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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연해주 여행]우수리스크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성터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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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및산행

2019. 8. 9.









[러시아 연해주 여행]우수리스크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성터 탐방

(2019/6/21일~6/25일,4박5일)


하나투어에서 주관하는 러시아 극동 지역 연해주에 있는 하바롭스크
블라디보스톡 우수리스크등에 있는 관광 명소와 한인 독립운동 유적지가 있는
관련 지역을 중점적으로 둘러보는 패케지 여행으로 2019년6월21일~6월25일(4박5일)
기간 동안 실시한 "하바롭스크/블라디보스톡/우수리스크 5일◈킹크랩/4성호텔/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 일정중 전날 블라디보스톡 지역에 명소를 돌아본 다음
우수리스크에서의 4일차 일정으로 당일 아침 블라디보스톡의 아지무트 호텔을
버스로 출발 약 2시간 정도 이동하여 첫번째로 우수리스크의 중심인 시청 소재지가
있는 혁명광장을 둘러 보고 두번째로 최재형 선생 생가,대한국민의회,거북이 공원을
둘러보고 세번째로 고려인 문화 센터와 안중근 기념비를 둘러보고 네번째로
독립운동을 진두지휘 했던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를 둘러보고 나서 탐방한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성터 탐방 전경 입니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성터에 대하여는 우스리스크의 중국식 이름인 '쌍성자(雙城子)'는
고구려의 도읍 형태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측되는 지명이며, 이를 계승한 발해의 5경 12부 중
'솔빈부'가 이곳, 우스리스크를 중심으로 건축되었습니다. 발해가 없어진 후에는 중국의
슬하 아래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1860년, 베이징 조약 체결로 러시아 영토의 일부분이
되었습니다. 이후, 조선인의 이주가 시작된 첫 지역으로 불리는 지역이 됩니다.
주변의 지형을 그대로 이용한 외성에서는 우스리스크 시내를 한눈에 관찰할 수 있으며,
내성 터에는 나무들이 마치 수문장처럼 자라나 있습니다.
















이상설 유허비를 뒤로 두고 남으로 달려 낮은 언덕을 넘어가면
가슴이 확 트이는 넓은 대지를 만날 수 있다. 발해 외성이 있던 터이다.
발해(渤海 698년 ~ 926년)는시대에는 연해주의 대부분이 발해의 영역권이었고,
우스리스크는 발해의 지방 행정구역인 15부 중 말(馬)로 유명한 솔빈부의 중심지였기에
발해 유적이 빈번하게 출토되고 있다. 발해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는 평지에
성을 쌓고 유사시에 대비하기 위하여 가까운 산악지역에 산성을 하나 더 쌓았다.
물론 이처럼 평지성과 산성을 함께 두는 것이 발해만의 고유한 전통은 아니다.
고구려의 축성 방식을 이어받은 것이다.  


●[동영상]블라디보스톡 신한촌 기념비 & 우수리스크 발해 옛성터에서
Click  ▼
https://youtu.be/ISNuglhJYCU














블라디 보스톡으로 가면서 바라본 아무르스키만 입니다.
  표트르 대제만(러시아어)은 프리모르스키 지방에 위치한 만이다. 길이는 70km이고
너비는 200km이고 깊이는 65m이다. 리아스식 해안으로 겨울에는 얼어붙는다. 중앙에
무라비요프-아무르스키 반도가 돌출되어 있으며, 그 끝부분에 블라디보스토크가 있다.
무라비요프-아무르스키 반도의 남서쪽에는 루스키섬이 있다. 무라비요프-아무르스키
반도를 중심으로 동쪽은 우수리스키만, 서쪽은 아무르스키만이라고 부른다.













저녁 석식으로 조지아식 (힝칼리 + 하차푸리 + 하르초) 요리로 러시아의 대표 술, 보드카에
러시아식 만두 '힝칼리',조지아식 피자 '하차푸리' 고기와 토마토의 완벽 조화! 매콤 수프 '하르초' 입니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성터

 
우스리스크의 중국식 이름인 '쌍성자(雙城子)'는 고구려의 도읍 형태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측되는 지명이며, 이를 계승한 발해의 5경 12부 중 '솔빈부'가 이곳, 우스리스크를 중심으로 건축되었습니다. 발해가 없어진 후에는 중국의 슬하 아래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1860년 베이징 조약 체결로 러시아 영토의 일부분이 되었습니다. 이후, 조선인의 이주가 시작된 첫 지역으로 불리는 지역이 됩니다. 주변의 지형을 그대로 이용한 외성에서는 우스리스크 시내를 한눈에 관찰할 수 있으며, 내성 터에는 나무들이 마치 수문장처럼 자라나 있습니다.


우수리스크에는 ‘크라스노야르성’이라는 발해의 성터가 남아 있습니다. 우수리스크 시내에서 4~5km 가량 떨어진 이 성은 내성, 외성, 동암성 등 세 구역으로 구성됐으며 외성은 전체 길이가 8km가 넘고 성벽은 3~5m에 이르며 산의 절벽은 방어시설로, 수이푼강은 자연해자로 이용할 수 있도록 축조되었습니다.


