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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정 이지함 .. 진기한 새, 괴이한 돌, 이상한 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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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4. 8.

 

 

 

 

                                                  토정 이지함

 

  

 

 

 

 

 

 

 

                                            이지함의 화려한 家門

 

  

 

 

이지함은 오늘날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동의 한산 이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사대부 명문가이었다. 고려 말의 충신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과 이곡(李穀)을 비롯하여, 선조 대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李山海)가 그의 조카이었다. 

 

 

 

이곡과 이색은 고려말과 조선 초를 걸쳐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으며, 이색의 아들 종선(種善)은 종1품 좌찬성까지 오른 인물이다. 또 이산해는 이지함의 兄인 "백의 재상" 이지번(李之蕃)의 아들로 후에 북인의 우두머리가 된다.  이지함이 죽은지 100여 년이 지난 1686년 숙종이 화암서원(花巖書院)이라는 사액서원을 내렸을 만큼, 한산 이씨 가문은 후세에까지 명망을 이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奇人 이지함

 

 

  

 

이러한 가문으로 보면 이지함은 성리학을 목숨처럼 여기는 사대부로 살아야 했다. 행동 하나하나에 명문가 자제의 기품이 흘러야 했다.

  

 

그러나 이지함은 기품과는 거리가 먼 기이한 행동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일부러 관인들의 앞길을 가로막고 바닥에 드러눕기도 했는데, 포졸들이 아무리 끌어내려 해도 이지함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행동도 예사롭지 않았지만 더 기이했던 것은 그의 행색이었다. 그는 나막신을 신고, 머리에 솥을 뒤집어쓴 채 돌아다녔다. 

 

 

 

이런 행색을하고 매맞기를 자청하기도 했다. 기록에 따르면, 이지함이 이처럼 튀는 행동을 한 이유는 당시 관리들의 횡포에 시달리던 백성들의 고통을 몸소 체험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두고 손가락질 하며 놀렸지만,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이지함 다시 보기

 

 

 

 

토정 이지함... 그는 그 인물의 역사적인 위상보다도 그의 저술로 알려진 "토정비결"에 관심이 집중되거나, 그의 奇人的인 풍모만이 野史의 주된 소재가 되었다. 또한 임꺽정 등의 소설 속의 주요 인물로 등장하여 대중들에게 친숙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이지함에 대하여 대중적인 친숙성만큼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부분이 너무 많은 실정이다. 그는 16세기를 대표할 수 있는 학자이며 思想家이었다.

 

 

그가 제시한 국부증진책과 민생 안정책 같은 사회경제사상은 그 시대를 뛰어넘는 상당히 진보적인 것이었으며, 實學의 원류로까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주자 성리학만을 고집하지 않고 다양한 학문과 사상을 수용하면서 부강한 조선을 위하여 적극적인 사회경제 정책을 제시하고 실천하였던 실학자이었다.  

 

 

 

 

 

 

 

 

 

 

토정 이지함(土亭 李知함) ..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형백(馨伯), 형중(馨仲), 호는 수산(水山) 또는 토정(土亭), 시호는 문강(文康)이다.생애의 대부분을 麻浦 강변의 흙담 움막집에서 청빈하게 지내서 토정(土亭)이라는 號가 붙었다.고려 말,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후손으로, 현령 이치(李穉)의 아들이며, 北人의 영수 이산해(李山海)의 숙부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맏형인 이지번(李之蕃)에게서 글을 배우다가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 들어갔다. 경사자전(經史子傳)에 통달하였고, 서경덕의 영향을 받아 역학, 의학, 수학, 천문, 지리에도 해박하였다. 1573년 유일(遺逸之士 .. 재야의 인물)로 이율곡에 의해 천거되어 6품직을 제수받아 포천 현감이 되었으나 다음해 사직하였다.

  

 

1578년 아산 현감이 되어서는 걸인청(乞人廳)을 만들어 관내 걸인의 수용과 노약자의 구호에 힘쓰는 등 民生 문제의 해결에 큰 관심을 보였다. 박순(朴淳), 이율곡, 성혼(成渾) 등과 교유하였으며, 당대의 일사(逸士) 남명 조식(南冥 曺植)은 마포로 이지함을 찾아와 그를 도연명(陶淵明)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그의 사회경제사상은 포천현감을 사직하는 상소문 등에 피력되어 있는데, 농업과 상업의 상호 보충관계를 강조하였고, 鑛山 개발론과 해외 통상론을 주장하는 진보적인 것이었다. 이지함은 朱子性理學만을 고집하지 않는 사상적 개방성을 보였으며, 이러한 까닭으로 조선시대 道家的 행적을 보인 인물들을 기록한 "해동이적(海東異跡)"에도 소개되었다.

