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사진·답사기/경북 봉화·영주·예천

도봉산고양이 2021. 8. 12. 18:35
봉화 닭실마을



' 봉화 닭실마을 나들이 '
닭실마을 청암정
▲  닭실마을 청암정


♠  숨겨진 길을 타고 닭실마을로 넘어가다 ~~

▲  석천계곡(石泉溪谷) 상류 (닭실 방향)

여름 제국(帝國)이 그의 주특기인 장마와 무더위를 적절히 돌리며 천하를 호령하던 7월의 한
복판에 경북 영주(榮州)와 봉화(奉化) 지역을 찾았다.

영주시내의 여러 늙은 명소들을 둘러보고 봉화로 넘어와 오전약수터와 석천계곡, 석천정사(石
泉精舍)를 둘러보았다.
석천정사(석천정)는 충재 권벌(權橃)의 유적으로 그가 일군 닭실마을, 청암정과 거의 한 덩어
리 같은 존재인데, 서로의 거리도 직선으로 400m 내외로 가까우나 이상한 것은 석천계곡과 석
천정사 어디에도 닭실마을로 인도하는 길과 이정표가 없는 것이다. (내가 갔을 때는 그랬음)
분명 계곡은 닭실에서 흘러오고 있고 계곡 옆으로 길도 있을 법한데 말이다. 하여 예전에 왔
을 때는 길이 없는 것으로 여겨 석천정에서 발길을 돌렸는데, 이번에는 없는 길이라도 뚫을
생각으로 석천정사에서 발길을 접지 않았다.

석천정 관리인이 사는 기와집과 그 옆 화장실을 지나면 조금 너른 공터가 나온다. 이 공터에
는 차량 1대가 바퀴를 접고 늘어지게 자고 있었는데, 차량이 여기까지 들어왔다면 뒤로 길이
있다는 뜻이 된다. (석천계곡 주차장에서 석천정사까지 차량이 갈만한 길은 없음) 과연 공터
를 지나니 닭실로 인도하는 조그만 흙길이 비밀의 길이 열린 듯, 내 앞에 펼쳐진다. 닭실을
알려주기 싫은 석천계곡의 함정을 보기좋게 무너뜨리고 새로운 보물을 발견한 듯 인적이 없는
그 길을 거닌다.

석천계곡과 닭실에는 관광객이 조금 있었으나 이 길을 가는 사람은 1명도 못봤다. 닭실을 보
고 나올 때도 이 길로 나왔는데 역시 마찬가지였다. 석천계곡 남쪽에 신작로(지금의 다덕로)
가 뚫리기 전에는 읍내에서 닭실로 갈 때 석천계곡을 따라 이 길을 거쳐 갔다. 그러니 500년
이 넘는 늙은 길인 것이다.
허나 지금은 잊혀진 존재가 되어 인적도 드물고 답사/나들이객 상당수가 차량으로 석천계곡과
닭실을 찾으니 이 길을 찾을 일이 거의 없어졌다. (닭실에도 딱히 이정표는 없었음)


▲  솔내음이 그윽한 석천정사에서 닭실로 가는 흙길

흙길은 소나무가 무성하다. 길 왼쪽에는 들판과 개울(가계천)이 펼쳐져 있고, 오른쪽은 소나
무 등이 운치를 빚어낸다. 길 중간에는 청암 권동보(權東輔)가 쓴 '제(題)석천정사'란 시문이
적힌 표석이 있어 심심해 하는 나그네에게 잠시나마 읽을 거리를 준다.


▲  저만치 모습을 드러낸 닭실마을

▲  닭실마을의 들판을 촉촉히 어루만지는 가계천(駕溪川)

한 굽이를 지나면 가계천 너머로 닭실마을이 모습을 비춘다. 마을은 저렇게도 가까운데, 길은
그렇지를 못해 남산교까지 빙 돌아가야 된다. 물론 지름길이라고 가계천에 놓인 징검다리가
있긴 하나 하천의 수량이 많아 징검돌은 물에 잠겨 있었다. (그래봐야 수심은 얕음) 물에 빠
져도 상관 없는 샌달이나 신발을 신었다면 모르지만 그것이 아니니 별 수 없이 남산교를 이용
했다.
개울을 건너면 풍년 예감이 넘치는 닭실의 너른 들판이 펼쳐지는데, 그 들판 너머로 닭실마을
이 가까이에 있다. 들판만 가로지르면 바로 마을인데, 역시나 길은 돌아가야 되니 바로 질러
가지 말고 우회도 하며 살라는 마을의 배려인 모양이다. 길에 그늘이 없다보니 따가운 햇살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강제 일광욕과 땀육수 배출로 몸이 무겁다.


