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운동 연구공동체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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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탄생 200주년 기획연재② 관념론에서 유물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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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2018. 6. 14.


누군가에겐 ‘고작’ 빵, 누군가에겐 생명줄, 이게 그저 생각의 차이일 뿐일까?

  

1789년 프랑스 대혁명에 나섰던 민중은 “빵을 달라!”고 외쳤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고작 빵 때문에 혁명을 일으킨단 말인가”라고 탄식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것은 혁명에 기름을 부었다. 

 

이 일화는 인간의 의식이 무엇으로부터 자라나오는지 설명해준다. 오스트리아 왕족 출신으로 프랑스 왕비가 된 마리 앙투아네트의 의식에서 빵은 ‘고작’ 빵에 불과했다. 마치 우리가 들이마시는 공기처럼, 그녀는 평생 동안 빵을 언제든 손에 쥐고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자 민중이 처한 상황은 전혀 달랐다. 굶주리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빵은 ‘생명처럼 소중한 것’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기꺼이 이 빵을 위해, 그리고 이 빵을 얻게 하는 일자리를 위해 혁명으로 들고 일어났다.

 

빵에 대한 이 상이한 두 관념, 의식의 뿌리는 무엇인가? 바로 이들이 놓여 있는 물질적 삶, 즉 존재 기반의 상이함이었다. 이것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의식에 혁명에 대한 적대감을 심은 반면, 노동자 민중의 의식에는 혁명에 대한 간절함을 심었다. 이처럼 인간의 의식은 바로 인간이 발 딛고 있는 존재 기반, 즉 물질적 토대로부터 자라나온다. 이런 관점을 칭하는 개념이 바로 유물론이다. 

 

유물론 vs 관념론

 

위 일화에 빗대서, 관념론을 쉽게 설명하면 이런 것이다. 관념론은 모든 것은 우리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고작 빵’, ‘고작 일자리’라고 단단히 마음먹으면, 우리는 빵과 일자리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유물론은 모든 인간은 먹고 사는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러한 물질적 토대로부터 의식이 자라난다고 주장한다. 마리 앙투아네트에게서 빵을 박탈해보라! 물론 케이크도 함께! 그러면 마리 앙투아네트의 머릿속에 ‘고작 빵’이라는 관념, 의식이 여전히 남아 있을까? 아니면 ‘제발 한 조각의 빵이라도!’라는 새로운 관념, 의식이 자리 잡게 될까?

 

유물론과 관념론을 이렇게 대비하면, 누구나 유물론이 옳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지배자들은 유물론을 두려워한다. 사회의 물질적 토대에 유물론적으로 접근하면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한줌 소유자들과 다수 일하는 사람들 사이의 계급분열이 너무도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배자들은 항상 노동자 민중에게 관념론을 불어넣으려 애써 왔다. 모든 고통의 원인이 ‘착취제도’라는 물질적 토대가 아니라 ‘마음가짐’ 때문이며, 따라서 분노와 저항의식을 억제하고 주어진 삶에 순응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노동자 민중은 인간이기에 스스로 생각하고, 착취제도의 부당함에 맞서곤 했다.

 

지배자들은 더 고도한 관념론을 만들어 보급했다. 그들은 인간의 모든 고통은 인간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초월자’, ‘신’의 섭리에서 비롯되므로, ‘생각’하지 말고 무조건 순응하라고 주문했다. 심지어 ‘현세의 고통’은 ‘천국에 들어가는 입장권’이므로, 기쁘게 행운으로 받아들이라고 주문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관념론에 대해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통렬히 폭로했다. 

 

‘소확행’ 의식으로 들여다 본 오늘날의 관념론

 

종교만이 아니라 갖가지 아편이 지금 노동자들과 젊은이들을 세뇌시키고 있다. 최근 일본과 한국의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소확행’ 현상을 살펴보자. ‘소확행’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집에서 처음 등장한 말로, 작고(小) 확실하게(確) 실현 가능한 행복(幸)을 뜻한다. 가령 그는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을 때, 서랍 안에 잘 정리된 속옷이 가득 쌓여있을 때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는 불확실한 큰 행복을 추구하면서 불행하게 사는 대신, 이런 작지만 확실한 행복에 만족하면서 즐겁게 살 것을 제안했다. 욕망을 키우기보다, 욕망을 최소화하면서 작은 일상에서 행복하게 보내자는 제안이다.

