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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고양이 2021. 10. 20. 21:31
강남 대모산 (완남부원군 이후원묘역, 대모산성, 불국사)


    
' 서울 강남의 대표 지붕, 대모산 나들이 '

  대모산 숲길  
완남부원군 이후원 묘역

▲  대모산 숲길
◀ 완남부원군 이후원 묘역
▶  대모산 불국사

대모산 불국사

 



서울 강남권의 대표 지붕인 대모산은 어린 시절부터 여러 번 인연을 지었던 친숙한 뫼이
다. 보통 접근성이 좋은 일원동(逸院洞)이나 수서역에서 길을 시작했는데, 한 해의 절반
이 끝나가는 시점에 이르러 다시 대모산 앓이가 도졌다. 그 앓이는 대모산에 안겨야 100
% 낫는 병이라 겸사겸사 시간을 내어 그를 찾았는데, 이번에는 산 남쪽인 자곡동(紫谷洞
)에서 산 더듬기를 시작했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린 13시, 지하철로 수서역까지 이동하여 거기서 강남구 마을버스 03
번을 타고 못골마을 정류장에서 두 발을 내렸다. 여기서 자곡로를 따라 서쪽으로 6분 정
도 가면 래미안강남힐즈아파트가 나오는데, 그 옆구리에 닦여진 '자곡로5길'로 들어서면
오른쪽 산자락에 옹기종기 모인 무덤들이 두 눈에 아른거릴 것이다. 이들이 바로 완남부
원군 묘역으로 그들을 미답처 목록에서 싹싹 지우고자 이곳을 대모산 나들이의 시작점으
로 삼은 것이다. (못골마을 정류장보다는 래미안강남힐즈 정류장에서 내리는 것이 더 가
까움)


▲  완남부원군 묘역 남쪽에 상큼하게 닦여진 공원 산책로


♠  대모산 남쪽 자락에 둥지를 튼 조선 중기 무덤,
완남부원군 이후원(完南府院君 李厚源) 묘역
- 서울 지방기념물 29호

▲  밑에서 바라본 묘역

대모산 남쪽 산골인 못골에는 완남부원군 이후원 묘역이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인적이 드
물던 이 두멧골까지 개발의 칼질이 밀려오면서 묘역 서쪽에 아파트가 심어지고 신작로가 바로
옆구리까지 들어왔으며, 남쪽과 동쪽에 공원이 조성되는 등, 주변 풍경이 다소 변화를 겪었다.
묘역은 거의 옛 모습 그대로이거늘 그 주변이 크게 홍역을 치룬 것이다. 그렇다면 나를 이곳
으로 부른 묘역의 주인공, 이후원 그는 누구인가?

이후원(李厚源, 1598~1660)은 자는 사진(士晋), 사심(士深), 호는 우재(迂齋)로 세종(世宗)의
아들인 광평대군(廣平大君)의 7세손이다. 그의 아비는 이욱(李郁), 어미는 장수황씨로 황정욱
(黃廷彧)의 딸이다.

10대 시절, 김장생(金長生)의 문하로 들어가 공부를 했는데, 이때 김집(金集)과 조속(趙涑),
송준길(宋浚吉)과 친분을 쌓았다. 1623년 서인 패거리들이 일으킨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참여
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으로 평가를 받아 완남군(完南君)에 봉해졌으며, 1624년 이괄(李
适)의 난 때 반란 토벌에 앞장섰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터지자 총융사(摠戎使)로 전쟁에 임했으며, 이듬해 청나라군 포
로를 잡은 공로로 녹훈되었으나 이를 반기지 않았다. 이후 단양군수와 태안군수를 지냈고, 조
정으로 돌아와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 종4품)을 지내다가 1635년 익산군수가 되었다. 그리고
그해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뒤늦게 과거시험을 통과했다.

1636년 김상헌(金尙憲)의 천거로 지평(持平, 정5품)이 되었으며, 얼마 가지 않아서 장령(掌令
, 정4품)이 되었다. 바로 그해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터지자 인조(仁祖)를 따라 남한산
성으로 서둘러 도망을 쳤으며, 그곳이 청군에게 포위되자 염통이 오그라든 김류(金瑬) 등이
강화도로 도망치자며 어리석은 인조를 구워삶았다.
그러자 이후원은 남한산성을 끝까지 지킬 것을 주장하여 그들의 의견을 가라앉혔고, 최명길(
崔鳴吉)이 항복을 제안하자 죽기로 싸울 것을 주장했다.