1995년 극동고고학 연구소가 이 성을 발굴한 결과 주거지에서 온돌구조가 발견됐고 9세기 당백자편이 출토되어 발해시대의 성이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솔빈강(수이픈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자리잡은 이곳에 지금은 그 시절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지만, 발해의 5경 15부 중 말을 방목하여 기르던 솔빈부가 위치했던 만큼, 5월이 오면 노란 민들레와 파란 하늘빛으로 이곳은 환상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성을 벗어나 수이푼강을 건너 시내 쪽으로 향하면 절터로 추정되는 넓은 공원이 있다.


지금은 아름드리 나무들만 빼곡히 서 있지만, 소박한 연꽃 문양이 희미하게 새겨진 주춧돌이 곳곳에 널브러져 있어 이곳이 앞서 들렀던 발해 성터와 관련된 곳임을 짐작케 한다.


크라스노야로프성’이라고도 하는데 절벽을 방어시설로, 강을 자연 해자로 이용한 산성이다. 성의 기본 평면은 반월형 형태를 하고 있으며, 강에서 보이는 산성의 외형은 대동강을 낀 평양성과 백마강을 낀 부소산성을 연상시킨다. 내성, 외성, 동암성 등 세 구역으로 이루어졌다. 외성은 전체 길이가 8㎞이상이 되며, 성의 외벽은 일부 2~3중으로 되어있다. 성벽 높이는 3~5m정도이다.



1950년대 조사에서 내성 내부에서 100여개의 주춧돌이 확인되어 대규모의 목조건물지가 있었던 곳으로 확인되었다. 1995년 극동고고학연구소에서 발굴한 성 내부의 경사면에 위치한 집 자리에서는 주겆의 외벽을 돌아가는 온돌구조가 발굴되었다. 또 12세기 송, 원대의 도자기 편과 청동제품 및 9세기의 당백자 편도 출토되어 발해의 문화를 알려주고 있다.


성안에는 넓은 공터가 자리 잡고 있고, 성위에서는 멀리 우수리스크 전체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성 밖에는 아직 토성이 남아 있으며 성 밖을 흐르는 수이푼강이 자연적인 해자로서 적의 침략을 막아주는 보호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발해성터 추정지  : https://youtu.be/9kkLddKNEV8



 ●연해주에서 발해 솔빈부 성터 나왔다
  
 김현민 승인 2018.10.25 10:49


한러 공동발굴조사…풍납토성과 비슷한 축조방식, 삼족기도 출토

 
발해는 8~10세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리며 동북아시아의 문화강국으로 자리 잡았다. 발해는 전 국토에 5경(京)·15부(府)·62주(州)를 설치했는데, 솔빈부는(率賓府)는 15부 중의 하나다. 솔빈부는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에 설치되어, 고려시대 중국 북부를 차지한 금(金)나라 때까지 존재했다.


이 솔빈부에서 발해의 옛 성터가 발굴되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최종덕)는 지난 8월부터 9월까지 러시아과학원 극동지부 역사학고고학민족학연구소(소장 N. N. 크라딘)와 공동으로 연해주 남서부 라즈돌나야 강가에 자리한 스타로레첸스코예 발해 평지성에 대한 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를 25일 발표했다.

 
스타로레첸스코예 유적은 발해의 지방행정구역 15부 중 솔빈부(率濱府)의 옛 땅에 있는 평지성이다. 서쪽과 북쪽, 동쪽으로 라즈돌나야 강(옛 지명 솔빈강, 중국에서는 수분하로 불림)이 흘러 해자 역할을 하고 있다.


150m 길이의 남벽과 30m 길이의 짧은 서벽이 남아있다. 현재 인근에 흐르는 강 때문에 성 내부 서쪽이 유실되는 등 유적의 원형이 계속 훼손되고 있어 성 남벽과 서편 일대를 중심으로 지난 2017년 7월부터 긴급 조사를 통해 그 현황을 기록·보존하고 있었다.

이번 조사에서는 스타로레첸스코예 유적 성벽의 전체 규모와 축조 방식을 확인했다. 성벽은 강자갈과 점토로 기초를 다진 후 중심부를 사다리꼴(폭 4m, 높이 2m)모양으로 판축기법을 사용해 쌓고 다시 흙으로 덧쌓아 축조되었다.

 

중심부는 점토층과 모래층을 번갈아 가며 20겹 정도를 쌓았으며, 판축한 점토층의 윗면에서는 목봉(木棒) 등으로 다진 흔적이 확인되었다. 또한, 성벽을 쌓고 나서 유실을 방지하고자 강돌로 윗면을 덮었으며, 성벽의 전체 폭은 14m에 이른다. 판축은 판자를 양쪽에 대고 그 사이에 흙을 단단하게 다져 쌓는 건축방식으로, 한성백제의 도성인 서울 풍납토성도 같은 방식으로 축조되었다.

강 때문에 계속 훼손되고 있는 성 내부 서편에서는 강돌을 이용한 지상 구조물의 흔적과 함께 구덩이를 판 후 돌을 쌓아 벽을 축조한 지하식 저장고 등이 확인되었다. 저장고 내부에서는 다양한 발해 토기, 동물 뼈, 물고기 뼈와 비늘, 철체 손칼 등 당시 발해인의 생활상을 연구할 수 있는 유물이 다수 출토되었다.