▲  푸른 들판과 평온함에 잠긴 닭실마을 (남쪽에서 본 모습)

▲  푸른 들판과 평온함에 잠긴 닭실마을 (북쪽에서 본 모습)


♠  닭실의 보물창고 충재박물관

닭실마을에 들어서 가장 먼저 충재박물관을 살피기로 했다. 마을 북쪽에 자리한 충재박물관은
닭실을 일군 충재(沖齋) 권벌의 문서와 유물을 비롯하여 그의 후손과 마을에 전해오던 유물을
모은 보물창고이다. 겉으로는 작고 싱거워 보여 정말 10분이면 다 볼 것 같지만 저 안에 무려
3,000여 점의 유물이 깃들여져 있다.

충재박물관은 마을의 옛 보물을 속세에 보여주고, 그것을 안전하게 지키고자 권벌의 후손들이
돈을 모아 1995년 3월에 세운 충재선생유물관에서 비롯되었다. 허나 마을의 전통 건물에 비해
지나치게 크고 전체적인 공간의 조형미를 깬다는 지적이 있었고, 항온/항습시설의 부재로 인
해 유물이 병들어가는 문제가 발생하면서 2007년 9월 기존 건물을 싹 갈아버리고 현재 위치에
기와집으로 새로 지어 충재박물관으로 이름을 갈았다.

박물관 안에는 보물 261호로 지정된 권벌 충재일기(沖齋日記) 6책과 보물 262호인 근사록(近
思錄) 4책, 보물 896호인 충재 종가 전적(典籍) 15종 184책, 보물 901호인 권벌 종가 고문서(
古文書) 15종 274점, 보물 902호인 권벌 종가 유묵(遺墨) 8종 14점 등 보물급 문화재 5개 482
점을 포함 3,000여 점의 유물이 있는데, 이중 전시 유물은 일부 밖에 안된다.
그럼 여기서 잠시 충재 권벌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고 박물관 유물을 일부 살펴보도록 하자.

* 닭실마을을 일군 충재 권벌(沖齋 權橃, 1478~1548)
권벌은 안동권씨 집안으로 안동시 북후면 도촌리(道村里)에서 권사빈(權士彬)의 아들로 태어
났다.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冲齋), 훤정(萱亭), 송정(松亭)으로 충재를 주로 썼다.
1496년에 생원시(生員試)를 통과했고, 1507년 문과 별시(別試)에 병과로 급제했으며,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과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사헌부지평(司
憲府持平)이 되었을 때 신윤무(辛允武)와 박영문(朴永文)의 역모를 알고도 즉시 알리지 않은
정막개(鄭莫介)의 당상관 품계를 삭탈하도록 건의하여 강직한 신하로 이름을 날렸다.

1514년 이조정랑(吏曹正郞)이 되고 이어서 호조전랑(戶曹正郞)이 되었으며, 1519년 예조참판(
禮曹參判)까지 승진했다. 바로 그해 조광조(趙光祖)가 훈구파(勳舊派)를 건드리며 왕도정치(
王道政治)를 주장하자 이러다 사단이 벌어지겠다 싶어서 조광조를 지지하는 사림(士林)과 훈
구파 사이를 중재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그래서 그들의 정쟁을 피하고자 아버지가 연로하고 자기 자신은 풍병(風病)이 있다고 우겨 강
원도 삼척부사로 자처해서 외직으로 나갔다. 이때 고향을 거쳐가면서 어머니의 묘소가 있는
닭실을 찾았는데, 닭실 경관에 크게 반하여 나중에 꼭 이곳에 살리라 다짐을 하고 삼척(三陟)
으로 떠났다.

