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사진·답사기/도봉구·도봉산(무수골)

도봉산고양이 2021. 7. 23. 04:43
서울 도심의 상큼한 뒷동산이자 조선시대 공동묘지, 초안산 나들이 (초안산 분묘군)



' 서울 도심의 상큼한 뒷동산이자 조선시대 공동묘지, 초안산 '

초안산 숲길

▲  봄이 무르익은 초안산 숲길

초안산의 조선시대 무덤들 비석골근린공원

▲  초안산 조선시대 분묘군

▲  비석골근린공원


봄이 한참 무르익던 4월 한복판의 어느 화창한 날, 집에서 무척 가까운 초안산(楚安山)을
찾았다.

초안산(114.1m)은 도봉구 창동(倉洞)과 노원구 월계동(月溪洞)에 걸쳐있는 야트막한 뫼로
내가 서식하고 있는 도봉구(道峰區)의 남쪽 끝을 붙잡고 있다. 모래와 진흙으로 이루어진
흙산으로 산세는 아주 느긋하며, 서쪽에는 우이천(牛耳川)이, 동쪽에는 중랑천(中浪川)이
흘러 마치 산을 둘러싸고 도는 모습이다. 그러다보니 동쪽과 서쪽은 자연히 배산임수라는
착한 지형을 띄면서 무덤이나 마을, 집 자리로는 아주 그만이다. 그래서 초안산 주변에는
안골, 녹천, 벼루말, 각심사 등 여러 마을이 둥지를 틀었다. (현재는 개발의 칼질에 모두
날라가 이름만 희미하게 남아있음)
또한 조선시대에는 한양도성 밖 10리 안<성저십리(城底十里)>에는 대놓고 무덤을 닦을 수
가 없어 천상 도성 10리 밖에 무덤을 써야 했는데 배산임수의 조건을 지닌 초안산이 10리
밖에서 가장 가까운 것이다. 그런 조건들이 묘하게 맞아 떨어져 구파발의 이말산(莉 茉山)
과 더불어 서울 사람들의 공동묘지가 되었다.

이곳에는 양반사대부부터 내시, 상궁, 중인, 서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이 신분을 초
월하며 묻혀 있는데, 지금까지 확인된 조선시대 무덤만 1,100여 기에 이르러 천하 최대의
조선시대 공동묘지를 이루게 되었다. 산 전체가 거의 무덤밭인 것이다. (무덤은 20세기까
지 들어섰음) 초안산이란 이름도 죽은 이들의 편안한 안식처를 정한다는 뜻이니 그야말로
이곳에 딱 어울리는 이름이라 하겠다.
비록 서울 지역 최대의 조선시대 공동묘지란 조금은 후덜덜하고 우울한 성격을 가지고 있
지만 그 덕에 2000년 이후 조금씩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조선시대 무덤 양식과 변천
을 한 자리에서 더듬을 수 있는 소중한 현장으로 뒤늦게 인정을 받으면서 '서울 초안산분
묘군'이란 이름으로 국가 사적 440호로 지정되었다. <산 전체가 아닌 무덤이 몰려있는 곳
들이 사적으로 지정됨, 사적으로 지정된 면적은 319,503㎡>
초안산에 안긴 무덤 가운데 내시 무덤이 무려 100여 기에 이르러 '내시산(內侍山)','내시
네 산'이란 별명도 지니고 있다. 그들의 무덤은 거의 서쪽(서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
는 그들이 일했던 궁궐과 충성을 바쳤던 제왕이 서쪽<정확히는 서남쪽~>에 있어 죽어서도
그 일편단심을 보이고자 함이라 한다.

그렇게 산을 가득 뒤덮은 무덤들은 아쉽게도 예안이씨묘역(정간공 이명 묘역) 등 극히 일
부를 제외하고 관리 소홀과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사람들의 못된 손장난 등으로 적지
않게 고통과 파괴를 당했다. 하여 형체를 온전하게 남긴 무덤은 별로 없으며 문인석과 상
석, 묘표 등 석물만 일부 남아있거나 납작해진 봉분이 고작인 무덤이 태반이다. 그러다보
니 주인을 알 수 없는 무덤이 태반이다. 
다행히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나라와 관할 구청(도봉/노원구)의 보호를 받게 되어 고
통도 많이 줄었지만 워낙 무덤이 많다보니 그 관리도 여간 어렵지가 않다.