 

이런 ‘소확행’ 현상은 한국의 젊은이들 속에서도 흔하게 발견할 수 있다. 아침에 마시는 커피 한 잔, 동료와 함께 맛집 검색하기, 인스타그램에 사진 올리기 등 큰돈이 들지 않는 것에서 소소한 만족감을 느끼며 살자는 생각. 배우자와 아이가 생기면 삶이 불확실해지므로 결혼을 기피하고 혼자만의 삶에 만족하며 살자는 생각. 당장 살아가기도 벅찬데 미래에 대한 희망은 버리고, 저녁에 맥주 한 잔 하며 드라마 보는 것에 만족하자는 생각. 친한 친구와 동네에서 고기 구워 먹을 때의 행복에 만족하자는 생각. 따뜻한 햇볕 속 낮잠의 행복에 만족하자는 생각.

 

이러한 ‘소확행’ 같은 사고는 분명 관념론이다. 행복과 불행은 오직 우리가 어떻게 마음먹느냐에 달려 있다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인간의 욕망은 개개인이 마음먹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유물론은 인간의 욕망은 개인이 놓여 있는 사회적 환경 즉 물질적 토대에 좌우된다고 설명한다. 수백, 수천 년 전, 최소한의 먹고 입는 것조차 힘든 사회였다면, 그 사회에 사는 개인은 약간의 빵과 속옷만으로도 행복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사회는, 노동자계급이 너무나 많은 것을 효율적으로 생산한 덕분에 그 정도의 물질적 삶은 대다수가 누릴 수 있는 단계에 도달했다. 대신 인간의 욕망은 크게 성장했다. 이제 최소한의 문화생활, 자동차, 작은 집, 기본적인 의료혜택과 교육기회 등이 대다수 인간이 욕구하는 기본적인 것이 됐다. 

 

이런 물질적 환경 앞에서 약간의 빵과 속옷에 만족하라는 얘기를 듣고, 자신의 욕망을 통제할 사람들은 거의 없다. 오히려 소수의 가진 자들이 누리는 엄청난 사치와 쌓이는 부를 보며 상대적 박탈감만 커지고 있다. 게다가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가뜩이나 좁아지는 시장을 조금이라도 넓히기 위해, 인간의 소비 욕망을 무한대로 확장하는 사회체제가 아닌가? 이른바 이런 소소한 것들로부터 지속적인 행복감을 느낄 사람들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그런데 이런 소소한 행복조차 결코 쉽게 주어지는 게 아니다. 일자리를 얻지 못해 실업 상태인 청년들은 저녁에 친구와 맥주 한 잔 마실 여유도 없고, 당장 메워야 할 카드빚 앞에서 펑펑 울지도 모른다. 소확행의 한 사례로서 ‘따뜻한 햇볕 속 낮잠’의 행복감에 대해 한 젊은이의 외침은 의미심장하다. “‘따뜻한 햇볕 속 낮잠’요? 저는 살기 위해 자요. 데이 근무(새벽∼오후)가 끝나고 집에 오면 밥도 못 먹고 침대에 쓰러집니다. 3교대 근무라 약속 잡기도 어려워요. 하루 버텨내느라 진이 빠지죠. 이 일을 계속할 건지 고민할 시간조차 없어요.”

 

유물론은 이런 소확행 관념이 왜 최근 탄생했고, 젊은이들 속으로 약간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지 명쾌하게 설명해준다. 최근 한국사회를 표현하는 방식 중 ‘1 대 9 대 65 대 25 사회’가 있다. 최상층 1%와 중산층 9%, 평균 이하의 삶을 누리는 65%와 최하층 25%로 구성된 사회가 바로 지금의 한국사회다. 20년 사이에 절반 이하로 뚝 떨어진 중산층이 앞으로는 거의 붕괴로 내몰릴 것으로 예견되는 상황에서 이런 추세는 더욱 확대될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젊은이들이 더 나은 처지로 오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 오히려 최하층으로 떨어질 두려움에 신음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이 때 소확행 의식은 일종의 아편과도 같은 효과를 발휘한다. 하위계층의 처지에서 벗어날 기회의 사다리가 부러진 상황에서, 가난에 만족하면서 소소한 행복을 추구함으로써 불행과 고통을 조금이라도 완화하려는 필사적인 시도가 바로 소확행 의식이 확대되는 객관적 배경이다. 거꾸로 소확행 의식 확대는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더 나은 삶의 전망이 닫혀가고 있다는 현실, 계급 양극화가 더욱 고착화될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수의 노동자들이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다는 현실을 밝게 비춰주는 등불이 아닐 수 없다. 

