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사진·답사기/서촌·경복궁·경희궁 주변

도봉산고양이 2021. 4. 3. 23:17
서촌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 윤동주 하숙집터



' 서촌의 한복판을 거닐다 '
(박노수미술관~윤동주 하숙집터)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 (박노수가옥)
▲  옥인동 박노수 가옥


봄이 한참 익어가는 4월의 한복판에 일행들과 경복궁(景福宮) 서쪽에 자리한 서촌을 찾았
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깃든 서촌(西村)은 부암동(付岩洞)과 백사실(백사골), 북촌(北村
), 북악산(백악산), 인왕산(仁王山), 북한산(삼각산), 호암산(虎巖山), 아차산 등과 더불
어 내 마음을 제대로 앗아간 곳으로 봄이 겨울로부터 천하를 해방시키면서 다시금 서촌앓
이가 시작되었다.

서촌은 경복궁과 인왕산, 서대문(돈의문) 사이를 일컫는다. 서촌의 중심지로 꼽히는 인왕
산과 경복궁 사이 동네는 원래 웃대라 불렸으며, 인왕산과 북악산(백악산)을 병풍으로 삼
아 경관이 아름답고 계곡이 즐비해 조선 초부터 왕족과 귀족들의 별장지로 인기가 높았다.
양반들 외에 중인(中人)들도 많이 살았으며, 왜정(倭政) 이후에는 윤동주와 이상(李霜),
박노수 등 문학가와 미술가들이 많이 정착하여 현대 예술/문학의 성지로 격하게 떠오르기
도 했다.
특히 조선 4대 군주인 세종(世宗)이 태어난 인연(1397년 출생)을 내세워 세종마을을 칭하
기도 하는데, 서촌의 명성이 나날이 높아지자 없어지기 바뻤던 한옥들도 다시금 늘어나기
시작했고, 서촌을 수식하는 옛 명소를 비롯하여 통인시장과 금천교시장(세종음식거리) 등
의 전통시장도 손질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특히 시장은 서촌을 뛰어넘어 도심의 대표적인
전통시장이자 먹자 골목으로 1주 내내 북적거린다. 또한 서촌에 살던 남정 박노수 화백은
자신의 집과 유물을 흔쾌히 기증하면서 지금은 종로구립미술관으로 거듭나 서촌의 대표급
명소로 크게 주목을 받고 있다.

본글에서는 서촌의 꿀단지가 된 박노수 가옥과 윤동주 하숙집터만 다루도록 하겠다.


♠  서촌의 새로운 활력소이자 근대 화가 박노수의 삶터,
옥인동 박노수 가옥(玉仁洞 朴魯壽 家屋) <종로구립 박노수 미술관>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1호

▲  미술관으로 쓰이는 박노수 가옥

서촌 한복판에 자리한 통인시장에서 옥인길을 따라 수성동계곡으로 가다보면 오른쪽(북쪽) 골
목 속에 서촌의 상큼한 명소로 등극한 박노수 가옥이 자리해 있다. 이곳은 집 이름 그대로 우
리나라 미술계의 원로이자 현대 화가인 남정 박노수의 집으로 인근 이상범(李象範) 가옥과 함
께 현대 미술의 산실이었으며, 2013년 9월 이후 속세에 개방되어 '종로구립 박노수 미술관(이
하 미술관)'으로 새로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
지금이야 속세에 공개된 현대 화가의 옛 집이자 미술관으로 입장료만 주면 누구든 안길 수 있
지만 이 집의 태생은 그리 곱지는 못했다. 바로 친일매국노로 추잡한 이름을 날린 윤덕영(尹
德榮, 1873~1940)이 지은 집이기 때문이다.

