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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고양이 2021. 2. 18. 22:15
돈암동 흥천사 



' 도심과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돈암동 흥천사 '

▲  흥천사 전경


흥겨운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 4월 초파일)을 며칠 앞둔 어느 평화로운 봄날, 돈암동
(敦岩洞) 흥천사를 찾았다.

돈암동 산자락에 깃든 흥천사는 내 즐겨찾기 명소의 하나로 이미 20번 이상 발을 들였다.
첫 인연이었던 1990년대 초에는 소장 지정문화재가 2개(극락보전, 명부전)에 불과했으나
조선 중/후기 탱화와 불상, 보살상을 많이 지니고 있다보니 나날이 지정문화재가 늘어나
이제는 국가 보물 1점, 등록문화재 1점을 포함해 무려 20점 이상을 간직하게 되었다.
하여 지정문화재가 새로 생겼다는 풍문을 전해 들을 때마다 그것을 확인하러 왔고, 석가
탄신일에도 여러 번 찾아가 그곳의 후한 초파일 인심(공양밥, 떡 공양)을 누리기도 했다.
게다가 내 즐겨찾기의 하나인 북악산길 동쪽 기점에 자리해 있고, 우리집과도 20리 거리
로 가까워 둘 중에 하나가 사라질 때까지는 인연이 마를 날이 없을 것이다.


♠  흥천사 입문

▲  봄내음이 진하게 서린 돈암동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8-4호

흥천사입구(돈암2동 주민센터)에 이르니 장대하게 솟은 느티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내밀며 반
갑게 마중을 한다.
그는 높이 10m, 둘레 2.4m로 약 380년 정도 묵었다. (1988년 7월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약 350년) 나무 주변에는 흥천사를 후광(後光)으로 삼은 마을이 있었는데, 오랜 세월
마을을 지켜준 존재로 왕년에는 나무 그늘에 장승과 돌탑도 있었다고 전한다.
허나 20세기 중반 이후, 개발의 거친 칼질이 흥천사 주변을 적지 않게 갈아엎으면서 나무 밑
에 있던 장승과 돌탑도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싹 사라져버렸다. 나무 역시 개발의 칼날을
잘못 맞아 골로 가기 직전인 것을 동네 주민과 흥천사 승려가 합심해 정성스럽게 보살피면서
다행히 생기를 되찾았다.

2014년 정자나무 가꾸기 사업으로 주변이 산뜻하게 정비되었으며, 흥천사를 알리는 오랜 이정
표이자 동네 사람들의 정자나무로 그 역할은 전혀 녹슬지 않았다.


▲  느티나무에서 경내로 인도하는 길 (옛 일주문 자리)

느티나무를 지나면 잘 닦여진 길이 나타난다. 도로 차단봉이 설치된 지점 쯤에 흥천사의 정문
인 일주문(一柱門)이 있었는데, 2014년에 경내를 정비하면서 밀어버렸다. 일주문은 절의 거의
필수 요소임에도 있던 일주문을 밀어버려 일주문이란 존재 자체를 지운 것이다.

느티나무에서 흥천사 경내로 향하는 길 북쪽 언덕에는 숲이 우거져 있다. 숲 서쪽 7층석탑 주
변과 삼각선원 주변에는 속인(俗人)들의 집이 즐비했으나 2011년 이후, 흥천사에서 매입해 말
끔하게 정리했다. 그때 이곳에 살던 사람들(거주자 22가구, 세입자 60여 세대)에게 이사 비용
과 생활비까지 보태어 이주를 시켰다고 하니 인심도 넉넉히 베푼 모양이다. 하긴 절이 중생에
게 야박하게 굴면 못쓰지. 중생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바로 종교와 절의 역할이 아니던가? 그
역할을 외면하면 그건 더 이상 종교가 아니다.


▲  주차장 북쪽에서 바라본 흥천사 대방
대방이 경내를 꽁꽁 가리고 있어서 보이는 것은 별로 없다. 그 뒤로 높이 솟은
한신한진아파트가 묵묵히 절을 굽어보고 있다.

▲  오색 연등을 두룬 7층석탑
탑신(塔身)이 위로 올라갈 수록 일정하게 줄어드는 균형 잡힌 맵시를 자랑한다.


주차장에서 정릉(貞陵)으로 넘어가는 길목 오른쪽 숲속에 잘생긴 7층석탑이 있다. 파리도 미
끄러질 정도로 맨들맨들한 하얀 피부를 지닌 그는 관음전 옆에 있었으나 2014년에 그 자리에
요사(寮舍)와 선원을 지으면서 지금의 자리로 밀려났다.
흥천사의 유일한 석탑으로 원래 탑은 법당 앞에 세우기 마련인데, 법당(극락보전) 앞 자리가
협소해 경내 밖까지 나온 것이다.

곧 다가올 석가탄신일을 위해 오색 연등으로 몸을 치장한 석탑 옆에 서면 흥천사 경내가 훤히
시야에 들어온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흥천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7층석탑 주변에서 바라본 흥천사

서울 시내 한복판인 돈암동 산자락에 둥지를 튼 흥천사는 '삼각산(북한산) 흥천사'를 칭하고
있다. 여기서 북한산은 다소 떨어져 보여 고개가 갸우뚱거릴 수 있지만 성북동(城北洞)과 돈
암동 산자락도 엄연히 북한산 남쪽 끝자락에 해당되어 삼각산 흥천사를 칭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1. 조선 왕실 최초의 원찰(願刹) 흥천사의 탄생
1396년 태조(太祖)의 왕후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가 세상을 뜨자 태조 이성계는 도성(都
城) 밖도 아닌 경복궁(景福宮) 근처 황화방(皇華坊, 정동 미국대사관과 러시아공사관터 일대)
에 왕후의 능인 정릉(貞陵)을 조성했다.
그리고 정릉 동쪽 취현방 북쪽 언덕(덕수초교와 서울시의회 일대로 여겨짐)에 정릉의 원찰을
세우니 그것이 조선 최초의 원찰, 흥천사이다. 흥천사는 1397년 1월 공사에 들어가 그해 9월
170칸 규모로 완성을 보았는데, 공사 감독은 건축 경력이 상당했던 김사행(金師幸)과 김주(金
湊)가 맡았으며, 태조는 공사기간에 수시로 현장을 찾아 일꾼들을 격려하고 돈과 식량을 두둑
히 내리는 등 많은 신경을 썼다.