 

경쟁의식

 

오늘날 젊은이들을 마취시키는 아편 중 하나는 경쟁주의 이데올로기다. 개인이 하층, 최하층으로 떨어지는 것은 ‘공정한 경쟁무대’에서 경쟁력을 상실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쟁력 상실은 개인이 노력하지 않은 결과이므로, 이 공정한 결과를 받아들여 가난과 불평등에 분노하고 저항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논리는 노골적인 관념론에 비할 때 더 세련된 형식을 취하지만, 근본적으로 관념론이다. 진짜 현실을 감추고, 가짜 현실로 대체하는 것, 이 또한 명백한 현실로부터 비껴나 허구적인 관념적 환상을 유포한다는 점에서 관념론의 변종이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현실은 어떤 것인가?

 

우선 앞에서 살펴봤듯이, 아무리 공정한 경쟁을 하더라도 중산층 이상으로 도약할 수 있는 사다리가 거의 없어지고 있다. 100명이 경쟁해서 서너 명이 승자가 되고, 나머지 모두가 패자가 되는 경쟁체제라면, 그것이 아무리 공정하더라도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을 것이다. 96~97%의 젊은이들은 이미 패자가 되도록 정해져 있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정한 경쟁’이라는 것도 자본가계급의 관념 속에서만 존재하는 허상이다. 

 

“오늘날 중위권 대학 이상 4년제 대학생의 꿈은 공무원이 되는 것이다. 7, 9급 공무원 시험학원이 밀집한 노량진 고시촌을 취재한 적이 있다. 일련의 시험 과목 강의를 학원에서 모두 들으려면 적어도 1년이 걸린다. 대부분은 이 과정을 1년 더 반복하여 2년 동안 학원을 다닌다. 수업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어진다. 공강 시간에는 근처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잠은 고시원에서 잔다. 이 기간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1~3년 동안 부모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학원비, 생활비 등을 더해 한 달에 적어도 50만 원이 필요하고, 고시원에서 생활한다면 여기에 30만 원을 더 보태야 한다.”

 

“이런 후원이 가능한 것은 오직 중산층이다. 중산층 자녀가 아니라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 수 없다. 중산층 이상 부유층이라면 3~5년이 걸리는 사법, 행정고시를 준비할 수 있다. (뒤집어 말해 부유층 자녀가 아니면 고급 공무원의 꿈을 꾸지 못한다) 100 대 1이 넘는 그 경쟁에서 소수만 살아남는데도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는 이유가 있다. 중산층에서 태어난 이들은 대기업조차 안전한 일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대기업을 다닌 그들의 부모가 온 몸으로 그렇게 증언해 왔기 때문이다. 이미 회사에서 밀려났거나 곧 밀려날 처지인 그들의 부모가 갖고 있는 마지막 자산은 자신의 청춘을 바쳐 마련한 중소형 아파트 또는 그 아파트로 빌린 은행 빚이다. 그 ‘자산 가치’가 아직 남아 있는 동안, 어떻게든 자식을 (회사원이 아닌) 공무원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그들의 부모는 직감하고 있다.”

 

“아이들은 중산층 부모의 두려움을 성장과정에서 똑똑히 지켜보았다. 자칫하면 중산층의 안정적 생활기반이 부모 세대에서 끝날 것임을 그들은 알고 있다. 그들이 공무원이 되려는 것은 ‘공공’에 대한 열정이 아니라, ‘개인’에 대한 공포다. 그런데 공무원 시험의 경쟁률은 말 그대로 100 대 1이다. 99명은 공무원이 되지 못한다. 한국 중산층 청년의 미래를 보려면, 노량진에 가면 된다. 빈곤은 소수가 아닌 다수 청년의 문제다.”(안수찬, “가난한 청년은 왜 눈에 보이지 않는가”, <한겨레21>, 2011년 4월)

 

이처럼 경쟁주의 이데올로기도 관념론이다. 반대로 유물론은 진실을 알려 준다. 현재 젊은이 개개인이 느끼는 고통과 불안은 노력을 하지 않아서도 아니고, 능력이 없어서도 아니다. 현재의 젊은이들이 해온 생존을 위한 노력은 조부모나 부모 세대가 과거에 했던 노력보다 훨씬 더 크다. 그럼에도 지금의 젊은이들이 비참한 상태로 내몰리는 것은 낡고 노쇠화해 너덜해지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가 사회구성원들에게 줄 수 있는 안정된 일자리들이 거의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갈수록 경쟁은 격화되고, 그 경쟁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은 점점 더 사라지고 있다.

