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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개혁신학 관점에서 본 현대 교회의 은사주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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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교회의 은사주의 실체 (부작용)

2010. 5. 17.

개혁신학 관점에서 본 현대 교회의 은사주의 실체

(부제 : 현대 교회 은사주의 문제점과 극복 방안)

 

 

김병혁 목사(캘거리 개혁신앙연구회 전임강사)

 

 

지난 20세기의 교회 역사를 되돌아볼 때, 짧은 시간동안 가장 급성장하는 교회를 지목하라면 단연 오순절계통의 교회일 것이다. 은사주의 운동은 이 교회들이 주창하는 오순절주의 신학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작금에 와서 은사주의 운동은 감독교회, 감리교회, 장로교회, 침례교회, 성결교회, 루터교회를 비롯하여 초교파적 운동(ecumenical movement)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뿐 아니라 20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정통 기독교와 금을 그어놓았던 가톨릭교회와 급진적인 자유주의, 심지어 사이비 기독교 집단과 이단까지도 아우르는 세계적인 종교 현상(a universal religious phenomenon)으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

 

근래에 필자가 직접 전해들은 일이다. 이 곳 캘거리에 공개적으로 오순절주의 신학과 은사주의 프로그램을 표방하는 교회가 세워졌다. 그 교회가 창립 행사가 갖던 날, 캘거리목회자협의회라는 목회자 친목 단체에 소속된 지역 교회 목사들이 대거 참석하여 축하와 덕담을 건네고 교제를 나눴다고 한다. 엄연히 신학과 교리가 다름에도 과연 어떤 형태의 공동적인 신앙적 관심사와 일치를 이룰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무엇보다 이 사건은 오늘날 은사주의가 교단과 교파를 불문하고 얼마나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교회 지도자들에게 관심과 호감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한 가지 단적인 예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은사주의자들은 은사주의 운동이 남긴 치적을 매우 자랑스러워한다. 예를 들어 그들은 은사주의는 침체일로에 선 교회들에게 성령의 활력을 불어넣어 교회 부흥의 광범위한 효과와 전 세계적인 수치적 성장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또한 세계 기독교를 단시일 내에 가장 보편적인 신앙의 종교로 만드는 데 혁혁한 공로가 있으며 지구의 구석구석까지 길 잃은 영혼들을 구원하는 폭발적인 성령의 역사를 주도하고 있다고 한다. 현상적으로 본다면 그들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 그러나 광풍처럼 몰아닥치고 있는 은사주의가 남긴 신앙적 유산들을 성경을 돋보기 삼아 꼼꼼히 살펴보면 은사주의의 외연 확대와 그에 따른 파급력이 모두 하나님의 역사라는 주장은 날조된 속임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말은 은사주의를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은 부패한 사람들이라거나 혹은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거나 혹은 은사주의가 끼친 영향은 순전히 악한 것뿐이라는 식의 극단적인 생각이 아님을 주지하기 바란다. 은사주의를 추구하는 분들 중에는 진실하게 그리스도께 헌신하고 참된 경건의 귀감이 되는 성도들을 많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믿음에 대한 순수한 동기와 그리스도에 대한 열정적인 헌신의 표로서 은사주의를 최선의 신앙적 선택으로 여기는 선한 마음의 소유자들이 있음을 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은사주의가 무분별하게 남용되는 곳에서는 언제나 비성경적이고 비신앙적인 열매들이 나타난다. 은사주의가 활개를 치는 곳에는 어김없이 거짓 선생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출몰하고 이들에 의해 영적 속임과 추문으로 참된 복음을 무력화시키는 시도가 끊이질 않는다. 무엇보다 가장 심각한 것은 은사주의는 성도들로 하여금 성경 진리에 관한 분별력을 상실케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교회를 혼란과 분열 가운데로 몰아가는 실체이며 주범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같은 은사주의의 도전과 범람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은사주의의 모체인 오순절 신학이 등장한 지 백 여 년이 넘었고 은사주의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십 년 전의 일이지만, 은사주의는 기독교 역사 속에서 쇠심줄만큼이나 질긴 생명력을 가진 이단적 신앙이다. 은사주의의 연원은 초대교회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성경은 초대 교회 초창기부터 매우 비정상적이고 극적인 형태의 은사주의가 교회의 본질을 위협하고 있음을 증거 해 준다. 초대 교회의 탄생과 성장 과정을 기록한 사도행전과 고린도 전서, 후서는 오순절 성령 강림이후에 초대 교회가 겪는 가장 심각한 내홍이 다름 아닌 신비주의적 은사주의였음을 말해 준다. 이 은사주의는 대체로 성령에 관한 잘못된 이해로부터 기인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날 은사주의를 추구하는 교회들은 초대 교회와 거의 동일한 경험과 문제로 고통을 겪고 있다. 시대가 달라도 교회를 파괴하는 사단의 속성에는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그리스도의 교회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은사주의의 기원과 특징을 간략하게 살펴본 후,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이 강조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개혁주의 신학적 관점에서 성경적인 비평과 은사주의를 극복하는 대안에 대해 고찰해 보고자한다.