윤덕영은 조선의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의 큰아버지로 왜정(倭政)에 적극 협
력하여 나라를 팔아먹고 백성의 고혈을 쥐어짜며 배때기에 기름칠 했던 매국노이다. 그와 같
은 시대를 살았고 친일파로 안좋은 뒷끝을 보인 윤치호(尹致昊) 조차도 '이 비열한 매국노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웹스터 사전에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라며 그의 만행을 꼬집
었다.
허나 사람이기를 포기한 윤덕영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온갖 손가락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온
갖 이권에 개입해 배때기를 불렸고, 집과 땅 욕심도 가히 징그러운 수준이라 송석원(松石園)
을 비롯한 옥인동 일대를 사들여 고래등 양옥 별장인 벽수산장(碧樹山莊)을 짓고, 그 주변에
가족과 첩들을 수용할 14동의 고래등 한옥을 지었다. 박노수 가옥은 그 14동의 하나로 딸과
사위를 위해 이 땅 최초의 근대 건축가인 박길룡(朴吉龍)에게 의뢰하여 1937년경(또는 1938년
)에 지은 것이다.

그런데 박노수 가옥과 미술관 안내문, 홈페이지에도 윤덕영이 지었다는 내용이 모두 빠져있다.
그저 박길룡이 1937년경에 지은 절충식 가옥이라는 점만 강조하고 있다. 윤덕영의 이름 3자가
보기에도 암이 걸릴 지경이고 듣기에도 고약하지만 그렇다고 엄연히 있는 사실을 빼먹는 것도
박노수를 위해서라도 그리 옳지는 못하다.


▲  세상을 향해 활짝 문을 연 박노수 가옥(미술관) 대문

이 가옥은 한옥 양식과 중원대륙 양식, 서양식이 뒤섞인 이른바 절충식 기법의 가옥이다. 2층
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벽돌 건물로 반지하층을 가지고 있으며, 붉은 벽돌로 된 1층에는 온돌
방과 마루, 복도, 응접실이 있고, 하얀 피부로 이루어진 2층은 나무 구조로 지어졌는데, 계단
을 중심으로 마루로 된 방이 널려있다.
그리고 벽난로 3개를 설치하여 온기가 머물 공간을 확보하였고, 집 서쪽에 현관을 두었으며,
벽돌로 포치를 설치하여 집의 운치를 더욱 높였다. 지붕은 서까래를 노출한 단순 박공지붕으
로 되어 있으며, 2층의 증축 부분을 빼면 거의 원형 그대로 잘 남아있다.

박노수가 매국노의 악취가 진동하는 이 집에 들어온 것은 1973년이다. 왜 이곳을 골랐는지는
모르겠으나 스승인 청전 이상범(靑田 李象範)의 집과도 가깝고, 집의 모습도 중후하고 운치가
진해 예술가의 집 분위기로는 아주 좋아 보인다. 게다가 뜨락도 넓고, 인왕산도 가깝고, 도심
과도 매우 가까우니 시내 왕래가 잦았던 그에게도 딱 적당한 장소였을 것이다.
남정은 이곳을 집과 화실로 삼으며 많은 작품을 그려냈으며, 그의 예술적이고 꼼꼼한 손맛이
담긴 뜨락에는 그가 수집했던 수석과 석물, 문화유산을 비롯해 다양한 꽃과 나무를 심어 자연
과 문화, 수석이 어우러진 아주 참한 공간으로 꾸몄다.
 
왜정 때 박길룡이 설계한 건물로 당시 건축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고, 현대 미술화가
인 박노수가 40년 가까이 머물며 작품 활동을 벌였던 현장이라 윤덕영이라는 친일파 괴물이
만든 건물임을 무릅쓰고 1991년 5월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그것도 1호라는 그럴싸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이 점이 참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데 1호나 2호, 100호 등은 그저 지정된
번호일 뿐 가치 순위는 아니기 때문에 그리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1호만큼은
신중해야 된다고 본다. 국보 2호는 몰라도 1호는 누구나 다 아는 것처럼 1호의 의미는 각별하
기 때문이다.
해방이 된지 80년이 되도록 친일매국노 청산은 커녕 그것들이 더 활개치고 있는 이 땅의 현실
을 이 가옥이 보여주는 듯 싶어 마음이 참 쓰라리다.

