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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연해주 여행]우수리스크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 생가 & 대한국민의회 & 거북이 공원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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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및산행

2019. 8. 8.










[러시아 연해주 여행]우수리스크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 생가
                              & 대한국민의회 & 거북이 공원 탐방

(2019/6/21일~6/25일,4박5일)


하나투어에서 주관하는 러시아 극동 지역 연해주에 있는 하바롭스크
블라디보스톡 우수리스크등에 있는 관광 명소와 한인 독립운동 유적지가 있는
관련 지역을 중점적으로 둘러보는 패케지 여행으로 2019년6월21일~6월25일(4박5일)
기간 동안 실시한 "하바롭스크/블라디보스톡/우수리스크 5일◈킹크랩/4성호텔/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 일정중 전날 블라디보스톡 지역에 명소를 돌아본 다음
우수리스크에서의 4일차 일정으로 당일 아침 블라디보스톡의 아지무트 호텔을
버스로 출발 약 2시간 정도 이동하여 첫번째로 우수리스크의 중심인 시청 소재지가
있는 혁명광장을 둘러 보고 나서 탐방한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이 거주했던 생가와
전로한족회 중앙총회인 대한국민의회가 열렸던 회의 장소, 그리고 거북이 동상이
유명한 거북이 공원 탐방 전경 입니다.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은 연해주의 대표적인 항일 독립운동가로 활동했으며,그의 생가는
전로 한족 중앙총회 명예회장으로 활동하셨던 최재형 선생이 1919년부터 거주하여
1920년 일본 헌병대에 의해 학살되기 전까지 살았던 생가입니다. 그는 연해주 지역의 명사로
사업을 통해 막대한 재산을 모아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하여 돈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한인을 위한 도로와 학교 건설 그리고 독립군의 자금 지원 등을 했습니다. 러시아 한인사회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며 높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이 살았던 집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초라하고 소박한데 이는 그의 곧은 성품을 잘 반영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로한족회 중앙총회인 대한국민의회가 열렸던 회의 장소는 대한국민의회(고려국민회)
결성지로서 전로한족회 대표자회의가 개최되었으며 전로한족중앙총회 본부였던 곳입니다.
우스리스크 블로다르스카야 15번지 앞과 우수리스크시 체체리나 15번지 일대에서 가까우며
거북이 공원이 근처에 있습니다. 현재는 러시아 초등학교 기숙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거북이 공원에 대하여는 우스리스크 시내 한복판에 자리한 시민공원은 공원의 한가운데 세워진
돌거북이상 때문에 시민공원이라는 이름이 있음에도 '거북이 공원'이라는 별칭으로 많이
불리는 장소입니다. 지역 인근에서 발견한 2개의 동상 중 하나만을 공원에 옮긴 것으로,
남은 하나는 하바로프스크의 박물관에 전시 중입니다. 비문이 없어 이 동상이 만들어진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여진족의 근거지로 알려진 지역에서 비슷한 것들이 발견되는
것으로 추정했을 때 여진족이 만든 것들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곳은 연해주의 대표적인 항일 독립운동가로 활동했으며,
전로 한족 중앙총회 명예회장으로 활동하셨던 최재형 선생이 1919년부터
거주하여 1920년 일본 헌병대에 의해 학살되기 전까지 살았던 생가입니다. 


●[동영상]우스리스크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 생가 에서
Click  ▼
https://youtu.be/P8jn9f-UfqY

























이곳은 대한국민의회(고려국민회) 결성지로서
전로한족회 대표자회의가 개최되었으며 전로한족중앙총회 본부였던
곳입니다. 현재는 러시아 초등학교 기숙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스리스크 시내 한복판에 자리한 시민공원은 지역 인근에서
발견한 2개의 거북이 동상이 있어 '거북이 공원'이라는 별칭으로
많이 불리며,동상 중 하나만을 공원에 옮긴 것으로, 남은 하나
는 하바로프스크의 박물관에 전시 중입니다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崔在亨) 선생


‘시베리아 항일운동의 대부’로 통하는 최재형은 1860년대 조선에 대흉년이 들어 중국, 러시아 등지로 집단 해외 이주를 했던 시대에 함경북도 경원에서 노비 출신 소작인 아버지와 기생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났다.


