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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6성(六姓)-경주이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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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5. 1.

 

 

 

 

 

 

 

 

 

 

 

신라의 6성(六姓)-경주이씨의 유래

 

 

 

 

□ 시조(始祖)

 

 

카페지기와 우리 일가의 본관(本貫)은 경주이씨(慶州李氏 ; ‘월성이씨(月城李氏)’라고도 한다)이다. 경주이씨(慶州李氏)는 신라초기에는 ‘급량부이씨(及梁部李氏)’로 불리었고, 고려시대에는 ‘계림이씨(鷄林李氏)’, ‘월성이씨’, ‘경주이씨’ 등으로 불렸으며, 조선시대에는 ‘경주이씨’와 ‘월성이씨’를 혼용하였다.

 

위에서 말한 급량부(及梁部)는 신라 건국 초기의 여섯 부족의 하나로 서기 32년(유리왕 9)에 6촌(村)을 6부(部)로 고칠 때,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을 개칭한 것이다.

 

본론으로 돌아간다. 경주이씨(慶州李氏)의 시조인 표암공(瓢巖公)은 기원전 117년 한무제(漢武帝) 원수 6년 갑자년(甲子年)에 하늘로부터 진한(辰韓) 땅 표암봉(瓢巖峰)의 ‘박바위’에 하강했다는 전설을 갖고 있다.

 

여기에서 표암공(瓢巖公)이라 함은 우리 경주이씨의 시조 알평공(平公)의 호(號)를 말하는 것으로 시조께서 지금의 경주시 동천동에 소재하는 ‘표암(瓢巖)’에 하강하였다 하여 작명한 호(號)이다. 한자 '표(瓢)'는 바가지를 뜻하는 '박'을 말하고, '암(巖)'은 바위를 말한다.

 

따라서 ‘표암(瓢巖)’은 ‘박바위’라고도  한다. 그리고 표암봉(瓢巖峰)은 표암이 위치한 산봉우리를 말하는데, 현재 경주 보문저수지 서북편에 있는 석탈해왕릉 옆 산봉우리다.

 

‘표암(瓢巖)’은 신라 6촌의 수장인 양산촌장 알평공(平公)이 탄강한 곳이라고 전해지고 있는데, 기원전 69년에 6촌 수장들과 이곳 '박바위'에서 화백회의(和白會議)를 주재(主宰)하여 기원전 57년, 알에서 깨어난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여 신라를 건국했다고 전한다.

 

그래서 조선조 순조(純祖) 6년(1806)에는 이러한 뜻을 새긴 유허비(遺墟碑)를 이곳에 세웠으며, 1925년에는 이곳에 다시 표암재(瓢巖齋)를 건립하였다. 표암재는 현재 경상북도 기념물 제54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주이씨의 시조 탄생지이자 시조의 제사를 지내는 표암재(瓢巖齋)

 

 

 

 

하늘에서 하강한 시조는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왕이 된 뒤 아찬(阿飡)에 올라 군무(軍務)를 장악했으며, 서기 32년(유리왕9) 왕으로부터 이씨(李氏)라는 성을 사성(賜姓)받았다.

 

이후 536년에는 법흥왕으로부터 문선공(文宣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고, 656년에는 무열왕으로부터 은열왕(恩烈王)으로 추봉(追封)되었다고 적고 있다.

 

하늘에서 하강하셨다는 우리들의 시조께서는 신라 양산촌장(陽山村長)으로서 부족들을 다스리며 혁거세(赫居世)를 양육시켰고, 그를 신라 초대 왕으로 추대함으로써 신라 왕조를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아울러 시조께서는 신라 6부 촌장의 대표로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화백회의(和白會議)제도를 창설하고, 그 의장(지금의 국회의장 격)을 맡음으로써 오늘날의 우리나라 민주주의 제도를 구현하는데 선구자적 역할을 수행했다고 전하기도 한다.

 

참고로 신라 건국 당시의 사로6촌(斯盧六村)의 개요를 도표화 하면, 아래 표와 같다.

 

 

구 분

알천

양산촌

 

(閼川

楊山村)

돌산

고허촌

 

(突山

高墟村)

자산

진지촌

 

(觜山

珍支村)

무산

대수촌

 

(茂山

大樹村)

금산

가리촌

 

(金山

加利村)

명활산

고야촌

 

(明活山

高耶村)

6부명

 

(6部名)

급량부

 

及梁部

사량부

 

沙梁部

본피부

 

本彼部

점량부

 

漸梁部

한지부

 

漢祗部

습비부

 

習比部

촌장

 

(村長)

알평

 

謁平

소벌

도리

蘇伐

都利

지백호

 

智伯虎

구례마

 

俱禮馬

지타

 

祗陀

호진

 

虎珍

강림지

 

(降臨地)

표암봉

 

瓢巖峰

형산

 

兄山

화산

 

花山

이산

 

伊山

명활산

 

明活山

금강산

 

金剛山

성씨

 

(姓氏)

이씨

 

 

(李氏)

최씨

(崔氏)

소씨

(蘇氏)

정씨

 

 

(鄭氏)

손씨

 

 

(孫氏)

배씨

 

 

(裵氏)

설씨

 

 

(薛氏)

 

 

 

 

앞에서 말한 화백회의(和白會議)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등 역사기록을 보면 우리 경주이씨의 시조 표암공(瓢巖公)이 어떤 일이든 다른 촌장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다수의 의사에 따라 결정․집행했던 회의체를 말한다. 이 회의가 민주주의의 효시(嚆矢)라 할 수 있는 신라(新羅)의 화백제도(和白制度)이다.

 

 

 

시조 알평공 초상

 

 

 

 

 

현재 경주시 동천동 산16번지에는 경주이씨의 시조 이알평의 경모비(景募碑)가 건립되어 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주이씨 시조(始祖) 경모비(敬慕碑)

 

 

신라의 2천년 역사는 꿈같이 지나갔건만 월성 옛터에는 돌 한 덩이 풀 한 포기마다 조상의 숨결이 배여 있고 축복 받은 자손들이 대대로 그 전통 그 문화 이어내려 오늘을 누리는 것 생각해보면 어찌 느껍지 아니하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비롯하여 동경지와 가승 등 옛 문헌을 상고하건데, 신라는 본시 진한의 땅으로서 거기 여섯 마을이 있었고, 그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마을은 알천양산촌이며 그 마을의 어른은 알평이신데, 처음에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곳을 박바위라 부르니 우리 겨레의 옛 신앙인 밝음을 뜻한 것임은 물론이다.

 

한선제지절 첫해 임자 기원전 69년 3월초 1일 알평을 비롯한 여섯 마을의 어른들은 자제들과 더불어 알천언덕 위에 자리를 같이 하고 앉아 여섯 마을 전체를 다스릴 거룩한 이를 받들어 모실 것을 의논했다.

 

그리고 모두 함께 높은 곳으로 올라가 멀리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 밑 라정가에 상서론 빛이 땅에 드리우고 거기 흰말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절하는 형상을 짓고 있으므로 달려가 보았더니 자주 빛나는 큰 알이 있었고, 그 알에서 용모 단정한 동자가 나와 뒷날 13세 되던 한선제오봉 첫해 갑자에 왕으로 추대되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신라의 첫 임금 박혁거세 왕이라.

 

알평 어른이야 말로 신라 건국의 첫 장을 꾸미신 원훈이거니와 다만 하늘에서 내려오시고 알에서 나오셨다는 것들은 우리 옛 조상들의 신성함을 말한 귀중한 기록이다.

 

그로부터 백년이 지나 제3대 유리왕 9년 서기 32년에 여섯 마을의 이름을 고치고 성씨를 내릴 적에 알천 양산촌은 급량부라 일컫고 이씨로써 성을 삼아 비로소 경주를 본관으로 한 큰 집안이 열리게 되었고, 무릇 2천여 년을 거쳐 오는 동안에 차성, 우계, 합천, 가평, 평창, 아산, 재령, 원주, 흥향 등 많은 지종으로 나뉘어 가지와 줄기마다 꽃 피고 열매 맺듯 역대를 통하여 뛰어난 문무장상들이 헬 수 없이 배출되었음을 보거니 이 어찌 깊은 뿌리에서 솟아오르는 진액의 덕택이 아니며, 또한 이 어찌 시조의 끼치신 은혜가 아닐까보냐, 그의 혈통을 받은 자손들이 거룩한 유적지를 그냥 보지 못하여 순조 때 표암 위에 시조의 자취임을 새겼고, 순종 때에는 바위 아래 표암제를 세웠으며, 또 근래에 국가에서 거룩한 유적임을 찬양하여 묘우를 세웠고, 터전을 확장하며 장원과 송죽으로 경내를 미화하여 조상을 사모하는 자손들의 마음은 기쁘기 여지없다.

 

그러나 공의 사적은 결코 한 씨족의 역사만이 아니라 우리 민족사의 근원이므로 나는 굳이 그 유적을 찾아 알천 동북쪽 금강산 내린 맥이 마지막 맺힌 표암 위에 올라 눈을 감고 2천년 전 민족의 옛 조상을 사모하며, 다시 그 혈통의 큰 인물들이 대대로 겨레 위해 큰 업적 끼친 것들을 헤아려 볼 때 감격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

 

명활산, 금오산, 선비산이 에워 둘렸고, 문천이 알천이 형산강으로 흘러드는 곳 신라의 옛 서울 알평어른 내리신 자취 2천년 묵은 역사 흐리듯 또렷도 하다. 옛 조상 축복을 받아 자손과 겨레 영광 있으리!

 

 

 

 

 

 

이 경모비(景募碑)는 지난 1979년 11월 1일 당시 경주이씨 중앙화수회(花樹會) 총재였던 당시의 삼성그룹 회장 고 이병철(李秉喆)씨의 성금으로 건립했는데,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이 비문을 지었다.

 

 

 

 

삼성그룹 회장 고 이병철(李秉喆)

 

 

 

 

 

비문의 내용은 모두가 신화적(神話的)인 내용 일색이다. 시조께서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도 그렇고,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도 그렇다.

 

우리민족의 시조라는 단군왕검(檀君王儉)이 환웅(桓雄)과 웅녀(熊女) 사이에서 탄생했다거나, 환웅이 손녀에게 약을 먹여 사람의 몸을 갖추게 한 다음 단수신(檀樹神)과 혼인하게 하여 태어났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경주시 동천동 표암재(瓢巖齋)에 새워진 경주이씨 시조 경모

 

 

1979년 11월 11일, 경주이씨 중앙화수회 총재였던 고 이병철

삼성그룹회장 성금으로 건립(경주시 동천동 산 16번지 소재)

 

 

 

 

다시 시조의 얘기로 돌아간다. 어쨌든 시조와 관련한 신화적 전설은 하나님께서 흙으로 만든 인간의 코에 자신의 “생기를 불어넣어” 창조하셨다는 하나님의 창조섭리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민족이든 종족이든 인간의 시조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아담’ 한사람일 뿐이다. 따라서 ‘단군(檀君)’도 우리들의 시조도 그들이 실제의 인물이라면 모두 에덴동산에서 쫓겨 나온 ‘아담’의 후손이며, ‘노아’의 큰 아들인 ‘샘’의 후손일 뿐이다.

 

그리고 그 후손들이 해 돋는 동쪽을 향해 이동해 온 한 무리의 우두머리일 뿐 결코 하늘에서 떨어지지도 않았고, 알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창조역사를 부정하는 비기독교인(非基督敎人)들이 하등의 근거도 없이 회자(膾炙)시켜 온 엉성한 전설을 맹신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했다는 말은 극구 부인하면서도 원숭이가 자신들의 할아버지라고 믿는 비기독교인들이 그들의 할아버지가 하늘에서 떨어졌다거나, 알에서 깨어났다는 말은 어떻게 믿을 수 있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기도 하다.

 

경주이씨 문중에서는 또 시조(始祖) 경모가(敬慕歌)라는 것을 만들었다. 누가 부르고 있는지는 모르나 - 물론 아무도 없을 것이다 - 이은상이 작사하고 신윤원이 작곡한 경모가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경주이씨 시조(始祖) 경모가(敬慕歌)

 

 

명활산(明活山) 금오산(金鰲山)

선도산(仙桃山)이 에워 둘렀고

문천(蚊川)이 알천(閼川)이

형산강(兄山江)으로 흘러드는 곳

신라의 옛 서울 양산촌장(楊山村長) 내리신 자취

이천년 묵은 역사 흐린 듯 또렷하도다.

옛 조상 축복 받아 자손과 겨레 영광 영광 있으리

 

 

 

 

 

 

본론으로 돌아간다. 우리들의 경주이씨 시조 알평공(謁平公)은 하늘에서 내려 온 사람이 아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사람은 하나님의 천사(天使)뿐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조 알평공(謁平公)은 에덴동산에서 축출된 ‘아담’과 ‘하와’의 후예(後裔)로서 해 돋는 동쪽을 향해 이동해 온 한 무리의 우두머리로 그의 부모에게서 태어났을 뿐 결코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여기에서 경주이씨(慶州李氏) 시조 알평공의 선계(先系)에 대한 얘기를 소개한다.

 

일연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언급되지 않았으나, 이씨(李氏)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중국의 한(漢) 무제(武帝)시대 때 위만조선(衛滿朝鮮)을 토평(討平 ; 무력으로 쳐서 평정함)할 때 들어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다른 성씨와는 달리 경주이씨는 당시에 이미 ‘농서이씨’[중국에서는 이씨(李氏)를 전부 ‘농서이씨’라 함]라는 성(姓)을 갖고 있었고, 농서이씨의 후손(後孫)이자 우리의 시조 표암공의 선대인 이진(李震)은 위만조선(衛滿朝鮮)을 토평할 때 전공을 세워 한4군(漢四郡)의 하나인 낙랑군(樂浪郡)의 태수(太守)가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후 이진(李震)의 증손(曾孫)인 천보(天寶)가 흉노(匈奴)를 토벌할 때 전공을 세워 지금의 황해도 지역인 양산후(楊山侯)로 봉해지자 후손들이 본관을 ‘농서이씨’에서 ‘양산이씨’[楊山李氏 : 현재의 안악이씨(安岳李氏)]’로 바꾸었다.

 

그리고 양산후(楊山侯)가 된 천보(天寶)의 동생 천록(天祿)이 양산[楊山 : 현재의 황해도 안악(安岳)]에서 한반도 동남부 지역인 사로[斯盧 : 현재의 경주(慶州)]로 이전하여 진한(辰韓)의 사로후(斯盧侯)에 봉해지자 그 일족이 거주하던 지역을 그들이 전에 살던 황해도 양산(楊山) 지역의 이름을 따서 양산촌(楊山村)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신라 유리왕이 6부 촌장에게 사성(賜姓)할 때 양산촌장(楊山村長)인 알평(謁平)에게는 본래의 성씨인 이씨(李氏)로 사성(賜姓)하여 우리나라 이씨(慶州李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시조(始祖)가 하늘에서 지금의 경주시 동천동 보문저수 옆 ‘박바위’에 하강(下降)하여 알에서 깨어난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왕으로 삼아 신라(新羅)를 건국하고 경주이씨의 시조(始祖)가 되었다는 허무맹랑한 전설보다는 훨씬 이치에 맞는 말이 아닌가.

 

 

 

시조가 탄강하여 목욕을 했다는 박(바가지) 모양의 ‘박바위’

 

 

(모양이 바가지(박)처럼 생겼다 하여 ‘박바위’라고 하는데, ‘표암봉’의

중앙 지점 쯤의 두 곳에 ‘표주박’을 엎어 놓은 것 같은 모양의 매끈한

둥근 돌이 두어 개씩 연이어 있는 바위가 있는데, 이곳을 경주이씨의

시조인 이알평(李謁平)이 하늘에서 하강하여 처음으로 목욕을 했다는

‘표암(瓢巖)’이다. ‘바가지’와 같은 욕조(浴槽)형상의 바위라는 뜻이다.