만약 윤덕영의 후손이 염치없이 계속 서식하고 있었다면 화염병이나 폭탄을 던져 없는 화마(
火魔)라도 억지로 소환해 집과 함께 날려버려야 마땅하겠으나 박노수가 이곳에 살면서 집에
일종의 면죄부가 붙었으니 굳이 때려부실 필요는 없을 것이다. 허나 문화재 지정 후순위로 두
어 천천히 지정을 하던가 등록문화재로 삼는 것이 어땠을까 싶은 아쉬움도 살짝 든다.


▲  무늬가 살아있는 석조대좌(臺座)의 위엄 (현관 앞)
무엇을 받치던 대좌였길래 무늬가 저렇게 요염한 것일까? 허나 대좌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은 채 망연히 뜨락 장식물의 일원이 되었다.
정체성과 역사를 잃어버리는 것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남정 박노수(藍丁 朴魯壽, 1927~2013)의 간략한 생애
박노수는 1927년 2월 17일 충남 연기군(현재 세종시)에서 태어났다. 1940년대에 청전 이상범
의 문하로 들어가 그림을 배웠으며, 해방 이후 서울대 회화과에 진학했다.

그의 작품활동은 주로 국전(國展)에서 이루어졌는데, 1953년 국무총리상, 1955년에 대통령상
을 받았으며, 1957년에는 추천작가를 지냈다. 이후 5.16민족상, 3.1문화상, 대한민국 문화훈
장 등을 받았고, 이화여대(1956~1962)와 서울대(1962~1982)에서 교수를 지냈다.
이후 서울대 명예교수가 되었고, 국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운영위원을 역임했으며, 1995년
자랑스러운 서울시민 60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리고 왜열도 동경과 스웨덴, 미국에 다수의
국제전과 10여 회의 국내외 개인전을 가졌다.

그의 작품은 전통적인 화제를 취하면서도 간결한 문필과 강렬한 색감, 대담한 터치 등 독자적
인 화풍을 구축해 전통 속에서 현대적 미감을 구현한 작가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대표작으로
는 '달과 소년'이 있으며, 많은 작품이 이 미술관에 진열되어 속인들의 정처없는 안구와 마음
을 다독거려준다.

남정은 1973년부터 2011년 말까지 이곳에 살았다. 2011년 죽음이 임박해진 박노수는 집과 소
장품 등 재산의 상당수를 사회에 환원하기로 결심했다. 하여 그해 11월 11일 자신의 집에서
미술계 인사와 후배들, 제자들, 종로구청 관계자 등이 모여 기증협약식을 갖고 약속대로 집과
소장품을 미련 없이 종로구청에 기증했다.
그가 넘긴 물건은 그의 그림을 포함한 미술 작품 500점, 수석과 여러 석물 379점, 오래된 가
구 66점, 개인 소장품 49점 등 총 994점으로 그의 통 큰 기증은 서민의 쪽박까지 빼앗으려 드
는 졸부와 위정자들로 가득한 이 땅에 한줄기 빛과 같은 위대한 업적이었다. 그가 베푼 대인
의 기운은 친일파 집이라는 굴레를 지닌 이 가옥을 180도 달리 보이게 하는데 충분했다.

종로구청은 남정의 뜻에 따라 기증받은 집을 종로구립 미술관으로 꾸미기로 하고 2012년 10월
에 개관하기로 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못해 1년 연기되었다. 그 사이 남정은 그의 소망이던 미
술관 개관을 끝내 지켜보지 못하고 2013년 2월 25일, 86세의 나이로 안타깝게 세상을 뜨고 말
았다.
그가 간 이후, 유족과 종로구청의 노력으로 남정의 손때와 예술혼이 서린 그의 집은 2013년 9
월 11일,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나 세상에 문을 열었다. 개관 기
념전으로 그의 대표적인 작품을 모아 '달과 소년전'을 가졌으며, 종로구 최초의 구립 미술관
으로 이곳이야말로 남정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유작이자 아름다운 선물이다.

나는 근/현대 미술가에는 그리 관심이 없다보니 왜정과 현대를 거쳐간 원로 화가의 하나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의 깊은 부분까지 파고드니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못지 않은 대인으로
그의 이름 3자가 제법 크게 다가온다.


