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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교동도 화개산 ~~~~~ 강화 교동도의 지붕. 화개산 나들이 ~~~~~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교동평야와 고구저수지 (바다 너머로 멍하게 보이는 곳이 북한 땅) ▲ 화개약수 ▲ 화개산 한증막 ♠ 교동도의 지붕, 화개산 오르기 (봉수대, 화개산 정상) ▲ 읍내리에서 바라본 화개산 여름 제국(帝國)이 막바지 절정에 이르던 8월 광복절에 강화도와 황해도(黃海道) 사이에 자리 한 교동도를 찾았다. 아침 일찍 도봉동(道峰洞) 집을 나서 별다른 정체 없이 강화터미널에 도착했다. 강화도는 꿀 명소가 많다 보니 주말과 휴일에 나들이, 답사 수요가 폭발적이라 교통정체를 피하고자 아침 부터 부지런을 떤 것이다. 강화터미널에서 교동도의 발인 강화군내버스 18번(1일 11회)을 타고 송해면과 하점면, 인화리 검문..
1. 평화로운 모습의 월송해변 월송정 동쪽에 길게 펼쳐진 해변으로 북쪽으로 구산해변(구산해수욕장)과 이어져 있다. 2. 월송정 월송정은 동대해(동해바다)를 따라 펼쳐진 관동8경의 일원으로 관동8경 가장 남쪽에 자리한다. (가장 북쪽 은 금강산에서 가까운 총석정) 신라 때 화랑인 영랑, 술랑, 남석랑, 안상랑이 월송정 주변에 펼쳐진 송림에서 달놀이를 즐기며 머물렀다는 전설이 서려있는데, 고려 때 월송사 부근에 지어진 것을 연산군 시절에 강원도관찰사 박원종이 중건했다고 전한다. (그가 지었다고도 함) 소나무숲을 넘는다는 뜻의 '월송(越松)' 대신 달과 소나무를 뜻하는 월송정(月松亭)이라 부르기도 하며 호랑 이가 담배맛을 알기 이전부터 시인, 묵객들이 앞다투어 찾아와 이곳의 절경을 즐기며 찬양했다. 고된 세월..
1. 월송리 소나무숲 솔내음이 그윽한 월송리 소나무숲은 월송정입구(7번 국도)에서 월송정까지 넓게 펼쳐져 있다. 제8회 아름다 운 숲 전국대회에서 네티즌이 선정한 아름다운 누리상에 선정된 곳으로 늘씬한 소나무들이 단단하게 뭉쳐 장관을 이루고 있는데, 숲입구에는 황만영선생기념비와 평해황씨시조제단 등이 자리하여 숙연함을 보탠다. 2. 월송리 소나무숲 속으로 (월송정 서쪽) 끝이 보이지 않는 저 송림 속에 나를 숨겨본다. 이 세상이 잠시동안 나를 찾지 못하게.. 허나 나를 찾는 이가 없다는 것이 함정 ㅠㅠ 3. 솔내음이 가득한 월송리 소나무숲 이런 숲길은 아무리 걸어도 지루하지가 않다. 4. 월송정의 일기장, 월송정기 월송정은 동대해(동해바다)를 따라 펼쳐진 관동8경 식구 중 가장 남쪽에 자리한다. (가장 북..
1. 울진대종 종각 (망양정 해맞이공원) 망양정 남쪽이자 망양정 해맞이공원 동부에 울진대종을 품은 팔작지붕 종각이 있다. 울진대종은 울진군에 서 2006년 12월에 야심차게 장만한 종으로 부산 지방무형문화재인 박한종이 제작하고 서울대 정밀기계설 계공동연구소에서 설계 및 감리를 담당하여 5개월만에 완성을 보았다. 제작비는 약 2억원이 들었으며, 종의 높이 286cm, 무게 7,518kg의 크고 견고한 종으로 해돋이행사와 1월 1 일 새해 타종식 때 몸을 푼다. 종의 이름은 울진을 상징하고 부르기도 쉬운 '울진대종'이라 하였는데, 경주에 있는 성덕대왕신종의 아름다 운 비천상을 응용했으며, 명문은 울진 출신 학자인 김명인이 맡아 울진의 무궁한 발전과 화합을 염원하는 내용을 새겼다. 2. 울진대종 주변에서 바라..
1. 망양정 북쪽을 흐르는 왕피천 왕피천은 67.75km의 긴 하천으로 울진의 대표 젖줄이다. 백두대간의 일원인 영양군 금장산(849m)에서 발원하여 매화천 과 광천(불영계곡)을 흡수하여 동해바다로 흘러가는데, 망양정 북쪽에서 동대해(동해바다)와 합쳐진다. 호랑이가 담배 맛 을 알기 훨씬 이전에 실직국(강원도 삼척) 왕이 왕피천 부근으로 피신해 은거했다고 전하며, 그로 인해 마을 이름은 왕피 리, 그 앞을 흐르는 하천은 왕피천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왕피천이란 이름이 왕이 피신을 했다는 뜻임) 2. 왕피천과 동대해가 만나는 곳 (망양정해수욕장 북쪽) 모래사장이 왕피천(왼쪽)과 동대해(오른쪽)를 구분해주고 있다. 3. 망양정으로 인도하는 소나무숲길 4. 망양정 숲길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앞에 ..
