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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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성경과 다릅니다

2015. 8. 29.

■중세시대의 성경



중세 시대



중세는 교황 그레고리 1세의 치세인 600년부터 종교개혁 전까지 약 1,000년간의 교권 통치시대를 말하는데, 국권 위에 군림한 교권이 민중을 억압하고 강하게 확립된 반면, 기독교의 진정한 가르침은 오히려 빛을 잃어감에 따라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가는 시대였다고 평가된다.


중세에는 꽤 오랜 기간동안 신학다운 신학이 없이, 과거 교부들의 신학을 답습하는 수준에 머물렀는데, 그 까닭은 신학이 진리 탐구가 목적이 아니라 교권을 옹호하고 기득권을 더욱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사용된 도구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9세기에 가서야 철학과 신학을 조화시키려는 스콜라 신학이 태동하면서 학문적 연구가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4세기에 접어들면서 인간 이성에 대한 자각으로 중세 신학은 쇠퇴기를 맞게 되었다.


따라서 중세 신학을 구분하면 처음에 신학이 부재하였던 중세 초기, 스콜라 신학이 태동한 스콜라 초기시대, 스콜라 신학이 발전한 스콜라 전성시대, 그리고 스콜라 신학이 쇠퇴에 접어든 중세 말기의 네 시대로 나뉜다.


한편, 중세 성경해석 역사는 오래 동안 풍유법이 유행하였던 중세 전기(前記)시대와 13세기 중엽부터 토마스 아퀴나스를 중심으로 역사적 해석이 되살아난 후기(後期)시대로 나눈다.

후기에는 제롬의 성경해석으로 돌아가 본문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자 하는 문자적이고 역사적인 해석의 중요성이 인식되던 시기였다.


그러나 비록 역사적 해석의 중요성이 강조되긴 하였으나, 중세 전체를 통틀어서 풍유법은 역시 지배적이었고, 실제적으로 역사적인 해석은 매우 도외시 되었다.


사실 신학은 성경해석을 어떻게 하는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인데, 중세에는 특이하게 신학의 방향을 결정해 놓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성경해석이 행해졌으므로, 성경해석 자체에 관심을 가진 깊은 연구는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알렉산드리아 학파로부터 라틴 교부에게로 이어지고 어거스틴에게서 확고하게 된 다중적, 풍유적 해석이 주류를 이루었다.

또한 교회의 수장인 교황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이 오래 동안 지배하였으므로, 성경해석은 진리 탐구의 방편이 아니라 교황의 교권 확립과 교회의 전통을 세우는데 필요한 시녀 노릇으로 전락하였다고 할 수 있다.

■중세 초기 시대

중세 초기에는 특별한 신학이 없는 시대가 거의 3백년간 계속되었는데, 이 기나긴 세월 동안 신학에 있어서는 새로운 교리나 성경해석의 새로운 방법들이 모색되고 연구되어지기 보다는 과거 교부들이 정립해 놓은 것들을 철학적으로 논증하고 합리화하여, 교회 안팎에 정당화시키려는 노력들이 주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성경해석에 있어서는 서방 교회의 라틴 교부들 특히 어거스틴으로부터 물려받은 풍유법이 기승을 부렸다. 한편 옛날 교부들의 주석이 많이 번역되었고, 성경을 해석할 때는 그것들을 근거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풍토가 동시에 유행하였었다.

이 역시 교회의 전통을 중시하는 라틴 학풍 때문이다.


중세 초, 중기까지 오리겐의 삼중적 의미에 더하여 사중적 의미가 유행하였다.
사중적 의미는 문자적, 풍유적, 도덕적(교훈적), 영적(신비적) 해석을 말한다. 문자적(Literal) 의미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그대로를 보여주며, 풍유적(Allegorical) 의미는 우리의 믿음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주고, 도덕적(Moral) 의미는 삶의 기준을 제공해주며, 영적(Spiritual) 의미는 우리의 삶의 끝이 어디인지를 보여주는 종말론적인 해석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루살렘은 문자적으로는 이스라엘 성읍이지만, 풍유적으로는 교회를 의미하며, 도덕적으로는 신실한 인간의 영이며, 영적으로는 하늘에 있는 도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는 말장난 같은 것이다. 하나의 단어에 이와 같이 많은 의미가 동시에 있을 수는 없다. 선지자와 사도들이 성경을 기록하면서 한 단어 한 단어를 표현할 때 이런 의미들을 한꺼번에 생각했을 리가 만무이다.