 

오순절 신학의 역사적 배경

 

은사주의는 20세기 초에 시작된 오순절 신학(Pentecostal Theology)에 뿌리를 둔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오순절 신학의 기원은 2세기 중엽의 초대교회로까지 소급된다. 과도기적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기독교 분파 세력 중의 하나였던 몬타누스주의(Montanism)의 창시자 몬타누스(Montanus)는 성경의 지식 보다 종교적 체험을 강조하며, 금욕 생활과 방언과 기도와 지속적인 예언적 계시를 통해 교회를 개혁하려 하였다. 그는 종국에는 자신의 모든 가르침이 성령의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하여 이단자로 지목되었지만 그가 제창한 성령 운동은 오늘날의 은사주의 운동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에서 오순절 성령 운동의 창시자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4세기 말 어거스틴(Augustine)과 신학적 대척점에 서 있었던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도 오순절 신학의 뿌리와 닿아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보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우선한 펠라기우스(Pelagius) 신학은 종교개혁 후기 시대(17세기)의 아르미니안주의(Arminianism)를 거쳐 18세기 중엽에 웨슬리 형제의 교회 부흥 운동을 통해 구체화 되었다. 특히 존 웨슬리의 은혜와 의지의 협력적 관계 속에서의 ‘성령의 두 번째 축복’(Second Blessing of the Holy Spirit) 개념은 이후 오순절 신학의 ‘성령세례’에 결정적인 신학적 근거가 되었다. 또한 웨슬리안 신학 형성에 기폭제가 된 모라비안 운동을 비롯하여 재세례파, 퀘이커교도로 대표되는 17,8세기의 경건주의 신학 역시 오순절 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합리적 사유에 의한 성경 해석보다 내면의 빛과 감정적 요소를 통한 직관적인 신앙을 중시한 경건주의는 19세기 초 윌리엄 어빙과 찰스 피니에 의해 주도되었던 미국의 2차 대각성 운동의 알미니안주의적 방법론과 부흥주의의 성령 운동과 결합되어 20세기 초 오순절 신학을 탄생시켰다. 또한 19세기에 나타난 전천년설 세대주의의 종말론적 성령론 역시 오순절 신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한편 오순절 신학의 뿌리는 로마 가톨릭에게까지 뻗어 있다. 로마 가톨릭 신학은 절대적인 성경의 권위를 교회 회의와 전통에 예속시켰다. 심지어 성경과 동등한 추가적 계시의 여지를 늘 남겨두었다. 이러한 로마 교회의 신앙 전통은 중세 교회 전반에 걸쳐 하나의 지속적인 신앙 전통으로 계승된 가톨릭 신비주의 운동에서 꽃을 피웠다. 오늘날 오순절 교회 지도자들과 가톨릭교회의 성령 운동주의자들과 그리고 오순절의 은사주의와 가톨릭의 영성 운동과 서로 죽이 잘 맞는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위의 사실은 오순절주의 신학이 어느 날 갑자가 나타난 유아독존적 신학이 아님을 말해 준다. 그런데 오순절주의 신학에 영향을 끼친 제 신학들에는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한결같이 성경의 절대 권위보다 개인적 신앙 체험을, 계시보다 실존을, 이성보다 직관을, 진리의 객관성보다 자신의 주관을, 말씀에 의한 분별보다 내적 감정을 더 강조한다. 이것은 바울과 어거스틴과 루터와 칼빈과 그 외에 수많은 종교개혁적 신앙 전통에 있는 성도들이 오순절 신학과 은사주의를 무조건 받아들일 수 없는 실제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은사주의 운동의 세 부류

 

학자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은 오순절 교회 신학자들은 오순절 운동을 세 부류로 구분한다.

 

첫 번째, ‘전통적인 오순절 주의’(Traditional Penticostalism)라고 한다. 이는 1901년 미국 캔사스주 토피카의 베델 성경대학의 여학생 애그니스 오우즈맨이 성령세례를 사모하다가 방언을 받을 것을 기점으로 20세기 초반기의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성결교 설교자 윌리암 시무어에 의해 아주사 거리 집회를 통해 본격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들은 그리스도에 관한 ‘4중 복음(Four-fold Gospel)’ 혹은 ‘순(Full) 복음’을 전하였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구세주, 성령 세례 주시는 분, 병 고치는 분, 장차 오실 왕으로서의 사역이라고 하였다. 특히 전통적인 오순절 주의자들은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면서 모든 신자는 반드시 성령세례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성령세례는 방언을 수반하는 체험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두 번째, ‘신오순절주의’(Neo Penticostalism) 혹은 ‘은사주의’(Charismatic Movement)이다. 이 부류는 1960년 캘리포니아의 벤나이스에 있는 마가 감독 교회(St. Marks Episcopal Church)를 담임하고 있던 데니스 바네 신부에 의해 확산되었다. 이 운동은 중생과 성령 세례를 구분하는 것은 전통적인 오순절주의와 같지만 성령세례의 증거를 방언 말함에 한정하지 않고 성령의 다양한 은사를 인정한다. 1960년대 이후에는 전성기를 이루면서 이 운동은 오순절파를 넘어 다른 교파들 속에 퍼졌고 천주교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세 번째, ‘성령의 제 3 물결’(The Third Wave of the Holy Spirit)로 알려진 은사주의 운동이다. 이 운동의 방법론의 주요 제안자이기도 한 피터 와그너는 제 1 물결은 전통적인 오순절 운동이었고 제 2 물결은 은사주의 운동이며 제 3 물결은 그 둘을 결합시킨 것이라고 하였다. 이 운동에 동참하는 자들은 오순절주의와 은사주의의 영적 계보는 인정하지만 그 이름을 자신들에게 적용하는 것을 거부한다. 한편 이들은 성령 충만을 받아 여러 가지 초자연적인 은사를 경험하며 표적과 이적을 강조하되 여전히 자신들의 교단에 남아 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을 복음주의자라고 부르기를 원한다. 이들은 교회 성장과 능력 전도에 관심이 많다. 하지만 오순절주의와 은사주의와의 차별화 시도에도 불구하고 제 3 의 물결의 대부분의 가르침은 표준적인 은사주의 교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은사주의의 특징적 주장과 개혁신학적 비평

 

첫째, 하나님은 지금도 계시하신다?