1639년 승지(承旨)가 되고 이어 수원부사에 천거되었으나 인조가 그를 곁에 두고 싶어서 병조
참지(兵曹參知)로 삼았다. 이후 충청도관찰사로 나가 백성의 힘을 무리하게 쓰지 않고 사풍(
士風)을 변경시켜 군정(軍政)을 닦았으며 이어 강화부유수가 되었다가 1642년에 대사간(大司
諫)을, 1643년에는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이 되었다.

1644년 심기원(沈器遠)이 좌의정(左議政)과 남한산성 수어사(守禦使)를 겸임하자 심복의 장사
들을 호위대에 집어넣고 전 지사(知事) 이일원(李一元)과 작당하여 회은군 이덕인(懷恩君 李
德仁)을 추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이후원이 적극 나서 반란을 토벌했으며, 이듬해 호
조판서와 대사헌이 되고 1646년에는 형조참판(刑曹參判)이 되어 회명연(會盟宴)에 참여했다.

1650년 효종(孝宗)이 청나라 정벌 프로젝트인 이른바 북벌(北伐)을 추진하자 그 참모가 되었
다. 효종의 명으로 전함 200척을 준비하여 그때를 알뜰히 대비했으나 1659년에 효종이 아쉽게
도 승하를 하면서 북벌프로젝트는 흐지부지 되고 만다.
1653년 도승지(都承旨)가 되어 인조실록 편찬에 참여했으며, 1655년 예조판서로 추쇄도감제조
(推刷都監提調)가 되어 도망간 노비나 부역, 군역을 회피한 사람들을 잡아와 그 죄를 물었고,
악학궤범(樂學軌範)을 개간해 사고(史庫)에 나누어 보관하게 하였다. 이어서 한성부판윤(漢城
府判尹), 형조판서, 공조판서, 대사간을 거쳐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다.

1657년 우의정(右議政)이 되면서 명나라에 대한 꼴통 사대주의의 대가 송시열(宋時烈)을 이조
판서에, 송준길을 병조판서로 임명했으며, 이후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 지경연사(知經
筵事),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등을 지냈다.

그는 성품이 청개(淸介, 청렴하고 절개가 있음)하고 인화를 중히 여겼으며, 선(善)을 좋아하
고 악을 멀리했다. 그리고 관직생활 중에도 틈틈히 경사(經史)를 읽으며 머리 속에 늘 풍부한
지식을 쌓아두었다.
1685년 경기도 광주 수곡서원(秀谷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세상 사람
들은 그를 완남부원군이라 부른다.


▲  고색의 기운을 머금은 이후원 신도비(神道碑)

이후원 묘역은 광명시 일직동 삼석산(三石山) 호봉골에 처음 자리를 잡았다. 그곳은 그와 같
은 시대를 살았던 이원익(李元翼, 1547~1634) 묘역 부근이다. 그러다가 1685년 광주 세촌(細
村) 금성산(金星山)으로 이장되었으며, 1714년 현 자리에 완전히 안착을 했다. 이때 그의 전
처인 광주김씨, 후처인 영월신씨와 같은 봉분(封墳)을 쓰는 합장묘(合葬墓)로 조성되었다.

이후원 신도비는 묘역 동남쪽에 자리해 있다. 신도비란 2품 이상의 높은 사람과 왕족들만 지
닐 수 있었던 비싼 비석으로 무덤 주인의 생애를 기록해 놓는다. 두툼하게 생긴 비좌(碑座)
위에 글씨를 깨알 같이 적어놓은 비신(碑身)을 세우고, 지붕돌로 마무리를 한 단출한 모습으
로 비석에 딱히 '신도비'를 칭하는 내용은 없으나 신도(神道)로 통한다는 무덤 동남쪽에 자리
해 있고, 묘표도 따로 마련되어 있어 그를 신도비로 보고 있다.
비문(碑文)은 이후원의 벗인 송준길이 짓고, 송시열이 추기를 지었으며, 명필로 유명한 이정
영(李正英)이 글씨를 쓰고,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두전(頭篆)을 썼다. 1685년 광주로 이장
되었을 때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며, 당대 유명한 사람들의 글과 글씨를 머금고 있어 역사적인
가치가 대단하다.