다만 다양한 비유의 용례들은 있을 수 있다. 즉, 같은 단어라도 어떤 때는 단순히 문자적인 의미에 그치며, 어느 때는 풍유적인 의미를 더하여 가지기도 하고, 또 어디에서는 교훈적인 의도를 가지고 사용된 경우도 있을 수 있으며, 또 다른 곳에서는 영적인 의미를 지니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든지 단어마다 모든 의미를 동시에 가질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또한 다중적 해석방법은 본문의 원래의 의미를 발견하는 주해(Exegesis)와 그것을 적용하는 강해(Exposition)로 나누어지는 성경해석의 일반적인 원리와는 다르다.

성경해석의 일반적 원리에서도 영적인 깨달음을 삶에 적용시키는 것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본문의 원래의 의미를 가장 중시하여 그것을 근거로 한 영적인 교훈이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초기 스콜라 시대

스콜라 신학은 철학으로써 신앙을 이해하려는 것으로서 신앙과 이성을 조화시키려는 '철학적인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스콜라(Schola)라는 말은 성직자 양성의 부설학교에서 유래하였다.

스콜라 신학은 한 마디로 철학을 사용하여 신학을 연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스콜라 시대는 종교와 철학을 구분하지 않고 신앙과 이성의 일치를 시도하였던 9세기 중엽의 에리우게나로부터 시작하여 나중에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대가들이 나와 신앙과 이성을 철학적 방법으로 훌륭하게 조화시키면서 스콜라 신학을 집대성하고 융성하게 발전시켰던 13세기 중엽까지의 약 4백년간의 기간을 말한다.


스콜라 시대는 다시 초기의 스콜라 태동기와 스콜라의 번성기로 나뉜다.

초기 스콜라 시대는 신학에 있어서는 신앙과 지식의 일치를 강조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즉, 신앙적 진리와 철학적 진리를 구분하지 않고 신앙을 철학으로 해석하는 풍조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때는 풍유적 해석과 함께 성경 안에서 발견되는 개념들을 철학적으로 접근하려는 시도들이 많았다.

이는 어거스틴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데, 초창기 스콜라 신학자로는 에리우게나, 안셀무스, 아벨라르두스 등이 있다.

★(에리우게나)★

에리우게나(Eriugena)는 810년 아일랜드에서 출생한 수도사였는데, 초기 스콜라 신학의 정초를 놓은 사람이다. 그는 신앙은 이성보다 앞서야 하나, 이성의 사용으로 신앙이 분명해질 수 있다고 하여 양자는 서로 대립되지 않고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다시 말해서 신앙은 맹목은 아니기 때문에, 신앙이 지적인 인식으로서 이성을 요구하고, 지적인 인식의 대상이 신앙의 내용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신학과 철학을 분리시키지 않고 동등한 위치에 놓고 자신의 사상들을 주장하였다.

그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오류가 없으며, 그 외의 모든 권위에 대해서는 그것이 의심스러울 때 이성을 권위보다 우위에 두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즉, 권위의 원천은 이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철학을 참된 신앙을 알기 위한 성찰로 보았으며, 참된 종교는 참된 철학이며 참된 철학은 참된 종교라고 하였고, 신앙을 이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스콜라 철학의 기반을 닦은 사람이다.

★(안셀무스)★

안셀무스(Anselmus)는 1033년 이태리에서 태어나 초년엔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훈련받고, 프랑스의 르 베끄(Le Bec) 수도원에서 많은 활약을 하다가, 나중에 영국의 켄터베리 성당의 대주교가 된 인물이다.


그 역시 에리우게나처럼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철학적으로 설명하려고 하였는데, 사람은 믿기 위해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고 하면서, 신앙은 이성의 전제가 된다고 하였다.


그는 신앙이 최우선이 되어야 하며, 신앙 안에서 이성으로 이해해야할 실재들을 계시를 통해 얻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사람이 자신의 믿는 바를 이성으로써 합리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따라서 종합하면 이성으로써 신앙을 논하기 전에 신앙의 신비함을 먼저 믿고, 그다음에 믿은 것을 이성으로써 이해하려고 노력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앙의 신비를 이성으로 이해하려 함에 있어 이성의 능력을 과연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가 문제가 된다.

안셀무스는 이성이란 신앙을 전제로 하므로 그 능력이 무한하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존재와 삼위일체를 비롯하여 많은 신학적 과제들을 철학적으로 입증하려고 시도하였다.