 

게다가 재벌의 자식들은 경쟁에 참여하지 않아도 날 때부터 재벌의 삶이 보장돼 있지 않은가? 그러나 경쟁주의 이데올로기를 목청껏 외치는 자본가계급은 경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재벌 회장들에 대해서는 결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어차피 승산 없고 불공정한 경쟁에 들러리 서느니 차라리 소확행이라는 아편을 찾는 것이다.  

 

인류 역사상 아편이 창궐하는 시기의 공통 특징이 있다. 소위 세기말적 현상으로 불리는 ‘앞이 안 보이는 절망적인 상태’다. 이런 상황은 현존 사회체제가 생명력을 다했지만 아직 새로운 사회체제가 등장하지 않은 불안정한 사회상태를 반영했다. 종교와 함께 소확행 의식과 경쟁주의 이데올로기는 오늘날의 아편이다. 이 아편의 등장 배경은 바로 반동화돼 갈수록 불안정해지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다.

 

지난 해 대선 전 노량진 학원가를 방문해 일자리와 희망을 약속했던 문재인. 이들에게 공정한 경쟁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자본가계급의 위선적인 이중 철학 

 

노동자계급을 향해서, 자본가계급은 관념론을 설파한다. 행복과 불행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그러니 임금과 일자리, 평등을 위해 저항하고 투쟁하는 대신, 현재의 가난한 삶에 만족하면서 행복하게 살라고 한다. 성난 민중에게 붙들려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던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민중에게 했던 말과 똑같은 얘기를 하는 것이다. 

 

또한 자본가계급은 노동조합에게 ‘협조주의와 사랑의 감정’을 설파한다. 자본에 대한 적대적 생각을 거두고, 평화로운 협조주의적 생각을 발전시키면 노사 모두 행복하게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자본가들은 저항하고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향해 ‘폭력적이고 적대적으로 삐뚤어진 의식’에 물든 불순분자라고 고함친다.

 

과연 그럴까? 노동자들의 의식이 폭력적이고 불순하고 저항적이라서 투쟁과 전투가 등장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본가들이 만들고 운영하는 이 자본주의 체제가 그런 의식을 낳고 있는 것일까? 상황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때와 같다. 젊은이들에게는 일자리가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노동자들은 높아지는 실업률과 상시적으로 덮쳐오는 구조조정 때문에 엄청난 고통을 느낀다. 노동의 결과물의 더 많은 부분이 갈수록 소수 자본가들의 수중으로 집중돼 불평등이 확대된다. 노동자들은 갈수록 절대적, 상대적으로 더 가난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이런 객관적, 물질적 상황이 노동자들의 의식을 저항적으로 만들고, 분노를 확산한다.

 

그런데 자본가계급은 노동자들을 향해서는 관념론을 설파하지만, 스스로를 향해서는 철저히 유물론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한다. 이윤이 문제되는 이상, 모든 자본가들은 한 치의 관념도 용서하지 않는다. 그들은 계산기를 두드리면서, 가장 많은 이윤이 보장되는 길을 유물론적으로 추적하고, 즉각 행동에 옮긴다. 노동자들을 정리해고하고, 임금을 최소화하며, 노동강도를 최대치로 끌어올릴 길을 그들의 모든 뇌세포를 총동원해 찾아나간다. 사랑, 용서, 협조 등 자본가들이 노동자들 속에 심어놓고자 하는 관념은 그들의 두뇌 속에서는 절대 찾을 수 없다.

 

이러한 계급적 이해관계로부터 자본가계급의 진정한 의식이 거꾸로 자라난다. 마르크스의 말처럼, “금전문제에서 인정은 금물이다!”가 자본가계급의 진짜 의식이다. 자본가계급은 ‘노동조합에 대한 비타협적 투쟁의식, 투쟁하는 노동자에 대한 무한한 적개심’으로 무장한다. 자본가계급의 거짓말이나 외교적 수사가 아니라 그들의 행동을 보라! 그들은 단호한 유물론자다!