 

“하나님이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말은 은사주의 운동의 찬송가가 되어 버렸다. 대부분의 은사주의자들은 때때로 하나님이 들을 수 있는 음성이나 내적인 영감이나 환상을 통해서든 아니면 자신들을 도구로 사용하여 노래를 자곡하거나 시를 짓거나 예언을 말하게 하든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자신에게 말씀하신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성령의 영감과 조명을 구별하지 않고 오늘날에도 성경 기록자들이 받은 계시 방식대로 새로운 계시가 나타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은사주의 운동의 대변자 구실을 하는 「은사」(Charisma)라는 잡지를 보면 언제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을 알려주는 세미나와 테이프와 책 광고가 가득하다. 은사주의자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거나 음성을 듣는 것은 모든 신자가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영적 혜택이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견해를 입증이라도 하듯이 제 3 물결 운동에 속하는 은사주의 신학자들은 오늘날에도 초대 교회의 사도와 선지자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피터 와그너는 1세기의 사도들의 예언 사역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1999년 이후에 수천 명의 소위 예언자들과 예비 예언자들을 모아 ‘전국 예언자 학교’(the National School of the Prophets)를 개최하고, 그 해 부터 최소한 일 년에 두 번씩 교회 지도자로 구성된 ‘예언하는 장로들의 사도 협의회’(The Apostolic Council of Prophetic Elders) 모임을 개최하고 자신이 이 집단의 사도로서 의장직을 감당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와그너와 「목사와 예언자」라는 책의 공동 저자인 은사주의자 톰 해몬(Tom S. Hamon)도, ‘오늘날 예언이 없다면 교회가 마땅히 드러나야 할 나야 할 건강한 모습을 보여 줄 수 없다고 하면서 같은 견해를 표한다. 이처럼 지금 여전히 하나님으로부터 음성과 꿈과 환상을 통해 직접적인 계시와 예언을 경험하는 교회를 가리켜 21세기에 가장 적합한 형태의 교회라는 개념에서 신사도적 교회(New Apostolic Churches)라고 부른다.

 

【 비 평 】

 

하나님은 기록된 성경을 통해 최종적이고 완성된 가르침의 체계를 주셨다. 기독교 신앙은 이와 같은 역사적이며 객관적인 계시에 의존한다. 만약 은사주의자들의 주장과 같이 지금도 성경 기자들이 받았던 계시와 동일한 형태의 계시나 예언이 존재한다면 성경은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을 보장하기에는 너무나 불완전한 문서에 불과할 것이다. 개혁신학은 언제나 성경 계시의 충족성과 종결성을 강조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은 과거 여러 시대에 여러 모양으로 그의 교회에 자기 자신과 그 뜻을 계시하여 주시기를 기뻐하셨다. 그 후에는 그 계시는 진리를 전체적으로 기록하도록 하심이 또한 그의 기뻐하시는 뜻이었다. 이 기록된 책이 ‘성경’이다. 성경의 필요성은 그 진리를 보다 잘 보존시키며, 전파케 하며, 더 확실하게 세워서 진리 반대 운동을 막아 교회에 구원의 위안을 주시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성경이 절대로 필요한 이유는 옛날에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그의 뜻을 계시해 주시던 그 방법을 이제(성경이 완성된 후에는)는 정지하셨기 때문이다.”(제1장 1절) 성령의 영감으로 성경이 기록된 이후, 성령의 조명(깨닫게 하심)의 역사를 통해 성도들로 하여금 성경의 참 뜻을 깨닫고 기억하시고 확신케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성령의 영감과 동일한 방식의 계시와 예언은 전혀 불필요한 일이다. 마치 성경 외에 무언가 새롭고 비밀스런 것들이 직통 계시나 예언을 통해 주어진다는 주장은 하나님의 뜻에 도전하고 성경의 유일성을 파괴하는 사탄적인 기만과 오류이다.

 

둘째, 지금도 초대교회의 성령의 초자연적 기적들이 지속된다?

 

오순절주의자들과 은사주의자들에 사이에 ‘미스터 오순절’로 알려진 데이비드 듀 플레시스(David du Plessis)는 기적의 시대는 결코 끝나지 않았다고 믿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초대 교회는 성령의 작품이었다. 성령은 변하시지 않았다. 성령은 초대 교회에서 최초의 지도자들과 성도들을 통해 이루신 일을 모든 세대에 반복하기를 원하신다.” 듀 플레시스는 사도행전에 묘사된 기적과 사건이 교회 역사 전체에 걸쳐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견해는 오순절주의자와 은사주의자 대다수의 생각을 반영한다. 은사주의자들은 사도 시대에 나타난 모든 초자연적인 기적들(예를 들어 표적, 이적, 병고침, 예언, 귀신 쫓아냄 등)은 지금도 지속되어져야 한다.