특히 하나님의 존재를 대표작인『모놀로기움(Monologium)』에서는 실재론적으로 증명하려고 하였고,『프로슬로기온(Proslogion)』에서는 존재론적으로 증명하려고 하였다.

원죄 문제에 있어서는 보편 실재론을 통해 아담이 인류를 대표하는 보편 인간임을 주장하여 롬 3:23의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말씀을 뒷받침하였다.

이처럼 그는 성경의 해석과 신학의 난제들을 철학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는데, 그로부터 확고하게 된 보편 실재론은 반(反)실재론자들의 반론에 휩싸이면서, 보편 논쟁이라는 중세의 대표적인 논쟁거리가 되었다.

★(아벨라르두스)★

아벨라르두스(Abelardus)는 12세기 초에 활약한 신학자인데, 틀에 박힌 종교적 신념과 고정관념이 지배하는 중세 시대에 처음으로 자유로운 신앙을 주장하였다.

그는 신앙이 이성의 한계를 넘긴 해도 이성과 모순되지 않으므로 양자간에 갈등은 없다고 하였다.

또한 성경의 권위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납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따라서 성경은 반드시 해석되어져야 하며, 그 방법은 건전한 추론에 의해 지도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성경해석의 중요성을 말하기는 했어도 어떤 특별한 해석 원리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는 또한 중세의 보편 논쟁(구체적 개별자 외에 보편의 존재 여부에 관한 논쟁)에서 에리우게나, 안셀무스 등의 보편 실재론과 로스켈리누스의 유명론(원죄와 삼위일체를 부정함)이 대립할 때 양자를 절충하면서 개념론을 주장하였다.

개념론은 온건한 실재론으로서 보편은 실재하지만 객관적 실체로서가 아닌 개념으로서 존재한다는 이론이다.

★스콜라 번성기★

스콜라 신학은 13세기 초부터 번성하기 시작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대 신학자가 등장하면서 13세기 중엽에 절정기를 이루게 된다.

이때는 신학과 철학을 조화시켜 철학의 기독교화가 이루어짐으로써 신학을 위하지 않는 철학이란 존재하지 않던 시대였다.


당시에는 프란시스(Francis)와 도미니크(Dominic)의 두 교단이 형성되어 수도원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는데, 프란시스 교단은 어거스틴 사상에 영향을 받아 보수적 경향의 주의적(主意的) 신학 풍토를 가진 반면 도미니크 교단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받아들여 주지적(主知的) 신학 풍토를 가졌었다.

아무튼 이때는 주의적이든 주지적이든 철학과 신학이 분리되지 않고 철학적 신학이 지배하던 시대였다.


스콜라 전성기에 프란시스적 노선의 신학자로는 보나벤투라가 유명하며, 도미니크적 신학자는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있다.

이때는 또한 성경해석에 있어서 제롬의 역사적 해석방법이 다시 주목을 받게 되면서 향후 성경을 해석하는 새로운 흐름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보나벤투라)★

보나벤투라(Bonaventura)는 1221년 이태리 토스카나에서 출생하여 프란시스 교단에 들어가 수련을 쌓은 후 신학 교수로서 활동하다가, 프란시스 교단을 이끄는 중심 인물이 되면서 알바노의 감독과 주교가 되었다.

그는 아퀴나스와 서로 다른 파에 속하면서 함께 스콜라 전성기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던 인물로서 많은 저술도 남겼다.


그의 신학의 핵심은 신(神) 인식 곧, 하나님의 실존에 대한 올바른 인식인데, 하나님의 실존이 사람 안에서 증명된다고 하였다.

그는 사람이 자기의 영혼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영혼의 직관적 인식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하면서, 이는 곧 하나님의 존재가 사람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인간의 모든 삶은 하나님께로 나아가기 위한 순례의 길이며, 사람이 올바른 길을 가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철학도 하나님을 만나는 길을 안내한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철학과 신학을 분리할 필요가 없으며, 양자는 서로 연결되고 보충하면서 인간을 하나님께로 인도한다고 하였다.

물론 신앙은 전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신앙인이라면 세상의 모든 사물을 통해 하나님께로 계속 인도함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알베르투스(Albertus)는 1206년 독일에서 백작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도미니크 교단에서 수도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연구하여 자신의 신학에서 구체화 시켰으며, 이를 제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전하여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그의 과제는 하나님의 존재를 규명하는 것이었는데, 철학과 신학이 모두 하나님을 찾는 길이지만 그 과정과 결과가 완전히 다르다고 하면서 양자를 구분하였다.