초안산은 북한산(삼각산)까지 산줄기가 이어져 있었으나 천박한 개발의 칼질이 그 주변을
마구 들쑤시면서 서로 끊긴 상태이다. (산줄기의 윤곽만 남아있음) 게다가 내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인 1971년 '초안산 근린공원'으로 지정되었음에도 행정관청의 오랜 무관심과 관
리 소홀로 적지 않은 살을 인간에게 내주면서 그 영역도 많이 줄어들었다. 다행히 서울시
가 늦게나마 정신을 차리면서 1990년대 후반부터 자연의 기운이 많이 살아났다.
그 결과 맹꽁이, 무당개구리, 청개구리 등 다양한 양서류와 파충류가 안기는 공간이 되었
으며, 2006년에는 서울에서 최초로 멸종위기종인 표범장지뱀이 발견되기도 했다. 도시 한
복판에 외로이 자리한 초안산에서 말이다. 또한 2012년에는 생태계 복원 차원에서 두꺼비
, 도룡뇽, 산개구리 등 3종 1,500여 마리를 방사하기도 했다.
한때 골프연습장이 이곳에 숟가락을 얹히고자 난리법석을 피우기도 했으나 지역 주민들의
노력으로 산을 지켰다. 그만큼 창동, 월계동 사람들의 소중한 쉼터이자 꿀단지로 뿌리 깊
게 자리를 잡은 것이다.

초안산은 녹천역(1호선)과 창동주공3단지, 창동주공4단지, 도봉문화정보도서관 서쪽 생태
다리, 창3동어린이집, 초안1단지아파트, 비석골근린공원, 청백1단지, 초안산체육공원에서
올라가면 된다. 정상까지는 넉넉잡아서 15~30분 정도 걸리며, 창동주공3단지에서 오를 경
우에는 30~40분 정도 잡으면 된다.

초안산에는 조선시대 무덤군을 비롯해 비석골근린공원과 각심재, 정간공 이명 묘역, 허공
바위, 잣나무숲, 세대공감공원, 초안산공원캠핑장 등의 명소가 있으며 축구장과 배드민턴
장 등의 체육시설도 닦여져 있다.
아직까지는 인지도가 낮아 지역 사람들이 주로 찾는 쉼터이자 명소로 머물러 있으나 주머
니 속의 뾰족한 송곳처럼 언젠가는 서울의 잘나가는 명소로 거듭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다. 게다가 늙은 무덤들이 산자락과 산길 도처에 헝클어진 모습으로 흩어져 있으니 내 염
통 상태도 체크하고 소소하게 납량특집도 즐길 겸, 한여름 밤에 야간 산책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달님도 등을 돌린 어둑어둑한 밤이면 효과가 더 좋을 듯 싶다. 혹시 아는가 무덤
이나 문인석 등에서 귀신 형님이나 누님이 확 튀어나와 반가이 맞이해줄지도??


▲  녹천역에서 초안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산길


♠  초안산 둘러보기 (녹천역에서 정상 주변까지)

▲  봄이 시정(詩情)을 뿌리는 초안산 산길 (녹천역에서 정상 방향)

녹천역(1호선) 1번 출구를 나오면 초안산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손짓을 한다. 경사도 느긋하여
그리 힘든 것은 없으며, 개나리와 진달래, 벚꽃은 다양한 색채로 봄 풍경의 아름다움을 돕고
나무들은 녹색 옷을 걸치며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들이 없다.
봄이 겨울 제국(帝國)을 힘겹게 몰아내고 따스한 기운으로 천하를 해방시키니 세상만물의 찬
양과 우러름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그 봄이 너무 짧다는 것. 봄이 되기가 무섭게 겨
울에 상반되는 여름 제국이 천하를 삼키니 말이다.