10세 때 온 가족이 기근을 피해 연해주 ‘지신허’라는 한인 마을에 정착했지만, 가난의 굴레를 벗지 못했다.


이듬해 한국인으로는 러시아 학교에 입학한 첫 학생이 됐지만, 형수와의 갈등으로 가출한 뒤 부두를 헤매다가 러시아 상선 선원들에게 발견돼 선원이 됐다. 러시아인 선장 부인은 소년에게 세례를 주고 이름을 ‘패치카’(난로)라고 불렀다.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


6년간 러시아 상선을 타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힌 최재형은 18세 땐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상업회사에서 무역과 수공업을 배웠다. 이후 군납사업을 하며 부를 쌓았고, 이렇게 번 돈을 항일 독립운동과 동포 지원에 사용했다. 그가 생전 연해주에 세운 학교가 30개에 달할 정도로 한인 동포 후손 교육에 열정을 쏟았다.


최재형은 계몽 활동과 사회 활동을 하면서 주민들의 문화 수준 향상에 큰 의미를 뒀다. 특히 교회학교를 통한 교육에 큰 관심을 두었다. 조국 광복을 위해서는 의식개혁과 교육이 선행돼야 함을 누구보다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그래서 모든 재산을 항일전투와 유격부대의 조직과 운영 그리고 학교와 교회 건립에 사용했다. 1908년에는 의병 유격대를 조직해 안중근과 함께 국내 진공 작전을 펼쳤다. 안중근이 이토를 살해할 때 사용한 브라우닝 권총을 구해준 이도 최재형이였다.


최재형의 딸 올가는 생전에 남긴 회고록에서 “안중근이란 사람이 3개의 인물 그림을 우리 집 벽에 붙여놓고 사격 연습을 했다”고 밝혔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 사용된 무기 구입에도 최재형이 큰 힘을 썼다. 그는 마을마다 교회와 학교가 설립되고, 노보키옙스크에서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이 들어갈 수 있는 6년제 상급 교육 기관도 세웠다. 상급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학생들은 민족의 지식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졸업생들은 선발 과정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 니콜스크-우수리스크, 블라고베쉔스크, 이르쿠츠크, 톰스크, 카프카즈와 크림 등으로 유학을 보내 주었다. 이를 위한 비용은 사회에서 모금된 자금으로 지원되었다. 모든 학생은 월요일마다 수업 시작 전에 교회에서 모여 예배를 드렸다. 첫 줄에 1학년, 그 뒤에 2학년 등의 순으로 학년별로 서서 다 같이 2~3곡의 찬송(기도) 곡을 부른 후에 반별로 흩어지곤 했다.


1919년 수립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초대 재무 총장에 선임됐다. 하지만 이듬해 4월 5일 우수리스크에서 일본군에 체포된 하루 만에 순국했다. 그해 5월 임시정부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추도회가 열렸다. 하지만 그의 시신은 아직 찾을 수 없어 묘지도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순국 42년 만인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러시아 난로를 뜻하는 페치카라는 애칭 때문이었을까. 최재형은 1920년 일본군에 체포돼 순국하기까지 항일 독립운동은 물론 동포들에게 따뜻한 지원을 한 것으로 칭송이 자자했다. 기념비 제막식을 거행하던 날 최재형 기념관 마당엔 종일 눈물 같은 빗방울이 흘러내렸다. 기념관 입구 오른쪽엔 최재형의 가옥에 남아있던 페치카의 원형이 복원돼 있다.


159년 전 8월 15일 태어난 최재형은 망국의 한을 풀지 못하고 60세로 순국했다. 그로부터 정확히 25년 뒤 조국은 광복을 맞았지만, 지금까지도 그의 시신과 무덤은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내년은 최재형 순국 100년이 되는 해이다. 기념비를 제막한 추모위는 그의 후손들과 함께 순국 100주년 기념식과 추모음악회, 국제 심포지엄, 다큐멘터리·출판 기념회, 사진전 등 다양한 사업을 벌일 예정이다.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3602448&code=61221111&cp=du