 

 

  

 

 

 

 

 

 

 

                                          진기한 새, 괴이한 돌, 이상한 풀

 

 

 

 

또한 이지함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김계휘(金繼輝)의 질문에 이율곡은 " 진기한 새, 괴이한 돌, 이상한 풀"이라고 대답하였다는 일화는 이지함의 奇人的 풍모를 대변해 주고 있다. 1713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 보은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으로는 "토정유고(土亭遺稿)"가 전한다. 

 

 

                                            

 

 

 

 

 

 

                                            이지함, 시대적 배경

  

 

 

토정 이지함이 살았던 시기는 시대적으로 燕山君의 폭정에서 중중반정(中宗反正)으로 士林派가 중앙정계에 뿌리를 내리다가, 기묘사화(己卯史禍)로 조광조의 지치주의적 왕도정치 실현이 실패하여, 여기에 참여하거나 관련된 신진 사대부가 제거되고, 뜻있는 선비는 과거를 포기하고 출사(出仕)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이 이지함에게 기인(奇人)이라 불릴만한 개혁적인 행적을 남기게 하였는지 모른다. 

 

 

이지함이 살던 조선 16세기 중반, 백성들의 생활고는 매우 심각하였다. 그동안 과전법 제도가 무너지면서 양반들은 마구잡이로 土地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농민들은 토지에서 내몰렸고 소작농 신세로 전락하였다. 농민들의 땅을 강탈하는 일에는 왕실도 앞장섰다.

 

 

 

 

 

 

                                                       임꺽정

 

 

 

 

어린 明宗을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했던 문정왕후(文定王后)는 막강한 권력을 이용하여 왕실 소유의 토지를 늘려갔다. 땅을 잃은 농민들은 갈 곳이 없었다. 양반들의 땅을 빌어 겨우 농사를 지을 수 잇었지만, 제 손에 들어오는 돈으로는 입에 풀칠하기도 힘겨웠다. 

 

굶주림과 虐政을 견디지 못한 백성들은 도적이 되었고, 이 도적떼는 전국으로 확산되어갔다. 명종 시절 조선을 혼란으로 몰아 넣었던 임꺽정이 바로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가난이 일상이 되어버린 백성들의 삶을 救하고자 했던 이지함, 그는 농사 지을 땅에만 의존하던 조선사회에 상품을 유통시켜 이윤을 남기는 상업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徐敬德의 門下가 되다

 

 

 

 

이지함이 상업에 눈을 뜨면서 찾아갔던 곳이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이었다. 서경덕을 중심으로 이들은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정통 성리학에서 벗어나 다양한 학문을 수용하였던 개방적인 학풍을 견지한 지식인 그룹이었다. 이는 서경덕과 그 제자들이 開城 출신이라는 사실과도 연관되는데, 개성지역의 활발한 상업활동을 통해 이들은 일찍부터 상업의 가치에 주목하고 있었다.

 

 

 

개성사람들은 양반도 상업에 종사하던 상인이었고, 또 서경덕의 제자들 중에는 실제로 상인도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어떤 사상은 상업에 대해서는 다른 유학자들에 비하여 유연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또 더욱 중요한 것은 조선왕조는 농업에 근간을 두었고, 농업에서 생산된 것으로 국가재정을 운영하려고 하였다. 

 

 

이지함은 서경덕의 門下에 들어가서, 농촌경제에만 한정되지 말고 상업이라든지, 수공업, 유통경제의 활성화를 통한 전반적인 국가경제의 富를 창출하고 그 창출된 富의 혜택이 백성들의 생활 현실에 그대로 적용되는 그런 사회를 구상하게 되었다. 

 

 

 

 

 

                                아담 스미스보다 200년 먼저 주장한 國富論

 

 

 

 

 

 

 

 

18세기 영국의 경제학자, 아담스미스 ... 그는 국민들을 잘 살기 위해서는 먼저 나라의 富를 키워야 한다는 이른바 "국부론(國富論)"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이지함은 아담 스미스보다도 200년이나 더 앞서서 이와 같은 주장을 한 것이다.

