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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촌의 한복판을 거닐다 ' (박노수미술관~윤동주 하숙집터) ▲ 옥인동 박노수 가옥 봄이 한참 익어가는 4월의 한복판에 일행들과 경복궁(景福宮) 서쪽에 자리한 서촌을 찾았 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깃든 서촌(西村)은 부암동(付岩洞)과 백사실(백사골), 북촌(北村 ), 북악산(백악산), 인왕산(仁王山), 북한산(삼각산), 호암산(虎巖山), 아차산 등과 더불 어 내 마음을 제대로 앗아간 곳으로 봄이 겨울로부터 천하를 해방시키면서 다시금 서촌앓 이가 시작되었다. 서촌은 경복궁과 인왕산, 서대문(돈의문) 사이를 일컫는다. 서촌의 중심지로 꼽히는 인왕 산과 경복궁 사이 동네는 원래 웃대라 불렸으며, 인왕산과 북악산(백악산)을 병풍으로 삼 아 경관이 아름답고 계곡이 즐비해 조선 초부터 왕족과 귀족들의 별장지로 인..
1. 경희궁 뒤쪽에서 바라본 경희궁 숭정전~태령전 구역과 서울 도심(광화문 주변) 정면에 뒷통수를 보인 집이 태령전, 그 너머로 용머리를 내민 집이 숭정전과 자정문, 왼쪽에 온전하게 보이는 팔작지붕 집 이 자정전이다. 2. 경희궁 태령전, 서암 뒤쪽 산책로 3. 영렬천 경희궁 뒤쪽 언덕 숲길에 영렬천이란 조그만 바위샘이 있다. 이곳은 지금은 사라진 경희궁 위선당 뒤쪽으로 물이 늘 마르지 않고 쏟아져 나오고, 그 물도 매우 차가워 초정이라 불렸다. 서암에 있는 샘터와 함께 경희궁의 식수를 책임지던 곳으로 선 조의 글씨를 집자한 영렬천 바위글씨가 샘 위에 새겨져 있다. 4. 지금도 선명하게 남은 영렬천 바위글씨 이곳은 경희궁 위선당 뒤쪽이자 숭정전 서쪽으로 경희궁에서 가장 서쪽 구석이다. (숭정전, 태령전,..
1. 층층이 길게 펼쳐진 숭정전 행각 궁궐의 중심 건물(정전, 법전)은 건물 주위로 길게 행각을 둘렀다. 2. 숭정전 행각 속으로 3. 숭정전 드므들 드므는 화재에 대비하여 물(방화수)을 담아두던 큰 그릇이다. 허나 큰불이 나면 드므에 담긴 물로는 어림도 없다. 그러니 무 조건 자나깨나 불조심, 화재 조심이다. 4. 경희궁 숭정전 숭정전은 경희궁의 중심 건물(정전, 법전)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단층 집이다. 1618년 정도에 건립되 었으며, 경종과 정조, 헌종이 여기서 즉위식을 가졌다. 왜정이 1926년에 헐값으로 조계사에 넘어갔으며, 이후 동국대로 넘어가 동국대 정각원이란 불당으로 지금까지 살아가고 있다. 1988년 이후 경희궁을 일부 복원하면서 원본을 그대로 놔둔 채, 이곳에 ..
1. 경희궁 태령전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영조의 어진을 봉안했던 곳이다. 원래는 딱히 용도가 없던 잉여 건물이었으나 영조 의 어진이 그려지자 1744년 이 건물을 중수해 여기에 어진을 봉안했다. 왜정 시절에 파괴된 것을 2000년에 서궐도안을 참조해 복원했으며, 현판은 석봉 한호(한석봉)의 글씨를 집자해 제작했다. 건물 안에는 근래 모사된 영조의 어진이 봉안되어 있어 건물의 역할과 기능은 여전하다. 2. 태령전에 봉안된 영조의 어진 3. 굳게 닫힌 태령문(태령전 정문) 태령전은 왕년의 시절에도 궁역 서쪽 구석이었고, 일부 복원된 지금도 서쪽 구석이다. 태령문은 늘 닫혀있기 때문에 여기서 숭정문으로 다시 돌아나가야 된다. 4. 자정전 뒤쪽 바위 (서암 동쪽 바위) 자정전 뒤쪽에는 인왕산..
1. 경희궁 숭정전 숭정전은 경희궁의 중심 건물(법전, 정전)로 1618년에 세워졌다. 경종과 정조, 헌종이 여기서 즉위를 했으며, 1926년에 왜 정이 조계사에 팔아먹어 조계사로 넘어갔다가 동국대로 이전되어 불당인 동국대 정각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곳 숭정전은 1988년에 복원된 것으로 흥화문처럼 복원은 되었으나 완전하게 이전은 하지 않아 숭정전의 원본은 동국대 에 계속 머물고 있다. 경희궁의 정전이긴 하나 다른 궁궐과 달리 궁역 한복판이 아닌 서쪽 구석에 자리해 있고, 2층(중층) 구조가 아닌 1층 구조 로 다른 궁궐(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정전에 비해 크기는 작다. 건물 주위를 행각으로 빙 둘렀으며, 그 뒤에는 편전인 자 정전이 자리해 있다. 2. 숭정전 돌계단과 월대 용과 봉황무늬가 있는 가..