절이 완성되자 초대 흥천사 주지로 상총(尙聰)을 임명했으며, 조계종(曹溪宗)의 본산(本山)으
로 삼았다. 그리고
250결을 내려 절 유지비에 쓰도록 했으며, 절 전각 기둥과 서까래까지
모두 금단청을 입혀 그야말로 금빛 찬란했다고 전한다.
태조는 신덕왕후를 얼마나 그리워했던지 매일 아침 흥천사에서 들려오는 종소리를 들어야 비
로소 밥숟가락을 들었다고 한다.

2. 억불숭유(抑佛崇儒) 속에서도 번영을 누린 흥천사
1398년 6월, 태조는 흥천사에 3층석탑을 세워 통도사(通度寺)에서 가져온 석가여래의 사리를
봉안했다. 그리고 그 탑의 집으로 8각형의 사리전
(舍利殿)을 장엄하게 지었는데 건물이 완성
되자 태조를 우란분재(盂蘭盆齋)와 신덕왕후의 수륙재(水陸齋)를 성대하게 열었다. 사리전이
얼마나 화려하고 대단했던지 그 시절 서울의 대표 명소로 인기가 대단했으며, 그것을 보려고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렸다고 전한다.

1408년 태조가 승하하자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은 눈에 가시처럼 여기던 계모(季母)의 정
릉에 스트레스를 풀었다. 하여 정릉 석물을 동원해 광통교(廣通橋) 공사와 태평관(太平館) 보
수에 썼으며, 1409년 능을 정릉동으로 추방시켜 사람들의 뇌리에게 잠시 잊혀지게 만들었다.
허나 흥천사는 절을 잘 지켜달라는 부왕의 유언으로 정릉의 원찰 자격을 거두고 절의 노비와
밭의 면적을 줄이는 선에서 끝냈다. 허나 태평관을 철거하면서 남게된 밭과 노비를 흥천사로
넘기면서 오히려 밭과 노비수가 증가했으며 1410년 절을 수리하고 1411년 사리각을 중수했다.

세종 때는 1424년 각 종파를 통합 정리하여 흥천사를 선종도회소(禪宗都會所)로 삼았으며, 전
답을 두둑히 내리면서 승려 120명이 머무는 큰 절로 성장했다. 1435년과 1437년 절을 수리했
으며, 1440년에는 대장경(大藏經)을 봉안했다.

1441년 3월, 절 중수공사가 끝나자 5일 동안 경찬회(慶讚會)를 열었으며, 1447년 세종은 3번
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을 시켜 사리각에 불골(佛骨)을 봉안하게 했다. 그리고 1449년
가뭄이 심하게 들자 흥천사에서 기우제를 지냈는데, 며칠 뒤 비가 내려 전국을 적시면서 세종
은 너무 기뻐 절 승려 140명에게 상을 내렸다.
불교를 신봉했던 세조(世祖)는 큰 동종을 만들어 하사했으며, 1469년 명나라 황제가 불번(佛
幡)을 보내오자 이를 흥천사에 봉안했다. 그리고 1480년 절을 크게 중수했다.

흥천사는 도성 안에 자리한 잇점으로 많은 사대부와 선비들이 찾아와 공부를 했는데 황희(黃
喜)의 아들인 황수신(黃守身, 1407~1467)도 여기서 공부하다가 나중에 세종이 되는 충녕대군
(忠 寧大君)과 만나게 되었다. 이때 충녕은 막힘없이 글을 외우는 황수신에게 퐁당퐁당 반해
나중에 왕위에 오르자 그를 불러 종7품 종묘서부승직을 내리기도 했다.


3. 흥천사의 비참한 최후

세조 이후 왕실의 지원이 감소하면서 잘나가던 흥천사에 서서히 적신호가 켜지게 된다. 연산
군(燕山君)은 1503년 궁궐에 있던 내원당(內願堂)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흥천사의 건축자재 일
부와 불상을 양주 회암사(檜巖寺)로 옮겼다. 그리고 절에 궁궐의 말을 관리하는 사복시(司僕
寺) 관아를 설치하여 절의 적지 않은 고통을 주었다.

1504년 화재로 사리전을 제외한 건물 대부분이 잿더미가 되었으나 복구하지 못했으며, 1510년
3월, 4부학당 유생들이 불교 배척을 외치며 야음을 틈타 불을 지르면서 남아있던 사리전까지
모두 아작내었다. 왕실의 원찰임에도 그 지경이 된 것을 보면 왕실의 무관심이 대단했던 모양
이며, 절 자리는 집 없는 사대부에게 고루 분배되면서 흥천사는 잠시 말끔히 사라지게 된다.


그렇게 최후를 맞은 흥천사는 세조 때 조성된 동종(銅鍾, 보물 1460호)만 살아남았고. 그마저
도 제자리를 잃고 동대문과 광화문을 방황하다가 덕수궁(경운궁) 광명문(光明門)에서 남은 여
생을 보내고 있다.

▲  흥선대원군이 쓴 흥천사 현판

▲  흥천사 극락보전

4. 신흥사에서 다시 태어난 흥천사, 다시 정릉과 이웃이 되다.
1569년 정릉 인근 함취정(含翠亭)터에 정릉을 지키고 제를 지내는 조그만 절이 왕명으로 지어
졌다. 절 이름은 전하지 않으며,
1669년 송시열(宋時烈)의 건의로 정릉을 중수하고 능역(陵域
)을 넓히면서 절을 석문 밖으로 옮기고 절 이름을 신흥사(新興寺)라 하여 옛 흥천사의 뒤를
잇게 했다.


1738년 불전을 새로 조성했으며, 이후 절이 퇴락하게 되자 성민(聖敏)과 경신(敬信)이 정릉을
지키는 능참봉(陵參奉)에게 건의하여 전국에 권선문(勸善文)을 돌려 협찬받은 돈과 폐사된 은
석사의 목재로 1794년에 현 자리로 이전해 절을 크게 중창했다.
1846년 구봉(九峰)이 칠성각을 세웠으며, 1849년에 성혜(性慧)가 절 서쪽에 적조암(지금은 분
리됨)을 세웠다. 또한 1853년 극락보전을 중수했으며, 1855년 명부전을 지었다.

1865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지원으로 전국 8도에서 시주를 받아 크게 중창했다. 대원군
은 신흥사와 정릉이 이웃한 점을 들어 중종 때 없어진 '흥천사' 이름을 다시 쓰게 했는데, 이
로써 흥천사 이름 3자는 다시 부활하게 되었다. 이때 이름 변경 기념으로 대원군은 친히 '흥
천사' 편액을 내렸다. (1794년 지금의 자리로 절을 이전하면서 새로운 흥천사란 뜻에서 신흥
사로 했다는 이야기도 있음)
흥천사로 거듭난 이후 왕족과 사대부, 궁궐 상궁의 발길이 늘었으며, 1891년 42수 관음보살상
을 봉안했다.