  

 

이지함은 백성들의 가난을 구제하기위해서는 해외 통상과 자원의 개발 같은 농업 이외의 경제정책이 중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명분 중심의 성리학과 봉건적인 질서가 견고하였던 조선사회에서 이지함은 이처럼 선진적인 주장을 하게 되는데, 여기에 이지함의 선구자적 위대함이 있는 것이다.

 

 

 

 

 

 

                                              이지함의 생애

 

 

 

 

 

이지함은 1517년(중종 12) 9월20일, 외갓집인 충남 보령군 청나면 장산리에서 태어났다. 이곳 장산리는 고래로부터 산자수명한 곳으로 광산 김씨의 집성촌으로 유명했다.이곳은 이지함의 작은 외삼촌 김극성(金克成)이 중종반정 때 4등功臣이 되어 60결( 1결은 30석)의 땅을 功臣田으로 받아 생활이 윤택하였으므로 그의 집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토정은 부친 이치(李穉)가 41세에 낳은 막내로 귀염둥이로 자랐다. 토정은 14세에 부친을 여의고, 16세에 모친을 잃었으며, 3년동안 형 이지번(李之蕃)과 같이 여막살이를 하였다. 이때 큰형 이지번이 家長이 되어 살림을 꾸려나간 것은 물론 토정에게 글을 가르쳐 주어 토정의 아버지와 스승 역할을 하였다. 兄 이지번은 토정보다 9살이 위이었다.

 

 

3년의 여막살이를 마친 토정은 형 이지번을 따라 한양으로 올라갔다. 이지번은 외삼촌 김극성의 추천으로 노비를 관장하는 장예원(掌隸院)에 근무한다, 이때 이지번은 세자 (훗날 仁宗)을 만나는데, 세자는 이지번을 白衣宰相이라 칭찬하였다.

 

 

 토정이 23세 되던 해인 1539년 큰아들 산두(山斗)가 태어난다. 부인은 모산수정랑의 장녀이었다.이지함에게는 산두, 산휘, 산룡의 세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산휘는 호랑이에 물려 죽었고, 셋째 산룡은 12살 때 역질로 죽었다.  같은 해 큰형 이지번의 아들 이산해(李山海), 작은 형 이지무의 아들 산보(山甫)도 태어난다. 토정은 산해와 산보에게 5살 때부터 글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산해는 신동으로 명필이어서, 그의 글씨를 얻으려는 사람들로 줄을 섰다고 한다. 이때 경원대군(후일, 明宗)은 이퇴계를 시켜 이산해의 글씨를 얻어오라고 하여 이때부터 이퇴계와 이지함, 이지번의 교유가 시작하게 된다.     

 

 

 

 

 

 

 

 

 

 

                                         이지함, 科擧를 포기하다

 

 

 

 

토정은 처음에는 학문에 뜻을 두지 않았다.그러나 그가 결혼 후 兄 이지번의 권고로 발분하여 침식을 잊는 열정으로 학문에 정진하였다. "토정집(土亭集)"에는...

 

 

 

 

 

 

 

 

 

 

소년 때에 글을 배우지 않더니, 장성하여 그의 형 지번이 글 읽기를 권하니 곧 분발하여 부지런히 배워 침식을 잊기에 이르렀다. 오래지 않아서 글뜻을 능히 통하게 되었으나, 科擧는 보지 않았고.스스로 방일하기를 좋아 하였다.

 

 

 

이율곡과 더불어 서로 매우 친숙하게 알고 있었다.  이율곡이 성리학에 종사하기를 권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나는 욕심이 많아서 할 수 없습니다"고 하였다. 

 

 

 

 

 

 

 

 

그 후 토정은 개성에 사는 서경덕의 제자가 되어, 이곳에서 동갑내기인 허엽(許曄 ..허균의 아버지로 후일 東人의 영수가 된다)과 동문수학하게 된다. 이때까지 토정은 과거에 급제할 실력은 충분하였으나, 스승과 같은 兄 이지번이 1546년(명종 2)에 나이 39세에 진사에 합격하자, 토정도 다음 식년시에 과거를 보기로 한다.   

