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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연해주 여행]우수리스크 독립운동을 지휘 했던 이상설 선생 유허비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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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및산행

2019. 8. 9.









[러시아 연해주 여행]우수리스크 독립운동을 지휘 했던 이상설 선생 유허비 탐방

(2019/6/21일~6/25일,4박5일)


하나투어에서 주관하는 러시아 극동 지역 연해주에 있는 하바롭스크
블라디보스톡 우수리스크등에 있는 관광 명소와 한인 독립운동 유적지가 있는
관련 지역을 중점적으로 둘러보는 패케지 여행으로 2019년6월21일~6월25일(4박5일)
기간 동안 실시한 "하바롭스크/블라디보스톡/우수리스크 5일◈킹크랩/4성호텔/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 일정중 전날 블라디보스톡 지역에 명소를 돌아본 다음
우수리스크에서의 4일차 일정으로 당일 아침 블라디보스톡의 아지무트 호텔을
버스로 출발 약 2시간 정도 이동하여 첫번째로 우수리스크의 중심인 시청 소재지가
있는 혁명광장을 둘러 보고 두번째로 최재형 선생 생가,대한국민의회,거북이 공원을
둘러보고 세번째로 고려인 문화 센터와 안중근 기념비를 둘러보고 나서 탐방한
독립운동을 진두지휘 했던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 탐방 전경 입니다.

독립운동을 진두지휘 했던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에 대하여는 1917년 3월 2일 이곳
연해주에서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독립운동가 이상설 선생은 동지들에게 조국
독립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자신을 이곳 우스리스크 수이푼 강가에서 화장하여
강물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합니다. 이 과정에서 선생은 자신의 육체와
함께 자신이 연구하고 쓰고 입고 있던 모든 자료와 물품들을 함께 태워달라는
부탁을 하여 현재까지 선생의 업적을 연구하는데 난항을 겪고 있습니다.
훗날 선생을 추모하는 광복회와 고려 학술문화재단에서 2001년 10월 18일 러시아
정부와의 협조를 통해 이곳에 비석을 세웠습니다. 너른 벌판에 비석 하나만
덩그러니 서 있어 사후에도 조국의 땅이 아닌 타국에 남겨진 그리고 관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독립운동가의 안타까운 운명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수이펀 강(중국어 간체: 绥芬河; 중국어 번체: 綏芬河), 또는 솔빈강(한자:率賓江),
라즈돌나야 강(러시아어)은 중국과 러시아를 흘러 동해의 표트르대제 만으로 유입되는 강입니다.






  1907년 6, 7월경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이준(李儁)·
이위종(李瑋鍾)과 함께 고종의 특사로 참석하여, 대한제국의 국권회복 문제를
제기하고자 노력하는등,구한말 및 1910년대 러시아지역의 대표적인 항일운동가 이상설은
1917년 3월 2일 이곳 연해주에서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며 동지들에게 조국 독립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자신을 이곳 우스리스크 수이푼 강가에서 화장하여 강물에 뿌려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합니다. 훗날 선생을 추모하는 광복회와 고려 학술문화재단에서
2001년 10월 18일 러시아 정부와의 협조를 통해 이곳에 비석을 세웠습니다




















■이상설(李相卨) 선생 유허비(遺虛碑)   
 
독립운동을 진두지휘 했던 이상설 선생의 기념비 1917년 3월 2일 이곳 연해주에서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독립운동가 이상설 선생은 동지들에게 조국 독립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자신을 이곳 우스리스크 수이푼 강가에서 화장하여 강물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합니다. 이 과정에서 선생은 자신의 육체와 함께 자신이 연구하고 쓰고 입고 있던 모든 자료와 물품들을 함께 태워달라는 부탁을 하여 현재까지 선생의 업적을 연구하는데 난항을 겪고 있습니다.


훗날 선생을 추모하는 광복회와 고려 학술문화재단에서 2001년 10월 18일 러시아 정부와의 협조를 통해 이곳에 비석을 세웠습니다. 너른 벌판에 비석 하나만 덩그러니 서 있어 사후에도 조국의 땅이 아닌 타국에 남겨진 그리고 관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독립운동가의 안타까운 운명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이 선생은 1904년 일제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맞서 이를 철회시키고,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해 상소투쟁을 펼쳤다. 이후 만주와 노령으로 망명해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다.


