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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謙齋 鄭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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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5. 1.

겸재  정선                    謙齋   鄭敾

 

 

 

 

 

겸재(謙齋) 정선(鄭敾)은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라는 우리 고유의 화풍(畵風)을 개척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중국의 산천(山川)이 아닌 조선의 산천을 있는 그대로 그렸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自負心)을 가졌다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진경시대 (眞景時代)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양란(兩亂)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조선 고유의 진경문화(眞景文化)를 이루어 낸 시기로, 정선(鄭敾)이 활동한 영조(英祖)시대는 진경시대 중 최고의 전성기이었다.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은 조선 후기의 화가로, 처음에는 중국 남화(南畵)에서 출발하엿으나 30세를 전후하여 조선 산수화(山水畵)의 독자적 특징을 살린 사생(寫生)의 진경화(眞景畵)로 전환하였으며, 여행을 즐겨 전국의 명승(名勝)을 찾아 다니면서 그림을 그렸다. 심사정(沈師正), 조영석(趙榮석)과 함께 삼재(三齋)로 불리었다. 강한 농담(濃淡)의 대조(對照) 위에 청색(靑色)을 주조로 하여 암벽(岩壁)의 면(面)과 질감을 나타낸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으나 후계자가 없어 그의 화풍(畵風)은 단절되었다.   

 

 

 

                                                  겸재 정선의 생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원백(元伯), 호는 겸재(謙齋), 겸초(謙艸), 난곡(蘭谷)이다. 아버지는 시익(時翊)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이다. 2남 1녀 중 맏아들이다. 그의 조상들은 전라남도 광산, 나주 지방에서 세거(世居)한 사대부 집안이었다. 뒤에 경기도 광주로 옮기고, 고조부 연(演) 때 서울 서쪽(西郊)으로 다시 옮겨 살기 시작하였다.

 

겸재 정선은 1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늙은 어머니를 모시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하며, 김창집(金昌集 .. 영의정을 지냄)의 도움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위수(衛率 .. 왕세자를 따라 호위하는 직책)라는 벼슬을 비롯하여, 1729년에 한성부 주부, 1734년에 청하현감을 지냈다. 또 자연, 하양의 현감을 거쳐 1740년경에는 훈련도감낭청(訓鍊都監郎廳), 1740년 12월부터는 양천의 현령을 지냈다. 이후 약 10년 동안의 활동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1754년에 사도시첨정(司韜寺僉正), 1755년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그리고 1756년에는 화가로서는 파격적인 가선대부 지중추부사(嘉善大夫 知中樞府事)라는 종2품에 제수되기까지 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었다는 기록과 함께 현재 남아 있는 30세 전후의 금강산 그림 등을 통하여 젊었을 때 화가로서 활동한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40세 이전의 확실한 경력을 입증할 만한 작품이나 생활 기록 자료는 없다.

 

그가 중인(中人)들이 일하고 있었던 도화서(圖畵署) 화원(畵員)이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의 집안은 원래 사대부 출신으로 신분상의 중인(中人)은 아니며, 몇 대(代)에 걸쳐 과거(科擧)를 통하여 출세하지 못한 한미(寒微)한 양반이었다. 그리고 그의 뛰어난 그림 재주 때문에 관료로 추천을 받았으며 마침내 화단(畵壇)에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스승  김창흡

 

 

 

김조순(金祖淳. 1765~1831)의 ' 풍고집(風皐集) '에 나오는 기록에 따르면 ' 겸재 정선은 어려서부터 그림 재주가 있었으며 부모님이 연로(年老)해서 가계를 떠맡아야 했기에 김조순의 고조(高祖)가 되는 김창집(金昌集. 1648~1722)에게 취직을 부탁하니, 그가 도화서(圖畵署)에 들어가 볼 것을 권하였다 '는 내용에 의해 겸재가 도화서 화원이 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겸재의 집안 가세가 한 때 상당히 기운 것은 사실이지만 신분상의 변화가 있을만큼은 아니었기에 중인(中人) 계급 이하가 나가는 도화서에 사대부(士大夫) 계층인 그가 들어갈 이유가 없었으며, 의리명분을 중시한 성리학자(性理學者)로서 당시 사회를 주도하던 서인(西人) 노론계(老論係)의 '장동김씨' 일가의 후원으로 정치적, 문화적 핵심인물들과의 관계를 통하여 이념실현의 선구적 역할로써 진경산수(眞景山水)를 완성하였기에 그가 화원(畵員)이 되었을 가능성은 근원적으로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상류 사대부가문의 혈통을 잇고 태어난 겸재는 7세때에 스승 김창흡(金昌흡)이 30세의 한창 나이로 그의 동네에 낙송루(洛誦樓)라는 독서당을 짓고 독서와 강학부시(講學賦詩)에 전념한 것을 보고, 어린 겸재는 이들의 학통을 이어 받아 그 이상(理想)을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그는 이웃인 삼주 김창옹(三洲 金昌翁)과 노가재 김창업(老稼齋 金昌業) 형제들의 영향으로 정통 화도수련(畵道修練)에 몰입하게 되는 듯 한데 이 당시는 소위 남종화풍(南宗畵風)이 수용되어 화본(畵本)의 모방에 충실한 시기이었기에 겸재도 이러한 시대사조에 따라 이의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의 화명(畵名)이 국내외에 떠치게 되는 계기는 역시 김창집 형제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당시 좌우상(左右相)의 재상 자리를 오르내리던 김창집(金昌集)이 연행(燕行)을 하게 되어, 그의 아우 김창업(金昌業)을 수행시키는데, 겸재를 지도하였을 '김창업'이 '겸재'의 그림을 가져가 제일로 꼽히게 된 것이다.        

 

 

 

 

 

 

                                        관포지교                    管鮑之交

 

 

 

겸재는 '사천 이병연(사천 李秉淵)'과의 관포지교(管鮑之交)로 유명하다. 이병연(李秉淵)은 1699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금화현감, 배천군수, 사복시 주부를 거쳐 정3품인 삼척부사(三陟府使)까지 올랐으며, 훗날 큰 시인(詩人)으로 성장하여 스승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의 뒤를 이어 동국진체 시단(東國眞體 詩壇)을 이끌면서 당대에 ' 시(詩)에서 이병연(李秉淵), 그림에서 정선(鄭敾) '으로 병칭(竝稱)되었던 인물이다.

 

두 사람은 스승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의 집을 사이에 두고 자라나 동문수학(同門修學)한 이래, 서로를 격려하며 각각 시(시)와 그림 분야에서 한 시대의 문화를 선도한 인물들인데, 겸재가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를 앞장서서 이끌고 완성한 인물이라면, 이병연(李秉淵)은 '영조실록(英祖實錄)'에 그 졸기(拙記)가 기록되었을 정도로 당대 진경시(眞景詩)의 거장이었고,

 

겸재가 무수한 작품을 남긴 정력적인 화가이었던 것 처럼, 이병연(李秉淵) 또한 무려 13,000수(首)가 넘는 한시(漢詩)를 남긴 부지런한 시인이었으며, 이병연이 겸재보다 5살 위였지만 늘 벗으로 자처했으며 각각 81세와 84세의 장수(長壽)를 누리면서 여느 사람의 한 평생이 넘는 60여 년 긴 세월 동안 시와 그림을 통하여 사귀었다. 두 사람의 우정이 얼마나 깊었는지는 1740년 초 가을에 겸재가 한강을 건너 양천현감(陽川縣監)으로 부임해 갈 때 이병연이 쓴 다음의 전별시(餞別詩)에 잘 나타나 있는데, 두 사람은 지척간의 이별조차 안타까워했을 정도이었다. 

 

 

爾我合爲王輞川     자네와 나를 합쳐놔야 왕망천(王輞川)이 될터인데   /   畵飛詩墜兩翩翩     그림 날고 시(詩) 떨어지니 양편이 다 허둥대네   /   己遠猶堪望        돌아가는 나귀 벌써 멀어졌지만 아직까지는 보이누나  /  炒愴江西落照川        강서(江西)에 지는 저 노을을 원망스레 바라보네      

 

 

왕망천(王輞川)은 당나라 시불(詩佛)인 왕유(왕維)를 말한다. 그리하여 이병연이 지은 다음의 시를 보면 한양에 있는 이병연이 시를 써 보내면, 양천(陽川)에 있는 겸재가 그림으로 화답하고, 겸재가 그림을 그려 보내면 이병연이 시(詩)로써 응(應)하자는 두 사람간의 약속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렇게 해서 이루어낸 시화첩(詩畵帖)이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에 전하고 있는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이다.

  

 

여정겸재 유시거화내지약 기위왕복지시 (與鄭謙齋 有詩去畵來之約 期爲往復之始) ... 겸재 정선과 더불어 '시(詩)가 가면 그림 온다 '는 기약(期約)이 있어 약속대로 가고 오기를 시작하였다..........  

我詩君畵換相看   내 시와 자네 그림 서로 바꿔 볼 적에  /  輕重何言論價問   둘 사이 경중(輕重)을 어찌 값으로 따지겠나  /  詩出肝腸畵揮手  시(詩)는 간장(肝腸)에서 나오고 그림은 손으로 휘두르는 것  /  不知難易更誰難   모르겠네, 누가 쉽고 또 누가 어려운지 !

 

 

 

 

 

 

 

33폭(幅)의 걸작들이 담긴 이 시화첩(詩畵帖),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 가운데 특히 빼놓을 수 없는 그림이 위의 시(詩)를 주제로 하여 그린 '시화상간도(詩畵相看圖)'이다. 겸재는 이 그림에서 작품의 제시(題詩)로 앞의 두 줄을 적으면서 첫 글자 옆에 백문방인(白文方印), 천금물전(千金勿傳  .. 천 금을 준다 해도 남의 손에 넘기지 말라) 이라는 도장(圖章)을 찍어 놓았다.

 

 

 

                                    영조와 정선                    英祖와 鄭敾

 

 

 

정선(鄭敾)은 서울 유란동(幽蘭洞 .. 현재 종로구 청운동)에 살면서 인근에 살던 '안동 김씨' 명문가인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 김창업(金昌業)의 문하에 드나들었고, 이들에게서 성리학과 시문(詩文)을 수업 받으며 이들 집안과 깊은 인연을 쌓아갔다. 안동 김문의 인사들은 그를 후원했고, 겸재는 감사의 뜻으로 안동 김문(金門)의 주거지인 ' 청풍계(淸風溪) '를 여러 번 그렸다. 현재에도 청풍계가 자리하고 있던 곳에는 '백세청풍(百世淸風 .. 오래도록 부는 맑은 바람)'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다.  

 

 

 

 

 

 

겸재는 안동 김문의 후원과 더불어 국왕인 영조(英祖)의 총애를 받았다. 영조(英祖)는 정선(鄭敾)보다 18년 년하(年下)이었지만, 83세까지 장수하면서 '정선'과 60년 가까운 시간을 함께 하였다. 정선은 40대 이후에 관직에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1721년 그가 46세 때 경상도 하양(河陽)의 현감을 맡아서, 5년 간 근무한 후 1726년 임기를 마쳤다. 정선은 북악산 서쪽의 유란동 집을 작은아들에게 물려주고, 인왕산 동쪽 기슭인 인왕곡(仁旺谷)으로 이사를 했다.

  

정선은 84세로 생을 마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으며, 그의 대표작인 '인곡유거(仁谷幽居)'는이곳에서 유유자적하게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예술에 상당한 조예를 지니고 있었던 영조(英祖)는 '정선'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반드시 호(號)로만 부를 정도로 그 재능을 아끼고 존중하였다. 이것은 영조 시절에 정선이 여러 관직을 지낸 것에서도 나타난다.      

 

 

 

                                    경교명승첩                      京郊名勝帖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의 상첩(上帖)에는 '겸재 정선'이 양천(陽川 .. 지금의 서울 강서구 가양동 일대) 현령(縣令)으로 재임하던 1740년에 친구 이병연(李秉淵)과 시(詩)와 그림을 서로 바꿔보자는 약속을 위해 그렸던 양천팔경(陽川八景)을 비롯하여 한강과 남한강변의 명승도(名勝圖)들이 수록되어 있다.

 

하첩(下帖)은 상첩보다 10여 년 뒤에 그려진 것으로, 서울 주변의 실경도(實景圖)들과 함께 이미 타계(他界)한 이병연(李秉淵)을 회상하며 양천(陽川)에 있을 때 그로부터 받은 시찰(詩札)을 화제(畵題)로 한 그림들이 수록되어 있다. 상권에 19폭, 하권에 14폭의 그림 모두 33점이 실려 있다. 그런데 상권과 하권의 그림들은 화법(畵法)이나 화재(畵材)에 있어서 사뭇 다르다.  

 

 

 

                                            녹운탄                 綠雲灘

 

 

 

 

 

녹운탄(綠雲灘)이라는 지명(地名)은 현재 남아 있지 않는 지명으로 아마도 지금의 광주시 남종면(南終面) 수청리(水靑里) 대청탄(大靑灘)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는 겸재의 스승인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이 남한강 상류의 절경인 청풍(淸風), 단양(丹陽), 영춘(永春), 영월(寧越)의 사군산수(四郡山水)를 유람하려고 배를 타고 남한강을 거슬러 오르는 노정(路程)을 기록한 '단구일기(丹丘日記)'에서 이곳 지명을 '노온탄(老溫灘)'이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깍아지른 듯한 절벽  아래 여울 물살이 거센 듯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배에서는 사공들이 있는대로 다 나와 앞뒤에서 삿대와 노질에 여념이 없다. 절벽 위 등너머 산 밑에는 제법 살 만한 터전이 있는 듯 반듯한 기와집들이 들어서고 벼랑끝 높은 곳에는 정자(亭子)가 있다. 누군가의 별장이었던 모양이다. 버느나무, 느티나무 등 잡목이 숲을 이루어 집 둘레를 감싸고 푸르른 산등성이 위로는 소나무숲이 듬성듬성 보인다.