                   

                        

 

그러나 명종 즉위년에 왕실의 외척인 대윤 윤임(大尹 尹任)과 소윤 윤원형(小尹 尹元衡)의 반목으로 소윤이 대윤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을사사화(乙巳史禍)가 일어났고, 여기서 명종 4년, 이지함의 죽마고우인 史官 안명세(安名世)가 이 을사사화가, 윤원형, 이기 등 소윤 일파가 억지로 죄없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매질을 하여 만든 獄事라고 적어 놓은 것이 발각되어 사형을 당하자, 이지함은 과거를 포기한 채 떠돌게 된다. 

 

 

 

 

 

 

 

                     이홍남(李洪南)의 고변 사건  .. 토정, 양반에서 천민으로

 

 

 

 

 

 

 

 

 

 

 

 

이렇듯 정치적 난국으로 큰 실의를 느낀 이지함이 장인과 처남의 운수를 짚어보니 불길한 기운이 있어, 그는 형에게 "내가 妻家를 관찰했더니 吉한 기운이 없습니다. 이에 피하지 않으면 禍가 장차 나에게까지 미칠 것이오"라고 말하며 처자를 데리고 서쪽으로 갔는데, 곧 커다란 시련이 닥쳤다.

이른바 이홍남(李洪南)의 고변 사건 또는 청홍도 사건(1549. 명종 4)이다. 이는 형제인 이홍남과 이홍윤(李洪胤)의 감정 대립이 불러온 역모 고변사건이었다.

 

 

 

당시 정계에 큰 파장을 일으킨 이 사건의 전말을 보면, 이홍남은 동생 이홍윤이 왕에게 불충했다고 고변하게 되는데, 이 역모 사건의 수괴로 이지함의 丈人인 이정랑이 걸려들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이지함의 妻家는 풍비박산이 났고, 이지함도 연좌법에 의해 양반의 신분에서 천민의 신분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후일 사면되었다. 

 

 

 

 

 

 

 

 

 

 

 

이지함은 그의 절친한 친구 안명세와 장인의 죽음으로 삶이 바뀌게 된다. 그는 과거를 포기하고 종종 기괴하고 괴짜같은 모습으로 다니기를 좋아했고, 머리에 솥을 쓰고 다니며, 나막신을 신고 다니면서 관군들의 길을 막고 누워버려 매맏기를 자청하는 기괴한 행동을 보였다.

 

 

 

 

 

 

 

 

 

 

 

 

 

이지함의 이러한 괴이한 행동은 실록에도 기록될 정도이었다. 이후로 이지함은 기나긴 유람을 시작한다, 그럴만큼 당시는 어지러운 세상이었다. 그러나 이지함은이 유랑기간 동안 백성들의 현실을 목격하면서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뜻을 품는다.  

 

 

 

 

 

 

 

 

 

 

 

 

 

 

                                             조선 최초의 양반 상인

 

 

 

 

 

죽마고우인 안명세(安明世. 1518~1548) 사건과 청홍도 사건은 이지함의 삶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이지함은 이때부터 처가 식구들을 부양하기 위하여 고기를 잡고 소금을 만들어 팔았다. 또 서해의 고향 앞바다 섬에 들어가 박(珀)을 심었다가 가을에 수확해 바가지를 만들어 팔기도 했다. 이지함은 밥을 해먹기 좋도록 머리에 갓 대신 솥 비슷한 철모를 쓰고, 나무를 파서 만든 나막신을 신고 다녔으며, 마포강가에 흙집을 짓고 살았다.

 

 

 

 

 

 

 

 

 

 

 

 

 

당시 마포는 지방의 산물과 서울의 市場이 최초로 만나는 상업과 유통의 중심지로, 그는 여기서 마포의 상인들과 어울리며 장사에 관한 살아있는 지식을 배우고, 한편으로는 고향 앞바다의 무인도에 들어가 박을 재배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수년만에 수천 섬의 양곡을 모을 수 있었고, 그 양곡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였다. 이러한 경험이 실학사상의 기초가 된 무역과 상업론의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이지함의 묘

 

 

 

 

 

 

                                               

 

 

충청남도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에 있다. 이지함이 생전에 미리 터를 정해두었다고도 하고, 이지함의 3형제가 모친의 喪을 당하여 선영의 묘를 이장할 자리를 찾다가 이곳이 명당임을알 알았다고 한다. 

