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사진·답사기/아차산·용마산 고구려유적

도봉산고양이 2021. 9. 24. 02:15


1. 다시 찾은 망우리공원 (망우저류조공원)

이번 망우리공원 나들이는 망우리고개 서쪽에 자리한 망우저류조공원에서 시작했다. 저류조공원 동남쪽 끝
에 망우리공원(망우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으며, 그 길의 끝에 망우리공원 산책로(사색의길)가 있다. 

2. 망우리공원 망우리묘지 (망우저류조공원과 망우리공원 주차장 사이)
망우리공원으로 이름과 성격이 세탁된(?) 망우리묘지의 기운이 예전만은 못하다고 해도 아직 수천 기의 무
덤이 안겨져 있어 공동묘지 및 공원묘지의 성격은 여전하다.

3. 망우리공원 사색의길 입구(유명인사 안내가벽 앞)

4. 이태원묘지 무연분묘합장비

망우리공원 사색의길 동쪽 구간(구리시 구간)으로 들어서면 이태원묘지 무연분묘합장비를 알리는 이정표가
손짓을 한다.
경성부(왜정 시절 서울의 이름)는 1933년 망우산에 크게 망우리공동묘지를 닦으면서 경성부 지역의 공동묘
지를 순차적으로 정리했다. 하여 이태원에 있던 이태원공동묘지도 1935년부터 망우리와 미아리로 통합되어
1936년 4월 8일에 정리가 완료되었는데, 경성부 위생과는 무연고 무덤으로 판명된 28,000여 기를 화장하여
작은 봉분을 닦고 이 위령비를 세웠다.  (합장비 뒤에 보이는 무덤이 무연분묘)
이태원공동묘지에는 1920년 왜정에게 희생된 유관순 열사의 무덤이 있었는데, 이태원묘지를 정리하는 과정
에서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의 무덤에는 비석 등의 묘표도 없었다고 함)

5. 이태원묘지 무연분묘와 유관순 분묘 합장 표지비
합장비 뒤쪽에 있는 작은 무덤이 이태원묘지 무연분묘이다. 이태원묘지에서 무연고로 판정한 28,000여 기
를 화장하여 이 봉분에 담았는데, 그들중에는 유관순 열사의 유해도 있었다. 하여 무덤 옆에 '유관순열사 분
묘 합장표지비'를 세워 그의 원통한 넋을 위로하고 있다.

유관순은 엄연히 가족이 있었으나 왜정의 고문으로 옥사했기 때문에 가족들까지 왜정의 감시를 받았다. 그

러다보니 그의 장례에 참여하기 어려웠고, 무덤도 관리하기 어려웠으며, 무덤에는 묘표도 없었다. 그러다가

경성부에서 추진한 공동묘지 정리로 이태원묘지가 정리되면서 왜정은 눈에 가시와 같던 유관순 묘를 서둘
러 파묘하고 무연고 처리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해도 건지지 못하고 다른 이들과 뒤섞여 저 봉분에 잠든 
유관순 누님의 비애..ㅠㅠ

6. 망우리공원 사색의길 동쪽 구간

망우리공원의 백미인 사색의길은 사색의길입구(유명인사 안내가벽)에서 길이 동서로 갈린다. 허나 순환 산
책로이기 때문에 열심히 걷다보면 결국 제자리로 오게 된다. 

7. 노고산취장비(경서노고산천골취장비)
1938년 9월 신촌에 있던 노고산 공동묘지를 이곳으로 옮기고 이를 기리고자 세운 비석으로 위창 오세창 선
생 등이 비문을 썼다. (비문 글씨는 445자)

8. 늦가을에 푹 잠긴 사색의길 동쪽 구간 (이때가 11월이었음)

9. 사색의길에서 바라본 구리시와 미사강변지구, 하남시, 덕소(와부읍), 검단산, 예봉산

10. 월파 김상용 묘

월파 김상용(1902~1951)은 문인으로 경기도 연천 출신이다. 1917년 경성고보에 입학했으나 3.1운동에 참
여하여 제적을 당했으며, 이후 보성고보에 들어가 1921년에 졸업하고 왜열도 릿쿄대학에 진학해 영문학을
전공했다.

조선으로 돌아와 1928년 이화여전 교수를 지냈고 미군정 시절에 강원도지사로 발령받기도 했으나 곧 그만

두고 이화여대 교수로 복귀했다. 그리고 1946년 미대륙으로 넘어가 보스턴대학에서 3년동안 공부를 하고
1949년에 귀국하여 이대 교수와 학무위원장을 지냈다. 1950년 서울 수복 이후 공보처 고문과 국영 코리아
타임스 사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1951년 1.4후퇴로 부산으로 피신했고 거기서 불의의 식중독으로 겨우 49
세의 나이로 허무하게 사망하고 만다. 

그는 우수와 동양적 체험이 깃든 관조적 경향의 서정시를 많이 썼는데 1939년에 그의 유일한 시집인 '망
향'을 냈으며, '남으로 창을 내겠소'가 대표작이다. 그리고 에드가알렌포의 '애너벨리' 등의 영문시도 번역
하여 이 땅에 소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