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사진·답사기/강서구(가양동)·양천구

도봉산고양이 2021. 6. 7. 08:34


1. 개화산 약사사 3층석탑

개화산 동쪽 자락에 안긴 약사사는 강서구의 대표적인 고찰이다. 창건시기는 개화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
나 신라 후기에 개화산을 주름잡던 주룡이 세상을 뜨자 매년 9월 9일마다 그가 술을 마셨던 자리에서 이상
한 꽃이 피었고, 그 자리에 절을 세우니 그것이 약사사의 전신인 개화사라는 것이다.
하여 이 믿거나말거나 설화와 1827년에 송숙옥이 작성한 '개화산약사암 중건기','양천읍지'를 통해 신라 때
창건된 것으로 보고 있으나 이를 입증할 기록과 유물은 없는 실정이다. 개화산약사암중건기와 양천읍지는
약사사가 알려준 내용을 그대로 썼기 때문이다. 다만 경내에 고려 때 석탑과 석불이 있어 적어도 고려 중/후
기부터 법등을 켠 것으로 여겨진다. 

창건 이후 오랫동안 적당한 사적을 남기지 못했으며, 조선 초기에 제작된 동국여지승람에 개화사로 나와 예

전 이름이 개화사였음을 알려준다. 
1737년 좌의정 송인명이 절을 크게 중수하여 송씨 가문의 원찰로 삼았는데, 가난했던 어린 시절 여기서 절
의 넉넉한 대접을 받으며 공부를 했고 과거에 붙은 인연이 있다. 이후 재상에 오르자 자신이 큰 것은 개화사

의 덕이라며 절을 중수하고 절 밑에 불량답을 보시했다. 또한 영조 때 그와 가깝게 지냈던 이병연이 개화사
와 송인명과의 끈끈한 사이를 '사천시초(槎川詩抄)'란 시로 표현했다.

 봄이 오면 행연(杏淵) 배에 오르지 마오
 손님이 오면 어찌 꼭 소악루(小嶽樓, 가양동에 있었음)만 오르려 하나
 책을 서너 번 다 읽은 곳이 있다면
 개화사에서 등유(燈油)를 써야지.

또한 진경산수화로 유명한 겸재 정선이 이병연의 시를 보고 개화사를 찾아가 그림을 남겼는데, 그는 1740
년부터 5년 동안 양천현감으로 있으면서 개화사와 소악루를 비롯한 양천의 명승지를 아낌없이 화폭에 담
아 당시의 정취를 아련히 알려준다.

1799년 송인명의 후손인 송백옥이 절을 중수하고 중수기를 남겼으며 1827년 절이 퇴락하자 처사 창선과
청신녀 경자가 돈을 모아 기존 자리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으로 절을 옮겼고 석불입상을 약사여래불로 삼
으면서 절 이름을 약사암으로 갈았다. (이후 약수사, 약사사 등으로 변경됨)
1911년 봉은사의 말사가 되었고, 1928년 주지 박원표가 약사전을 새로 지었으나 6.25 때 개화산이 치열한
격전지가 되면서 건물이 모두 파괴되었으며, 가건물로 간신히 자리를 유지하다가 1984년 이후 대웅전과 감
로당, 삼성각을 지어 지금에 이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감로당, 삼성각, 범종각 등 5~6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크게 지
어진 감로당은 요사와 종무소의 역할을 하고 있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석불입상과 3
층석탑이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대변해주며, 석불은 영험이 있다고 전해져 기도 수요가 제법 많다. 허나 경
내에서 이들 외에는 고색의 향기는 전혀 없다. 
또한 경내 밑에는 개화산의 오랜 명물로 꼽히던 약수터가 있었는데 이 물을 마시면 병이 낫는다고 하여 중
생들의 인기가 대단했다. 이 약수터 때문에 절의 이름이 한때 약수사가 된 적도 있을 정도.. 허나 1990년대
이후 계속되는 부적합 판정으로 수요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끝내 부적합을 극복하지 못하고 2013년 봄에 
완전 폐쇄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2. 허공을 가득 메운 연등 구름과 그 밑에 갇힌 3층석탑 (약사사 3층석탑)

대웅전 뜨락 한복판에 이곳에서 가장 늙은 존재인 3층석탑이 있다. 탑 높이는 4m로 땅에 바닥돌을 깔고 1
층 기단과 3층 탑신을 얹혔으며, 머리장식은 사라진 것을 근래에 새로 붙여 고색의 때가 만연한 아랫 부분
과 전혀 다른 피부색을 보인다.

탑은 길쭉하고 홀쭉한 모습으로 기단이 1층으로 간략화 되었고, 옥개석의 밑면 받침이 형식적으로 새겨져 
있어 고려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이를 통해 약사사가 적어도 고려 중/후기에 창건되었음을 알려

주고 있으며, 고려 중기 이후 탑의 변천 과정을 알려주는 자료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또한 서울에 몇
남지 않은 오래된 토박이 석탑의 하나이기도 하다. 