그해 11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터지자 사림패거리에 연루되어 파직을 당했다. 그래서 고향
으로 내려오면서 이전에 봐두었던 닭실로 거처를 옮겨 1520년 초에 지금의 종택(宗宅)을 지었
으며, 1526년에 집 곁에 석천정을 짓고 1533년까지 닭실에 머물렀다.
1533년 복직되어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이 되었고, 밀양부사를 거쳐 1537년 12월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이 되었다가 1538년에 경상도 관찰사(觀察使)와 형조참판으로 승진했다. 그
리고 1539년에는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어 서울을 다스렸고, 그해 7월에는 중종의 특명
을 받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명나라 기록에 잘못 기록된 태조 이성계의 가계(家系)를 고
쳐줄 것을 요구했다.

1540년에 병조판서와 한성부판윤이 되었고, 1541년에 예조판서와 의정부좌찬찬(議政府左參贊)
을 거쳤으며, 1545년에 의정부 우찬성(右贊成)이 되었고, 그해 7월 명종(明宗)이 왕위에 오르
자 원상(院相)이 되었다.
그리고 그해 8월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소윤(小尹) 패거리가 장경왕후(章敬王后)의 대윤(大尹
) 패거리에게 시비를 건 을사사화(乙巳士禍)가 터지자 대윤패거리인 윤임(尹任) 등을 구하려
고 왕에게 계사(啓辭)를 올렸으며, 사화가 끝나자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책록되고 길원군(吉
原君)에 봉해지기도 했으나 소윤패거리인 정순붕(鄭順朋) 등이 자기들과 논의가 다르다고 공
격해 공신록에서 삭제되었다. 또한 10월에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으며,
1547년 양재역벽서(良才驛壁書)사건에 연루되어 전라도 구례(求禮)로 유배를 가게 된다. 이후
평안도 삭주(朔州)로 옮겨졌다가 1548년 거기서 인생을 마감했다.

선조 때 권벌의 억울함이 밝혀져 충정(忠正)이란 시호를 받았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
으며, 불천위제사의 특권을 누리며 후손들에게 매년 성대한 인사를 받는다.

* 닭실마을 소재지 :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963 (충재길42 ☎ 054-674-0963)
* 충재박물관 소재지 :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934 (충재길 60)


▲  충재선생 문집
권벌의 글과 그와 교류하던 인사와 후대 명사들의 글이 담겨져 있다.

▲  심경(心經) - 보물 896호
송나라 진덕수(眞德秀)가 마음에 대해 논한 옛 성현의 격언을 모은 서적으로
정조 임금이 수진근사록(袖珍近思錄)을 읽어보고 권벌의 근사록과 함께
충재 후손에게 내린 책이다.

▲  근사록(近思錄) - 보물 896호
영조가 권벌의 근사록을 궁궐로 들여와 그 내용을 필사하여 권벌의
후손에게 보낸 근사록이다.


▲  정덕(定德)2년 3월 문무잡과방목(文武雜科榜目) - 보물 896호
1507년 권벌이 문과 별시에 병과(丙科)로 합격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

▲  시권(試券) - 보물 901호
1507년 권벌이 문과 별시에 붙었을 때 그가 제출했던 시험 답안지이다.

▲  유서(諭書) - 보물 901호
1538년 중종이 경상감사인 권벌에게 군사 징병 권한을 내리는 교서이다.

▲  누렇게 바랜 과거 급제 교지(敎旨) - 보물 901호
1507년 중종이 내린 과거 급제 교지

▲  근사록 - 보물 262호

근사록은 송나라 때 주자<朱子, 주희(朱熹)>와 그의 제자인 여조겸(呂祖謙)이 만든 책으로 일
상 수양에 필요한 장구(章句) 622조록을 추려내어 14부로 분류한 14권의 책이다.
권벌이 소장한 근사록은 1370년 이인민(李仁敏, 1330~1393)이 작성한 것으로 14권과 15권 끝
에 '성산이씨간우진양(星山李氏刊于晋陽)'이란 전문을 새겼고, 그 다음 종형인(鐘形印) 안에
'홍무(洪武) 3년(홍무는 명태조의 연호)', 정형인(鼎形印) 안에 이노숙(李魯淑, 이인민의 호
가 '노숙')을 새겨서 작성 시기와 간행자, 간행처를 고맙게도 알려주고 있다.

