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 사진·답사기/경기 구리·남양주·가평

도봉산고양이 2021. 1. 6. 04:04

 

1. 죽산 조봉암의 어록

조봉암선생 묘 밑에는 그의 어록을 담은 견고한 돌덩어리의 표석이 있다.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 것

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하고서는 안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허냐'

2. 만해 한용운 묘 (국가등록문화재)

승려이자 문인, 독립운동가로 명성이 높은 만해(1879~1944)의 유택이다. 그는 승려가 되기 전에 혼인을 하여 부인과 자녀

가 있는데, 이곳에 부인(유씨)과 같이 묻혀있다. 묘비에는 '부인유씨재우'라 쓰여 있는데, 이는 유씨 부인이 만해 오른쪽에

묻혀있다는 뜻으로 여기서 오른쪽은 바라보는 입장이 아니라 고인이 머리를 북으로 하고 누운 상태에서의 오른쪽을 말한

다.

3. 만해 한용운 묘소 안내문

망우리공원(망우리묘지)에 묻힌 애국지사 묘역 중 만해 묘소 등 일부는 국가등록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4. 박희도 묘

박희도(1889~1951)는 황해도 해주 출생으로 종교인, 교육가이다.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에서 활약하다가 3.1운동

때 기독교계 대표 영입과 학생들의 참여에 크게 힘을 썼고 독립선언 33인 중 최연소자로 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복역 후 최초의 사회주의계 잡지 '신생활'을 발간해 독립운동에 진력했으나 러시아혁명 기념 필화사

건으로 함흥형무소에 잡혀가 2년 징역살이를 하였다. 1928년 중앙보육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을 지내는 등 기독교 교육계의

지도층으로 활동했으며 정치적으로는 자치론의 길을 걸었다.

1949년 반민특위에 잡혀가 조사를 받고 풀려났으며, 육군정훈학교 출강을 제외하고 활동을 안하다가 왜정 시절 옥고 휴유

증으로 1951년에 사망, 부모 묘소 밑에 잠들었다. (부인 묘는 옆에 있음)

 

그의 동생 박희성(1896~1937)은 연희전문(연세대) 출신으로 광복군 비행장교 1호로 미국에서 훈련을 받다가 순직했으며,

2010년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5. 호암 문일평 묘 (국가 등록문화재)

문일평(1888~1939)은 평북 의주 출생으로 사학자이자 언론인이다. 1905년 왜열도 명치학원에 들어가 1908년에 귀국했으
며, 대성학교와 경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최남선의 광문회와 도산 안창호가 이끄는 신민회에 참여했다. 

1911년 정치학 연구를 위해 와세다대학에 들어가 김성수, 장덕수 등과 교류했으며, 1912년 상해로 건너가 신규식 등이 조

직한 비밀결사 동제사에 참여했고, 1919년 3월 12일 독립청원서를 종로 보신각에서 낭독해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1927년 신간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중동과 배재, 중앙고보 등에서 역사를 가르쳤으며, 1933년 조선일보 편집고문이 되

면서부터 언론을 통해 평이한 역사 서술을 통한 민중 계몽에 힘을 썼다.

그는 '조선심','조선학'이란 단어로 대표되는데 이는 한국학의 대가인 이규태 등으로 이어졌다. 장남 문동표는 조선일보에

들어가 광복 후에는 편집국장을 지냈으며, 조선일보 명예회장인 방우영은 호암의 외손서(외손녀 사위)이다. 

 

묘비의 내용은 정인보가 지었으며 서예가 김승렬이 글을 썼다.

6. 문일평묘 앞에 있는 작은 묘비

7. 위창 오세창묘 (국가 등록문화재)

오세창(1864~1953)은 서화가이자 언론인으로 서울 출생이다. 부친 오경석은 청나라에서 많은 서적을 가져와 개화에 앞장

섰던 역관으로 오세창도 그런 부친의 영향으로 20세에 역관이 되었다.

1888년 박문국 주사로 있으면서 이 땅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 기자를 겸임했으며, 우정국 통신국장 등을 거쳐 1897년에

1년간 왜열도 동경외국어학교에서 조선어 교사로 일했다. 

개혁당 사건으로 1892년 왜열도로 넘어갔으며, 거기서 손병희의 권유로 천도교에 들어가 의암 손병희의 참모로 활동했다. 

그리고 1919년 3.1운동 때는 손병희와 함께 천도교 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했다.


손병희 사후(1922년) 천도교의 내부 갈등이 극심해지자 그는 왜정에 비타협적인 보수파 노선을 지켰으며, 1945년 이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고, 1946년 8월 15일에 민족대표로 왜로부터 대한제국의 국세를 돌려받았다. 그리고 1949

년 백범 김구의 장의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당대 최고의 서예가로 망우리묘지(망우리공원)에 있는 노고산천골취장비, 방정환묘비, 설태회 묘비에 글씨를 남겼으며, 간

송 전형필 선생의 스승으로 그에게 많은 도움과 가르침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