▲  느긋한 산길의 정석, 초안산 산길 (녹천역에서 정상 방향)

▲  초안산 북쪽 능선길 ▼

녹천역에서 초안산 정상으로 오르는 산길에는 오래된 무덤이 없다. 중간에 생태공원으로 거듭
난 세대공감공원과 창동4단지로 내려가는 산길이 실핏줄 만큼이나 복잡하게 엉켜 있으며 이정
표가 많이 부실하여 잘 골라서 움직여야 된다.


▲  초안산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 초안산 정상

녹천역에서 20분 남짓 오르니 드디어 초안산 정상(114.1m)에 이르렀다. 정상에는 삼각점과 태
극기, 정자, 헬기장 등이 있는데, 나무가 울창하여 조망은 별로이며 나지막하게 누운 뫼의 꼭
대기라 그런지 마치 고양이가 주인 배 위에 올라가 야옹거리며 두리번거리는 기분이다.

여기서 길은 여러 갈래로 갈리는데, 동북쪽은 녹천역과 창동4단지, 서북쪽은 도봉문화정보도
서관과 창1동, 창3동, 서남쪽은 창3동, 남쪽은 매봉과 월계동이다. 초안산의 오랜 문신이나
다름없는 조선시대 무덤을 보려면 서북쪽과 서남쪽, 남쪽으로 내려가면 되며 정상 남쪽 헬기
장 부근부터 무덤의 흔적들이 초췌한 모습으로 마중을 나온다.

▲  정상에 자리한 4각형 정자

▲  'H'마크가 박힌 헬기장


▲  헬기장 남쪽에 자리한 무덤 2기와 묘비

헬기장 남쪽 산길 옆에는 무덤 2기가 납작하게 누워 있다. 이들은 원래 저거보다 더 컸지만
후손들의 손길에서 벗어난 이후, 대자연과 장대한 세월의 의해 저런 몰골이 되버렸다. 하긴
천하에 어느 누가 대자연과 세월을 이기겠는가?
주변에 비석과 비석을 세우던 비좌(碑座) 등이 널려있어 얼핏 봐도 무덤 티가 나는데, 묘비와
비좌는 제자리를 약간 벗어나 무덤 옆과 뒷쪽에 널부러져 있다.

▲  무덤 뒷쪽에 누운 비좌
비좌에 의지했을 비석은 온데간데 없고,
그 빈자리에는 빗물이 고여 있다.

▲  헬기장 부근에 외로이 서 있는
문인석 1기


▲  헬기장 남쪽에 있었던 체육시설 (2015년)

헬기장 남쪽에는 체육시설과 너른 공터가 있다. 이 주변에는 자연의 일부로 동화된 무덤의 흔
적과 문인석이 적지 않게 방황하고 있어 무덤이 여럿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는데, 초안산의 옛
무덤에 대한 인식이 바닥이었던 20세기 중~후반, 동네 사람들이 그들을 밀어내고 체육시설을
닦았고 상태가 괜찮은 문인석을 주위에 갖다 놓아 이곳의 장식물로 삼았다.
이처럼 무덤 문인석으로 주변을 치장한 체육시설은 천하에서 이곳이 유일할 것인데, 다행히도
근래에 무덤 유적 보호를 위해 배드민턴장을 밀어버렸으며, 지금은 체육시설 일부가 남아있다.


▲  초안산 정상에서 창3동으로 내려가는 산길
이 산길 주변에도 무덤들이 많다.

▲  무덤 봉분(封墳)은 대자연의 의해 완전 가루가 되었지만 상석과
향로석, 혈(穴)에 해당되는 봉분 뒷쪽은 그런데로 남아있다.


