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블로그를 개설하지 않으셨습니다.친구 신청을 하시려면 먼저 블로그를 개설해 주세요.
지금 개설 하시겠습니까?
친구가 되시면 친구의 새글 및 활동에 대한 알림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snowlove78님에게 친구신청을 하시겠습니까?
친구 신청을 했습니다.상대가 수락하면 친구가 됩니다.
친구 신청을 실패했습니다. 잠시 후 다시 시도해 주세요.
친구 신청 가능 수를 초과했습니다.
도봉산고양이의 블로그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누추하지만 네이버 블로그도 있으니 많이 보러들 오세요 ~~! ☞ http://blog.naver.com/py1978
1. 굴업도해수욕장(큰말해수욕장) 큰말 앞에 펼쳐진 굴업도해수욕장은 동서로 길쭉한 모래 해변으로 약 500~600m 정도 된다. 해변 북쪽에 마을(큰말)이 있 어 해수욕 피서지로 좋으며, 해변 동쪽에 소굴업도, 서쪽에는 개머리언덕이 자리한다. 개머리언덕은 해수욕장 서쪽 끝에 올라가는 길이 있으며, 소굴업도는 해변을 따라 동쪽으로 가면 되는데, 썰물 때만 접근이 가능하니 마을 사람들에게 물때 를 꼭 확인하여 접근하기 바란다. 2. 굴업도해수욕장 동쪽 구간과 밀물로 잠시 떨어진 소굴업도 3. 굴업도 숲길 (굴업도 선착장으로 내려가는 숲길) 우리는 굴업도 마을 민박집에 여장을 풀고 잠시 쉬다가 굴업도 동부를 둘러보러 목기미 해변으로 이동했다. 이 숲길은 마을에서 굴업도 선착장을 빠르게 잇는 숲길로 2009년에..
1. 양화진 옛터 (양화진역사공원) 절두산성지가 들어앉은 잠두봉 북쪽에 양화진 옛터가 있다. 양화진은 양화나루를 지키던 조선시대 군사시설로 1754년 한 강과 서울을 방어하고자 군진을 설치하고 상비군을 주둔시켰다. 허나 20세기 이후,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졌으며, 잠두봉 북쪽에 양화진공원(양화진역사공원)을 닦으면서 양화진 군 진터 일부에 네모나게 장대석을 둘러놓고 그 안에 건물터를 닦아 이곳이 양화진의 옛터임을 알려주고 있다. 2. 옆에서 바라본 양화진터 (양화진공원) 3. 양화진 옛터를 알리는 표석 4. 양화진터 북쪽에 늙은 느티나무 양화진터 북쪽 언덕에 그림처럼 솟은 늙은 느티나무로 서울시 보호수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느티나무가 있는 언덕과 그 서쪽에는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이 닦여져 있는데..
올림픽공원(몽촌토성) 늦가을 나들이 ~~~ 늦가을 올림픽공원(몽촌토성) 나들이 ~~~ ▲ 올림픽공원 몽촌토성 ▲ 올림픽공원 보호수 느티나무 ▲ 몽촌토성 동벽 늦가을이 한참 익어가던 11월 첫 무렵, 일행들과 나의 즐겨찾기 명소의 하나인 올림픽공원 을 찾았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린 14시에 몽촌토성역(8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올림픽공원으로 들어섰 는데, 너른 공원에는 주말을 맞아 늦가을 정취를 즐기려는 온갖 사람들로 그야말로 북새통 을 이루었다. ♠ 올림픽공원(Olympic Park) 입문 ▲ 지구 평화를 위한 웅대한 날개짓, 허나 진정한 평화는 아직도 멀었다 - 세계평화의문 올림픽공원의 정문이자 올림픽공원9경의 제1경으로 손꼽히는 세계평화의문은 1988년 7월 건축 가 김중업이 만든 것이다. 문 높이 ..