▲  남정의 손에 이끌려 이곳에 정착한 잘생긴 수석들

▲  미술관 개원 기념으로 종로구청장이 남정에게 바친 메세지

▲  미술관 남쪽 뜨락 (동쪽에서 본 모습)

박노수 가옥은 크게 미술관으로 변신한 2층 가옥과 남쪽 뜨락, 그리고 북쪽 벼랑에 설치된 전
망대로 이루어져 있다.
남쪽 뜨락에는 남정이 수집한 갖은 석물과 문화유산, 수석 등이 가득 흩어져 있고, 소나무와
감나무 등 여러 나무와 꽃이 뿌리를 내려 조촐하게 자연과 문화가 잘 버무려진 야외 전시장을
이루고 있다. 특히 그는 수석 취미가 대단하여 뜨락 안팎으로 수석들이 가득한데, 군침이 돌
정도로 잘생긴 돌도 적지 않으며, 그가 도안해서 만든 돌덩어리 원탁과 의자 6기는 가족과 벗
, 제자/후배들과 이야기꽃을 피웠던 정겨운 현장이다.

▲  남정이 도안해서 만든 견고한
돌덩어리의 원탁과 의자

▲  비석의 지붕돌인 가첨석(加檐石)


▲  귀여움과 고색의 때가 묻어난 조그만 호랑이상
어디서 데리고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조선 후기 작품으로 여겨진다.

▲  머리 위에 또다른 머리 장식을 둔 특이한 석등(石燈)
피부가 반질반질하고 머리 장식이 특이한 흔치 않은 석등으로 그의 자세한
사연은 모르겠다. (조선이나 왜정 때 조성된 석등 같음)

▲  남정이 모은 자연산 수석들

▲  키 작은 두충나무와 향로석(왼쪽)
두충나무는 중원대륙이 고향으로 최대 자랄 수 있는 높이는 10m이다. 혈압
강하와 진정/진통 작용에 효과가 좋아 한약재로 많이 쓰이며,
10~11월에 열매가 핀다.

▲  물을 머금은 조그만 돌항아리(돌확)

▲  아직까지 겨울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련한 감나무

▲  양옥란(洋玉蘭)이라 불리는
태산목(泰山木)

▲  뜨락 구석에 자리한 어느 문인석

▲  고된 세월을 머금은 커다란 수석


▲  현관에서 나그네를 마중하는 목조 동자상
이들은 불교식 동자상으로 세월이 달아놓은 주름으로 빛이 좀 바래 보이지만
앳된 표정은 전혀 녹슬지 않았다.


▲  가옥 현관과 여의륜(如意輪) 현판의 위엄

박노수 가옥(미술관)은 포치가 달린 현관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된다. 현관문에서 신발을
벗고 실내화로 갈아타면 되는데, 반지하층을 제외한 1층과 2층 상당수의 방이 개방되어 있다.
1층에는 미술관 사무실이 있고, 박노수의 생애와 그림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달과
소년'을 비롯한 박노수의 그림은 주로 2층을 장식하고 있다. (내부 촬영은 통제됨)

현관문에는 한자로 쓰인 여의륜 현판이 걸려있다. 글씨가 꽤 큼지막하고 패기가 넘치는 모습
으로 옛 박노수의 집에 있으니 그의 글씨로 착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친필이다. 현판에 담긴 여의륜이란 모든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고 세간(世間), 출세간 이익을
더하는 것을 본뜻으로 하는 보살(菩薩)을 의미하는 말로 추사가 말년에 불교에 관심을 가지면
서 서울 봉은사(奉恩寺)와 봉원사(奉元寺), 팔공산 은해사(銀海寺), 해남 대흥사(大興寺) 등
천하의 유명한 절을 많이 돌아다니며 많은 글씨를 남겼다.

현판 우측에는 '승연노인(勝蓮老人)'이란 낙관이 찍혀있는데, 승연노인은 추사의 다른 아호(
雅號)이다. 이 현판을 손에 넣은 박노수는 현관문에 걸어두어 현관부터 미술가의 집 분위기를
진하게 우려냈다.