러시아 우스리스크서 ‘최재형 기념비’ 제막식 열려
한청단도 참석...내년 순국 100주년 앞두고 다양한 행사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9577



◆최재형 선생 생가(고택)


  - 현주소: 우수리스크 수하노바 32(첫 번째 집), 블로다르스카야 38(두 번째 집)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고택으로 최재형이 거주했던 두 곳의 집이 있다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최재형. 함경도 출신의 자수성가한 재력가였던 그는 군수업을 통해 모은 돈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다. 항일 의식 고취를 위한 신문을 창간하였고, 항일 의병 단체인 동의회를 결성하여 총재직을 맡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1909년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 후원, 1917년 전로한족중앙총회의 명예 회장으로 추대, 1919년 3월 국내외 최초의 임시 정부인 대한국민의회 외교 부장, 그해 4월에 상해임시정부의 초대 재정 장관으로 추대되는 등 가히 독립운동계의 대부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1920년 4월 참변으로 희생되기 전까지 최재형이 거주하던 고택을 찾아볼 수 있다. 우수리스크 내에 두 곳이 있다. 최재형 선생은 한인사회의 지도자로서 독립운동과 국민계몽운동에 헌신하였으며 1920년 4월참변시 일본군에 의해 불법 체포되어 학살당하였다. 최재형 선생의 두 번째 집은 일본군에게 체포될 때까지 거주했던 집이며 당시의 집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연해주의 대표적 항일독립운동가이며 전로한족중앙총회 명예회장으로 활동하였던 최재형 선생이 1919년부터 1920년 4월 일본헌병대에 의해 학살되기 전까지 거주했던 곳이다. 그가 일본군에 체포되어 순국하기 전 마지막으로 살았던 이 집은 얼마 전까지 러시아인이 살고 있던 것을 현재 우리나라가 구입하여 박물관으로 만들고 있다 하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최재형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2007년 4월 7일 모스크바에 사는 최재형의 손자 최발렌친은 최재형의 총살 추정지인 우수리스크 감옥 뒤편 언덕에서 87년 만에 할아버지에게 제사를 올렸다. 2014년 대한민국 재외동포재단은 최재형 고택을 매입했다. 2016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는 최재형의 손자 최발렌친에게 대한민국 국적을 부여했다.



◆임시정부의 하나인 대한국민의회(전로한족회 중앙총회) 회의장소


  - 현주소: 우수리스크 체체리나 32


전로한족회 및 대한국민의회는 3‧1운동 이전 이미 해외에 존재하던 임시정부 수립운동 흐름의 구체화로서 의미를 갖는다. 재러 한인들은 1918년 그간 개별적으로 조직된 각종 단체인 한족회(1905년), 대한교육청년회(1907년), 권업회(1911년) 등을 규합하여 전로한족회중앙총회를 조직하였으며, 1919년 3‧1운동 직후 새로운 국제정세에 대처하기 위해 동 조직을 대한국민의회로 개편하였다.


1919년 삼일 운동 직후, 국내외 최초로 임시 정부를 선포한 대한국민의회의 전신(前身). 전로한족중앙총회는 1918년 6월 정식으로 조직되었다. 이 건물에서 1918년 6월 13일~23일까지 민족의 자치와 항일 독립운동을 추진하고자 제2회 특별 전로한족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현재는 학교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거북이 공원-우수리스크 시립 공원


-우스리스크의 시민들에게 휴식의 공간으로 각종행사가 열리는 공원이다. 이 공원 안에 있는 돌거북이는 우수리크스 인근 발해 절터에서 유물로 발군된 거북이 묘대를 옮겨다 놓은 것이라고 한다.  
 
 최재형 고택 맞은편에 위치한 시립 공원. 발해 또는 금나라의 유물로 추정되는 돌 거북이상이 있는 공원이다. 돌 거북이상은 우수리스크 인근에서 발견된 것을 이곳으로 옮겨다 놓은 것이다. 당시 두 개의 돌 거북이상이 함께 발견되었는데, 하나는 이곳 우수리스크에, 다른 하나는 하바롭스크 박물관 입구로 옮겨 놓았다.