 

유물론을 향한 마르크스의 여정

 

마르크스가 처음부터 유물론자였던 것은 아니었다. 대학 시절 마르크스는 당시에 관념론 철학을 대표했던 헤겔 철학에 경도돼 있었다. 마르크스는 헤겔 철학에서 급진적 측면을 끌어내 절대왕정체제에 맞서고자 했던 청년 헤겔파에 속해 있었다. 청년 헤겔주의자들과 함께 마르크스는 민주주의 운동에 나섰는데, 그 가운데 여러 정치적 문제와 씨름해야 했다.

 

1842년 마르크스는 당시 독일에서 가장 급진적인 민주주의 사상을 대변했던 〈라인신문〉에서 기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현실의 정치적 문제와 마주치자, 마르크스는 여러 중요한 정치적 대립 배후에 물질적 이해관계가 놓여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토지문제나 채취권 등의 쟁점들을 파고들자, 정치적 견해가 계급적 이해관계에 좌우되고 있다는 사실이 선명하게 드러났던 것이다. 방직공들의 봉기를 둘러싼 정치적 대립에서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계급적 이해의 대립이, 숲에서 땔감을 얻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둘러싼 정치적 대립에서는 지주와 가난한 농민 사이의 계급적 이해 대립이 놓여 있었다.

 

대다수 헤겔 좌파들은 이러한 물질적 대립, 즉 계급적 대립 앞에서 관념의 세계로 도망쳤다. 그들은 추상적인 우애, 인간애 뒤로 숨어 계급투쟁에 기권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이 진실 앞에 도망치지 않고 투쟁을 선택했다. 그리고 투쟁은 그를 유물론으로 이끌었다. 그 결정적 계기는 1844년 6월 독일 슐레지엔 방직공들의 봉기였다. 노동자들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가 투입됐고, 수십 명이 죽거나 중상을 입었다. 마르크스는 당시 독일 지배자들의 악선동, 가령 노동자들이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했기에 질서유지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는 얘기를 거부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의 봉기는 자본가들의 착취에 맞선 저항이었고, 따라서 폭력을 유발한 자들은 자본가들과 정부였음을 폭로했다.

 

그의 두뇌는 현실에 더욱 충실했다. 그는 이 노동자 봉기라는 현실을 경험하면서, ‘혁명적 의식’으로 전진했다. 부르주아들이나 지식인들이 중심이었던 민주주의 투쟁의 소심함과 달리, 노동자들의 투쟁은 철저히 전투적이었고 혁명적이었다. 이러한 현실을 경험한 마르크스의 의식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이 현실을 반영해, “오직 노동자계급 속에서만 해방(혁명)의 진정한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는 의식으로 전진했다. 그의 의식에서 이제 노동자계급은 고통 받는 불쌍한 존재가 아니라, 세계를 혁명으로 이끌 수 있는 역사의 주인공으로 자리 잡았다. 이렇게 마르크스는 관념론에서 유물론으로 전진했는데, 이 유물론적 인식은 그를 노동자계급을 혁명의 중심에 놓는 혁명적 사회주의로 안내했다.  

 

다시 빵의 문제로 

 

확고한 유물론자로 재탄생한 마르크스는 인류의 역사를 유물론적 관점에서 체계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 결론은 무엇이었는가? 이제까지 인류의 삶의 기초는 먹고 사는 문제, 즉 경제적 생산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인류는 이 경제적 생산능력(생산력)을 발전시키는 데 가장 적합한 생산관계를 채택해 왔는데, 이 생산관계의 핵심은 ‘생산수단을 어떤 계급이 소유하는가’였다. 그에 따라 결국 생산물의 분배관계가 결정됐다. 

 

어떤 사회의 의식은 바로 이 경제적 생산양식(생산력과 생산관계의 통일)에 의해 근본적으로 좌우되는 것이었다. 문화, 의식, 윤리 등의 상부구조는 인간에게 필요한 경제적 요소들, 가령 의식주를 생산하는 경제적 하부구조에 의해 우선적으로 조건지어졌다. 바로 이 경제구조를 밝히는 것, 특히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구조를 밝히는 것이 마르크스가 평생에 걸쳐 수행한 유물론적 과업이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자본론>이었다.

 

결국 핵심은 ‘빵의 문제’였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에 나섰던 민중의 “빵을 달라!”는 외침은 사회의 진정한 핵심을 여과 없이 투명하게 드러냈다. 하지만 유물론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노동자들과 민중은 왜 가난하고 굶주려 빵을 갈망하는가? 어떤 현실이 그것을 강요하는가?