 

은사주의 운동의 계열인 <빈야드 운동>의 창시자로 알려진 존 윔버는 기적, 환상, 방언, 예언, 신유 등은 복음의 본질적인 수단이라고 확신한다. 그는 이러한 것들이 없는 기독교는 서구적이고 물질주의적인 사고방식으로 더럽혀진 무기력한 기독교라고 하였다. 실제로 표적과 기적은 제 3 물결 은사운동의 전도 방법의 핵심 골자이다. 이 운동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표적과 이적은 성령의 나타남의 자연스런 현상이기에 성도라면 반드시 경험해야 하는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래서인지 은사주의자들이 주최하는 집회나 모임에서는 언제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슈가 된다. 때로는 설교보다 기적 경험을 간증하는 순서를 더 중요하게 취급하기도 한다.

 

【 비 평 】

 

성경에는 수많은 기적들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 하지만 은사주의자들은 성경에서 언급된 기적과 자신들이 말하려는 기적과의 본질적인 차이점을 간과하고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적은 하나님의 특정한 계시를 선포하기 위한 수단으로 특별한 사람에게 허락하시는 일종의 계시의 방편이다. 흔히 사도들이 경험한 초자연적인 기적들은 그들에게 사도의 표로서 주신 것들이다(고후 12:12). 이 기적들은 기적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과 관계된 것이며, 그것을 행하는 사람은 초인적인 힘과 결과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은사주의자들이 집착하는 기적이란 대개 이상하고 단순한 해프닝이거나 우연의 일치거나 어디서나 경험할 수 있는 반복적인 사건일 때가 많다.

 

일례로 오늘날 기적적인 신유 치료의 가능성을 주장하는 은사주의자들은 많지만 대부분 그들이 말하는 신유에 대한 증거는 검증이 불가능하다. 미국의 유명한 전문 마술사인 제임스 랜디(James Randi)는 수 십 명의 신유 치료자들과 그들이 제시한 사례들을 면밀하게 조사한 후, 한 권의 책을 발간했다. 그에 따르면 단 한 사람의 신유 치료자도 그에게 자연적인 건강 회복이나 심신증적인 개선이나 명백한 속임수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의학적으로 확인된 신유를 한 건도 제시하지 못했다고 양심 고백하였다. 신유 치료자들로부터 병을 고쳤다는 사람들은 대개 기능성 질환(두통, 소화 불량, 가슴 통증 등 일시적으로 경험하는 병이나 심인성 질환(심리적인 부담이나 스트레스로 겪는 마음의 병)과 관련된 것들이다. 예수님이나 사도들의 기적 사례인 기질성 질환(기관 자체가 병이 들거나 물리적으로 심각하게 손상되거나 기능이 상실되어 나타나는 병)이 정상인의 상태로 완전하게 치료되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정말 완벽하게 병을 고칠 수 있는 신유의 은사가 확실하다면 왜 신유 치료자들은 언제나 비공개적인 장소에서 일부 사람을 위해서만 그 일을 행하는가? 사랑의 짐을 나누어져야 할 그리스도인으로서 육체의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을 위해 공개적인 장소에서 그 일을 나타내 보이지 않는가? 오히려 초자연적인 은사의 가능성을 남발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거짓이 탄로 날 때에는 가차 없이 상대방의 믿음 부족으로 책임을 돌린다. 기독교 역사를 되돌아보더라도 초자연적 은사에 집착하는 이들은 신비주의 계열의 이단이나 불건전한 사이비 기독교 단체들이었다.

 

지금까지 은사주의자들이 강조하는 초자연적인 은사와 관련해서 병 고침의 한 가지 예를 들었는데, 이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지금은 이적을 행할 수 없으시다거나 병을 고치시는데 관심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시고 또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시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이적이 존재하는가의 문제는 하나님의 전능성과 불변성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의지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사도들 이후로는 초대 교회에 나타난 것과 동일한 이적 기사의 은사를 허락하지 않으셨다. 어느 곳에서나 항상 같은 이적이 발생한다면 이적의 특이한 징조와 가치는 상실하게 된다. 이것이 이적에 관한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이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행한 기적을 잘 살펴보라. 그 분들에게 이적은 오직 사람들에게 복음 메시지의 유효성을 확신시키는 수단으로서만 사용되었다. 사도 바울의 경우 멜리데 섬에서 이적을 행하고서(행 27:8-10), 로마에 도착한 이후에는 그의 이적적 능력이 확실하게 감소되었다. 그 실례로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에서 거의 죽게 되었으나 사도 바울은 그를 낫게 할 수 없었다(빌 2:25-30). 뿐만 아니라 병든 드로미모의 병을 고치지 못한 채 그를 밀레도에 두고 와야만 했다(딤후 4:20). 신약 성경이 완성됨에 따라 하나님께서 초대교회의 일부 사도들에게 주셨던 이적의 은사는 점차적으로 철폐되어진 것이 분명하다. 성도의 구원의 확실성의 여부는 더 이상 이적적 은사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수단으로서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확인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은사의 불필요함 때문이기 보다는 그 보다 더욱 확실하게 복음을 증거하는 은혜의 수단으로서 말씀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성경에 충실하고 하나님의 경건을 추구하는 성도들은 결코 초자연적인 표적과 기적에 집착하기 보다는 구원의 능력이 되는 성경 말씀을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일에 착념해야 한다(딤전 4:13).