 

봉분 둘레 100m, 높이 1.5m로 묘소에는 비석과 문인석이 있다. 묘비는 화강암이며 직사각혀의 대좌와 비신이 있다. 비신은 높이 132cm, 너비 52cm, 두께 17.8cm이며, 낮은 산허리에 있다. 서해가 한 눈에 들어오는 위치이다. 유언대로 비문은 간략하고, 문인석은 치장이 거의 없는 매우 검소한모양이다.                                      

 

 

 

 

 

 

                                        임진왜란을 예언하다

 

 

 

 

 

 

 

 

 

 

 

 

 

 

 

 

 

 

 

 

 

 

                                             마포구 토정동

 

 

 

 

 

 

 

 

 

 

 

 

 

 

 

 

 

 

 

 

 

 

 

 

 

 

 

 

 

 

 

 

 

 

 

 

 

 

 

 

 

 

 

 

 

 

 

 

 

 

                                           포천 현감,  이지함 

 

 

 

 

 

지금까지 기인(奇人)으로만 알려져 온 이지함.. 그런데 그에 관하여 전혀 뜻밖의 기록이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을 담은 대표적 저서인 북학의(北學義) ... 청나라의 문물 수용과 상공업의 개발을 주장하였던 박제가(朴濟家)가 지은 책이다. 바로 이 책에 토정 이지함의 이름이 등장한다. 해외 통상을 통하여 가난한 백성을 구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이지함..

 

 

 

  

 

                                    이지함,  57세에 포천현감이 되다

 

 

 

벼슬을 하지 않고 在野에서 성리학 이외의 다양한 학식을 접한 그는 1573년(선조 6) , 57세가 되던 해에 宣祖의 등극으로 정국이 바뀌면서 주민들의 추천으로 조정에 천거되어 청하(淸河 ..지금의 포천)현감이 되었다.

 

 

 

 

 

 

 

 

 

부임 첫날밤, 진수성찬으로 차려온 밥상을 받은 이지함은 衙前들을 꾸짖는다.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배를 곯고 있는데, 벼슬에 있는 사람들은 매일같이 이런 진수성찬을 먹는 것에 대해 탓하며 오곡밥과 나물국 한그릇만 담아 올리게 하였다. 

 

 

 

 

 

 

 

 

 

 

그가 고을현감으로 가장 먼저 한 일은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문책하는 일이었다.그는 관료들을 문책하는 방법도 남달랐다. 나이에 상관없이 잘못이 드러나면 아이처럼 머리를 길게 땋게 하였다. 德이 부족하여 아이만 하지 못하니 스스로 느끼고 뉘우치라는 의미에서였다.

 

 

 

 

 

 

 

 

 

 

청하현감 부임 직후 그는 백성들의 배고픔을 덜어주고자 당시 왕실 외척 및 중앙조정의 훈구파들과 결탁한 지방관리들에 의한 부정부패로 백성들이 굶주려 배고픔이 참을 수 없는 지경임을 사실적으로 지적하고 그 개선책을 상소하게 된다.     

 

 

 

뿐만아니라 조선 후기의 백과사전인 "오주연문장전산고(오주연문장전산고)"의 저자 이규경(이규경) 또한 이런 이지함의 선구자적 면모에 대하여 찬사를 보내고 있다. 이지함은 포천현감 재직 당시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왕에게 상소문을 올린다.

 

 

 

 

 

 

                                            王者以民爲天  民以食爲天

 

                             왕은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밥을 하늘로 삼는다.

 

 

 

 

 

 

 

 

 

 

 

 

 

 

이지함은 당시 포천현의 실상을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포천현의 형편은 이를테면 고아 비렁뱅이가 오장(五腸)이 병들어서 온 몸이 초췌하고 고혈(膏血)이 다하였으며, 피부가 말랐으니 죽게 되는 것은 아침 아니면 저녁입니다"

 

 

 

 

 

                                      1574년, 抱川縣監時上疎 

 

 

 

 

 

산과 들에 헛되이 버려져 있는 銀은 무엇이 아까워서 주조를 못하게 하며, 玉은 무엇이 아까워서 채굴하지 못하게 하십니까? 바다 속에 무궁무진한 물고기는 무엇이 아까워서 잡지 못하게 하며, 갯벌에 무궁무진한 소금은 무엇이 아까워서 굽지 못하게 하십니까? 

 

 

 

육지와 바다는 온갖 재물을 간수해 둔 창고입니다. 이것은 눈에 훤히 보이는 실물이니 이것을 자원으로 이용하지 않고 나라가 다스려진 경우는 없습니다. 만약 이 자원의 창고를 열 수 있다면 백성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은 限이 없을 것입니다.