경주이씨 화수회에서는 이 같은 전설을 토대로 이 ‘욕조바위’를 성역

시하면서 그 위에 전각을 지어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보존하고 있다)

 

 

 

 

이상의 내용을 다시 한 번 정리한다. 앞에서 말한 대로 우리 경주이씨(慶州李氏)의 시조는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 아니다. 사람은 사람에게서 태어나는 것이 창조주(創造主)의 섭리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중동(中東) 지역에 소재하던 ‘에덴동산’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담과 하와(이브)의 자손으로서 그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그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이때 쫓겨난 아담, 하와의 후손들은 수세기에 걸쳐 해 돋는 동쪽을 향해 우랄, 알타이 산맥을 넘고, 몽골초원과 중국대륙을 거쳐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반도(韓半島)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최종 종착지(終着地)인 한반도 동남부의 지금의 경주시 동천동(東川洞)에 이르러 신라(新羅)를 건국하고, 본래의 성씨인 양산이씨를 월성이씨(月城李氏 ; 후에 경주이씨로 다시 변경)로 변경하여 2014년 현재 2,188년 동안 번성해 온 하나의 민족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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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慶州市)에서는 매년 3월 중정일에 시조 표암공을 기리는 춘향대제(봄에 지내는 제사)가 봉행되는데, 이 행사에는 경주(慶州李氏)와 경주이씨에서 분적한 재령, 합천, 장수, 차성, 아산, 진주, 우계, 원주, 가평, 평창이씨의 영호남 대표 등 전국의 종친(宗親)과 후손 3,000여 명이 참석하여 진행된다.

 

 

 

경주 이씨 시조 표암공 춘향대제

 

 

붉은 색 옷을 입은 3명 중  오른쪽 초헌관(初獻官 ; 예전에 나라의 제사 때

첫 번째 술잔을 올리는 일을 맡아 하는 임시 벼슬)이 이명박 대통령이다)

 

 

 

 

 

자랑스러운 우리들의 경주이씨 세계(世系)

 

 

시조

(표암공)

2세

3세

4세

5세

6세

7세

8세

9세

10세

謁平

仲嘉

文祥

秀章

起貞

알평

중가

문상

수장

기정

11세

12세

13세

14세

15세

16세

17세

18세

19세

20세

美善

成立

啓煊

宣璋

基膽

仁興

善楨

미선

성립

계환

선장

기담

인흥

선정

21세

22세

23세

24세

25세

26세

27세

28세

29세

30세

泰暉

友榮

駿

敬智

元長

漢老

季湯

태휘

우영

경지

원장

한노

계탕

31세

32세

33세

34세

35세

중시조

(소판공)

37세

38세

39세

40세

嗣彦

禧斗

居明

金現

金書

潤弘

承訓

사언

희두

거명

금현

금서

윤홍

승훈

41세

42세

43세

44세

45세

46세

47세

48세

49세

50세

周復

侈連

寵暹

春貞

玄福

宣用

升高

得堅

주복

치연

총섬

춘정

현복

선용

승고

득견

51세

파시조

(익재공)

53세

54세

55세

입향조

(판윤공)

57세

(부사공)

58세

(군수공)

59세

(찰방공)

60세

(병사공)

齊賢

瑞種

元益

之帶

元林

光曾

升亨

제현

서종

원익

지대

원림

광증

승형

61세

(참의공)

62세

(훈도공)

63세

64세

65세

66세

67세

68세

69세

夢星

厚根

利薰

敏華

宜森

雲從

幹宅

復遜

枝和

몽성

후근

이훈

민화

의삼

운종

간택

복손

지화

70세

71세

72세

73세

74세

75세

 

 

 

鍾澾(종달)

 

(金德順)

 

 

賢雨 (현우)

 

春雨 (춘우)

 

敬雨 (경우)

 

柄雨 (병우)

 

正雨 (정우)

 

石順 (석순)

 

 

상철 (相喆)

상숙 (相淑)

상규 (相圭)

상기 (相起)

상수 (相洙)

상대 (相大)

상렬 (相烈)

상용 (相容)

상진 (相鎭)

상택 (相澤)

상록 (相祿)

鍾吉(종길)

 

(李起蘭)

 

容雨 (용우)

 

聲雨 (성우)

 

慶花 (경화)

 

康雨 (강우)

 

永雨 (영우)

 

相雨 (상우)

 

機雨 (기우)

 

경아 (暻雅)

경민 (景敏)

상훈 (相勳)

세연 (世然)

상현 (相儇)

상은 (相恩)

혜란 (惠蘭)

상필 (相弼)

보라 (普羅)

상원 (相媛)

鍾浩(종호)

(薛永仙)

 

春雨 (춘우)

 

慶雨 (경우)

 

   起雨 (기우)

 

花連 (화연)

 

知雨 (지우)

 

韓雨 (한우)

 

点雨 (점우)

 

昌雨 (창우)

 

승민 (承珉)

미숙 (美淑)

은주 (     )

성일 (     )

陵守(능수)

(金碩經)

 

金宗漢(김종한)

金宗翔(김종상)

金宗浩(김종호)

金分先(김분선)

金粉禮(김분예)

 

鍾守(종수)

(金興道)

金將壽(김장수)

 

金永富(김영부)

 

鍾淑(종숙)

(崔慶和)

 

聖熺 (성희)

 

鎭雨 (진우)

 

日順 (일순)

 

澈雨 (철우)

 

瓚雨 (찬우)

 

英順 (영순)

 

元順 (원순)

 

상옥 (相玉)

상동 (相東)

태자 (泰子)

상선 (相善)

상돈 (相敦)

장미 (萇美)

상훈 (相勳)

경미 (慶美)

현지 (     )

승민 (     )

상학 (相學)

김경락(金京洛)

(崔富壽)

최석원(崔錫元)

 

 

鍾烈(종열)

윤경 (     )

은희 (     )

鍾杰(종걸)

창우 (     )

명주 (     )

화진 (     )

鍾和(종화)

(        )

시우 (     )

수빈 (     )

수지 (     )

南珠(남주)

(吳炳錫)

오경필(吳京弼)

花子(화자)

(韓基洙)

한낙현(韓樂鉉)한무현(韓武鉉)

花善(화선)

(孫海振)

손동휘(孫東輝)

鍾善(종선)

(金德佑)

김태경(金泰慶)김홍국(金泓局)

 

(72세(世) 이후는 여성과 인척(姻戚)을 모두 수록하였다)

 

 

 

 

우리 대소가의 안태고향(安胎故鄕) 괘릉리 884번지 생가

 

 

(가운데 전주 왼쪽에 있는 기와집이 우리 가문의 생가집이다.

지금은 비록 남의 집이 되어있지만, 약 100여년간 우리가문의

어른들과 대다수 가솔들이 태어나고 잠든 가문의 요람이었다)

 

 

 

 

이하에서는 경주이씨 선현들의 행적과 부침(浮沈)의 역사를 시대별로 정리해 보기로 한다.

 

우선 중시조 소판공(蘇判公) 이거명(李居明)은 신라의 성골(聖骨)이나 진골(眞骨) 귀족들만이 오를 수 있는 소판(蘇判)의 직을 역임했는데, 소판은 신라조의 지방수령직(지금의 시도지사)으로 김유신(金庾信) 장군의 아버지 김서현공도 소판출신이었다.

 

경주이씨(慶州李氏)는 전술한 대로 시조 이후 중시조(中始祖) 때까지의 신라시대 기록은 계대(系代)만 확인되었을 뿐 일체의 행적이 남아있지 않다.

 

다만, 시조가 신라를 창건한 개국공신이었고, 중시조의 관직이 성골(聖骨)과 진골(眞骨)만이 오를 수 있는 '소판(蘇判)'의 벼슬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시조이후 중시조 때까지도 대대로 왕족 다음가는 지위를 누렸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이러던 중 지난 1930년대에 시조이후 8대파 분파(分派) 때까지의 잃어버린 공동선조의 기록을 찾았다 해서 한동안 소란을 피우기도 했었다. 그러나 당시의 실전(失傳)기록은 사실과 다른 것으로 판명되었다.

 

따라서 일부 후손들이 찾았다는 시조 이후 28대 또는 35대의 실전세계(失傳世系)는 그 신빙성을 인정할 수 없는 처지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도 다른 파일에서 다시 소개하기로 한다.

 

소판공(蘇判公) 이후 경주이씨는 천자만손(天子萬孫)으로 번성하여 고려조(高麗朝)에서만 문하시중(門下侍中 ; 조선조의 영의정) 4명을 배출했고, 조선조에서도 과거급제자 178명, 재상(宰相 ;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8명, 대제학 3명, 공신 12명, 청백리 10명 등을 배출하는 등 삼한(三韓)의 대표적인 명문거족으로 성장해 왔다.

 

 

□ 중시조(中始祖)

 

 

우리나라 대다수 이씨(李氏)의 조종(祖宗)으로 알려지고 있는 경주이씨는 신라 창건 당시의 6부(部) 촌장이자 화백회의의 의장이었던 알천양산촌장 이알평(李謁平 ; 경주이씨가 아닌 분들의 편의를 위해 경칭(敬稱)은 생략한다.

 

이하 다른 이도 같다)을 시조로 하고, 시조의 36세손인 신라 9주(州) 수장(首長) 중의 한 사람이었던 소판공(蘇判公 : 지금의 시도지사) 이거명(李居明)을 중시조(中始祖)로 하고 있다.

 

 

 

 

경주이씨 중시조 소판공(蘇判公) 거명(居明)의 양호단(良湖壇 ; 사당)

 

 

(울산광역시 울주군 청량면(靑良面) 소재, 비석에는 ‘경주이씨(慶州李氏)’가 아니고, ‘월성이씨’라고 새겨져 있다. 출세한 '경주이씨'가 아닌

촌부 출신의 종손인 '월성이씨(月城李氏)'들이 세운 비석이기 때문이다)

 

 

 

 

경주이씨는 시조 이후 계대(系代)가 실전(失傳)되어 무려 1천여 년 간의 계대가 확인되지 못하는 우여곡절이 있기도 했었다.

 

그러던 중 1367년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우리 문중의 파시조(派始祖)인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묘지(墓誌)를 쓸 때 시조의 원대손(遠代孫)인 이거명(李居明) 이후의 세계(世系)를 적은 것이 연유가 되어 이때부터 소판공(蘇判公)이 중조(中祖) 곧 기세조(起世祖)로 확정되기에 이르렀고, 조선말기에 이르러 시조 이후 중시조까지의 실전(失傳) 세계(世系)를 찾아내어 전체의 계대가 규명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때 찾았다는 실전세계는 그 신빙성을 거의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 부분은 다른 파일에서 다시 소개하기로 한다.

 

참고로 현재 우리나라 이(李)씨의 본관은 237본이나 되는데, 대체로 한국계와 중국계, 그리고 기타계열로 나뉜다. 한국계는 모두 신라 6성의 하나인 경주이씨에서 갈라져 나간 것으로 자세한 것은 뒤에서 다시 설명하기로 한다.

 

신라 6(六姓)이란 『삼국사기(三國史記) 1권』 ‘신라본기(新羅本紀)’에서 기록하고 있는 신라 유리왕이 재임 9년(서기32년)에 당시의 6촌장에게 사성(賜姓)한 성씨들을 말한다.

 

양산촌장 알평(謁平)에게는 이씨(李氏), 고허촌장 소벌도리(蘇伐都利)에게는 최씨(崔氏), 대수촌장 구례마(俱禮馬)에게는 손씨(孫氏), 진지촌장 지백호(智白虎)에게는 정씨(鄭氏), 가리촌장 기타(祈陀)에게는 배씨(裵氏), 고야촌장 호진(虎珍)에게는 설씨(薛氏)를 하사한 것 등이 그것이다.

 

중시조 소판공(蘇判公) 거명(居明)의 사당은 지금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청량면(靑良面) 동천리(東川里) 양천(良川)마을에 소재하고 있다. 중시조 생존당시의 이 지역은 지금의 경주시 지역이었다.

 

 

중시조 소판공(蘇判公) 거명(居明)의 단소(壇所 ; 제단을 모신 장소)

 

 

(울산광역시 울주군 청량면(靑良面) 소재)

 

 

 

 

□ 분적종(分籍宗)

 

다음은 경주이씨의 주요 세거지(世居地 : 성씨의 일족이 모여 사는 마을로 옛날에는 세거지가 양반의 중요한 조건중의 하나였음)와 분파(分派) 형성경위를 간략하게 알아본다.

 

신라의 왕성 경주에서 신라왕이 사성(賜姓)하여 태어난 경주이씨의 세거지(世居地)는 당연히 경주여야 하나, 주요 씨족들이 역대왕조의 부침(浮沈)과 붕당정치의 틈바구니에서 볼모로 강제이주를 당했는가하면, 귀양을 가고 피난을 가는 등 곡절을 겪은 결과 이제는 전국 일원에 그 세거지가 분포되어 있다.

 

신라의 창건 주역이었던 경주이씨의 후예들은 1,000여 년을 신라의 진골(眞骨) 귀족으로 왕조와 운명을 같이 해 왔었다.

 

부패해질 대로 부패해진 신라가 고려에 의해 패망하자 경주이씨들의 후예들은 진골귀족으로서의 사명감과 고려왕조의 볼모정책에 따라 그 주력인사들이 고려의 정승공(正承公)으로 봉해진 경순왕(敬順王)을 따라 천 여리나 떨어진 고려의 수도 개경(開京 ; 고려의 수도, 지금의 개성)으로 강제이주를 당했다.

 

나라는 패망하였으나 문무백관으로 재임하던 귀족들이 그들이 섬겨오던 왕을 호종하여 1천여리가 넘는 고려의 왕성으로 볼모가 되어 잡혀간 것이다.

 

경주이씨(慶州李氏)의 ‘정묘보(丁卯譜)’에 의하면, 경주이씨가 지금의 황해도 금천(金川 : 황해도 남동부에 있는 군(郡)으로 주산업은 농업으로 콩, 조, 밀, 인삼, 담배 따위가 많이 난다. 군청 소재지는 금천면이다)에 대대로 분묘(墳墓)를 썼던 사실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신라가 패망한 이후 신라의 진골귀족으로 명신의 지위를 누리던 경주이씨의 선조들이 고려의 건국당시 개경으로 강제이주 당하여 인접한 금천(金川)에 터를 잡았다는 근거가 된다.

 

금천(金川)에 터를 잡은 경주이씨는 초기 고려에서는 다른 성씨의 신라유신(新羅諛臣)들과 함께 중신의 자리에 올라 고려조의 중신들과 대립하면서 개혁을 위한 왕권장악을 꾀하다가 실패하기도 했었다.

 

개혁운동의 실패는 당연히 신라유신 세력의 배척정책의 단초가 되었고, 이에 따라 경주이씨도 예외 없이 관직에의 진출이 막혀버렸다.

 

오랜 세월동안 관직에의 등용이 막혔던 신라조의 후예 중 경주이씨의 경우 우리 문중의 35대조에서부터 겨우 향직(鄕職)에의 진출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관직의 길이 트인 경주이씨 후예들은 초인적 정진을 거듭하여 여말(麗末)에 이르러서는 수대에 걸쳐 문하시중(門下侍中 ; 조선조의 영의정)에까지 진출하는 등 삼한(三韓)의 명문거족이 되어 개경(開京) 일원에서 세거(世居)하였다.

 

그러나 고려조 말부터 경주이씨의 세력이 약화되자 상대 당파의 모략으로 벼슬을 버리거나, 유배를 당하는 등 그 세거지(世居地)가 전국으로 분산되기 시작했다. 경주이씨 세거지의 분산과정을 개략적으로 살펴본다.

 

이하에서의 계대(系代) 표시는 우리들의 직계 조상일 경우 카페지기로부터의 상향대수를 나타내고, 방계 조상인 경우는 중시조로부터의 하향대수를 나타낸다.

 

경주이씨 독자들께서는 카페지기의 항렬이 ‘우(雨)’자라는 것과 시조(始祖)이신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의 73대손이며, 중시조(中始祖)이신 이거명(李居明)의 38대손, 파시조(派始祖)이신 익제공(益齋公 : 李齊賢)의 22대손, 입향조(入鄕祖)이신 판윤공(判尹公 : 李之帶)의 18대손이라는 점을 감안하시면 계대(計代)에 참고가 되리라 믿는다.

 

경주이씨가 고려의 수도 개경에서 최초로 분산된 경우는 17세손인 이규의 증손(曾孫) 이석(李碩)이 여말(麗末)에 벼슬을 버리고,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羅州)로 퇴거(退居)한 때부터로 보인다.