 

특히, 이번 저장고에서 출토된 삼족기(三足器)는 원통형인 다리 세 개가 흑회색 작은 항아리의 편평한 바닥에 부착된 형태이다. 삼족기는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성(현재 중국 헤이룽장성 닝안시 인근)에서 2점이 출토된 바 있으며, 그 중 한 점은 유약을 바른 발해 삼채(三彩)로, 발해 유물 중에선 출토가 드문 토기이다. 삼채는 황유나 백유, 녹유, 갈유, 남유 등 3가지 이상의 연유(燃油)를 바른 도기를 말한다.


유적은 중국 동북지역에서 연해주로 흐르는 강가에 위치하며 다수의 저장용 구덩이(수혈)가 성 내부에서 확인된데다 삼족기, 원통형 기대 조각 등 고급기종이 나와 조사지역이 발해의 중심부에서 연해주 동해안으로 진출하는데 중요한 물류거점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발해의 옛터는 중국, 러시아, 북한에 흩어져 있어 실물자료를 통한 직접적인 조사가 힘든 상황이다. 이에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지난 2006년부터 러시아 연해주 소재 발해유적에 대한 분포현황조사와 발굴조사를 추진하여, 발해의 동북방 중심지로 기능했던 콕샤로프카 유적과 발해의 영역확장을 보여주는 시넬니코보-1 산성 등 다양한 발해유적의 실체를 확인한 바 있다.


김현민inkim234752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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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ww.opinio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819



 ●발해성터(외성)-대한민국 임시정부기념사업회


이상설 유허비를 뒤로 두고 남으로 달려 낮은 언덕을 넘어가면 가슴이 확 트이는 넓은 대지를 만날 수 있다. 발해 외성이 있던 터이다. 연해주는 아시아 대륙의 남동쪽 끝으로 한반도의 북쪽과 맞닿아 있으며, 동서양을 연결하는 초원지대의 시작점이다. 본래는 중국 땅이었으나 1860년에 중국과 러시아가 맺은 베이징 조약으로 인하여 러시아 영토가 되었으며, 그때 이후 지금까지 러시아 땅이다. 이곳은 우리 땅 한반도에서 두만강을 건너면, 바로 발길이 미쳤던 곳이기에 선사시대부터 한반도와 서로 오고 갔던 동일한 문화권이었고, 따라서 함흥평야지역에 위치했던 옥저의 유물이 연해주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도 다수 발굴된다. 


  특히 발해시대에는 연해주의 대부분이 발해의 영역권이었고, 우스리스크는 발해의 지방 행정구역인 15부 중 말(馬)로 유명한 솔빈부의 중심지였기에 발해 유적이 빈번하게 출토되고 있다. 발해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는 평지에 성을 쌓고 유사시에 대비하기 위하여 가까운 산악지역에 산성을 하나 더 쌓았다. 물론 이처럼 평지성과 산성을 함께 두는 것이 발해만의 고유한 전통은 아니다. 고구려의 축성 방식을 이어받은 것이다.


 고구려는 성을 쌓을 때 대체적으로 평지성과 산성을 함께 축조하였다. 고구려의 초기 수도인 환인에 오녀산성과 하고성자성이 나란히 있으며, 두 번째 수도인 집안에는 환도산성과 국내성이 서로 사이좋게 어깨를 맞대고 있다. 이 전통이 우스리스크의 발해 성에서 고스란히 적용된 듯, 시내에 두 개의 평지성을 쌓은 흔적이 현재 남아있고 시 외각의 남쪽에 있는 높은 구릉 지대에는 산성을 두었다.


출처 : http://www.kopogo.com/bbs/board.php?bo_table=writing4&wr_id=13



●발해(渤海)-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698년부터 926년까지 한반도 북부와 만주·연해주에 존속하며 남북국을 이루었던 고대국가.


<건국과 성쇠>


1. 건국


발해는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이 지난 뒤인 698년에 건국되었다. 건국의 기폭제가 된 것은 696년에 요서(遼東) 지방의 영주(營州)주 01)에서 일어난 거란족의 반란이다. 영주는 당나라가 동북쪽 이민족을 통제하던 거점도시로서, 주변 지역에서 귀순해오거나 강제로 끌려온 이민족들이 다수 거주하였다. 그러한 이민족에는 고구려 유민을 비롯하여 거란족, 해족(奚族), 말갈족 등이 있었다.


696년 5월에 거란족 수장인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영주도독의 가혹한 통치에 불만을 품고 반기를 들었고, 이들은 유주(幽州, 지금의 베이징)까지 공격하여 당나라에 큰 타격을 주었지만, 이듬해에 겨우 평정되었다. 영주에 함께 거주하던 대조영 집단도 이들에 동조했고, 이 거사가 실패로 돌아갈 무렵에 무리를 이끌고 영주를 탈출했다. 이 때 말갈 추장인 걸사비우(乞四比羽) 집단도 동참했다.