 

셋째, 성도는 성령 체험과 성령 세례의 증거로 방언을 받아야 한다?

 

은사주의자들은 구원 이후 체험으로서의 성령 세례를 강조한다.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이 회심할 때는 오로지 제한된 의미에서만 성령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초자연적으로 성령의 능력 속에 잠겨 더 높은 수준의 신앙생활로 도약하려면 성령 세례를 구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 체험에는 방언이 수반되고 그 결과 새로운 영적 동기부여와 능력이 나타난다고 한다. 오순절 신학에 대한 철저한 연구를 시도한 프레데릭 데일 브루너(Frederick Dale Bruner)는 오순절주의의 성령 세례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1) 성령 세례는 거듭남과는 ‘구별되고’ 거듭남에 ‘뒤이어 일어난다.’ (2) 성령 세례는 맨 처음 방언의 표적에 의해 입증된다. (3) 성령 세례는 ‘간절하게’ 구해야 얻을 수 있다.

 

이러한 성령 세례는 구원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을 구별하는데, 대부분의 은사주의자들은 ‘성령은 세례로 모든 신자를 그리스도께 인도(회심)하시지만 그리스도는 세례로 모든 신자를 성령께 인도(오순절 체험)하시지는 않는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 체험, 즉 성령 세례의 체험을 강조한다.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환상, 꿈, 신유 등)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방언은 성령 체험의 시금석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방언은 진짜 성도임을 증명하는 필수적이고 규범적인 종교적 경험인 것이다.

 

【 비 평 】

 

은사주의자들의 중생 이후의 성령 세례 교리는 성경에 대한 심각한 해석적 오류로부터 기인된 것이다. 사실 은사주의자들이 차후 세례 교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유일한 본문은 사도행전에 국한되어 있다. 사도행전을 제외한 어떤 성경에서도 이 교리를 증명할 수 있는 성경적 근거를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사도행전은 이 교리를 뒷받침해주는 근거가 되는가? 그렇지 않다. 사도행전은 교회가 창설되던 초창기만의 기록을 담고 있다. 이 시기에 나타난 예외적인 기적과 은사는 특별한 계시 전달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특이한 시대의 특성이지 결코 모든 시대에 나타나야 할 전형이 아니다. 은사주의자들은 사도행전에서 성령을 받는 어떤 일관된 패턴을 찾아서 그것을 모든 시대에 적용 가능한 규범으로 삼으려고 하지만 사도행전은 오히려 변화무쌍한 성령의 주도적인 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따라서 성령을 받은 이후에 또 다른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규범화 하는 것은 너무나 일방적이고 단편적인 주장이다. 사도행전에 나온 오순절 성령 강림은 유일하면서도 독특한 하나님의 구원사적 섭리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성령의 강림과 더불어 나타나는 외적 표징들은 그리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표적과 이적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시의 초반부에만 강렬하게 나타난다. 앞서 언급한 예와 같이 사도행전의 후반부로 갈수록 발생 빈도가 현저하게 줄어들다가 사도행전 이후의 교회 시대에는 차츰 사라져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성령 세례는 매우 실제적인 교훈이다. 성령 세례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구원 체험에서 필수적인 부분이다(고전 12:13). 왜냐하면 성령세례는 성도를 그리스도와 생명으로 연합해 주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성령 세례가 중생 이후의 특별한 구원 체험이라는 주장은 비성경적이다. 더구나 성령 세례는 오직 성령의 소관이며 그리스도는 성령 체험으로 인도하지 않는다는 것과 성령 세례를 받은 증거로서 사도 시대와 같은 방언을 해야 한다는 은사주의자들의 주장은 성경에 대한 무지와 억지가 낳은 최악의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성경 어디에도 ‘성령 세례’라는 단독적인 표현이 없을뿐더러 성령을 세례 주시는 분으로 언급하는 구절이 없다. 성경에는 ‘성령으로 세례’라는 말만 있다. 그런데 이 표현의 정확한 의미는 ‘성령에 의해’ 혹은 ‘성령과 함께’라는 ‘받는 세례’라는 뜻이다. 즉 성도가 회심할 때에 성령에 의해 또는 성령과 함께 세례를 받는 것이다.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요 1:33).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보내어진 성령에 의해, 혹은 성령과 함께 세례를 받을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다. 그러므로 성령 세례는 구원에 관한 영적 개념을 좀 더 분명하고 포괄적으로 전달하는 개념이지, 결코 육체와 관련된 종교적 체험의 성격으로 규명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중생과 회심을 경험한 성도가 아직도 성령 세례를 받지 못했다는 주장은 성령은 받았는데 성령과 함께 있지 않다는 해괴한 논리가 되는 것이다. 중생과 회심에 이른 사람은 누구나 성령 세례를 받았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은 결단코 진정한 중생과 회심에 이를 수 없다. 은사주의자들의 차후 성령 세례 교리의 심각한 오류를 한 가지 더 지적한다면, 이 교리는 무엇보다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얻는 구원을 부정한다. 이들은 시종일관 더 나은 구원의 조건으로서 성령 세례를 받기 위해 인간적인 열심과 공로를 촉구한다. 이는 구원을 이룰 수 있는 근거가 사람편에 있다는 펠라기우스주의나 알미니안주의와 다를 바 없는 주장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만이 구원을 이룬다는(Sola Gratia)의 종교개혁의 교리에 전적으로 배치되는 비성경적 견해이다.