▲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후원 묘

이후원 묘는 이후원 자신과 그의 전처, 후처가 모두 안장된 봉분을 중심으로 묘표(墓表), 상
석(床石), 향로석(香爐石), 망주석(望柱石) 2기, 해치석 2기로 이루어진 조촐한 모습이다.
봉분 밑도리에는 호석(護石)을 둘러 무덤이 조금 있어 보이게 하였으며 묘표는 봉분 앞이 아
닌 옆에 두었다. 허나 높은 사람들 무덤에 흔히 쓰는 문인석(文人石)과 동자석(童子石) 같은
석물을 전혀 갖추지 않았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들 대신 독특하게도 해치석을 지
니고 있으며, 이들은 다른 사대부나 왕족의 무덤에서는 만날 수 없는 희귀한 예로 나 역시 이
곳에서 그들을 처음으로 접해 본다. 이들 해치는 무덤 지킴이로 배치되었다.

▲  호석을 두룬 봉분과 상석, 향로석
묘표(오른쪽 돌기둥)

▲  이후원 후손들의 무덤 (3기)
이들은 상석과 향로석, 망주석만 갖추었다.


▲  오늘도 평화롭기 그지 없는 이후원 묘역의 초여름 풍경
(서쪽에서 바라본 모습)

▲  무덤의 주인을 소상히 알려주고 있는 묘표
연꽃 무늬가 진하게 새겨진 비좌 위에 곧게 솟은 비신(빗돌)을 세우고
그 위에 네모난 지붕돌을 얹혔다. 빗돌 피부에는 고된 세월의 때로
얼룩이 져 있으나 글씨를 확인하는데는 그리 어려움은 없다.

▲  향로석에 새겨진 글씨 '완남 이충정공묘(完南 李忠貞公墓)'
여기서 '완남 이충정공'은 이후원을 뜻한다. 300년이 넘은 글씨이지만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정정함을 과시하고 있다.

▲  뻐드렁니를 드러낸 서쪽 해치석의 위엄

이후원 묘만의 특별한 옵션, 해치석은 아주 조그맣고 앙증맞은 모습으로 상석 앞에 2기가 자
리해 있다. 네모난 바닥돌 위에 귀엽게도 앉아있는 해치는 상상 속의 동물로 광화문 앞에도
커다란 해치석(해태석)이 있는데, 얼굴과 이빨, 귀, 뒷다리, 꼬랑지까지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서쪽 해치상의 두 눈은 장대한 세월에게 제대로 얻어맞은 듯 멍이 부었고, 코는 깎여나가 흔
적만 남았다. 아마도 그의 코를 갈아 그 가루를 먹으면 아들을 낳거나 시험에 붙는다는 유언
비어가 있었던 듯 싶다. 그래도 코를 제외한 나머지는 잘 남아있으며, 동쪽 해치상은 눈과 코
가 모두 멀쩡하다.
그들의 귀여운 자태에 반해 집으로 살짝 가져가 나의 수호용 석수(石獸)로 삼고 싶지만 그들
을 들고 갈 힘도, 지위도 되지 못한다.

▲  서쪽 해치석의 얼굴

▲  서쪽 해치석의 옆모습


▲  맞은편 해치석을 바라보고 있는 동쪽 해치석
무덤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바람직하지 못한 기운들도 해치의 귀여운 모습에
그만 넋을 잃고 그들의 임무도 잊은 채, 돌아갈 것이다.

▲  동쪽 해치석의 해맑은 얼굴

▲  동쪽 해치석의 옆모습


▲  이후원 묘역 동쪽 숲길 (못골위 근린공원)

이후원 묘역 남쪽과 동쪽에는 '못골위 근린공원'이 닦여져 있다. 동쪽 산책로는 야트막한 오
르막길로 그 고개를 넘으면 바로 못골마을로 이어지는데, 고개 너머 길은 잡초들이 덥수룩하
여 접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대모산으로 이어지는 산길도 없는 눈치여서 다시 묘역
으로 나와 그 서쪽 길(래미안강남힐즈 동쪽 길)을 기웃거려 보았으나 딱히 길은 없어 보였다.
하여 자곡로로 나와 길을 탐색하니 LH강남3단지아파트 남쪽 세명근린공원에서 대모산으로 가
는 계단길을 발견, 그 길을 통해 오랜만에 대모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 완남부원군 이후원 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자곡동 산39-3


▲  대모산으로 인도하는 계단길 (세명근린공원)