♠  초안산 서남쪽 둘러보기 (창3동 구역)

▲  창3동 산자락에서 만난 무덤 3기

초안산 창3동 구역에는 늙은 무덤이 많다. 산자락은 물론이고 산길에도 세월의 무게로 납작해
진 무덤이 널려있어 한밤에 오면 정말 기분이 오싹해질 정도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잠시 초안
산 분묘군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초안산에 깃든 무덤 가운데 가장 늙은 것은 좌의정을 지낸 이명(李蓂, 1496~1572)의 무덤이다.
그의 묘는 월계동 예안이씨 묘역(각심재 주변)에 있는데, 예안이씨 외에 밀양박씨(창3동 지역
), 태안이씨(창3동 지역) 묘역 등 3개의 사대부 집안 묘역이 초안산에 둥지를 틀고 있다. 그
들은 후손들의 보살핌이 각별하여 무덤 상당수가 양호하게 남아있다.
이들 외에는 내시, 상궁, 중인, 서민들의 무덤으로 산 곳곳에 흩어져 있는데, 상당수는 관리
의 손길이 끊겨 초췌한 몰골이다. 특히 100여 기에 이르는 내시 무덤 중에는 김계한(金繼韓,
?~1624)과 김광택(金光澤)의 묘가 제일 오래되었으나, 1993년 김계한의 13세손이 경기도 양주
시 광적면 효촌리로 이장시키면서 이제는 인덕대학 뒷쪽 매봉에 자리한 승극철(承克哲) 부부
묘가 제일 늙은 내시의 무덤이 되었다. 묘비에 의하면 1634년에 조성되었다고 나온다.

현재까지 산에서 확인된 오래된 무덤은 2000년 기준으로 1,154기로 상석 511기, 향로석(香爐
石) 210기, 석인상 169기, 묘비 182기, 비석 대좌 123기, 망주석(望柱石) 58기, 초석 2기, 장
명등 1기이다. 하지만 아직도 땅 속에 잠긴 묘와 석물이 적지 않아 그 갯수는 계속 변동된다.
상황이 이리된 것은 후손에게 버려진 묘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그런 묘들은 대자연과 몰지각
한 인간들의 희롱으로 대부분 우울한 몰골이 되기 일쑤이고 심지어 도굴까지 당한 무덤도 적
지 않다.

높은 사람들이나 쓸 수 있던 신도비(神道碑)는 앞서 언급한 집안 묘역에 조금 있고, 그 외의
무덤은 묘표(墓表, 묘비)를 지녔다. 묘표는 15세기 형식인 하엽방부형(荷葉方趺形)은 일부이
고, 17~18세기 형식인 원수방부형(圓首方趺形)의 묘표가 대부분이다. 특히 방형(方形)의 비대
만 남은 것이 많은데 윗면에는 연판문이나 당초문(唐草紋), 옆면에는 안상문이나 운문(雲紋)
을 새기거나 아무 문양도 없는 것이 많았다. 이는 중인과 내시, 상궁, 서민의 무덤이 많기 때
문으로 풀이된다.

남아있는 석인상은 3대 가문 묘역을 비롯해 적지 않게 흩어져 있고 쌍계를 갖춘 동자석(童子
石)도 많다. 이들 석인은 대부분 17~18세기 것으로 18세기 중반 이후 사실주의 양식의 석물도
적지 않아 무덤 석물의 변천 과정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상석(床石)은 장방형의 상석 받침을
지닌 형태거나 향로석이 상석 받침과 연결되어 겸용으로 만들어진 형태가 많다. 이러한 석상
의 형식은 17세기 이후에 많이 등장하는 것으로 상석 받침과 겸용으로 만든 향로석은 18세기
이후 초안산에서 많이 나타난다.
이들 석물을 통해 빠르면 15세기에 무덤이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17~18세기에 폭발적으로 늘
어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 넓지 않은 산에 무덤이 마구 들어서니 자연히 묘역 구성은 간소
한 밀집형이 주류를 이루며 석물들은 단순하고 실용적인 형태로 제작되었다.