 

성령 세례에 관한 은사주의자들의 맹점을 인정한다면 그들이 한사코 강조하는 방언 은사의 유효성과 지속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오순절 강림 사건과 같이 초대 교회 시대의 방언의 은사는 성경 완성과 더불어 종결되었다고 확신한다. 교회 역사 속에서 대부분의 경건하고 복음적인 칼빈주의자와 개혁주의자들은 이와 같은 견해를 일관되게 지지해 왔다.

 

그렇다면 사도 시대의 방언이 중단되었다는 증거가 무엇인가?

첫째, 사도 시대의 방언은 다른 초자연적인 기적과 마찬가지로 그 시대 교회와 성도를 구별 짓는 특별한 표징으로서만 한정되었기 때문이다. 방언은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에만 언급되어 있다. 신약 시대의 마지막 기적이 일어난 시점(대략 주후 58년경) 이후부터 요한이 계시록을 완성한 시점(대략 주후 96년-98년)까지 방언에 관한 아무런 언급이 없다. 특히 방언에 관해서는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잠깐 언급한 것 외에는 나머지 열 두 편의 서신에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신약의 다른 저자들(베드로, 야고보, 요한등) 역시 방언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초대 기독교 역사도 이 같은 사실을 반증한다. 사도 시대 이후로 초대 교회 시대(속사도와 교부시대, 1세기-4세기)에 작성된 정통 교회의 기록물 중에서 방언에 관한 구체적인 언급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다만 이것들은 몬타니즘과 같은 신비주의 성령론을 강조하는 기독교 이단이나 사이비들의 전유물처럼 취급되곤 하였다. 이후 역사에서도 자칭 방언 현상에 몰입하는 사람들은 이단적이거나 광신적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비정통적인 집단에 속한 자들이었다.

 

둘째, 성경은 방언의 은사보다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면한다. 은사주의자들은 방언의 은사를 최고로 여기지만, 사도 바울은 방언은 가장 주의해야 할 은사로 여긴다. 사도 시대의 방언 은사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그럼에도 방언에 대한 과도한 관심과 집착은 늘 교회에 문제를 야기하였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통해 그 심각성에 대한 실제적인 교훈을 주고 있다. 고린도 교회에서 문제가 된 방언은 무아지경의 황홀경에 빠져 정신 나간 사람의 헛소리처럼 횡설수설하는 뜻 없는 소리였다. 성경에서 말하는 방언은 분명 언어의 기본적 요소가 구비되어 의사가 전달되는 말, 즉 외국어(foreign language)였다. 그런데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이 추구하는 방언은 사람들이 전연 이해할 수 없는 조잡하고(coarse) 이상한(strange) 말이다. 이들은 이 말을 천국의 언어(heavenly language)라고 부른다. 그러나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에 기록된 방언이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라는 증거는 성경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다.

 

은사주의자들의 방언은 그 외에 다른 몇 가지 치명적인 논리적 결함이 있다. 사도 바울은 방언의 은사가 교회 안에서 제대로 활용되려면 반드시 공적인 방언 통역을 받아야 한다(고전 14:26-28)고 주장했다. 그러나 은사주의자들의 방언이 초대 교회의 방언과 같다는 것을 증명할 방언 통역의 객관성을 입증할 방법이 없다. 실제로 전혀 배우지 않은 외국어 방언을 하는 사람도 없거니와 그 언어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는 사람이 그것을 제대로 통역하는 일도 볼 수 없다. 그런데도 은사주의자들 중에는 방언의 은사는 배워서도 할 수 있다고 한다. 방언을 하는 법을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곳이 유행할 정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방언의 은사에 대한 인간적인 질투와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며, 설사 배워서 한다고 하더라도 성경에서 말하는 방언과는 전혀 상관없는 거짓된 방언이다. 뜻 없는 말은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와 다를 바가 없다(고전 13:1).

 

방언의 은사가 허용되던 초대교회 시절에도 이 은사는 다른 은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등하다는 주의를 받았다(고전 14:4-5). 왜냐하면 이 은사는 자신만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사랑의 은사는 모든 자를 유익하게 하며, 한 마음으로 교회를 세우는 원동력이 된다. 사도 바울은 너무나 분명하게 “방언도 그치고”,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 예고하였다(고전 13:8,10). 방언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가 완성되기 이전까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은사로서 존재하였다. 그것은 결코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보편적인 은사가 아니라 일시적인 은사였다. 일시적 방언은 완전한 것,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치되었다. 그러므로 지금도 방언을 통해 계시를 받을 수 있다는 사상은 성경의 충족성과 완전성 그리고 종결성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불신앙과 다를 바 없다.

 

경계해야 할 은사주의 프로그램

 

1. 알파코스(Alpha Course)

 

알파코스(Alpha Course)는 영국 런던에 있는 '성 삼위일체 브롬프톤'(Holy Trinity Bromptom Church) 성공회 교회(이하 HTB로 약함)에서 1976년에 당시 주임신부였던 찰즈 만함(Charles Marnham)에 의해서 시작된 전도 프로그램이다. 알파란 명칭은 다섯 가지의 뜻을 표하는 구절의 첫 글자를 모아 만든 두문자어(acronym)이다. 예를 들어, 첫 글자 A는 '누구든지 올 수 있다'(Anyone can come)를, L은 '웃으면서 재미있게 배운다'(Learning and Laughter), P는 '음식을 함께 먹는다'(Pasta), H는 '서로 섬기며 돕는다'(Helping one another), 끝으로 A는 '무엇이든지 물어볼 수 있다'(Ask anything)를 뜻한다. 이러한 구절들의 조합으로부터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바처럼 알파코스는 비공식적으로 비교적 자유롭게 불신자들을 접촉하는 기회를 만들어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전도목표 아래 고안된 전도프로그램이다.