 

채색(彩色)을 지극히 아끼던 조선시대 산수화답지 않게 청록색(靑綠色)을 풍부하게 사용하여 화려한 느낌을 주고 있는데, 이는 '겸재'가 국왕 이하 일국의 감상인(鑑賞人)들이 존숭하는 당대 제일의 화가일 뿐만 아니라 청나라에서도 평가하는 세계적인 대가(大家)로 값비싼 채색을 비교적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기에 가능하였던 것 같다.    

 

 

 

                                          독백탄                   獨柏灘

 

 

 

 

 

이 곳이 남한강과 북한강이 물머리를 맞대는 양평군 양서면 양수리(兩水里)의 전경이라는 것을 한눈으로 알아 볼 수 있다. 물 안으로 밀고 들어온 긴 섬이 중앙에 가로 노여 남,북한강으로 갈라 놓았다. 섬 위로 나 있는 강줄기가 북한강이라는 것은 수종사(水鐘寺)가 거의 산 정상 가까이에 있는 운길산(雲吉山)이 그 뒤로 보이는 것만으로도 단정지을 수 있다.

 

더구나 그 죄측으로 이어진 예봉산(禮蜂山)과 운길산 산자락이 강으로 달려들어 만들어 놓은긴 반도(半島) 모양의 남양주군 조안면 능내리의 지형(地形)에 이르면 이곳이 양수리(兩水里) 일대라는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능내리의 마재 끝자락에 해당하는 억센 바위 봉우리 앞의 긴 섬이 바로 '쪽자섬'이고 그 사이를 지나는 여울목이 바로 '쪽잣여울', 즉 독백탄(獨栢灘)이라 할 수 있겠다.

 

마재 끝자락을 온통 험한 바위산으로 표현하기 위해 대부벽(大斧劈)으로만 묘사하였는데, '녹운탄'에서 보듯 군청색으로 쓸어내려 맑고 깨끗한 분위기가 고조된다. 그 위에 따로 떨어진 바위봉우리 하나와 하류 쪽에 솟구친 석기(石磯) 한 무더기도 같은 기법으로 처리해 광활하게 전개된 아래 위 남,북한강의 수면이 자칫 흩어질 뻔한 것을 막아주고 있다.  

 

  

 

                                                우천                   牛川

 

 

 

 

 

경기도 광주시(廣州市) 남종면 분원리 일대를 그린 진경(眞景)이다. 지금은 팔당호(八堂湖)가 막혀 수위가 높아진 까닭에 그림 아랫자락이 물에 잠겨 있지만, 팔당호 옹앞나루 근처에서 이곳을 바라보면 바로 이렇게 보인다. 소내, 즉 우천(牛川)이 경안(慶安)으로부터 중부면과 퇴촌면을 가르며 북류(北流)해 와서 분원리와 금사리를 갈라놓는 망조고개 밑을 휘돌아 한강에 합류하는 지점의 경치인 것이다. 

 

  

                                        석실서원                   石室書院

 

 

 

 

 

석실서원(石室書院)은 경기도 남양주시 지금동(芝錦洞)에 세웠던 서원이다. 효종 7년인 1656년, 병자호란 때 대표적인 척화신(斥和臣)이었던 김상용(金尙容)과 김상헌(金尙憲)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1663년 석실사(石室祠)라는 편액을 하사받고,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김수항(金壽恒), 김창집(金昌集), 김창흡(金昌翕), 김조순(金祖純) 등이 추가로 배향되었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 현재 조말생(趙末生) 묘역 입구에 과거 석실서원 터이엇음을 알리는 화강암 비가 세워져 있다.   

 

 

 

                                     삼주 삼각산                 三州 三角山

 

 

 

 

 

 

                                              광진                   廣津

 

 

 

 

 

현재 워커힐 호텔과 워커힐 아파트 등이 들어서 있는 서울 광진구 광장도 아차산(峨嵯山) 일대의 모습이다. 이곳에 한강을 건너는 가장 큰 나루 중 하나인 '광나루'가 있었다. 광나루가 언제부터 이 곳에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의정부, 동두천 쪽에서 내려와 한강을 건너 광주, 여주, 충주, 원주로 가려면 이 나루를 건너는 것이 가장 빠른 지름길이니 우리 역사가 시작될 때부터 이 나루도 생겨났을 듯하다.

 

더구나 이 나루 건너편에 백제(百濟)의 옛 도읍지인 하남 위례성(河南 慰禮城)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風納土城)이 있음에랴 ! 요즘 학계에서는 그 토성(土城)을 바룰하여 그 곳이 하남 위례성인지 여부를 밝히려는 노력이 한창 진행 중이다. 이 곳 풍납토성이 하남 위례성이었다면 백제의 시조(始祖)온조왕(溫祖王)이 백제를 건국하면서부터 이 광나루는 한강나루 중 가장 큰 나루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큰 나루 또는 너른 나루라는 뜻으로 광나루라 부르지 않았나 한다. 이로 말미암아 백제 개로왕(蓋鹵王) 21년인 475년에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이 하남위례성을 함락하여 백제가 도읍을 공주(公州)로 옮겨간 뒤에도 이 나루 이름만은 그대로 남아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물론 광주(廣州)라는 지명도 백제 때 수도가 있던 큰 고을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에 광주로 건너가는 나루라는 뜻도 겸할 수 있었다. 조선왕조가 한양을 수도로 정하면서 이 광나루의 기능은 되살아나게 되었으니 광주를 거쳐 충청좌도(忠淸左道 ... 남쪽을 바라보고 앉는 임금을 기준으로 할때 좌도라는 의미로 지도 상에서는 동쪽 부분임)와 강원도와 경상도를 이는 교통의 요지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에 아차산(峨嵯山)과 한강(漢江)이 어우러지는 아리따운 경치와 함께 이 곳은 별장(別莊)지대로 각광을 받게 되어 권문세가(權門勢家)들이 다투어 아차산 기슭에 별장을 지었다.

 

특히 겸재가  살던 진경시대(眞景時代)는 평화와 안락이 절정에 이르러 상류층들이 이런 아취있는 풍류생활을 맘껏 누리고 있었다. 겸재는 그런 그 시대 상황을 이 광나루 진경(眞景)에서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금도 배를 타고 보거나 천호동 쪽에서 바라다보면 아차산(峨嵯山)의 층진 모습이 꼭 이와 같이 보인다. 다만 이 금레서처럼 한식 기와집들이 드문드문 숲속에 배치되는 운치가 사라지고 살벌한 현대식 고층건물들이 무질서하게 들어차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송파진                     松波津

 

 

 

 

 

송파진(松坡津)은 지금 송파대로가 석촌호수를 가르고 지나서 생긴동쪽 호숫가에 있던 나루터이다. 이곳은 서울과 남한산성 및 광나루에서 각각 20리씩 떨어져 있던 교통의 중심지라서, 병자호란 직후부터 서울과 광주(廣州)를 잇는 가장 큰 나루터로 부각된 곳이다.   

 

 

 

                                            압구정                   鴨鷗亭

 

 

 

 

 

잠실(蠶室) 쪽에서 서북쪽으로 흘러오던 한강 줄기가 꺾여 서남(西南)으로 흘러가는데 그 물모퉁이를 이루는 언덕 위에 높이 세워진 것이 압구정(押鷗亭)이다. 지금 강남구 압구정동 산 310에 해당하는 곳이다. 잠씰 쪽에서 배를 타고 오면서 바라본 시각이기 때문에 압구정동 일대와 그 대안(對岸)이 되는 옥수동, 금호동 일대가 한 눈에 잡혀 있다.

 

바로 강 건너가 독서당이 있던 '두무개'이고 그 뒤로 보이는 검은 산이 남산(南山)이다. 정상에 큰 소나무가 서 있는 것으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6.25 한국전쟁때까지만 해고 그 큰 소나무는 그렇게 서 있었다고 한다.  

 

짙은 검푸른 색으로 덧칠해 놓은 남산 뒤로는 삼각산의 연봉(連峰)들이 멀리 뵈는데, 군청색을 엷게 물타서 흐릿하게 칠한 원산법(遠山법)으로 일관하였다. 독서당 고개나 이곳 압구정동 산언덕으로 모두 연두빛으로 초칠한 다음 짙은 초록색을 덧칠하여 그늘을 만들었다. 지형(地形)의 굴곡을 분명히 드러냄으로써 근경(近景)임을 시사하려는 의도이다. 압구정동 뒤로 보이는 원산(遠山)은 관악산과 청계산 우면산일 것이다.      

 

 

                                          목멱조돈               木覓朝暾

 

 

 

 

 

이 그림은 겸재가 현령(縣令)으로 재직하던 양천현(陽川縣 ..지금의 가양동)에서 바라본 남산(南山 ..목멱산. 당시에는 종남(終南)이라고도 했다. 북방에서 올린 봉화를 마지막으로 받는 남쪽 산이라는 의미이다)의 해돋이(朝暾) 모습이다. 양천에서는 남산이 정동(正東)이다. 겸잰ㄴ 인왕산 밑, 지금의 청운동 근처에 살았다. 그곳에서 바라보면 아침 해가 낙산(駱山 ..지금의 동숭동) 뒷산 위로 떠오른다. 같은 해돋이라도 격이 다를 수 밖에 없다.

 

이 그림은 겸재가 양천현령으로 부임한 후 맞이한 첫봄의 정경이다. 나뭇가지에 물이 오르는 곡우지절(穀雨之節)인지 강 이편에 휘휘 늘어진 수양버들은 옅은 연두빛으로 봄날의 은은한 정취를 더하고 있다. 강 저편에는 마치 줌카메라로 바짝 당겨놓은 듯, 낮은 구릉들이 (지금은 난지도에 가려서 안 보인다)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새벽 어스름에 노를 저어 나온 고기잡이배에 부탁해 강을 건너면 벗들이 있는 장안까지 한걸음에 달려갈 듯 싶다. 하지만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임지(任地)를 벗어날 수는 없다. 겸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남산의 해돋이 진경을 그림으로 마무리해 친구인 이병연(이병연)에게 전하는 것 뿐이다.

 

 

                                曙色浮江漢             새벽빛 한강에 떠오르니

                                高稜隱釣參             산봉우리들 낚싯배에 가리고

                                朝朝轉危坐             아침마다 나와서 우뚝 앉으면

                                初日上終南             첫 햇살 남산에서 오르네

 

 

겸재가 '이병연'의 시(詩)를 그림으로 풀어냈는지, 이병연이 겸재의 그림에 시(詩)를 부쳤는지는 알 수없다. 어느 경우이든 겸재는 '이병연'의 시(詩)를 예쁜 꽃전지에 옮겨 적은 후 그림 옆에 나란히 붙여놓았다. 당시, 겸재는 66세이었고, 사천 이병연은 71세이었으니, 이를 두 노인이 나누었던 정의(情誼)는 이렇듯 각별하였다. 그러한 사천 이병연은 겸재의 그림 '목멱조돈(木覓朝暾)'을 위와 같이 노래하였다.    

 

 

 

 

 

 

위 시(詩)는 실로 진경산수(眞景山水)에 붙인 진경시(眞景詩)라고 할 수 있다. 서광이 은은히 번져가나, 저 멀리 남한산성(南漢山城)의 능선들이 부옇게 제 모습을 드러내고 가까이로는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와우산(臥牛山)이나 노고산(老姑山), 혹은 애오개나 만리재일 법한 구릉들이 연두빛 산색을 내비치기 시작한다. 붉은 해가 남산 너머로 얼굴을 내밀자 한강수는 금빛으로 출렁이고 그 빛에 눈이 부셔 먼 산들이 가뭇하다. 장안의  남산들이 양천(陽川)에서는 동산(東山)이니, 아침 첫 햇살로 수면이 일렁이는 양천, 그 양천이 양천(陽川)인 이유를 이로써도 알 수있다. 

 

목멱조돈(木覓朝暾)은 실경(實景)을 재현한 산수화이지만 어느 문인화에 못지않은 고아(高雅)한 정취가 배어 있다. 강변의 낮은 언덕들에서 먼 산에 이르기까지 옅은 담채(淡彩)와 번지기로 이제 막 밝아오기 시작하는 수변풍경을 차분하게 그려내고 있다. 겹겹이 좌우로 펼쳐진 능선들도 물결처럼 유려하고 부드러워 마치 산 전체가 강물을 따라 흘러가고 있는 듯하다.

 

무엇보다도 이 그림의 백미(白眉)는 먹물과 채색(彩色)으로 옅게 우려낸 구릉들 사이로 우뚝 솟아 있는 남산과 그 뒤에 붉은 점으로 찍혀 있는 아침 해의 모습이다. 짙은 묵점(墨點)과 성글게 혹은 촘촘히 찍어나간 울창한 송림(松林)과 그 뒤로 살며시 고개를 내밀고 있는 붉은 해의 대비(對比)는 강변의 그윽한 정취와 어우러져 자못 농염한 자태마저 느끼게 한다. 

 

 

 

 

 

 

이 그림에서 느껴지는 이러한 여성적인 아취(雅趣)는 '금강전도'나 '박연폭포'로 상징되는 굵고 간결한 필선의 겸재 화풍과는 사뭇 다르다. 비교적 빈한했던 2,30대 시절이나 , 두 번에 걸친 영남지방에서의 현감시절과는 달리 한양과 가까운 거리에서 말년의 마지막 지방관 시절을 보내던 평온한마음상태가 그림에 반영된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서울특별시가 사용하는 휘장(徽章)은 ' 역사와 활력의 인간 도시 서울"을 상징하는데, 겸재의 목멱조돈(木覓朝暾)과 단원 김홍도(金弘道)의 '무동(舞童)'을 조합한 것이다.      