두 집단은 요수(遼水)를 건너 요동(遼東)으로 건너왔으니, 이들이 영주에서 말갈족의 거주지인 북방으로 손쉽게 탈출하지 않고 아직 당나라 세력이 남아 있는 동쪽의 고구려 옛 땅으로 돌아온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고구려 유민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사실을 암시하고, 발해 건국이 결국은 고구려의 부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당나라에서는 처음에 대조영의 아버지 걸걸중상(乞乞仲象)에게는 진국공(震國公), 걸사비우에게는 허국공(許國公)을 봉하여 이들을 무마하려 했다. 그러나 걸사비우가 이를 거절함에 따라 당나라 군대의 추격이 시작되었다. 이 때 당나라 장수는 이해고(李楷固)로서 거란 반란군에 가담했다가 당나라에 항복한 인물이다. 그는 먼저 걸사비우를 공격하여 그를 죽였고, 이 무렵에 걸걸중상도 사망하였다. 이에 따라 대조영이 두 집단을 통합하였고, 당나라 군대의 예봉을 피하기 위해 랴오둥을 벗어났다. 그렇지만 이해고는 랴오닝성〔遼寧省〕과 지린성〔吉林省〕경계에 있는 천문령(天門嶺)을 넘어 추격해오자, 대조영 집단은 부득이 당나라 군대와 일전을 벌이게 되었다. 다행히 이 전투에서 이해고가 대패하여 귀환했다.


대조영은 무리를 수습하여 영주로부터 2천리나 떨어진 동모산(東牟山)에 나라를 세웠다. 발해가 건국된 해는 일본측 기록인『루이쥬코쿠시(類聚國史)』에 전해진다. 건국지는 지린성 돈화(敦化)에 있는 성산자산성(城山子山城)으로 여겨진다. 이곳은 말갈족의 터전이기에 기록에는 ‘읍루의 옛 땅’에 도읍했다고 했다. 그렇지만 대조영이 처음부터 건국지로 지목한 것이 아니라, 당나라 추격에 쫓겨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곳이었다. 산 위에 성을 쌓아 건국한 것은 혹시 있을지 모르는 당나라 군대의 공격에 맞서기 위한 것으로서, 건국 당시 방어에 급급했던 절박한 사정을 추측할 수 있다.


건국 집단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으로 구성되었다. 영주를 탈출할 때에 걸걸중상과 걸사비우가 독립적으로 망명자를 통솔했으니, 말갈 추장인 걸사비우는 말갈족을 지휘했고, 걸걸중상은 고구려 유민을 지휘했다. 이때의 규모는 1천 명 가량이었다. 발해를 건국하고 난 뒤에 주변에 흩어져 살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점차 흡수함에 따라 세력이 날로 불어나 마침내 10여만 호에 정예병이 수만 명이나 되었다. 이 가운데 주도권은 고구려 유민이 쥐고 있었을 것이니, 현전하는 발해인의 성씨 가운데 고(高)씨가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고, 발해 왕실과 귀족이 묻힌 육정산고분군(六頂山古墳群)에서 제일 상층부에 속하는 무덤들에 고구려 요소가 강하게 나타나는 사실 등에서 증명된다.


처음에는 국호를 ‘진국(振國)’이라 했다. 진국(震國)이란 기록도 있는데, 이것은 걸걸중상에게 봉해진 진국공에서 유래해서 추후에 잘못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대조영이 713년당나라로부터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 받은 뒤에는 국호를 ‘발해’로 바꾸었다.『신당서(新唐書)』발해전에서 이때에 “말갈 칭호를 버리고 발해로만 불렀다”고 한 것은 당나라에서 그렇게 했다는 말이다. 당나라는 발해국을 공식 인정하기 전에는 말갈 집단으로 비하해 불렀기 때문이다.


대조영이 고구려인인지 말갈인인지 끊임없이 논란이 되어 왔다. 이는 발해국의 귀속과 직결된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순수한 고구려인도 순수한 말갈인도 아니었으니, 역사 기록에 고구려 별종(別種)이라 한 것은 이 때문이다. 대조영 집안은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 출신으로서 일찍이 고구려에 귀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고구려 장수를 역임했으며,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반란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중국으로 강제 이주시킬 때에는 그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고구려 멸망기에는 이미 고구려 유력가문으로 성장해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그는 ‘말갈계 고구려인’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기에 건국 시에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아울러 통솔할 수 있었다.


건국을 선포한 뒤에 고왕(高王)대조영(?∼719)이 추진한 것은 주변국과의 외교관계 수립이었다. 당나라 군대가 언제 다시 공격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먼저 당나라와 대립하고 있던 동돌궐(東突厥)에 사신을 파견했고, 역시 당나라와 불편한 관계에 있던 신라에도 사신을 파견하여 방패막이로 삼았다. 이 때 신라는 대조영에게 제5등 대아찬을 주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뒤 당나라도 발해에 화해의 몸짓을 보내왔다. 707년경에 당중종은 장행급을 파견하여 대조영을 위무했고, 대조영은 그 보답으로 아들을 장안으로 보내 숙위(宿衛)하게 했다. 마침내 713년에 당현종이 최흔을 파견하여 대조영을 발해군왕,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으로 책봉하고, 아들 대무예(大武藝)를 계루군왕(桂婁郡王)으로 책봉함으로써, 비로소 공식적인 외교관계가 수립되었다. 이로부터 발해는 거의 매해 사신을 파견하였다.