●최재형-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최재형(崔在亨, 1860년 8월 15일[1] ~ 1920년 4월 7일)은 대한제국과 러시아 제국의 항일 독립운동가 겸 군인이다. 일명 최재형(崔在衡)·최도헌(崔都憲)이고, 러시아식 이름은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Цой Пётр Семёнович)이다


<생애>


▶출생


1860년 8월 15일 함경도 경원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최흥백은 노비였으며, 어머니는 기생이었다. 최재형은 1869년 아버지 손에 이끌려 조선인들이 정착해 살고 있던 러시아의 지신허 (Tizinkhe)로 갔다. 최재형은 조선인 최초로 러시아 정교회 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학교를 다니는 동안 형수의 심한 구박으로 굶기를 밥먹듯 하여 11살이 되던해 포시예트 항에 가면 굶지 않는다는 소문을 듣고 가출하여 포시예트를 찾아갔을때는 기진해서 바닷가에서 정신을 잃었다.


▶최재형의 은인 부부


배고픔에 지쳐 기절한 최재형을 발견하여 돌본 이들은 선한 러시아 선장이었다. 선장 부부는 나이가 많았고 선박을 타고 세계를 도는 선주였다. 최재형은 그들의 각별한 보살핌을 받았다. 선장 부인은 학식이 뛰어났다. 선장부인은 최재형에게 러시아어와 서양학문을 가르쳤고, 선장은 최재형이 해외에서 견문을 넒힐 수 있도록 후원하였다. 최재형은 1871년부터 1877년까지 6년동안 선장부부와 상선을 타고 세계를 돌며 무역을 배웠고 이를 통해 최재형은 풍부한 학식과 폭 넓은 사고를 가진 지식인으로 성장했다. 17살에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온 최재형은 유창한 러시아어로 한인노동자들의 부당한 대우를 시정해주고 한인인부들을 데리고 도로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치어 러시아 항제 니콜라이 2세로부터 은급 훈장을 받았다.


▶군수업으로 부를 쌓다


군수업으로 1년 수입 10~12만 불의 막대한 부를 쌓았다. 최재형은 특별히 조선인들을 직원으로 고용했는데, 이로 인해 절대빈곤에 시달리던 조선인들은 자력으로 돈을 벌 수 있었다. 최재형은 러시아의 연해주의 연추에서 활동하였는데, 조선인들의 경제적 자립에 기여한 덕분에 연추의 조선인 사회에서 도헌(都憲, 군수 비슷한 공직)에 선출될 정도로 러시아 사회에서 지위가 높아졌다. 최재형은 한인들의 교육에도 힘을 쏟아 한인마을의 정교회 학교를 32개나 세웠다. 한인들은 최재형을 페치카(따뜻한 난로)라고 불렀다. 러일전쟁에 참여한 최재형은 그 후 일본의 야욕을 간파하고 항일운동에 뜻을 두었다. 1907년 안중근은 해외망명을 통해 러시아에서 최재형을 만났다. 최재형은 1908년 최초의 독립단체 동의회를 조직하여 총장이 된다. 안중근은 평의원으로 참여한다.


▶항일 투쟁의 지원


최재형은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항일투쟁을 위해 값지게 사용하였다. 연해주에 온 류인석(柳麟錫)이 13도의군을 조직할 때 의병들의 총기 구입 등 무장을 도왔다. 옛 소비에트 연방이 제2차 세계 대전 때까지 사용할 정도로 성능이 뛰어난 소총으로 무장시킨 것이다.


동의회는 러시아의 모든 항일의병 세력을 단결시켰고, 러시아 국경의 일본군 초소와 소규모 부대들을 격파하고, 많은 탄약과 소총을 탈취했다. 당시 일본군은 전사자 40여명에 달했으나, 의병들은 부상자가 불과 4명이었다. 결국 의병들의 러시아 활동 사실을 파악한 일본은 제정 러시아를 압박했고, 러시아 국적의 조선인 청년의 징집, 무기 수거 등으로 의병 활동을 방해했다.