1. 경희궁 흥화문 경희궁은 조선 후기 때 이궁으로 바쁘게 쓰였던 곳이다. 지금은 서울역사박물관 뒤쪽에 복원된 일부만 남아 아주 초췌한 모습이나 왕년에는 이 주변을 모두 아우르며 10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을 지녔던 궁궐로 그 규모는 현재 덕수궁보다 훨 씬 컸다. 경희궁 자리는 인조의 아비인 원종(덕흥대원군)의 집이 있던 곳으로 광해군은 창덕궁을 흉궁이라 여겨 인왕산 필운대 주 변에 인경궁과 원종 집 자리에 경덕궁(경희궁)을 세워 왕실의 위엄을 드높이고자 했다. 경덕궁은 1617년에 짓기 시작해 1623년에 완성을 보았으며, 원종의 시호인 '경덕'과 같은 발음이라 1760년 경희궁으로 이름이 갈렸다. 도성 서부에 있어서 동궐에 상반되는 의미로 서궐이라 불렸으며, 인조부터 철종까지 10대에 걸쳐 제왕들이..
' 서촌 늦가을 나들이 (월암근린공원에서 황학정까지) ' ▲ 행촌동 은행나무 ▲ 황학정 ▲ 친일파 홍난파 가옥 늦가을의 한복판에 친한 후배와 서촌(西村) 지역을 찾았다. 흔히 서촌하면 경복궁(景福宮) 서쪽 일대를 일컬으나 원래는 서대문<西大門, 돈의문(敦義門)> 안쪽 지역이었다. ..
1. 선희궁터 사우 신교동 서울농학교 교내 뒷쪽에 선희궁 사우가 있다. 선희궁은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이씨의 사당으로 일종 의 사묘(사친묘)이다. 즉 제왕이 후궁이던 자신의 생모나 친조모를 위해 세운 사당이다. 처음에는 의열묘라 불렸으나 정조 때 선희궁으로 높..
1. 선희궁터, 서울농학교 뒤쪽 언덕에서 바라본 서촌(웃대)과 서울시내 선희궁 자리였던 서울농학교 뒤쪽에 옛 선희궁 건물이 하나 남아있다. 그 옆에 뒤쪽 언덕으로 오르는 숲길이 있는데, 그 길의 끝에 이르면 서울 도심을 조망하는 전망대가 나온다. 이곳은 이춘제가 세심대와 옥류동 ..
1. 궁정동 무궁화동산 (옛 궁정동 안가터) 청와대 서쪽 길 건너편에 무궁화의 성지인 무궁화동산이 있다. 이곳은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된 1979년 10.26사태가 일어났던 궁정동 안가(안전가옥) 자리로 이후로도 계속 청와대 구내로 금지된 곳에 묶여있다가 1993년에 청와대 앞길이 개방되면서 ..
1. 통의동 백송터 백송은 피부가 하얀 소나무로 중원대륙이 원산지이다. 우리나라에 있는 백송은 조선시대에 명나라나 청나라에 사신으로 간 사 람들이 기념으로 가져와 심은 것들로 그 개체수가 얼마되지 않는다. 그중 서촌(웃대)의 일원인 통의동 한복판에 이 땅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
* 옥인동 구석에 남아있는 친일매국노 윤덕영의 기와집 윤덕영은 서촌(웃대)에서 가장 풍경이 좋은 옥인동과 송석원 일대를 싹 매입하여 벽수산장이란 프랑스식 건물과 14동의 한옥을 지었다. 벽수산장은 222평 규모로 '송석원별장'이란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 윤덕영 자신은 벽수산장에 ..
* 필운동 홍건익가옥 홍건익가옥은 청계천에서 장사를 했던 홍건익이 1936년에 지은 개량한옥이다. 740.5평방미터의 대지에 대문채와 행랑채, 사랑 채, 안채, 별채 등 5동의 한옥을 두었는데 서울에 남아있는 한옥 중, 후원에 일각문과 우물, 빙고를 모두 갖춘 집은 이곳이 유일 하다. 전통한..
1. 운강대 바위글씨 북악산(백악산) 남쪽 자락에 자리한 경복고등학교 안에 운강대 바위글씨가 있다. 조그만 바위에 살짝 깃들여진 이 바위글씨는 이 곳에 살았던 운강 조원(1544~1595)의 흔적을 기리고자 새겨진 것으로 그의 손자인 조석형이 새겼다고 하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종로구지 ..
1. 월암동 바위글씨 돈의문 뉴타운 개발로 산뜻하면서도 밋밋하게 변해버린 송월동에 월암동 바위글씨가 있다. 누가 썼는지는 귀신도 모르나 그 필치로 보아 명/청나라의 장필과 미불의 글씨가 유행했던 조선 중/후기 것으로 여겨진다. 결구가 치밀하게 풍격이 고고한 글씨로 1656년에 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