 

현실을 분석한 마르크스는 작업장과 기계, 토지 같은 생산수단을 어떤 계급이 소유하느냐가 결정적으로 중요함을 간파했다. 이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유산자계급은 소유자라는 이유로 작업장과 기계, 토지 등 경제적 핵심 요소들을 제 마음대로 운영하고 통제한다. 그 결과 노동과정은 착취과정이 되고 만다. 생산하는 노동자들이 계속 일할 수 있게 하는 최소한의 대가(가령 임금)를 뺀 나머지(가령 이윤)를 유산자들이 독점하게 된다. 일하는 사람들은 노동과정에 대한 통제권을 잃게 되며, 자신이 만들어낸 생산물인데도 최소한만 분배받는다. 그에 따라 착취계급과 일하는 피착취계급 사이의 계급투쟁이 원시공산제 이후 인류사회를 규정해 온 역사라고 마르크스는 결론 내렸다.

 

결국 “빵을 달라!”는 1789년의 노동자 민중의 외침은 모든 생산수단을 노동자 민중의 공동소유로 전환시키는 사회주의로 뻗어나갈 수밖에 없다는 최종 결론에 마르크스는 도달했다. 단지 ‘빵’이라는 구호가,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달라! 일자리를 달라!’는 구호로 지금 표현만 바뀌었을 뿐이다. 이처럼 자본주의의 현실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이 없고, 바뀔 수도 없다면, 이 자본주의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의식, 즉 마르크스주의 또한 근본적으로 바뀔 수 없고, 바뀔 이유도 없다. 

     

왜 지배계급은 유물론을 두려워하는가? 

 

지배계급은 “유물론은 물질적 가치를 중시하고, 관념론은 정신적 가치를 중시한다”면서 유물론을 저급한 것으로 매도한다. 그러나 유물론이 의식의 가치를 무시한다는 것은 전혀 진실이 아니다. 유물론은 단지 ‘존재(물질)가 의식에 선행한다는 점’, 따라서 ‘인간의 의식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그 의식이 발 딛고 있는 현실(물질과 물질의 운동)에 착목해야 한다’는 점을 말할 뿐이다. 가령 우리가 컵이라는 의식을 갖게 되는 것은 우리 눈앞에 컵이라는 물질적 실체가 먼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지, 우리가 컵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기에 컵이 앞에 존재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계급투쟁 사상과 착취에 대한 의식을 갖게 되는 것도 바로 현실에 ‘계급대립’과 ‘잔인한 착취’가 존재하기 때문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

 

유물론은 딱 거기까지만 주장한다. 그 뒤 유물론은 의식과 정신의 가치를 인정한다. 이러한 객관적 현실을 옳게 반영하는 의식이라면, 그 의식은 옳다. 그리고 이 올바른 의식이 현실을 변혁하고 세계를 전진시키는 것일 때, 이 의식은 ‘물질적 힘’으로 전화한다. 오히려 마르크스주의는 이러한 혁명적 의식(혁명적 사회주의 의식)에 결정적 의미를 부여한다.

 

지배계급이 유물론을 제 맘대로 왜곡시키면서 유물론의 확산을 가로막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본주의 사회를 규정하는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으로의 분열, 그리고 이 분열에서 자라나는 계급대립을 감추기 위해서다. 그래서 수많은 노동자들, 젊은이들이 자본주의 착취제도에서 자신을 짓누르는 고통의 진정한 근원을 발견하고 단결해 투쟁에 나서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치명적인 한계에 도달할 수밖에 없으며, 나아가서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할 물질적 토대를 창조하고 있음을 밝혔다. 나날이 긴밀하게 서로 연결되고 있는 사회적 생산력, 이 사회적 생산력이 토해내는 혁명적 노동자계급이 바로 그 물질적 토대다. 그 점 때문에 자본가계급은 유물론을 저주할 뿐만 아니라 이 유물론이 토해낸 혁명적 사회주의 앞에서 벌벌 떨게 된다.

 

하지만 자신을 휘감고 있는 이 부조리하고 고통스런 현실을 근원적으로 탐구하고, 그로부터 진정 해방될 수 있는 길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유물론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마르크스주의를 향한 길을 떠나야 하는 첫 번째 이유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