즉, 철학은 이성의 일반적인 빛의 작용에 따라 제일 존재자로서의 하나님을 발견함에 그치고, 신학은 신앙의 초자연적인 빛의 계시에 따라 하나님을 알고 믿으며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게 한다고 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중세의 스콜라 신학을 집대성하고 완성시킴으로써 교부시대의 어거스틴을 방불케 하는 걸출한 신학자이다.

그는 이태리 나폴리에서 아퀴노 백작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는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수학하였고, 그 후 나폴리 대학에서 배우다가 도미니크 교단에 수도사로 들어갔다.

그는 평생 도미니크 교단에 몸담고 활동하였는데, 독일 콜론에서 스승인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를 만나 그의 영향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심취하게 된다.


그 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연구하고 자기 신학의 종합·분석적 도구로 사용하여 기독교의 사상을 철학적인 용어로 설명하였다.

그는 스승인 알베르투스보다 뛰어난 체계화의 능력을 가지고 아리스토텔레스뿐 아니라 플라톤, 헬레니즘, 아랍 철학 등 수많은 철학 분야를 모두 연구하여 종합하고 체계화시킴으로써 새로운 조화를 이루어 토마스주의(Thomism)라는 신학체계를 만들어 냈다.


그는 탁월한 저술을 많이 남겼는데,『존재와 본질(De ente et essentia』,『진리론(De Veritate)』등은 형이상학적인 내용을 담은 작품이고,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주해도 썼으며, 가장 유명한 것은『신학대전(Summa Theologica)』이다.


이 책은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체계적인 이해를 돕는데 크게 공헌하였고, 카톨릭 교회의 신학을 대표하면서 이후 조직신학의 한 표준적 틀로서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는 모든 존재하는 지식은 종교와 관련을 맺은 결실이라고 하였다. 즉, 사람의 영혼에게 두 가지 지식의 원천이 있는데,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계시와 자연을 통한 인지라는 것이며, 이 둘은 모두 하나님을 아는 인식 원리가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성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정도에 머물며, 계시가 하나님의 본질을 밝혀준다고 하였다.

따라서 자연을 연구하여 얻는 철학적 지식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신학으로 높여져야 만족한 경지에 오르게 된다고 하였다.


아퀴나스는 신학자인면서 동시에 박학한 성경해석자였다. 그는 제롬의 문자적 해석에 동조하면서 성경의 문자적 의미의 중요성과 역사적 해석을 강조하였다.

그의 문자적 해석의 한 예는 에덴동산에 대한 성경의 기록이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 서술방식에 의한 것이므로 에덴동산은 실재하였다고 한 것이다.


그가 비록 다중적 해석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지만, 당시로서 문자적 해석을 중요하게 부각시킨 그의 주장은 새로운 것이었다.


이러한 사상은 이후에 많은 영향을 주면서 문자적 해석을 위한 성경 원어 연구를 활발하게 하고, 역사적 주해석이 쏟아져 나오게 하는 자극을 주었다.

이는 결국 신학과 성경해석이 분리되는 결과를 낳았다. 중세를 풍미해온 풍유적 해석의 특징은 내적 은혜 아래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영감을 받아 해석한다는 것인데, 해석자의 자의적 판단에 의존하는 이러한 풍토는 점차 지양되었다.

그러면서 성경해석과 연구에 있어서 합리성과 객관성이 중요시 되는 시대적 요구를 반영하는 새로운 해석의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이는 후기 스콜라 학파의 성경해석의 새로운 전통으로 자리 잡으며, 나아가서 고전 연구에까지 물고를 틔게 함으로써 서양 고전에 대한 활발한 연구는 결국 15세기 초 문예부흥을 촉발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중세 말기 시대

막강한 교권으로 위세가 드높던 중세 기독교는 말기에 접어들면서 많은 문제가 드러나고 각종 반발에 부딪히게 되면서 결국 쇠퇴하기 시작한다.


중세 말기인 14세기부터는 교권에 억압받았던 인간 이성이 눈뜨기 시작하고 신앙과 이성은 별개라는 인식이 확산되자, 중세 교회를 지탱하였던 스콜라 신학 역시 점차 쇠퇴기에 접어들게 된다.


따라서 이때부터 자연스럽게 신앙에서 지식을 독립시키고 사상의 자유를 추구하려는 흐름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14∼16세기에 르네상스(Renaissance)라는 새로운 사조가 형성되면서 기독교 역사에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된다.


