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사진·답사기/아차산·용마산 고구려유적

도봉산고양이 2021. 1. 5. 16:46

 

1. 망우산 정상 조망대에서 바라본 서울시내와 북한산, 불암산 산줄기

망우산2보루 남쪽인 망우산 정상(282m)에 조망대가 닦여져 있다. 이곳은 동쪽과 서쪽, 서북쪽이 훤히 트여있는데 서쪽과

서북쪽으로 중랑구와 동대문구, 성북구, 강북구, 도봉구, 노원구 등 서울 동북부 지역과 북한산(삼각산), 도봉산, 수락산, 불

암산 산줄기, 남양주 별내 지역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와 조망도 일품이다.

2. 망우산 정상 조망대에서 바라본 구리와 한강, 하남 지역

동쪽으로는 구리 지역과 한강, 강동구, 하남시 지역이 훤히 시야에 들어온다.

3. 망우산 능선길 (망우산 정상 남쪽)

3. 늦가을에 잠긴 망우산 사색의길 동쪽 구간

4. 왜인 사이토 오토사쿠묘 
1933년에 문을 연 망우리묘지에는 왜인들도 적지 않게 묻혀있다. 이중 사이토 오토사쿠(1866~1936)란 왜인도 있는데 그
는 야마나시현 출신으로 왜정 초대 산림과장을 지내면서 식목일을 제정하고 미루나무와 아까시나무를 이 땅에 도입하는
등 왜정 초기 산림정책을 담당했던 고위 관료이다.

 

동경대 임학과를 나와 농상무성 산림국에 취직, 대만과 야마나시현을 거쳐 북해도 임정과장을 지냈으며, 1909년 대한제국

의 농공상부 기사로 들어왔다. 1910년 왜정이 들어서자 왜정 초대 산림과장이 되었고 1915년 영림창장을 거쳐 1918년에

퇴직했으나 조선에 계속 남아 사이토임업사무소를 세워 산림위탁경영사업을 통해 녹화사업을 펼쳐갔다. 그에 대해서는 임

업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평가와 산림 수탈의 앞장선 자라는 비난이 존재하나 아무래도 후자에 더 무게를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왜정 중심으로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1936년 골로 갔는데 고향으로 가지 않고 망우리묘지에 묻혔다. 하여 칙임관(차관, 국장급) 이상 관료로 이 땅에 묻힌

유일한 왜인이 되었다. 야마나시현 출신의 아사카와 다쿠미는 그의 영향으로 임업계에 뛰어들었으며, 서울에서 계속 사제

의 정을 이어나갔다.

 

이 무덤은 비석으로 이루어진 단출한 모습으로 비석 밑에 화장한 유골을 묻었다. (전형적인 왜열도 무덤 스타일) 왜정 고위 

관리의 무덤이다보니 1945년 이후 적지 않게 고통을 당해 비석에 쓰인 글씨가 뜯겨져 나갔는데, 이는 그들이 오랫동안 이
땅에 저지른 개짓거리에 대한 당연한 보복이라 할 것이다. 비록 무덤 주인은 그 정도가 약했다고는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지 팔자이다. 비석 옆에는 꽃이 담긴 돌통이 있는데, 이곳에 온 기념으로 그 돌통을 발로 뻥 넘어트렸다. 

5. 여러 무덤 앞을 지나는 사색의 길 동쪽 구간

사색의길 동쪽 구간에는 근현대사 인물의 유택이 많이 분포하고 있다. (만해 한용운, 죽산 조봉암, 소파 방정환 등)

6. 죽산 조봉암묘

죽산 조봉암(1899~1959)은 강화도 출신으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청년 시절 3.1운동에 참여해 옥고를 치뤘으

며, 독립운동으로 신의주 감옥에 7년 동안 갇혀있기도 했다. 왜정 시절 조선공산당의 주요 리더였으나 1945년 이후 조선

공산당에서 나와 중도파의 길을 걸었으며, 1948년 인천에서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헌법기초위원으로 활동했고, 초

대 농림부장관을 맡아 농지개혁을 추진하고 국회부의장을 역임했다.

 

제2대, 제3대 대통령선거가 출마하여 2위를 차지하는 위엄을 보였고, 1955년 진보당을 창당했다. 허나 자유당 정권은 정

권 유지에 걸림돌인 그를 제거하고자 북한 간첩으로 몰아 1959년 7월 31일 서둘러 처형하고 만다.
무덤 앞에는 묘비가 있으나 비문이 없어 그의 누명을 침묵의 소리로 항변하고 있으며, 2011년 대법원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으면서 오랫동안 간첩으로 오인받아 고통받은 그의 명예가 다소 회복되었다. 

그의 무덤은 지붕돌 묘비와 장명등 1쌍, 상석, 혼유석을 지니고 있으며, 봉분 밑도리에는 호석이 둘러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