2. 발전


발해의 발전은 2대 무왕(武王, 719∼737)과 3대 문왕(文王, 737∼793) 때에 이루어졌다. 무왕대무예는 즉위 후에 인안(仁安)이란 연호를 선포하였으니, 독자적인 연호의 사용은 발해 멸망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왕의 통치기에 동모산에서 현주(顯州, 현재의 지린성 和龍)로 도읍을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호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정복군주라는 사실이다. 그가 즉위한 뒤에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발해 영토의 기본 틀이 마련되었다. 727년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와 부여의 땅을 상당수 회복했음을 선언했다. 또 북쪽과 동쪽의 말갈 땅도 복속시켰으며, 남쪽의 대동강과 원산만 방면으로도 진출하여 신라의 경계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의 활발한 정복 활동은 필연적으로 주변국과의 마찰을 야기했고, 마침내 발해가 당나라와 대결하는 국면으로 치달았다. 지금의 흑룡강(黑龍江, 러시아 아무르강) 주변에 살던 흑수말갈은 발해 세력이 자신에게 점차 다가오는 데에 불안을 느끼자 독자적으로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발해를 견제하려 했다. 당나라는 이를 호기로 삼아서 726년에 흑수주도독부를 설치하고 감독관을 파견했다. 무왕은 이런 조치가 당나라와 흑수말갈이 앞뒤에서 협격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하였고, 727년 일본에 사신을 처음 파견하여 국교를 수립함으로써 고립을 타개하고자 했다. 이로써 발해는 돌궐, 거란, 일본과 연합하고, 당나라는 신라, 흑수말갈과 연합하는 동아시아 세력 판도가 형성되었다.


이런 와중에 무왕은 동생 대문예(大門藝)와 장인 임아(任雅)를 보내 흑수말갈을 치게 했다. 그러나 동생은 당나라에 숙위했던 경험이 있어 당나라에 대적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지를 잘 알고 있었으니, 수차례 간언하다가 결국 무왕의 분노를 샀다. 신변에 위험을 느낀 대문예는 당나라로 망명했고, 그의 송환을 둘러싸고 발해와 당나라 사이에 갈등이 일었다. 그러던 차에 무왕은 732년 9월에 발해 장군 장문휴(張文休)를 보내 등주(登州)를 공격하였고, 이듬해에는 거란과 연합하여 하북 지방을 공격함으로써, 마침내 국제전으로 비화되었다. 당나라는 군사를 보내 이를 격퇴하는 한편, 신라를 끌어들여 발해 남쪽을 공격하게 했다. 신라의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전쟁이 종식된 뒤인 735년에 신라는 그 공로로 패강 이남의 영유권을 인정받았다. 발해도 735년에 당나라에 사죄하는 사신을 파견함으로써, 양국 간의 국교가 복원되었다.


무왕이 사망하고 문왕이 즉위한 뒤에는 정복전쟁을 통하여 외부로 발산하던 국력을 내부로 수렴하는 정책으로 선회했다. 57년간이나 재위한 그는 시호에서 보듯이 문치(文治)에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대흥(大興)이란 연호를 택했다가 774년에는 보력(寶曆)으로 개원하였다. 신라와의 상설 교통로인 신라도(新羅道)가 그의 통치 전반기에 설치된 듯하다. 또 즉위한 직후에 당나라로부터 국가 의례를 정한 개원례(開元禮) 및 역사서를 수입하는 등 국가 문물제도의 정비에 힘을 기울였다. 이에 따라 건국 초기에 고구려 제도를 많이 따랐던 모습이 사라지고, 당나라 제도가 새로운 표준이 되었다.


중앙행정기구와 중앙군대, 관리의 등급제도와 복장제도를 마련했다. 지방에는 부(경)-주-현의 3단계 행정체계가 갖추어졌다. 전국에 5경을 둔 것은 당나라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수도를 중앙이 아닌 북쪽에 둔 것이나 네 번 수도를 옮긴 것에서는 독자적인 면이 엿보인다.


문왕은 이상적 군주인 전륜성왕(轉輪聖王)을 자처하고 황제국을 지향했다. 그의 존호에 금륜(金輪)이란 단어가 보이는 것은 전자의 증거이고, 황상(皇上), 황후(皇后) 칭호나 조고(詔誥) 용어 등이 사용된 것은 후자의 증거이다. 국력 신장에 따라 당나라는 762년에 발해군왕에서 발해국왕으로 승격하여 책봉했다. 명목적인 것이지만, 이때에 비로소 독립국가로 인정한 것이다. 이런 자신감을 토대로 771년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자신이 천손(天孫)임을 자처하고, 양국의 관계를 구생관계(舅甥關係, 장인과 사위)로 설정하여 일본의 반발을 샀다.


그의 시대에는 천도가 잦았다. 당나라에서 안녹산의 난이 일어난 직후인 756년 초에 현주에서 상경(上京, 현재의 중국 헤이룽장성 닝안(寧安))으로 천도했고, 780년대 후반에 동경(東京, 현재의 중국 지린성 琿春)으로 천도했으며, 그의 사망 직후에 상경으로 되돌아왔다.


