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 사진·답사기/인천광역시

도봉산고양이 2021. 5. 5. 05:42


1. 문학산 정상(217m)에서 바라본 연수구와 남동구 지역, 인천신항

인천의 남쪽 지붕이자 오랜 진산인 문학산 정상에 올라서면 연수구와 남동구, 미추홀구, 동구, 중구, 서해바
다 등 인천 본토의 절반 정도가 두 눈에 들어와 일품 조망을 자랑한다.

2. 문학산 정상에서 바라본 연수구, 송도국제도시 지역

3. 문학산 정상에서 바라본 연수구 서부 지역과 송도국제도시, 청량산

4. 문학산 정상부 외곽

5. 2015년 10월 15일 문학산 정상이 해방된 기념으로 세워진 '문학산을 되돌아보다' 안내문 

6. 문학산 정상부
문학산은 높이는 낮지만 정상부만큼은 무지 넓다. 

7. 문학산역사관

문학산 정상에 자리한 문학산역사관은 이곳에 있던 군시설 건물을 손질한 것으로 비류의 미추홀시대부터
백제, 신라, 고려, 조선, 왜정,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문학산을 거쳐간 역사를 다루고 있다. 이곳에 왔다
면 문학산의 이해도 도울 겸, 꼭 둘러보기 바란다. 관람시간도 별로 안걸린다. 

8. 문학산성

문학산에 깃든 늙은 흔적 중 가장 비중이 큰 것이 문학산성이다. 정상 봉우리를 돌로 둘러싼 약 587m의 테
뫼식 산성으로 현재 남아있는 구간은 232m에 불과하다. 그것도 겨우 얇게 남아있고 산길에서 조금 떨어져

있어 나는 산성의 흔적을 제대로 더듬지 못했다.
성내 면적은 약 20,800평방미터로 비류가 미추홀에 정착해 닦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6~7세기에 신라
가 쌓았다는 설과 백제가 토성으로 지은 것을 후대에 석성으로 손질했다는 설이 크게 설득을 얻고 있다.
인천고을 중심지(관교동 지역) 남쪽에 자리하여 남산석성, 남산고성이라 불렸으며, 그 외에 인천산성, 미추
홀고성, 문학산고성, 문학고성, 비류성, 에분성 등 많은 이름을 지니고 있다. 

산 정상부에는 봉수대가 있었고, 서쪽에 서문, 동쪽에 동문, 동북쪽에 우물이 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6.25시절 인천상륙작전 때 국군과 연합군이 이곳을 탈환했고 1962년부터 50년 가까이 미군과 국군이 이곳

에 주둔하며 인천을 지켰다. 그러다가 2013년 군부대 상당수가 철수를 했고, 2015년 10월 15일 속세에 개
방되어 비로소 자유의 공간이 되었다. 허나 인천 수호의 성격은 아직 남아있어서 아침부터 오후 늦게 일몰
까지만 문을 열어둔다. 그러니 문학산 정상을 가고 싶다면 햇님이 천하를 비추는 낮에 가기 바란다. 

9. 문학산 정상부와 문학산성 조감도

10. 문학산 절터와 돌덧널무덤

1949년 인천시립박물관장인 이경성이 문학산 일대를 조사하여 고려시대 절터를 여럿 건졌다. 허나 절터 이
름이 전하지 않아 절터가 발견된 산의 이름을 따서 임시로 문학사지, 연경사지, 길마사지란 이름을 붙였다.
절터 유적에서 건물터와 기와, 토기편이 여럿 나왔으며, 문학산에서 조금 떨어진 학익동 학림사터(현 학익
초교)에서는 '연우사년삼월중수'란 글씨가 새겨진 기와편이 나와 학림사가 1317년에 중수되었음을 알려주
고 있다. (이들 절터 유적은 모두 방치되고 있으며, 학림사터에는 학익초교가 들어앉음)
그리고 산 남쪽 자락인 청학동 연경산 팔각정 일대에서는 돌덧널무덤 8기와 무덤에 쓰인 것으로 여겨지는
석재들이 나와 보존되고 있다. (청학동 돌덧널무덤)

11. 조선시대 인천도호부와 문학산 지도 
가운데 부분이 인천 고을(인천도호부) 중심지이고, 그 아래가 문학산이다. 

12. 문학산의 옛 이야기

삼호현(사모지고개)과 산신우물, 갑옷바위, 베바위 이야기 등

13. 광복 이후의 문학산

1945년 광복 이후, 미군의 군사훈련장으로 쓰였으며, 6.25 시절 인천상륙작전 때 상륙지점의 하나인 청색해
안(blue beach)의 마지막 종착점이었다.

1962년부터 1979년까지 미군이 이곳에 머물면서 유류보급부대와 미사일부대를 두었고 1979년부터 국군이
주둔해 2015년까지 이곳을 지켰다. 그러다가 2015년 10월 해방되어 지금에 이른다. 

1949년 인천시립박물관 초대 관장인 이경성의 인천고적조사보고를 계기로 향토사 연구자들의 관심과 노력

으로 1958년 문학산성 동문을 복원하고 인방석에 '문학산성 동문'이란 글자를 새겼다. 그리고 도천현에서
산성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십제고도 문학산성'이란 표석을 세웠지만 군부대가 주둔하면서 문학산 문화유
산에 대한 관심과 발굴은 중단되고 만다.

14. 지금보다 많이 홀쭉했던 1950~60년대 인천 지도
인천 고을의 중심지는 문학산 북쪽 관교동 지역이었다. (부평구와 계양구 지역은 부평도호부 관할이었음)
구한말과 왜정 때 중구, 동구 지역이 개발되면서 인천의 중심지는 중구로 넘어갔고, 그로 인해 관교동과
문학산은 변두리 시골로 밀려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