 

이후 조선조에 들어서는 23세손 이절(李節)의 대 이래로 당시의 수도인 한성(漢城)에서 경기도 안성(安城), 경상북도 예천(醴泉)ㆍ안동(安東)ㆍ상주(尙州), 전라남도 함평(咸平) 등지로 분산되었다. 일부는 관향인 경주로 되돌아가기도 했었다.

 

또한 21세손 이인로(李仁老)는 단종(端宗) 손위(遜位 ; 임금의 자리를 내어놓음) 때 전북 임실(任實)의 두곡리(杜谷里)로 이주하여 정착했고, 이관(李琯)의 동생 이제현(李齊賢)의 자손들 중 카페지기의 20대조인 이서종(李瑞鍾)의 후계(後系) 중 이지회(李之會)는 경산(慶山)의 자인(慈仁)으로, 필자의 17대조인 이지대(李之帶)는 관향인 경주(慶州)로, 이성지(李成枝)의 후손들은 충청북도 제천(堤川)으로 각각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우리 가문의 경주지역 입향조이신 판윤공(判尹公) 이지대(李之帶)가 낙향할 당시의 경주부(慶州府) 남면(南面) 남중리(南中里)는 현재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전 울산군 두서면 구량리) 지역으로 당시에는 경주부(慶州府) 지역에 속한 지역이었다.

 

그리고 당시의 경주부 남부지역은 우리들의 고향 경주시 외동읍(外東邑)의 전신인 신라조 당시의 취산진지촌(嘴山珍支村) 지역이었다.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4대손이자 우리들의 17대조로 검교한성판윤(檢校漢城判尹)을 지낸 판윤공(判尹公) 이지대(李之帶)는 단종 즉위년인 1452년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고 안평대군(安平大君)을 강화도로 유배시키는 등 폭정을 일삼자 이에 항거하여 벼슬을 버리고 관향(貫鄕)인 경주부(慶州府) 남면 남중리로 낙향(落鄕)한 것이다.

 

입향조께서는 이 마을에 당도하자말자 은행나무를 심었는데, 500년이 넘은 이 은행나무가 지금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서면 보호수(保護樹)로 지정되어 천연기념물 제64호로 보호받고 있다.

 

그리고 이 나무가 지금의 울산광역시에 소재한다하여 울산에서는 필자의 입향조이신 이지대(李之帶) 공도 울산을 빛낸 울산사람이라고 홍보하고 있다.

 

 

 

 

판윤공파의 파시조 '이지대'가 심은 두서면 은행나무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서면 소재)

 

 

 

다시 세거지(世居地) 얘기로 돌아간다. 중시조의 20세손인 이미(李美)는 조선조 태종조 때 제주도로 유배된 이후 일부가 그곳에 터를 굳혔고, 경기도 안성(安城)의 죽산(竹山), 전라북도 완주(完州)의 고산(高山), 충청북도 청원(淸原), 경상북도 영일(迎日 ; 지금의 포항시)의 흥해(興海)와 상주(尙州)의 함창(咸昌) 등지로 산거하기 시작했다.

 

고려조에서 문하시중에까지 오른 이제현(李齊賢)의 경우는 셋째아들 이창로(李彰路)의 후계(後系) 중 21세손 이문(李聞)이 경상북도 영일(迎日)의 흥해(興海)로 낙향(落鄕)하였고, 20세손 이종지(李鍾地)가 단종조 갑술년(甲戌年)에 지금의 함경남도 이원(利原)으로 유배되어 이 무렵부터 이들 지역에 나뉘어 살게 되었다.

 

한편 17세손 이천의 자손들은 22세손 이만선(李萬善)ㆍ이완원(李完元)의 대에서 경상북도 의성(義城)ㆍ대구(大邱)ㆍ산청(山淸)ㆍ철산(鐵山)에, 23세손 이간(李簡)ㆍ이시영(李時迎)의 대에서 경상북도 안동(安東)ㆍ선산(善山)ㆍ청도(淸道), 전라남도 순천(順天) 등지에 정착했던 사실이 ‘정묘보(丁卯譜)’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천의 동생 이매(李邁)의 자손들은 18세손 이경원(李敬元) 이래로 4대에 걸쳐 경기도 용인(龍仁)ㆍ봉산(鳳山)과 경상북도 상주(尙州) 등지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17세손 이과의 자손들은 경상북도 안동(安東)과 강원도 양양(襄陽) 등지에 많이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이과의 동생 이수(李蓚)의 자손들은 이수가 여말(麗末)에 평안북도 곽산(郭山) 땅에 유배되었다가 그 곳에 머물러 살게 되었다.

 

15세손 이수(李蓚)의 자손들은 20세손 이귀산(李龜山) 이래로 관향인 경상북도 경주(慶州)로 돌아갔으며, 17세손 이손보(李孫寶)의 자손들은 21세손 이득산(李得山) 이래로 경상북도 의성(義城)에 정착하였다.

 

1930년 현재 경주이씨(慶州李氏)는 충청북도 청원군(淸原郡)일원, 충청남도 보령군(保寧郡) 미산면(嵋山面), 전라북도 완주군(完州郡) 봉동면(鳳東面), 임실군(任實郡) 덕치면(德峙面), 전라남도 해남군(海南郡) 화산면(花山面), 무안군(務安郡)ㆍ영암군(靈岩郡)ㆍ진도군(珍島郡) 일원에 세거지를 형성하고 있다.

 

경상북도의 경우는 달성군(達城郡) 성서면(城西面), 의성군(義城郡) 다인면(多仁面), 월성군(月城郡 ; 지금의 경주시) 천북면(川北面)ㆍ강동면(江東面), 청도군(淸道郡) 청도읍(淸道邑), 상주군(尙州郡) 낙동면(洛東面), 영일군(迎日郡)ㆍ경산군(慶山郡) 일원이 주요 세거지였다.

 

그리고 경상남도에서는 밀양군(密陽郡) 단양면(丹陽面), 남해군(南海郡) 삼동면(三東面), 울주군(蔚州郡) 일원, 평안북도 박천군(博川郡) 동남면(東南面), 정주군(定州郡) 임포면(臨浦面), 함경남도 이원군(利原郡) 남면(南面)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오늘날 경주이씨 자손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살고 있는 집성촌은 전라남도 영암군(靈岩郡) 영암읍(靈岩邑) 망호리(望湖里)이다. 이곳에 경주이씨(慶州李氏)가 처음 자리 잡은 것은 4백여 년 전, 필자의 21대조이자 파시조(派始祖)이신 익재공 이제현(李齊賢)의 9대 손인 이기(李琪)가 을묘사화(乙卯士禍)를 피해 이 마을로 오게 되면서부터이다. 현재 이 마을 1백여 가구가 경주이씨 자손들이다.

 

여기에서 경주이씨의 고려조 이후의 씨족사(氏族史)를 다시 한 번 정리한다. 영남지방의 경주에서 천년동안 경주에서 세거(世居)하던 경주이씨의 후손들은 신라가 패망하면서부터 고려조의 왕도인 개경으로 강제 이주당하여 그곳에서 새로운 세거지(世居地)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그 고려조가 패망하고 조선이 창건되자 조선의 수도인 한성(漢城)으로 옮겨와 조상전래의 지능과 노력으로 수많은 상신(相臣 ; 재상급 신하)과 공신(功臣)을 배출하며 명문거족의 지위를 누리다가 앞서 기술한 대로 포악한 군왕과 붕당정치의 희생물이 되어 유배(流配)를 당하고 피난을 하는 등 그 세거지가 조선8도(朝鮮八道)로 분산되었다.

 

때문에 시조 이후의 계대(系代)마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해 전전긍긍하다가 백사파(白沙派)의 ‘무진보(戊辰譜)’에서 중시조 이후의 28대에 이르는 실전세계를 찾아 수록했고, 그 이후 1890년대 광무연간(光武年間)의 ‘갑진보(甲辰譜)’에서 시조 이후 35대에 걸친 실전세계를 다시 찾아내어 수록함으로써 잃어버린 뿌리를 그런대로 규명했다고 전한다.

 

일설에서는 조선 말기 무렵에 경주이씨에서 갈라져 나간 합천이씨(陜川李氏) 족보에서 시조 이알평(李謁平)으로부터 이거명(李居明)까지 36대의 명단을 찾아내어 족보에 수록함으로써 지금의 족보가 완성되었다고도 전한다.

 

실전(失傳)된 계대의 근거가 정확하지 않다는 뜻이 된다. 때문에 이 자료의 발견경위와 내용과 관련해서는 ‘정묘대종보(丁卯大宗譜) 실전세계의 고찰(考察)’에서 이를 신빙할 수 없다는 지적이 대두되고도 있다.

 

어쨌든 우리나라의 이씨(李氏)는 중국에서 귀화해 온 몇몇 본(本)의 이씨(李氏)를 제외하면 거의 이알평(李謁平)의 후손에서 분관(分貫)한 것으로 되어 있다. 분관과 분파의 내력을 구체적으로 알아본다.

 

우선 시조 후손에서 이개(李開)를 시조로 하는 합천이씨(陜川李氏), 이위(李渭)를 시조로 하는 차성이씨(車城李氏)가 갈라졌다.

 

중시조인 이거명(李居明)의 후손에서도 몇 개의 관향이 나누어졌다. 이거명(李居明)의 증손 이윤장(李潤張)의 후손이 평창이씨(平昌李氏)로, 아우인 이윤원(李潤遠)의 후손이 가평이씨(加平李氏)로, 5세손 이주좌(李周佐)의 후손이 아산이씨(牙山李氏)로, 6세손 이우칭의 후손이 재령이씨(載寧李氏)로 분관되었다.

 

그리고 이양식(李陽植)의 후손이 우계이씨(羽溪李氏)로, 이임간(李林幹)의 후손이 장수이씨(長水李氏)로, 15세손 이전(李筌)의 후손이 덕은이씨(德恩李氏)로, 16세손 이자영(李自英)의 후손이 진위이씨(振威李氏)로, 17세손 이영행(李永倖)의 후손이 진주이씨(晉州李氏)로, 22세손 이반계(李攀桂)의 후손이 원주이씨(原州李氏)로 각각 분관되었다. 경주이씨의 결속력이 약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경주이씨는 또 고려말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을 배출하면서 삼한(三韓)의 명족으로 위치를 굳히게 되었으나, 17~21세손의 조상에서부터는 이들을 파조(派祖)로 하는 14개의 파가 나누어짐으로써 전체적인 결속력이 더욱 약화되기 시작했다.

 

종래의 분관(分貫) 대신 분파(分派)를 계속함으로써 그만큼 세력이 감소했기 때문이다. 경주이씨의 분파경위와 내용을 알아본다.

 

먼저 17세손인 이규의 후손이 평리공파(評理公派), 이관(李琯)의 후손이 이암공파(怡庵公派),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이 익재공파(益齋公派), 이지정(李之正)의 후손이 호군공파(護軍公派), 이천의 후손이 국당공파(菊堂公派), 이매(李邁)의 후손이 부정공파(副正公派), 이과의 후손이 상서공파(尙書公派), 이수(李蓚)의 동생이 사인공파(舍人公派)로 분파되었다.

 

그리고 15세손인 이강(李康)의 후손은 판전공파(判典公派), 21세손 이지수(李之秀)의 후손은 월성군공파(月城君公派), 19세손 이양오(李養吾)의 후손은 직장공파(直長公派), 이존오(李存吾)의 후손은 석탄공파(石灘公派), 이존중(李存中)의 후손은 진사공파(進士公派), 이존사(李存斯)의 후손은 교감공파(校勘公派)로 나뉘어졌다.

 

그리고 이 14대파(大派) 아래에서 다시 240여 개의 소파(小派)로 나뉘어져 전체 종중의 혈연관계는 더욱 희석되기 시작했다.

 

하나의 본관(本貫)과 하나의 파(派)로 면면히 이어져 오던 씨족이 갈기갈기 찢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14대파의 파명(派名)과 파조(派祖), 소파(小派)의 수는 다음 각 표와 같다.

 

 

 

경주이씨 14대파의 파명(派名)과 파조(派祖)

 

파     명

중시조로부터 대수

파   조

평리공파(評理公派)

16세손

이인정(李仁珽)

이암공파(怡庵公派)

17세손

이  관(李  琯)

익재공파(益齋公派)

이제현(李齊賢)

호군공파(護軍公派)

이지정(李之正)

국당공파(菊堂公派)

이  천

부정공파(副正公派)

이  매(李  邁)

상서공파(尙書公派)

이  과

사인공파(舍人公派)

이  수(李  蓚)

판전공파(判典公派)

15세손

이  강

월성군파(月城君派)

21세손

이지수(李之秀)

직장공파(直長公派)

19세손

이양오(李養吾)

석탄공파(石灘公派)

이존오(李存吾)

진사공파(進士公派)

이양중(李養中)

교감공파(校勘公派)

이존사(李存斯)

 

14대파에서 파생된 소파(小派)의 수 (243개 파)

14대파

소파(小派)의 수

14대파

소파(小派)의 수

평리공파

  26

사인공파

-

이암공파

-

판전공파

 3

익재공파

  12

월성군파

11

호군공파

  15

직장공파

-

국당공파

117

석탄공파

 1

부정공파

   5

진사공파

-

상서공파

  53

교감공파

-

 

 

앞에서 소개한 분파 중에서 가장 융성한 분파는 조선조 당시 상서공파(尙書公派)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집, 우리들의 파조(派祖)인 익재공파(益齋公派)의 익재 본인과 그 일문에 이어 조선조에서 일컬어지던 이른바 ‘8별(鼈)의 집’, 그리고 조선조의 명장 이완(李浣) 대장과 제18대 대한민국 대통령(李明博)을 배출한 국당공파(菊堂公派)를 들 수 있다.

 

경주이씨 상서공파(尙書公派) 백사(白沙) 이항복의 집에서는 조선조에서 영의정(領議政) 4명, 좌의정(左議政) 2명, 대제학(大提學) 2명이 나왔고, 익재공파는 고려조에서 익재공 이재현 자신을 비롯하여 문하시중(영의정) 4명, 조선조의 ‘8별의 집’에서 죄의정과 대제학 각 1명을 배출했으며, 국당공파(菊堂公派)의 정순공(靖順公 : 誠中) 후손에서는 좌의정 1명을 배출하였다.

 

 

 

상서공파(尙書公派) 백사 이항복(李恒福)의 초상

 

 

 

 

이하에서는 신라조(新羅朝)에서부터 조선조까지 당대의 왕조에 공헌한 경주이씨 출신 관리들의 면면을 살펴본다. 지면관계상 우리 문중의 직계 조상 중 몇몇 분들만 소개한다.

 

다른 분파에서는 시조로부터 50세까지는 어느 분파든 거의가 공통사항이라는 점을 감안하시면 도움이 될 것이다. 우선 시조에서부터 50대손 ‘핵’에 이르기까지의 계대와 관직을 알아본다.

 

경주이씨 ‘정묘보(丁卯譜)’ 상계(上系)편을 살펴보면 경주이씨의 중시조이자 필자의 37대조인 이거명(李居明)이 신라의 소판에 재직했었고, 아들 이금현(李金現)은 병부령(兵部令)과 각간(角干)을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소판이나 병부령은 신라시대에 성골과 진골만이 등용될 수 있는 관등(官等)과 관직이었다. 지금의 관직으로는 시․도지사와 국방부장관이라 볼 수 있다.

 

고려조에 와서는 신라 경순왕의 사위이자 필자의 35대조인 이금서(李金書)가 고려의 중원태수와 낭중(郎中)으로 관직에 진출했고, 34대조와 33대조는 각각 병정(兵正)과 정조시랑(正朝侍郞)을 지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고려조의 병정(兵正)은 향리직명이고, 정조시랑(正朝侍郞)은 고려 향직(鄕職)에서 정7품(正七品)의 관계(官階)이다.

 

패망한 신라의 유신들을 상위 품계에 등용하지 않으려는 고려 조정의 방침 때문에 이 당시에는 경주이씨 전체에서도 별다른 현직이 없었다. 두 분이 어느 군현(郡縣)에서 향직(鄕職)에 종사했는지도 알 수 없다.