이인민이 1370년 진주목사로 부임하자 그와 친하던 사예(司藝) 박상충(朴尙衷)이 전별 선물로
근사록을 선물로 주었다. 그는 그렇게나 구하고 싶었던 그 책을 얻자 너무 기뻐서 진주에서
이를 간행했는데, 비록 원본이 아닌 그것을 옮긴 복사본이지만 이 땅의 희귀한 고려 서적으로
그 가치는 충분하며, 권벌이 평소 가지고 다닌 수택본(手澤本)이란 점과 정조 임금이 친히 서
문(序文)을 지어서 붙였다는 점에서 눈길을 끄는 서적이다.

권벌은 근사록을 소매에 늘 넣고 다니며 내용을 줄줄 외웠는데, 중종(中宗) 때는 경연(經筵)
에서 그 책으로 강연까지 했다. 또한 중종 어느 해에 중종이 권벌을 비롯한 신하들과 궁궐에
서 코가 비뚤어질 정도로 술을 마시며 놀았는데, 다음날 누군가가 근사록을 주어와 바쳤다.
이에 중종은 '아마 권벌의 옷소매에서 빠졌을 것이다. 그러니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해라' 명
을 내렸다. 그만큼 권벌하면 근사록이 생각날 정도로 근사록 광이었던 것이다.

이런 유래에 호기심을 가진 영조(英祖) 임금은 권벌의 후손인 권만(權萬)에게 그 책을 궁궐로
들일 것을 명했고, 이후 궁중(宮中)에 두었다가 1794년 정조가 '어제충정공권벌 수진근사록서
(御製忠定公權橃袖珍近思錄序)'를 지어서 승정원 좌부승지 서영보(徐榮輔)에게 명해 글씨를
쓰고 후손에게 보냈다. 그 연유로 이 근사록을 수진근사록이라 부르기도 한다.


▲  유지(有旨) - 보물 901호
1539년 중종이 승정원(承政院)을 통해 내린 교서로 명나라에서 태조 이성계의
가계를 잘못 기록한 것을 지적하며 이를 고쳐줄 것을 요구하고자 권벌에게
개종개주청사(改宗系奏請使)의 임무를 부여한다는 내용이다.

▲  명태조 주원장(朱元璋)의 글씨라고 전하는 '충(忠)' 족자

권벌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가져온 것이다. 주원장의 친필인지 아니면 그것을 모사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족자는 권벌의 5대손인 권두광(權斗光) 집안에서 보관해오다가 후손
권주섭이 박물관에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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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벌 수적(手蹟) - 보물 902호
권벌의 자필 간찰(簡札)을 비롯하여 그가 수집한 황보인(皇甫仁)의 필적과
후대에 태어난 지봉 이수광(芝峯 李晬光)의 필적이 담겨져 있다.
이 수적의 표제(表題)는 '선조수적(先祖手蹟)'임

▲  충재일기(沖齋日記) - 보물 261호

권벌이 매우 잘한 점을 하나 꼽는다면 당시의 상황을 일부나마 남겼다는 것이다. 그는 서울에
서 관직생활을 하던 30대에 일기를 썼는데, 한원일기(翰苑日記) 2책, 당후일기(堂后日記) 1책
, 승선시일기(承宣時日記) 2책, 신창령추단일기(新昌令推斷日記) 1책 등 모두 6책이다.

한원일기는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을 지낼 때 쓴 것으로 1책은 1508년 1월 5일부터 9일
20일까지, 2책은 12월 1일부터 1509년 9월 14일까지 기록되어 있다. 한원은 한림원(翰林院)으
로 불렸던 예문관의 별칭이다.
당후일기는 승정원(承政院) 주서(注書)를 지낼 때 쓴 것으로 1510년 3월 1일부터 3월 30일까
지의 짧은 기록이다. 당후(堂后)는 승정원 주서가 거처하던 방으로 승정원 뒤에 있었다.
승선시일기는 승정원 승지(承旨)를 지낸 당시의 공사(公事)를 담은 것으로 1책은 1518년 5월
15일부터 7월 5일까지, 2권은 7월 10일부터 11월 6일까지 썼다.
끝으로 신창령추단일기는 승정원 주서로 있을 때 서얼 출신이던 신창령(新昌令) 이흔(李訢)의
역모사건 전말을 추단한 기록으로 1509년 10월 28일에 작성되었다.