5
. 조선의 마지막 황후가 머물던 왕실의 원찰, 그리고 현재
1933년 독성각이 불타자 이듬해 재건했다. 그리고 1942년 종각을 새로 지었는데, 이때 오세창
(吳世昌)이 종각 현판을 선물했다.
6.25 때는 격전지인 미아리고개가 지척임에도 다행히 총탄이 비켜가 화를 면했으며, 순종(純
宗)의 황후이자 조선의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1894~1966) 윤씨가 여기서 힘
겨운 피난 생활을 하였다. 그때 윤씨는 양식 1홉으로 하루를 지냈는데, 그 1홉에서 매일 1줌
씩을 떼어 향과 초를 사들고 기도를 올렸다고 전한다.

왜정(倭政) 때는 혼인한 승려와 그 가족들이 절 주변에 거주하면서 주변이 산만해지기 시작했
는데, 6.25 이후 경내 옆까지 민가가 밀려들어왔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이 추진한 불교정화운
동부터 조계종과 사찰 관리를 두고 오랫동안 갈등을 빚으면서 오랫동안 방황을 겪는다. 그러
다가 2011년 흥천사 주지로 들어온 금곡 정념이 스승인 무산오현의 뜻을 따라 많은 돈을 들여
22가구와 세입자 60여 세대를 이주시키면서 경내를 온전히 보전했다.
민가가 떠난 자리에는 2014년에 삼각선원을 크게 지었고, 극락보전과 대방을 중수했으며, 경
내를 꾸준히 손질하여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법당인 극락보전을 비롯해 명부전, 대방(만세루), 용화전, 독성각, 용화전, 삼각선원 등 10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절은 서남쪽으로 산을 등지고 있어 대방과 극락보전은 동
북쪽을, 명부전은 동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국가 보물인 금동천수관음보살좌상과 국가 등록문화재인 대방을 비롯해
극락보전, 명부전,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판(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板. 서울 지방유형문화
재 379호
), 도량장엄번(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12호), 약사불도(서울 지방문화재자료 66호),
약사여래좌상 및 복장유물(서울 지방문화재자료 74호) 등 지방문화재 20여 점을 지니고 있어
절의 풍부한 내력을 가늠케 한다.

이곳은 산사이긴 하나 턱밑과 머리 윗쪽까지 밀려온 개발의 칼질 앞에 고즈넉한 산사의 농도
가 다소 떨어졌다. 심지어 아파트들이 절 윗쪽까지 들어서 절을 굽어보고 있는 실정이며, 절
을 둘러싼 숲도 예전 같지가 않다.
흥천사는 조선 최초의 원찰로 의미가 깊으며, 비록 100여 년의 공백기가 있으나 조선 왕실의
지원으로 자라난 절의 하나이다. 또한 번잡한 도심 속에 박혀 있지만 정작 절로 들어서면 겉
으로 보이는 모습과 달리 차분하고 고즈넉한 분위기가 그윽하며, 흥천사의 영원한 단짝인 정
릉과도 가깝고 이정표도 잘 정비되어 있어 같이 둘러보면 정말 배부른 나들이가 될 것이다.
게다가 절 뒷쪽에 도심의 하늘길, 북악산길이 흐르고 있으니 여기서 북악산길 트래킹을 시작 하는 것도 괜찮다. 또한 10월 중순에는
흥천사 느티나무 광장과 주차장 일대에서 돈암동 느 티나무 축제가 열린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2동 595 (흥천사길 29 ☎ 02-929-6611~12)


♠  흥천사 대방과 명부전

▲  흥천사 대방(大房) - 등록문화재 583호

내 핵심부를 가리며 동북쪽을 바라보고 앉은 대방은 경내에서 가장 큰 집으로 특이하게 'H'
구조를 취하고 있다.
대방이란 왕실 원찰에서 주로 지니고 있는 특별한 건물로 왕족과 귀족들의 예불과 숙식 편의
를 위해 지어졌다. 숙식을 하는 방과 예불 공간, 부엌, 누(樓) 등을 갖추고 있으며, 높은 것
들의 편의 외에도 신도와 승려들의 숙식, 예불 공간의 역할도 하였다. 또한 법당(극락보전)
앞에 자리하여 경내가 외부에 보이지 않도록 가리는 역할도 했다.

이 건물은 1865년에 지어진 것으로 만세루
(萬歲樓)라 불리기도 하는데, 흥선대원군이 남긴 흥
천사 현판이 있으며, 대방 가운데에는 너른 방이 있고, 그 좌우로 여러 방들이 있어 대방이란
이름을 무색하지 않게 한다.
2016년에 해체 복원에 들어가 2019년에 마무리를 지었으나 시멘트를 이용하고 부실하게 손질
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해 복원이 되었음에도 오랫동안 비워두다가 2020년 석가탄신일부터 부
분 공개를 하고 있다. 이곳에는 많은 불상과 보살상, 탱화가 있었으나 공사로 인해 관음전과
극락보전 등 주변 건물로 모두 흩어졌다.

▲  대방 정면에 걸린 흥천사 현판

▲  대방 우측의 옥정루(玉井樓) 현판

▲  대방 좌측의 서선실(西禪室) 현판

▲  대방의 다른 이름, 만세루 현판
1926년(병인년) 악질 친일파 송병준의
아들인 송종헌(宋鍾憲)이 쓴 것이다.


▲  흥선대원군이 쓴 흥천사 현판의 위엄
1865년 흥선대원군이 절 이름을 흥천사로 갈게 하면서 그 기념으로 남긴 현판이다.
대원군의 체취가 서린 필체로 글씨가 마치 살아 꿈틀거리는 것 같다.

▲  대방의 듬직한 뒷모습

▲  종각(鐘閣)
1942년에 지어진 것으로 범종의 거처이다.

▲  오세창 선생이 남긴 종각 현판
현판 글씨가 마치 사람 모습 같다.


▲  흥천사 명부전(冥府殿)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67호

대방 서쪽에는 명부전이 자리해 있다. 동남쪽을 향하고 있는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1855년에 승려 순기(舜猉)가 세운 것을 1894년에 중수했다.
건물 좌우로 풍판을 달았으며, 평방(平枋) 윗쪽에는 공포를 촘촘히 배치한 다포(多包) 양식으
로 기둥 위에는 밖으로 용머리를, 안쪽에 용꼬리를 새겨 건물의 품격을 높였다. 그리고 건물
내부에는 판형(版型)으로 운봉(雲峰)을 장식했다.

