허 유상규 묘 (국가 등록문화재)

태허 유상규(1897~1936)는 평안북도 강계 출생이다. 경신중학를 거쳐 1916년 경성의전 1기로 입학했으며, 1919년 3.1운

동 때 경성의전 학생들을 이끌고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상해임시정부로 건너가 도산 안창호의 비서관으로 활동했으

며, 이때 흥사단에 가입했다.

도산의 권고로 다시 귀국하여 1925년에 경성의전에 복학, 1927년에 졸업하여 경성의전 강사 및 부속병원 외과의사로 근

무했고, 동아일보사에서 주최한 강연회에 꾸준히 연사로 참석했다. 그리고 잡지와 신문에 많은 글을 실어 민중의 의학적

계몽활동에 나섰으며, 1930년에 조선의사협회 창설을 주도했다. 허나 1938년 중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감염되어 40세

의 나이로 병사하고 만다. 

유상규는 도산을 매우 존경해 아들 이름에 도산의 필명인 '산옹'의 '옹'을 땄을 만큼 사이가 각별했으며, 도산이 유상규의

장례를 주관했다. 도산 또한 1940년 그의 묘 옆에 무덤을 썼다. 

 

아들 유옹섭은 부친 묘와 도산 묘를 같이 돌봤으며, 2007년 보훈처로부터 부친묘의 현충원 이장 허가를 받았으나 부친의 

도산 선생에 대한 마음을 헤아려 이장을 하지 않고 도산 묘터 복원에 힘쓰다 2014년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