 

 

 

 

 

고기잡이에 대해서는 전라도 만경현에 섬이 하나 있습니다. 소금에 대해서는 황해도 풍천부 근처에 섬도 있습니다. 이 섬들은 국가나 개인에게 소속된 적이 없다고 하니 포천현에 임시로 빌려주시면 고기를 잡고 소금을 굽겠습니다. 이것들을 팔아 곡식을 마련한다면 2~3년 안에 몇 천 섬의 곡식을 장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지함은 1574년 왕에게 올린 위의 상소문에서 육지와 바다의 資源을 개발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돕자고 주장하면서, 이를 위하여 구체적인 방안까지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나라가 나서서 자원을 개발하고 이 자원들을 通商하여 이용하자는 이지함의 주장은 농업 이외에 商業을 천시하면서도 그 이득만큼은 독점하였던 지배층에게는 경악할 만한 사건이었다.

 

 

 

 

 

 

 

 

 

 

 

 

 

                                                                    제왕의 세 가지 창고 

 

 

 

 

 

이지함은 이러한 현실을 타개할 수있는 방책으로 크게 세 가지 대책을 제시하였다. 이지함은 제왕의 창고는 세 가지가 있음을 전제로 하고, 도덕을 간직하는 창고인 人心을 바르게 하는 것이 상책(上策), 인재를 뽑는 창고인 吏曺와 兵曺의 관리를 적절히 하는 것이 중책(中策), 그리고 백가지 사물을 간직한 창고인 육지와 해양개발을 적극적으로 하는 것이 하책(下策)으로 정의하였다. 

 

 

 

 

 

 

 

 

 

 

 

그러나 이지함이 중점을 둔 것은 下策```이었다. 즉 당면한 현실에서 상책과 중책은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므로 하책을적극적으로 실시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지함이 하책을 강조한 것은 자원의 적극적인 개발과 연결되었으며, 이러한 사고의 바탕에는 의(義. 성리학의 의리와 명분)와 이(利. 실용과 이익)를 대립시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절충하려는 개방적인 사상이었다. 

 

 

 

  

 

 

 

그는 또한 재물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 조선사회의 미덕이지만, 재물과 이익도 좋은 마음으로 쓰면 덕이 될 수 있다는 주장도 펼쳤다. 의(義)와 이(利)를 대립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는 진보적인 정책으로 펼 수 있다는 생각들.. 이런 생각을 현감직을 맡으면서 실천하려 했다는 것에서 그는 아주 뛰어난 관료이었다.

 

 

 

 

 

 

                                            개혁을 넘어 혁명

 

 

 

 

 

 

당시 조선사회는 땅과 바다의 자원을 백성들과 함께 공유한다는 큰 원칙이 있었다. 즉 누구든지 직접 개발하기만 하면 그것은 생산자의 몫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명분일 뿐이었고, 자원개발의 실질적인 혜택은 소수의 힘있는 권력층의 것이었다.

 

 

 

가난한 백성들이 생산해 내면 그 생산물을 갖가지 이유를 핑계로 관리들이 착취하였다. 이 때문에 자원 개발이 적극적으로 이루어 질 수 없었다. 가장 대표적인 자원이 소금이었다. 당시 막대한 이윤을 내었던 소금도 이러한 방식으로 대부분 지배층의 손에 넘어갔다.

 

 

 

이지함은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관리되고, 소수의 권력층에게만 이득이 돌아가는 자원들을 국가가 나서서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通商에까지 이용하여 빈민들을 구하자는 선구적인 방안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보수적인 전통 성리학자이었던 송시열(宋時烈)조차 이러한 이지함의 선구적인 면모에 대하여 감탄과 존경의 뜻을 다음과 같이 표한다.... "내가 세상에 늦게 태어나서 토정의 문하에서 배우지 못했으나, 선배들에게 그 풍모와 명성을 듣고서는 우러러 공경하며 사모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 

 

 

 

이러한 이지함의 발상은 굉장한 개혁이었다. 개혁이라기 보다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그러니까 이것이 사회구조적으로 제도화되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이미 존재하였다. 통치자 그리고 권력층의 입장에서는 이지함의 주장은 위험한 발상이고, 선구자적이고 파격적인 것이었다. 