▲  현관에 놓인 수석
바다에 두둥실 떠있는바위섬의 축소판 같다. (그러고보니 독도와도 비슷하게 보임)

▲  현관 주변에 놓인 수석들

▲  뚜껑이 닫힌 죽은 우물
친일파 윤덕영의 딸 내외와 박노수 가족의 목을 축여주었던 우물로
주변 개발로 수맥이 끊기면서 이제는 껍데기만 남았다.

▲  가옥 동쪽 창고 옆에 자리한 조그만 웅덩이
붉은 빛을 띈 작은 잉어들이 꼬랑지를 휘날리며 웅덩이를 순찰한다. 이 웅덩이는
박노수가 물고기를 기르며 작품을 구상하던 공간으로 웅덩이 위에 걸쳐진
석물의 조각이 마치 살아있는 담쟁이덩굴을 보듯 섬세하고 아름답다.

◀  집 동쪽에 솟아난 늘씬한 소나무
박노수가 생전에 심은 나무로 하늘과 가까운
줄기 끝에 소나무 잎이 덩어리로 몰려있는
모습이 특이하다. 나무의 높이는
거의 가옥 2층 정도 된다.


▲  북쪽 벼랑 전망대로 인도하는 계단

가옥 북쪽에는 수풀이 우거진 가파른 벼랑이 있다. 예술과 문학의 향이 깃든 가옥답게 대나무
도 삼삼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 벼랑에 계단과 숲길을 내었고, 그 길의 끝에는 무려
전망대까지 두었다. 아무리 큰 기와집이나 근대 양옥이라고 해도 뜨락에 전망대까지 둔 경우
는 찾아보기가 힘든데, 집 북쪽이 언덕이라 그 경사를 활용해 숲길과 전망대를 설치하고 중간
중간에 석물을 배치해 고즈넉한 산책로를 내었다. 이 언덕 산책로와 전망대야말로 박노수 가
옥만이 가진 강한 매력이자 백미라 칭할 만하다.

산책로 입구에는 고색의 때가 자욱한 조그만 석인이 홀을 쥐어들며 안내인처럼 자리하고 있다.
제자리를 잃고 방황하는 그를 남정이 이곳으로 데리고 온 것인데, 고향을 잃은 충격 때문일까
? 석인은 좀처럼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긴 이곳에 이끌려온 석조 문화유산 모
두 제자리를 잃은 가련한 처지이다. 사람이 들을 수 없는 그들만의 속삭임으로 고향을 잃은
동병상련의 한을 달래지는 않을까?
투박하게 닦여진 돌계단을 오르면 북쪽으로 난 아주 짧은 샛길이 있는데, 대나무로 둘러싸인
그곳에는 돌의자가 놓인 조그만 쉼터가 있다. 그리고 숲길을 마저 오르면 나무로 지어진 전망
대(전망데크)가 나타난다.

▲  대나무에 감싸인 북쪽 샛길 쉼터

▲  숲길에서 만난 석등


▲  숲길 끝 벼랑에 자리한 전망대
숲길과 돌의자, 석물은 박노수 시절의 것이고, 전망대는 2013년에 단 것이다.

▲  전망대에서 바라본 가옥의 뒷모습과 지붕
건물의 모습은 양옥이지만 지붕만큼은 거의 한옥 스타일이다. 매국노 윤덕영이
14동의 한옥을 지을 때 자신의 살 벽수산장을 제외하고 모두 한옥으로
지었으면서 왜 딸의 집만 이렇게 이채로운 모습으로 지어주었을까?

▲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가옥 굴뚝
지붕에는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굴뚝 5개가 뿔처럼 솟아나 집의 멋스러움을 한층
수식한다. 1층 지붕에는 2개, 2층에는 3개가 달려있는데, 이중 3개는
벽난로용, 나머지는 부엌용이다.