1907년 광무황제의 특사로 이준,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에 파견돼 한국 독립을 호소했다. 1908년 연해주로 망명해 13도의군 창설과 성명회 결성, 권업회 활동 등을 앞장서서 이끌었다.


유해는 인근 수이펀 강에 뿌려졌으며 이후 광복회와 고려학술재단이 2001년 10월 8일 러시아정부의 협조를 얻어 러시아 우스리스크 수이펀(綏芬)강 인근에  독립운동가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 1870~1917) 선생의  유허비를 세웠다.  화강석으로 된 유허비는 폭 1m, 높이 2.5m의 기둥 모양이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되었던 독립운동가, 이상설


-한국의 독립을 위해 열과 성을 다했던 독립투사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우수리스크에서 별세


 충북 진천 출신의 독립운동가인 이상설은 25세 때 과거 시험에 합격, 27세 때 성균관 교수를 역임할 만큼 총명한 인물이었다. 그는 1907년 고종의 밀지를 받고,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위종과 함께 특사로 참여하였다. 그곳에서 이상설은 일본의 침략 행위를 전 세계에 알리려 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진 못하였다.
 
이후 그는 1910년 성명회를 조직하여 한일합방 반대 운동 및 합방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각국에 발송하는 독립운동을 벌였다. 또한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최재형, 김학만 등과 권업회를 조직, 권업신문을 발행하여 교민들에게 독립 사상을 고취시켰다. 1914년에는 이동휘, 이동녕 등과 대한 광복군 정부를 수립하고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상설은 1917년 3월 우수리스크에서 병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한국의 독립을 위해 열과 성을 다했던 독립투사였다.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우수리스크에서 쓸쓸히 눈을 감은 이상설의 마지막 유언은 다음과 같다.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뒤 제사도 지내지 말라.”




▣이상설과 헤이그 밀사사건(密使事件)▣

 

1905년 일제는 서유럽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한국을 보호한다는 승인받은 뒤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그러자 고종은 "보호조약은 무기로 위협하여 늑정(勒定)했기에 무효하다"는 내용의 급전을 미국 정부에 전달했으나, 미국은 반응이 없었다.

 

또한 고종은 한양의 각국 공사들에게 조약의 부당성을 호소했으나 역시 성과가 없었다.

 

이후 1907년 1월 16일 고종은 영국인 베델이 경영하는 ‘대한매일신보’에 미국·프랑스·독일·러시아 원수에게 보내는 서한을 발표했으나, 박제순(朴齊純) 친일내각이 21일 이를 위조라고 했다.

 

이에 고종은 같은 해 6월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마지막 기대를 걸었다. 이 회의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의 주창으로 열리는 회의로 40여 개 국의 대표 225명이 참석하여 주로 중재재판, 육해전 법규 등을 논의하지만 실제는 열강들 간의 식민지 쟁탈전에 따르는 분규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회의였다.

 

고종은 이상설(李相卨)을 정사로 하고 이준(李儁)과 이위종(李瑋鍾)을 부사로 파견하여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폭로함으로써 열강의 후원으로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1907년 4월 서울을 출발한 이준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을 만나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전 주(駐)러시아 공사 이위종과 이범진(李範晉)을 만났다.

 

먼저 이준·이상설·이위종 3명의 특사는 '장서'(長書:控告詞)를 러시아어로 번역하여 만국평화회의 의장국인 러시아 정부의 지지와 후원을 기대했지만 보름이 넘도록 반응이 없었다.

 

그러자 독일 베를린으로 가 뒤 '장서(長書)'와 부속문서인 '일인(日人)불법행위' 1권을 프랑스어로 인쇄한 뒤 만국평화회의 개최지인 헤이그로 가서 장서와 부속문서를 일본을 제외한 40여 개 참가국 위원들에게 보냈다.