 

 

 

                                          안현석봉                  鞍峴夕烽

 

 

 

 

 

 

안현(鞍峴)은 안산(鞍山) 또는 모악산(母岳山)이라 부르는 서울의 서쪽 산이다. 봉원사(奉元寺)와 연세대학교 및 이화여자대학교를 품고 있는 높이 296m의 산이다. 한양의 내백호(內白虎 ..명당의 서쪽을 막아주는 안쪽 산줄기)인 인왕산(仁王山)에서 서쪽으로 다시 갈라져 인왕산 서쪽을 겹으로 막아주고 있으니 한양의 외백호(外白虎)에 해당한다. 이 산을 안산(鞍山) 또는 안현(鞍峴)일 부르는 것은 산 모양이 말 안장(鞍裝)같이 생겼기 때문이다. '길마'는 안장(鞍裝)이란 뜻의 순 우리말이다. 아마 안현(鞍峴)이나 안산(鞍山)은 '길마재'의 한자식 표기일 것이다. 

 

모악산(母岳山) 또는 '모악재'라 부르는 것은 풍수설(風水說)에 의해서 생겨난 이름이다. 서울의 조산(祖山 .. 풍수설에서 명당의 근원이 되는 으뜸산)인 삼각산(三角山.. 북한산)은 부아악(負兒岳 ..애 업은 산)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는 마치 어린아이를 업고 서쪽으로 달아나려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를 막기 위해 서쪽 끝의 '길마재'를 모악(母岳 ..어미산)이라 하고 그 아래 연세대학교 부근 야산을 '떡고개'라 했다고 한다. 어미가 떡으로 아이를 달래서 달아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어떻든 이런 길마재 위에는 태조(太祖)때부터 봉수대(熢遂臺)를 설치하여 매일 저녁 봉홧불을 오리게 하였다. 무사하면 봉홧불 하나를 올리고 외적(外敵)이 나타나면 두 개, 국경에 가까이 오면 세 개, 국경을 침범하면 네 개, 싸움이 붙으면 다섯 개를 올리도록 했다. 따라서 평화 시에는 늘 봉홧불 하나가 길마재 상봉에서 타오르기 마련이었다.원래 길마재에는 동서 두 봉우리에 각기 다른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동쪽 봉우리에서는 평안도와 황해도의 육지 쪽에서 전해오는 봉홧불 신호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강매동 봉대산(烽臺山)에서 받아서 목멱산(木覓山) 제3봉수대로, 서쪽 봉우리에서는 평안도와 황해도의 바다 쪽 봉화 신호를 고양시 일산구 고봉산(高烽山) 봉수대에서 받아 목멱산(남산) 제4봉수대로 전해주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 중국 쪽에서 외적이 침입하는지 여부는 전적으로 이 안현봉수대의 불꽃 수(數)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만큼 중요한 안현(鞍峴)의 봉홧불이기에 겸재(謙齋)는 1740년(영조 16) 초가을에 양천(陽川 ..현재 양천구)의 현령(縣令)으로 부임해 가서는 현재 가야동 6번지 일대의 현아(縣衙)에 앉아 틈만 나면 이 길마재의 저녁 봉홧불을 건너다 보고 나라의 안위(安危)를 확인했던 것 같다.그쪽 방향은 바로 자신의 고향집이 있는 한양이기도 했다.

 

한 가닥 촛불처럼 피어오르는 봉홧불은 오늘도 서북지역이 무사하다는 신호인데 저녁 어스름이 내리는 길마재 너머로 인왕산과 북악산이 초저녁 어둠을 안고 더욱 뚜렷이 다가온다. 하늘이 멀어지고 먼 산이 가까워지는 초가을 어느 맑은 날 해거름에 소슬한 가을바람이 수면을 타고 소리없이 들어와 문득 겸재(謙齋)의 그리움을 자극했던 모양이다.

 

인왕산 아래에는 식솔들이 기다리는 고향집이 있고, 북악산 아래에는 평생 뜻을 같이하는 그리운 친구 '사천 이병연(李秉淵)'이 있었다. 그래서 눈 감고도 그려낼 수 있는 정든 고향 산천의 모습을 먼 경치로 능숙하게 그려냈다. 그리고 자신이 앉아 있는 양천 관아 서쪽 소악루(小岳樓) 일대의 한강 이쪽 경치도 서호(西湖)나 소동정호(小洞定湖)로 부를만큼 넓어진 한강의 너른 강폭과 함께 대담하게 그려내어 강과 산이 어우러지도록 했다.

 

돛단배 몇 척을 띄워도 드넓은 강물이 채워지지 않았던지 광주바위와 허가바위를 끌어내어 음양(陰陽)의 조화를 통해 화면 구성을 완성시켰다. 카메라로는 잡히지 않는 구도이다. 시각(視角)의 한계를 초월한 이런 화면 구성이 바로 겸재의 화성(畵城)다운 면모다.          

 

 

 

                                        공암층탑                  孔岩層塔

 

 

 

 

 

공암(孔岩)은 양천(陽川)의 옛 이름이다. 신라 경덕왕 16년인 757년에 주군현(州郡縣)의 이름을 한지식으로 고칠 때 이렇게 바뀌었다. 고구려가 백제로부터 빼앗은 뒤에는 제차바위(齋次巴衣)라 했다. 이런 이름은 모두 한강 속에 솟아 있는 세 덩어리의 바위로부터 말미암았다. 차례로 서 있는 바위란 의미로 '제차바위'라고 했고, 구멍바위라는 의미로 공암(孔岩)이라 했던 것이다.

 

사실 이 그림에서 보듯 큰 바위 두 개에는 가운데에 구멍이 파여 있고, 세 개의 바위는 크기가 차례로 줄어든다. 그런데 그 옆 강기슭에는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진 산봉우리 하나가 솟아 있다. 이 산을 탑산(塔山)이라 한다. 그림에서 보듯 탑 하나가 산기슭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얻은 이름이다.

 

해발 31.5m의 탑산자락이 강으로 떨어지면서 10여길이 넘는 바위절벽을 만들어 놓았는데, 수직 절벽 아랫부분에 천연동굴(天然洞窟)이 있어 수십명이 들어앉을 만하다. 이 석굴(石窟)에서 ' 양천허씨 (陽川 許氏)'의 시조인 허선무(許宣文)이 출현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바위 절벽을 '허가바위'라고 한다. 허선문(許宣文)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견훤(甄萱)을 정벌하러 갈 때 (934년), 90여 세의 나이로 도강(渡江)의 편의를 제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군량미까지 제공하였었다. 그래서 왕건(王建)은 허선문을 공암촌주(孔岩村主)에 봉하고 그 자손이 이 땅을 대대로 물려받아 살게 하였다. 공암 허씨 또는 양천 허씨라 하는 이들은 모두 이 허선문(許宣文)의 후손들이다.

 

조선이 한양에 도읍을 전하기 이전에 김포, 부평, 인천, 수원 등지에서 개성이나 평양으로 가려면 이곳 공암나루를 건너는 것이 가장 지름길이었으므로 이 시절 한강나루 중에서는 이 공암나루가 가장 번성하였다. 그래서 왕건(王建)도 이 나루를 건너 천안(天安)으로 향했던 것이다. 이에 현(縣)의 이름도 공암(孔岩)이라 하고 나루 이름도 공암진(孔岩津)이라고 했던 것인데, 고려 충선왕 2년인 1310년에는 고을 이름을 양천(陽川)으로 바꾸면서 읍소재지를 현재 양천향교가 있는 가양동 231 일대의 궁산 아래로 옮긴다. 그러자 공암에는 나루만 남게 되었다.

 

공암이나 허가바위는 모두 자주빛을 띤 바위다. 세 덩어리로 이루어진 공암은 '광제(廣濟)바위' 혹은 '광주(廣州)바위'라고도 부른다. 이것이 백제 때부터 부르던 이름이 아니었나 한다. 광제(廣濟) 바위는 너른 나루에 있는 바위라는 뜻일 터이니 백제(百濟)가 하남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두고 한강의 물길을 장악하고 있을 때 이 공암나루는 너른 나루 중 하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광주(廣州) 바위라고 하는 것은 광제바위가 잘못 전해져서 얻은 이름이리라 . 그런데 광주(廣州)에서 떠 내려와서 광주바위하고 한다는 전설을 붙이고 광주관아에서는 매해 양천현령에게 싸리비 두 자루를 세금으로 받아 갔다고 한다. 어느 때 이를 귀찮게 여긴 양천현령(陽川縣令)이 이 바위들이 배가 드나드는 데 거치덕대니 광주로 다시 옮겨가라고 하자, 광주 아전들은 다시는 이 바위를 광주바위라고 주장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광주바위 즉 공암(孔岩)은 70년대까지 한강 물 속에 그댈 잠겨 있었고, 허가바위 굴 밑으로는 강물이 넘실대며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80년대 올림픽대로를 건설하면서 뚝길이 강속을 일직선으로 긋고 지나자 이 두 바위는 육지 위로 깊숙이 올라서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은 ' 구암 허준(龜岩 許浚)'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는 구암공원(龜岩公園) 한 귀퉁이에 볼품없이 처박혀 있다. 수천년 동안 한강물과 어우러지던 운치있는 풍광은 이제 이 그림에서나 찾아 볼 수 있을 뿐이다. 산기슭에 남아 있던 탑(塔)은 일제강점기에 양천우편소장이던 일본인이 양천우편소에 옮겨 놓았다는 데 현재는 누구도 간 곳을 알지 못한다.        

 

 

 

 

 

 

                                        금성평사                     錦城平沙

 

 

상암 월드컵경기장과 월드컵공원 등이 들어선 난지도(蘭芝島) 일대의 300년 전 모습이다. 원래 이 곳은 모래내와 홍제천, 불광천이 물머리를 맞대고 들어오는 드넓은 저지대(低地帶)라서 한강 폭이 호수처럼 넓어지므로 '서호(西湖)'라는 발명으로 불리던 곳이다. 따라서 이 세 개의 천(川)과 대안(對岸)의 안양천이 실어오는 흙모래는 늘 이곳에 모래섬을 만들어 놓을 수 밖에 없었다.

 

 

 

 

 

 

난지도(蘭芝島)가 이렇게 생긴 모래섬인데, 그 모양은 홍수를 겪을 때마다 달라져서 갈라지기도 하고 합쳐지기도 하여 일정치 않았던 모양이다. 오리섬(압도. 鴨島)이니 중초도(中草島)이니 하는 이름들이 난지도의 다른 이름으로 기록되고 있는 것도 이 모래섬이 떨어졌다 붙었다 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현상일 것이다. 겸재(謙齋)가 이 그림을 그릴 당시인 1740년(영조 16)에는 난지도가 이렇게 강 가운데로 깊숙이 밀고 들어온 모래섬들의 집합체 이었다.

 

그런데 1919년에 펴낸 경성지도를 보면 난지도는 서호(西湖)의 2/3 이상을 차지하는 하나의 큰 섬으로 합쳐져 있다. 이 모습은 1970년대 중반까지 크게 바뀌지 않아 신촌(新村) 쪽으로 모래섬에 밀린 샛강이 반달처럼 에둘러 흐르고 있었다. 이렇게 드넓은 물가 모래밭이었기에 겸재는 금성평사(錦城平沙) 즉, 금성의 모래펄이라는 제목으로 이 일대의 한강을 싸잡아 그려놓았다. 

 

그런데 어째서 하필 '금성의 모래펄'이라고 했을까. 이는 난지도로 모래를 실어오는 모래내와 홍제천 사이에 금성산(錦城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그림에서 모래섬 뒤로 보이는 마을터가 금성산이다. 이 산을 금성산(錦城山)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은 조선 중종때부터이다. 충청병사를 지낸 김말손(金末孫)이 본래 강 이쪽 양천 두미에 있었던 금성당(錦城堂) 불상(佛像)을 강 건너로 쫓아보냈기 때문에 한양 모래내 쪽 강가 야산에 금성당에 세워지고 금성산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 모셔진 석조불상이 나주 석불의 신령이 옮아붙었다고 해서 나주의 별호인 금성을 당호로 삼은 것이다. 김말손(金末孫)은 무과(武科)에 급제한 인물로 말 타고 활 쏘는 솜씨가 뛰어났는데, 금성당 불상이 영험이 있어 부근을 지나는 길손이 이곳에 재물을 바치고 기도하지 않으면 재앙(災殃)을 입는다는 속설(俗說)때문에 백성들이 시달림을 받게 되자 이 같은 일을 감행했다. 이렇게 해서 금성신이 난지도(蘭芝島) 뒤 모래내 부근에 있었기 때문에 '금성평사'라 했던 것이다. 그 금성산이 있던 자리가 지금의 성산동(城山洞)이다.

 

성산동 쪽으로는 잠두봉(蠶頭峰 ..절두산)에서 망원정(望遠亭) 금성당에 이르는 한강 북쪽 강면의 경치를 모두 그리고 그 뒤로 노고산(老姑山), 와우산(臥牛山) 등을 그려놓았다. 양천(陽川) 쪽으로는  선유봉, 증이, 두미를 거쳐 탑산과 양천현아(陽川縣衙) 곁의 소악루(小岳樓)까지 그려냈다. 양천현 뒷산인 성산(城山 .. 궁산 또는 파산)에서 바라본 시각이다.

 

이런 아름다운 풍광이 1970년대부터 크게 변한다. 1977년 성산동에서 강 건너 양화동까지 성산대교(城山大橋)가 놓이기 시작하고 1978년에는 난지도(蘭芝島)에 쓰레기장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성산대교는 1979년에 완공되었고, 난지도 쓰레기장은 15년 동안 쓰레기가 쌓여 거대한 산을 이루었다. 그 결과 샛강이 메워져서 난지도는 육지가 되었고, 마침내 2002년에는 쓰레기산에 월드컵공원이 들어서게 되었다.   

 

 

                                       양화환도                      楊花喚渡

 

 

 

 

 

양화진(楊花津)은 마포구 합정동 378번지에 있던 나루이다. 한양 서울의 외백호에 해당하는 길마재 줄기가 한강으로 밀고 내려오다가 강물에 막혀 불끈 솟구친 바위절벽인 잠두봉(蠶頭峰 .. 지금의 절두산) 북쪽 절벽 아래에 나루터를 마련하고 이를 '양화나루'라고 했다. 양화나루는 잠두봉(蠶頭峰)이나 선유봉 쪽 모두 삼각산으로부터 관악산에 이르는 서울 주변의 명산을 한눈으로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뿐만 아니라 광활한 백사장과 호수 같이 너른 강물이 아득히 아래위로 이어져서 장쾌무비한 장강 풍정을 만끽할 수도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강산의 아름다움을 모두 갖춘 빼어난 명승지로 꼽히던 곳이다.   