▶안중근 의거를 지원


동의회 산하 의병부대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 국내진공작전을 하는 안중근의 뒤에는 최재형이 있었다. 싼값에 무기를 샀고 의군의 숙식은 최재형의 집에서 했다. 그만큼 최재형은 군납업으로 많은 자금과 큰 저택을 보유했다. 대한의군은 신아산 전투등 국내진공작전에 연전연승 하고 영산전투에서는 참패했다. 참패의 원인은 포로를 석방하여 대한의군의 비밀 루트가 발각된 때문이었다. 또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러시아를 압박하여 최재형을 무장해제시켰다. 최재형은 자금난에 문을 닫게된 해조신문을 인수하여 《대동공보》를 발행,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안중근은 의병을 다시 일으킬 것을 다짐하며 최재형의 집에서 손가락을 자르는 단지동맹을 했다. 그 후 대동공보 기자증을 가지고 활동하던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대동공보에서 최재형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 주살을 모의한다. 당시 하얼빈은 중국의 영토였지만 러시아가 조차해서 다스렸다. 하얼빈에 이토 히로부미가 오니 최재형은 이토 히로부미 사살 장소를 하얼빈으로 정해, 안중근은 최재형의 집에서 권총연습을 한다. 최재형은 안중근에게 권총을 사주고 안중근 거사 후 일본이 관할하지 않는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 받도록 계획하고, 변호사인 미하일로프 주필을 안중근의 변호인으로 준비했다. 그러나 안중근이 1910년 일본 법정의 불법재판 끝에 순국하자, 최재형은 자신이 안중근을 지켜주지 못했다고 자책감을 느껴 안중근의 처자들을 보호하였다.


이 사건으로 러일 전쟁 패전국인 러시아의 연해주 조선인들에 대한 감시가 강화되었고 최재형은 권업회를 창설하여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의 음모에 따라 간첩 혐의로 체포되었다. 곧 석방됐으나, 러시아 정부가 더 이상 그와 거래 하지 않음에 따라 경제적 궁핍에 시달렸다. 전로한족중앙총회(全露韓族會中央總會)의 명예회장으로 활동했고 1919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고 곧 이어 최초 임시정부였던 대한국민의회에서 외교부장을 맡았다. 그 이후 1919년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재무총장에 선임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교육가, 사업가, 독립운동가, 언론가 등 다양한 길을 걸으며 오로지 한인들을 위해 살았고 엄청난 자금을 독립운동에 쏟아부었다.


▶최후


여건이 나빠진 최재형은 우수리스크의 한 초라한 집에서 지내다가, 1920년 러시아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연해주에 침입한 일본군에 의해 총살당하고 말았다. 손자 최발렌틴은 모스크바에 살고 있으며, 최재형의 사진과 관련 문서를 보관하고 있다.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가 거주했던 우수리스크의 유럽풍 벽돌집은 러시아인에게 넘어 갔었는데 대한민국 정부가 2014년 러시아 한인이주 150주년을 기하여 매입했다. 그 후 대한민국 보훈처가 10억원을 들여 <최재형기념관>으로 리모델링 해서 2019년 3월 28일에 개관했다.


▶평가


군수업으로 쌓은 막대한 재력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여,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현자로 평가된다.


출처 : https://ko.wikipedia.org/wiki/%EC%B5%9C%EC%9E%AC%ED%98%95



●최재형(崔在亨)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일제강점기 경제력 및 정치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연해주 한인사회를 이끈 대표적 인물로, 군자금 지원 및 재러한인의병을 규합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을사조약 체결로 조선의 국운이 위태롭던 시기인 1906년 제정러시아에 살고 있는 한인 가운데 당시 연해주 사회에서 경제력 및 정치적인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었던 한인공동체 지도자 최재형은 연해주 남부에서 최초의 의병부대를 조직했다. 그는 의병부대를 직접 지휘하거나, 이범윤 등과 연합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했으며, 1909년에는 전 조선총독 이토 히로부미 암살계획에 참여하기도 했다.


1911년 5월 21일 57명의 주요 항일인사들로 구성된 블라디보스톡 비밀회의에서 애국단체『권업회』가 조직되었다. 최재형은 권업회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어 활발한 항일운동을 전개해 나갔으며, 한때 일본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나흘 후 방면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최재형의 적극적이고 활발한 항일활동 배후에는 한인들의 아낌없는 지지와 신뢰가 바탕이 되었다.