 

밀사들은 만국평화회의 의장인 러시아 넬리도프를 방문하여 한국의 공식 대표로서 회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넬리도프가 자신의 권한 밖의 일이라며 네덜란드 정부와의 교섭을 권하여 외무장관을 방문했으나, 네덜란드 정부의 통보가 없다는 이유로 만나지도 못했다.

 

이에 영국·미국·프랑스·독일의 대표위원을 만나 지원을 호소했으나 거절당하였다.

그런데 이같은 사정이 알려지자 각국 신문기자들이 관심을 가졌는데, 특히 영국인 윌리엄 스태드가 국제협회의 후원을 얻어 그 회의 회보(쿠리에르 드 라 콩페랑스 Courrier de la Conference)에 장서의 전문을 게재했다.

 

그리고 7월 9일에는 회의장에 귀빈으로 초대되어 이위종이 프랑스어로 '한국의 호소'라는 제목의 일제 침략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여 큰 호응을 받았다. 이 연설 후 각국 신문에서 매일 한국을 여론이 일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국 대표들에게 외면당하여 본회의 참석은 좌절되었다.

 

참석이 좌절되자 이준은 조국을 지키지 못하여 분하고 화가나 음식을 끊었는데, 그로 인해 병이 나 7월 14일 호텔에서 병사했다.

 

이상설과 이위종은 이미 계획된 대로 각국을 순방하며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과 영세중립화를 역설했다.

 

헤이그 밀사사건을 들어 일제는 특사를 위칭(僞稱)했다며 재판에 회부토록 했고, 궐석재판에서 이완용 내각은 이상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종신형을 선고하여 끝내 귀국하지 못했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밀사파견 사실을 알고는 고종을 찾아가 협박한 후 고종의 폐위를 일본 총리대신에게 건의했다.

 

이에 이완용 내각은 어전회의를 소집하여 고종에게 일제에 대해 사죄해야 한다고 협박했다.

일제 통감부는 고종을 감금하고, 이완용·송병준 등으로 하여금 고종에게 퇴위하도록 협박하게 했다.

마침내 일본 군대의 포위 속에 고종은 순종에게 선위(禪位)한다는 미명으로 사실상 폐위 당했다.

 

이어 일제는 한국의 군대를 해산시키고 한일신협약을 강요하여 한국의 내정까지 장악하여 합병의 형식만 남게 되었다.

●이상설 유허지- 독립기념관


-현주소 : 우수리스크시 우쪼스노예 마을 주변, 라즈돌리노예강(옛 수이푼강) 옆


구한말 및 1910년대 러시아지역의 대표적인 항일운동가 이상설을 기념하여 세운 비
현재 이상설 기념비로 가는 길이 포장되어 있다. 이상설 비 입구에 무궁화를 심어 대한민국을 상징하고  있다.

이상설은 헤이그특사의 1인이며, 만주 용정에서 민족학교인 서전서숙을 설립하였고, 권업회 등에서 활동한 러시아지역의 대표적인 항일운동가이다. 2001년 10월 18일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이 이곳에 이상설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위치는 우수리스크수이푼 강 유역이다.


이상설은 1917년 3월 2일 48세의 일기로 작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유언을 남겼다.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룩하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고국에 갈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원고는 모두 불태우고 그 재마저 바다에 날린 후에 제사도 지내지 마라”


(비문)
보재 이상설 선생은 1870년 한국 충청북도 진천에서 탄생하여 1917년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 서거한 한국독립운동의 지도자이다. 1907년 7월에는 광무 황제의 밀지를 받고 헤이그 만국평화 회의에 이준 이위종 등을 대동하고 사행하여 한국독립을 주장하다. 이어 연해주에서 성명회와 권업회를 조직하여 조국독립운동에 헌신 중 순국하다.

그 유언에 따라 화장하고 그 재를 이곳 수이푼 강물에 뿌리다.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은 2001년 10월 18일 러시아정부의 협조를 얻어 이 비를 세우다.