♠  대모산(大母山, 293m)을 더듬다

▲  대모산 숲길 (자곡동에서 정상 방향)

대모산은 강남의 대표 지붕이자 듬직한 뒷동산이다. 1977년에 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 1989년 이후 공원으로 조금씩 꾸며지기 시작했다. 개포동과 일원동, 수서동, 자곡동, 내곡
동(內谷洞), 세곡동(細谷洞)에 걸쳐있는 산으로 1980년대 개포동(開浦洞) 개발 이전에는 산세
가 양재천(良才川)까지 이르렀다. <꼬마 시절인 1980년대 중반에 대모산을 타고 도곡동(道谷
洞)까지 내려간 기억이 있음>
산의 모습이 늙은 할머니처럼 생겼다고 해서 할미산, 대고산(大故山)이라 했으나 조선 세종(
世宗) 때 태종(太宗)의 능인 헌릉(獻陵)이 산 남쪽에 조성되면서 어명에 의해 대모산(大母山)
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산세가 비구니가 앉은 모습 또는 여자의 앞가슴처럼 생겼다고 하여
그리 이름을 내렸다는 설도 덧붙여 전해지고 있음)
조선 후기에 신경준(申景濬)이 작성한 산경표(山經表)에는 한남정맥(漢南整脈)에 속하는 산이
라 했으며, 여지도서(輿地圖書) 광주목(廣州牧) 기사에는 '관아 남쪽 30리에 있으며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다'고 나와있다.

대모산에 안긴 오랜 명소로는 불국사와 대모산성터 등이 있으며, 넓은 산세에 비해 계곡은 매
우 빈약하다. 개포동과 일원동 개발로 계곡 상당수가 날라갔기 때문이다. 그나마 남아있는 계
곡들도 시멘트를 바르고 요상하게 공구리를 쳐서 볼품이 매우 없다. 반면 약수터는 주변 산들
못지 않게 많아서 구룡산을 포함하여 무려 18개소의 샘터가 있다. (일부는 부적합 상태임)
또한 도보 산책길의 전국적인 유행으로 강남구청에서는 수서역에서 대모산 북쪽 자락과 구룡
산 북쪽 자락을 거쳐 염곡동(廉谷洞)으로 이어지는 대모산 둘레길인 '강남그린웨이'를 닦았으
며, 천하 둘레길의 성지(聖地)로 격하게 찬양받는 서울둘레길4코스(대모, 우면산 코스)가 대
모/구룡산 북쪽 자락으로 흘러간다. (불국사를 경유함)


▲  대모산 숲길 (왼쪽 철책 너머는 헌인릉 보호구역)

자곡동 세명근린공원에서 20여 분 정도 오르면 대모산 능선길에 이른다. 길은 거의 완만한 수
준으로 길이 약간 흥분기를 보이는 구간은 나무데크 계단길을 깔아 그 흥분을 조금 가라앉혔
다.


▲  대모산 능선길
왼쪽 푸른 철책은 헌인릉과 국정원 구역이니 넘어가지 말자. 국가의
예민한 곳을 건드려봐야 좋을 것은 하나도 없다.

▲  숲에 감싸인 대모산 정상(293m)

대모산 능선길로 들어서 서쪽으로 10분 정도 가면 대모산 정상에 이른다. (동쪽 능선길로 가
면 수서역임)
보통 하늘을 이고 있는 뫼의 정상은 바위로 이루어져 있거나 잡초로 이루어진 대머리 같은 지
형이나 대모산 정상은 나무가 무성하여 정상이라는 것이 그리 실감이 나지 않는다. 삼삼하게
솟은 나무들로 하늘은 절반 밖에 보이지 않으며 조망 또한 별로 기대할 수 없다. 하여 여기서
는 동남쪽인 자곡동과 세곡동, 성남시 정도만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대모산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 대모산 정상

대모산 정상에서 서쪽으로 내려가면 'H'마크가 새겨진 헬기장이 나온다. 이곳은 북쪽이 확 트
여있어 앞서 정상에서 누리지 못한 조망을 제대로 보상 받을 수 있다. 바로 앞에 개포동과 일
원동을 비롯하여 강남구와 서초구, 송파구, 성동구, 광진구, 중랑구, 아차산~용마산 산줄기,
구리시, 멀리 불암산과 수락산, 도봉산, 북한산(삼각산), 남양주 지역까지 시야에 잡혀 조망
도 제법 진국이다.