1. 절두산성지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높이 20m의 잠두봉 정상에 천주교가 씌워놓은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과 절두산성지 성당이 있다. 이들은 절두산성지의 중심적인 존재로 왼쪽에 길쭉한 건물이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오른쪽에 십자가가 있는 건물이 절두산성지 성당인데, 박물관에는 조선 후기부터 20세기까지 이 땅의 천주교 역사 유물이 들어있으며, 종종 특별전도 열고 있다. (관람시간은 9시30분~17시, 매주 월요일 휴관, 입장료는 없음) 2. 활짝 열린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잠두봉, 절두산성지는 여러 번 와봤지만 순교자박물관은 이번이 첫 인연이다. 천주교 쪽은 관심이 거의 없으나 기왕 왔으니 미답처도 하나 지울 겸, 정말 간단히 둘러보았다. 3. 1890년에 제작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지도서 파리외방전교회가 ..
1. 절두산성지에 있는 은언군과 송마리아 묘비 은언군(1755~1801)은 사도세자의 서자이자 정조의 이복동생이다. (동시에 순조의 숙부가 됨) 부인인 송마리아는 진천송 씨인 참봉 송낙휴의 딸로 그들은 청나라에서 온 주문모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은 일로 1801년 신유박해 때 사사되고 만다. 이후 손자인 철종에 의해 신원이 되었으며, 무덤은 구파발 동쪽 이말산(진관동 78-1번지)에 있었으나 6.25때 실전되고 말 았다. (이말산 일대를 조사하면 무덤이 나올 듯 함) 묘비만 남아있던 것을 후손 이우용이 1989년 9월 26일 천주교에 기증 하여 절두산성지에 이렇게 안착을 했다. 2. 남상교(1783~1866) 청덕거사비 남상교는 남종삼의 백부이자 양부로 현풍현감 재직 때 선정을 많이 베풀어 지역 사람들이 ..
1. 형구돌 18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을 교수형으로 처단하려고 사용했던 돌덩어리이다. 저 돌덩어리에 죽어간 사람들의 신 음과 메아리가 들리는 듯 하여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2. 연자매처럼 보이는 이것은?? 모습은 연자매이나 실은 노기남 대주교의 금경축 기념비이다. 노기남(1902~1984)은 최초의 한국인 주교이자 제10대 서울 대교구장을 지낸 사람으로 대주교 사제 수품 50주년(1980년 10월 26일)을 기념하고자 세웠는데, 그 기념비를 특이하게 연 자매로 만들었다. 원래는 그의 합정동 자택에 있었으나 나중에 이곳 절두산성지로 옮겼다. 3. 절두산성지 한복판에 세워진 김대건 신부 동상 4. 석굴에 봉안된 하얀 피부의 성모 마리아상 5. 성모 마리아상 주변 6. 흥선대원군의 쇄국 망령이 ..
1.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 (한강 산책로에서 바라본 잠두봉) 2호선 당산철교가 지나가는 곳에는 서울의 주요 나루터인 양화나루가 있었다. 양화나루가 언제부터 나루터로 살았는지 는 알 수 없으나 고려사에 처음 이름이 등장해 고려 때부터 나루터로 살아온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시대 이후, 한강의 5대 나루터의 일원으로 바쁘게 살았으며, 이곳이 나루터로 크게 각광을 받은 것은 강 남쪽에 선유 봉(현 선유도), 북쪽에는 잠두봉이 자리했고 그 사이로 비스듬하게 모래톱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지금과는 완전 다른 모습임) 양화나루란 이름은 인근 강변에 갯버들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잠두봉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조선 초부터 도성 밖 경승지로 유명하여 망원정 등 왕족과 사대부들이 세운..
