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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도 사육신 순의(殉義) 563주년 추모(追慕) 제향 에서-(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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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답사

2019. 10. 10.









2019년도 사육신 순의(殉義) 563주년 추모(追慕) 제향 에서-(2/4)

(2019/10/09 현재)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에 위치한 사육신공원(死六臣公園)에서
있었던 2019년도 사육신 순의(殉義) 563주년 추모(追慕) 제향 전경 입니다 
사육신은 1456년(조선 세조2년) 단종 복위를 꾀하다 목숨을 잃은 인물들 가운데
남효온의 ‘육신전’에 소개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외에 국사편찬위원회 조사를 거쳐 확정된 김문기 등 7명이다. 이에 따라 명칭과
달리 일곱 충신의 묘가 사육신묘에 봉안됐다.

이날 행사에는 사육신 중 유응부의 후손인 서울시의회 기획경제위원장 유용 위원장을
비롯해 유연식 서울시 문화본부장, 이용규 사육신현창회 이사장과 후손들,
시민과 유림대표 등 500여명이 참석했다.

사육신의 충절을 기리면서 제(祭)를 지내는 헌작례는 유용 위원장이 초헌관을 맡았으며,
이용규 이사장이 아헌관을, 기계유씨 유낙준 대종회장이 종헌관을 맡아 엄숙하게
봉행됐으며, 동작구어머니합창단의 찬조 공연이 진행됐다.

사육신 추모대제는 사육신의 충절을 추모하고자 1961년 이후 매년 개최하는 합동
제례의식으로, 동작구의 지역 전통문화사업으로 특화된 행사다. 매년 동작구에서는
800만원의 행사 예산을 지원해주고 있으며, 올해 유용 위원장이 서울시 예산
5000만원을 반영해, 사육신 추모대제와 초·중·고 학생의 충효사상을 고취하기
위한 백일장도 동시에 개최됐다.





이용규(李鎔奎) (사)사육신 현창회 이사장의 추모사 입니다 











김의재 前 )(사)사육신 현창회 이사장의 과거 연혁과 일화 소개 인사 입니다








이용규(李鎔奎) (사)사육신 현창회 이사장의 국사편찬위원회 결의사항과 합의사항 설명 입니다 







집례(이상훈 조선·대한제국 제향보존회 차장)의 추모제 의식 진행 안내 입니다.   






대축과 봉향,봉로,봉작,전작,사준등 제집사 입장 재배 입니다. 






묘사,봉향,봉로등 집사원의 관세수와 개독(開櫝) 점촉(點燭) 입니다 







전체 헌관들의 입장 입니다. 이날 제향의 헌작례는 박원순 서울특별시장을 대리하여
초헌관에 서울시의회 유용 경제기획위원장, 아헌관에 이용규 사육신현창회 이사장,
종헌관에 유낙준 기계유씨 대종회장, 대축에 이은식 사육신현창회 부이사장,
집례에 이상훈 조선·대한제국제향보존회 차장이 담당하여 제례가 엄숙하게 봉행 됩니다.  

























전체 헌관들과 재위자 참사원들의 부복 재배 입니다. 









초헌관(서울시의회 유용 경제기획위원장)에
대한 전폐례 안내(行奠幣禮)와 진행 입니다. 













■사육신(死六臣)-다음백과 


[요약] 1453년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통해 단종의 세력을 제거하고 정권·병권을 장악했다. 이때 성삼문·정인지·박팽년 등 43명이 정난공신의 칭호를 받았고, 이어 수양대군은 왕위에 올랐다. 세조가 왕의 전제권을 확립하려 하자 집현전 출신의 유신들은 즉각 반발했다. 일부 유신들은 세조를 몰아내고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을 도모하였고, 이 계획은 성삼문·박팽년·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이들은 1456년 6월 창덕궁에서 명의 사신을 맞이하는 자리를 이용하여 세조를 살해할 계획이었으나 연회 절차에 변동이 생겨 거사가 미루어지게 되었다. 이때 불안을 느낀 김질이 밀고해 세조는 이들을 잡아들였고, 주모자 6명은 모두 처형당했다. 훗날 남효온은 〈추강집〉에 사육신전을 적어 이들 6명의 충절을 기렸다.


성삼문(成三問:1418~56)·하위지(河緯地:1387~1456)·이개(李塏:1417~56)·유성원(柳誠源:?~1456)·박팽년(朴彭年:1417~56)·유응부(兪應孚:?~1456) 등을 일컫는다.