 

알파코스는 찰즈 만함 이후 1981년에 존 어바인(John Irvine), 1985년에 니키 리(Nicky Lee)에 의해 조금씩 변화를 겪었으며, 1990년에 니키 검블 (Nicky Gumbel)에 의해서 지금과 같은 내용으로 진행이 되고 있다. 찰즈 만함에 의해 만들어진 초창기 알파토크는 복음에 대한 순수한 면이 없지는 않았으나 니키 검블이 <능력전도>를 주창하는 빈야드 교회(Vineyard Christian Fellowship)의 지도자 존 윔버와 그 교회 팀을 HTB 교회로 초청하면서 완전히 변질되었다. 알파코스의 보급 현황은 놀랍다. 영국의 알파코스 홈페이지(http://www.uk.alpha.org)에 따르면, 영국에서만 200만, 전 세계적으로 1,100만 명 이상이 알파코스에 참석하였으며, 163개국에서 알파 세미나가 개최되고 있다.

 

알파코스는 현대판 영지주의이다. 빈야드의 성령 체험주의, 신사도운동의 직통 계시, 신오순절주의의 방언 강조, 제3의 물결의표적과 능력 전도, 뉴에이지의 신비주의, 로마 가톨릭의 영성 운동 등 지금까지 언급한 거의 모든 종류의 은사주의 결정적 요소들이 한데 짜깁기 되어 있다. 2000년을 전후로 알파코스는 한국 교회에 교회 성장과 전도 유력 프로그램으로 소개되었다. 1999년 8월 한국의 여러 기독교 신문들에는 유명 목사들의 지도와 후원 아래 “21세기 교회 영성 목회를 리드할 성경공부”, “60개국 65개 교파 46,000여 교회지도자 세미나 참석’, ‘성령 치유 세미나’ 등의 문구를 사용한 알파코스 세미나 광고가 대대적으로 실렸다. 알파코스는 한국 교회 내에서 뿐만 아니라 해외 이민 교회에까지 광범위하게 실시되고 있다.

 

그러나 알파코스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이 프로그램으로 인한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올해 들어 몇몇 장로교단의 명망 있는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알파코스에 대한 면밀한 신학 공청회가 열리면서 이단성 사례가 구체적으로 제기된 바 있다. 한국의 주요 4대 교단(합동, 통합, 합신, 고신) 총회는 알파코스를 불건전한 프로그램으로 규정하고 자체 이단사이비연구협의회를 구성하여 조사 중에 있다.

 

2. 셀(Cell)과 G 12

 

셀(Cell)과 G 12는 은사주의를 배경으로 알파코스를 변형한 교회 성장 프로그램들이다. 이 프로그램 역시 최근 국내외 가릴 것 없이 전 세계 기독교에 불고 있는 커다란 트렌드의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 셀(Cell)이란 구역 조직의 번역어인데, 교회 성장가들에 의한 구역조직의 셀(Cell)이라는 용어는 조용기 목사의 여의도 순복음 교회가 세계적인 교회로 부상하면서 그 성장 비결이 구역조직으로 알려지면서 부터였다.

 

지만 현재 한국 교회에서 유행하는 셀(Cell)은 국외에서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화된 교회 성장 시스템의 일환으로 국내에 유입된 것이다. G12라는 프로그램은 셀 양육 시스템 중의 하나로, 영어 대문자 G는 Goverment(정부)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개념을 나타내는 단어이며, 숫자 12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12명의 제자를 가리킨다. 즉 하나의 리더가 자신 밑에 12명의 제자를 양육한 뒤, 일정 기간이 지나면 분가, 독립하여 무한 번식하도록 하는 교회 성장 시스템이다. 하지만 셀과 G 12는 급속한 교회 성장에 대한 갈망이 큰 나머지 전통교회 체계를 부정하는 한편 은사주의와 신비주의와 같은 불건전한 신학 사상을 무분별하게 수용하고 있다.

 

3. 빈야드 운동(Vineyard Movement)과 토론토 축복(Toronto Blessing)

 

최근에 `빈야드 운동' 혹은 `토론토 축복'이라고 하는 은사주의 운동 등이 있는데, 그것들이 `빈야드'라고 불리우는 이유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애나하임(Anaheim, California)에 있는 빈야드교회를 이끄는 죤 윔버를 비롯해서 그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형성한 단체가 `빈야드 교회 연합(Association of Vineyard Churches)'으로서 이제는 일종의 교단처럼 되었기 때문이고, `토론토 축복'이라 함은 죤 아노트(John Arnott)가 개척한 `토론토 공항 교회(Toronto Airport Vineyard)'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하여 언론이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다. 빈야드 운동에서는 성령의 능력을 특히 강조하는 권능주의와 성령체험의 감정적 요소를 강조하는 감정주의의 두 관점이 강조되는데, 능력전도를 주장하는 존 윔버의 경우는 권능주의적인 측면이 강하고, 감정적 경험을 중시하는 존 아노트는 감정주의적인 면이 강하다. 그럼에도 이 두 가지는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이교도적 신비주의와 극단적인 체험주의와 비상식적 무형식주의라는 은사주의의 극단성이 골고루 나타난다.