 

 

                                      행호관어                       杏湖觀魚

 

 

행호관어(杏湖觀魚)는 ' 행호(杏湖)에서 고기 잡는 것을 살펴 본다 '는 뜻이다. 한강물은 용산에ㅓ 서북쪽으로 꺾여 양천 앞에 이르면 맞은편의 수색(水色), 화전 등 저지대를 만나 강폭(江幅)이 갑자기 넓어진다. 그래서 안양천과 불광천이 강 양쪽에서 물머리를 들이미는 곳부터 서호(西湖) 또는 동정호(洞庭湖)로 불렀는데, 창릉천(昌陵川)이 덕양산(德陽山) 산자락을 휘감아 돌며 한강으로 합류(合流)하는 행주(杏州) 앞에 이르러서는 그 폭(幅)이 더욱 넓어진다. 이 곳을 행호(杏湖)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행주는 본디 개백현(皆伯縣)이라 불렀었다. 고구려 때 한 여인이 현재의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일산동 고봉산(高烽山)에서 봉화(烽火)로 신호를 보내 안장왕(安藏王. 519~531)을 이 게백현에서 만났기 때문에 '다 나와 맞았다 '는 뜻으로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모두 개(皆)'의 의미를 그대로 살리고, '맏 백(伯)'에서는 훈(訓)의 음(音)을 따왔던 것이다. 그러던 것을 신라(新羅)가 이곳을 점령하고 나서 경덕왕 16년에 전국의 지명(地名)을 한자식으로 고치면서 왕(王)을 만났다는 뜻으로 우왕현(遇王縣) 또는 왕봉현(王逢縣)으로 바뀌었고, 고려 초에는 행행(行幸 .. 왕이 여행 함)한 곳이라는 뜻으로 행주(幸州) 고쳤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행주(幸州)와 행주(杏州)를 함께 쓰는 경우가 많아져 행주 아래 넓은 한강물을 행호(杏湖) 또는 행호(幸湖)라 쓰기도 하였다. 아마도 이 행주에 실제 살구나무가 많아서 그렇게 불렀을지도 모르겠다. 공자(孔子)가 행단(杏壇)에서 제자들과 함께 음악을 연주하며 즐겼다는 고사를 연상하여 '살구 행(杏)'으로 대신했을 수도 있다.

 

어떻든 이런 행호에서 고기잡이가 한창이라 배들이 떼를 지어 그 너른 행호 물길을 가로막고 그물을 좁혀나가는 듯하다. 이처럼 큰 규모의 고기잡이 행사가 벌어지는 것은 별미 중의 별미인 이곳의 웅어와 하돈(河豚 ..황복어)이 잡히는 철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모두 수라상에 오르는 게절의 진미이었으므로 사옹원(司甕院)에서는 제철인 음력 3, 4월이 되면 고양군과 양천현에 진상(進上)을 재촉하였다. 그러면 두 군현(郡縣)에서는 고기잡이배들을 모아 본격적으로 웅어 (멸치과에 속하는 바닷물고기)와 복어잡이에 나섰다.

 

이 그림은 그 아름다운 행호에서 전게되는 고기잡이 모습을 그려낸 것이다. 양천현아(陽川縣衙) 뒤산인 성산(城山)에 올라서서 서북쪽으로 행호를 내려다본 시각으로 그려냈다. 당연히 현재 행주외동 일대의 행호 강변의 경치가 한눈에 잡혀들었다. 오른쪽의 덕양산 기슭에는 '죽소 김강욱(竹所 金光煜. 1580~1656)의 별서(別墅 ..별장)인 귀래정(歸來亭)이 들어서 있고, 가운데에는 행주대신으로 불리던  '장밀헌 송인명(藏密軒 宋寅明. 1689~1746)의 별서인 장밀헌(藏密軒)이 큰 규모로 들어서 있다. 송인명은 이 당시 좌의정으로 세도를 좌우하고 있었다.그리고 지금 행주대교가 지나고 있는 덕양산 끝자락 바위절벽 위에는 낙건정 김동필(樂建亭 金東弼. 1689~1746)의 별장인 낙건정(樂建亭)이 숲 속에 자리잡고 있다.    

 

 

 

                                       종해청조                   宗海聽潮

 

 

 

종해헌(宗海軒)은 양천현(陽川縣 ..지금의 가양구) 관아의 동헌(東軒 ..지방 수령의 집무소) 이름이다. 그러니 '종해청조(宗海聽潮)'라는 그림의 제목은 양천현 현령이 동헌인 종해헌(宗海軒)에 앉아서 조수(潮水) 밀리는 소리를 즐기고 있다는 뜻이다.

 

 

 

 

 

 

 

                                       소악후월                       小岳候月

 

 

 

 

 

소악후월(小岳候月)은  소악루에서 달뜨기를 기다린다는 의미이다. 겸재가 이런 제목으로 그림을 그리게된 데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동복현감을 지내다 스스로 물러나 소악루(小岳樓) 주인이 된 이유(李濡. 1675~1757)는 겸재보다 한 살 위인 동년배인데, 율곡학파의 조선성리학통을 계승한 성리학자이자 아름다운 생활환경을 즐길 줄 아는 풍류문사이었다.

 

당연히 자연의 아름다움에 빠져들고 술과 시문(詩文) 서화(書畵)를 사랑하니 사람들은 그를 ' 강산주인(江山主人) '이라 불렀다. 따라서 그와 사귀던 이사들은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이거나 최고의 풍류문사이었다. 남당 한원진(南塘 韓元震)과 병계 윤봉구(屛溪 尹鳳九)는 '강문8학사(江門八學士)'로 불리던 당대 율곡학파(栗谷學派)의 최고 거장들이다.

 

이유(李濡)는 이들과 친해 사람의 성품과 동물의 성품이 같은가 다른가를 따지는 일을 함께 의논할 정도이었다.그리고 진경시(眞景詩)의 최고봉인 '사천 이병연'은 시정(詩情)을 공감하는 시우(詩友)이었다. 그런데 '이병연'은 겸재와 평생 뜻을 같이한 둘도 없는 지기(知己)였다. 그러니 '강산주인(江山主人)'으로 부리던 이유(李濡)가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謙齋)와 친분을 맺지 않았을 리 없었다.

 

소악루(小岳樓)가 양천현아(陽川縣衙) 지척에 지어진지 불과 2, 3년 후에 겸재가 양천현령으로 부임한 것은 이런 친분관계와 결코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악루를 짓고나서 어느 때 이유(李濡)가 사천 이병연과 겸재를 초대하였고, 이때 겸재와 '사천 이병연'은 이곳 경치에 매료되어 그 일대를 시(詩)와 그림으로 표현하기로 작정하였던 듯 하다.

 

아 사실이 '문화군주'인 영조(英祖)의 귀에 들어가자 영조는 그림 스승인 겸재를 65세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양천현령(陽川縣令)으로 발령내 그들의 소원을 이루게 했다. 그래서 남겨진 것이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을 비롯한 한강 일대의 진경산수화들이다. 문화절정기를 이끌러 가는 최고 통치자의 문화의식이 어떻게 위대한 문화유산을 남겨 놓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이다. 

 

겸재는 소악루에서 달맞이하는 정경을 모두 한 화폭에 담기 위해, 소악루를 근경(近景)으로 잡고, 달 떠오르는 한강 상류를 원경(遠景)으로 잡았다. 그러자니 소악루 뒷편 성산 위에서 소악루와 한강 상류를 바라보는 시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솔숲이 우거진 성산 등성이 아래에 소악루 건물이 큼직하게 지어져 있고, 그 주변으로 잡목 숲이우겨져 있다. 저 아래 강변에는 거목이 된 버드나무 몇 그루가 늘어진가지들을 탐스럽게 풀어 헤쳐 푸르름을 자랑하는데 둥근달은 남산 너머 저쪽 광나루 근처에 둥실 떠 있다. 달빛에 숨죽인 어둠이 강 건너 절두산(切頭山) 절벽을 험상궂고 후미지게 만든 다음 선유봉, 두미암, 탑산 등 강 이쪽 산봉우리들을 강 속으로 우뚝우뚝 밀어 넣고 있다. 강물을 갈라 놓은 긴모래섬이나 강변이 모래톱도 달빛에 비쳐 날카롭게 강물 속으로 파고 든다. 

 

소악루(小岳樓)와 본채 등 큰 기와집들은 숲 속에서도 그 위세가 당당하지만, 그 아래 초가집은 그대로 달빛어린 숲 그늘에 파묻힌 느낌이다. 이런 대조적인 표현이 보름달 뜨는 밤 소악루 주변의 경치를 더욱 호나상적인 분위기로 이끌어가게 하였다.        

 

 

 

                                       설평기려                       雪坪騎驢

 

 

 

 

 

                                       빙천부신                    氷川負薪

 

 

 

 

 

또한 두 사람에게 모두 제자가 되는 '창암 박사해(蒼巖 朴師海)'는 지금은 전하지 않는 겸재 정선과 사천 이병연의 합작 시화첩에 다음과 같이 발문(跋文)을 달기도 하였다. 이 시화첩은 그림이라 말하자니 곧 시(詩)가 있고, 시(詩)라고 말하지나 곧 그림이 있는지라 시(詩)라 또는 그림이라고 이름 지어 한 쪽으로 치우치게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로시화(二老詩畵)'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제목 또한 시(詩)를 그림보다 앞세운 것이니 이것도 편중(偏重)된 것이 아닐까 ? 소리 울림은 적요(寂寥)한데 글의 꾸밈과 생각이 그윽하고 묘(妙)한 것은 겸재 노인의 그림시(詩)요, 쇠와 돌이 찡그렁거리듯이 그대로 볘껴내서 핍진(乏盡)한 것은 이병연 선생의 시(詩)그림이다.

  

그림이 시(詩)가 아니라면 진짜 그림이 아니고, 시(詩)가 그림이 아니라면 좋은 시(詩)가 아니다. 또 그림만 그림인 줄 알고 시(詩)는 그림인 줄 모르면 그림을 잘 보는 것이 아니고, 시(詩)만 시(詩)인 줄 알고 그림이 시(詩)인 줄 모르면 참으로 시(詩)를 아는 것이 아니다. 사천 이병연 선생께서 바라보면 겸재 노인의 그림이 바로 시(詩)이고, 겸재 노인께서 살펴 보면 사천선생의 시(詩)가 바로 그림이다. 나는 두 노인 가운데 어느 분이 시인(詩人)이고 어느 분이 화가(畵家)인지 정말 알지를 모르겠다. 그러므로 마땅히 고르게 하여 '시화주인(詩畵主人)'이라 불러서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하리라.  

 

 

 

                                          그림으로 살펴 본 겸재의 생애

 

 

 

겸재는 이병연(李秉淵) 같은 시인(詩人)과의 교우를 통하여 자기 회화(繪畵) 세계에 대한 창의력을 넓히고 일상적 생활의 주제를  그림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자극을 받게 되었다. 우리나라 자연을 다룬 그의 화제(畵題)들은 당시 기행문의 소재이었던 금강산, 관동지방의 명승 그리고 서울에서 남한강을 오르내리며 접할 수 있는 명소들과 그가 실제 지방의 수령으로 근무하던 여가에 묘사된 것들이다.

 

그밖에도 자기 집과 가까웠던 서울 장안이 사계절의 경치들, 특히 인왕산 동북 일대의 계곡과 산등성이들이 화제(畵題)가 되었다. 그리고 문인지우(文人之友)들과 관련되는 여러 곳의 명소(名所)나 특수한 고장들의 자연을 다루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사도(故事圖) 같은 중국적 소재도 많이 다루고 있으며, 성리학자들의 고사도(故事圖) 제작에서 그의 관심거리가 무었이었는지 알 수있다.    

 

 

 

                                      청풍계도                       淸風溪圖

 

 

 

청풍계(淸風溪)는 인왕상(仁旺上) 동쪽 기슭의 북쪽 종로구 청운동(靑雲洞) 54번지 일대의 골짜기를 일컫는 말이다. 원래는 푸른 단풍나무가 많아서 청풍계(靑楓溪)라고 불렀는데,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강화도를 지키다 순국(殉國)한 우의정 '선원 김상용 (仙源 金尙容) '이 별장으로 꾸미면서부터 맑은 바람이 부는 계곡이라는 의미인 청풍계(淸風溪)로 바뀌었다고 한다.   

 

 

 

 

 

 

선원 김상용(仙源 金尙容)이 이 곳을 별장으로 꾸민 것은 1608년 2월에 선조(宣祖)가 죽고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면서 8월 '김상용'이 한성부 우윤(右尹 ..서울시 부시장)이 되니 아마 이때쯤에 이루어진 일이 것이다. 그러나 이 곳은 원래 '김상용'의 고조부인 사헌부 장령 김영수(金永銖)가 살던 집터이었다. 그의 맏형인 학조(學祖)대사가 잡아준 명당터라는 것이다.

 

 

학조(學祖)대사는 세조(世曺)때부터 중종(中宗)때까지 왕실의 신임을 한몸에 받았던 불교계의 대표이었다. 당연히 풍수지리에 정통했던 그가 자신을 극진하게 공경하는 막내 제수 '강릉김씨'를 위해 잡아준 집터라 하니 한양 도성 안에서 가장 빼어난 명당터였을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래서 사실 이곳은 훗날 ' 안동김씨 (安東金氏) '의 200년 집권, 60년 세도(勢道)의 산실(産室)이 되었던 것이다.