 

카페지기의 32대조 이주복(李周復)도 고려조의 정6품 좌사간(左司諫)에 그쳤으나, 이후부터는 중앙관직에 재임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26대조 이선용(李宣用)과 25대조 이승고(李升高)의 경우도 고려의 향직(鄕職)인 군윤(軍尹)과 보윤(甫尹)으로 그쳤다.

 

필자의 직계 선조로 고려왕조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이는 22대조이신 이진(李瑱)과 그의 동생 이세기(李世基) 때부터다. 이진(李瑱)은 충렬왕(忠烈王) 6년에 친시문과(親試文科)에서 2등으로, 동생 이세기는 3등으로 합격했었다.

 

이 후 이진(李瑱)은 밀직승지(密直承旨), 전법판서(典法判書), 정당문학(政堂文學 : 고려·조선시대 관직으로 고려 문종(文宗) 때 정원은 1명, 품계는 종2품)을 거쳐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한 이후에는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으며, 충숙왕(忠肅王) 2년 지공거(知貢擧)를 거쳐 검교정승(檢校政丞)에 등용되었다가 임해군(臨海君)에 봉해졌다.

 

 

□ 파시조(派始祖)

 

경주이씨(慶州李氏)와 카페지기의 직계 조상 중 고려조(高麗朝)의 인물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瑱)의 아들로 고려 말의 대학자이자 외교가ㆍ문장가였던 21대조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1287년~1367년)이다. 고려 명신으로 일곱 임금을 섬기고 네 번이나 정승이 되었다.

 

우리나라 주자학(朱子學)의 개척자인 백이정(白伊正)에게서 수학한 후 충렬왕 27년 성균시(成均試)에 장원하고, 이어 15세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이하에서는 익재공(益齋公)이라 한다.

 

 

 

익재공 초상

 

 

 

 

 

고려조 제26대 왕인 충선왕(忠宣王)이 왕위를 물려주고, 원(元)나라 연경(燕京 ; 지금의 북경 ; 원나라의 수도)에 만권당(萬卷堂)을 세운 후 익재공을 불러들이자 바로 연경(燕京)에 가서 원(元)나라의 학자인 요수(姚燧)ㆍ기맹부 등과 함께 고전(古典)을 연구하였다.

 

당시 고려(高麗)는 드라마 ‘기황후(奇皇后)’에서도 그 일부가 그려진 바와 같이, 무려 100여 년간 당시의 몽골 오랑캐들이 지배하던 원(元)나라의 속국이 되어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던 시절이었다.

 

 

 

 

북한 개성에 있는 익재공 묘역의 신도비

 

 

(신도비(神道碑)란 임금이나 종2품 이상 벼슬아치의 무덤 앞이나

근처 길목에 세워 죽은 사람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碑石)을 말함)

 

 

 

 

 

어쨌든 익재공(益齋公)은 이러한 활약에 힘입어 이듬해에는 선부의랑(選部議郞)을 거쳐 성균제주(成均祭酒)가 되었고, 1316년에는 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에 승진하였다.

 

1319년에는 원(元)나라에 체재 중이던 충선왕(忠宣王)을 따라 중국의 강남(江南)을 유람했고, 이듬해에는 지밀직사(知密直事)에 올라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이 되었다.

 

이후 충선왕이 ‘빠이엔투그스(伯顔禿古思)’의 모략에 의해 토번(土蕃 ; 지금의 티베트)에 유배되자 원(元)나라의 조정에 그 부당함을 상소하여 유배에서 풀려나게 했었다.

 

이후에는 심왕(瀋王) ‘고(暠 ; 충선왕의 조카)’의 고려 왕위계승을 위한 오역사건으로 충숙왕(忠肅王 ; 고려 제27대왕)이 원나라에 잡혀가자 다시 연경에 가서 이를 해명하고 이듬해 귀국해서 향리(고려의 수도 개경 인근의 ‘금천’을 말한다)에 은거했다.

 

그리고 고려 제28대 왕인 충혜왕(忠惠王)이 원(元)에 잡혀갔을 때도 익재공(益齋公)은 원나라 조정에 글을 올려 사면을 청했다.

 

익재공(益齋公)은 충선왕이 아들에게 고려왕위를 물려주고 조카 ‘고(暠)’에게 심왕위(瀋王位)를 물려준 후 공민왕(恭愍王)이 즉위할 때까지 원(元)나라 정권에 의한 고려 왕위의 폐위와 복위가 반복될 때마다 일선에서 고려국의 왕위보전을 위해 눈부시게 노력한 충성의 인물이었다.

 

이후 익재공(益齋公)은 공민왕이 즉위한 뒤에는 우정승(右政丞)ㆍ권단정동성사(權斷征東省事)로 발탁,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을 지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동덕협의찬화공신(同德協議贊化功臣)에 오르고, 1353년에는 이를 사직했다가 다음 해 우정승으로 다시 임명되었고, 1356년에는 고려조의 최고 벼슬인 ‘1인지하 만인지상’인 문하시중(門下侍中 ; 조선시대의 領議政)에 올랐다.

 

이후 익재공은 관직을 사직하고 저술과 학문에 전심하다가 1362년 홍건적(紅巾賊)의 침입 때는 공민왕(恭愍王)을 청주로 호종(扈從)한 공로로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고, 만년에 은퇴한 뒤에는 왕명으로 실록을 편찬했으며, 공민왕 묘정(廟廷)에 배향(配享)되었다.

 

여기에서 ‘묘정(廟廷)에 배향한다’는 말은 임금이 죽으면 종묘(宗廟 ; 역대 임금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던 왕실의 사당)에 그 신주를 모시고 선왕들과 함께 제사를 지냈는데, 이때 그 임금의 생전에 공로가 특히 많은 신하가 임금보다 뒤에 죽으면 선왕의 묘정(廟庭)에 그 신주를 모신다는 뜻이다.

 

 

 

북한 개성시 장풍군 십탄리(현 황해북도 장풍군 십탄리) 익재공 묘소

 

 

(2008년 2월 13일 북한 민화협 초청으로 경주이씨 익재공파 대표단

228명이 익재공의 묘소를 방문, 성묘를 하기 위해 서울에서 갖고 간

음식물을 진설하고 있다)

 

 

 

익재공 묘소 원경

 

 

 

 

북한 개성의 익재공 생가터

 

 

 

 

 

우리들의 파시조(派始祖) 익재공(益齋公)은 또 당대의 명문장으로 외교문서에 뛰어났고, 저술에도 두각을 나타내어 민간가요(民間歌謠) 17수(首)를 한시(漢詩) 7언절구(七言絶句)로 번역한 ‘익재난고(益齋亂藁)’ 소악부(小樂府)를 저술하여 고려가요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남겼다.

 

이 외에도 ‘익재집(益齋集)’과 ‘역옹패설’ 등의 저서가 있으며, 그의 재능은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뛰어났다.

 

익재공(益齋公)이 원(元)나라에 체재하고 있을 때는 충선왕이 설립한 만권당(萬卷堂)에 있을 때의 일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하고 있다.

 

하루는 충선왕이 원(元)나라의 문인(文人)들과 더불어 시를 짓는데, 충선왕이 먼저 “닭울음소리는 흡사 문 앞 버들가지 같구나(鷄聲恰似門前柳)”라는 한 구절을 읊자 원나라 학사들이 그 출처를 물었다.

 

갑작스런 질문에 충선왕이 얼른 대답을 못하고 있는데 곁에 있던 익제공이 선뜻 응대하기를 “우리나라(고려)의 시에 ‘집 머리 동트는 날 닭울음소리 수양버들 휘늘어져 한들거리듯(尾頭初日金鷄唱 恰似水楊搖搖丈)’이라는 글귀가 있는데, 이는 닭울음소리가 가늘고 긴 것을 버들가지에 비유한 것이니, 전하(殿下)께서도 이 뜻을 취하심이요, 또 한퇴지(韓退之)의 싯귀에도 ‘뜬구름 버들가지처럼 뿌리도 꼭지도 없네(浮雲柳絮無根蒂)’라는 말이 있으니 이는 곧 소리를 버들가지로 나타낸 것이 아니겠소”하고 말하니 모든 사람들이 감탄했다고 한다.

 

이로부터 1천여 년 뒤 한말(韓末)의 한문학 대가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은 익재공(益齋公)의 시를 ‘공묘청준(工妙淸俊)하고 만상(萬象)을 구비한 조선 3천년의 제일 대가(大家)’라고까지 평가했다.

 

그리고 익재공(益齋公)이 일찍이 연경에 있을 때 원나라 화가 진감여(陳鑑如)가 그의 초상화를 그리고, 학자 탕병룡(湯炳龍)이 찬(讚)을 썼는데, 그 그림이 지금까지 전해져 국보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국보 110호로 지정된 익재공의 초상화

 

 

 

 

 

 

그러나 이토록 영명했던 익제공(益齋公)의 자녀들은 하나같이 비운의 생을 마치기도 했었다.

 

익재공(益齋公)의 아들 이달존(李達尊)은 아버지의 스승인 백이정(白伊正)의 사위가 되어 충숙왕 때 과거에 올라 전리총랑(典理摠郞)에 이르렀으나 28세로 요절했다.

 

그리고 익재공(益齋公)의 두 번째 부인인 수춘국부인 박씨(壽春國夫人 朴氏)의 소생으로 태어난 딸은 고려 제31대 왕인 공민왕(恭愍王)의 후비로 간택되었으나, 불행한 일생을 마쳤다.

 

공민왕(恭愍王)의 정비(正妃)인 노국대장공주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노국대장공주를 비롯하여 여러 재상들은 공민왕에게 명문가의 여식으로서 후비를 들일 것을 청하였다.

 

그렇게 해서 간택된 후비(后妃)가 익재공의 딸 혜비(惠妃) 이씨(李氏)로, 혜비는 1359년(공민왕 8년) 음력 4월 24일 왕비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막상 혜비(惠妃)가 들어오자 노국대장공주는 음식을 들지 않는 등 질투를 하기도 했었다.

 

1374년(공민왕 23년) 공민왕이 시해(弑害)된 후에는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어 정업원(淨業院, 현재의 청룡사)으로 들어가 여생을 승려로 지냈다.

 

 

 

공민왕

 

 

 

 

 

 

조정에서는 공민왕 사후에도 그녀를 비롯한 정비 안씨, 신비 염씨 등에게 계속 일용품을 지급하고 있었으나, 1388년(창왕 즉위년) 음력 12월 헌사(憲司)에서 그녀들이 정실(正室)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러한 일용품의 지급을 중단하고 세록(歲祿)만 지급케 하도록 청하였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된 후에는 여승이 된 혜비(惠妃)를 1408년(태종 8년) 음력 2월 3일 사망할 때까지 혜화궁주(惠和宮主)로 불리었다. 혜비(惠妃)가 사망하자 조선조 제3대왕인 태종은 쌀과 콩 30석, 종이 100권을 부의(賻儀)로 내렸다.

 

이때 혜비(惠妃)는 정업원의 주지로 있었는데, 그녀가 사망하자 조선조 조정에서는 의안대군(宜安大君, 태조 이성계의 8남)의 처 심씨를 대신 주지로 삼았다. 그녀의 능지(陵地)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다. 남편 공민왕과의 사이에서 자녀는 없었다.

 

우리들의 파조(派祖) 익재공(益齋公)의 따님이신 혜비(惠妃)와 관련해서는 지난 1983년, KBS 드라마 ‘개국’에서 배우 조남경이 혜비(惠妃)로 분한 대하드라마가 방송되었고, 지난 2005년~2006년에는 MBC 대하드라마 ‘신돈’에서 배우 문정희가 혜비(惠妃)로 분한 드라마가 방송된바 있다.

 

 

 

 

드라마 '신돈'에서의 혜비(문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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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파시조(派始祖) 익재공(益齋公) 이후 우리 문중의 직계 선대에서는 31대조 이칭, 30대조 이치연(李侈連), 29대조 이총섬(李寵暹)등이 연거푸 문하시중(門下侍中 ; 조선조의 영의정)에 등용되었다.

 

그리고 24대조 이득견(李得堅)이 종2품인 직장, 23대조 이핵이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등용되었고, 방계인 이강(李康)이 판전객사사(判典客寺事), 이인정(李仁挺)이 문하평리(門下評理), 이보림(李寶林)이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존오(李存吾)가 우정언(右正言), 이달충(李達衷)이 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역임함으로써 각각 분파조로 모셔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 문중의 직계 조상에서는 검교한성판윤(檢校漢城判尹)을 역임하신 판윤공(判尹公) 이지대와 그 후손 몇몇 분이 중앙직과 지방직에 등용되었을 뿐 이렇다 할 현직에 나아간 사람이 없다.

 

왕권(王權)을 탈취하기 위하여 척족과 충신을 살해한 세조(世祖)의 정치행각에 항거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기 때문에 관계진출 자체를 금기시했고, 사회 모든 분야에 연좌제(緣坐制)가 극성을 부리고 있을 때여서 왕(세조)에게 등을 돌리고 낙향한 역신(逆臣)의 후손들을 고위 관직에 등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연좌제(緣坐制)’란 특정한 사람의 범죄에 대하여 일가친척이나 그 사람과 일정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 연대 책임을 지고 처벌을 당하던 제도로 조선조에서는 주로 3촌의 근친이나 처첩(妻妾)에 한정되었다.

 

박정희 정권 때와 5공 때 특히 극심했는데, 1980년대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사실상 없어졌다고 하나, 아직도 그 잔재(殘在)가 남아있다고 본다. 어쨌든 예전에는 연좌제(緣坐制)로 인하여 능력 있는 사람도 직업 선택에서 많은 제약을 받았다.

 

이 때문에 익재공(益齋公)의 4대손인 판윤공 이후에는 판윤공의 아드님이신 16대조 이점(李點)이 향직인 부사(府使 ; 정3품)에 그쳤고, 15대조인 이원림(李元林)이 군수(郡守 ; 종4품관), 14대조인 이광증(李光曾)이 찰방[察訪 ; 각 도의 역참(驛站)을 관장하던 종6품의 외관직(外官職)]에 그쳤다.

 

이후 13대조 이승형(李升亨)이 진주병마절도사(晉州兵馬節度使 ; 병마절도사는 종2품 무관직), 12대조 이몽성(李夢星)이 공조참의(工曹參議 ; 참의는 정3품 문관직), 11대조 이후근(李厚根)이 음성훈도(陰城訓導 ; 훈도는 한양의 4학과 지방의 향교에서 교육을 담당한 교관)와 통정(通政 ; 정3품)으로 다소 격상되기도 했다.

 

이후 10대조 이이훈(李利薰)이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 9대조 이민화(李敏華)가 전연사봉사[典涓司奉事 ; 봉사는 돈녕부(敦寧府)와 각 시(寺)·사(司)·서(署)·원(院)·감(監)·창(倉)·고(庫)·궁(宮)에 설치된 종8품의 관직]를 역임한 이후부터 카페지기의 직계에서는 9대가 흐른 지금까지 벼슬길에 들어서보지 못하고 있다.

 

대신 방계(傍系)에서는 고종조에서 외부대신과 법부대신(法部大臣)을 역임한 후손도 있었고, 그 후손의 자손 중에서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陸軍參謀總長)과 국방장관(國防長官)을 지낸 인사도 있었지만, 이들이 지낸 벼슬은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일제(日帝)의 벼슬이었고, 친일(親日)에 따른 보상적 관직이었다.

 

친일분자들을 척결하기 위한 반민특위(反民特委 :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협력하면서 악질적으로 반민족행위를 저지른 사람을 조사, 처벌하기 위해 1948년 제헌국회 내에 두었던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도 일제 출신 군인과 경찰, 행정관리들을 신생 대한민국의 군과 경찰, 정부관리로 기용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반 반민특위적 우유부단의 덕분이기도 했다.

 

 

□ 입향조(入鄕祖)

 

 

우리 문중의 경주지역 입향조(入鄕祖 ; 한 고을에 처음으로 정착한 성씨의 조상)이신 판윤공(判尹公)은 고려 후기의 유명한 학자이자 정치가(고려 문하시중 : 조선조의 영의정)였던 파시조 익재공의 4대손이다. 이하에서는 ‘판윤공’이라 한다.