1. 봉국사 동쪽 숲길 봉국사 일주문 바로 안쪽에 동남쪽 산자락으로 인도하는 나무데크 숲길이 있다. 근래 닦여진 상큼한 숲길로 그 길을 오르면 '북한산 동네숲'이라 불리는 푸른 언덕 공원이 마중을 한다. 언덕 경사를 순화시키고자 봉국 사 쪽은 나무데크 계단길을 깔아두었고, 경사가 완만한 언덕 윗부분은 볏짚을 씌운 흙길이 북한산동네숲까 지 이어진다. 길은 비록 짧으나(200m 정도) 숲이 울창하여 산내음과 솔내음이 그윽하다. 2. 녹음 속을 가르는 봉국사 동쪽 숲길 3. 북한산동네숲 능학정 북한산동네숲은 정릉2동 정수초교 뒤쪽 언덕이자 봉국사 동쪽 산자락에 닦여진 조촐한 동네 공원이다. 숲과 경작지를 손질하여 내놓은 생태공원에서 시작된 공원으로 에코체험관과 사계절테마원, 생태연못, 운동시설 등을 지니고 있..
1. 정릉동 봉국사에서 먹은 석가탄신일 공양밥 (2020년 석가탄신일) 봉국사 공양밥은 절에서 매우 흔한 비빔밥 스타일의 공양밥으로 무채와 콩나물, 시금치 등의 나물과 고추장 을 버무려 잘 비벼먹으면 된다. 밥 외에 시원한 나박김치도 나와 소화를 흔쾌히 도우며, 물과 후식용 커피믹 스도 준비되어 있다.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에는 대부분의 절에서 공양밥을 흔쾌히 제공하는데 2020년에는 중공 잡것들이 악의적으로 퍼트린 코로나 전염병 때문에 많은 절에서 공양밥 제공을 축소하거나 떡 같은 간식으로 대체해 전년(2019년)만큼 먹을거리는 풍성하지 못했다. (인근 돈암동 흥천사는 떡과 생수를 제공하는 것으로 공양 밥을 대신 했음) 지금도 코로나는 여전하여 올해(2021년) 석가탄신일(5월 19일) 공양밥 인심도..
1. 독성각에서 바라본 봉국사 경내 뜨락 (천불전과 만월보전 사이) 2. 독성각 독성상과 독성탱 독성각은 독성(나반존자)의 공간으로 그의 상과 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모두 근래에 장만했음) 3. 벼랑에 자리한 독성각 독성각은 1칸짜리 맞배지붕 집으로 벼랑에 아슬아슬하게 깃들여져 있다. 4. 만월보전 옆에 있는 나무상자(괘불함) 봉국사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아미타괘불도란 괘불이 있는데, 그 괘불이 저 나무상자에 들어있다. 괘불은 석가탄신 일 등 절의 특별한 날에만 잠깐씩 모습을 비추는 비싼 존재로 평소에는 친견하기가 매우 어렵다. 봉국사 괘불은 아직까 지 친견을 못해 마음 같아서는 저 괘불함을 열어보고 싶으나 그가 들어있는 괘불함을 이렇게 보았으니 그것으로 일단 만족을 하련다 (나에게 그 비싼 괘불함을..
1. 명부전 인왕상과 사자도(위에 있는 그림) 명부전의 식구인 사자도는 1898년에 그려진 것으로 19세기 후반 불화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밑에 있는 인 왕상은 호랑이탈을 쓴 고양이처럼 귀여운 모습이다. (사자도는 서울 지방유형문화재인 '명부전 석조지장삼존상과 시왕 상, 권속일괄'의 일원임) 2. 벼랑에 아슬아슬하게 자리를 닦은 독성각 독성각은 1칸짜리 맞배지붕 집으로 벼랑에 아찔하게 걸터 앉아있다. 이곳은 독성(나반존자)의 거처로 만월보전 좌측에 서 접근하면 되는데, 건물 정면 바깥은 바로 벼랑이라 주의가 필요하다. 3. 봉국사 경내 (천불전 앞에서 바라본 모습) 4.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산신각 독성각보다 더 높은 벼랑 위쪽에 산신각이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차산 봄나들이 (상부암 석보살입상, 아차산생태공원, 아차산성, 온달샘석탑, 우미내계곡) ' 고구려 유적의 성지, 아차산 봄나들이 ' ▲ 아차산 생태공원 소나무숲 ▲ 아차산성 ▲ 온달샘 석탑 ♠ 한강변에 숨겨진 오래된 석불, 상부암 석보살입상(上浮庵 石菩薩立像)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80호 ▲ 상부암 석불의 거처인 상부관음전(上浮觀音殿) 수도권 고구려(高句麗) 유적의 성지(聖地)이자 야간 등산의 성지로 추앙받는 아차산(峨嵯山, 295m)은 내 즐겨찾기 뫼의 하나로 1~2달에 1번꼴로 안기고 있다. 그렇게나 자주 안기는 아차 산이지만 며칠도 안가서 아차산 앓이가 도져 그곳에 깃든 미답지(未踏地)를 1개라도 지울 겸 그의 품을 다시 찾았다. 이번에는 바로 산으로 들어가지 않고 광장동 구석에 숨겨진 오래된..