 

4. 프로미스 키퍼스(Promise Keepers) 운동

 

프로미스 키퍼스 운동 1991년 미국에서 빌 맥카트니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콜로라도 대학교 축구 코치이었다. 또 랜디 필립스는 그 운동의 책임자이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불더밸리 빈야드 교회의 교인들이다. 그 교회의 제임스 라일 목사는 극단적 은사주의파에 속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시기를, 비틀즈는 하나님의 손으로 은사를 받았고 그들에게 기름을 부은 것은 바로 하나님이셨고 하나님께서 온 세계에 음악적 부흥을 통한 은사주의적 갱신을 시작하실 목적으로 그렇게 하셨다고 했다. 그는 또한 하나님께서 오늘날도 자기 백성에서 여전히 음성으로 말씀하심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오늘날 다른 많은 운동들과 같이, 이 운동의 문제점은 은사주의적 연관과 에큐메니칼 성격이다. 이런 류의 운동은 자유주의적 교단들을 문제삼지 않고 심지어 로마 천주교회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CCC의 빌 브라잇, 빌 하이벨즈, 무디성경학교 교장 조셉 스토웰, 척 스윈돌, 척 콜슨, E. V. 힐 등 에큐메니칼 인사들이 이 운동의 연사들이다. 오늘날에는 분명한 사상적 제한성이 없으면, 초교파적 운동 자체가 이런 문제점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일이 하나님의 방법대로 바르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자유주의 이단 사상을 포용하는 에큐메니칼 정신과 은사주의적 특징들은 하나님의 뜻에 명백히 어긋난다.

 

맺음말(은사주의 대처 방안)

 

은사주의를 한 가지 개념으로 정의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은사주의 신학을 반영하는 스펙트럼의 범위가 무지 넓기 때문이다. 은사주의 내에는 이단과 다를 바 없는 천박하고 극단적인 부류에서 정통 복음주의와 매우 친밀한 부류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양한 은사주의가 있다. 앞서 서두에서 밝힌 대로 은사주의자들 가운데는 자신의 한계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보다 성경적인 사고와 통찰을 갖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진실 무망한 마음으로 은사를 추구하는 성도들도 있음을 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 본 은사주의의 그늘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한 은사주의를 통해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신앙을 만나기란 요원한 일임에 분명하다. 은사주의라도 겉모습을 달라질 수 있겠지만 은사주의의 비성경적 오류와 신학적 불건전성의 씨앗을 제거하지 않는 한 은사주의는 사탄이 현대 교회의 성(城)을 파괴하기 위해 교회 마당에 몰래 들여 놓은 커다란 토로이 목마가 될 가능성이 크다. 비록 이미 교회 마당 깊숙이 들어 와 있지만 트로이 목마의 문이 완전히 열리기 전에 강력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과연 진리에 관한 한 가공할만한 파괴력을 지닌 이 질기고 억센 존재를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는가?

 

첫째, 분별력을 갖고 오류에 직시하라.

오늘날 우리는 진리에 대해 냉소주의와 회의주의가 판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믿지 않는 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성도라고 하는 이들 역시 진리를 추구한다고 하면서도 진리를 분별하는 일에 관심이 적다. 은사주의는 겉으로는 종교와 신앙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지만 그 내면은 진리에 대한 불신과 오류가 가득한 불신앙과 진배없다. 따라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알아야 한다. 어느 시기보다도 지식과 명철이 요청되는 때이다.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려야”(살전 5:21-22) 한다. 이러한 지혜와 결단이 있을 때에 두려움이 사라질 것이며, 앞으로 일어날 일을 정확하게 예상하는 한편 신중하게 대비하게 될 것이다.

 

둘째, 진리로서 무장하라.

불신앙은 타협과 조정의 대상이 아니라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이다. 은사주의는 한 입에 교회와 성도를 삼키려는 듯 우리 곁에서 으르렁거리고 있다. 비록 전쟁은 힘들고 어려운 일임에 분명하지만, 이 영적 전투에서 물러서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영적 군사로 부름 받은 성도가 취해야 할 태도가 아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진리를 위한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좋은 무기로 무장해야 한다. 성도에게 허락된 유일한 공격용 무기는 진리의 말씀뿐이다. 이것을 잘 활용할 때에, 우리는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할”(고후 10:5)수 있게 될 것이다. 진리의 싸움에서는 오직 진리로 무장해야 한다. 그것만이 영적 승리를 보장해 준다.

 

셋째, 진리 안에 거하라.

은사주의와의 영적 싸움은 한 순간에 마쳐질 일이 아니다. 주님께서 심판주로 오실 때까지 은사주의와 같은 잘못된 사상은 더 활개를 칠 것이며, 더욱 강한 기세로 성도를 위협할 것이다. 종국적인 승리를 위해서는 수고와 인내가 필요하다. 또한 평안과 안식이 요청된다. 이것은 진리 안에 머무는 자에게만 주어진다. 진리 안에 거하는 것은, 곧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는"(엡 4:21)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진리 안에 머물 때에 무엇이 두려우랴!(*)

출처 : 한국해와 독도사랑
글쓴이 : 한국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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