 

지금 이 터는 청운초등학교와 정주영회장 댁 등 몇몇 부호들의 사가(私家)로 나누어져 있다. 선원 김상용(仙源 金尙容)과 그의 아우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형제가 율곡(栗谷) 학통을 이어 이곳 인왕산과 북악산 아래에 뿌리를 내린 결과 그들의 증손자 세대에 이르러서는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 등 진경(眞景) 문화의 선두주자들을 배출하게 되었고, 그들의 문하에서 진경문화의 주역인 겸재 정선(謙齋 鄭敾)과 사천 이병연(柶川 李秉淵) 등이 출현하여 진경문화의 절정을 이끌어간다. 따라서 겸재가 진경문화의 산실(産室)이라 할 수 있는 이 청풍계(淸風溪)를 많이 그렸을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래서 현재 세상에 알려진 것만 해도 여러 폭인데 그 중에 이 '청풍계'가 대표작이다.

 

 

'기미년 봄에 그렸다'는 겸재 자필의 글씨가 있어서, 겸재가 64세 되던 해인 1739년(영조 15)에 그린것을 알 수 있다. 눈길을 끄는 바위절벽은 1960년대만 해도 이 모습대로 남아 있었는데 지금은 어느 사가(사가)의 뜰 안으로 숨었는재 아니면 파괴되어 사라졌는지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 흔적을 가늠할 길 없다고 한다. 키 높은 전나무와 느티나무, 그리고 훤칠하게 자라난 아듬드리 노송(老松)의 표현에서 300년묵은 고가(고가)의 전통을 실감할 수 있다. 청운동(淸雲洞)이라는 동네 이름도 1914년 행정구역 구편시 청풍계(淸風溪)와 백운동(白雲洞)을 합쳐 지은 것이다.  

 

 

    

                                    풍계유택                           楓溪遺宅

 

 

 

풍계유택(楓溪遺宅)은 ' 청풍계(靑楓溪)에 남아 있는 외가댁 '이라는 의미이다. 겸재(謙齋)의 외조부 바자진(朴自振. 1625~1694)에 세상을 떠난 뒤 그 자손들이 물려받아 살던 집이다. 박자진은 광해군(光海君) 때 영의정을 지내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자결한 퇴우정 박승종(퇴우정 박승종. 1562~1623)의 당질(5촌조카)로 거부(巨富) 소리를 들을만큼 부자였다고 한다. 그래서 선원 김상용(仙源 金尙容)의 옛집이 있는 청풍계(靑楓溪) 초입에 이만한 대저택에 살았던 것이다.

 

 

 

 

 

 

 

겸재(謙齋)가 14세이던 1689년(숙종 15)에 부친 정시익(鄭時翊)이 세상을 뜨고, 이어서 기사사화(己巳士禍)가 일어나 우암 송시열(宋時烈)과 김수항(金壽恒) 등 율곡학파(栗谷學派)의 중진들이 연이어 사약(賜藥)을 받고 죽는 참변을 맞는다.

 

 

이로 말미암아 겸재는 내외의 후원 세력을 모두 잃게 된다. 그래서 외조부 '박자진'의 그늘에서 자랄 수 밖에 없었던 겸재에게 외가(外家)의 의미는 매우 큰 것이었다. 당연히 현재 서울 종로구 청운동 89번지 경복고등학교 안에 살던 겸재가 그 맞은편 개울 건너의 청운동 50일대에 있던 외가댁(外家宅)을 아침저녁으로 드나들었을 것이다.

 

 

그가 글공부와 그림공부를 하던 곳도, 외삼촌, 외사촌들과 어울려 놀며 동네 친구들을 사귀던 곳도 그곳이었다. 그러니 자신의 집보다도 외가(外家)의 구석구석이 그의 눈에는 더 익숙했을 것이다. 그런 외가집을 화성(畵星)으로 추앙되던 71세 때 (1746년) 그리게 되었으니 아마 눈을 감고도 그려낼 수 있었으리라. 북악산기슭에 있는 그의 집에서 보면 외가의 본채와 후원 쪽만 바라다 보였던지, 이 그림에서는 솟을대문과 행랑채가 딸려 있을 앞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저택의 면모가 완연하다. 인왕산(仁旺山)을 등지고 있는 안채 정당(正堂)은 2층 누각(樓閣)이고, 'ㄱ'자로 연결된 살림집은 겹집인데 담이 2중, 3중으로 둘러져 있으며 후원에는 대궐 전각 규모의 별채와 사당이 있다. 담 안 곳곳에는 각종 키 큰 나무들이 나이를 자랑하듯 위용을 자랑하며 건물들과 조화를 이루고 인왕산 기슭 바위 절벽 아래에는 송림(松林)이 병풍처럼 둘러 서 있다. 지금 이곳은 이렇게 넉넉한 생활공간이 아니다. 해묵은 나무는 고사하고 빈 터 하나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민가(民家)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인곡정사                            仁谷精舍

 

 

 

이 그림은 1746년(영조 22), 겸재가 71세 때 살던 자택의 모습이다. 현재 종로구 옥인동 20에 해당하는 곳이다. 당시 이곳의 지명이 한도 북부 순화방 창의리 인왕곡(仁王谷)이었기 때문에 인곡정사(仁谷精舍)라는 택호(宅號)를 사용한 듯 하다. 이 그림을 그린 내력은 그림이 들어 있는 ' 퇴우이선생진적첩(退尤二先生眞蹟帖) '의 발문(跋文 .. 책의 후기)에 밝혀져 있다. 겸재의 둘째 아들인 정만수(鄭萬遂)가 지은 이 발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이 ' 주자서절요서(朱子書節要序) '를 직접 짓고 썼다. 이는 퇴계의 자손을 거치고 거쳐 후에 겸재의 외조부인 박자진(朴自振)에게 전해졌다. 박자진(朴自振)은  스승인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에게 이를 두 번이나 보여주고 발문(跋文)을 받아 왔다. 겸재의 아들 정만수(鄭萬遂)는 박자진의 증손자 박종상(朴宗祥)을 졸라 우암(尤庵)의 발문이 딸린 퇴계의 친필 '주자서절요서'를 집으로 가져온다. 이에 겸재가 크게 기뻐하여 퇴계가 주자서절요서를 짓던 곳과 박자진이 우암의 발문을 받던 장면을 각각 '계상정거(溪上精居)'와 '무봉산중(舞鳳山中)'이란 이름으로 그려낸다. 그리고 청풍계(靑楓溪)에 있던 자신의 외가(外家)를 그린 풍계유택(楓溪遺宅)과 주자서절요서(朱子書節要序)를 수장할 자신의 집을 그린 '인곡정사(仁谷精舍)'등을 모두 한 책으로 묶어 '퇴우이선생진적첩'을 만들었다.

 

 

 

그림을 보면 행랑채가 딸린 솟을대문 안에 'ㄷ'자 모양의 본채를 가진 단출한 구조의 남향집이다. 안채로 바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사랑채부터 담을 두르고 중문(中門)을 내었다. 이것이 사대부집의 기본구조이다. 중문 안에는 헛간채, 장독대 등이 구비되어 있다.

 

안목이 있는 선비가 살기에 적당한 규모의 조촐한 집이다. 뒤울 안에는 대나무가 우거지고 담장 밖 뒷동산에는 노송(老松)이 숲을 이루었다. 사랑채 앞마당에는 잡수 몇 그루가 제멋대로 자라서 그늘을 드리우고 행랑채 곁에도 고목나무가 서 있다. 나무 그늘 아래에는 네모진 좌대석이 놓여 있고, 지붕을 씌운 김치막 곁에는 바위더미가 자연스럽게 쌓여 있다. 정녕 화성(畵聖)다운 감각으로 운치 있게 꾸민 생활공간이다. 본채는 30여칸, 행랑채는 6칸쯤 돼 보인다. 이 집 곁에서 살았던 조영석(趙榮석)이 16칸 집을 은화 150냥에 샀다고 했으니 아마 이 집은 300냥쯤은 되었을 것이다. 겸재가 어느 부자에게 '소문첩(昭文帖)'이라는 화첩을 그려주고 150냥을 받은 적도 있었다고 하니 이만한 집을 장만하여 살기는 여렵지 않았을 것이다.    

 

                                

 

 

 

 

                                  진경 산수화                        眞景 山水畵 

 

 

 

 

 

조선 후기에 유행한, 우리나라 산천(山川)을 직접 답사하고 소재로 하여 그린 산수화를 진경산수화라고 한다. 진경산수화는 화보(畵報)나 다른 그림을 모방한 그림이 아니고 우리나라 산하(山河)를 직접 답사하고 화폭에 담은 산수화이다.

 

 

조선 후기의 화가 조영석(趙榮碩)은 ' 그림으로  그림을 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니 물체를 직접 마주 대하고 그 진(眞)을 그려야 곧 살아있는 그림이 된다 '고 하였다. 또한 이익(李瀷)은 화보가 괴이함만을 갖춘 완물(玩物)거리일 뿐 군자(君子)가 취할 바가 못된다고 주의를 주었다. 진경(眞景)이란 원래 문인화적(文人畵的)개념이다. 오대 형호의 필법기를 보면 필묵(筆墨)의 기교(技巧)를 잊어버려야만 비로소 진경(眞景)을 그릴 수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진(眞)이란 ' 사(寫)란 물의 형태만을 얻어서 그 기(氣)를 잃어버린 것을 말하며, 진(眞)이란 기(氣)와 질(質)을 아울러 갖춘 것을 말한다 '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대상의 겉모습만을 묘사한 형사(形似)의 그림이 아니라 대상의 본질(本質)을 표현하는 신사(神似)의 그림을 진경(眞景)이라 한 것이다. 그래서 형호(荊浩)는 소나무를 수만 번 그리고 나서 비로소 실물과 같은 것을 그릴 수 있다고 하였다.

 

 

18세기에는 특히 진경산수화가 유행하였는데, 실경(實景)을 화폭에 담는 경향은 이미 고려(高麗) 이래 오랜전통을 갖고 계속되었으며, 특히 18세기에는 어느 시기보다 유난히 성행하였다. 조선의 산하(山河)를 그린 것에는 진경(眞景)에 해당한 것도, 또는 그렇지 못한 속화(俗畵)도 있만 조선의 산하를 그린 그림에 진경(眞景)이란 찬사를 붙인 것은 우리 산하에 대한 자긍심의 표출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자긍심(自矜心)의 원천에는 금강산(金剛山)이 있는 것이다.

 

 

금강산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불교의 성지(聖地)로서 각광을 받았고, 조선시대에도 중국의 사신들이 우리나라를 방문하면 반드시 찾아보고 싶어했던 명산이다. 금강산에서  시작한 우리 산하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이 전국토로 확산되면서 진경산수화가 발달하게 된 것이다.        

 

 

 

 

  

                                                 금강산                 金剛山

 

 

 

 

 

겸재는 처음에는 중국 남화(南畵)에서 출발하였으나 30세를 전후하여 조선 산수화의 독자적인 특징을 살린 사생(寫生)의 진경화(眞景畵)로 전환하였으며, 여행을 즐겨 전국의 명승을 찾아다니면서 그림을 그렸다.

 

 

우리의 산천(山川)을 직접 다니면서 우리의 시각으로 그린 진경산수의 명작이 여러 점 나오는데, 특히 72세에 완성한 '금강내산(金剛內山)'은 금강산 일만이천봉의 암봉(巖峰)을 마치 한떨기 흰 연꽃송이처럼 화폭에 담아내 진경산수(眞景山水)의 결정체로 평가되고 있다. 겸재는 기이(奇異)한 산천의 모습이나 안개 낀 풍경 등 머리 속으로만 상상한 경치를 그린 '관념산수화(觀念山水畵)'에서 벗어나 우리 산천을 직접 보고 그린 진경(眞景)산수화를 완성하였다.

                                           

  

 

                                                     금강산 여행

 

 

 

겸재는 그의 평생지기이며 동네친구이고 같은 '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 ' 문하생으로 장차 삼연(三淵)의 뒤를 이어 동국진체시단(東國眞體詩壇)을 이끌어 가는 사천 이병연(사천 李秉淵 .. 1671~1751)이 금화현감(金化縣監)으로 나가 있으면서( 1710.5 ~1715.1) 겸재를 초청하여 금강산(金剛山) 유람을 함께 떠나게 된다.

 

 

그는 금강산 여행 중 받은 감동을 내외 금강산 진경 30폭(幅)에 담아 '사천 이병체(沙川 李秉滯)'의 후의(厚意)에 보답하기 위해 주는데, 이로 인하여 겸재의 화명(畵名)이 자자해져 당시 좌의정으로 있던 김창집(金昌集)이 천거하고 보증을 서서 관직을 얻게 되니 이때 겸재의 나이가 40세를 전후한 때이었다. 그 뒤 겸재는 양천현령(陽川縣令)을 거쳐 종2품인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에까지 이르러 자칫 낙반(落班)될 위기를 모면하여 가문(家門)을 재건한다.     

 

 

 

 

 

                                                             금강전도                   金剛全圖

 

 

 

 

 

국보 제 217호지정되어 있다. 겸재 정선이 그린 실경산수화(實景山水花)로 그가 만 58세 때인 1734년(영조 10년) 겨울 금강내산(金剛內山)의 전경을 만폭동(萬瀑洞)을 중심으로 그린 그림이다. 원형(圓形) 구도로, 그림의 윗부분에는 비로봉(毗盧峰)이 우뚝 서 있다. 거기서 화면의 중심인 만폭동(萬瀑洞)을 지나 아랫부분 끝에는 장안사(長安寺)의 비홍교(飛虹橋)가 배치되어 있다. 종이 바탕에 수묵 담채로 그렸으며, 크기는 세로 130.7cm, 가로 59cm이다.  리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표훈사(表訓寺)와 정양사(正陽寺) 등이 그려진 그림이 왼쪽은 무성한 숲이 어우러진 부드러운 토산(土山)으로 묘사되었다. 맞은편의 예리한 암산(岩山)들과 알맞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 맞은편인 화면의 오른쪽에는 금강산의 여러 바위봉우리들이 바위 꼭지에서 ' ㅅ '자로 붓 자국을 내면서 수직(垂直)으로 다시 꺾이는, 이른바 수직준법(垂直逡法)으로 그려져 있다. 