일기라고 해서 충무공 이순신처럼 여러 해 동안 매일 쭉 쓴 것이 아니라 일부만 기록한 것으
로 중종실록을 편찬했을 때 중요한 자료로 참고했으며, 권벌의 문집인 충재집(沖齋集)에도 일
부 실려있다. 당시 관료의 생활실태와 조정과 왕실의 일상 행사가 기록된 드문 자료로 유희춘
(柳希春)의 미암일기(眉巖日記), 이이(李珥)의 석담일기(石潭日記)와 함께 조선 전기의 주요
기록물로 가치가 높다.


▲  장필 진묵(張弼 眞墨) - 보물 902호
명나라 문장가로 초서를 잘쓰던 장필이 남긴 것으로(1465~1504년 사이)
권벌이 명나라에 개종계주청사로 갔을 때 가져온 것이다.

▲  교지(敎旨) - 보물 901호
선조(宣祖) 임금이 1591년 5월 권벌을 영의정에 추증하면서 내린 교지

▲  교지(敎旨) - 보물 901호
1568년 선조가 권벌의 공과 직에 따라 그의 부인을 정경부인으로 올린다는 교지

▲  충재선생문집 - 권벌의 시문집으로 10권 5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  문서와 그림에 사용하는 조선시대
도장들

▲  호구단자(戶口單子) - 보물 901호
호주(戶主)가 호적작성을 위해 관청에
제출한 문서 (1690년작)


▲  예조입안(禮曹立案) - 보물 901호
예조에서 권벌의 손자인 권래(權來)의 입후(立後, 양자로 삼음)를 인정하는 문서

▲  분재기(分財記) - 보물 901호
권벌의 어머니인 윤씨가 친정에서 받은 재산 내역이 적혀있다.

▲  혼례용 복숭아 모양 은술잔
은으로 만든 술잔으로 2개가 1쌍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예전 닭실마을에서
혼례 때 사용되었다. (지금은 그냥 전시물..)

▲  석천정사 현판과 주자대전(朱子大全) - 보물 896호
송나라 주자(주희)의 시문을 모아서 만든 책으로 권벌이
좌참찬(左參贊)을 지냈을 때 받은 것이다.

▲  퇴계 이황(李滉)이 청암정을 찾아와 남긴 시현판(왼쪽)과
청암 권동보가 쓴 제석천정사 시현판(오른쪽)
이들 현판은 각각 청암정과 석천정사에 있었으나 도난이 염려되어 박물관으로 옮겼다.

▲  유향설원(劉向說苑) - 보물 896호
유향설원은 한나라 유향(劉向)이 중원대륙 고금(古今)의 기문(奇聞)과 일화를
20편으로 엮은 책으로 권벌이 임사균(任士均)에게 받은 필사본이다.

▲  왕세자책례도감계병(王世子冊禮都監契屛) - 보물 901호
1690년 숙종이 왕세자(경종)를 책봉하면서 만든 병풍으로 그림 6폭과
서문, 좌목 등이 기재된 글씨 2폭으로 이루어져있다.

▲  우향계축(友鄕契軸)
안동, 봉화 지역의 양반 단체인 우향계의 문서이다.

▲  상다리가 미안할 정도로 풍성하게 차려진 권벌 제사상의 위엄

충재박물관 정문에는 권벌 제사상의 모형도가 있다. 차려지는 음식만 과일을 합쳐서 무려 30
종이 넘는 상다리가 아작날 정도의 호화로운 제삿상이라
'아직도 이렇게 제를 지내나?' 보는 이로 하여금 충격과 공포에 빠져들게 하는데, 권벌의 제
사는 단순 기제사(忌祭祀)가 아닌 아무나 할 수 없는 불천위제사(不遷位祭祀)이다. 불천위제
사란 나라에 공을 세운 인물 가운데 제왕의 승인을 받은 사람만 두고두고 받을 수 있는 제사
로 그 가문에는 보통 그를 위한 부조묘(不祧廟)가 세워진다.

권벌 종가(宗家)에도 부조묘가 있는데, 이런 부조묘를 지닌 집을 흔히 종가라고 부른다. 보통
은 3~4대만 제를 지내고 그것이 지나면 제삿상을 받지 못하나 부조묘에 봉안되거나 불천위 특
권을 받은 이는 세상이 망할 때까지 두고두고 후손들에게 제삿밥을 받는다.