▲  대모산 헬기장에서 바라본 천하 ①
개포동과 일원동을 비롯하여 송파구, 광진구, 아차산 산줄기,
그리고 멀리 수락산과 도봉산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  대모산 헬기장에서 바라본 천하 ②
개포동과 일원동, 송파구, 강동구, 광진구, 아차산 산줄기, 수락산,
구리시, 남양주 지역 등

▲  천하를 향해 고개를 내민 대모산 서쪽 조망대

대모산 정상 서쪽에는 천하를 굽어보는 조그만 조망대가 있다. 이곳은 동쪽 헬기장보다 더 조
망이 일품으로 강남구 지역을 중심으로 송파구, 강동구, 구리시, 서초구, 성동구, 광진구, 중
구와 남산, 동대문구, 멀리는 북한산(삼각산), 도봉산, 수락산, 남양주 지역까지 망막에 들어
온다. 강남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고 서쪽의 구룡산 외에는 주변이 상당수 평지라 조망
의 깊이도 클 수 밖에 없다.


▲  대모산 서쪽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개포동과 도곡동, 양재동을 비롯한 강남/서초구 지역과 동작구, 용산구,
중구, 남산, 북한산(삼각산)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  대모산 서쪽 조망대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강남구와 서초구, 우면산, 관악산, 동작구 지역

▲  옛 대모산성(大母山城)의 아련한 흔적들

대모산 헬기장 서쪽 능선길과 대모산 조망대 주변을 잘 살펴보면 무리를 지어 모인 돌무더기
들이 심심치 않게 보일 것이다.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그저 잡석들의 무리로 보고 밟고 지나
가기 일쑤이나 눈썰미가 조금 있다면 그저 단순한 돌무더기가 아님을 느낄 것이다. 그들은 바
로 대모산의 갑옷이었던 대모산성의 흔적들(대모산성터)이다.

산꾼과 행정당국의 오랜 외면을 받으며 굴욕의 시간을 견디고 있는 대모산성은 6~7세기 정도
(또는 신라 후기)에 신라(新羅)가 쌓은 것으로 여겨진다. 1999년 국립문화재연구소와 한양대
박물관팀이 발굴조사를 벌인 적이 있는데, 이때 짧은 굽다리 접시를 비롯하여 다양한 신라 유
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곳 산성은 정상을 둘러싸며 조성된 테뫼식 산성으로 둘레는 약 600m, 내부 면적은 약 8,276
㎡이며, 성돌은 50~70cm 정도의 자연석과 활석을 이용했다. 봉은사(奉恩寺)에서 편찬한 '봉은
본말사지(奉恩本末寺誌)'에는 백제 때 고성(古城)으로 나와있고, 북쪽 성벽에서는 청동기시대
주거지가 일부 확인되기도 했으나 나중에 성곽을 구축하면서 과반수 이상 날라간 상태였다,
또한 정상 중간 지점에 제단으로 쓰인 것으로 보이는 바위가 널려있는데 이 바위에는 달걀 모
양의 조각이 50여 개 이상 새겨져 있다. 이들 흔적을 어려운 말로 성혈(聖穴)이라 하며, 그
흔적을 문신처럼 지닌 바위는 알바위라 부른다. 하여 이를 통해 대모산은 옛 조선(고조선)부
터 지역에서 꽤나 애지중지되었음을 귀뜀해준다.
그랬던 대모산성은 고려 이후 버려졌고,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대자연의 오랜 괴롭힘으
로 완전히 헝클어져 돌이 약간 뭉쳐있는 형태로 여럿 남아있을 뿐이다.

옛 조선부터 신라 후기까지 절찬리에 이용된 의미 깊은 곳이지만 오랫동안 세상의 관심을 받
지 못했다가 2012년에 비로소 서울시에서 지방기념물로 지정하고자 문화재위원회에 상정했다.
허나 여러 가지 이유(사유지, 강남구의 의지 부족 등)로 지정문화재의 지위를 얻지 못했고,
그러다보니 보호 조치도 계속 보류되었다. 게다가 대모산성을 알리는 어떠한 안내문도 없는
실정이라 사람들의 발길에 계속 고통받고 있으며, 봉우리 주변에 철탑 시설물과 국정원 철책
까지 산성터를 그냥 두지 않아 상태는 더욱 악화되고 있다.
그러니 더 망가지기 전에 서둘러 지방문화재로 지정하여 흐릿하게 남아있는 흔적이라도 수습
했으면 좋겠다. 그래도 서울에 거의 흔치 않은 산성 유적이 아니던가.