 

 

산의 둘레에는 엷은 푸른색으로 문질러 원형 구도의 둥근 형태를 강조하면서 하늘 높이 솟는 공간감(空間感)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원형 구도는 중국을 중앙으로 하여 세계를 둥글게 표현한 '천하도 (天下圖)'와 같은 옛 지도에서 영향을 받은 듯하다.

 

 

이 그림의 구상은 송강 정철(松江 鄭徹)의 '관동별곡(關東別曲)'에 나타나는 금강산 묘사와 관계가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즉, 정철(鄭徹)은 그의 '관동별곡'에서 진헐대(眞歇臺)에 올라 내금강의 열 봉우리를 바라보며 내금강(內金剛)을 한 송이연꽃이나 옥(玉)을 묶어 놓은 것 같다고 표현한 것이다. 금강산에 대한 이러한 형태 감각이 노래로 읊어져 널리 퍼지자, 정선(鄭敾)과 같은 산수화가에게도 그러한 가사 내용을 조형화(造形化)하는데 알게 모르게 영향을 준 듯 하다.

 

 

조선시대 금강산 그림의 걸작으로 꼽히고 있는 이 그림은 내금강의 진경(眞景)을 반조감도적(半鳥瞰圖的)인 시점과 원형(圓形)  구도로써 압축하여 나타낸 것이라든지, 미점(米點)의 토산(土山)과 정선 특유의 수직준법으로 처리한 암산의 대표적인 표현과 포치(布置)는 그의 금강산 화풍의 전형과 완성을 보여 주는 것이며, 후대의 금강산 그림에 큰 영향을 주었다.

 

 

화면의 왼쪽 윗부분에 '금강전도(金剛全圖)'라는 화제(畵題)와 '겸재(謙齋)'라는 그의 호(號)가 적혀 있다. 그 아래에 '겸재'라는 백문방인이 찍혀 있다. 오른쪽 윗부분에는 제화시(題畵詩)와 함께 ' 갑인동제 (甲寅冬題) '라는 관기(款記)가 적혀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이천봉개골산                萬二千峰皆骨山

 

 

 

 

하인용의사진안     何人用意寫眞顔      누가 그 진면목을 그릴 수 있을까  /  중향부동부상외     衆香浮動扶桑外         산에서 나는 뭇 향기는 동해 밖에 떠오르고   /    적기웅반세계간      積氣雄蟠世界間       그 쌓인 기운은 온누리에 서리었네    /   기타부용양소채          幾朶芙蓉揚素彩         몇 떨기 연꽃은 해맑은 자태를 드러내고  /  반림송백은현관             半林松栢隱玄關         송백 숲은 선사(禪寺) 문을 가리었네  /   종령각답수금편      縱令脚踏須今遍       비록 걸어서 이제 꼭 찾아 간다고 해도  /  쟁사침변간하       爭似枕邊看下            그려서 벽에 걸어 놓고 실컷 보느니만 못하겠네

 

 

 

젊어서 산천을 돌아보고, 늙어서 이들을 그려 벽에 걸어 놓고 그 속에 노닌다...는 와유(臥游)라는 동양 산수화의 전통적 사상이 담겨져 있는 글이다. 와유(臥游)란 와이유지(臥以游之)의 준말로, 산수(山水)의 그림을 보며 즐기는 일이라는 의미이다. 당시의 조선 산수화가 중국화의 모작(模作)에 그치고 있던 시기에 겸재 정선은 스스로 국내 명승지를 찾아다니며 일일이 사생(寫生)하면서 진경산수화를 많이 그림으로써, 우리나라 산수화의 기원을 세운 선구자가 되었다.           

 

 

 

 

 

                                             비로봉                비로봉

 

 

 

 

 

 

 

 

 

 

                                  단발령망금강                    斷髮嶺望金剛

 

 

 

 

 

 

 

 

 

 

오른쪽 단발령(斷髮嶺)에서 멀리 하얗게, 겨울의 금강인 개골(皆骨)처럼 보이는 수정 같은 칼바위산을 바라보며 그린 그림이다. 금강산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넘어야 할 고개이다. '단발(斷髮)'이라는 것은 머리를 깎는다는 뜻인데, 이 고개에 올라서면 아름다운 금강산의 모습에 반하여 그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려고 한다는 뜻에서 '단발령'으로 불리운다. 

 

 

인간이 사는 속세는 번뇌와 더러움을 상징하듯 짙은 먹으로 그리고, 그와 대비되는 맑고 깨끗한 신선의 세계는 티끌 하나 없이 하얗고 맑은 수정(水晶) 같이 그려놓았다. 서릿발 가이 날카로운 '상악준(霜鍔峻)'과 동글동글한 쌀알을 찍어 놓은 듯한 '미점(米點)'이 하얀 바위산과 검은 흙산의 대비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그 사이를 흐르는 구름은 마치 속세에 물든 인간들이 함부로 신선들의 세계에 범접하지 못하게 하려는 듯 도도하다. 

 

 

그럼에도 인간이기에 '겸재'는 속세에 머물러 사는 자신의 그런 모습이 좋았나보다. 흙산 중턱에 두 그루의 커다란 나무 아래에는 갓 쓰고 도포(道袍)를 입은 사람들이 구경을 하고 있고, 가마를 들고 온 가마꾼들도 보인다. 그리고 올라가는 길 위에는 나귀를 끌고 올라가는 사람들도 보인다. 작지만 결코 그것을 놓치지 않고, 그 속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겸재, 그의 그림 속에는 이러한 면들이 종종 보이고 있다.   

 

 

 

 

 

 

                                            백천교                    백천교

 

 

 

 

 

 

 

 

 

 

                                   금강산내총도                    금강산내총

 

 

 

 

 

 

 

 

지금까지 전해지는 겸재의 진경산수화 가운데 연도(年度)를 추정할 수 있는 최초의 작품이 바로 이 신묘년(辛卯年) 풍악도첩(風樂圖帖)이다. 이 작품은 모두 13매로 되어있으며, 성첩(成帖) 내력과 화첩 이름을 담은 발문을 1매로 포함하고 있다.

 

 

발문에 의하면 1711년에 백석공(白石公)이란 인물이 금강산을 두 번째 여행하였을 때, '겸재 정선'을 동행시켜 금강산도(金剛山圖)를 제작하도록 하였다고 하며, 이때 그의 나이 36세 때이었다.

위 그림은 '금강산내총도(金剛山內叢圖)'로 금강내산을 마치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그린 듯하다. 이처럼 넓은 공간의 경물(景物)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그린 표현은 조선 초 이래로 이어진 보수적인 산수화의 전통과 맞닿아 있는데, 이 그림은 겸재가 전도식(全圖式 .. 한 장면에 모든 경관을 담아냄)의 시점과 구성에서 영향을 받아 그 형식을 발전시켜 나간 화풍을 보여주고 있다.  

 

 

 

 

                                     금강내산                        금강내산

 

 

 

 

 

 

 

 

 

                                                                삼일포                   삼일포

 

 

 

 

 

 

 

 

 

                                        삼부연폭포                삼부연폭포

 

 

 

 

 

 

 

 

 

                                            만폭동                만폭동

 

 

 

 

 

 

 

 

 

                                            총석정                 총석정

 

 

 

 

 

 

 

 

 

 

                                       장동팔경첩                       壯洞八景帖

 

 

 

 

 

장동(壯洞)은 한성부(漢城府) 북부, 의통방(義通坊), 육상궁(毓祥宮) 옆에 있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인근의 팔경(八景)을 내려다 보고 그린 그림들을 모아 놓은 화첩(畵帖)을 말한다. 현재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은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에 소장된 33.7 × 29.5cm 크기의  화첩(畵帖)과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33.2 × 29.5cm 크기의 화첩 등 두 종류가 전하고 있다.

 

 

간송본(澗松本)은 겸재의 나이 70대 중반인 영조 27년 즉, 1751년 경에 그려진 것이고, 국립중앙박물관본은 겸재의 나이 80대 초반인 영조 31년, 즉 1755년 경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두 화첩에 수록된 작품들 중에는 소재(素材)가 서로 겹치는 그림들이 5점 있는데, 그 화제(畵題)는 각각 독락정(獨樂亭), 취미대(翠微臺), 대은암(大隱巖), 청송당(聽松堂), 청풍계(淸風溪) 이고, 간송본(澗松本)에만 수록된 것은 자하동(紫霞洞), 수성동(水聲洞), 필운대(弼雲臺)의 3점이며, 국립중앙박물관본에만 수록된 것은 창의문(彰義門), 백운동(白雲洞), 청휘각(晴暉閣) 의 3점이다.    

 

 

 

 

 

                                         창의문                     彰義門

 

 

 

 

 

 

 

 

국립중앙박물관본에 수록되어 있는 이 그림은 종로구 청운동에 있는 사소문(四小門)의 하나로서, 자하문(紫霞門)으로도 불리는 창의문(彰義門)을 그린 그림이다. 원래는 초루(誰樓)가 없었으나, 겸재가 양천현령(陽川縣令)으로 나가 있는 동안에 영조(英祖)의 명으로 창의문이 보수되면서 초루(誰樓)까지 새로 갖추게 되었고, 임기를 마치고 돌아온 겸재가 새로워진 이 문을 보고 감개무량하여 감회와 애정을 담아 화폭에 펼채낸 것으로 보이는 이 그림은 붓 끝을 곧게 세워 바위와 언덕을 곱슬곱슬하니 가는 선(線)으로 묘사하였기에, '장동팔경첩' 가운데에서도 특이한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인왕산(仁王山) 자락과 북악산(北岳山) 자락이 서로 마주치는 골짜기 능선 위에 날아갈듯이 지어진 문루(門樓)와 성문(城門), 그 좌우에 인왕산과 북악산 능선을 따라 날개를 펼치 듯 뻗어나간 성벽(城壁)은 마치 날개를 퍼덕이며 내려 앉는 한 마리의 독수리 같은 형상이다. 군데군데 송림(松林)이 우거지고 작고 큰바위가 널려 있다.  

 

 

 

 

                                            대은암                   大隱巖

 

 

 

 

 

 

 

 

 

이 그림은 지금의 청와대 동쪽인 삼청동 칠보사(七寶寺) 부근에 해당하는 대은암(大隱巖)의 풍경을 그린 그림인데, 조선 중기의 학자인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에는 이곳의 유래가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

 

 

 

지정 남곤(止亭 南袞)이 백악산록(白岳山麓)에 집을 지으니 그 북쪽의 정원은 천석(泉石)의 뛰어남이 있었다. 읍취헌 박은(揖翠軒 朴誾)이 매양 용재 이행(容齋 李荇)과 더불어 술을 가지고 가서 놀았는데, 지정(止亭)은 승지(承旨)로 새벽에 들어가서 밤에 돌아오므로 문득 더불어 놀 수 없었다. 읍취헌(읍취헌)이 장난으로 그 바위를 ' 대은(大隱 .. 크게 숨어 있는 바위) '이라 하고 그 시내를 만리(萬里)라고 하니 대개 바위가 주인에게 아는 바 되지 못한 까닭으로 대은(大隱)이라 하였으며, 시내 역시 만리(萬里) 밖에 있는 듯 하다 하여 그렇게 했다고 한다.

 

 

이후 이 일대를 대은암이 있는 동네라 하여 '대은암동'이라 했는데, 불행하게도 뒷날 남곤(南袞)이 기묘사화를 일으켜 죄인이 되자 남곤의 후손들은 이 집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 집주인이 바뀌다 드디어 율곡(栗谷)의 친한 벗인 ' 백록 신응시(白麓 申應時) '의 소유가 되었다.   

 

 

그 후 누군가에 의해 이곳에 대은암(大隱巖) 무릉폭(武陵瀑)이란 각자(刻字)가 새겨지고 서울 북부의 명승으로 잘려졌고, 겸재도 이곳에 개인 저택이 있었던 모양으로 만리뢰(萬里瀨)를 끼고 아래에는 번듯한 와옥(瓦屋)의 본채가 있고, 위에는 초당(草堂)이 있었는데, 버드나무를 비롯한 괴회잡목(槐檜雜木)이 군데군데 늙어 있고 북악산 동쪽 계곡이 그대로 후원(後園)이 되고 있어 가히 절승(絶勝)한 풍경이다. 훤출하게 키 큰 노송(老松)들에 가려진 초당 뒤로 검게 보이는 바위가 대은암(大隱巖)인 것 같은데 겸재 특유의 쇄찰법(刷擦法)으로 몇 번 쓱쓱 문질러 검은 바위로 만들어 놓았지만, 그 인상은 백색 화강암의 인상과 동일하기 느껴지니 그저 신기할 뿐이다.

 

 

초당(草堂) 아래로는 만리뢰(萬里瀨) 개울이 콸콸 여울져 흐르고, 만리롸 아래쪽에 반듯한 대저택이 있는데, 본채와 사당채만 보이고 사랑채와 행랑채를 그림 밖으로 몰아낸 것은 대은암과 만리뢰가 보여주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주안점을 둔 화면구성이다.   

 

 

 

 

 

                                          백운동                      白雲洞

 

 

 

 

 

 

 

 

 

 

이 그림은 인왕산 자락이 북악산 자락과 마주치는 인왕산 동편 북쪽 끝자락에 위치한 백운동, 지금의 종로구 청운동 자하문(紫霞門) 터널과 이어지는 자하문길 서쪽 골짜기를 그린 그림인데, 이곳은 인오아산의 세 봉우리 가운데 중앙에 해당하는 낙월봉(落月峰) 줄기가 흘러내려 북악산 자락과 마주치는 곳이어서 계곡이 깊고 개울물이 풍부하여 바위 절벽이 아름다워 일찍부터 도성에서 가장 빼어난 명승지로 알려졌던 곳이다.

