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 사진·답사기/경기 구리·남양주·가평

도봉산고양이 2021. 1. 9. 17:55

 

1. 위창 오세창묘 (국가 등록문화재)

오세창(1864~1953)은 서화가이자 언론인으로 서울 출생이다. 부친 오경석은 청나라에서 많은 서적을 가져
와 개화에 앞장섰던 역관으로 오세창도 그런 부친의 영향으로 20세에 역관이 되었다. 1888년 박문국 주사
로 있으면서 이 땅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 기자를 겸임했으며, 우정국 통신국장 등을 거쳐 1897년에 1년간
왜열도 동경외국어학교에서 조선어 교사로 일했다. 

개혁당 사건으로 1892년 왜열도로 넘어갔으며, 거기서 손병희의 권유로 천도교에 들어가 의암 손병희의 참
모로 활동했다. 그리고 1919년 3.1운동 때는 손병희와 함께 천도교 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했다.


손병희 사후(1922년) 천도교 내부 갈등이 심해지자 그는 왜정에 비타협적인 보수파 노선을 지켰으며, 1945
년 이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고, 1946년 8월 15일에는 민족대표로 왜로부터 대한제국의 국
세를 돌려받았다. 그리고 1949년 백범 김구의 장의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당대 최고의 서예가로 망우리묘지(망우리공원)에 있는 노고산천골취장비, 방정환묘비, 설태회 묘비에 글씨
를 남겼으며, 간송 전형필 선생의 스승으로 그에게 많은 도움과 가르침을 주었다.

2. 호암 문일평 선생(1888~1939)의 어록

조선 독립은 민족이 요구하는 정의 인도로서 대세 필연의 공리요 철칙이다. (호암의 '애원서' 중에서)

3. 명온공주와 김현근 묘역

명온공주(1810~1832)는 순조의 딸이고 그의 남편인 김현근(1810~1868)은 안동김씨 집안으로 김상용의 8
대손이다.

김현근은 어려서부터 말과 글이 똑똑해 15살에 부마가 되었는데, 순조가 명온공주의 남편을 물색하고자
12~15세 남성을 대상으로 간택령을 내렸다. 하여 그해 5월 22일 17명 후보 중 8명을 골랐고, 5월 25일에 3
명으로 줄였으며, 6월 2일 3번째 간택에서 진사 김한순의 아들인 김현근이 최종 합격되어 동년위로 봉해진
후 7월 17일 혼인을 거행했다.

 

명온공주는 일찍 병을 얻어 1832년 22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으며, 김현근은 청나라 사신 업무, 판의금부
사 등을 지내다가 1868년 58세로 사망한다. 고종은 명온공주의 오라비인 효명세자(추존 익종)의 대를 이어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고종에게 있어 명온공주는 고모가 되며, 김현근은 고모부가 된다. 

 

명온공주 부부의 묘는 원래 종암동 고려대 앞쪽에 있었으나 1936년 이곳으로 이전되었으며, 6.25때 부근이
격전지가 되면서 장명등이 화마에 크게 당했다. 또한 상석 위에 영문 이름이 새겨져 있으니 이는 1950년 인
천상륙작전에 참여한 어느 철딱서니 없는 양이 군사가 남긴 낙서이다. 

 

무덤은 합장분으로 이루어진 봉분 1기와 무덤의 주인을 알리는 지붕돌 비석, 장명등, 상석을 지니고 있으며,
망우리묘지에 묻힌 망자 중 가장 계급이 높다. 또한 비록 다른 곳에서 이장되긴 했으나 가장 늙은 무덤이기
도 하다.

4. 명온공주 묘 상석에 새겨진 영문

1950년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한 어느 개념 바닥인 양이 군사가 남긴 낙서이다. 세상에 낙서할 곳이 없어서
남의 무덤 상석에다가 저런 짓을 했단 말인가.

5. 명온공주 부부묘 묘표(묘비)

지붕돌 비석으로 망우리묘지(망우리공원)에 있는 묘비(묘표) 중 가장 늙었다.

6. 명온공주 부부묘 장명등

6.25 시절, 부근이 격전지가 되면서 크게 고통을 당한 안좋은 추억이 있다. 

7. 소파 방정환 묘역 (국가 등록문화재)

소파 방정환(1899~1931)은 아동문학가이자 애국지사로 어린이날과 '어린이'란 용어를 만든 인물로 유명하
다.
서울 당주동 출생으로 어린이에게 나라의 미래가 있다며 어린이 운동에 온 생애를 바쳤는데, 죽음 직전에 '
어린이들을 잘 부탁한다' 며 '여보게 밖에 검정말이 끄는 검정 마차가 와서 검정옷을 입은 마부가 기다리니
어서 가방을 내다주게'라는 말을 남기며 32세의 짧은 나이로 운명하고 말았다. 

 

그의 유골은 홍제동 화장터에 있었으나 1936년 후배 최신복 등이 나선 모금 운동으로 망우리묘지 현 자리
에 유택을 마련해 안장되었다. 무덤은 흙으로 다진 봉분 대신 쑥돌로 표석처럼 세웠는데, 비석 글씨는 앞서
언급했던 위창 오세창이 썼다. 오세창은 손병희를 도와 3.1운동 33인의 일원으로 참여했으며, 소파는 손병
희의 3째 사위이기도 하다.

소파와 함께 개벽사에서 '어린이' 잡지를 만든 최신복은 수원에 선산이 있음에도 자신의 부모묘를 소파 바
로 밑 왼쪽에 썼으며, 자신도 부인과 함께 그 밑에 묻혀 소파와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