●이상설(李相卨)선생 유허비(遺虛碑) 


-위치 : 연해주 우수리스크 우쪼스노예 마을 주변, 라즈돌리노예강 옆


-이상설선생 유허비 동영상 : https://youtu.be/YsiSz23Cs0U


1906년 북간도 독립운동 독립운동계의 대표적인 지도자 이상설은 1906년 북간도 독립운동 근거지였던 용정에 서전서숙을 개숙한 뒤 이듬해 7월 헤이그특사의 정사가 되어 구국 외교에 헌신하였으며, 1908년 연해주로 망명한 뒤로는 십삼도의군 창설과 성명회 결성, 그리고 권업회 활동 등을 지도했던 독립운동계의 대표적인 지도자였다.


이상설은 1906년 북간도 독립운동 근거지였던 용정에 서전서숙을 개숙한 뒤 이듬해 7월 헤이그특사의 정사가 되어 구국 외교에 헌신하였으며, 1908년 연해주로 망명한 뒤로는 십삼도의군 창설과 성명회 결성, 그리고 권업회 활동 등을 지도했던 독립운동계의 대표적인 지도자였다.


그는 이범세(李範世)·여규형(呂圭亨)·이시영(李始榮)·이회영(李會榮) 등과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또 헐버트(Hulbert,H.B.)와도 친교를 맺어 영어·프랑스어 등을 익혔으며, 특히 수학·물리·화학·경제학·국제법 등을 공부하였다. 1894년(고종 31) 문과에 급제해 이이(李珥)를 조술(祖述: 스승의 도를 이어받아 서술하는 일)할 학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 뒤 비서감비서랑(祕書監祕書郎)에 임명되었다. 1896년 성균관교수 겸 관장·한성사범학교교관·탁지부재무관 등을 역임하고 궁내부특진관에 승진하였다.

1904년 6월 박승봉(朴勝鳳)과 연명으로 일본인의 전국 황무지개척권 요구의 침략성과 부당성을 폭로하는 「일인요구전국황무지개척권불가소(日人要求全國荒蕪地開拓權不可疏)」를 올렸다. 고종은 이 상소를 받아들여 일본의 요구를 물리쳤다고 한다. 이 해 8월 보안회의 후신인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의 회장에 선임되었다.


1905년 학부협판(學部協辦)과 법부협판을 역임했으며, 11월 초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에 발탁되었다. 1905년 11월 이완용(李完用)·박제순(朴齊純) 등 5적(五賊)의 찬성으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을 당시, 그는 대신회의의 실무 책임자인 참찬이었지만 일본의 제지로 참석하지 못하였다. 이 조약이 고종의 인준을 거치지 않은 사실을 알고 상소를 올려 고종은 사직(社稷)을 위해 죽을 결심으로 5적을 처단하고, 5조약을 파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조약체결 직후 조병세(趙秉世)·민영환(閔泳煥)·심상훈(沈相薰) 등 원로대신들을 소수(疏首)로 백관의 반대 상소와 복합항쟁(伏閤抗爭)을 벌이도록 주선하였다. 11월 말 민영환의 자결 소식을 듣고 종로에 운집한 시민에게 울면서 민족항쟁을 촉구하는 연설을 한 뒤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1906년 봄 이동녕(李東寧)·정순만(鄭淳萬) 등과 북간도 용정(龍井)으로 망명하였다. 8월경 그 곳에 항일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건립하고 숙장(塾長)이 되었다. 여기에서 이동녕 등과 역사·지리·수학·국제법·정치학 등의 신학문과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1907년 6, 7월경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이준(李儁)·이위종(李瑋鍾)과 함께 고종의 특사로 참석하였다. 여기서 대한제국의 실정과 국권회복 문제를 제기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국력의 뒷받침이 없었고, 제국주의 열강의 이권 협상의 성격을 띤 회의였기 때문에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해 6월 대한제국의 주장을 밝힌 「공고사(控告詞)」를 평화회의와 각국 위원에게 보냈다. 또, 헐버트와 이위종·송헌주(宋憲澍)·윤병구(尹炳球)를 대동하고 영국·프랑스·독일·미국·러시아 등지를 순방하면서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이 동양 평화의 관건임을 주장하였다. 나아가 한국의 영세 중립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그 해 8월 본국 정부에서 재판에 회부되어 궐석 판결로 사형이 선고되기도 하였다.


