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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위면 은산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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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7. 27.

진위면 은산리1 

행정구역은 서로 다르지만 용인·안성은 하나의 삶의 공간 


6 백년 전통 이어온

봉화정씨가 둥지 틀고

은산리 지킴이로 활동


'장군봉'을 중심으로

아흔아홉골로 갈라져

마을지명도 가지가지



▲ 방촌과 산하리 평동마을 전경

■ 평택에서 밥 먹고, 안성에서 똥 누고, 용인에서 농사짓는다

진위면은 평택지방의 옛 중심이다. 근현대사가 심하게 왜곡된 우리나라에서 '옛'이라는 글자는 전통과 긍지보다는 시대에 뒤떨어진 후줄근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진위면의 중심은 봉남리다. 이 마을은 1938년 군(郡)의 명칭이 평택군으로 바뀌기 전까지는 진위군의 행정중심지였다. 중심지로 성가를 높이던 시절 진위면은 읍내면 또는 북면으로 불렸다. 북면에는 봉남리, 견산리, 가곡리, 갈곡리, 하북리, 야막리, 청호리, 고현리, 동천리, 신리, 마산리, 은산리가 있었다.


은산리는 진위면에서도 가장 동쪽에 위치하였다. 이곳은 기동(1리), 방촌(2리), 미동(3리), 상리(4리), 진목(5리) 같은 자연마을로 이뤄졌다. 마을은 약 20호에서 40호에 못미친다.


이곳은 1914년 이후 평택시, 용인시, 안성시 세 군(郡)의 경계다. 경계지점은 은산리 방촌과 원곡면 산하리 평동 마을 사이를 흐르는 작은 실개천이다.


그러다보니 행정구역은 달라도 생활이나 문화는 함께 공유한다.  행정구역의 경계를 넘어 생활과 문화를 공유하게 된 것은 1914년 이전만 해도 이 지역이 양성군 승량원면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진위군 마산면에 속한 월경리, 산내리와 양성군 승량원면의 방촌, 기동, 신촌, 상리, 은정동(銀井洞), 양성군 면하촌의 중리, 하중리, 상촌을 합하여 은산리라고 지명을 붙이고 진위군에 속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기존의 공동문화권이었던 평동과 신촌은 안성군 원곡면 산하리로 남겼고, 진목리는 용인군 남사면에 가져다 붙였다.


그러다보니 마을 따로, 농사 짖는 농경지 따로, 그리고 정월이나 명절이면 함께 놀았던 공동체문화 따로, 따로 따로 나눠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주민들은 '평택에서 밥 먹고, 안성에서 똥 누고, 용인에서 농사짓는다'고 자조 섞인 푸념을 한다. 사실 이것은 푸념거리가 아니라 공권력에 의한 민중생활의 파괴다.   


■ 봉화정씨의 6백년 세거지 산대(山垈)


▲ 봉화정씨 문화유산 지킴이 정종봉씨

은산리와 원곡면 산하리 일대의 다른 지명은 '산대(山垈)'다. 산대(山垈)는 은산리의 기동, 방촌, 미동, 상리, 원곡면 산하리의 평동, 새말, 모양말, 진목의 통미 등 모두 8개의 자연마을을 일컫는 지명이다. 이곳은 봉화 정씨 문헌공파의 동족마을이다.


그 가운데 기동과 방촌, 평동, 새말, 모양말은 아직도 동족마을을 유지하고 있고, 미동과 상리, 통미는 한 두 집 살거나 이거하고 없다. 그래서 옛날에는 봉화 정씨를 '산대(山垈) 정(鄭)씨'라고도 불렀다.


산대(山垈) 봉화 정씨의 입향조는 삼봉 정도전의 장손인 용인공 정래다. 평동마을 노인회장 정광순(70), 방촌 마을 정종봉(75)씨에 따르면 정래(鄭來)는 용인 현령을 지낸 분으로 중앙에서의 박해를 피해 은거지를 찾아 헤매던 중 은산리 기동마을 텃골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도 태종 16년 6월에는 정도전 자손의 금고(禁錮)를 해제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같은 해 6월 26일에는 큰아들 정진에게 관직을 내렸고, 7월 25일에는 손자 정래와 정속에게 관직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뒤로 정진은 공조판서, 판한성부사,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며 이름을 날렸고, 셋째 아들 계열의 손자 정문형은 좌찬성을 거쳐 우의정을 지냈다.


그렇다면 실록의 기록과 항간에 전해오던 이야기와는 논리적 모순이 생긴다. 다시 말해서 정래가 박해를 받아 낙향을 했다면 정치적으로 금고(禁錮)를 당했던 태종 16년 6월 이전에 했어야 하는데 용인현령을 지낸 뒤에 하였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부친인 정진(鄭津)은 세종3년 3월에 죽을 때까지 형조판서를 역임하였고 사촌인 정문형이 성종 때 우의정을 지냈다면 정래의 낙향은 박해가 아닌 정치적 또는 개인적 이유였을 것이다. 