이곳은 특히나 내시묘가 많이 분포하고 있는데, 조선 제일의 법전(法典)인 경국대전(經國大典
)에 내시의 묘는 도성 10리 밖에 두라는 규정이 있어 그거에 맞는 이곳과 구파발 이말산(莉茉
山)이 무덤 자리로 격하게 선호되었다.
초안산에 안긴 1,100여 기의 무덤들은 '서울 초안산 분묘군'이란 이름으로 사적 440호로 지정
되었으며, 조선 중/후기에 걸쳐 긴 시간에 조성된 조선시대 공동묘지로 비록 상태가 양호한
석물은 별로 없으나 나름대로 무덤과 석물의 변천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초안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1동, 창3동 / 노원구 월계2동
* 초안산 분묘군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 산202-1, 노원구 월계동 산8-3번지 등


▲  문인석과 동자석까지 갖춘 무덤들 - 이들은 사대부의 무덤으로
무덤의 상태는 그런데로 양호하다.

▲  오랜 세월 표정을 잃지 않으며 주인
무덤을 지키는 문인석의 일편단심

▲  비석과 상석, 동자석을 갖춘 무덤
비석에 증통정대부(贈通政大夫)~라 쓰여있어
통정대부로 추증된 이의 무덤임을 알려준다.

▲  증통정대부(贈通政大夫)~ 무덤 앞에
자리한 가선대부(嘉善大夫)~의 무덤

▲  산자락에 가득 깔린 옛 무덤의 물결


▲  봄이 곱게 붓질을 한 생생한 수채화, 창3동 주택가와 초안산 경계선

▲  창3동 주택가에서 초안산으로 오르는 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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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안산 창3동 산자락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가까이에 창3동 지역을 비롯해 쌍문동(雙門洞)과 수유동(水踰洞) 지역이
낮게 바라보인다. 그들 너머로 보이는 장대한 산줄기는 서울의 듬직한
진산(鎭山)인 북한산(삼각산)과 도봉산이다.

▲  초안산 창3동 산자락에서 바라본 북한산의 위엄
북한산(삼각산) 인수봉과 백운대, 만경대 등이 거뜬히 시야에 잡힌다.
그만큼 이곳과 저곳은 가깝다.

▲  봉분은 사라지고 석물만 남은 무덤 ①
인간이 빚은 봉분은 사라지고 감쪽같이 대자연의 일부로 녹아들어 나무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결국 무덤도 인생처럼 부질 없는 것이다.

▲  봉분은 사라지고 석물만 남은 무덤 ②

▲  봉분은 사라지고 석물만 남은 무덤 ③

▲  봉분은 사라지고 상석만 덩그러니
남은 무덤 3기

▲  고된 세월에 지쳐 쓰러진 망주석
하늘을 향해 우뚝 섰던 망주석은 땅바닥에
쳐박혀 산길의 일부가 되었다.


▲  창3동 산자락의 작은 소나무숲

▲  소나무숲에 이리저리 뒹굴고 있는 무덤 상석들
이곳에는 상석을 갖춘 무덤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소나무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  마치 칼질을 당한 듯, 윗도리가 잘려나간 가련한 문인석

▲  산길의 일부가 되버린 무덤의 비애
봉분은 말끔히 파괴되어 겨우 흔적만 남아있고, 누렇게 뜬 낙엽이 그 자리에 한가득
쌓여 허전함을 달래준다. 무덤 주변에는 문인석 1기와 윗도리만 겨우 남은
상석이 제자리를 지켜 이곳에 무덤이 있었음을 강하게 어필한다.

▲  피부가 누렇게 뜬 비석(묘표)
피부가 손상되어 글 해독이 불가능하다.

▲  세월에 지쳐 쓰러진 비석이 상석을
베게 삼아 하늘을 바라본다.


♠  초안산 동남쪽 둘러보기 (월계동 구역)

▲  초안산 정상에서 비석골근린공원으로 내려가는 산길

초안산 정상에서 남쪽 길로 내려가면 월계동 청백1단지와 비석골근린공원으로 이어진다. 이
구간에도 늙은 무덤이 적지 않게 흩어져 있는데, 4각형 정자 쉼터에 이르면 산길 동쪽으로 철
조망이 빙 둘러져 있다. 그 안쪽은 예안이씨 땅으로 정간 이명을 중심으로 한 예안이씨 묘역
이 둥지를 틀었다.