 

판윤공(判尹公)은 1394년(조선 태조 3년) 경상도 수군만호(水軍萬戶)로 재임하면서 왜구(倭寇)가 탄 배를 나포한 공적으로 왕으로부터 표창을 받았으며, 그 후 벼슬이 높아져 검교한성판윤(檢校漢城判尹)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전술한 대로 판윤공(判尹公)은 1452년(단종 즉위년)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인보 등을 죽이고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유배시키며, 단종 3년(1455) 조카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후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던 집현전 학사들(사육신 ; 死六臣)을 참살하자, 비분강개하여 관직을 버리고 경주부 외남면 남중리(慶州府 外南面 南中里 ; 지금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서면(斗西面) 구량리(仇良里) 860번지)로 낙향하였다.

 

이때 판윤공(判尹公)은 한성(漢城)에서 가져온 은행나무를 연못가에 심었는데, 이 은행나무가 1962년 12월3일 천연기념물 제64호로 지정된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서면 은행나무이다. 말대로라면 이 나무의 나이는 2014년도 현재 555년이 된 셈이다.

 

 

 

가을철 두서면 은행나무

 

 

 

 

 

높이 22m, 가슴 높이의 둘레가 12m에 이른다. 이 나무를 훼손하면 해를 입는다고 하고, 아들을 낳지 못한 부인들이 이 나무에다 정성껏 빌면 아들을 낳는다는 전설도 전하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신선하게 여겨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이 은행나무가 몇 차례 태풍으로 가지가 부러지는 등 불구가 되어 있다.

 

 

 

 

태풍으로 가지의 절반이 부러진 은행나무

 

 

(2003년 태풍 '매미'로 인해 수관의 절반 정도가 훼손되었다)

 

 

 

 

판윤공(判尹公)은 이때 은행나무를 심고 구량천이 마을 앞으로 흐르면 눌러 살고, 뒤편으로 흐르면 타지(他地)로 이거(移居) 한다는 방침을 정했는데, 이후 홍수로 마을 앞으로 흐르던 구량천의 수로가 마을 뒤로 바뀌자 지금의 경주시내로 이주하였고, 자신을 따라 낙향한 대소가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이때 판윤공(判尹公)께서는 시조의 탄강지이자 명활산(明活山)이 소재하는 지금의 경주시 동천동으로 이주하신 듯하다. 경주 명활산에 판윤공의 묘소가 있고, 사당(祠堂 ; 齋室)이 있기 때문이다.

 

 

 

경주시 명활산(明活山)의 판윤공파 입향조 판윤공(判尹公)의 묘소

 

 

(일황으로부터 '자작(子爵)과 남작(男爵) 칭호를 받은 그 잘난 직계 후손들은 모두 어디에 가고, 벗겨지고 일그러진 봉분에 잡초도 아닌 잡목이 무성하다. 비석에는 ‘경주이씨’가 아니고, ‘월성이씨’라고 새겨져 있다. 출세한 경주이씨가 아닌 촌부출신 월성이씨가 세운 비석이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 문중의 선대들은 구량리와 30여리 떨어진 지금의 경주시 외동읍 방어리(防禦里)와 괘릉리 일원으로 이주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거의가 그곳을 떠나고 말았다. 조상전래의 월성이씨들이 일제와 자유당 독재정권 시절에 걸쳐 신흥세력으로 발흥한 포악한 또 다른 ‘월성이씨’ 즉, 상민(常民)과 중인(中人) 출신의 이른바 똑똑하고 돈 많은 ‘경주이씨’들을 피해 정든 고향을 등진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월성이씨와 경주이씨의 관계는 뒤에서 다시 설명한다.

 

 

 

경주이씨 판윤공파의 입향조 이지대의 재실(齋室)과 묘소 위치도

 

 

(경주시 명활산, 그림의 '제실'이란 말은 ‘재실(齋室)’의 오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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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는 조선조에서 주요 벼슬을 역임한 선조들을 정리해 본다. 전술한 대로 경주이씨(慶州李氏)는 조선조에 8명의 정승, 3명의 대제학, 1백 78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다.

 

조선조에서의 경주이씨(慶州李氏)는 중엽 이후 특히 두드러졌는데, 카페지기의 21대조인 익재공(益齋公)의 7대손이 되는 이공린(李公麟)의 ‘8별(鼈)의 집’에서부터 비롯된다.

 

조선조 당시 경주이씨 가문 중 벌열에 오른 가문으로 상신(相臣)과 공신(功臣)들이 누구인지 먼저 알아본다. 여기에서는 정승(政丞)과 공신들만 알아본다.

 

 

 

경주이씨 출신 조선조 상신(相臣)

 

성 명

재임왕조

직 함

성 명

재임왕조

직 함

이항복

(李恒福)

선조조

영의정

(領議政

이태좌

(李台佐)

영조조

좌의정

(左議政)

이경억

(李慶億)

현종조

좌의정

(左議政)

이종성

(李宗城)

영조조

영의정

(領議政)

이   완

(李  浣)

현종조

우의정

(右議政)

이경일

(李敬一)

순조조

좌의정

(左議政)

이광좌

(李光佐)

경종조

영의정

(領議政)

이유원

(李裕元)

고종조

영의정

(領議政)

 

 

 

경주이씨 출신 조선조 공신(功臣)

 

성      명

재임

왕조

공적 사항

이   래(李   來)

태종조

2차왕자난 2등공신(二次王子亂 二等功

臣)

이승상(李升商)

태종조

2차왕자난 4등공신(二次王子亂 四等功

臣)

이흥상(李興商)

단종조

계유정난 3등공신(癸酉靖難 三等功臣)

이양생(李陽生)

세조조

이시애난 토벌 3등공신(李施愛亂討伐

三等功臣)

이철견(李鐵堅)

성종조

성종즉위 4등공신(成宗卽位 四等功臣)

이극정(李克正)

중종조

중종반정 3등공신(中宗反正 三等功臣)

이   손(李   蓀)

중종조

중종반정 3등공신(中宗反正 三等功臣)

이항복(李恒福)

선조조

정여립옥사 3등공신(鄭汝立獄事三等功

臣)·호성1등공신(扈聖一等功臣)

이사공(李士恭)

선조조

호성 1등공신(扈聖 三等功臣)

이정암(        )

선조조

임진왜란 2등공신(壬辰倭亂 二等功臣)

이수일(李守一)

인조조

이괄난 토벌 2등공신(李适亂討伐 二等

功臣)

이탁남(李擢男)

인조조

이인거 모반적발 2등공신(李仁居謀叛

摘發二等功臣)

 

 

 

‘8별의 집’ 얘기를 계속한다. 조선조에서 유명했던 ‘8별의 집’은 익재공(益齋公)의 후손으로 그의 7대손 되는 이공린(李公麟)의 일화에서 비롯된다.

 

이공린(李公麟)은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인 박팽년(朴彭年)의 사위이다. 장가든 첫날 방 그는 큰 자라가 나타나 ‘내 아들 8형제를 구해 달라’고 애원하는 꿈을 꾸었다.

 

꿈을 깨 신부에게 물으니 새 사위를 대접하려고 자라 8마리를 사다가 부엌에 두었다는 것이다. 이공린(李公麟)은 신부와 함께 자라의 새끼를 들어다 물에 놓아주었는데 그 중 한 마리는 죽고 말았다.

 

뒷날 이공린(李公麟)은 박(朴)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아들 여덟을 두었다. 오(鰲)ㆍ구(龜)ㆍ원ㆍ타 ㆍ별(鼈)ㆍ벽ㆍ경(鯨)ㆍ곤(鯤)이라고 거북구(龜)자 아니면 고기어(魚)자를 넣어 이름을 지었는데, 모두가 문장에 뛰어나 ‘8문장(文章)’으로 꼽혔다.

 

그런데 셋째 ‘원’이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 죽음으로써 첫날 밤 자라 한 마리가 죽은 것과 맞아 떨어졌다는 이야기다. 17대가 지난 지금까지 후손들은 자라를 먹지 않는 것을 가법(家法)으로 지켜온다.

 

이공린(李公麟)은 사육신(死六臣)사건으로 장인인 박팽년(朴彭年)이 죽은 후 그 죄에 연좌되어 30여년을 금고 당했다.

 

그러다가 성종조에 어머니 남양홍씨(南陽洪氏)가 절부(節婦)로 표창을 받음으로써 그 자식으로서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다.

 

성종 13년 무과를 거쳐 현령(縣令)이 되었으나, 셋째아들 ‘원’이 사화(士禍)에 연루되어 죽자 청주(淸州)에 유배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신원(伸寃)되고 청주(淸州)에 거주하다가 죽었다.

 

이구(李龜)는 성종 23년 문과에 급제, 좌랑(佐郞)이 되었으나 동생 원의 화(禍)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 후 다시 기용되어 교리(校理)ㆍ승지(承旨)ㆍ판결사(判決事)를 역임하고 충주목사(忠州牧使)가 되었다.

 

'이원'은 성종 20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검열(檢閱)이 되고 연산군 1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호조좌랑(戶曹佐郞)이 되었다.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봉상사(奉常寺)에 재직하면서 김종직(金宗直)에게 문충(文忠)이란 시호(諡號)를 주자고 건의(建議)한 일로 곽산(郭山)에 장류(杖流), 4년 후에 나주(羅州)로 이배(移配)되었다가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참형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신원되고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다.

 

이사균(李思鈞)은 중종조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연산군 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부수찬(副修撰)으로 재직하던 중 폐비윤씨(廢妃尹氏)의 복위(復位)를 반대하다가 보은(報恩)에 부처(付處)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교리(校理)에 오르고, 이듬해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였다. 을묘사화(乙卯士禍)로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사류(新進士類)가 축출된 후 부제학(副提學)에 올랐으나, 조광조(趙光祖) 일파라는 모함을 받아 좌천되었다.

 

그 후 공조참판(工曹參判)ㆍ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고 후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이몽량(李夢亮)은 명종 즉위 후 위사공신3등(衛社功臣三等)으로 광산군(廣山君)에 봉해졌다. 대사간(大司諫)ㆍ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ㆍ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거쳐 1557년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을 지내고 1559년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다음 해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1562년 형조판서(刑曹判書)를 거쳐 우참찬(右參贊)에 올랐다.

 

‘오성과 한음’의 일화로 유명한 오성대감 이항복(李恒福)은 상서공파(尙書公派)의 후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5차례나 병조판서를 역임하여 국난을 수습했고, 전후 정승에 올라 고개를 들기 시작한 당쟁(黨爭)을 조정하는데 전력한 그는 조선조 <4대 명재상>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은 선조 13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 관직에 나아가 1589년 예조정랑(禮曹正郞)으로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다스리고 평난공신3등(平難功臣三等)이 되었다.

 

도승지(都承旨)로 재직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왕(王)을 호종하고, 이조참판(吏曹參判)이 되어 오성군(鰲城君)에 봉해졌다.

 

형조판서(刑曹判書)로 도총관(都摠管)을 겸직, 다시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병조판서(兵曹判書)가 되었다. 이덕형(李德馨)과 명(明)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한편 전국에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했다.

 

선조 31년 우의정(右議政)이 되어 진주사(陳奏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오고, 1599년 좌의정(左議政), 다음 해 우의정(右議政)으로 전임, 도원수(都元帥)로 도체찰사(都體察使) 등을 겸직하고, 영의정(領議政)에 승진했다.

 

1602년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진봉(進封)되고, 2년 뒤 호성공신1등(扈聖功臣一等)에 봉해졌다.

 

광해군 때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를 극력 반대하다가 관직이 삭탈되고, 이듬해 북청(北靑)으로 유배되어 그 곳에서 죽었다. 죽은 그 해에 바로 복관(復官)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영조 때의 좌의정(左議政) 이태좌(李台佐), 소론(少論) 4대신의 한 사람인 이광좌(李光佐), 순조 때의 영의정 이경일(李敬一) 등이 모두 백사(白沙)의 후손이다.

 

이광좌(李光佐)는 숙종~영조 때 소론(少論)의 중진으로 40여 년 벼슬길에서 영의정을 세 번, 대제학을 세 번이나 역임했으며, 글씨와 그림에도 능했다. 문집 ‘운곡실기(雲谷實記)’가 전한다.

 

이광좌(李光佐)의 8촌 형인 이태좌(李台佐) 또한 소론(少論)인데, 영조 때 좌의정에 올라 형제가 어깨를 나란히 하여 노론(老論)과 맞섰다.

 

그의 아들 이종성(李宗城)이 뒤를 이어 좌의정을 지내고 영의정에까지 이르렀는데, 이 무렵에 조선조에서 경주이씨(慶州李氏)가 가장 성시(盛時)를 누렸다.

 

국당공파(菊堂公派)에서는 병자호란(丙子胡亂) 뒤 효종ㆍ송시열(宋時烈)과 함께 북벌을 계획했던 이완(李浣)대장이 가장 걸출하다. 벼슬은 좌의정을 지냈는데, 조선조에서 무인(武人)으로 재상에 오른 사람은 7명 뿐이다.

 

국당공(菊堂公)의 파조인 국당공(菊堂公) 이천은 아들이 4형제[경중(敬中)ㆍ배중(培中)ㆍ달충(達衷)ㆍ성중(誠中)]였는데, 그 중 성중(誠中)이 조선원종개국공신이 되어 검교좌정승(檢校左政丞)을 지냈다. 그의 6대손이 바로 이완(李浣)이다.

 

이완(李浣)은 인조 2년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관직에 나아가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인조 21년 경기도수군절도사(京畿道水軍節度使)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겸임하였다.

 

효종이 송시열(宋時烈) 등과 북벌(北伐)을 계획하자 효종 3년 어영대장(御營大將)으로 발탁되고, 다음 해 훈련대장(訓練大將)이 되어 신무기(新武器)의 제조(製造), 성곽(城郭)의 개수(改修)ㆍ신축(新築) 등으로 전쟁준비를 서둘렀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내고, 훈련대장(訓練大將)에 재임되었으나 1659년 효종이 죽어 북벌(北伐)계획이 중지되었다. 1673년 포도대장(捕盜大將)을 거쳐 이듬해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이완(李浣)의 아버지 이수일(李守一) 역시 이름난 무장으로 함경도병마절도사(咸鏡道兵馬節度使)를 세 차례나 역임하면서 여진(女眞) 토벌에 공이 많았다.

 

이괄(李适)의 난(亂)이 일어나자 부원수로 도원수 장만(張晩)과 함께 경기도 시흥시 길마재(안현(鞍峴) 전투에서 반군을 격파한 공을 세워 공신에 올랐으며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다. 벼슬은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다.

 

국당(菊堂)의 맏아들 경중[敬中 ; 고려ㆍ판병부사(判兵部事)]의 후손에서는 손자 정보가 세종 때 청백리(淸白吏)에 올랐고, 정보의 후손에서 이정암[선조조ㆍ대사간(大司諫)]ㆍ이정형[李廷馨 ; 선조조ㆍ대사간(大司諫)]형제가 명신으로 꼽혔다.

 

정암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을 일으켜 곳곳에서 무공을 세웠다. 그의 동생 이정형(李廷馨)은 성리학의 대가로 형과 함께 임란(壬亂)에 의병장으로 활약했고, 이조참판(吏曹參判)ㆍ대사헌(大司憲)을 지냈다. ‘동각잡기(東閣雜記)’, ‘지퇴당집(知退堂集)’ 등의 저서가 남아 전한다.

 

오천(梧川) 이종성(李宗城)은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내고, 장조(莊祖)(장헌세자(莊獻世子)묘정에 배향되었다.

 

영조 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영조 4년 경상도암행어사(慶尙道暗行御史)가 되어 민폐를 일소하였다.

 

영조 12년 이조판서(吏曹判書)로 탕평책(蕩平策)을 반대하다가 파직되었으나, 다시 기용되어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ㆍ도승지(都承旨)ㆍ형조판서(刑曹判書) 등을 지내고, 영조 20년 다시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다.

 

영조 28년 좌의정(左議政)에서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가 사직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죽었다. 성리학(性理學)에 밝고 문장에 뛰어났다.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李裕元)은 대원군(大院君)에 맞선 보수정치가로 대원군(大院君)의 개혁정치에 반대하고 파직 당했다가 대원군(大院君) 실각 후 영의정이 되어 대원군(大院君) 공격의 선봉이 되었다.

 

1882년 운양호(雲揚號)사건으로 일본세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문호를 열게 될 때 전권대신으로 제물포(濟物浦)조약에 조인했다.