▲  현관 앞에서 바라본 미술관 정문
조금씩 숨겨진 끼를 드러내며 경쟁자 북촌을 긴장시키는 서촌, 박노수 미술관은
바로 그 서촌의 새로운 활력소이자 허브이다. 평일임에도 제법 많은 이들이
찾아와 짧은 시간에 비해 너무 떠버린 이곳의 높은 인기를 실감케 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168-2 (옥인1길 34, ☎ 02-2148-4171)


♠  너무 일찍 져버린 천재 시인 윤동주(尹東柱)의 하숙집터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에서 수성동계곡으로 조금 가면 길 왼쪽(남쪽)에 윤동주하숙집터를 알
리는 금색 피부의 안내문이 있다. (종로구 누상동 9번지)

※ 윤동주(1917~1945년)의 간략한 생애
윤동주는 왜정 시절의 대표급 시인으로 그의 이름 석자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중/
고등학교 국어/문학 교과서에 서시를 비롯한 그의 굵직한 작품들이 정말 지겹게 나오니 말이
다. 지금도 이름이 또렷한 윤동주는 1917년 12월, 두만강(豆滿江) 이북인 북간도(北間島) 명
동촌(明洞村)에서 윤영석()과 어머니 김룡()의 아들로 태어났다.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대랍자()학교를 다니던 중 용정(龍井)으로 이사를 가면
서 1933년 그곳 은진()중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다가 1935년 조선 본토로 넘어와 평양 숭
실(崇實)중학교에 들어갔으나 신사참배 문제로 왜정에 의해 강제로 학교가 문을 닫으면서 다
시 용정으로 돌아가 광명(光明)학원의 중학부를 졸업했다.
이후 남쪽으로 내려와 서울 연희전문학교(연세대) 문과에 진학하여 1941년에 졸업했는데, 학
교 기숙사의 식사가 부실해지면서 후배 정병욱(鄭炳昱)과 함께 누상동에 하숙집을 얻어 잠시
살다가 그해 5월 그믐날에 다른 하숙집을 알아보고자 옥인동으로 내려오던 중, 우연히 전신주
에 붙어있던 하숙집 광고 쪽지를 보았다.
하여 그 집을 찾아가니 문패에는 '김송(金松)'이라 쓰여 있었다. 마침 그는 소설가 김송을 존
경하고 있었는데, 설마 그 김송? 생각하며 문을 두드리니 글쎄 그 김송이 나타난 것이다.

그렇게 해서 김송 집에 들어가 4개월 정도(1941년 5월~9월) 하숙을 했는데, 저녁 식사가 끝나
면 김송 가족과 대청에서 차를 마시며 음악을 즐기거나 문학 이야기를 나누었고, 때로는 성악
가인 김송 부인의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듣기도 했다.
김송 집에 머무는 동안 인근 자하문고개를 수시로 올라가 시를 구상했다고 하며, 그 현장이
바로 윤동주시인의 언덕이다. (☞ 관련글 보러가기) 또한 이때 많은 시가 쓰였는데, 마음을
주고 받는 글벗이 곁에 있고, 자신이 존경하는 이의 집에 머물며 그의 가족에게 호의를 받으
니 마음도 흔쾌히 즐거워 덩달아 작품 구상도 잘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붓도 흥분하여 좋은
시가 나오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1941년 9월, 김송과 작별하고 왜열도로 넘어가 동경(東京) 릿쿄(敎)대학 영문과에 들어갔으
며, 1942년 도시샤대학(同學) 영문과로 자리를 옮겼다. 허나 1943년 7월 학업을 멈추고
잠시 고향으로 가다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왜경에 급히 체포되었다.
왜경은 그에게 변론의 기회도 제대로 안주고 징역 2년형을 때려 후꾸오카 형무소에 집어넣었
는데 거기서 잔인한 생체 실험의 희생자가 되어 결국 해방을 목전에 둔 1945년 2월, 회한의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28세였다. 목격담에 따르면 그는 정체를 알 수 없
는 주사를 계속 강제로 맞았다고 하니 결국 왜국의 비인간적인 만행에 천재시인 윤동주는 제
대로 꽃도 피우지 못하고 강제로 눈을 감게 된 것이다.