1. 군산 동국사 (동국사 대웅전) 군산 도심부인 금광동에는 이 땅의 유일한 왜식 사찰인 동국사가 있다. 구한말 시절 왜열도 애들이 군산 지역에 많이 넘 어와 무질서하게 말뚝을 박았는데, 그때 왜식 불교도 같이 들어와 왜식 절과 포교원이 많이 지어졌다. 동국사는 그 시류 를 타고 생겨난 것으로 1909년 왜인 승려 내전불관이 왜인 일조통의 집을 빌려 지은 포교소에서 시작된다. 1913년 승려 우치다가 군산에 서식하는 왜인들의 지원을 받아 현 자리로 절을 옮겨 금강선사란 간판을 내걸고 본당과 고 리를 만드니 그것이 지금의 동국사 대웅전이다. 그 시절 금강선사는 왜국 조동종 소속의 절로 1919년에 범종과 범종각을 만들었고 1921년에 대문의 돌기둥을 세웠으며, 1932년에 개축을 벌였다. 1945년까지 왜..
1. 굳게 닫힌 가옥 현관 가옥 내부로 인도하는 현관문은 굳게 닫혀 있다. (가옥 내부는 공개하지 않고 있음) 2. 신흥동 일본식 가옥의 왜식 정원 3. 왜식정원에 세워진 조그만 탑 정원 수식용으로 장만한 것으로 바닥돌과 기단, 탑신, 머리장식을 지니고 있다. 7층탑 같기도 하고 8층탑 같기도 하고 좀 애 매한 모습이다. (이 땅에 8층탑은 없음) 4. 2층으로 이루어진 신흥동 왜식 가옥 5. 왜식정원에 세워진 왜식 석등 6. 신흥동 일본식 가옥 안내도 관람시간 10~18시(11~2월은 17시까지) 가옥 내부는 공개 안함 7. 신흥동 일본식 가옥의 외경과 활짝 열린 정문, 붉은 피부의 담장 8. 신흥동 일본식 가옥 외경
1. 군산 신흥동 일본식 가옥 (왜식 가옥 정문) 군산 도심인 신흥동에 왜정 때 지어진 2층 왜식 가옥이 있다. 군산은 전북의 대표 항구도시이자 전북 곡창지대에서 생산된 쌀을 실어나르던 요충지로 1900년대부터 왜정 시절까지 많은 왜인들이 건너와 말뚝을 박으며 꿀을 빨았다. 여기서 현지 주 민들을 착취하며 꿀을 빨던 왜인들은 좋은 집과 별장을 지으며 떵떵거리고 살았는데, 신흥동 왜식 가옥 역시 그중에 하나 로 포목점과 작은 농장을 꾸리며 군산부협의회 의원까지 지낸 작자가 지었다. 가옥을 이루는 건물 2채가 'ㄱ' 모양으로 붙어있고 그 사이로 왜식 정원이 있으며, 그 정원에는 커다란 왜식 석등이 있는데, 1층에는 온돌방 2개와 다다미방 2개, 응접실, 관리실, 주방, 욕실, 금고가 있고, 2층에는 다다미방..
1. 군산 해망굴 월명공원이 들어앉은 월명산 북쪽 해망령 밑도리에 군산 지역의 거의 유일한 굴인 해망굴이 있다. 1926년에 닦여진 터널로 1926년 10월 16일에 시작된 군산항 제3차 축항공사 과정에서 조성된 것인데, 중앙로(왜정 시절 명치통)와 수산업의 중심지 인 해망동을 빠르고 잇는 길로 호남 곡창지대에서 생산된 쌀을 군산항으로 빠르게 보내려는 의도로 지어졌다. 볼트 형태로 축조하여 출입구 쪽은 석축으로 내부는 콘크리트로 다졌으며, 굴 길이는 131m, 높이는 4.5m이다. 굴 주변에는 군산신사, 신사광장(현재 서초등학교), 공회당, 도립군산의료원, 안국사(현 흥천사) 등이 있어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했으며, 6.25시절에는 군산을 점령한 북한군 지휘본부가 터널 안에 들어앉았는데, 연합군 공군기의 ..