 

글씨에 일가를 이루었는데 특히 예서(隸書)를 잘 썼고, ‘임하필기(林下筆記)’, 귤산문고(橘山文稿)‘ 등 저술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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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왕조(王朝)에서 우리 문중의 분파를 비롯하여 기라성 같은 명현(名賢)과 충신들이 부지기수였지만, 2천년의 문중역사를 갖고 있는 경주이씨는 그 긴 역사와 240여개의 분파로 분산되어 응집력이 약화된 때문인지는 몰라도 대다수 종중(宗中)들이 문중에 대한 애착이 거의 소멸되어 종씨(宗氏)관계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는 추세다.

 

카페지기뿐만 아니라 모든 문중원들이 마찬가지다. 그래서 객지에서 항렬이 같은 경주이씨를 만나도 ‘타성받이’ 보듯 할 뿐이다. '월성이씨'와 '경주이씨' 사이가 특히 그렇다.

 

최근 들어 일부 종친들 사이에서 서로 ‘왕손(王孫)’이니, ‘왕족(王族)’이니 하면서 ‘신소리’들을 늘어놓기도 하나, 씁쓸할 뿐이다. 경주이씨에서 대통령(이명박)이 나왔으니 ‘왕손’과 ‘왕족’이 아니냐는 것인데 오히려 역하게만 들린다.

 

2,188년(2014년 현재)의 긴 씨족역사를 지니고 있는 경주이씨는 세습왕조의 군왕을 배출한 일부 성씨를 제외하고는 신라조(新羅朝) 이후 역대 왕조에서 공신(功臣)과 명현(名賢)의 반열을 그 어느 성씨보다 혁혁하게 이어 오기도 했었다.

 

그러나 일부 선조의 경우 권력 지향적 변절(變節)과 반민족적 매국행위(賣國行爲)에 가담한 인사들도 있어 마음이 무거워 지고,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조선 초기에 현직(顯職)에 오른 한 선조(후손들의 입장을 고려하여 실명을 밝히지 않는다. 이하 다른 이의 경우도 같다)의 경우 고려조에서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를 지냈으나, 조선 개국 후 이방원(李芳遠)을 도와 ‘제2차 왕자(王子)의 난(亂)’을 평정, 태종(太宗) 즉위 후 좌명공신2등(佐命功臣二等)으로 계성군(鷄城君)에 봉해졌다.

 

이후 1407년에는 경연관(經筵官)을 거쳐 좌빈객(左賓客)을 지낸 후 1408년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겸 판경승부사(判敬承府事)에 이르러 태종의 묘정에 배향되는 등 승승장구의 족적(足跡)을 남겼다.

 

권력에 눈이 어두워 수많은 고려유신(高麗遺臣)들과 척족까지 살해한 폭군의 정변에 스스로 가담하여 벼슬을 지낸 것이다.

 

조선조 고종 당시 증광문과(增光文科)에 장원, 부교리(副校理), 부수찬(副修撰), 응교(應敎)등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검상(檢詳), 필선(弼善), 교수(敎授), 병조정랑(兵曹正郞), 우승지(右承旨) 등을 역임한 바 있는 한 어른도 1910년(융희 4년) 한일합방이 되자 일제에 의해 남작(男爵)으로 임명되어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응원하였다.

 

역시 고종조에서 외무아문주사(外務衙門主事),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등을 역임하고, 주미공사관 서기관(書記官), 현감(縣監), 외무아문참의(外務衙門參議), 승정원우부승선(承政院右副承宣), 회계원장(會計院長), 주일전권공사(駐日全權公使), 특진관(特進官), 찬정(贊政), 외부대신(外部大臣), 법부대신(法部大臣) 등을 지낸 한 어른은 1910년 한일합방이 이루어지자 일제에 의해 자작(子爵)으로 임명되어 조선총독부의 어용자문기관인 중추원(中樞院) 고문(顧問)을 지냈다. 자랑이 아니라 너무나 치욕스럽다는 얘기다.

 

이 어른이 일본천황으로부터 하사 받은 자작(子爵)은 다섯 등급으로 나눈 귀족의 작위 가운데 넷째 작위로 백작(伯爵)의 아래, 남작(男爵)의 위쪽이다.

 

백작(伯爵)은 다섯 등급으로 나눈 귀족의 작위 가운데 셋째 작위로 후작의 아래이고, 자작(子爵)의 위이다. 그리고 남작(男爵)은 다섯 등급으로 나눈 귀족의 작위 가운데 다섯 번째 작위를 말한다.

 

일제에 의해 자작(子爵)이 된 그 어른은 카페지기와 같은 ‘판윤공파’의 후손이다. 어쩌다 이런 사람이 카페지기의 선조(先祖)가 되었는지 기가 막힐 일이다. 비록 직계선조는 아니라도 말이다.

 

그의 아들도 자작(子爵) 작위를 습작(襲爵 ;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작위(爵位)를 이어서 받음)했고, 일제(日帝)를 축출하고 탄생한 대한민국의 육군참모총장과 국방장관을 지낸 그의 손자도 친일인명사전(親日人名辭典)에 수록되어 있다.

 

이뿐인가. 지난 자유당(自由黨) 시절 종중의 중앙화수회(中央花樹會) 총재를 역임한 한 어른까지 친일혐의를 뒤집어쓰고 있으니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익재공과 판윤공(判尹公)의 후손인 이 분은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 서명자 33인 중의 1인인데, 후에 변절하여 친일밀정(親日密偵) 노릇을 했다는 의구심으로 사후 논란이 많은 상태이다.

 

수양대군(首陽大君)의 폭정에 비분강개하여 비록 명예직이었지만, 한성판윤(漢城判尹 ; 지금의 서울시장)의 관직조차 버리고 천여 리의 경주부(慶州府)로 낙향해 버린 입향조 판윤공(判尹公)의 우국충정을 털끝만큼이라도 닮았으면, 이런 짓들은 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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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앞서 소개한 대로 근세의 인물 중 왜놈들의 침략행위에 맞서 구국투쟁(救國鬪爭)을 하다가 불행하게 순절한 애국지사(愛國志士)들도 부지기수였다.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우리가 잘 아는 ‘헤이그 밀사사건’의 이상설(李相卨), 그리고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1867년 4월 21일 ~ 1932년 11월 17일) 일가를 들 수 있다.

 

경주이씨 후손 이상설(李相卨)은 189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여러 요직(要職)을 거쳐 1904년 법부협판(法部協辦)이 되고, 이어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에 올랐다. 이해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자결(自決)을 시도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실패했다.

 

1907년 화란(和蘭)의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가 열리자 고종의 밀지(密旨)를 받고 이준(李儁)ㆍ이위종(李瑋鍾) 등과 함께 헤이그에 가서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려 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거부당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성명회(聲鳴會)를 조직하여 합방의 부당성을 통박하는 성명서를 각국에 발송하는 등 독립운동에 전력했다.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大韓民國建國功勞勳章) 복장(複章)이 수여되었다.

 

 

 

 

자랑스러운 경주이씨의 후손 독립운동가 이상설(李相卨)

 

 

 

 

 

 

그리고 독립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로 알려진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일가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전 재산과 지위, 생명까지 포기하며 명실 공히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현했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주’(프랑스어 : Noblesse oblige)란 프랑스어로 “귀족성은 의무를 갖는다”를 의미한다.

보통 부(富)와 권력(權力), 명성(名聲)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함께 해야 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사회지도층에게 사회에 대한 책임이나 국민의 의무를 모범적으로 실천하는 높은 도덕성(道德性)을 요구하는 단어이다.

 

 

 

 

자랑스러운 경주이씨의 후손 독립운동가 이회영(李會榮)

 

 

 

 

 

 

본론으로 돌아간다. 이회영(李會榮)은 조선조 고종(高宗) 시절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의 넷째아들로, 세칭 삼한갑족(三韓甲族, 신라·고려·조선 3조에 걸쳐 대대로 문벌이 높은 집안)으로 불리는 경주이씨 백사공파의 후손이다.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이항복(李恒福)의 11세손인 이회영(李會榮)은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투사를 양성하다가 여순(旅順)감옥에서 삶을 마쳤다.

 

이회영(李會榮)은 구한말(舊韓末) 일제에 나라가 넘어가자 독립운동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新民會)를 결성했고, 이후 44살의 나이에 형제와 가족들을 설득, 만주(滿洲)로 집단 망명했다. 국외에 독립운동기지(獨立運動基地)를 세우기 위해서였다.

 

형인 건영, 석영, 철영 동생인 시영, 호영 가족이 모두 망명(亡命)에 참여했고, 독립운동도 함께 했다. 이들이 막대한 가산(家産)을 정리해 마련한 독립운동자금(獨立運動資金)은 당시 돈으로 40만원(현재가치 600억원 이상)이었다.

 

이회영(李會榮) 일가는 중국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로 이동하여 이동녕, 이상룡 등 집단 망명가(亡命家)들과 함께 1911년 민단(民團) 성격의 자치기관인 경학사와 신흥강습소(후일 신흥무관학교로 개칭)를 설립했다.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는 전략, 전술, 총검술, 격검 등을 교육하며 1919년 11월 안도현 삼림지역으로 이동할 때까지 3500명의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들을 길러냈고 청산리전투, 봉오동전투 등 무장독립투쟁을 치러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김좌진(金佐鎭)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과 함께 청산리대첩에 참여했고, 그 결과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6일간 일본군(日本軍) 1만2,000여명을 사살하는 성과를 냈다.

 

 

 

 

김좌진(金佐鎭 : 1889-1930)

 

 

(독립운동가, 북로군정서 총사령)

 

 

 

 

이회영(李會榮)의 조카 이규준과 아들 이규학도 신흥학우단을 중심으로 행동조직 ‘다물단’을 조직, 일본 밀정을 암살하는 등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나 이회영(李會榮) 일가는 독립운동을 위해 재산과 지위, 생명까지 모두 희생해야 했다. 이회영은 김규식, 신채호, 안창호, 김창숙, 조소앙 등 독립운동가들에게 숙소와 식사를 제공하는 등 끊임없이 독립운동(獨立運動) 자금을 댔었고, 결국에는 상인들의 빚 독촉과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이회영(李會榮)과 함께 활동했던 정협섭은 “우당 이회영 집을 찾아갔더니 여전히 생활이 어려워 식구들의 참상은 말이 아니었다”며, “끼니도 굶은 채 누워있었다”고 전했다. 600억 원의 거부(巨富)와 그의 가족들이 끼니를 굶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이회영(李會榮)의 여섯 형제 중 다섯은 독립운동을 하다 고문사하거나 굶어 죽었고, 이회영은 1932년 11월 66세의 나이로 중국 여순(旅順) 감옥에서 고문사(拷問死)했다.

 

그리고 둘째 석영은 1934년 상하이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세상을 떠났고, 셋째 철영은 1925년에, 여섯째 호영은 1933년에, 첫째 건영은 1940년에 세상을 떠났다. 모두 굶어 영양실조(營養失調)로 죽은 것이다.

 

많은 역사가들은 망국(亡國)과 동시에 만주(滿洲) 지역에서 조직적인 독립운동이 있었던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이회영(李會榮) 일가 등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 때문이라고 말한다.

 

삼한(三韓) 갑족(甲族) 출신들이 지금 가치로 최소 600억 원이나 되는 전 재산을 모두 독립운동에 바치고, 먹을 것이 없어 거의가 굶어 죽은 것이다. 이 정도면 경주이씨(慶州李氏) 다운 애국자(愛國者)들이 아니겠는가.

 

간악한 일제(日帝)의 앞잡이가 되어 호의호식하며 살고자 일제의 자작(子爵)으로 조선총독부의 중추원(中樞院) 고문(顧問)을 지내거나, 그 자작(子爵) 작위를 습작(襲爵)하여 대한민국의 육군참모총장과 국방장관을 지낸 무리들과는 같은 경주이씨지만, 종자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6형제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이시영(李始榮)은 한말(韓末)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의 사위였다. 28세에 평안도관찰사를 지낸 그는 일제(日帝)에 나라가 망하자 그의 형 이회영과 함께 만주(滿洲)로 망명, 유하현(柳河縣)에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세워 독립군(獨立軍)양성에 힘썼다.

 

1919년 상해(上海) 임시정부(臨時政府)가 수립되자 법무총장(法務總長)ㆍ재무총장(財務總長)을 역임하였다. 1939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창당에 참가, 감찰위원장(監察委員長)에 피선(被選), 1933년 임시정부(臨時政府) 국무위원(國務委員) 겸 법무위원(法務委員)이 되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귀국, 대한독립촉성회(大韓獨立促成會) 위원장(委員長)을 지냈고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부통령(副統領)에 당선되었으나 대통령 이승만과 정치노선이 달라 1951년 물러났다.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大韓民國建國功勞勳章)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자랑스러운 경주이씨의 후손 독립운동가 이시영(李始榮) 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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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독립운동가 경주이씨 후손 이상용(李相龍)은 한일합방 직후 만주(滿洲)로 망명하여 유하현(柳河縣)에서 양기탁(梁起鐸), 이시영(李始榮) 등과 함께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치, 2세 교포의 교육과 군사훈련을 행하였고, 1912년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여 단장(團長)이 되어 교포 계몽에 힘썼다.

 

3ㆍ1운동 때는 한족회(韓族會)를 조직, 동포들의 자치활동(自治活動)에 힘쓰는 한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조직에 참여하여 그 독판(督辦)이 되고, 1926년에는 임시정부(臨時政府) 국무령(國務領)이 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大韓民國建國功勞勳章)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근년에 작고한 애산(愛山) 이인(李仁)도 독립운동에 기여한 경주이씨 후손이다. 일제(日帝)하 변호사로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변호했고,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 한글학회)사건 때는 회원으로 그 자신이 붙들려가 4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는 제헌국회의원, 대법원장 직무대리, 검찰총장, 법무부장환, 반민특위위원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대한민국 건국에 이바지했었다.

 

1960년 참의원을 끝으로 일선에서 물러나야 했던 애산(愛山)은 몇 해 전 돌아가며 자신의 재산을 모두 <한글학회>에 기증하였다.

 

 

자랑스러운 경주이씨의 후손 독립운동가 이인(李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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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우리 경주이씨는 오랜 역사와 더불어 수많은 명현(名賢)과 애국지사(愛國志士)를 배출하였으나, 이제는 종씨와 종손(宗孫)의 개념도 빛이 바래고 사라지고 없어졌다.

 

양반출신과 종손들은 고향과 조상의 무덤을 지키고 가업(家業)을 잇느라 모두 몰락해 버렸고, 상민(常民)이나 중인(中人) 출신들이 유학을 가고, 대처(大處 ; 도시)로 나가 출세하고 돈을 벌어 재벌이 되고, 유명인이 되어 경주이씨를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경우 성씨에 상관없이 고향과 종가(宗家)를 지키면서 명맥만 이어 오는 일부 종손들의 고루한 사고(思考) 역시 종중들로 하여금 종씨와 종가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퇴색시켜 버린 원인이 되고 있다.

 

특히 경주이씨(慶州李氏)의 경우 거대한 문중의 세력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일부 기업인이나 정치인들이 시조의 제사를 주관하는 등 정치적 관심을 보인바있으나, 대다수 종중(宗中)들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혈족으로서의 유대가 사실상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작고한 삼성그룹의 총수(總帥) 이병철씨나, 1980년대 후반 신한민주당(新韓民主黨) 총재를 역임한 이민우(李敏雨)씨, 현재 경주이씨 중앙화수회 총재로 재임중인 이종찬(李鍾贊)씨 등이 한 때 문중의 힘을 이용하려는 어눌한 시도를 한바 있었지만, 그들 또한 죽고 몰락하여 이제는 그런 움직임도 사라지고 없어졌다.