조선 후기 사찰 건축 양식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서울에 몇 없는 오래된 불교 건물로 명부
전의 현판이 가로가 아닌 세로로 걸린 점이 매우 이채로운데, 보통 현판의 색깔인 검은색 바
탕이 아닌 붉은색 바탕에 글씨가 쓰여 있어 마치 중원대륙 양식의 건물을 보는 듯 하다.


▲  명부전 석조지장삼존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15호

명부전에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중심으로 도명존자(道明尊者), 무독귀왕(無毒鬼王)이 석조
지장삼존상을 이루고 있다. 이름 그대로 돌로 만들어 도금과 색을 입힌 것으로 그 좌우로 시
왕상(十王像), 귀왕(鬼王) 2구, 사자(使者) 2구, 판관(判官) 2구, 금강역사(金剛力士) 2구,
동자상 6구 등 27구가 명부전 식구를 이루고 있는데, 이들은 '흥천사 명부전 석조지장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이란 기나긴 이름으로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15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명부전의 주인인 지장보살상은 84.5cm의 보살상으로 푸른 민머리를 지니고 있다. 몸통과 같이
조각된 오른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손바닥에 둥근 보주(寶珠)를 들고 있으며, 왼손은 편
상태로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이런 손의 형태는 조선 후기 석불상과 석조보살상에서 많이 등
장한다. 푸짐한 인상의 각진 얼굴에는 가늘게 뜬 눈과 살짝 구부러진 눈썹, 미소를 머금은 입
, 길쭉한 귀를 지니고 있으며, 목에는 삼도(三道)가 획 그어져 있다.
대의(大衣) 안쪽에 편삼(扁衫)을 걸쳤고, 대의 자락이 오른쪽 어깨를 덮고 팔꿈치와 배를 지
나 왼쪽 어깨로 넘어가고 있으며, 왼쪽 어깨의 대의 자락은 수직으로 내려와 배에서 편삼과
겹쳐져 있다. 아랫도리를 덮은 옷자락은 배에서 앞으로 한 가닥의 옷주름이 늘어져 있고, 그
옆으로 낮은 옷자락이 펼쳐져 있다.
대의 안쪽에 가슴을 가린 승각기(僧脚崎)는 상단이 수평이고, 내부에 대각선으로 간략하게 접
혀 있다. 보살상의 뒷면은 목 주위에 대의를 두르고, 왼쪽 어깨에 앞에서 넘어온 대의 자락이
늘어져 있다.

지장보살 좌우에 자리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은 자리가 낮아서 그렇지 지장보살과 덩치가
비슷하다.
그들 좌우로 왼쪽에 시왕 중 홀수 대왕 5명을,
오른쪽에 짝수 대왕 5명을 배치하여 시왕상을
이루고 있으며, 시왕상 사이로 동자상을 두고,
그 앞에는 귀왕과 판관을 배치했다. 그리고
문 앞에는 무기를 든 사자와 금강역사가 자리
해 명부전 식구들을 지킨다.

▲  사자상과 금강역사상, 사자도

▲  명부전 시왕상과 시왕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23호)

시왕을 머금은 시왕상은 패널에 오려 붙인 형식으로 1/3왕과 5/7/9왕, 2/4왕, 6/8/10왕이 한
세트를 이루고 있다. 5/7/9왕, 6/8/10왕이 그려진 화기(畵記) 일부가 사라졌으나 '유(酉)'가
남아있어 1885년 을유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화기를 통해 상궁이 시주하여 흥천사에 봉
안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19세기 말 서울/경기 지역에서 유행하던 시왕도 양식으로 봉국사(奉國寺) 시왕도(1872)와 화
계사(華溪寺) 시왕도(1878) 등이 비슷한 도상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림 상단에는 시왕을 중심
으로 심판 장면이 그려져 있고, 하단에는 지옥 장면이 펼쳐져 있다.

상단에는 병풍을 배경으로 시왕이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이 크게 표현되어 있으며, 시왕 주위
난간과 계단 밑에 권속들이 서 있다. 옥졸(獄卒)은 창과 같은 무기류를 들고 있으며, 판관은
복두를 쓰고 우산이나 부채를, 동자는 벼루와 두루마리, 책을, 천녀는 부채를 들고 있다. 하
단에는 지옥의 형벌 장면이 가득 채워져 보는 이로 하여금 인생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다. 즉 착하게 살라는 흥천사와 시왕도의 뜻이다.


▲  명부전 윗쪽에 걸린 괘불함(掛佛函)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72호

명부전 가운데 칸 문 위쪽에는 시커먼 피부의 길쭉한 나무 상자가 걸려있으니 그가 비로자나
삼신괘불도의 보금자리인 괘불함이다. 이곳 괘불은 서울에서 가장 늙은 측에 속하는 1832년
작(作)으로 예전 석가탄신일에 친견한 추억이 있다.
괘불은 만나기가 꽤 어려운 까칠한 존재로 그를 보고 싶다면 석가탄신일(가급적 15시 이전까
지)을 이용하기 바란다. 그날은 날이 날인지라 95% 이상 외출을 나온다. 만약 평일이나 일반
휴일에 외출을 나온 그를 봤다면 하늘의 뜻이라 여기고 반드시 복권을 구입하기 바란다.

흥천사 괘불과 괘불함은 '흥천사 비로자나삼신괘불도 및 괘불함'이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유형
화재 372호
로 지정되어 있다.


▲  명부전 뒷통수에 깃든 벽화 5점
반야용선을 이끄는 관세음보살을 중심으로 하늘을 나는 천녀(天女),
호랑이를 타고 질주하는 승려 등이 그려져 있다.

▲  극락보전 서쪽 바위에 깃든 관세음보살상과 산신상(왼쪽 감실)

극락보전 서쪽에는 관세음보살상이 있는 바위로 인도하는 계단이 있다. 그 계단의 끝에 구멍
이 여럿 패인 바위가 있고, 그곳에 하얀 피부를 지닌 맵시가 고운 관세음보살과 조그만 산신
상이 둥지를 틀고 있다.
자애로운 표정을 지닌 관세음보살은 경내를 굽어보고 있는데, 그 옆 바위에 감실(龕室)을 파
서 산신과 호랑이를 두었으며, 유리로 그 감실을 봉해버려 답답하게 갇혀 있는 모습이다. 그
들을 품은 바위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절이 있기 전에는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으로 쓰였던 듯 싶다.