늦가을 인왕산자락길, 황학정, 행촌동 나들이 ' 인왕산자락길, 황학정, 서촌 늦가을 나들이 ' ▲ 인왕산자락길의 만추(晩秋) 늦가을이 그 절정에 이르던 11월 한복판의 어느 평화로운 날, 서울 도심에 숨겨진 상큼 한 자락길 인왕산자락길(숲길탐방로)을 찾았다. 인왕산자락길은 서울 도심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 인왕산(仁王山) 동쪽 자락에 닦인 둘레길로 2개의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제1코스(2.7km)는 인왕산길을 졸졸 따라가는 길 로 윤동주문학관에서 사직단(사직공원)까지 이어진다. 경사가 완만해 그리 힘들이지 않 고 이동할 수 있으며, 인왕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여럿 손짓해 언제든 정상 쪽으 로 방향을 틀 수 있다. 다만 인왕산길이 차량 왕래가 빈번하다보니 비록 작은 소음이지 만 종종 적막을 깨뜨..
1. 야인시대 촬영지로 유명한 군산 이영춘가옥 (가옥 내부 복도) 2. 이영춘가옥의 중심 공간인 응접실 3. 군산 지역에서 꿀을 빨았던 구마모토 농장과 그 농장에서 세운 자혜진료소 4. 이영춘의 생애와 그가 세운 개정보통학교, 농촌위생연구소 5. 구마모토농장 구마모토농장은 왜인 구마모토리헤이가 세운 것으로 군산 지역에서 가장 잘나갔던 농장주이다. 게이오대에 재학중이던 23 살에 조선 농촌을 돌아보고 오사카아사히신문에 '조선 농업은 전도가 유망하다'는 글을 기고 했으며, 그 글에 낚인 모토야마 의 지원으로 토지 매수를 시작했다. 이영춘가옥이 있는 군산간호대학 일대에 농장을 마련했는데, 1935년에는 논 3,000정보, 소속 소작인은 3,000가구, 전 가족 2만명 규모로 개정의 본장과 지경, 대야, 정읍 ..
1. 군산 이영춘가옥 군산간호대학 교내에 특이하게 생긴 이영춘가옥이 있다. 이 집은 1920년대에 군산 지역 최대 농장주로 악명을 떨친 왜인 구마모토가 별장용으로 지은 것으로 한식와 양식, 왜식 건축양식이 뒤섞여있다. 외부 형태는 서양식을 띄고 있으며, 평면 구조는 왜식의 중복도형을 바탕으로 양식의 응접실, 한식의 온돌방이 결합되어 있다. 내부 거실은 바닥이 티크목 쪽맞춤 으로 정교하게 짜여져 있으며, 상드리에 및 가구들은 서양에서 수입한 것으로 건축비가 조선총독부 관저와 비슷하게 소요 되었을 정도로 고급 자재로 떡칠을 했다. 해방 이후 농촌보건위생의 선구자로 추앙받는 쌍천 이영춘 박사(1903~1980)가 집으로 사용했는데, 그는 구마모토와 친분 이 있었고, 그를 설득해 지역 농민들에게 의료 서비스를 ..
1. 정동 고종의길 고종의길은 정동공원(구 러시아공사관터)에서 덕수궁돌담길 구세군중앙회관까지 이어지는 120m의 짧은 길이다. 1896년 아관파천 이후 고종이 덕수궁(경운궁)과 러시아공사관을 오갈 때 사용한 길로 여겨지는데, 덕수궁 중심 구역에서 영국공 사관, 미국공사관을 거쳐 러시아공사관으로 이어졌던 길로 1892년에 미국공사가 미국공사관의 이면도로로 개설했다. 이곳은 대한제국의 중심 궁궐인 덕수궁 안쪽이나 왜정을 거치면서 길은 물론 길 주변 덕수궁 건물이 파괴되었으며, 미국대 사관 영역으로 꽁꽁 묶여있다가 2011년 미국과 토지 교환을 통해 우리에게 돌아왔다. 이후 1896년 도면과 1900년대 초에 촬영된 사진 등 관련자료를 검토하고 따져서 고종의길을 닦아 2019년 세상에 내놓으면서 비로소 자유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