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 사진·답사기/경기 남부(수원·화성·오산·평택)

도봉산고양이 2021. 9. 23. 03:59


1. 대웅보전 목조삼세불좌상과 후불탱화

대웅보전의 중심 존재인 목조삼세불은 1790년에 조성된 것으로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약사여래와 아미타불
이 좌우에 자리해 삼세불을 이루고 있다. 석가여래는 오른손으로 항마촉지인을 선보이고 있고, 아미타불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아미타수인을 취했다. 그리고 약사여래불은 손을 반대로 하여 오른손에 약합을 들고
있다. 

이들 삼세불은 전라도와 강원도에서 활동하던 조각승 3명을 초청해 같이 작업했다고 한다. 실제로 삼세불

은 부분적으로 약간 차이점이 있는데, 마치 1명이 삼세불로 변신한 것처럼 모습이 거의 같다. 얼굴을 앞으
로 약간 내민 구부정한 자세와 개성이 없는 듯한 근엄한 표정, 사각형의 얼굴과 신체 형태, 지나치게 두껍
고 폭이 넓은 간결한 옷자락 표현 등은 조선 후기 불상에서 흔히 나타나는 양식이며, 머리의 육계(무견정상
) 윤곽이 불분명하고, 정수리와 이마 가운데에 뚜렷이 드러난 원통형과 반달 모양의 상투 매듭 구슬도 조선
후기 불상의 특징이다.

대웅전 닫집속에서 발견된 원문에 따르면 상계(商界), 설훈(雪訓), 계초(戒初), 봉현(奉玹) 등 승려 20명이 참
여하여 1790년 8월 16일에 작업을 시작해 9월 30일에 완성을 보았다. 그리고 다음날인 10월 1일, 나라 안
의 명승을 초청해 점안식을 거행했다. 

삼세불 뒤에 걸린 후불탱화는 1790년 당시 충청도 연풍현감으로 있던 단원 김홍도가 그렸다고 전한다. 허

나 탱화 화기에 이런 사실이 나와있지 않으며, 그림 양식도 김홍도의 화풍과 크게 차이가 있어 그가 그린
것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탱화의 길이는 3.2m, 폭 2.7m로 화면을 위 아래 2단으로 나누어 그렸다. 상단은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왼
측에 약사여래불, 오른쪽에 아미타불을 그려 놓았으며, 하단에는 10대 보살과 가섭과 아난, 나한과 사천왕
등을 배치했는데, 그림 안의 여러 상들이 모두 상단의 삼세불을 향하여 시선을 집중하고 있어 원형 구도를
이루고 있다.

삼세불의 법의와 석가여래의 광배에 홍색을 칠하고, 대좌에는 청색의 연꽃을 표현하여 청과 홍의 대비를 보
이며, 인물들의 얼굴과 드러난 신체 부위는 갈색 빛이 감도는 살색으로 처리했다. 필선은 다소 딱딱한 편이
나 모든 인물의 얼굴과 손에 서양화의 음영법을 구사했는데, 이런 독특한 음영법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나타나는 특징으로 이 시기 경기 지역에서 활동한 경기파들의 작품에 보이는 표현수법이기도
하다. 또한 영주사(이건 어디에 있는 절이지??) 대웅전에도 똑같은 수법으로 그려진 칠성탱화가 안치되어
있다.
하여 이 탱화는 김홍도가 그린 것이 아니라 조선 후기에 다른 화승이 김홍도의 그림을 본 떠 새로 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2. 대웅보전 뒤쪽 수로와 조그만 화계(꽃계단) 

3. 이름도 특이한 시방칠등각
대웅보전과 천불전 사이에 자리한 시방칠등각은 칠성과 산신, 독성을 머금은 삼성각이다. 삼성각이나 칠성
각이란 아주 흔하고 쉬운 이름을 두고 시방칠등각이란 생소한 이름을 달고 있는데, 여기서 시방(십방)은 이
름 그대로 10곳, 즉 무수한 석가여래의 세계를 의미한다. 그리고 칠등은 칠성을 뜻한다.
용주사 초창기에 칠성각이 있었는데, 도편수는 안성 칠장사의 설잠이 맡았고, 칠성탱은 경옥과 연홍, 설순

등이 제작 봉안했다. 그리고 지금은 사라졌지만 이덕무가 지은 주연도 있었는데, 내용은 이렇다.