3. 내분


문왕이 장기간 통치를 한 뒤에 사망하자, 발해는 그 후유증을 앓았다. 동궁이 먼저 사망하여 친척인 대원의(大元義)가 왕위에 올랐지만, 그의 성격이 포악하여 죽임을 당했다. 이로부터 6명의 왕이 25년 사이에 교체되었으니, 이것은 발해 내부에서 정치적 분쟁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5대 성왕(成王)은 동경에서 상경으로 천도하고 그의 연호처럼 중흥(中興)을 꾀했지만 곧 사망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6대 강왕(康王) 때에 고구려 계승의식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798년 발해 국서에서는 “교화를 따르는 부지런한 마음은 고씨에게서 그 발자취를 찾을 수 있다”고 언명했다.



4. 융성


818년 10대 선왕(宣王, 818∼830)이 즉위하자 내분이 진정되면서 발해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그의 시대에 침체기를 벗어나 중흥을 이룩했다. 연호를 건흥(建興)으로 삼은 선왕은 고왕대조영의 아우인 대야발(大野勃)의 4세손으로, 이로부터 왕의 계보가 바뀌었다.


그는 정복활동을 통하여 영토를 넓혔으니, “바다 북쪽의 여러 부락을 토벌해 영토를 크게 여는 데에 공이 있었다”고 한다. 이때 발해는 흑룡강(黑龍江) 유역까지 경략하여 흑수말갈을 통제하기에 이르렀다. 또 남쪽으로 요동지방과 대동강 방면으로도 진출했다. 이로써 발해의 정복활동은 거의 마무리되었다. 그 결과 처음에 ‘사방 2천리’였던 영토가 이 무렵에 ‘사방 5천리’로 크게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사방의 경계가 확정되었고, 5경, 15부, 62주가 완비되었다.


대외관계도 안정되어 재위 12년간 일본에 다섯 차례나 사신을 파견하여 어느 때보다도 빈번하였으며, 교류 성격도 더욱 더 상업적으로 변모했다. 이 무렵에 일본이 교류에 소극적이었던 것과 대조적이다. 11대 왕 대이진(大彛震, 831∼857)이 즉위한 뒤에는 관제를 크게 개편하여 좌우신책군(左右神策軍), 120사(司)를 두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왕권이 재차 강화되면서 융성기를 맞이했고, 마침내 당나라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란 평가를 받았다. 그렇지만, 이 융성기에 당나라와 신라가 내분에 휩싸이면서 해동성국의 모습을 전하는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 제11대 왕부터 마지막 왕까지의 시호가 전하지 않고, 제13대 왕과 제14대 왕의 사망 연도조차 알 수 없다. 또 9세기 후반 이후 발해 국왕의 계승 관계도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태이다.


다만, 872년당나라 빈공과(賓貢科)에서 신라 유학생을 제치고 수석을 차지했고, 897년에는 발해 왕자가 신라 사신보다 윗자리에 앉기를 요구한 쟁장사건(爭長事件)이 벌어져, 신라를 능가했던 발해의 국력을 유추할 수 있게 해준다.


5. 멸망과 부흥


발해의 마지막 왕인 대인선(大諲譔, 907(?)∼926)이 통치하던 시기에는 동아시아 각국의 정세가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한반도에서는 신라가 후삼국으로 분열되었고, 중국에서는 당나라가 멸망하고 5대 10국이 번갈아 일어났다. 이 틈을 타서 북방에서는 거란족이 발흥했다. 거란은 남쪽 중원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배후세력을 먼저 제거해야만 했다. 이를 위해서 서방 세력을 먼저 공략하고 이어서 동방의 발해를 공격해왔다.


발해는 거란의 침략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926년 정월에 마침내 무릎을 꿇었다. “마음이 갈라진 것을 틈타서 싸우지 않고 이겼다”고 한 것으로 보아서 발해의 내분도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주민 구성이 고구려계와 말갈계로 이원화되어 있던 것이나, 지방의 수령 세력을 확실히 장악하지 못했던 것도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분해될 수 있는 소지를 안고 있었다.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킨 후 수도에 동쪽 거란국인 동단국(東丹國)을 세우고 맏아들에게 통치를 맡겼다.


 928년에는 수도를 요양(遼陽)으로 옮기고 발해 유민도 함께 이주시켰다. 이로부터 발해 유민은 금나라 초기까지 200여년간 요동지방을 중심으로 자취를 남기다가 서서히 중국 속으로 흡수되어 들어갔다. 일부는 요나라 또는 금나라 지배층으로 들어갔고, 일부는 이들 지배에 저항하면서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멸망 직후 서경압록부에서 일어난 후발해국(後渤海國, 926∼?)과 그 뒤를 이은 정안국(定安國, ?∼980년대), 원래의 발해 중심지에서 일어난 오사국(烏舍國, 10세기 후반∼11세기 전반), 요나라의 동경에서 일어난 흥료국(興遼國, 1029∼1030)과 대발해국(大渤海國, 1116) 등이 있다. 그런가 하면 고려로 망명해와 한국사의 한 부분을 이룬 부류도 있으니, 이들은 멸망 직전부터 들어왔고 때로는 부흥운동이 좌절될 때마다 피신처를 찾아 망명해왔다. 국내의 태씨, 대씨들은 발해 왕실의 후예로서 그러한 망명자의 후손들이다.