르네상스는 불어(佛語)로 '재생(再生)'이라는 뜻인데,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각 분야에서 새로운 시도들이 많이 이루어진 것을 말한다.

보통은 문예부흥이라고 부르지만 단지 문학과 예술에 국한하여 부흥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중세 내내 억압하며 강요하는 신앙 분위기에 대한 반발로 생겼기 때문에 종교를 비롯한 문화와 사회의 각 방면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문예부흥은 14세기 이태리 플로렌스(피렌체) 지방에서 처음 비롯된 것으로 보며, 본격적으로 활발하게 된 것은 15세기 중엽 동로마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터어키에 의해 함락(1453년)되면서부터였다.

그때 헬라 신학자들이 대거 로마 지역으로 피하면서 이들에 의하여 헬라와 라틴의 여러 고전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연구를 인간 중심의 학문이라는 뜻에서 인문학(Humanitas)라고 불렀는데, 그 후 프랑스와 영국 등 유럽 각 지역으로 르네상스 운동이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 시기부터 성경 연구에 있어서도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새로운 시도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것은 교회가 교권 유지를 위해 감추었던 성경이 빛을 보기 시작하면서 출발하였다. 그때까지의 스콜라 풍의 신학자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순수 성경해석자들이 나타나서 스콜라 시대보다 문자적·역사적 해석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하였으며, 또한 이들로부터 새로운 번역이 착수되고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영국, 체코 등지에서는 성경이 자국어로 번역되기 시작하였고, 15세기의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일반에게 보급됨으로써 성경의 대중화에 기여하였다.

이에 따라 교회와 기득권 세력은 위기감을 느끼고 새로운 세력들로부터 교권을 지키고자 이들을 이단으로 몰아가게 된다.

이때 많은 개혁의 시도들이 무참히 꺽이면서 초대교회와 같은 순교자들이 나오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흐름들은 후에 등장하는 종교 개혁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또한 이때는 기독교 학자들이 신학자와 성경해석자로 각각 역할이 구분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그러나 신학이란 성경해석 없이는 불가능하므로 신학자는 먼저 성경해석자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구분이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종래의 스콜라 신학을 반대하는 입장의 약간의 신학자들이 있었으며, 또한 전문적인 성경 번역자와 전문 주석가들도 함께 활동하였다.

★(둔스 스코투스)★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는 1266년 영국의 스코틀랜드에서 출생하였으며, 프란시스 교단에서 사제가 되어 신학을 연구하여 옥스퍼드와 파리, 독일 쾰른에서 교수를 역임하였다.

그는 프란시스 교단의 전통적인 어거스틴주의를 대표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에 영향 받은 도미니크 교단의 토마스 학파와 대립하였다.


그는 사물의 전체성을 직관(直觀)으로 파악하여 이성에 의한 사유의 우위를 주장한다.

또 모든 것은 하나님의 자유로부터 나온 것이며, 하나님께서 바라는 것은 모두 선이라고 하였다.

그는 면밀한 사변(思辨)으로 '정교한 박사'라고 불리면서 비판적이고 역사전승적인 연구들을 남겼는데, 그가 신앙으로부터 이성을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함으로써 중세를 버텨온 스콜라 신학은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무너지기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오컴의 윌리엄)★

1280년경 영국 오컴에서 태어난 윌리엄(William of Ockham)은 중세 말기에 기독교 신앙을 철학으로 설명한 스콜라 신학자 중 마지막 사람이었다.

그는 스코투스처럼 신앙과 이성이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주로 영국에서 나온 이러한 사상은 철학이 신학과 독립하여 전혀 별개의 영역으로 떨어져나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젊어서 프란시스 교단의 수도사가 되고 옥스퍼드에서 공부한 뒤에 그 곳과 파리에서 강의를 하였다.

그는 논리학과 인식론에서 뛰어났는데, 몇 가지 명제가 유죄 선고를 받아 이단이라는 혐의를 받으면서 교황 요하네스 2세와 알력이 있었다.


특히 로스켈리누스의 유명론을 더욱 정교하게 이론화하였는데, 유명론은 보편자(普遍者)의 실재(實在)를 부정하므로 원죄를 비롯해서 성경의 많은 부분들을 설명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이단시된 것이다.


그는 보편자는 실재가 아니고 개체에 내재하는 실재물도 아니며, 오직 개체들이 실재라는 것이다.

보편자는 단지 정신의 구성물이고 정신 속에서의 개념으로서 '말'로서만 존재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영국에서 근세에까지 계속 답습되다가 마침내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을 탄생토록 하였다.