♠  흥천사의 보물 창고, 극락보전(極樂寶殿)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66호

대방 뒷쪽에는 흥천사의 법당인 극락보전(극락전)이 대방의 뒷꽁무니를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
다.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1853년에 구봉계장
(九峰啓壯)이
지었는데, 경내에서 가장 늙은 집으로 처음에는 대웅전(大雄殿)으로 쓰였다. 그러다가 나중에
극락보전으로 이름이 갈렸는데, 흥천사는 창건 초부터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
(阿彌陀佛)을 중심 불상으로 삼았다고 전하며, 극락보전이란 그 아미타불의 거처를 일컫는다.

석축 위에 높이 들어앉아 밑에서 보면 제법 장엄하게 보이며, 지붕을 받치는 공포가 기둥 사
이에 촘촘히 박힌 다포 양식으로 건물 좌/우/뒷면은 판벽(板壁)으로 사천왕(四天王)을 비롯한
여러 벽화가 그려져 있다. 건물 정면 3칸에는
마치 그림 판화를 긁어놓은 듯, 온갖 꽃과 나무
무늬(꽃살 창호)가 색채감 가득히 새겨져 있으며, 가운데 두 기둥 위에는 용머리 장식을 두어
건물을 수식한다.

앞서 명부전과 더불어 조선 후기 사찰 건축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화려한 장식과 그 시
절 뛰어난 건축 기술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서울에 얼마 없는 조선 후기 사찰 건축
물로 그 가치가 높아 일찌감치 서울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  벽화가 그려진 극락보전의 뒷모습
건물 좌/우/뒷쪽 외벽에는 여러 벽화를 담아 법당을 곱게 수식하고 있다.

▲  극락보전의 빛바랜 일기장 '흥천사 대웅전 불량대시주(佛糧大施主)' 현판
1899년에 쓰여진 것으로 극락보전의 옛 이름이 대웅전이었음을 살짝 귀뜀해 준다.

▲  1972년에 제작된 흥천사 개금불사시주기

▲  망국의 황자(皇子), 영친왕이 5살 때 흥천사에 남긴 현판

영친왕<英親王, 영왕(英王) 1897~1970>은 고종의 7번 째 아들로 1901년에 흥천사를 방문해 글
씨 하나를 남겼다. 물론 수행원과 승려의 간청에 의해 그리 했을 것이다. 현판에는 '王孝 天
地玄黃金雨孝王海史. 英親王殿下五歲書, 大韓光武五年'이라 쓰여 있으며, 저 글씨 중 '王孝天
地玄黃金雨孝王海史'만 영친왕의 필적이다.
지체 높은 왕자의 친필인지라 특별히 법당 천정에 걸어 애지중지하고 있으며, 아무리 황제의
아들이 쓴 글씨라고 해도 4살 어린이가 쓴 글씨답게 천진난만함이 가득 묻어 나온다. 글씨가
다소 흐트러져 보이긴 하나 그 나이에 저 정도의 글씨를 썼을 정도면 어린 시절 총기가 조금
있었던 모양이다. 허나 현실은 망국의 황족...


▲  극락보전의 화려한 붉은 닫집과 보물들이 가득한 불단

극락보전 내부는 그야말로 화려함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 불단에는 목조여래좌상(아미타여래)
과 목조보살좌상, 천수관음보살좌상이 있으며, 그 뒤로 아미타불도, 그 위로 붉은 기와의 닫
집이 호화롭게 지어져 있다.
불단 좌우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온갖 탱화들이 가득 깃들여져 있으며, 천정에도 고운 색
채의 벽화가 넉넉히 깃들여져 있어 극락보전은 그야말로 흥천사의 보물 창고이자 불교미술박
물관이다. 그러니 흥천사에 왔다면 극락보전 내부는 꼭 둘러봐고 또 살펴봐야 나중에 명부(저
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흥천사의 얼굴과 같은 존재이며, 흥천사의 지
정문화재 40% 정도가 이곳에 들어있다.


▲  왼쪽 목조보살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14호)
가운데 목조여래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13호)
오른쪽 금동천수관음보살좌상(보물 1891호)
후불탱화인 아미타불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7호)


극락보전 불단 중심에 자리한 목조여래좌상은 나무로 만들어 도금은 입힌 아미타여래(阿彌陀
如來像)이다.
좌우 협시로 자리한 목조보살좌상과 금동천수관음보살보다 덩치가 많이 밀려 그가 과연 중심
불상인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데, 그들보다 앉아있는 대좌(臺座)를 더 높였으나 그래도 많
이 밀려 다 큰 어른들 사이에 아이가 앉아있는 것 같다.

목조여래좌상은 56.3cm 높이의 불상으로 허리가 유난히 길고 어깨가 넓은데, 이는 조선 초기
불상에서 많이 나오는 특징이다. 얼굴은 약간 내밀어 밑을 보는 자세이고, 덩치에 비해 얼굴
이 너무 작으며, 머리의 측면 폭은 또 넓다.
무견정상(육계)은 낮게 솟아 있으며, 이마에는 백호가 있고, 콧날은 오똑 솟아있고
입술에는
미소가 깃들여져 있다.

가사를 2벌 겹쳐 입었는데, 오른족 어깨에 부견의(覆肩衣)를 걸치고, 대의 자락이 왼쪽 어깨
뒤로 넘겨져 늘어졌다. 앞가슴은 U자형으로 열려있고 안에 입은 승각기(내의)가 접혀저 사선
의 주름을 이루고 있으며,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두 다리를 덮은 옷자락은 오른발을 반쯤 덮
고 무릎 아래로 흘러내렸다.
수인(手印)은 설법인(說法印)을 취하고 있으며, 불상 뒷면에는 네모난 복장유물 공간이 있는
데, 여기서 지본묵서 다라니경 2건과 발원자명이 쓰인 목판이 나왔다.

불상의 이런 스타일은 1606년에 조성된 공주 동학사(東鶴寺)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과 비슷해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동학사 불상을 조성한 조각승 석준
(釋俊)
각민(覺敏) 등이 조성하거나 그 계열에서 만든 것을 19세기 중기 이후에 흥천사로 흘러들
어온 것으로 여겨진다.

그 옆에 연꽃을 든 화려한 보관(寶冠)의 목조보살상은 앉은 키 101.5cm 크기로 보관에는 정면
을 향해 날개짓을 하는 봉황 2마리가 좌우대칭을 이루며, 꽃무늬와 연화문(蓮花紋) 장식이 붙
어있고 상단에 5개의 화염문과 측면 좌우로 관대(冠帶)가 매달려있다. 그리고 보관 겉면에 여
러 개의 작은 구멍이 뚫려있어 장식 일부가 사라진 것으로 여겨진다.