권벌 내외의 제사는 자시(子時, 23~1시)에 치르며 전통방식으로 진행되는데, 이때가 되면 천
하에 흩어진 권벌 후손들이 모여들어 대부분 유생 복장을 갖추며 정성껏 제에 임한다. 저 제
삿상을 한번 차리는 것도 참 큰일 중의 큰일일텐데, 아직까지도 옛 방식을 유지하고 있으니
권벌과 가문에 대한 후손들의 긍지가 참 대단함을 알 수 있다.


♠  닭실의 상징, 청암정(靑巖亭) - 명승 60호

▲  청암정 돌담과 북문

▲  청암정 남문

충재박물관 남쪽에는 닭실마을의 상징인 청암정이 있다. 청암정은 주변을 돌담으로 두르고(서
쪽은 나무 울타리를 침) 종가가 있는 동쪽을 비롯하여 북쪽과 남문에 문을 냈는데, 관람객은
북문과 남문으로 들어서면 된다. (관람객 출입문은 변경될 수 있음)


▲  닭실 속의 섬, 청암정

북문을 들어서면 조그만 별채와 거북바위에 둥지를 튼 청암정이 나타난다. 청암정은 권벌이
닭실마을을 일구고 6년 뒤인 1526년에 지은 것으로 거북바위에 돌로 단단히 터를 다지고 'T'
자형 정자를 지어 올렸다. 그리고 바위 주변에 동그랗게 호를 파고 연못을 만들어 거북이가
좋아하는 물을 담았는데(거북바위를 위해 연못을 팠다고 함) 그로 인해 거북바위와 청암정이
닭실 속에 조그만 섬이 되어버렸다.
섬이 된 거북바위는 완전하게는 아니지만 네모 비슷한 모양이며, 연못은 거의 동그란 모습이
니 나름대로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거북바위를 둘러싼 연못은 수심은 얕은 수준이라 물에 빠져도 크게 탈은 없다. 연못보다 높이
가 낮은 북쪽과 서쪽, 남쪽은 흙으로 단단히 둑을 다지고 나무를 심어 물의 이탈을 막았으며,
연못 물은 인근 가계천에서 끌어오면서 적당히 물을 갈아준다. 이렇게 연못을 두르니 물에서
선선한 바람이 피어올라 한여름에도 그리 덥지가 않다.

속세와 청암정을 잇는 다리는 동쪽에 두었는데, 다리가 참 조촐하다. 그냥 통돌 몇 개를 가져
와서 적당히 이어붙인 형태로 교각은 중간에 1개를 두었으며, 육지 쪽에 계단씩으로 돌을 쌓
고 긴 통돌 2개를 이어붙여 다리를 만들었다. 다리의 폭은 좁기 때문에 성인 1명이 지나가면
꽉 찬다. 내가 갔을 때는 물을 간지가 꽤 되었는지 물 빛깔도 흐릿하고 조금 비린내가 난다.

권벌은 여기서 독서를 하거나 지인들과 풍류를 즐겼는데, 이런 정자까지 둘 정도면 권벌도 제
법 재력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인근 백성을 동원하여 만든 만큼 힘들게 사는 지역 민초
들의 애환도 담겨져 있다. 양반사대부는 팔자 좋게 별장이나 짓고 성리학 놀이나 일삼으며 부
국강병과 백성은 거의 생각하지도 않고, 백성들은 그런 지배층의 수탈에 등골이 휘어지니 예
나 지금이나 이런 거지같은 현상은 달라진 것이 별로 없는 거 같다.
1533년 그가 복직되자 후손과 지역 유생들이 공부하는 서당(書堂) 역할을 했으며, 지금은 관
광지로 개방되어 나그네들의 쉼터로 변했다. 단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되며, 음식 섭취나 고
성방가는 삼가하기 바란다.