▶생애


최재형(崔在亨)은 대한제국 조선 왕조의 독립운동가로 러시아식 이름은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Цой Пётр Семёнович)이다. 어릴 때 부모를 따라 러시아령 노우키예프스크로 이주하여 귀화했다. 상업으로 치부하여 노우키예프스크 도헌(都憲)이 되자, 연봉을 은행에 적립하여 그 이자로 동포 자녀 1명씩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유학시켰다. 1904년 러일전쟁 때 러시아 해군소위로 경무관 부속 통역관이 되어 활동하는 한편, 남부소집회감독(南部所集會監督)으로 러시아 군부의 지원 하에 동포들을 규합했다. 또한 전 간도관리사(間島管理使) 이범윤(李範允)과 결의형제하고 그를 지원했다.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당하여 다수의 군인들이 러시아령으로 넘어오자, 이범윤과 함께 격문을 작성하고 최병준(崔秉俊)·엄인섭(嚴仁燮) 등을 각지에 파견하여 의병·군자금 모집에 나섰다. 이듬 해 3월 이위종(李瑋鍾)으로부터 군자금 1만 루블을 지원받고, 1909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범윤과 함께 독립군 600명을 훈련시킨 다음,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여 함경북도 경원의 신아산(新阿山), 회령 영산(永山)에서 일본수비대를 궤멸시켰다. 이어 노우키예프스크에 박춘근(朴春根)이 이끄는 독립군 본부를 설치하는 한편, 러시아군에 쇠고기 기름 등을 납품하여 군자금을 마련하고 동포 사회의 정착을 지원했다.


엄인섭·김서윤(金瑞允)·이위종 등과 독립운동단체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활동했으며, 1910년 2월 『해조신문(海朝新聞)』을 인수하여 『대동공보(大東共報』로 개칭·재간행하여 동포들의 항일독립정신을 고취했다. 또한 노우키예프스크에 한인중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에 주력하는 한편, 1911년 신한촌(新韓村)에서 홍범도(洪範圖)·이종호(李鍾浩) 등과 함께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일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재러한인대표로 2명의 위원을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할 것을 계획하고 이를 추진했다.


그 해 4월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재무청장에 선임되었으나 이를 사양했다. 1920년 4월 초 일제의 시베리아 출병에 대해 재러한인독립군부대를 총집결하고 사단장이 되어 러시아 적군과 함께 시가전을 전개하다가 김이직(金利稷)·황경섭(黃景燮)·엄주필(嚴周珌) 등과 함께 체포되다. 헤이룽장 성[黑龍江省]의 일본헌병본부로 압송되는 도중 탈출했으나 니콜스크시 남쪽 군사경계선 근처에서 일본군추격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활동사항


1858년 함경북도 경원에서 출생한 최재형은 1869년 아버지 최흥백, 형 알렉세이와 함께 연해주 남부 진신허 마을로 이주했다. 1871년 집을 나와 전전하다가 포시에트 선착장에서 러시아 선원들에게 발탁되어, 러시아 함대의 견습수부가 되었다. 그 후 그는 1878년부터는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무역회사에서, 1882년에는 블라디보스톡-라즈돌노예-슬라뱐카-노보키예프스크-크라스노예 셀로를 잇는 전략도로 건설부에서 통역원으로도 일하며 많은 인생 경험을 쌓아나갔다.