윤동주는 그의 조부(祖父)의 영향으로 시에 천재적인 소질을 발휘했다. 그의 동생인 윤일주(
)와 당숙인 윤영춘()도 시인이었다고 하니 그의 집안은 문학적 소질이 다분한 지
식인 집안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15살에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첫 작품은 '삶과 죽음'과 '초한대'이다. 이후 '병아리(
1936년 11월)','빗자루(1936년 12월)''오줌싸개 지도(1937년 1월),'무얼 먹구사나(1937년 3월
)','거짓부리(1937년 10월)' 등을 간도 연길(延吉)에서 발간된 '카톨릭소년'이란 잡지에 소개
했다.
연희전문대학 시절에는 조선일보에 '달을 쏘다'를 냈고, 학교 교지 '문우(文友)'에 '자화상'
,'새로운 길' 등을 실었다. 그리고 '쉽게 쓰여진 시'가 1946년 경향신문에 실렸다.

누상동(樓上洞) 김송의 집에서 하숙을 하던 1941년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란 제목으로 시
집을 내려고 했으나 내지 못하고 대신 3부를 필사해 정병욱과 이양하(李敭河)에게 1부씩 증정
했다.
바로 그 시집의 서문(序文)으로 지어진 것이 그 유명한 서시로 1948년에 이르러 정병욱과 윤
일주에 의해 정음사에서 출간되었다.

그의 시는 청소년 시절에 지은 시와 성년 이후의 시로 구분할 수 있는데, 청소년기에 쓰여진
시들은 암울한 분위기를 담고 있고 대체로 어린 시절 평화를 지향하는 현실 분위기의 시가 많
다. 대표작으로는 '겨울'과 '버선본' 등이 있다.
그리고 연희전문학교 시절에 쓴 시는 자아성찰의 철학적 감각이 강하고, 왜정 시절 민족의 암
울한 역사성을 담은 시가 주류를 이루니 '서시','자화상','또 다른 고향','별헤는 밤'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그의 대표 시로 어둠의 시절에 깊은 우수 속에
서도 티없이 순수한 인생을 살아가려는 그의 내면 세계를 표현했다.

그는 비록 뜻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나보다 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떴지만 그의 시는 우리
나라 뿐 아니라 왜열도와 중원대륙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적지 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특히 그가 다닌 릿쿄대학과 도시샤대학에는 그를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어 해마다 많은 이
들이 헌화를 하고 그를 기린다. 만약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아시아를 뛰어넘는 세계 문학계
의 큰 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윤동주가 세상을 뜨자 그의 시신을 간도 용정으로 옮겨 묘를 썼다. 허나 그 무덤도 한때 위치
를 몰라 방황하다가 연길대학교에 교환교수로 온 왜인 교수의 노력으로 간신히 묘비를 찾았다
. 이후 우리나라와 중원대륙를 점거한 공산당 정부가 국교를 맺자 가족들은 봉분을 단장하고
묘비도 새로 세웠으며, 그의 명동촌 생가는 1994년에 복원되었다. 또한 그가 다닌 명동소학교
는 윤동주 관련 단체의 지원으로 옛 건물을 복원하여 윤동주기념관으로 거듭났다.

우리나라에 참으로 굵직한 시인들이 많지만 윤동주만큼 인기와 사랑이 큰 시인도 손에 꼽을
것이다. 우리나라를 넘어 다른 나라에서도 그의 팬들이 많으니 말이다. 비록 왜의 잔악무도한
만행으로 일찍 눈을 감았지만 그의 작품을 통해 그의 혼은 우리들 마음 속에 길이길이 깃들여
져 있으며,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촉촉히 적셔주는 영원한 문학신(文學神)이다.

김송의 집은 개량한옥으로 1970년대까지 있었으나 이후 개발의 이슬로 사라지고 현재는 3층
주택이 들어섰다. (안내문 사진에 1970년대에 찍은 김송집과 앞 골목길이 나와있음) 그나마
윤동주하숙집터 안내문도 2014년 이후에 비로소 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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