▲  산길에 널부러진 상석들

▲  수풀에 파묻힌 고적한 상석


▲  파괴된 무덤에 남아있는 조그만 문인석과 상석 (바로 옆이 산길)
문인석이 상석보다 작은 경우는 처음 본다.

▲  4각형 정자 쉼터 (왼쪽 철조망 너머가 예안이씨 묘역)

▲  장대한 세월을 예민하게 탄 시커먼 피부의 문인석
무덤은 사라지고 문인석만 남아 있는데, 자신의 우울한 처지에
너무 울었던 탓일까? 얼굴이 거의 지워졌다.

▲  숲속에서 숨바꼭질을 당하고 있는 상석과 묘표

▲  세월의 때가 진하게 낀 검은 피부의 묘표와 상석
무덤 봉분은 진작에 녹아 없어지고 그 자리에 산길이 뚫렸다. 무덤 주인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이 본의 아니게 무덤 자리를 밟고 지나가니
저 세상에서도 속이 편치 않을 것이다. '내가 이럴려고 무덤을
썼나~~!' 자괴심이 들 정도로 말이다.

▲  산비탈의 일부가 되버린 무덤 (묘표와 상석)

▲  월계고등학교 뒷쪽 숲길 (비석골근린공원 부근)

▲  비석골근린공원 서쪽 산자락에 안긴 옛 무덤들 (내시묘로 추정됨)


♠  초안산 비석골근린공원과 궁중문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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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석골근린공원 내부 ▼

초안산 남쪽 끝에는 비석골근린공원이 둥지를 틀고 있다. 이곳은 염광여자메디텍고등학교와
월계고등학교 사이로 비석이 많다고 해서 비석골이라 불렸는데, 그 비석이란 다름 아닌 초안
산에 널린 묘표(묘비)들이다.

이곳은 초안산을 비롯해 노원구 곳곳에서 수습된 문인석과 동자석, 묘표를 옮겨와 보존하고
있다. (공원 주소가 '노원구 월계동'이라 노원구 석물만 있음) 그래서 자연히 문화유산을 겯
드린 상큼한 시민공원이 되었는데, 매년 4월 하반기에는 '임금님과 충신의 만남이 시작된다'
는 주제로 '태강릉 • 초안산 궁중문화제(이하 궁중문화제)'가 열린다.
궁중문화제는 딱히 축제가 없어 애를 태웠던 노원구청이 개최하는 지역 축제로 태강릉(泰康
陵, 중종의 왕후인 문정왕후 윤씨의 능인 태릉, 명종과 인순왕후 김씨의 능인 강릉>
과 비석골
근린공원 일대에서 열리는데, 태강릉은 제왕과 왕후의 지체높은 무덤이고 초안산은 궁궐에서
일했던 내시와 상궁들이 많이 묻혀있으니 이들을 하나로 묶어 궁중문화제란 그럴싸한 행사를
지어낸 것이다.

이 행사에는 어가행렬과 다양한 전통체험, 안골 치성제, 음악회, 포토존, 장터 등이 열리는데
, 내가 이번에 초안산을 찾은 이유 중의 하나도 궁중문화제를 약간이나마 맛보기 위함이다.
허나 내가 도착한 시간은 벌써 17시, 행사도 완전 끝 무렵에 이르러 음악 공연의 끝부분과 약
간의 전통 체험만 남아있던 상황이었다.


▲  신명나는 궁중문화제 음악 공연 (통기타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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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철수해버린 관상보기 체험장
나는 과연 무슨 상일까? 물론 관상이나 손금, 사주는 100% 믿으면 곤란하다.

▲  역시나 텅 비어버린 초안산 안골치성제 천막

서울 도심과 한참이나 떨어진 초안산, 1980년대까지만 해도 안골, 녹천(鹿川), 각심절, 벼루
말 등의 오래된 마을이 있었으나 1990년대 이후 불어닥친 개발의 칼질로 죄다 사라지고 그 이
름마저도 이제 희미해져 기억 속으로 꼴까닥하기 직전이다. 그나마 녹천역 남쪽에 있던 녹천
마을이 시골 풍경을 간드러지게 드러내며 늦게까지 자리를 지켰으나 자비 없는 개발의 칼질에
결국 2015년에 역사의 뒤안길로 강제 퇴장당하고 만다.