「발해의 왕계」

①고왕대조영(698∼719)-②무왕대무예(719∼737)-③문왕대흠무(737∼793.3)-④□왕대원의(793.3∼793?)-⑤성왕대화여(793?∼794)-⑥강왕대승린(794∼809)-⑦정왕대원유(809∼812)-⑧희왕대언의(812∼817?)-⑨간왕대명충(817?∼818)-⑩선왕대인수(818∼830)-⑪□왕대이진(831∼857)-⑫□왕대건황(858∼871)-⑬□왕대현석(872∼894?)-⑭□왕대위해(895?∼906?)-⑮□왕대인선(907?∼926.1)


* ?은 즉위년, 퇴위년이 확실하지 않음

* 10대 왕까지는 즉위년칭원법, 11대 왕부터는 유년칭원법에 따름


<정치제도>


중앙통치기구의 핵심은 선조성(宣詔省), 중대성(中臺省), 정당성(政堂省)의 3성(省)과 정당성 아래에 설치된 충부(忠部), 인부(仁部), 의부(義部), 지부(智部), 예부(禮部), 신부(信部)의 6부(部)이다. 국가의 주요 업무는 여기에서 처리되었다.

이 밖에 1대(臺), 7시(寺), 1원(院), 1감(監), 1국(局)이 있었다. 중정대(中正臺)는 관리의 규찰을 담당하고, 전중시(殿中寺)·종속시(宗屬寺)·태상시(太常寺)·사빈시(司賓寺)·대농시(大農寺)·사장시(司藏寺)·사선시(司膳寺)의 7시는 주로 궁중 업무를 담당하였다. 문적원(文籍院)은 도서 관리를 담당하고, 주자감(胄子監)은 교육을 맡았다. 또한 항백국(巷伯局)은 후궁을 관리했다.


군사제도에는 중앙군대로서 좌·우맹분위(左右猛賁衛), 좌·우웅위(左右熊衛), 좌·우비위(左右羆衛), 남좌·우위(南左右衛), 북좌·우위(北左右衛)의 10위가 있었다. 각각 대장군(大將軍) 1인, 장군(將軍) 1인을 두었다. 지방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과의도위(果毅都尉), 별장(別將)과 같은 직책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나라 부병제도(府兵制度)와 비슷한 것이 있었을 것이다.

왕실제도로는 성왕(聖王), 기하(基下), 노왕(老王), 태비(太妃), 황후(皇后), 귀비(貴妃), 부왕(副王), 왕자(王子) 등과 같은 호칭 규정이 있었다. 또한 존호(尊號)와 시호(諡號)도 규정에 따라 시행했다.


관료에 관한 각종 등급제도도 마련되어 있었다. 직사관(職事官)을 위한 등급으로 1품(品)에서 9품까지 있었다. 발해에서는 품을 질(秩)이라 불렀다고 한다. 각각 정·종(正從)의 구별이 있었지만, 상·하(上下)의 구별이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18등급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산관(散官)에는 문산계(文散階)와 무산계(武散階)가 있었지만, 구체적인 등급 체계는 알 수 없다. 문산계로는 자수대부(紫綬大夫), 청수대부(靑綬大夫), 영서대부(英緖大夫), 헌가대부(獻可大夫), 광간대부(匡諫大夫) 등이 있었다. 무산계로는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을 비롯해, 위군대장군(慰軍大將軍), 운휘장군(雲麾將軍), 귀덕장군(歸德將軍), 충무장군(忠武將軍), 영원장군(寧遠將軍), 유장군(游將軍) 등이 있었다. 벼슬 등급과 품계가 서로 일치하지 않을 때에 사용되는 행수법(行守法)도 시행되었으며, 임시직인 검교관(檢校官) 제도도 있었다.


관리의 복장제도로서 3질 이상은 자주색 옷〔紫衣〕·상아홀〔牙笏〕·금어대(金魚袋), 4·5질은 짙은 붉은색 옷〔緋衣〕·상아홀·은어대(銀魚袋)를 착용했다. 6·7질은 옅은 붉은색 옷〔淺緋衣〕·나무홀〔木笏〕, 8·9품은 녹색옷〔綠衣〕·나무홀을 착용했다. 다만 외국에 사신으로 파견될 때에는 이 규정보다 상위의 복장을 착용했음이 확인된다. 또한 상주장(上柱將)처럼 군사적인 공헌을 기리기 위한 훈관(勳官)제도를 시행했지만, 구체적인 등급 체계는 알 수 없다.



◈「발해의 관복제도」


품계 복색 홀(笏) 어대(魚袋)

1∼3품 자주색 상아홀 금어대

4∼5품 짙은 붉은색 상아홀 은어대

6∼7품 옅은 붉은색 나무홀

8∼9품 녹색 나무홀


개국공(開國公), 개국자(開國子), 개국남(開國男)처럼 5등급의 봉작(封爵)제도도 있었다. 이 밖에 외국에 사신을 파견할 때에는 대사(大使), 부사(副使), 판관(判官), 녹사(錄事), 역어(譯語), 사생(史生), 천문생(天文生), 의사(醫師), 수령(首領), 뱃사공 등으로 임시조직이 편성되었다.