 

 

그림에 등장하는 대저택은 세조비(世祖妃)인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 尹氏)의 형부로서 84세까지 살면서 평생 부귀를 누렸던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념의(李念義)의 옛집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굽이쳐 흐르는 시냇물을 끼고 고루거각(高樓巨閣)이 산 속에 높이 지여져 있다. 주변 모든 산이 암산(巖山)일 터인데 겸재는 특유의 부벽찰법(斧劈擦法)을 사용하지 않고 다만 담묵(淡墨), 담청(淡靑)의 훈염(暈染)과 태점(苔點) 및 부드러운 피마준(披麻蠢)만으로 부드럽게 산을 처리함으로써 장쾌한 맛은 없으나 쇄락(灑落)한 분위기는 더욱 살아나고 있다.     

 

 

 

 

                                            독락정                  獨樂亭

 

 

 

 

 

 

 

 

독락정(獨樂亭)은 지금 청와대가 들어선 세종로 1번지 동쪽 산골짜기에 있던 정자인데, 당시에는 북악산 남쪽 기슭 일대를 대은암동(大隱巖洞)이라 불렀다고 하니 그때로 보면 대은암동(大隱巖洞)이 동쪽 끝자락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작품은 북악산 전경(全景)을 다 그린 것이 아니라 독락정 부근 산중턱 부분만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독락정(獨樂亭)을 그린 그림임을 알 수 있는 이유는 북악산 상봉(上峰) 부근 동쪽 기슭에 지금도 의연히 ' 비둘기 바위 '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인데, 겸재는 이 비둘기 바위를 화면 우측 상단에 뚜렷이 묘사해 놓았다. 

 

 

겸재는 대담한 필묵법(筆墨法)으로 휘쇄난타(揮刷亂打)하여 그 특징만 드러내 놓고 대부분의 바위산은 희미한 윤곽선 안에 바탕색을 그대로 방치한 채 미점(米點) 계통의 횡점(橫點)을 군데군데 찍어서 초목(草木)을 상징했을 뿐이며, 청묵흔(靑墨痕)으로 대담하게 골짜기와 산기슭을 우려내니 남기(嵐氣) 자욱한 북악산의 늦여름 정취가 화면에 가득 넘친다.  

 

 

 

 

                                          수성동                     水聲洞

 

 

 

 

 

 

 

 

 

이 그림은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로 시(詩), 문(文), 화(畵), 서(書), 금(琴), 기(棋)의 육절(六絶)로 일컬어졌던 안평대군(安平大郡)의 대군궁(大君宮)이 있던 옛터로서 현재 종로구 옥인동의 어디쯤인가 있었다는 수성동(水聲洞)을 그린 그림이다.

 

이곳은 세조(世祖)의 왕위 찬탈 과정에서 안평대군이 피살(被殺)되자 그 중부(仲父)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이 탐(貪)을 내어 차지(借地)했다가 그 후 쇠락(衰落)해 버렸는지 겸재의 위 그림 속에는 빈터로 등장하게 된다.

 

시간적 배경은 여름인 듯 하며 바위와 숲이 습윤(濕潤)한 기색을 띠고 울창한 기운이 화면에 가득한데, 대담한 묵법(墨法)과 통쾌한 운필(運筆)로 난타한 듯 분방한 화법이지만 오히려 이로 인해 수성동의 분위기는 더욱 살아나는 듯 하다.   

 

 

 

 

                                          자하동                     紫霞洞

 

 

 

 

 

 

 

 

 

이 그림은 지금의 종로구 청운동에 위치한 북소문(北小門)인 창의문(彰義門), 일명 자하문(紫霞門) 아래 북악산 기슭을 일컫던 동네를 그린 그림이다. 시점(視點)을 근접시켰기 때문에 그림 속에는 한양성의 성벽과 자하문(紫霞門)이 보이지 않지만 바로 북악산 자락이 동쪽에서 내려와 인왕산 줄기로 이어지는 언덕 아래에 마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에는 고루거각(高樓巨閣) 큰 집이 한 마을을 거의 다 차지(借地)한 듯 묘사되어 있는데, 산동네에 큰 집을 지으려니 터가 가팔라 축대를 높이 쌓고 석재(石材)를 곳곳에 놓아 층층으로 집을 지어 나가는 건축기법을 구사하고 있다. 

 

대담한 필선으로 처리된 나무 그림이나, 장중하면서도 당당한 필법으로 여유있게 처리된 건축물 표현에서 겸재의 만년기(晩年期)의 노숙한 화풍(畵風)을 실감할 수 있는데, 고루거각(高樓巨閣)을 한편으로 몰면서 중앙에 많지 않은 집을 밀집시키는 치밀한 구도감각도 만년기의 노련함이 아니고는 이루어내기 힘든 착상이다. 

 

북악산 자락도 그 특징적인 바위벼랑을 쇄찰법(刷擦法)으로 한군데만 쓱쓱 쓸어내렸을 뿐 나머지는 태점(苔點)을 군데군데 찍다가 그마저 생략해서 마치 연하(煙霞)에 잠긴 듯 안개에 묻어버렸는데, 이는 자하동(紫霞洞)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한 의도적인 표현으로 보인다.    

 

 

 

 

                                          청송당                     聽松堂

 

 

 

 

 

 

 

 

 

이 그림은 지금의 종로구 청운동 89변지 경기상고(京畿商高) 자리에 있었으며, 조선 중기의 큰 선비로 이름 나있던 ' 청송 성수침(聽松 成守琛) '의 독서당을 그린 그림인데, '청송당(聽松堂)'이란 이름의 유래는 청송(聽松)의 부친 대사헌 성세순(成世純)의 막객(幕客)이자 기묘명현(己卯名賢) 중 하나인 ' 눌재 박상 (訥齋 朴祥) '이 지었다는 '청송당서(聽松堂序)'에 다음과 같은 '청송찬(聽松讚)'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금(當今) 황제(皇帝) 기원(紀元) 가정(嘉靖) 5년(1526년) 봄에 내가 충주(忠州)로부터 목사(牧師) 직이 바뀌어 한양으로 돌아와 망우(亡友) 이간(李幹)의 집을 빌려 사니, 백악(白岳)의 제이산(第二山) 기슭이었다. 이웃에 탈속(脫俗)한 큰 선비인 성수침(成守琛)이 살았는데, 돌아가신 대사헌(大司憲) 모공(某公)의 적자(嫡子)이었다. 

 

 

내가 일찍이 대사헌의 막객(幕客)이 되어 강남에서 모시고 있었고, 알아주심이 자못 융숭하여 문하(門下)를 왕래함이 한두군데가 아니어서 또한 자제들과 친숙한 바가 되었다. 그러므로 수침(守琛)이 자주 나를 찾아오며 쇠패(衰敗)한 것으로 소외시키지 않았으니 그로 인연삼아 대(代)를 물려가며 사귀는 관계가 되었다.

 

 

하루는 나를 서당으로 오라 하거늘 사양할 말이 없어 바로 그곳으로 가보았다. 북악산을 등지고 남산을 바라보는데, 푸른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시냇물이 구비쳐 흐르니 암자(암자)와 같이 그윽하고 외지기가 형용하기 어렵다. 앞으로는 돌아가신 상공(相公) 댁을 굽어보게 되는데, 곧 수침(守琛)이 병을 고치며 공부하는 곳이다. 얼마동안 얘기를 나누다가 수침(守琛)이 내게 당(堂)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청(請)하거늘, '청송(聽松)' 이자(二字)로 대답하며 이렇게 말했다.

 

 

서당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모두 소나무이니 곧 그 색(色)이 볼 만하고 그 절개(節槪)가 가상하다. 그러나 색(色)은 푸르름에 그칠 뿐이고 절개(節槪)는 고통스러움에 그칠 뿐이다. 소리는 곧 일정한 틀이 없어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서리가 치거나 눈이 내리는데 따라 서로 돌이키며 운율(韻律)이 되어 하룻날 하룻반, 한 겨울 한 여름을 그치지 않는다.     

 

 

 

 

 

                                         청풍계                       淸風溪

 

 

 

 

 

 

 

 

 

이 그림은 인왕산 동쪽 기슭의 북쪽, 지금의 종로구 청운동 54번지 일대의 골짜기를 그린 작품으로 원래는 푸른 단풍(丹楓)나무가 많아서 청풍계(靑楓溪)라 불렀으나, 병자호란 때 강화도를 지키다가 순국(殉國)한 우의정 '선원 김상용(仙源 金尙容)'이 별장을  이곳에 꾸미면서부터 ' 맑은 바람이 부는 계곡 '이라는 의미의 '청풍계(淸風溪)'로 바뀌었다고 한다. 

 

겸재가 이 그림을 그릴 당시, 김상용의 후손인 '모주 김시보(茅洲 金時保)'가 주인이었던 이 집은 백악사단(白岳詞壇)이 자주 모인 집회장소이었기 때문에 겸재는 이곳을 소재로 한 그림을 여러 점 그렸다. 

 

태고정(太古亭)에 초점을 맞추어 능연사(凌然祠)와 청풍지각(靑楓池閣) 등의 건물을 주변으로 몰고 만송강(萬松岡), 창옥봉(蒼玉峰) 등으로 그 둘레를 에워싸는 특수한 구도(構圖)를 보이고 있는 이 그림은 장마비 그친 여름날의 겨치인 듯 주변 수림(樹林)과 바위들이 물기에 젖어 온통 짙푸르기만 한데, 하지만 태고정(太古亭)과 능연사(凌然祠), 청풍지각(靑楓池閣) 등 건물에는 햇살이 환히 비치어 흐린 날이 아님을 알게 해주나.     

 

 

 

 

 

                                           취미대                    翠微臺

 

 

 

 

 

 

 

 

이 그림은 경복궁 궁장(宮墻) 동쪽, 즉 삼청동에 있어 북악산 난쪽 기슭의 동쪽 언덕에 있던 취미대(翠微臺)를 그린 작품인데, 앞에 너른 들판이 호수(湖水)처럼 비어 있고 그 너머로 경복궁 북쪽 담장이라고 생각되는 회색빛 긴 담장이 둘러처져 있으며, 담장 안에는 노송림(老松林)과 잡수림(雜樹林)이 가득 우거지고 그 수풀 건너 저쪽에 남산(南山)이 우뚝 솟아 있기 때문에 이곳이 지금의 청와대 동쪽 일대의 북악산 기슭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그림은 '주역(周易)' 가운데서도 주음법(主陰法) 화면 구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진경산수화(眞景山水花)인데, 연초록빛 경적전(耕籍田 ... 국왕이 농사의 시범을 보이기 위해 직접 농사 짓던 논과 밭) 너른 들판이 중앙에 광활하게 펼쳐지고 그 주변으로 산자락들이 포위하듯 에워싸면서 검푸른 소나무숲을 거칠게 배열해 주음법(主陰法)의 기묘한 음양(陰陽)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취미대(翠微臺)도 경적전(耕籍田)으로 밀고 들어온 그런 산자락 중 하나일 터인데 오른쪽 하단의 높은 언덕 위 소나무숲 속에 고광(高廣)한 암대(巖臺)가 솟아 있고, 그 위에 세 사람의 선비가 모여 있는 것을 보면 이곳이 취미대(翠微臺)인 것으로 보인다. 

 

 

남산(南山)은 원경법(遠景法)으로 처리하여 청묵훈염법(靑墨暈染法)으로 윤곽만 우려낸 다음 미점(米點)을 대담하게 횡타(橫打)하는 겸재 특유의 미가운산식토산법(米家雲山式土山法)으로 그렸고, 경적전(耕籍田)을 둘러싼 산자락들은 북악산의 특징인 소림암봉(疏林巖峰)을 살리기 위해 담묵(淡墨)의 윤곽선에 미점(米點)을 성글게 찍어 나간 암산법(巖山法)으로 ㅊ리하였다.     

 

 

 

 

 

                                         필운대                         弼雲臺

 

 

 

 

 

 

 

 

 

이곳은 종로구 필운동 9번지 일대의 필운동 북쪽 끝 인왕산 기슭에 있는 봉우리를 말하는데, 그 이름은 중종(中宗) 32년에 명(明)나라에서 황태자 탄생을 조선에 공식 통보하기 위해 보냈던 '황태자탄생반조사(皇太子誕生頒詔使)' 부사(副使)이었던 호과급사중(戶科給事中) 오희맹(吳希孟)이 인왕산을 멋대로 개명(改名)했던 것인데, 우리는 단지 그 이름을 이 봉우리에 채택하였던 것이다. 

 

 

이곳은 인왕산 남쪽 줄기의 중턱에 가까워 장안이 한눈에 조망되고 북악산과 남산이 등거리로 잡히며, 경복궁과 창덕궁은 물론 동대문까지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좋은 곳이었으나, 지금은 배화여중고 교정에 편입되어 그 앞에 고층건물을 지어 놓았기 때문에 그 경개(景槪)와 운치(韻致)가 완전히 망가지게 되었다.   

 

 

 

 

 

                                     연강임술첩                   漣江壬戌帖

 

 

 

 

 

임술년(壬戌年)이었던 서기 1082년 7월과 10월 보름, 북송(北宋)의 시인 소동파(蘇東坡)는 호북성 황강(黃江)에서 뱃놀이를 즐겼다. 바람은 고요했고 물결은 잔잔하였다. 그의 대표작 ' 적벽부 (赤壁賦) '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660년 뒤인 임술년 1742년 10월 보름날, 경기도 관찰사인 홍경보(洪景輔)는 당시 최고의 화가이었던 양천현령 정선(鄭敾)과 문장가인 연천현감 신유한(申維翰) 등을 임진강변으로 불러모았다. 소동파의 문아한 활동을 한 번 따라해 보기로 한 것이었다. 

 

 

세 사람은 그 옛날 소동파(蘇東坡)처럼 임진강(臨津江) 중에서도 경치가 가장 좋다는 지금의 경기도 연천군 일대인 삭녕 우화정(羽化亭)에서 웅연(熊淵)까지의 연강(漣江 .. 임진강) 40리 길에 배를 띄웠다. 그리고 이날의 뱃놀이를 화첩(畵帖) 세 벌로 그려 한 벌씩 나누었다. 정선(鄭敾)이 그림을 그렸고, 홍경보와 신유한이 글을 썼는데,이 화첩(畵帖)이 바로 '연강임술첩(漣江壬戌帖)'이다.   