 

지난 2007년 5월 3일 경주 표암봉 시조 제향(祭享)에서 초헌관(初獻官)에 봉해졌던 이명박(李明博) 전 대통령(당시는 대통령 후보)이 옛 영화의 한 순간을 재현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또한 시조 제향(祭享)의 초헌관(初獻官)을 맡는 등 정치적인 운신에 공을 들인 것은 사실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경주이씨 국당공파(菊堂公派) 후손으로 카페지기보다 한 항렬 낮은 ‘상(相)’자 항렬이다. 원래 호적명을 이상정(李相定)으로 등재했다가 이명박(李明博)으로 바꿨다는데, 왜 그렇게 해야 했는지, 과연 그럴 필요성이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항렬자(行列字)를 따르고 싶지 않았거나, 항렬자를 쓸 수 없는 신분이었거나, 둘 중의 한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2007년 5월 3일 경주이씨 표암재(瓢巖齋)

시조 추모 제향에서의 이명박 당시 대통령후보

 

 

 

 

 

경주이씨(慶州李氏) 중앙화수회 역대총재 중에도 항렬자를 쓰지 않은 이들이 많다. 초대 이시영(李始榮 : 초대 부통령) 총재와 7~8대 이상철(李相喆 : 전 국회의장), 13대 이민우(李敏雨 : 전 신한민주당 총재), 14대부터 현재까지 연임하고 있는 이종찬(李鍾贊 : 전 국정원장)씨 등은 항렬자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2~3대 이인(李仁 : 초대 법무부장관), 4~6대 이갑성(李甲成 : 3․1운동 민족대표, 전 민의원), 9~12대 이병철(李秉喆 : 전 삼성그룹 회장) 총재 등은 반상(班常)의 구별이 엄존했던 그 시기에 항렬자를 안 쓰거나, 못 쓴 축에 속한다.

 

화제를 바꾼다. 앞에서 기술한 월성이씨와 경주이씨(慶州李氏)와의 관계를 설명한다. 경주이씨는 아직까지 ‘월성이씨’로 혼용되어 일반 국민들에게 혼선을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혼선은 조선조 방목(榜目)과 우리나라 역대 인물란에서 경주이씨(慶州李氏)와 ‘월성이씨’를 다른 성씨인 것처럼 분리한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이때 경주이씨와 월성이씨를 타성으로 분류한 것은 잘못된 분류였다. 경주이씨가 월성이씨였고, 월성이씨가 경주이씨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여러 문헌들에도 경주이씨를 월성이씨라고 표기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지금도 경주이씨(慶州李氏)의 발상지인 경주(慶州)는 물론 인접한 포항(浦項), 경산(慶山), 영천(永川), 울산(蔚山) 등지에서는 경주이씨를 월성이씨라고 부르는 이들이 많다.

 

이를 통일하기 위하여 경주이씨 중앙화수회(中央花樹會)에서는 지난 1979년, ‘월성이씨’와 ‘경주이씨’를 ‘경주이씨(慶州李氏)’로 통일하기로 결의한바 있으나,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시조의 출생지이자 관향(貫鄕)인 경주지방의 ‘경주이씨’들 조차 자신들의 본관을 ‘월성이씨’라고 칭하는 이들이 많다.

 

비록 몰락하기는 했으나, ‘월성이씨’라는 관명(貫名)은 조상대대로 세거지(世居地)를 지키고 있는 종손(宗孫)들이 주로 쓰는 명칭이고, ‘경주이씨’라는 관명은 종손이 아닌 차손(次孫)이나 서자(庶子)들로 유학을 하고 대처(大處 ; 도시)에서 부를 축적하여 출세한 이들이 주로 사용하는 관명(貫名)이기 때문이다.

 

맏이로 태어나 조상의 묘역(墓域)을 지키느라 도회지로 진출하지도 못하고,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한 종손(宗孫)들은 ‘월성이씨’를 아직까지 고집하고 있다.

 

그러나 조상을 모시지 않아도 되는 차남이하 자손들이나, 서자(庶子) 또는 중인이나 상민(常民)출신 종중(宗中)들은 일찍이 도회지로 진출하여 돈을 벌고 공부를 하여 출세하면서 자신들을 홀대하고 구속하던 틀을 벗어나기 위해 조금은 신식에 속하는 ‘경주이씨(慶州李氏)’라는 관명을 만들어 전래시켜 온 것이다.

 

어쨌든 월성이씨(月城李氏)와 경주이씨(慶州李氏)의 서로 다른 관명(貫名)은 그때그때 바뀐 경주의 지명에 따라 바뀌어 왔고, 지방에 따라서는 옛 명칭이 지금까지 그대로 잔존(殘存)해 오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지명 변경에 따른 유래를 다시 알아본다.경주이씨(慶州李氏)와 월성이씨(月城李氏)는 동일한 가문의 서로 다른 명칭이다.

 

경주이씨는 서두에서 소개한 대로 신라초기에는 ‘급량부이씨’ 로 불리었고, 고려시대에는 ‘계림이씨’, ‘월성이씨’, ‘경주이씨’ 등으로 불렸으며, 조선시대에는 ‘경주이씨’와 ‘월성이씨’를 혼용하였다.

 

이것은 ‘월성이씨(月城李氏)’가 ‘경주이씨(慶州李氏)’의 분적종(分籍宗)이라서가 아니라 같은 가문을 본관(本貫)의 지명을 따라 그때마다 다르게 부르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는 다른 성씨에서도 흔하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로는 전주(全州)이씨를 완산(完山)이씨로, 밀양(密陽)박씨를 밀성박씨로, 진주(晉州강)씨를 진양(晉陽)강씨 혹은 진산강씨(晉山姜氏) 등으로 부르는 경우와 같다.

 

다만, 경주를 본관으로 하는 가문들 중에서 경주(慶州)김씨와 월성(月城)김씨, 경주(慶州)최씨와 월성최씨, 경주(慶州)박씨와 월성(月城)박씨는 서로 다른 가문이다.

 

이들 가문은 본종(本宗)과 분적종(分籍宗)의 관계이다.이에 비해서 경주(慶州)정씨와 월성(月城)정씨, 경주(慶州)손씨와 월성(月城)손씨, 경주(慶州)석씨와 월성(月城)석씨 등은 동일한 가문의 서로 다른 명칭이다.

 

경주이씨(慶州李氏)는 경주의 지명이 시대에 따라 변천됨으로 인해서 그 명칭도 변화하였다. 예로부터 경주이씨(慶州李氏)를 월성이씨(月城李氏)라고 하는 것은 경주의 고호(古號)가 월성(月城)이기 때문이다.

 

 

 

'월성이씨' 비석과 '경주이씨' 화환

 

 

 

 

 

(중시조 소판공 양호단에서의 향제에 '경주이씨' 유력인사들이 보낸

화환이 늘어서 있다. 비석에는 '월성이씨'라고 조각되어 있고, 화환

에는 '경주이씨'로 기재되어 있다. 비석은 촌부출신 '월성이씨'들이

세워두고, 화환은 귀족 출신 '경주이씨'들이 세워 놓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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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우리 경주이씨(慶州李氏)는 이런저런 이유로 본관(本貫)의 통일도 제대로 되지 않고 있지만, 일부 종중(宗中)에서는 이름을 지을 때 항렬자를 쓰지 않는 경우도 많다.

 

60∼70대 이상의 남성들 중에는 항렬자(行列字)를 쓰고 싶어도 쓰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서자(庶子)나 중인(中人)과 상민(常民)에 속하는 종중(宗中)들은 항렬자를 쓰지 못한 경우가 많고, 종중에 대하여 특별한 감정을 갖고 있는 이들은 조상전래의 항렬자(行列字)까지 버리고 엉뚱한 이름을 작명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종중(宗中)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은 이들이나, 반감을 가진 이들도 자신의 후대부터는 항렬자를 따르지 않도록 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루한 씨족관념에 대한 무언의 항거(抗拒)라고 볼 수도 있다. 6.25 전까지는 ‘상놈’이나 서자(庶子)의 자식들은 항렬자(行列字)를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었다.

 

물론 당시의 ‘상놈’이나 그 자식들은 족보(族譜)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고, 출생신고를 해 주는 이가 없어 호적부(戶籍簿)에도 오르지 못해 항렬자 자체가 필요치도 않았다. 성(姓)도 ‘항렬자’도 없이 그냥 ‘마당쇠’나 ‘돌쇠’, ‘언년이’, ‘끝분이’로 불리면 되었다.

 

전술한 대로 ‘경주이씨(慶州李氏)’ 중앙화수회 역대총재 중에도 2~3대 총재인 이인(李仁 : 초대 법무부장관), 4~6대 이갑성(李甲成 : 3․1운동 민족대표, 전 민의원), 9~12대 이병철(李秉喆 : 전 삼성그룹 회장) 총재 등이 항렬을 따르지 않았거나 못했다.

 

그리고 현재의 고문 중에도 이익순(李翼淳) 부일한의원장, 이훈동(李勳東) 조선내화그룹회장, 이근양(李根陽) 대한석탄공사사장, 이두학(李斗鶴) 중앙새마을금고협의회장, 이만섭(李萬燮) 전 국회의장 등이 항렬자를 따르지 않고 있다.

 

이명박(李明博) 전 대통령 역시 항렬자는 '상(相)'자 이지만, 무슨 사연으로 항렬자를 안 따른 것인지, 못 따른 것인지 구체적인 내용을 알지 못하고 있다.

 

어쨌든 어느 땐가 월성이씨가 경주이씨(慶州李氏)로 정리가 될 수도 있겠지만, ‘먹고 살기도 바쁜데 그 따위 것이 뭐 대수냐’는 무관심이 팽배(彭排)하고 보니 통일이 잘 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본관을 기재하는 족보(族譜)도, 호적부(戶籍簿)도 모두 없어져 버렸으니 더욱 그럴 것이다. 카페지기도 가끔은 카페지기의 성씨와 본관을 ‘월성이씨’라고 소개하고 있다. 상대방이 연륜이 있어 보이고, 뭔가를 좀 아는 듯해 보일 때 쓰는 말이다.

 

 

 

 

경주이씨 표암재 전경(경주시 동천동 산16)

 

 

 

 

 

 

여기에서 카페지기의 직계 종친인 경주이씨 판윤공파(判尹公派) 파조(派祖)인 판윤공의 생애를 좀 더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판윤공(判尹公)은 경주이씨 중시조(中始祖) 이거명(李居明)의 21세손이며, 익재공의 현손(玄孫 ; 5대손)으로 이름은 지대(之帶 : 이하 ‘공(公)’이라 한다), 호는 죽은(竹隱)이다.

 

족보에는 공(公)의 생존 시의 관직이 검교한성판윤(檢校漢城判尹)으로 되어 있으나, 조선조 한성판윤 역대명단을 살펴보면 공(公)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검교한성윤자(檢校漢城尹者)’ 즉 ‘명예한성판윤(名譽漢城判尹)’을 역임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공(公)의 명예직 한성판윤 역임사실도 그의 재임 시로부터 552년이 지난 2005년 10월 그를 추모하는 시향(時享)에서 겨우 밝혀지기도 했다.

 

중시조의 39세손 이덕봉(李德峯)의 후손인 이상필(李相弼) 종친이 판윤공이 조선조 제3대 왕인 태종(太宗)으로부터 받은 왕지(王旨 ; 임명장)를 받들어 와서 고유제를 올림으로써 공(公)의 ‘명예한성판윤’ 재임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공(公)의 생애를 계속 추적해 본다.

 

2005년에 발견된 임명장인 왕지(王旨)에는 “李之帶 爲 嘉善大夫檢校漢城尹者(이지대 위 가선대부검교한성윤자) 영락14년(永樂十四年) 6월(六月) 초2일(初二日)”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태종의 어보(御寶)가 찍혀 있다.

 

 

 

판윤공이 받은 왕지(王旨)

 

 

 

 

 

여기에서 말하는 검교(檢校)란 고려·조선시대의 훈관(勳官)직 즉, 명예직(名譽職)을 말한다. 검교관제는 중국 동진시대(東晉時代)부터 있었으나, 이는 실직(實職)이었고 실제로 훈관으로서의 검교관제는 당(唐)나라 때부터 있었다.

 

우리나라에서의 훈관인 검교관제(檢校官制)는 고려 초기의 관리 채용에 있어 정원제가 성립되자 마련되었다. 그 목적은 고위관직의 자리는 한정되어 있는데, 승진대상자는 늘어나 이들에게 승진의욕을 제고하고자 실직(實職)이 아닌 훈직(勳職)을 주어 승진의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서반직(西班職) 검교와 내시부검교(內侍府檢校)의 직제가 뚜렷이 증가하고, 이 검교제가 피역(避役)의 도구로 이용되면서 그 제수(除授의 범위도 향리(鄕吏)·백성에게까지 확대되어 막대한 국록(國祿)의 낭비를 가져왔다.

 

이에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검교직(檢校職)을 그대로 두고는 재정적자를 면할 수 없었기 때문에 1416년(태종 16) 동서반유록검교직(東西班有祿檢校職)이 폐지되고, 1443년에는 내시부검교직이 폐지되었다. 그러나 세조가 왕위에 오른 뒤 다시 시행되었다.

 

다시 공(公)의 얘기로 돌아간다. 공의 생졸년(生卒年 ; 태어나고 사망한 해)은 관련 읍지(邑誌)나 실록, 임명장을 토대로 유추하면, 공(公)의 출생기를 고려 말(末)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때는 고려 공민왕 19년(1368)으로 당시에는 신돈(辛旽)과 이인임(李仁任)의 전횡과 왜구(倭寇)의 잦은 침입으로 나라가 극히 위태로울 때였다.

 

이에 공(公)은 구국의 일념으로 무과(武科)를 지망하여 갑과(甲科)로 등제했는데, 관련 서책에 의하면 이때의 공의 나이가 20세로 시기는 고려 창왕 원년(1389)으로 추정되고 있다.

 

공(公)이 급제한 당시의 무과는 초시(初試), 복시(覆試), 전시(殿試)의 3단계로 갑과(甲科) 3명, 을과(乙科) 5명, 병과(丙科) 20명을 선발하여 합격증으로 홍패(紅牌)를 주었다.

 

공(公)이 최초로 재임한 만호(萬戶)는 원나라 군제의 근본으로 민호(民戶)의 수를 말하는데, 당시의 만호는 정4품이었다. 공이 이후 재임한 수군절제사(水軍節制使)는 첨수사(僉水使), 첨사(僉使), 도만호(都萬戶)라 하기도 했다.

 

또한 공(公)이 검교판윤직(檢校判尹職)을 임명받은 당시의 한성 또는 한성부(漢城府)는 현재의 서울특별시를 말하는데, 한성판윤(漢城判尹)은 당시의 한성부 책임자로서 정2품의 관직으로 일제시대까지 한성부사(漢城府使), 윤(尹), 부윤(府尹) 등으로 불렸다.

 

이후 해방이 되자 1946년에 서울시장이 되었다가, 1949년에 서울시가 특별시가 되면서 특별시장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한성부 판윤(判尹)의 업무는 주로 서울의 호구수를 통계내거나, 호적을 작성해서 보관하는 일, 주택이나 건축, 전답, 산림 등을 관장하고 토목공사의 시행, 세금징수, 공공재산관리, 각종 물물조사, 폭력행위단속, 순찰, 우마(牛馬) 관리, 신분증명 등에 관한 일을 관장하고 관리 감독하는 것이었다.

 

이중에서 가장 중요한 업무는 세금과도 직접 연관되는 호적업무였다. 한성부의 위치는 당시의 중부 징청방(澄淸坊)의 호조와 이조 중간에 있었다.

 

한성부에서 근무하는 관원들은 판윤(判尹)을 비롯하여 90명 정도가 있었는데, 이들은 오전 6시경인 묘시(卯時)에 출근하여 오후 6시경인 유시(酉時)에 퇴근했고, 해가 짧을 때, 즉 겨울에는 오전 8시경인 진시(辰時)에 출근하여 오후 4시경인 신시(申時)에 퇴근했다. 그 시절에도 섬머타임제(일광절약시간제 ; daylight saving time)가 있었던 셈이다.

 

 

 

그 시절 한성부

 

 

 

 

다시 공(公)의 얘기로 돌아간다. 조선조 제3대 왕인 태종(太宗)의 어보(御寶)가 찍힌 왕지(王旨)에서 적고 있는 공(公)의 가선대부(嘉善大夫)라는 직책은 종2품으로, 문관에게 내리는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라는 직책과 동등한 직책이다.

 

그리고 왕지(王旨)라는 것은 왕의 명령인 임명장으로 조선 초기에 사용한 말이며,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로 인하여 교지(敎旨)라 하다가 고종 때부터 왕을 황제라고 호칭하면서 칙명(勅命)이라고 고쳐 불렀다. 교지를 교부한 연호(年號) 영락(永樂)은 명나라 성조(成祖)의 연호로 태종16년(1416)을 말한다.