1908년부터 미국에 1년여 동안 머무르면서 대한제국의 독립지원 호소를 계속하였다. 또한 각지의 교포를 설득해 독립운동의 새로운 계기를 만드는 데 힘썼다. 또한, 1908년 8월 콜로라도주 덴버시에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자회의(愛國同志代表者會議)에 이승만(李承晩)과 연해주(沿海州) 대표로 참석하였다.


1909년 4월 국민회(國民會) 총회장 최정익(崔正益) 등과 국민회의 제1회 이사회를 열고 구체적 사업을 결정한 다음, 정재관(鄭在寬)과 연해주로 떠났다.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승희(李承熙)·김학만(金學萬)·정순만 등과 항카호(興凱湖) 남쪽 봉밀산(蜂密山) 부근에 땅 45방(方)을 사서 100여 가구의 한국 교포를 이주시키고, 최초의 독립운동기지라 할 수 있는 한흥동(韓興洞)을 건설하였다.


국내외의 의병을 통합해 보다 효과적인 항일전을 수행하고자 1910년 6월 유인석(柳麟錫)·이범윤(李範允)·이남기(李南基) 등과 연해주 방면에 모인 의병을 규합해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하였다. 유인석과 상의해 이 해 7월에는 전 군수 서상진(徐相津)을 본국에 보내어 고종에게 13도의군 편성, 군자금의 하사와 고종의 아령파천(俄領播遷)을 권하는 소를 올려 망명정부의 수립을 기도하였다.


8월에 국권이 상실되자, 연해주와 간도 등지의 한족을 규합,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였다. 그런데 9월 일제와 교섭한 러시아에 의해 연해주 니콜리스크(雙城子)로 추방되었다가 블라디보스토크로 왔다. 1911년 김학만·이종호(李鍾浩)·정재관·최재형(崔在亨) 등과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해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권업신문(勸業新聞)』의 주간을 맡기도 하였다. 1913년 이동휘·김립(金立)·이종호·장기영(張基永) 등과 나자구(羅子溝)에 사관학교를 세워 광복군 사관을 양성하였다.

1914년 이동휘·이동녕·정재관 등과 중국과 러시아령 안에서 동지들을 규합해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워 정통령(正統領)에 선임되었다. 1915년 3월경 상해 영조계(英租界)에서 박은식(朴殷植)·신규식(申圭植)·조성환(曺成煥)·유동열(柳東說)·유홍렬(劉鴻烈)·이춘일(李春日) 등의 민족운동자들이 화합해 신한혁명단(新韓革命團)을 조직해 본부장에 선임되었다.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하다가 1917년 3월 니콜리스크에서 죽었다. 그는 우수리스크에서 자신의 육신을 화장할 것과 자신의 필적을 모두 소각할 것을 유언으로 남겨두고 48세를 일기로 소슬히 타계하였다. 우수리스크에서의 이러한 그의 유적을 기려 광복회와 고려학술재단은 2001년 10월 18일 러시아정부의 협조를 얻어 이곳에 유허비를 세웠다. 김니콜라이 우수리스크 고려인협회장이 개인재산을 들여 경내 주변에 소나무를 심어놓았으며, 출입 계단의 벽돌 일부가 파괴된 것을 제외한다면, 유허비 경내는 비교적 양호하게 관리되어 있다.


<참고>


◈이상설(李相卨)-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205XX79100149



◈이상설 선생 유허비-이상설 보도자료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44Ek&articleno=16143907


◈우수리스크 수이푼 강가의 이상설 선생 유허비-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449871


◈고종은 왜 망명한 이상설을 헤이그 특사로 보냈나?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area/area_general/891104.html#csidx8b6f3c49d614a7f94f2f37bbea729a1


◈쓸쓸한 ‘독립운동 성지’… 우린 언제 이 빚을 다 갚을까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507102148585#csidx4c8d8decf0ccfb98b0a7f2501dd18e2


◈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1부)] 日帝에 항거 독립투사들… 두만강 넘어 첫 임시정부 세워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2977770


◈독립운동의 땅, 연해주를 찾아서-은평시민신문


http://www.ep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15504


◈대륙을 향한 분단의 현실, 연해주를 가다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Print.html?idxno=1225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