머리에는 무견정상이 솟아있고, 보관 밑 이마에 머리카락이 단정히 처리되어 있으며, 머리카
락이 어깨 위까지 내려와 3가닥으로 늘어져 있다. 머리는 어깨에 비해 크나 상반신이 지나치
게 길고, 하반신은 넓으며, 명상이나 졸음에 잠긴 듯 가늘게 뜬 눈의 눈꼬리가 많이 올라가
있고, 코는 뾰족하고 콧등은 짧다. 그리고 이마에는 큰 백호가 찍혀져 있다.
두 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으며, 무릎에 놓인 오른손과 어깨까지 치켜든 왼손에 연꽃이
달린 줄기를 들고 있다. 대의 안쪽에 편삼을 걸치고, 오른쪽 어깨에 걸친 대의 자락이 배를
지나 왼쪽 어깨로 넘어가고 끝자락이 엉덩이까지 늘어져 있다. 내의(승각기)는 상단이 자연스
롭게 접혀 있다.

그의 조성 관련 기록은 아쉽게도 남아있지 않으나 그의 스타일을 볼 때, 15~17세기에 조성된
불/보살상과 많이 비슷해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19세기 중기 이
후에 흥천사로 흘러들어와 극락보전 식구가 된 것으로 여겨진다.

불단 식구들 뒤에 조용히 깃든 아미타불도는 1867년에 그려진 것으로 경상도 화승(畵僧)들이
여럿 참여해 19세기 말 경상도 화풍이 만힝 반영되어 있다. 왕실 상궁인 조씨와 안씨, 천씨
등이 고종(高宗) 내외의 안녕과 무강을 빌고자 돈을 대어 만든 것으로 19세기 말 서울 지역
사찰에서 많이 나타나는 왕실과 절과의 후원 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꼽힌다.


▲  확대해서 바라본 금동천수관음보살좌상(보물 1891호)의 위엄

극락보전 보물 중 가장 백미(白眉)는 복잡하게 생긴 금동천수관음보살좌상이 아닐까 싶다. 연
꽃을 든 목조보살좌상보다 덩치는 작으나 무수한 손과 팔의 무리가 관세음보살상 덩치만해 비
록 키는 딸려도 덩치는 목조보살좌상과 비슷해 보인다.

이 보살좌상은 이 땅에서 매우 희귀한 42수 천수관세음보살(千手觀世音菩薩)로 1894년에 작성
된 '삼각산 흥천사 42수(手) 관세음보살 불량시주(佛糧施主)' 현판 기록을 통해 19세기부터
흥천사에 있던 것으로 파악된다. 조성 시기는 정확히 헤아리기 어려우나 얼굴 모습이나 잘록
한 허리 등의 형식을 통해 고려에서 조선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천수관세음은 많은 손과 다양한 지물로 모든 중생을 구제하며 호국적 성격까지 지닌 보살상으
로 신라 중/후기부터 널리 유행한 것으로 보인다. 허나 관련 관세음보살상은 거의 없는 실정
이며, 그림 또한 매우 희귀하다. 이 땅에 몇 없는 존재가 흥천사에 있다는 것은 그만큼 흥천
사가 잘나갔음을 뜻하는데, 원래부터 이곳에 있던 것은 아니며, 19세기 중/후반 흥천사가 급
성장을 거듭하고 있을 때 왕실에서 내린 것으로 보인다. 즉 그의 제자리는 그의 닫힌 입처럼
알 수가 없다.

앞에 두 손으로 합장인을 선보이고 있고, 나머지 손은 각자의 방향에서 제각각 춤을 추고 있
다. 저렇게 손이 많으니 일을 하거나 물건을 들 때는 편하겠으나 손과 팔 동작, 관리는 쉽지
않을 듯 싶다. 그냥 두 손, 두 팔만 있어도 충분하다. 어쨌든 천하에서 매우 희귀한 존재가
흥천사에 있고 늘 이렇게 친견할 수 있으나 마치 유명한 위인을 만난 듯 마음이 뿌듯하다.


▲  흥천사 지장시왕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8호

지장시왕도는 1867년에 의운자우(義雲慈雨)가 그렸다. 푸른 두광(頭光)과 연두색 신광(身光)
을 지닌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그 좌우로 시왕과 명부(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담겨져 있다.

19세기 후반 서울 지역 지장시왕도의 새로운 형식을 연 그림으로 지장보살이 두 손으로 보주
를 들고 있는 점, 그 밑에 선악동자(善惡童子) 2명이 지장보살의 석장(錫杖)을 대신 들고 있
는 점이 기존의 지장시왕도와 다르다. 개운사(開運寺) 지장시왕도(1870년)와 봉국사(奉國寺)
지장시왕도(1885년) 등이 이것을 참조해서 그렸으며, 점차 확대되어 19세기 후반 서울, 경기,
경상도에서 널리 유행했다.
안정된 구도와 홍색을 기반으로 녹색과 청색이 대비를 이루는 색채의 구사력, 세부 문양에서
볼 수 있는 섬세한 표현 등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  현왕도(現王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80호

현왕도는 덥수룩한 검은 수염을 휘날리는 제왕 모습의 염라대왕(현왕)이 그의 부하들을 거느
리고 죽은 자를 심판하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1867년에 조성되었다.
화기는 아쉽게도 없으나 18세기 말~19세기 초에 경북 사불산파 화승인 신겸(愼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19세기 밀 서울과 경기도, 경북 지역에서 유행한 현왕도의 형식을 따르
고 있어 당시 서울 경기 지역과 경북 화승들 간의 교류를 확인해 볼 수 있는 작품이다.


▲  극락보전 신중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07호

신중도는 호법신(護法神)들의 무리를 정신없이 담은 법당 지킴이용 탱화이다. 그림 상단에는
제석천(帝釋天)과 범천(梵天), 일/월대신(日/月大臣), 일궁천자(日宮天子), 월궁천자(月宮天
子) 등 천부세계(天部世界)를 표현하고, 하단에는 위태천(韋太天)과 조왕신(竈王神) 등 여러
무기를 지닌 천룡부(天龍部)를 표현했다.

채색은 적색과 녹색을 중심으로 하여 하늘색 계열의 밝은 청색이 사용되었으며, 위태천의 투
구 및 갑옷. 삼지창, 검과 각종 기물 등에 고분법을 적용하고 금색을 칠했다.
그림 밑에 화기가 있는데 글씨가 조금 떨어져 나가긴 했으나 대허체훈(大虛體訓)과 혜산축연
(惠山竺衍), 학허석운(鶴虛石雲)가 1885년에 조성되었고, 상궁 김씨와 홍씨가 대표 시주자로
나와있어 고종 내외 등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왕실발원 탱화로 여겨진다.