옛날 마을에는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 의식이 하나씩은 있었다. 치성제나 당제(堂祭)
등 이름은 틀리지만 본질은 비슷한 마을 제사로 안골 역시 치성제를 지내며 마을의 안녕과 단
합을 도모했다. 안골 치성제는 조선 초기 이후부터 전래된 것으로 소 1마리가 7개의 칼을 맞
고 쓰러져 있던 것을 잡아서 안골, 각심사(각심절), 벼루말 사람들이 매봉 남쪽 허공바위에서
제를 지내니 그것이 안골 당제(치성제)의 시초라고 한다.
그 사연으로 제를 지낼 때는 꼭 7개의 식칼을 놓는다. 왜 하필이면 7개의 칼을 맞은 소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름 상서로운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소만 불쌍함;;)

옛날에는 소 1마리를 통째로 잡아서 제를 지냈으나 20세기 이후 약식으로 지내고 있으며 제각
(祭閣)을 두어 제사 도구를 보관하고 음식을 준비했으나 6.25전쟁 때 파괴되고 말았다.
제는 1년에 3회를 지냈는데, 2월 초하루는 통합적으로 제를 지냈고, 6월 초하루는 할머니산제
라하여 간소하게 소 내장을 갖추어 지냈으며, 10월 초하루에는 소를 통째로 잡아서 지냈다.
제주(祭主)는 마을에서 가장 존경을 받는 나이 많은 남자를 뽑았는데, 3일간 바깥 출입을 금
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제를 준비했다.

허나 1980년대 이후 개발의 칼질로 마을이 강제로 사라지면서 마을 사람 대부분은 다른 곳으
로 가버리고 9대째 안골에 살고 있는 박점순 할머니가 마을 제사를 지키고 있어 다행히 치성
제 전통은 유지되고 있다. 요즘은 10월 초하루에만 제를 지내며 그날이 되면 각지에 흩어진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어 허공바위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제단에는 대추, 밤, 사과의 3색 과일
과 생소고기를 올리고 향과 초를 켜 옛날부터 전해오던 식칼 7개와 놋숟가락을 놓는다.


▲  비석골근린공원을 장식하고 있는 문인석과 망주석들 ▼

공원 한쪽에는 문인석 13기가 무리지어 있다. 이들은 염광학원과 옛 경춘선 철로변, 영축산(
靈鷲山), 수락산(水落山)에서 가져온 것으로 16~19세기에 조성된 것들인데 세월의 때를 진하
게 탄 문인석부터 피부가 하얀 문인석까지 다양한 모습들이라 문인석의 변천 과정을 살피기에
는 아주 좋은 곳이다.


▲  서로 상반된 피부 색깔을 지닌 문인석들

▲  망주석들 - 염광학원과 불암산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  키 작은 동자석들 - 염광학원과 영축산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  빛바랜 묘표(묘비)와 하얀 피부의 상석, 향로석
비석이 너무 낡아서 글씨는 확인할 수 없다. 저들을 거느리던 봉분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지고 저들만 겨우 남아 공원에 안착했다.

▲  비석골근린공원에서 시내로 나가는 길 (초안산로5길, 청백3단지 옆)

축제 막바지라 짐싸기 바쁜 비석골근린공원을 벗어나 초안산 동쪽 자락에 자리한 각심재(恪心
齋)와 정간 이공묘를 찾았다. 허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보수 공사 중이라 온 몸을
가리고 있었다. (정간 이공 묘역과 신도비도 접근이 통제된 상태)
그래서 별미련 없이 발길을 돌렸다. 굳이 무리를 하면서까지 사진에 담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
다. 어차피 내 서식지와도 가까운 곳이니 그들의 몸단장이 끝난 이후에 다시 인연을 지어도
상관 없다.

이렇게 하여 초안산 봄나들이는 약간의 아쉬움을 남긴 채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비석골근린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월계동779 (월계로45가길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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