▲  옛 대모산성의 흔적들 ①
대모산성 왕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아차산에 깃든 아차산성(阿且山城)이나
금천구 호암산에 깃든 호암산성(虎巖山城)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까?

▲  옛 대모산성의 흔적들 ②
1970년대까지만 해도 성벽이 많이 남아있었다고 하며 멀리서도 그 흔적이
보였다고 한다. 허나 속세의 무관심 속에 그마저도 대부분 헝클어지고
지금과 같은 우울한 몰골이 되고 말았다.

▲  옛 대모산성의 흔적들 ③
성곽을 다졌던 자리에는 성돌 일부와 성터 윤곽이 어렴풋이 남아있다.

▲  불국사로 내려가는 숲길


♠  대모산 북쪽 자락에 둥지를 튼 오래된 산사
~ 대모산 불국사(大母山 佛國寺)


▲  불국사 약사보전(藥師寶殿)

대모산성터에서 일원동 쪽으로 15분 정도 내려가니 불국사가 뒷통수를 보이며 모습을 드러낸
다. 이름도 참 좋은 불국사는 몇 번 인연을 지었던 절로 그냥 넘어갈까 했으나, 간만에 대모
산에 왔고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그냥 못지나치듯, 그냥 가기가 아쉬웠다. 하여 석불좌상의 안
부도 물을 겸, 불국사로 발을 들였다.

절 밑에는 약수터(불국사 약수터)가 있어 더위로 지친 목구멍을 적실 겸 다가갔다. 허나 수질
부적합 빨간 딱지가 부착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그것을 무시하고 마셔도 상관은 없으나
이후는 장담하지 못한다. 요즘 내리는 비가 너무 각박한 수준이다보니 약수터의 목구멍도 죄
다 타들어가고 있었고, 바가지들도 실업자 신세가 되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런 약수터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며 경내로 인도하는 돌계단을 오르면 정면으로 약사보
전과 그곳의 주인 약사여래(불국사 석불좌상)와도 시선이 딱 마주친다.

대모산 북쪽 자락에는 이름도 참 아름답고 외우기도 쉬운 불국사가 조용히 안겨져 있다. 흔히
불국사하면 다보탑과 석가탑으로 유명한 경주(慶州) 불국사를 100% 생각하기 마련이라 불국사
에 간다고 하면 의심할 여지도 없이 다들 경주에 가냐고 묻는다. 허나 부처 형님의 나라를 뜻
하는 '불국'이란 이름을 경주 불국사 혼자서만 누리면 어디 쓰겠는가?
비록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불국사' 이름을 지닌 절은 천하에 수십 곳이 넘는다. (그나
마 오래된 절은 경주와 대모산 불국사가 고작임)

'불국사' 이름의 절 중에 경주 다음으로 2위(1위와 2위의 차이가 완전 넘사벽 수준;;)라고 볼
수 있는 대모산 불국사는 약사여래를 중심으로 한 약사도량으로 태고종(太古宗) 소속이다. 법
당(法堂)인 약사보전을 중심으로 삼성각, 나한전 등 4~5동의 건물을 지니고 있으며, 지형상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시선의 끝에는 이곳의 마르지 않는 샘 강남이 펼쳐져 있다.
가람배치는 법당 앞에 석탑 1기를 둔 1법당 1탑 배치로 절에 흔히 있는 일주문(一柱門)은 없
다. 게다가 절이 들어앉은 위치도 사세 확장에 그리 용이한 지형이 아니라서 새로 건물을 짓
기에도 여의치가 않아 보인다.

▲  불국사 약수터
내가 갔을 때는 수질 부적합 판정으로
잠시 휴업 상태였다.

▲  2층으로 이루어진 삼성각(三聖閣)
1993년에 지은 것으로 2층은 삼성각, 1층은
공양간과 요사, 선방으로 쓰인다.