'이만리 아유타국 돌우물에는 공덕수가 널리 젖어들고, 팔십경 기타원 좋은 밭에는 길상화가 가득 피었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정면에 칠성탱, 그 왼쪽에 산신탱, 오른쪽에 독성탱이 있
고 근래 조성된 조그만 석조석가여래상이 들어있다.

4. 대웅보전의 잘생긴 뒷모습

5. 시방칠등각 산신탱

1942년에 조성된 것으로 가로 120㎝, 세로 130㎝ 크기이다. 산신 할배와 호랑이, 동자, 과일바구니를 든 여
인을 비롯해 산, 소나무 등이 그려져 있어 산신탱의 기본 요소를 모두 갖추었다. 

6. 시방칠등각 독성탱

1942년에 조성된 것으로 가로 120㎝, 세로 130㎝ 크기이다. 유유자적 앉아있는 독성(나반존자) 할배와 동
자, 소나무, 천태산이 그려져 있다. 

7. 경내 뒷쪽에 자리한 전강대종사사리탑

전강대종사(1898~1975)는 20세기의 대표급 고승이자 용주사를 크게 일군 승려이다. 하여 경내 뒤쪽에 특별
히 그의 사리탑을 만들어 그를 두고두고 기린다. 
사리탑은 원주 법천사의 지광국사현모탑과 비슷한 모습으로 꽤 수작이며, 그가 남긴 오도송이 있는데 내용
은 이렇다. 

昨夜月滿樓(작야월만루) - 어젯밤 달빛이 누각에 가득하더니 
窓外蘆花秋(창외노화추) - 창 밖엔 갈대꽃 가을이로구나. 
佛祖喪身命(불조상신명) - 부처와 조사도 몸과 목숨을 잃었는데 
流水過橋來(류수과교래) -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구나. 

8. 호성전에 봉안된 장조의황제(사도세자)와 경의황후 홍씨(혜경궁홍씨), 정조(정조고황제)와 효의선황후의
영가 위패

이들은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로 지정된 화성 용주사 목조불패로 진품은 효행박물관 수행고에 있고 복제품
이 대신 나왔다. 

 

9. 이제는 과거가 되버린 호성전(2020년 초 사진)

호성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사도세자의 제각이다. 정조의 명으로 지어진 것으로 지금
은 맞배지붕 스타일을 보이고 있지만 원래는 팔작지붕 건물이었다.
매일 새벽, 한낮, 해질녘, 초저녁, 한밤중, 자정 이후 등 무려 6번이나 재를 올렸으며, 이후 정조와 경의황후
(혜경궁홍씨), 효의황후(효의선황후)의 위패까지 봉안되어 49재는 물론 속절제와 기신제까지 올려 그들의
극락왕생을 발원했다. 

지금의 용주사를 있게 하고 용주사의 성격을 잘 드러낸 가장 중요한 건물이나 6.25 때 안타깝게도 파괴되
어 맞배지붕 집으로 중건되었으며, 2020년 8월 21일 오전 1시 전기 누전으로 또 전소되어 지금은 터만 남
아있다. 하여 호성전에 있던 위패는 관음전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건물 복원을 계획하고 있다. 

10. 지장전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지장보살과 시왕 등 명부(저승) 식구들의 공간이다. 이곳에 봉안된
명부 식구들은 원래 용주사의 유물이 아니라 화성 만의사 지장전에 있던 것으로 1894년에 이곳으로 옮겨
왔는데, 덕분에 용주사의 늙은 보물이 크게 늘어났다. (만의사 지장전이 퇴락하여 지장전 식구들이 오갈
곳이 없게 되자 이곳으로 옮겼다고 함)

11. 지장전 지장보살상과 무독귀왕, 도명존자상
화성 만의사에서 넘어온 것들로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이다.

12. 경내 동남쪽에서 바라본 천보루와 좌우 회랑, 나유타료
천보루와 좌우 회랑 안쪽에 용주사 경내의 중심부인 대웅보전 구역이 있다.

13. 용주사를 마무리 짓다. 일주문

지금은 일주문이 용주사의 정문 역할을 하고 있으나 일주문이 없던 예전에는 삼문이 이곳의 정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