 

판윤공(判尹公)은 명예직으로서의 한성판윤으로 재임하다가 1453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이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을 살해하고, 성삼문(成三門),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박팽년(朴彭年) 등 사육신을 비롯한 70여명을 도륙할 때 비분강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1,000 여리나 떨어진 당시의 경주부(慶州府)로 낙남(落南)해 버렸다.

 

이후에는 갈건야복(葛巾野服 ; ‘갈건과 베옷’이라는 뜻으로 ‘은사나 처사들의 의관’을 일컫는 말)으로 산천을 소요하며 조정(朝廷)의 일을 말하지 아니 하였다 한다. 공(公)의 90년 생애를 요약하면 다음 표와 같다.

 

 

구 분

연도

관 직

세수

비 고

고려공민왕19년

1369

출생

1

고려/추정

고려 창왕 원년

1389

무과 급제

20

고려/추정

조선 태조 원년

1392

장자 ‘점’ 출생

23

조선/추정

조선 태조  3년

1394

수군 만호

25

조선실록기록

조선 태조  4년

1395

차자 ‘묵’ 출생

28

추정

조선 태종  7년

1409

수군절제사

40

추정

조선 태종 16년

1416

검교 한성판윤

47

왕지

조선 세종  5년

1423

장자 장사랑 임명

54

교지/장자 31세

조선 세종 25년

1443

차자 진사 급제

74

울산읍지/차자 48세

계  유  정  란

1453

낙남(낙향)

84

추정

조선 세조  4년

1459

별세

90

추정

 

 

 

 

위의 표에서 1453년 계유정란 시 공(公)이 낙남(落南)했다는 말은 사실과 다르다는 견해도 있다. 낙남이란 말은 그냥 남쪽으로 내려왔다는 말이고, 낙향(落鄕)이란 말은 서울에서 고향으로 내려갔다는 말이다.

 

공(公)의 경우 계유정란을 일으켜 수많은 충신들을 척살한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야만적 행위에 비분강개하여 선조의 출생지인 경주부(慶州府)로 그냥 내려온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고향인 경주부로 낙향했다는 설이 있다.

 

즉, 공(公)은 원래 한양에서 출생한 것이 아니고, 경주부에서 출생하여 과거에 급제했고, 첫 직임으로 공의 고향인 지금의 경주시 감포(甘浦) 항구를 비롯한 울산(蔚山) 해안지역의 수군만호(水軍萬戶)를 맡았고, 이후에도 이들 지역을 무대로 수군절제사(水軍節制使)를 역임하면서 당시의 경주부 지역인 지금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서면지역에 세거지(世居地)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 조정의 발탁으로 상경하여 벼슬을 했고, 태종조(太宗朝)에서는 상당기간 검교한성판윤으로 재임하다가 이후 수양대군(首陽大君)의 폭정과 비인도적 정치행각에 분노하여 일가들이 거주하는 경주부(慶州府)로 낙향하여 판윤공파의 씨족을 창건했다는 것이다.

 

 

경주이씨 판윤공파의 입향조 판윤공 이지대의 재실(齋室)

 

 

(경주시 보문동 명활산 소재)

 

 

 

 

□ 판윤공파의 명장 이언춘(李彦春) 장군

 

 

여기에서는 우리 경주이씨 판윤공파의 종친들과 대소가(大小家)에게 조선왕조실록에서 전하고 있는 사실(史實) 한 가지를 추가한다.

 

많은 이들은 경주의 토착성씨인 경주이씨, 특히 카페지기의 직속 선대인 판윤공파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과 경주일원이 온통 왜놈들과의 전장(戰場)이었는데, 그 후손 중에서 왜적들과 싸운 의병장 한 사람도 없었는가 하는 의문을 갖고 있다.

 

경주이씨 전체로도 일제 당시에 친일인사는 그렇게 많았는데, 임진왜란 때 나라를 위해 왜적들과 싸운 후손은 없었느냐는 답답한 심경을 토로하기도 한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도 사실을 전하지 않았고, 알려주지도 않았으니 당연한 의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경주지역 판윤공 후손에도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분명 용맹무쌍한 명장(名將)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외동읍과 경남북 일원에서 왜적을 격파했던 이언춘(李彦春) 장군이 그 분이다. 장군은 비록 이순신장군 만한 중직(重職)과 명성은 아니더라도 외동읍 일원에서 특별한 전공을 세운 분이다.

 

장군은 경주이씨 판윤공파 출신 훈련원정(訓練院正)인 충효재공(忠孝齋公) 안국(安國)의 차자(次子)로 태어났으며 판윤공 이지대의 7세손이다.

 

실기(實記)에 의하면 장군은 명종 원년(1546) 5월 15일, 지금의 경주시 동천동(東川洞)에서 태어나 유년기부터 판단력이 출중하였으며, 기골이 장대하고 담력이 남달랐다고 전하고 있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당시 마을 훈장(訓長)이었던 공(公)은 장정들을 모아 창의(倡義)하여 이시랑을 좌령장(左領將)으로, 아들 상립(尙立)을 우령장(右領將)으로 하는 의병조직을 지휘하였다.

 

장군은 1592년 4월 23일 울산 개운포 전투에서 의병장 윤홍명, 이응춘(경주시 외동읍 출신), 장희춘 등과 합세하여 백운암에서 적을 크게 물리쳤고, 동년 5월 19일에는 울산 달현 전투에서 이시랑을 좌대장(左隊長)으로 아들 상립(尙立)은 우대장(右隊長)을 장악케 하고, 공(公)은 의병을 총지휘하여 야간공격으로 대승을 거두기도 했다.

 

1592년 12월 14일에는 박인국, 이여랑, 류정 등 의병장과 함께 지금의 외동읍 모화리 소재 원원사(遠願寺)에 집결하여 화살을 만드는 작업 중에 적의 침입을 받자 접전 끝에 왜적 70여명을 격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1594년에는 무과에 급제하고 훈련원 주부에 제수되었다. 1594년 9월 24일에는 은진 현감 이의(李穀), 방어사 권응수 등이 주도하는 영천 창암(蒼岩)전투에 나아가 유정(柳汀)과 합세하였으며, 시현(柴峴)전투에서는 좌령장 이시랑(李時良)과 우령장 상립(尙立)을 지휘하여 적을 격퇴하고, 1594년 12월 10일에는 재침한 적을 다시 물리쳤다.

 

1596년 3월 3일에는 팔공산 회맹에 참가하여 여타 의병장들과 함께 수성(守城)에 공을 세웠다.

 

이언춘(李彦春) 장군은 또 1595년 2월 28일, 김득복(金得福) 등과 함께 지금의 외동읍 괘릉리에 소재하는 영지(影池)저수지 아래에 주둔하고 있던 왜적을 한밤중에 저수지를 무너트려 수공(水攻)으로 격파함으로써 '영지전투(影池戰鬪)'를 승리로 이끈바 있다.

 

왜군에게 시달리던 방어리(防禦里) 백성들을 구출하는데 기여한 것이다. 당시 방어리에는 경주이씨의 판윤공파의 후손들이 씨족부락을 형성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영지전투의 현장 방어리 ‘영호(影湖)’마을(못밑)

 

 

 

 

 

여기에서 말하는 영지전투란 부산포(釜山浦)에 상륙한 왜병들이 영남좌로(嶺南左路 ; 카페지기가 졸업한 지금의 영지초등학교 정문 통과)를 따라 북상하다가 영지저수지 둑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영호(影湖)’마을에 유진하고 있을 때 불국사에서 작전을 숙의하고 있던 천사장(天使將) 이눌(李訥), 격의장(激義將) 이여양, 분격장(奮擊將) 이언춘(李彦春) 등이 김득복군(金得福軍)과 합세하여 이들을 섬멸한 전투를 말한다.

 

 

 

 

임진왜란 당시의 영남좌로(嶺南左路)

 

 

 

 

 

당시 불국사(佛國寺)에 유진(留陣)하면서 괘릉리에 소재하는 영지저수지 못둑 밑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의 격퇴를 숙의하던 김득복(金得福)과 이눌(李訥), 이언춘(李彦春) 등은 우선 김득상과 황희안 등을 파견하여 실상을 파악한 후 그날 밤 모든 의군(義軍)을 불국사에서 영지저수지 둑 밑에 있는 ‘영호(影湖 ; ‘못밑’이라고도 한다)’ 마을 뒤 소나무 숲에 잠입시키고, 그곳에서 3대로 나누어 매복하였다.

 

황희안을 분대장으로 하는 62명의 궁수(弓手)들은 마을 건너 편 숲에 매복시키고, 삽을 든 40여명은 김득복(金得福)이 인솔하여 저수지 둑 안쪽에 은신하게 하였으며, 이눌(李訥)의 군대 100여명과 이언춘(李彦春)의 군대는 공격조로 편성하여 대기했었다.

 

의병군과 관군은 5경쯤(새벽3시경) 되자 행동을 개시하여 남쪽(영지초등학교 통학로가 있던 쪽)과 북쪽(영지저수지 ‘밀개(물막이)’가 있는 쪽으로 옛적 괘릉리 ‘영못안’과 신계리에 거주하던 영지초등학교 학생들이 통학하던 길)에서 못 둑을 끊었다.

 

지금은 견고한 콘크리트 옹벽이지만, 당시에는 20여명의 장정(壯丁)이 삽으로 끊을 정도로 허술한 ‘밀개’였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말하는 ‘밀개’란 농기구인 ‘고무래’를 말하기도 하나, 또 다른 말로는 저수지(貯水池)의 ‘무넘기’를 이르는 말이기도 한데, 이 ‘무넘기’를 경상도에서는 ‘밀개’라고 한다.

 

 

 

 

지금의 영지저수지

 

 

                    (제방 왼쪽 끝에 ‘밀개’가 있다. 멀리 토함산(吐含山)

기슭에 희미하게 불국사(佛國寺) 사찰단지가 보인다)

 

 

 

 

본론으로 돌아간다.늦겨울 하천변에 움막을 짓고 야영하던 왜병(倭兵)들은 갑자기 밀어닥친 급류에 휩쓸려 우왕좌왕하다가 쏟아지는 화살과 의병(義兵)들의 기습공격으로 대패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일로 왜병(倭兵)들은 다음 전투에서 대군(大軍)을 이끌고 와서 영지전투 당시 의병들이 진을 치고 있었던 불국사(佛國寺)를 불태우고 말았다.

 

어쨌든 이후 수많은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이언춘(李彦春)장군은 후일 그 전공을 조정으로부터 인정받아 왕으로부터 증직(贈職)으로 훈련대장(訓練大將)을 제수 받았고, 1605년에는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었으며, 양무(良武)의 시호를 하사받았다.

 

장군은 1609년 3월16일에 별세했는데, 직계후손들은 양무사(良武祠)를 세워 영정을 모시고 제향(祭享-나라에서 올리는 제사)하고 있으며, 이와 관련한 실기(實記)는 동경지(東京誌)에 실려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동경지는 동경잡기(東京雜記)를 말하는 것으로 동경잡기는 1845년(헌종 11) 경주부윤 성원묵(成原默)이 증보·간행한 경주(慶州)의 지지(地誌)를 말한다.

 

동경(東京)은 고려(高麗) 때 경주(慶州)의 이름으로 동경잡기는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의 현존하는 최고의 개별 읍지(邑誌)로서 19세기 경주의 지역 사정과 함께 신라의 전설·역사·풍속·문물 등을 매우 풍부하게 전하여 주므로 신라(新羅)시대와 경주 일대를 연구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1910년 조선고서간행회에서 성원묵의 판본을 인쇄본으로 간행하였고, 1913년 조선광문회에서 또 활자본으로 간행하였다. 1991년 동문선에서 이석호 번역으로 홍석모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등과 함께 조선세시기(朝鮮歲時記)라는 이름으로 번역·간행되었다.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 경주이씨의 항렬제차(行列第次)

 

 

다음은 경주이씨의 항렬제차(行列第次)를 소개한다. 경주이씨는 1856년(고종5년 ; 무진년) 가을 익재(益齋)․국당(菊堂)․상서(尙書) 등 3파(派) 자손이 충북(忠北) 진천군(鎭川郡) 연촌(蓮村 ; 현 초평면 용정리 양촌)에 모여 화수회(花樹會)를 창립하고, 그 당시 진천(鎭川) 문중에서 사용하던 항렬(行列)자로 후손들의 이름을 작명하면서 미정상태에 있던 ‘우(雨)’자 항렬 이하 5대의 항렬을 새로 정했다.

 

그 이후 종중회의(宗中會議)에서는 아래 표에서와 같이 70대 손까지의 항렬을 추가로 확정하였다. 작고한 전 삼성그룹 회장 이병철(李秉喆)씨와 제17대 대통령인 이명박(李明博) 전 대통령은 카페지기보다 한 항렬 낮은 ‘상(相)’자 항렬이다.

 

이들이 왜 항렬을 따르지 않았는지, 아니면 따르지 못했는지, 특히 이병철씨의 경우 전설에 불과한 시조숭배사상에 그토록 투철했던 그가 왜 종중의 항렬자를 따르지 않았는지 궁금증을 갖게 한다.

 

어쨌든 당시의 종중회의에서 제정한 경주이씨의 항렬제차는 아래 표와 같다. 숫자는 위쪽 줄은 시조(始祖)로부터의 세수(世數), 아래쪽은 중시조(中始祖 ; 居明)로부터의 세수(世數)이다.

 

 

경주이씨 行列第次(항렬제차)

始祖

70

71

72

73

74

75

中祖

35

36

37

38

39

40

行列

○榮

圭○

鍾○

○雨

相○

○熙ㆍ炯

영화 영

홀 규

쇠북 종

비 우

서로 상

빛날희

빛날형

始祖

76

77

78

79

80

81

中祖

41

42

43

44

45

46

行列

在○

○鎬ㆍ鍵

濟ㆍ濬○

○東

丙ㆍ心○

○敎ㆍ世

있을 재

빛날 호

자물쇠건

건널 제

깊을 준

동녘 동

남쪽 병

마음 심

가르칠 교

인간 세

始祖

82

83

84

85

86

87

中祖

47

48

49

50

51

52

行列

鎭○

○求

根○

○燮

埈○

○善

진정할진

구할 구

뿌리 근

불꽃 섭

높은 준

착할 선

始祖

88

89

90

91

92

93

中祖

53

54

55

56

57

58

行列

泰○

○模

炫○

○均

鎔○

○淳

클 태

법 모

밝을 현

고를 균

녹일 용

맑을 순

始祖

94

95

96

97

98

99

中祖

59

60

61

62

63

64

行列

秉○

○杰

基○

○鈺

洛ㆍ永○

○植

잡을 병

호걸 걸

터 기

보배 옥

강이름락

길 영

심을 식

始祖

100

101

102

103

104

105

中祖

65

66

67

68

69

70

行列

德○

○周ㆍ起

鎰ㆍ鏞○

○浩ㆍ洙

柱ㆍ綵○

○熏ㆍ燁

큰 덕

두루 주

일어날기

중량 일

종 영

클 호

이름수

기둥 주

비단채

연기낄 훈

빛날 엽

 

 

 

 

 

 

 

 

 

 

경주시 내남면(內南面) 명계리 홈실 마석산(磨石山) 6대 조부(祖父)님 유택

 

 

 

(‘상(相)’자 항렬에서는 7대 조부(曾祖父)님 유택, ‘희(熙)’자

또는 ‘형(炯)’자 항렬에서는 8대 조부(高祖父)님 유택이 된다)

 

 

 

 

 

경주시 불국동(시동) 마석산(磨石山) 기슭 '잿길' 입구 조부(祖父)님 유택

 

 

 

(‘상(相)’자 항렬에서는 증조부(曾祖父)님 유택, ‘희(熙)’자

또는 ‘형(炯)’자 항렬에서는 고조부(高祖父)님 유택이 된다)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황사등(黃砂嶝) 조모(祖母)님 유택

 

 

 

(‘상(相)’자 항렬에서는 증조모(曾祖母)님 유택, ‘희(熙)’자

또는 ‘형(炯)’자 항렬에서는 고조모(高祖母)님 유택이 된다)

 

출처 : http://cafe.daum.net/junghodek/TTgG/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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