이 절은 고려 말기인 1352년에 진정국사(眞靜國師)가 창건하여 약사사(藥師寺, 약사절)라 했
다고 전한다. 믿거나 말거나 설화에 따르면 절 아랫마을(일원동)에서 박씨 농부가 경작을 하
고 있었는데 소가 논 한가운데서 나아가지 않아 살펴보니 글쎄 땅 속에 석불(지금의 불국사
석불좌상)이 있는 것이었다.
하여 바깥으로 꺼내 가까운 봉은사(奉恩寺)에 넘기려고 했으나 석불이 거부 반응을 보이며 꿈
쩍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약사절로 보내려고 하니 갑자기 석불이 지푸라기보다 가벼워져 그
곳으로 옮겼다. 그때 불상이 발견된 논을 부처논이라 불렀고 그 옆을 흐르는 개천을 부처내라
불렀다고 한다.

다른 설로는 절 아랫마을에서 농부가 밭을 갈다가 석불을 발견하여 마을 뒷산에 자리를 만들
어 봉안했는데, 진정국사가 그 소식을 듣고 달려와 1385년에 그 자리에 절을 세워 약사절(약
사사)이라 했다는 것이다.
위에 언급된 설화의 내용처럼 과연 진정국사가 창건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석불은 고려
후기 것으로 판명이 난 상태라 창건시기와도 그런데로 맞아보인다. 또한 밭에서 발견되었다는
설화를 통해 지역 농민들이나 지역 세력가의 발원으로 석불이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불국사에서 동쪽으로 조금 가면 옛 절터(일원동 246-12)가 있는데, 그곳이 불국사의 원래 자
리라고 한다. 허나 언제쯤 현 위치로 옮겨졌는지는 대모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창건 이후
500년 동안 마땅한 흔적을 남기지 못했으며, 1874년 고종(高宗)의 지원으로 중창을 했다고 전
하는데, 그때 현 자리로 이전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대모산 남쪽 헌인릉(獻仁陵)에서 물이 나오자 고종은 그곳과 가까운 약사사 주지에게 의
견을 물었다고 한다. 이에 주지승이 대모산 동쪽(현 성지약수터)의 수맥을 끊으면 된다고 답
을 올려 그렇게 하니 과연 물이 나오지 않았다고 하며, 고종은 고마움의 뜻으로 불국정토를
이루라는 뜻에 '불국사'란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다른 설로는 고종의 꿈에 헌릉에 묻힌 태종이 자꾸 나타나자 그를 달래고자 약사사를 증축하
고 불국사란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  1칸짜리 나한전(羅漢殿)
불국사에서 가장 늙은 건물로
1964년에 지어졌다.

▲  나한전 내부
석가여래와 문수/보현보살, 16나한,
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다.


6.25전쟁 때 절이 처참히 파괴되고 오로지 창건 설화에 나온 석불만 겨우 살아남았는데, 1963
년 안양 삼막사(三幕寺)에서 온 권영선(풍곡당)이 중창해 법당과 칠성각, 나한전(1964년)을
세웠다. 이후 건물이 낡고 협소하여 영길(법선당)이 1993년부터 3년의 불사 끝에 나한전을 제
외한 모든 건물을 싹 갈고 탱화를 새로 제작했다.

강남구의 거의 유일한 늙은 산사로 강남권에서는 봉은사 다음 급이며, 고색의 향기는 말끔히
씻겨 내려갔으나 이곳의 유일한 보물인 늙은 석불이 전하고 있어 나름 오래된 절임을 증명하
고 있다.
시내와 가깝긴 하지만 숲에 푹 묻힌 탓에 고적하고 아늑한 산사의 멋과 여유를 누리기에 부족
함은 없으며, 으리으리한 경주 불국사와 달리 두 눈에 쏙 들어올 정도로 조촐하여 은근히 정
감이 간다.


▲  약사보전 내부 (단란한 모습의 약사5존상과 불단, 닫집)

불국사의 중심 건물(법당)인 약사보전(약사전)은 삼성각과 더불어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약사전 앞에는 근래 마련된 5층석탑이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매끄러운 하얀 피부를 드러내
고 있고, 약사전으로 오르는 돌계단 좌우에는 수호의 의무를 지닌 돌사자 2기가 있는데, 사자
의 탈을 쓴 고양이처럼 귀엽게 다가온다.

약사전 불단에는 약사여래를 중심으로 3존상도 아닌 무려 5존상이 봉안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 왜 특이하게 5존상으로 불단을 장식했을까? 실제 다른 절에서는 3존불(또는 3존상) 주변에
별도의 불상과 보살상을 두는 사례도 많고 이곳 불국사 같은 경우는 지형상 다른 여래나 보살
상을 중심으로 한 건물을 더 두기가 곤란하므로 그 역할을 약사전이 싹 도맡고 있는 것이다.
즉 약사전이라고 해서 약사여래만 집중적으로 취급해야 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대신 불단
가운데에 약사여래를 높게 배치하고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등 4개의 협시보살상을 낮게 배치
하여 5존상을 구성했다.