3. 옆에서 바라본 3층석탑과 새로운 하늘을 이루고 있는 오색연등

4. 약사사 삼성각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삼성각이란 이름 그대로 산신과 칠성, 독성
의 공간인데, 이곳에 봉안된 칠성탱과 산신탱은 1960년에 조성된 것으로 경내에서 가장 늙은 탱화이다. 

5. 대웅전에서 바라본 뜨락 (가운데가 3층석탑)

6. 대웅전 옆구리에 있는 석조지장보살상
미륵석불의 모자를 쓰고 있는 지장보살상은 오른손에 그의 지물인 육환장을 쥐고 있고, 왼손에는 어린 아기
를 안고 있다. 지장보살이 승려 대머리로 있는 경우는 많이 봤으나 이렇게 미륵석불 스타일의 모자를 쓴 것
은 처음 본다. 

7. 대웅전 내부 (약사사 석불입상)

장엄하기 그지 없는 대웅전 불단에는 1기의 석불과 7기의 불상/보살상이 있다. 그 뒤에는 조그만 금동불
이 거대한 병풍을 이루고 있는데, 거의 3천불이라고 한다. 모든 것이 금동 피부 일색인 곳에 홀로 빛바랜 
돌피부로 이루어진 아주 큰 불상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가 경내에서 3층석탑 다음으로 오래된 석
불입상이다. 

8. 약사사 석불입상 (대웅전 내부)

대웅전의 주인장인 석불입상은 머리에 쓴 돌갓 밑에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이를 통해
고려 후기, 아무리 늦어도 조선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약사사의 든든한 밥줄로 '개화산약사암 중건기'에 일장미륵으로 등장한다. 불상의 정체에 대해서는 의견들
이 많으나 가슴 앞에 댄 두 손에 연꽃가지를 들고 있어 관세음보살로 여겨지기도 하며, 불상의 투박한 모습
을 통해 고려와 조선 때 온갖 모습으로 재현된 미륵불로 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그를 약사여래

불로 삼으면서 절 이름을 약사암으로 갈았으며, 현재도 영험한 약사여래불로 애지중지한다.

이 석불은 현재 위치 바로 옆에 있었던 건물에 있었는데, 밑도리는 땅속에 묻혀 있었다. 그러다가 1974년에
그 건물을 부시고 대웅전을 조성하면서 불상 밑에 기단석을 만들어 편의를 제공했다. 
불상의 얼굴은 길고 넓적한데, 경직된 인상에 두 눈은 너무 크고, 코는 세모로 오똑하나 코 끝은 크게 닳아
진 상태이며, 입은 그 모양만 확인이 가능하다. 두 귀는 어깨까지 축 늘어져 있어 중생의 고충을 듣기에는 
별 지장은 없어 보이며, 머리에는 둥근 돌갓을 쓰고 있는데, 지방에 있는 미륵불에서 많이 보이는 모습이다. 
어깨가 얼굴에 비해 너무 작고, 옷도 옷주름 몇 가닥이 표현된 것이 전부이다. 두 손은 가슴 앞에 대고 연꽃
가지를 들고 있어 꽃을 든 불상의 이미지를 주며, 밑도리는 앞에 있는 금동석가여래상과 불단에 가려져 확
인이 어렵다. 그렇다고 실례를 무릅쓰고 확인하기에도 좀 그렇다. 
썩 괜찮은 작품은 아니지만 보면 볼수록 끌리는 존재로 소망을 들어주기로 명성이 자자해 많은 이들이 찾아
와 소망과 고충을 털어놓는다. 약사사가 지금에 이른 것도 그의 공이 크다.

9. 옆에서 바라본 약사사 석불입상

10. 옆에서 바라본 대웅전 식구들 (석불입상과 금동불, 금동보살상들)
저 많은 존재 중에서 딱딱한 돌 피부의 석불입상이 단연 돋보인다. 

11. 약사사 감로당

3층석탑을 사이에 두고 삼성각을 바라보고 선 감로당은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경내에
서 가장 큰 집으로 요사와 종무소의 역할을 맡고 있으며, '甘露堂' , '開花山 藥師寺' 현판은 승려 석정의 필
체이다. 툇마루를 갖추고 있어 잠시 두 다리를 쉬기에 좋으며, 벽면에는 십우도와 혜능 이야기, 백락천과
도림선사 이야기 등이 그려져 있다.

12. 약사사의 법당인 대웅전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대웅전은 이곳의 법당으로 1988년에 중건되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
물로 지붕을 청기와로 수를 놓아 웅장함과 화려함을 동시에 뽐낸다.

13. 동쪽에서 바라본 대웅전 뜨락과 5층석탑, 연등 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