지방에는 5경(京), 15부(府), 62주(州) 및 다수의 현(縣)을 두어 부(경)-주-현의 3단계 행정 체계를 갖추었다. 현의 명칭은 일부만 알려져 있다. 5경은 당나라 제도를 모방한 것으로서 15부 가운데에서 중요한 거점에 설치했다. 62주 가운데에는 3개의 독주주(獨奏州)가 있었으니, 중간에 있는 부를 거치지 않고 중앙에서 직접 관할하였다. 부에는 책임자로 도독(都督)을 두었고, 주에는 자사(刺史)를 두었으며, 현에는 현승(縣丞)을 두었다.


이러한 지방행정제도는 영토 범위가 확정된 9세기에 들어와서 완비되었을 것이다. 건국 직후에는 여기저기 산재하던 여러 촌(村)을 크기에 따라 대촌, 소촌 등으로 구분해 다스렸다. 이들에 대한 통치의 실권은 현지의 토착 지배자인 수령(首領)이 쥐고 있었다. 8세기 중반경에는 약홀주(若忽州), 목저주(木底州), 현도주(玄菟州)와 같은 고구려식 행정구역 명칭을 사용한 예도 보인다.

중앙과 지방의 발해 관제는 주로『신당서』발해전에 나타난다. 당나라 장건장(張建章)이 발해에 사신으로 갔다 온 9세기 전반경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그 이후에도 관제에 변화가 있었을 것이니, 11대 왕 때에 좌우신책군(左右神策軍), 120사(司)를 두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은 알 수 없다.


발해의 정치제도는 기본적으로 당나라 제도를 모방했기 때문에 동일 시기의 신라보다 훨씬 세련된 모습을 띤다.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그만큼 발해의 전통적 기반이 미약했음을 반영한다.


물론 당나라 제도를 따르기는 했으나, 명칭이나 운영에서 독자적인 면도 보인다. 예를 들면 정당성의 장관인 대내상(大內相)은 선조성의 장관인 좌상(左相)이나 중대성의 장관인 우상(右相)보다 상위였다. 3성 가운데 실행기관인 정당성(政堂省)에 권한이 집중된 것이니, 정책기관을 우위에 두었던 당나라나 고려와 대비된다. 6부 명칭으로 충부(忠部), 인부(仁部) 등 유교 덕목을 사용한 것도 독특한 것으로서, 일본의 관제 개혁에도 영향을 미쳤다.


발해는 정치제도의 운영에서 황제국가의 체제를 그대로 따르기도 했다. 발해는 거의 전 기간에 걸쳐 독자적인 연호(年號)를 사용했다. 왕을 황상(皇上)으로 불렀고, 왕비를 황후(皇后)라 불렀으며, 발해 왕의 명령을 조(詔)라 칭했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발해는 대외적으로 왕국이면서도 내부적으로 황제국인 외왕내제(外王內帝) 체제를 띠고 있었다. 이러한 이중적인 체제는 그 뒤에 고려에서도 활용되었다.



◈「발해의 15부와 그 속주 및 독주주」


-15부(府) 속주(屬州)


용천부(상경) 용주, 호주, 발주

현덕부(중경) 현주, 노주, 철주, 탕주, 영주(숭주), 흥주

용원부(동경) 경주, 염주, 목주, 하주

남해부(남경) 옥주, 정주, 초주

압록부(서경) 신주, 환주, 풍주, 정주

장령부 하주(瑕州), 하주(河州)

부여부 부주, 선주

막힐부 막주, 고주

정리부 정주, 반주(심주)

안변부 안주, 경주

솔빈부 화주, 익주, 건주

동평부 이주, 몽주, 타주, 흑주, 비주

철리부 광주, 분주, 포주, 해주, 의주, 귀주

회원부 달주, 월주, 회주, 기주, 부주, 미주, 복주, 사주, 지주

안원부 영주, 미주, 모주, 상주

독주주 영주, 동주, 속주

기타 집주, 녹주, 빈주, 신주 가운데 2개


출처 :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1626


<참고>


◈발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https://ko.wikipedia.org/wiki/%EB%B0%9C%ED%95%B4


◈발해성터(외성)-대한민국 임시정부기념사업회


http://www.kopogo.com/bbs/board.php?bo_table=writing4&wr_id=13


◈발해의 건국과 발전


http://contents.history.go.kr/front/ta/print.do?levelId=ta_h41_0030_0040_0020&whereStr=


◈하늘에서 내려다 본 발해 성 터 - 동북아 역사넷


http://contents.nahf.or.kr/id/NAHF.cr.d_0001_0030_0030


◈연해주에서 발해 솔빈부 성터 나왔다


http://www.opinio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819



◈발해의 옛 성터를 걷다 : 네이버 블로그

http://hyeng19.blog.me/221340453856

◈민족사로 재조명되어야 할 동북아의 패자 대진(발해)-고구려 역사져널
대진국(발해)은 고구리를 그대로 계승한 우리민족의 국가


http://www.greatcorea.kr/sub_read.html?uid=2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