 

 

 

 

 

 

 

 

                          이지함, 포천현감을 스스로 사직하다 .. 그리고 아산현감

 

 

 

 

 

 

이러한 이지함의 파격적인 주장이 조정에서 받아들여질 리 없었다. 이러한 절실한 개혁방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지함은 벼슬을 스스로 버리고 귀향하였다. 그러나 이지함은 1578년(선조 11)에 다시 아산현감으로 다시 등용되었다. 

 

 

 

 

 

 

 

 

 

 

                                                 걸인청    乞人廳

 

 

 

그는 현대적 개념의 빈민 구제기관인 걸인청(乞人廳)을 설립하였다. 걸인청은 걸인들에게 단지 먹고 잘 곳을 제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교육시키고, 그가 직접 관리감독까지 하여 노약자와 굶주린 사람들을 구호하였다. 그리고 직접 걸인들을 데리고 나가 시장에서 장사하는 방법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봉건사회에서 근대적인 재활기관을 만든 것이다.

 

 

 

 

 

 

 

 

 

 

당시 아산의 백성들은 물고기를 잡아서 왕에게 받치고 있었는데, 이지함은 물고기를 기르던 연못을 매워 버렸다. 백성들이 임금이 먹을 음식을 마련하는 것을 괴로워한다는 사실을 알고 임의로 연못을 매워버린 것이었다. 왕에 대한 대역죄가 될 수도 있는 일...

 

 

 

 

 

 

 

 

 

 

                                                 이지함, 돌연 죽다

 

 

 

 

하지만 이지함은 아산현감 부임 3개월만에 돌연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의 나이 62세에 역질에 걸려 죽은 것이다.    

  

 

 

 

 

 

 

 

 

 

 

 

                                             토정비결    土亭秘結 

 

 

 

 

 

이지함이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단지 이지함의 號인 土亭의 이름을 가탁(假托)한 것으로 보고있다. 그 이유로는 이지함이 비록 술서(術書)에 능통하고, 복서(卜筮)를 잘하여 앞 일을 내다보는 데 유별난 재주가 있었다고는하지만, 본디 그의 학문적 바탕이나 경향으로 보아 이러한 복서(卜筮)를 남길 이유가 없다는 점 등이다.

 

 

 

또 이 토정비결이 널리 세시풍속으로 정착된 것이 19세기 純祖 以後였다는 점을 들어 이지함이 살았던 때부다 훨씬 뒤라 이지함이 지은 것이 아니라고 보는것이다. 

 

 

 

 

 

 

 

 

 

 

 

 

 

 

 

 

 

 

 

                                           대인설     大人說

       

 

 

 

 

 

 

 

              인유사원(人有四願)하니 내원영강(內願靈强)하고 외원부귀(外願富貴)하나니

              부막부어불탐(富莫富於不貪)이요, 귀막귀어부작(貴莫貴於不爵)이요

              강막강어부쟁(强莫强於不爭)이요, 영막영어부지(靈莫靈於不知)라.

 

 

 

 

                                  사람마다 네 가지 소원이 있으니

                                  안으로는 신령하고 굳세기를 바라고

                                  밖으로는 부자가 되고 귀인이 되려한다.

 

 

 

 

 

                                                 연이(然而),

 

                                                    그러나

 

 

 

 

 

             부지이불령(不知而不靈)은 혼우자(昏愚者) 유지(有之)하고

             부쟁이불강(不爭而不强)은 유약자(濡弱者) 유지(有之)하고

             불탐이불부(不貪而不富)는 빈궁자(貧窮者) 유지(有之)하고

             부작이불귀(不爵而不貴)는 미천자(微賤者) 유지(有之)하니

 

 

             알지도 못하고 신령하지도 못한 것은 어리석은자가 가지고 있고

             다툼질도 하지 않고, 강하지도 못한 것은 나약한 사람이 가지고 있고

             욕심도 안 내고 부자도 못 되는 것은 빈궁한 인간이 가지고 있고

             벼슬도 하지 않고 귀하지도 못한 것은 미천한 사람이 가지고 있으니

 

 

 

 

 

             부작이능귀(不爵而能貴)하며, 불탐이능부(不貪而能富)하며

             부쟁이능강(不爭而能强)하며, 부지이능령(不知而能靈)은

             유대인(惟大人)이라야 능하니라.

 

 

 

                             벼슬도 하지 않고 능히 귀하며

                             욕심을 안 내고도 능히 부유하며

                             다투지 않고도 능히 강하며

                             아는 것이 하나도 없어도 능히 신령한 것은

                             오직 대인이라야 능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