이후 최재형은 군수업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다. 최재형은 한국인들을 직원으로 고용했는데, 이로 인해 절대빈곤에 시달리던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돈을 벌 수 있었다. 최재형은 러시아 연해주 연추에서 활동하였는데, 한국인들의 경제적 자립에 기여한 덕분에 연추의 한국인 사회에서 도헌(군수 정도 되는 공직)에 선출될 정도로 러시아 사회에서의 위치가 높아졌다. 1893년 최재형은 얀치헤(연추) 한인 마을의 책임자(읍장)로 선출되면서 그는 마을에 학교와 교회를 세우는 등, 지역 한인들로부터 높은 신뢰와 덕망을 쌓아나갔으며, 1896년에는 페트로그라드에서 열린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을사조약 체결로 조선의 국운이 위태롭던 시기, 1906년 최재형은 연해주 남부에서 최초의 의병부대를 조직했다. 그는 의병부대를 직접 지휘하거나, 이범윤 등과 연합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했으며, 1909년에는 전 조선총독 이토 히로부미 암살계획에 참여하기도 했다. 1911년 5월 21일 57명의 주요 항일인사들로 구성된 블라디보스톡 비밀회의에서 애국단체『권업회』가 조직되었다. 최재형은 권업회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어 활발한 항일운동을 전개해 나갔으며, 한때 일본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나흘 후 방면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최재형의 적극적이고 활발한 항일활동 배후에는 한인들의 아낌없는 지지와 신뢰가 바탕이 되었다. 1913년 최재형은 7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을 이끌고 페트로그라드의 로마노프 왕조 300주년 기념식에 참석했으며, 1914년 1월에는 블라디보스톡에서 열린 한인의 러시아 이주 50주년 기념 행사준비위원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하지만 1915년 슬라뱐카 마을에서 헌병에게 재차 체포되어 니콜스크-우수리스크(현재 우수리스크)로 이송되었다가 여론의 압력으로 11일 후 석방되는 등, 또 한번의 고초를 겪기도 했다.

1917년 최재형은 이번에는 얀치헤 집행위원회 대표로, 1919년에는 상해 임시정부 재무부 장관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1918-1920년 내전시기 동안에는 새로운 빨치산 부대를 조직하여 백위파를 지원하는 일본군에 타격을 주었고, 이로 인해서 최재형은 일제의 주요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1920년 4월 5일 새벽 최재형은 일본군에 의해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 등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감행된 학살만행 과정에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최재형은 자신의 모든 재산을 항일운동을 위해 대부분 사용하였다. 연해주에 온 의병들을 옛 소비에트연방이 제2차 세계대전때까지 사용할 정도로 성능이 뛰어난 소총으로 무장시키기도 했으며, 러시아의 모든 항일 의병 세력을 단결시킨 동의회를 결성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그는 안중근의사의 의거를 지원한 인물이다.『대동공보』를 발행,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던 최재형에게 안중근의사가 찾아온다. 최재형은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장소를 하얼빈으로 정해, 일본이 아닌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을 받도록 조치하고, 변호사인 미하일로프 주필을 안중근의 변호인으로 준비한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가 1910년 일본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되자, 최재형은 안중근 의사를 지켜주지 못했다고 자책감을 느껴 안중근 의사의 부인과 아이들을 보호하였다.

이후 연해주의 한인들에 대한 러시아의 감시가 강화되었고, 권업회를 창설하여 독립운동을 하던 최재형도 그를 간첩으로 몬 일본의 음모로 체포되었다. 곧 무혐의 결정으로 석방되었으나, 러시아정부에서 더 이상 그와 상거래를 하지 않음에 따라 경제적 궁핍에 시달려야 했다. 최재형은 1920년 러시아의 일본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연해주에 침입한 일본군에 의해 총살당하고 말았다. 현재 최재형의 후손들이 러시아 모스크바와 카자흐스탄 알마티 등지에서 거주하고 있다.


▶상훈과 추모


1962년 최재형의 후손에게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2189


<참고>


▣우수리스크에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 기념관 개관
국가보훈처, 한국의 독립운동사 알리는 러시아 대표적 독립운동 유적지 될 것


http://www.dongpo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39325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 기념비 러시아 우수리스크에 세워져


http://cupnews.kr/news/view.php?no=13111


▣러시아 우스리스크서 ‘최재형 기념비’ 제막식 열려
한청단도 참석...내년 순국 100주년 앞두고 다양한 행사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9577


▣[르포]‘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 기념비 제막식에 가다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3602448&code=61221111&cp=du


▣전로한족회중앙총회-우리역사넷 - 국사편찬위원회


http://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treeId=0202&levelId=tg_004_1760&ganada=&pageUnit=10


▣우수리스크의 독립투사 최재형을 만나다 : 신동아


http://shindonga.donga.com/3/all/13/111357/1


▣러 `항일운동 대부` 최재형, 총살당한 언덕엔 비문조차 없어 - 러시아 연해주를 가다


https://www.mk.co.kr/news/society/view/2018/10/6750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