★(리라의 니콜라우스)★

니콜라우스(Nicolaus)는 1270년경 프랑스 리라에서 출생하였는데 프란시스 교단에 들어간 후에 파리에서 공부하고 소르본 대학에서 오래 동안 강의하였다.

그는 성경 연구에만 전념하여 50권으로 된『성경전권주해』를 남기는 등 전문적인 성경해석학자로서 활약하였다.

그는 중세의 다중적·풍유적 해석의 위험을 경고하고 문자적 의미를 중시하였으며, 또한 기초적 문헌학 해석을 주장하여 성서해석에 새 경지를 열었다.


아퀴나스로부터 서서히 불지피기 시작한 문자적·역사적 해석이 그에게서 꽃피우게 된 것이다.

그의 새로운 성경해석 체계는 중세의 억압된 분위기를 벗어나려는 시대적 배경과 맞물려 당시와 근세로 넘어가면서 계속 유행하였고, 결국 종교개혁을 성공시킨 마르틴 루터에게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루터는 니콜라우스를 상당히 존경한 것으로 알려졌다.

★(위클리프)★

1320년 영국에서 태어난 위클리프(John Wycliffe)는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고 모교의 신학 교수를 거쳐 국왕 에드워드 3세의 궁정 사제로 서임되었다.

그는 신학보다는 성경 자체에 더 관심을 가지고 신앙과 구원에 관한 근거는 오직 성경에 있다고 확신하였으며, 영국이 교황권으로부터 정치적·종교적으로 독립할 것을 표방하였다.


또한 그는 성경을 자국어인 영어로 번역함으로써 성경의 대중화의 첫 발을 떼어놓았으며, 이는 결국 종교개혁의 불씨를 제공한 셈이 되었다.


그는 교황 정치의 부패와 성직자의 악덕을 비판하고 카톨릭 교리가 상당 부분 잘못되었음을 주장하면서, 민중 속에서 복음을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성경을 근거로 참된 복음을 설교하며 많은 저술을 남기고 활동하다가, 나중에 대학과 귀족들의 지지를 잃고 실의 속에서 은퇴하였다.

그가 죽은 후 1415년 콘스탄스 공의회에서는 성경을 번역하고 교회를 공격하였던 그를 이단으로 단죄하고 그의 유해를 저서와 함께 불태웠다고 한다.

그의 주장은 뒤를 이어 존 후스와 윌리엄 틴데일 등으로 계승되면서 종교개혁의 분위기를 무르익게 만들었다.

★(존 후스)★

종교개혁을 추진하다가 순교한 존 후스(Johannes Huss)는 1369년경 체코의 보헤미아 지방에서 태어났다.

그는 체코 프라하 대학에서 신학과 문학을 배우고 모교에서 신학을 강의하였으며, 프라하 대학의 총장까지 지냈는데 동시에 카톨릭 교회의 사제이기도 하였다.

그는 위클리프의 주장을 받아들여 성경을 유일한 권위로 인정하면서 성경과 위클리프의 저작을 체코어로 번역하는 일을 하였다.

그러면서 교황을 비롯한 고위 성직자들의 이른바 성직매매 등 세속화를 강력히 비판하게 됨에 따라 교회와 대립하게 된다.


그는 또한 체코 민족운동의 지도자로서 보헤미아의 독일화 정책에 저항하였다.

당시 로마 교회는 아비뇽의 분열(1378∼1417년)이라는 혼란 속에서 한동안 후스의 움직임을 묵인하다가 점차 영향력이 커지자 그의 주장들을 철회하도록 명령하였고, 결국 교황 요하네스 23세는 그를 파문하였다.

그러나 후스는 자기의 신념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마침내 가톨릭교회는 콘스탄스 공의회에서 후스를 소환하여 끝까지 주장을 철회하지 않는 후스를 화형에 처하고 말았다.


이러한 처사는 당시에 잠재되어있던 교회에 대한 불만을 증폭시키고 의분을 불러일으킴으로써 1419년부터 약 15년간에 걸친 후스전쟁을 유발시켰고, 결국 로마 교회의 방침을 후퇴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 후에 모라비아 지방에서는 후스의 정신을 따르는 모라비안 교파가 형성되어 순수한 신앙을 지키려는 노력이 지속되었다.

곧, 후스의 순교는 헛되지 않았으며, 비록 후스 생전에는 종교개혁의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약 100년 뒤에 성공한 종교개혁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출처 : 놀라운편지
글쓴이 : 사랑그리고편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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