▲  불국사 석불좌상(가운데 석불)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36호

이들 5존상 가운데 가장 맏이는 가운데에 있는 석불좌상(약사여래상)이다. 이곳의 중심 불상
답게 좌우에 거느린 보살상보다 대좌(臺座)가 높은데, 그의 우측에는 육환장(六環杖)을 든 승
려머리의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좌측에는 보관(寶冠)을 눌러쓰고 가슴에 금색 장식을 단 관
세음보살이 있으며, 양쪽 끝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앉아있다. 그리고 그들 뒤로 석가여
래를 중심으로 도드라지게 돋음새김으로 조성된 후불탱이 든든히 자리해 있다.

불국사 석불좌상이라 불리는 이 약사여래상은 밭에서 나왔다고 전한다. (지역 농민이나 지역
세력가의 발원으로 조성된 것을 그리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음)
불국사가 가장 의지하고 있는 이곳의 든든한 밥줄로 그를 내세워 약사도량을 칭하고 있는데,
절에서는 약사불(약사여래)이라 하여 많은 정성을 들이고 있다. 허나 고려 때 약사여래와는
다소 차이가 있어 처음부터 약사불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며, 원래 정체는 아미타불로 여겨
진다. 그런 것을 나중에 약사여래로 강제 전환시킨 것으로 여겨진다.

불상의 높이는 79.5cm로 머리의 크기가 신체에 비하여 너무 크다. 하얀 피부의 몸과 달리 머
리는 검은 색이며 꼽슬인 나발이다. 머리 꼭대기에는 육계로 보이는 하얀 혹이 솟아 있으며,
홍예처럼 구부러진 눈썹 사이로 백호가 있다. 지그시 뜬 두 눈으로 중생을 보는 약사여래의
표정은 그야말로 인자함이 느껴진다. 오뚝 솟은 코와 붉은 입술, 살이 두툼해 보이는 양쪽 볼
은 정말 손으로 비벼보고 싶다. 두 귀는 중생들의 소망을 하나도 빠짐없이 접수하려는 듯, 안
테나처럼 크다.
그의 몸에 걸쳐진 법의(法衣)는 석굴암(石窟庵)의 본존불처럼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있으며
이런 형태를 어려운 말로 우견편단(右肩偏袒)이라고 한다. 다리 위에 놓여진 두 손은 선정인(
禪定印)을 취하고 있으며, 손 위로 알 모양의 빨간색 물건이 있는데, 이는 약사여래가 늘 지
니고 다닌다는 약합(藥盒)이다. 약합에는 중생을 치료하기 위한 그만의 치료제가 들어있을 것
이다.

그는 원래 맨돌의 불상이었으나 나중에 호분(胡粉, 조개껍데기를 태워 만든 것으로 여자들의
화장품으로 많이 사용됨)
으로 하얗게 떡칠을 하여 하얀 피부의 석불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원래 모습을 적지 않게 잃었다.
신라 후기~고려 초기 시절 유행했던 불상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머리와 신체 비례가 맞지 않
으며, 자연스럽지 않은 옷주름 조각 등으로 고려 후기 것으로 여겨진다.

* 불국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원동 442
(광평로10길 30-71 ☎ 02-445-4543)


▲  두툼하고 탐스럽게 열린 어여쁜 불두화(수국)
순백의 불두화보다는 그래도 색이 입혀진 불두화가 더 유혹적이다.

▲  불국사를 뒤로하며... 대모산도시자연공원 숲길

▲  그림 같은 숲길, 대모산공원 산책로

대모산공원으로 내려와 에어브러쉬(air brush)로 대모산이 나에게 살짝 붙여둔 존재들을 말끔
히 털어버렸다. 이제 내가 서식하고 있는 세상으로 갈아타야 되니 지금까지 의지한 다른 세상
의 흔적을 싹 지우는 것이다. 오늘 나들이도 충분히 그리고 달달하게 즐겼으니 나의 제자리로
돌아가 잠이나 실컷 자야겠다.
이렇게 하여 대모산 여름 나들이는 그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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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10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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