▲  극락보전 극락구품도(極樂九品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05호

극락9품도는 화면을 9개로 나누어 극락세계의 구품(九品)을 그린 것으로 고양시 흥국사(興國
寺)의 극락구품도와 같은 모본(模本)을 사용했다. 대허체훈과 혜산축연, 학허석운 등이 그린
것으로 그들이 1885년에 극락보전 신중도도 제작했으므로 같은 해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  천룡도(天龍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08호

천룡도는 신중도의 축소형 탱화로 위태천과 천룡팔부(天龍八部)가 담겨져 있다. 1898년 용담
(蓉潭)이 초본을 제작했는데, 다른 천룡도와 달리 위태천을 크게 부각시키지 않고 하단의 산
신과 조왕산, 기타 신중이 부각되는 구도를 취하고 있으며, 의복과 기물 등에 금박(金箔)을
사용했다.
인물 묘사에는 섬세한 바림질과 세칠의 묘사로 입체감과 사실성이 돋보이며, 간략히 표현된
옷주름에도 활달한 필력이 엿보인다. 신중도의 일원이나 천룡도 형식은 거의 없으며, 서울에
서는 거의 이곳이 유일하여 19세기 말 서울, 경기 지역의 천룡도 양식을 보여주는 희귀한 존
재이다.

이렇게 극락보전에 지킴이용 탱화가 신중도 외에 천룡도까지 있으니 그들의 협동심으로 극락
보전이 이렇게 무탈했던 모양이다.


▲  극락보전 도량신도(道場神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06호

이름도 생소한 도량신도는 삼보(三寶)의 도량을 지키는 도량신을 머금은 그림이다. 도량신은
화엄경 략찬게(
略纂偈)에 나오는 화엄신중(華嚴神衆)의 일원으로 도량신과 신장(神將) 5명이
각이 진 흰색을 배경으로 정면을 향해 앉아들 있다.
도량신 뒤쪽 좌우에는 산개(傘蓋)와 당번(幢幡)을 든 동자가 있으며, 정면 좌우에는 신장 2명
이 칼과 동그란 지물을 들고 가운데를 향해 서있다. 인상을 잔뜩 쓴 붉은 얼굴의 도량신은 단
령의 붉은 관복을 입고 가슴과 허리에 각각 각대(角帶)를 차고 있으며, 관복에는 주름을 표현
한 먹선을 따라 바람질로 채색하고 입체감을 표현했다.

향우측 신장은 앙발(仰髮)의 귀졸(鬼卒) 모습으로 이마에 검은 띠를 둘렀고, 오른손은 허리춤
에 대고 왼손은 어깨 높이로 들어 둥근 지물을 들고 맨발로 서있다. 향좌측 신장도 앙발의 귀
졸 모습으로 머리에 청색 두건을 쓰고 두 다리를 약간 벌리며 오른손에 긴 칼을 들고 서있다.

이 그림은 대허체훈과 학허석운 등이 그렸는데, 1885년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  연화대감로도(蓮花大甘露圖)
1939년에 그려진 것으로 극락보전 탱화 식구 중 가장 막내이다. 고색이 제대로
여물지 못하여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지 못했는데, 그 시절의 우울했던
생활상은 물론 제2차 세계대전과 태평양전쟁 등 현대식 전쟁 장면까지
들어있어 기존의 감로도와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  극락보전 천정에 깃든 벽화 (노승과 천녀인 듯)
극락보전에 발을 들였다면 고개를 들어 천정을 꼭 살펴보자. 여러 벽화와 문양,
용머리 장식 등이 눈을 즐겁게 해줄 것이다. 이들은 극락보전이 지어진
당시에 조성된 것으로 건물의 품격과 아름다움을 드높인다.

▲  극락보전 천정에 그려진 벽화 (천녀와 동자인 듯)


♠  흥천사 마무리

▲  흥천사 용화전(龍華殿)

극락보전 우측에 자리한 용화전은 막연히 56.7억년 후에나 온다는 미륵불(미륵보살)의 거처이
다. 1967년에 지어진 것으로 원래는 현판이 있는 가운데 칸만 있었으나 나중에 좌우로 1칸씩
넓혀 지금의 특이한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  용화전 식구들
하얀 피부를 지닌 미륵불을 중심으로 하여 오른쪽에 금동 피부의
관세음보살상을, 왼쪽에 여래연지내영도를 두었다.

▲  여래연지내영도(如來蓮池來迎圖)
미륵불 왼쪽에는 마치 추상화처럼 생긴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은 여래(미륵불)가
연꽃이 핀 연지에 왔음을 표현한 것으로 그 자비로움의 향기가 천하에
두루 미치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근래 제작됨)

▲  석가탄신일을 앞두고 간만에 마실을 나온 장엄등(莊嚴燈)들

장엄등은 큰 연등으로 저녁이 되면 스스로를 불사르며 몸을 환하게 밝힌다. 그것이 연등과 장
엄등, 유등의 매력이다. 흥천사 장엄등은 귀엽게 표현된 부처상과 코끼리, 청룡상 등이 있으
며, 서울연등회 제등행렬에도 참여한다.


▲  임시로 지어진 관음전(觀音殿) <2020년 가을 이전>

대방 서쪽에는 갈색 피부를 지닌 관음전이 있다. 대방 정도의 큰 집으로 일반적인 사찰 기와
집과는 다소 거리가 먼 이형적(異形的)인 모습이라 다소 쌩뚱 맞기는 하지만 대방 중수로 인
해 2017년에 임시로 마련한 것이다. 그러니 나중에 대체용 건물이 생기면 이 집은 사라지게
되며 저것이 생전에 마지막 사진이 될 수도 있다.
(관음전은 2020년 10월에 북쪽으로 이전되었으며, 윗 사진의 건물은 철거되었음)

대방에 있던 종무소(宗務所)가 이곳에 들어와 일을 보고 있으며, 강당의 역할도 도맡고 있는
데, 특히 대방에 들어있던 지방문화재 목조관음보살상과 탱화 일부가 이곳에 신세를 지고 있
으니 꼭 둘러보기 바란다. 목조관음보살상을 봉안하여 건물 이름이 관음전을 칭하게 되었다.


▲  관음전 목조관음보살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16호)
아미타불회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09호)


관음전의 주인인 목조관음보살상과 그 뒤쪽에 든든하게 걸린 아미타불회도는 대방에서 넘어왔
다. 대방에도 저들은 한 세트로 있었는데 여기서도 늘 같이 있어 서로의 진한 정을 드러낸다.
꽃이 화려하게 치장된 불단에 장엄하고 있는 관세음보살상은 원래 용왕과 선재동자를 거느린
관음3존상이나 이곳으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좌우 협시상은 다른 곳으로 넘어가고 관세음보살
누님 혼자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보살상은 고맙게도 뱃속에 조성발원문을 품고 있어 조성시기 등 여러 정보를 속삭이고 있
는데, 1701년 전북 임실(任實) 사자산 적조암(寂照庵)에서 조성되었다. 그것이 19세기 중/후
반 이후에 이곳까지 들어와 안그래도 보물로 넘치는 흥천사의 곳간을 더욱 채워준 것이다.