청암정 동쪽에는 권벌이 책을 봤던 3칸짜리 팔작지붕 별채가 있는데, 툇마루가 1칸을 이루고
있으며, 방은 2칸이다. 청암정과 비슷하게 통풍이 잘되어 한여름에도 시원하다. 이런 곳에서
공부하면 정말 두뇌 회전이 잘되어 서울대는 들어가고도 남겠는데, 이미 그럴 나이는 지나서
애석하기만 하다. 허나 학창시절로 돌아가 이곳에서 책을 본다고 해도 내 돌머리가 금머리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  사방이 뻥 뚫린 청암정 내부

정자 내부는 바깥에서 보는 것과 달리 제법 넓다. 권벌의 후손과 초대받은 양반, 유생들만 발
을 들일 수 있는 차별된 공간이었던 청암정, 허나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은 이곳의 폐쇄적
인 성격을 그냥 두지 않고 누구든 찾을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바꾸어 버렸다. 이곳이 봉화의
대표급 명소가 되면서 빚어진 현상으로 정자를 흔쾌히 속세에 개방한 후손들의 결정에 경의를
표한다.

▲  청암정 현판의 위엄

▲  근사재 현판과 청암정의 내력이
담긴 하얀 피부의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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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쪽에서 바라본 청암정

▲  청암정 남쪽

청암정은 동쪽과 남쪽, 북쪽에 정자로 오르는 계단을 마련했다. 동쪽은 돌계단으로 폭이 다소
넓지만 남쪽과 북쪽은 폭이 좁은 나무 계단으로 경사가 그리 고르지가 못하다. 정자를 강제로
이고 있는 거북바위는 윗부분이 정자 때문에 많이 변형이 되고 피부가 깎였지만 나머지 부분
은 바위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바위가 정말 넓직하여 청암정을 담고도 공간이 제법 남
는데, 연못과 맞닿은 아랫 부분에는 나무와 화초를 심어놓았다. 그리고 연못 건너편에도 나무
를 잔뜩 심어 외부에서 거의 보이지 않게 위장을 했다.

▲  청암정에서 바라본 연못과 둑방

▲  푸른 이끼의 안식처가 된 거북바위


▲  청암정의 서쪽 부분과 박석이 박힌 조그만 산책로

▲  연못 동쪽과 심플하게 생긴 돌다리

▲  바로 앞에서 본 돌다리
모습은 저래도 경상도에서 제법 늙은 돌다리이다. 다리의 폭이 좁으니 통돌을
2줄로 해서 2명이 지나갈 정도로 확장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청암정에서
연회나 교육을 할 때 음식과 밥상, 물건을 나르는 하인들 편의도
생각할 겸 말이다.

▲  동쪽에서 바라본 돌다리

▲  동쪽에서 바라본 청암정


▲  서쪽 나무울타리에서 바라본 청암정과 거북바위

▲  별채(바로 앞 건물)와 청암정

▲  청암정 서쪽 길에서 바라본 닭실마을과 푸른 들판

밤에 잠도 제대로 못잤고 한더위에 영주부터 오전약수터, 석천계곡을 거쳐 이곳까지 발에 불
이 나게 돌아다녔더니 피곤에 피곤이 겹쳐 눈꺼풀이 백두산만큼 무겁다. 하여 이곳에서 낮잠
한숨을 청했다. 아무리 덥다고 해도 시원한 바람이 정자를 감싸니 그렇게 덥지도 않다. 그런
상황에 잠기운이 나를 희롱하니 이내 잠이 들어 30분 정도 달콤한 낮잠을 즐겼다. 단지 30분
을 잤을 뿐인데, 300분을 잔 것처럼 기분도 개운하고 피곤도 좀 풀린 것 같다.
권벌도 그의 후손도, 이곳을 찾은 손님들도 여기서 시원하게 낮잠을 잤을 것이다. 여기서 자
는 낮잠은 정말 꿀맛.. 왜 바위를 괴롭히면서까지 그 윗도리에 정자를 짓고 연못을 둘렀는지
권벌의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간다. 나도 이런 별장을 뒀으면 좋으련만. 이번 생애는 어림도
없을 것 같다.
내가 정자를 점거(?)하고 있던 시간에도 관광객 여럿이 정자로 들어왔다. 그들도 정자에 눕거
나 앉아서 옛 사람들의 풍류를 잠시 따라하다가 갈 길들이 바쁜지 금방 자리를 뜬다.

청암정은 기존 바위와 주변 풍경을 적절히 활용해 자연에 위배되지 않는 범위에서 지어진 것
으로 우리나라 정원 유적의 으뜸급이라 할만하다. 하여 석천계곡과 닭실마을을 한 덩어리로
묶어 '권충재 관계유적'이란 이름으로 사적 및 명승 3호로 지정되었으나 그 등급이 정리되고
지정 명칭도 바뀌면서 '봉화 청암정과 석천계곡'이란 이름으로 국가 명승 60호로 변경되었다.