어째든 은산리로 낙향한 뒤 봉화 정씨는 크게 번창하였다. 10세손인 정인창은 무관벼슬이었지만 당상관(堂上官)인 절충장군에 올랐고 13세손인 정잠은 정3품 통정대부를 지냈으며, 잠의 아들 정동준은 17세기에 종2품 가선대부에 제수되었다. 그러면서 처음 터를 잡았던 협소한 기동마을 텃골을 벋어나 방촌, 평동, 신촌, 통미 등으로 세력을 확장하였고, 지방정치에도 적극 참여하여 양성고을에서 확실한 반가(班家)의 입지를 굳혔다.


■ 처음 터를 잡았다고 해서 '텃골'


▲ 은산1리 기동텃골

봉화 정씨가 입향한 6백 년 전 은산리 일대의 지형은 서남쪽으로는 산과 계곡이 발달하고 동쪽과 북쪽은 바닷물이 들어오는 황무지였다. 초기 정씨 집안의 경제적 기반은 동막골과 사냥골의 계곡이었다.


이곳은 텃골과도 가깝고 계곡물이 흘러드는 고라실이어서 최적의 논농사, 밭농사지역으로 꼽혔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쯤 밭농사보다 논농사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낮은 지대의 개간이 시작되었고 마을도 벌판 쪽으로 확대되었다. 조선 후기 은산리 일대에 바닷물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평동마을 정광순(70)씨는 두 가지 근거로 설명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마을 앞의 땅을 파면 1미터 50까지는 진흙층인데 그 아래는 갯가에 많은 백모래층이며 더 내려가면 개흙이 나온다는 점. 다른 하나는, 삼군(三郡)이 만나는 진목리 못미처 바위에 옛날에는 바다조개껍질이 붙어 있었다는 점을 예로 들었다.


그밖에도 산하리 신촌마을에는 '모양말'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모양은 '모랫말'의 사투리여서 옛날 이 마을까지 갯모래밭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은산리의 지명은 이 같은 역사적, 지리적 환경 속에서 만들어졌다. 방촌마을의 삼봉 정도전 기념관에서 만난 정종세(79), 정기순(70)씨에게 산과 계곡, 마을의 지명을 아는 데로 말해달라고 했더니 '아흔 아홉골을 어떻게 다 말하냐'며 손사래를 쳤다.


실제로 마을의 주봉인 장군봉을 중심으로 갈라져 내린 계곡은 깊고도 다양해서 타인에겐 일일이 말해주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도 물러설 수 없어 간청하여 몇 가지 지명을 받아 적는데 나중에 들어온 정종봉(75)씨가 사무실 한쪽에서 지명이 빽빽하게 적힌 두루마리 지도를 꺼냈다.   


은산 1리 기동(基洞)은 본래 이름이 용인공 정래가 처음 터를 잡았다고 해서 '텃골'이다. 텃골 아래는 사낭골을 따라 일렬횡대로 마을이 늘어서 있는데 위쪽이 '윗말', 남동쪽 모퉁이가 '겨둔말'이다. 여기서 겨둔말은 '곁 윗말'의 사투리로 보인다.


은산2리 방촌(傍村)은 '분동(分洞)된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 마을은 텃골에 자리를 잡은 봉화 정씨들이 점차 사회, 경제적으로 기반이 안정되자 넓고 툭 트인 지역으로 분가하면서 유래되었다.


▲ 은산1리 기동텃골 정호신씨 댁

방촌에는 아랫말, 엄나무모랭이, 솔무랑, 마루태기, 주막거리와 같은 작은 마을과 남산이라는 자그만 산이 있다. 여기서 아랫말은 기동마을 윗말 아래쪽에 형성된 마을이라면 엄나무모랭이와 솔무랑은 엄나무와 소나무가 있는 산모퉁이에 형성된 마을을 뜻한다.


마루태기는 은산3리 미동으로 넘어가는 산마루에 형성된 마을로 이곳에는 삼봉 정도전의 사당인 문헌사와 기념관이 있다. 주막거리는 큰 길에서 방촌으로 들어오는 입구다. 이곳은 사통팔달로 길이 뚫려 1960년대 초까지 주막이 있었다.


은산3리 미동에는 말미골과 미등골이 있다. '미동'이라는 지명도 미골에서 연원한 것 같다. 은산4리 상리는 '말미'라고 부른다. 말미란 끄트머리 마을이라는 뜻인데, 용인군 남사면 진목리에 속해 있던 진목(통미)마을이 은산5리에 편입되면서 이제는 네 번째 마을이 되었다.


은산5리 진목은 본래 월경과 통미로 나눠져 있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용인군 남사면에 편입된 지역으로 1983년 행정구역 조정으로 평택시에 속하게 되었다. 월경은 조선시대 '월경지'에서 온 것으로 고을의 경계를 넘어 다른 고을 안에 영토가 있는 것을 말하며, 통미는 합정동 통미마을에서 알 수 있듯이 사방이 툭 트인 개활지에 형성된 마을이다.<다음호에 계속>[평택시민신문 webmaster@pttimes.com 2006 년 02월 22일 (31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