 

 

 

 

                                       우화등선                     羽化登船

 

 

 

 

 

 

우화등선(羽化登船)이란, 사람이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감을 이르는 말이다. 우화(羽化)는 원래 번데기가 날개 달린 나방으로 변하는것을 말하는데, 번잡한 세상 일에서 벗어나 즐겁게 지내는 상태를 비유하는 말이며 또한술에 취하여 도연(陶然)한 모습을 일컫기도 한다. 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赤壁賦)' 중 '전(前) 적벽부'에 ' 훌쩍 세상을 버리고 홀몸이 되어 날개를 달고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오르는 것만 같다 ... 飄飄乎如遺世獨立 羽化而登船 '에서 비롯되었다.  

 

 

 

 

 

 

 

 

                                       용연계람                    龍淵繫纜

 

 

 

 

 

 

 

 

 

                                   북원수회도                      北園壽會圖 

 

 

 

 

 

 

 

 

 

 

 

 

1716년 가을 어느 날에 양반가의 넓찍한 마당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사랑채에는 잔칫상을 기다리는 주빈(主賓)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고, 밖에서는 손님을 모셔온 가마꾼들이 오고간다. 서울 장의동(현재, 자하문 부근)의 전(前) 공조판서 이광적(李光迪. 1628~1717)의 집에서 이광적(李光迪)의 과거(科擧) 급제 60주년(회방. 回榜)을 기념하는 잔치가 벌어지고 있다.

 

 

이광적(李光迪)은 과거 급제 60주년을 맞이해서 북악산 및 인왕산 기슭에 거주하던 70세 이상의 노인들과 그 자손들이 모여서 장수(長壽)를 서로 자축하였던 모임이다. 어린 손자들도 할아버지들 옆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41세의 겸재는 잔치를 주도한 외삼촌 ' 박견성(朴見性) '의 부탁으로 잔칫날의 흥겨움을 그림에 담았다. 그림을 보면 겸재가 높은 곳에서 잔치의 현장을 내려다 보며 그린것 같지만, 이는 한 화면에 모든 전경을 표현하는 ' 조감법(鳥瞰法) '에 의한 것이다. 새가 하늘에서 내려다 보는 풍경 같다고하여 '조감법'이라고 한다.  

 

 

 

 

 

 

 

 

 

이광적(李光迪)은 1650년 생원, 진사가 되고, 1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64년부터 벼슬을 시작하여 함평현감, 강릉현감, 영월군수 등을 두루 거쳤으며, 수령으로서 많은 치적을 쌓아 임금으로부터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그는 70세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으며, 1706년 공조참판으로서 임보(林潽)의 옥사(獄事)를 소홀히 다룬 죄로 파직되었다. 잔치가 끝난 후 주빈(主賓)들은 시를 남겼는데, 이광적이 쓴 시(詩)는다음과 같다.

 

 

 

                      壽星南極照華筵        노인의 별 남극성이 화려한 자리에 비추니

                      鶴髮韶顔世擬仙        백발의 동안을 사람들이 신선에 비유하네

                      靈杖鳩공扶醉步        신령스러운 구장(鳩杖)으로 취한 걸음 의지하니

                      香山故事尙依然        향산(香山)의 고사가 여전히 그대로 남았네

 

 

 

위 시에서 수성(壽星)은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별로 노인성(老人星), 남극성(南極星), 수노인(壽老人), 남극노인(南極老人) 등의 별칭을 갖고있다. 소안(韶顔)은 젊은이처럼 빛나는 늙은이이 얼굴을의미하고, 구장(鳩杖)은 임금이 70세 이상의 노대신(老大臣)들에게 내려주던 지팡이로 손잡이 꼭대기에 비둘기 모양으로 장식하였다. 향산고사(香山故事)는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말년에 시와 술과 거문고를 삼우(三友)로 삼아 취음선생(醉吟先生), 향산거사(香山居士)라는 호(號)를 사용하며 유유자적하난 나날을 보내면서 문사들이 모여 '낙중구로회(洛中九老會)'의 풍류모임을 가졌다.  

 

 

 

 

 

                                       박연폭포                     朴淵瀑布

 

 

 

 

박연폭포(朴淵瀑布)는 개성시에 있는 폭포이다. 폭포의 높이 37m, 너비 1.5m로, 우리나라에서 아름답기로 이름난 금강산의 구료폭포, 설악산의 대승폭포(大勝瀑布)와 더불어 3대 명폭(名瀑)의 하나이며, 일찍이 명유(名儒) 서경덕(徐敬德)과 명기(名妓) 황진이(黃眞伊)와 더불어 이른바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알려져 왔다.  

 

 

 

 

 

 

 

 

그림의 크기는 세로 119.4cm, 가로 51.9cm의 크기이다. 겸재의 진경산수(眞景山水)는 실경(實景)을 즉물적으로 사생하는 것이 아니라 회화적(繪畵的)으로 재해석(再解釋)하는 것임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 금강전도(金剛全圖) '와 '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와 더불어 겸재(謙齋)의 3대 명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화면 전체를 압도하는 박연폭포(朴淵瀑布)의 물줄기가 힘차게 그려져 있다. 폭포는 화면에서 약간 왼쪽으로 치우친 곳에 그려졌으며, 그 오른쪽에는 육중한 바위 벌벽이 자리잡고 있다. 수직(垂直)으로 떨어지는 폭포의 흰 물줄기를 강조하기 위하여 양옆 벼랑은 짙은 먹으로 겹쳐 칠하여 강약(强弱)의 대비(對比)가 한층 고조되고 있다.

 

폭포 아래쪽에는 정자(亭子)와 그 옆에 갓 쓰고 도포를 입은 조선의 선비가 그려져 있고, 폭포 위 절벽 위에는 성문(城門)이 그려져 있어 화면 아래 위 전체적으로 역동성(力動性)이 느껴진다. 대상을 과감히 변형시켜 단순산 사실성을 뛰어넘는 겸재의 예술성이 돋보이고 있는 작품이다.

 

 

 

 

 

 

 

 

 

 

박연(朴淵)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옛날에 박진사(朴進士)가 이 폭포에 놀러 왔다가 아름다운 경치에 도취되어 폭포 아래 못 속에 사는 용녀(龍女)에게 홀려 백년가약을 맺었다. 박진사의 어머니는 아들이 돌아오지 않자 이 폭포에서 아들이 떨어져 죽었다고 생각하고 비탄에 빠져 자신도 폭포 밑 담(潭)에 빠져 죽었다. 그래서 그 담(潭)을 '고모담(姑母潭)'이라 하고, 박씨의 성을 따서 박연폭포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고, 바가지와 같이 생긴 담소(潭沼)에서 떨어지는 폭포라고 하여 박연폭포(朴淵瀑布)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다.   

 

 

 

 

 

 

                                           세검정                洗劍亭

 

 

 

 

 

세검정(洗劍亭)은 창의문(彰義門) 밖 탕춘대(蕩春臺) 옆에 있는 정자이다. 이 정자는 연산군(燕山君) 6년에서 11년사이에 유흥(遊興)을 위한 수각(水閣)으로 세웠다고도 하고, 일설에는 숙종(肅宗) 때 북한산성을 수축하고 수비하기 위하여 병영(兵營)을 설치하였는데, 이 곳에 있는 군인들의 쉼터로 세운 것이라고도 한다.

 

 

광해군(光海君) 15년 이귀(李貴), 김유 등이 광해군의 폐위를 의논하고 이곳 사처(沙川) 맑은 물에서 칼을 씻었으므로 ' 세검정'이라고 이름하였다고 하는데, 원래 세검(洗劍)이란 칼을 씻어서 칼집에 넣고 태평성대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세검정'은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의거(義擧)로 평가하여 이를 찬미하는 상징을 지니고 있다. 

 

 

세검정은 1941년 부근에 있던 종이공장의 화재로 인하여 소실(燒失)되어 주초석(柱礎石) 하나만 남아 있던 것을 1977년 5월에 복원하였다. 복원은 정선(鄭敾)의 '세검정도'를 참고로 하였다고 한다. 복원 당시 도시계획선에 저촉되어 원위치에서 홍제천 상류로 이전 복원키로 하였으나, 원위치에 주초(柱礎) 자리가 드러나게 되어 도시계획선을 변경하고 원위치에 복원하였다.     

 

 

 

 

 

 

 

 

 

 

 

 

 

 

 

 

 

 

                                          인왕제색도                       仁王霽色圖

 

 

 

 

 

국보 제216호 지정되어 있으며, 종이 바탕에 수묵(水墨)으로 그렸으며, 가로 138.2cm, 세로 79.2cm의 크기이다. 영조(英祖) 27년인 1751년, 겸재 정선이 76세 때 윤5월 하순, 비 온 뒤의 인왕산(仁王山) 경치를 지금의 효자동(孝子洞) 방면에서 보고 그린 그림이다.

 

 

비가 온 뒤 개고 있는 인왕산(仁王山)의 인상적인 분위기가 특유의 기법으로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다. 겸재의 회화(繪畵) 세계와 발군의 기량을 입증해 주는 명품일 뿐 아니라, 조선 후기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를 대표하고 있는 걸작품이다. 그림 오른쪽 상단 여백에는 ' 인왕제색 신미윤월하완 (仁王霽色 辛未閏月下浣) '이라고 묵서(墨書)되어 있다. 그 밑에 '정선'이라는 백문방인(白文方印)과 '원백(元伯)'이라는 주문방인(朱文方印)이 찍혀 있다.

 

 

 

 

 

 

 

 

특징 있게 생긴 인왕산의 바위를 원경 가득히 배치하였다. 그 아래에 안개와 수목을 그려 넣어 단순하면서도 대담한 구도를 이루고 잇다. 그리고 수목(樹木)과 가옥(家獄)이 있는 전경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인 부감법(俯瞰法)으로 포착하였다. 원경은 멀리서 위로 쳐다보는 고원법(高遠法)으로 나타내었다. 이로써 마치 앞에서 인왕산을 바라보는 듯한 현장감을 주고 있다.

 

 

 

 

                                                    국보 제216호

 

 

 

 

 

이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는 비 갠 후의 인왕산(仁王山)의 모습을 직접 본 듯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실제로 바라본 인왕산의 모습은 바위가 흰빛에 가까운데, 이 바위는 진한 먹빛을 띠고 있다. 비 온 후의 젖은바위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붓을 뉘어 쓸어내리듯 표현한 바위는 바위산인 인왕산의 특색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전경(前景)에는 진한 숲이 있고 사이사이 구름이 에워싸고 있다. 진한 숲을 따라 시선을 옮기면 정상의 바위산과 만나게 된다. 하반부부터 자욱이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길게 띠를 이루면서 점차 위로 번져 났으니, 오른편 아래쪽에 기와집이 일부 드러났지만 다른 많은 집들은 모두 다 가려졌다.

 

 

반면에 화면의 상반부는 아직 채 흘러내리지 못한 빗물이 평소에 없던 세 줄기 작은 폭포까지 형성하며 세차게 쏟아지고 있다. '겸재'는 비에 젖어 평상시보다 짙어 보이는 화강암봉(花岡巖峰)을 큰 붓을 뉘여 북북 그어 내리고 그것도 부족해서 거듭 짙은 붓질을 더함으로써 거대하고 시커먼 바위산의 압도적인 중량감을 표현하였다.

 

 

주된 봉우리의 윗부분은 약간 잘려 나갔으며, 좌우나 아래쪽도 바깥이 생략되었다. 그러므로 보는 이는 인왕산의 주봉이 망원렌즈로 당겨진 듯 성큼 다가선다는 인상을 갖게된다. 거대한 암벽은 매우 빠른 붓으로 늠름하게 쳐내렸고 골짜기에 피어 오르는 물안개와 축축한 솔밭에는 푸른빛이 배어나오도로 먹빛깔의 농담(濃淡)을 묘하게 가려 썼다.

 

 

그러나 무엇보다 압도적인 중량감을 지닌 주봉(主峰)의 봉우리가 약간 잘려서 화면의 상변과 맞닿아 있는 점이야말로 참으로 극적인 구성이라 하겠다. 이렇게 소재의 일부를 생략한 구성은 회화적(繪畵的)으로 아무런 무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점이 작품의 예술성을 더욱 드높인 요인으로 보고 있다. 이 그림이 갖는 강렬한 표현력은 그 굳세고 빠른 필력(筆力)과 변화무쌍한 묵법(墨法)에도 기인하고 있지만, 전체 구도에 힘 입은 점이 가장 크다고 한다. 겸재가 75세의 만년(晩年)에 그린 것임에도 불구하고 강한 필묵(筆墨)이 보는 이를 압도하는 '겸재'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걸작이다.     

 

 

 

 

                                    겸재의 유산                 謙齋의 遺産

 

 

 

 

겸재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대표적인 그림으로는 ' 독서여가 (讀書餘暇) '가 있다. 이 그림은 툇마루에 나와 앉아 화분에 핀 모라을 감상하는 선비의 모습을 그렸는데, 자신을 표현한것으로 보인다. 방 안에는 책이 가득하여 정선(鄭敾)의 독서벽을 알 수 있으며, 특히 이 그림으로나마 정선을 만날 수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즐거움이다.

 

 

 

 

 

 

 

 

정선(鄭敾)은 76세 되던 1751년 비안개가 걷힌 후에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 인왕산 모습을 최고의 필치로 그린 ' 인왕제색도 (仁旺霽色圖) '를 남겼고, 80세 이상 장수(長壽)하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붓끝에서는 18세기 조선의 풍경이 마치 사진(寫眞)을 찍은 것처럼 생생한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18세기 후반이후에는 거의 모든 집에서 그의 그림을 소장할 만큼 화가 정선(鄭敾)의 위상이 높아졌다. '인왕제색도' 그리고 '금강전도'와 같이 우람하고 힘찬 산수화(山水畵)는 물론이고, 섬세한 붓터치가 돋보이는 초충도(草蟲圖)에 이르기까지 정선은 회화(繪畵)의 모든 분야에서 탁월한 실력을 보여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