♠  닭실마을 마무리

▲  권벌 종택과 부조묘

봉화의 꿀단지로 부상한 닭실마을은 권벌이 개척한 전통마을이다. (1380년대에 권벌의 조상이
개척했다는 설도 있음) 마을 부근에 권벌의 어머니묘가 있는데, 1519년 성묘를 왔다가 닭실
풍경에 퐁당퐁당 빠져 이곳을 점찍어 두었다. 이후 기묘사화로 파직을 당하자 1520년에 안동
고향집을 이곳으로 옮겼고 그를 시조로 하는 닭실마을을 일구게 된 것이다.

닭실은 풍수지리(風水地理)상 금계포란(金鷄抱卵, 황금닭이 알을 품은 형세)의 지형이라고 한
다. 마을 동북쪽에 문수산이 병풍처럼 있고, 서쪽에 백설령(白雪嶺)이 암탉이 알을 품은 듯한
형세로 자리해 5시 방향으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으며, 마을 동쪽 옥저봉(옥적봉)은 수탉이
활개치는 형상이다. 즉 수탉과 암탉이 서로 마주보며 알을 품는 지세로 이런 지형은 자손이
많이 번창하는 대단한 명당(明堂)이라고 한다. 조선 후기 택리지(擇里志)로 유명한 이중환(李
重煥)도 이곳을 삼남의 4개 길지(吉地)의 하나로 격하게 찬양했으며, 임진왜란과 6.25동란도
이곳을 피해가면서 10승지지(十勝之地)의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수탉과 암탉으로 상징되는 두 산에 둘러싸여 있고 마을 앞에 들판과 개천이 흐르고 있어 전형
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태까지 띄고 있으니 정말 남부럽지 않은 마을이다.

이렇게 닭과 관련된 지형이다보니 마을 이름도 닭실인데, 원래 이름을 달실이다. 경상도 사투
리로 '닭'을 '달'이라 불러 그리 불리게 된 것인데, 한자어로는 닭의 계곡을 뜻하는 유곡(酉
谷)마을이다. 근래에 국어표준어법이 적용되면서 마을의 뜻과 다르게 닭실로 널리 불리게 되
었는데, 마을에서는 달실로 불러줄 것을 세상에 요청하고 있다.

닭실에서 자유롭게 둘러볼 수 있는 곳은 청암정과 충재박물관 정도이다. 종택과 마을 집들은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는 공간이라 전통체험이나 초청 등의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은 접근이
통제되어 있으니 괜히 사진을 찍는다고 대문이나 담을 범하는 행동은 하지 말자.


▲  담장 너머에서 까치발로 바라본 권벌 종택과 부조묘
닭실마을은 석천계곡과 마찬가지로 주변에 소나무가 무성하다.

▲  닭실 돌담길 ①
정겨운 모습의 오래된 돌담길, 정면 왼쪽에 보이는 높은 소나무가 있는 곳이
청암정이다.

▲  닭실 돌담길 ② 권벌 종택의 솟을 대문이 정면에 보인다.

▲  권벌 종택 솟을대문

▲  풍년이 깃든 닭실 논두렁


▲  다시 멀어지는 닭실마을

▲  닭실에서 석천계곡으로 가는 흙길

닭실마을을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7시가 되었다. 관람이 통제된 권벌 종가와 마을 기와집
들 내부를 빼고는 거진 다 살펴본 것 같으나 조상의 묘소를 돌보고 제를 지내는 추원재(追遠
齋)를 빼먹고 말았다. (그때는 추원재도 몰랐음) 그리고 마을 구석에 있다는 '후토스(Hutos)'
촬영지도 놓쳤다. (방송 촬영지는 별로 관심 없음)

잠시나마 정이 든 닭실을 뒤로하며 다시 속세로 나가는 걸음이 참으로 무겁다. 그래도 어찌하
겠는가? 내가 있어야 될 곳은 이곳이 아니기에 마을에 대한 미련을 가계천에 내던지고 읍내로
나왔다.

이렇게 하여 한여름에 벌인 봉화 닭실마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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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8월 1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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