1. 정릉동 봉국사 (봉국사 일주문) 북한산(삼각산) 남쪽 자락이자 정릉 북쪽에 자리한 봉국사는 1395년에 무학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예전에는 나 옹선사가 1354년에 창건했다고 내세웠음) 무학은 이곳에 절을 짓고 약사여래불을 봉안하여 약사사라 했다고 전하며, 1468년에 세조의 지원으로 절을 중창했다고 전한다. 허나 정릉이 복원된 17세기 중반까지 무려 200년 동안 적당한 내 력이 전하지 않고 있으며, 봉국사의 사적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기는 1669년 이후이다. 1669년 태종에 의해 260년 가까이 속세의 뇌리 속에 잊혀져 쑥대밭이 된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을 현종의 명으로 1669년에 복원되었다. 이때 정자각과 전례청 등 정릉의 부속 건물이 새로 지어지고, 인근 경국사와 이곳..
1. 삼척 신리 너와마을 미인폭포에서 동쪽으로 7km 정도 떨어진 신리 골짜기에 너와집을 듬뿍 지닌 너와마을이 있다. 너와집은 너와 집이란 뜻 이 아니라 지붕을 이는데 쓰는 '너와'란 목재를 뜻한다. 널빤지를 쓰는 나무너와와 켜가 있는 청석판을 쓰는 청석너와의 2가지가 있는데, 보통은 나무로 만든 것을 너와라 부르며, 강원도 지방에서는 '느에', '능에’라고도 한다. 너와는 지름 30㎝ 이상의 나뭇결이 바르고 잘 쪼개지는 적송이나 전나무 등의 나무 줄기에서 밑둥치와 윗부분을 잘라낸 다음 토막을 내서 사용한다. 쪼개는 방향은 생목이 서 있던 향의 동서방향에 평행이 되도록 한다. 너와의 크기는 일정치 않으나 보통 가로 20∼30㎝, 세로 40∼60㎝, 두께 4∼5㎝ 정도이다. 너와의 수량을 헤아릴 때 70장..
1. 영은사의 법당인 대웅전(대웅보전)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다포집이다. 1805년 서곡화상이 삼척부사 심공저의 지원을 받아 지은 것으로 이 때 1804년 화재로 파괴된 절을 중수했다. 장대석을 3겹을 쌓은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두고 둥근 기둥을 세웠으며, 측면 벽 상부에는 풍판을 둔 2고주 5량 구조이다. 기둥은 민흘림으로 전, 후 기둥은 평주이고, 측면과 중앙의 네 기둥은 고주이 며, 법당 내부의 중앙 2개 고주가 대들보를 받치고 있다. 공포는 내삼출목, 외이출목의 다포형식으로 기둥 사이에는 2개씩의 간포를 마련해 도리를 받치고 있으며, 정면의 살미는 쇠서이고, 후면은 운공, 내부는 연봉형이다. 문의 형식은 중앙 어간은 3분합 빗살문이며, 양 협간은 2분합 빗살문으로 우 측 ..
1. 영은사 앞을 흐르는 추천 한오봉과 천봉에서 발원한 추천은 궁촌리와 영은사를 거쳐 동해바다(동대해)로 흘러간다. 2. 영은사 팔상전 근덕면 궁촌리 산골에 푹 묻혀있는 영은사는 오대산 월정사의 말사로 범일조사가 892년에 창건하여 운망사라 했다고 전한 다. 1585년 사명대사가 머물면서 중수했다고 전하며 1804년 산불로 팔상전을 제외하고 모두 소실되자 1805년 중수했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보전을 비롯해 팔상전과 심검당, 요사 등 6~7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대웅보전과 팔상전, 괘불 등 의 지방문화재를 지니고 있다. 그밖에 1810~1811년에 조성된 탱화 여럿과 1770년에 세워진 월파당선사부도 등의 늙은 부 도탑 3기, 1830년에 세운 사적비가 전한다. 팔상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
1. 위창 오세창묘 (국가 등록문화재) 오세창(1864~1953)은 서화가이자 언론인으로 서울 출생이다. 부친 오경석은 청나라에서 많은 서적을 가져 와 개화에 앞장섰던 역관으로 오세창도 그런 부친의 영향으로 20세에 역관이 되었다. 1888년 박문국 주사 로 있으면서 이 땅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 기자를 겸임했으며, 우정국 통신국장 등을 거쳐 1897년에 1년간 왜열도 동경외국어학교에서 조선어 교사로 일했다. 개혁당 사건으로 1892년 왜열도로 넘어갔으며, 거기서 손병희의 권유로 천도교에 들어가 의암 손병희의 참 모로 활동했다. 그리고 1919년 3.1운동 때는 손병희와 함께 천도교 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했다. 손병희 사후(1922년) 천도교 내부 갈등이 심해지자 그는 왜정에 비타협적인 보수파 노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