용왕과 선재동자를 협시로 둔 관세음보살은 조각의 경우 법주사(法住寺)와 남해 보리암 정도
를 빼면 거의 없어 매우 가치가 있으며, 근래 그의 뱃속에서 조성발원문과 후령통, 묵서다라
니, 여러 불서(佛書) 등 9건 633점의 복장(腹臟)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하여 '흥천사 만세루
목조관음보살삼존상 및 복장유물
'이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16의 지위를 부여받
았다. 현재는 관세음보살상만 친견이 가능하다. (만세루는 대방의 다른 이름)

관세음보살 뒤에 걸린 아미타불도(阿彌陀佛會圖)는 상궁들의 시주로 1890년에 조성된 것으로
수화승 긍조(亘照)와 만파정익(萬波定翼), 보암긍법(普庵肯法), 혜산축연 등이 조성했다. 화
기에 조성연대는 누락되어 있으나 같은 대방에 있던 신중도를 1890년에 긍조가 제작하여 같은
해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림 중앙에 연화대좌 위에 앉은 아미타불이 두광과 신광을 드러내고 있고, 그 좌우로 연꽃을
든 8위의 보살과 사천왕이 자리해 일제시 아미타불을 바라보고 있다. 특히 비싼 금이 재료로
쓰인 것이 돋보이는데, 그림에 등장하는 이들의 지물에는 금박을, 천의 등 옷 문양에는 금니
(金泥)로 그렸으며, 아미타불 신광에도 금색을 사용해 빛이 반짝반짝 비추는 것 같다.


▲  만세루 신중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10호

만세루 신중도는 관음전의 신세를 지켜 그곳을 지키고 있는데, 제석천과 범천, 위태천 등 온
갖 호법신들이 정신없이 담겨져 있다.
채색은 어두운 암록색과 조금 탁해진 적색을 사용했는데, 삼지창과 검 등 무기와 기물, 관대,
의복에 부분적으로 금을 사용해 그리거나 문양을 넣어 그림이 부분부분 밝아보인다. 극락보전
신중도와 하늘 공간 처리와 색채에서 조금 차이점이 있을 뿐, 도상은 거의 일치하며, 그것을
참조하여 그린 것으로 여겨져 1885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  만세루 제석천도(帝釋天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11호

제석천도 역시 대방에서 넘어온 것으로 제석천이 중심이 된 신중도의 간단 버전이다. 제석천
을 중심으로 천부중(天部衆) 8위와 천녀 등이 빙 둘러져 있는데, 제석천은 두광과 신광을 지
니고 있으며, 정면을 향해 합장인을 선보고 있다.

천부중은 4위가 원유관(遠遊冠) 형식의 관모를 쓰고 있고, 나머지가 방형(方形)과 반월형(半
月形) 일월관(日月冠)을 눌러쓰고 있는데 일월관을 쓴 이는 일궁천자와 월궁천자로 여겨진다.
상단 천부중 옆에는 당번(幢幡)을 들고 과일은 받쳐 든 천녀가 있으며, 제석천 머리 위쪽에는
당과 부채를 든 동녀 2명이 있다.
의복과 관, 광배는 탁한 적색과 암록색이 주조를 이루며, 피부색은 거의 흰색을, 하늘 공간과
관, 의복에는 밝은 청색을 사용했다. 천부중이 들고 있는 홀과 관모에 부분적으로 금이 사용
되었고, 옷 위에 그려진 문양 일부에도 금을 썼다.
1890년에 청신녀(淸信女) 조묘법월(趙妙法月)과 원씨의 시주로 받아 도편수 긍조 등이 조성했으며 신중도의 축소판으로 등장 인물이 단촐한 천룡도와 제석천도가 특별하게도 흥천사에 모
두 들어있으니 흥천사가 범상치 않은 절임을 알려준다. 하긴 시작부터가 범상치 않았고 조선
후기에도 잘나갔으니 오죽하겠는가.


▲  독성각, 북극전으로 인도하는 길

명부전 뒷쪽 언덕에는 독성각과 북극전이 있다. 이들은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경내 중심(극락보전, 대방)과 조금 떨어져 있고, 숲에 진하게 묻혀 있어 경내 중심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구석에서 숨바꼭질을 벌이고 있으니 지나치기도 쉽다.

명부전 뒷쪽에 독성각, 북극전으로 오르는 길이 닦여져 있다. 연등이 대롱대롱 길을 안내하고
있는데, 북극전과 독성각 주변에서 길은 끊긴다. 적조사와 북악산길로 나가는 길을 펜스로 모
두 막았기 때문이다.

▲  비닐막을 씌운 북극전(北極殿)

▲  북극전의 주인, 칠성탱

북극전은 인간의 수명을 관장한다는 칠성(七星)의 보금자리로 귀에 많이 익은 칠성각(七星閣)
의 다른 이름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59년에 지어져 칠성각이라 했다가 북극전으로 이름
을 갈았으며, 기도 수요가 많아서 정면에 비닐막을 씌워 기도 공간을 늘렸다. 건물 내부에는
칠성탱과 산신탱, 산신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산신은 이미 극락보전 옆 바위에 봉안되어 있음
에도 북극전에도 별도로 둔 것을 보면 산신을 크게 대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  칠성탱 옆에 자리한 산신탱과 산신상

▲  독성각(獨聖閣)

북극전과 나란히 자리한 독성각도 앞에 비닐막을 씌워 기도 공간을 늘렸다. 1칸짜리 맞배지붕
집으로 북극전보다 덩치는 작지만 서로 비슷한 모습인데, 1933년 불에 탄 것을 다시 지었으며
독성(獨聖, 나반존자)이 홀로 건물을 지킨다.

▲  색채가 선명한 독성상과 독성탱

▲  흥천사에서 적조사로 올라가는 길
(오른쪽에 보이는 기와집이 삼각선원)


공개를 꺼리는 지방문화재 몇 점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정문화재와 공개된 건물은 싹 둘러보았
다. 간만에 왔지만 지정문화재 일부를 제외하고는 다들 낯이 익지만 오랜 지기처럼 언제 봐도
반갑다.
이렇게 하여 흥천사 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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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2월 1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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