조선시대 제4대 국왕인 세종은 정도전의 재상 중심의 정치운영론과 태종의 왕권강화론을 절충하면서 유교적 이상국가를 수립하고자 노력했다. 특히 세종은 왕권을 뒷받침할 수 있는 학문연구기관으로 집현전을 설치·운영하고, 국왕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고자 했다. 그러나 유교에서 말하는 정치론은 강력한 군주에 의한 정치운영론이 아니고 유학의 소양을 갖춘 사대부가 정치운영의 중심이 되는 정치론이었다.


그러므로 세종이 국왕과 신하의 상호 협력을 바탕으로 한 정치운영을 지향했지만 현실은 자연히 신하가 중심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특히 세종 말년에 국왕이 병환으로 정치운영에 참여할 기회가 적어지자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화되었다.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유학자들은 종래 유학연구나 국왕의 정책보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국가의 정치 정책에 깊이 간여하게 되었다. 그결과 집현전의 성격은 점차 언론·학문 기관에서 정치기관으로 변화해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1450년 세종이 죽자 집현전의 활동은 더욱 강화되었고, 그들은 자신들의 소망관직인 대간으로 대거 진출했다.

집현전의 관계진출은 문종이 2년 3개월 만에 죽고 나이 어린 단종이 즉위하면서 더욱 활발해졌다. 이때 문종은 단종이 나이가 어려 직접정치를 할 수 없으므로 황보인·김종서 등의 신하들에게 어린 왕을 보필하도록 당부했다. 이에 따라 재상의 합의체인 의정부는 국왕을 보필하고, 국왕과 정사를 의론하는 최고정무기관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정치운영의 중심기구로 변모했다. 이는 유교에서 말하는 신하 중심의 정치운영론보다 소수의 재상이 전권을 독단하는 현상으로 나타남으로써 집현전을 중심으로 하는 유학자들에게 불만을 사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태종 이래로 강력해진 왕실은 소수의 재상에 의한 정치운영에 불만을 품었다.

이는 세종이 많은 왕자를 남겨놓았으나 적장자 왕위계승에 따라 문종의 장자인 단종이 어린 나이에 국왕에 오름으로써, 상대적으로 왕실의 힘을 약화시키고 소수의 재상에 의해 정치가 독점되는 제도의 모순을 초래하게 되었다. 특히 세종의 왕자 중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과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은 유능한 인물로서 중앙정치에 불만을 품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이 시기에 중앙정치의 내부는 소수의 재상과 젊은 유학자, 그리고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흐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수양대군은 김종서·황보인을 제거하고 자신과 경쟁자인 안평대군을 강화로 유배보냈다가 사사(賜死)시켰다. 그리고 후환을 없애기 위해 김종서와 뜻을 같이하는 이징옥을 파면하고, 이에 불만을 품고 1453년에 일어난 이징옥의 난을 진압함으로써 중앙과 지방의 적대세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스스로 영의정부사·이조판서·병조판서·내외병마도통사 등을 겸직하면서 정권(政權)과 병권(兵權)을 독차지하고, 권람·한명회·홍달손과 간접적으로 도운 정인지·한확·최항·신숙주·성삼문 등 43명을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 봉했다. 이어서 수양대군은 형식상 선양(禪讓)의 절차로 왕위에 올랐다.


성삼문 등의 집현전 학자들이 정난공신에 봉해진 이유는 황보인·김종서 등 소수의 재상이 전권을 장악한 것에 불만을 품은 것에 연유한다.


즉 그당시 집현전 유학자들은 유교에서 말하는 다수의 유학자가 참여하고 공론을 실현하는 신하중심의 정치운영론을 이상으로 여겼으므로 소수 재상중심의 정치운영론에 불만을 느꼈고, 수양대군의 정적제거에 동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세조의 집권은 집현전 출신 유학자들의 생각과 다른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세조는 왕의 전제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의정부서사제도를 폐지하고 육조직계제를 실시했다. 이는 의정부의 권한 약화와 왕권의 강화를 통해 국왕이 중심이 되는 정치운영을 지향한 결과였다. 집현전 출신의 관료들은 즉시 반대했다. 이들은 정치운영을 국왕 1명에게 맡길 수 없다는 것과 대다수 관료가 참여하는 신하중심의 정치운영론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관철되지 못하고 정국은 세조의 독주에 의해 진행되었다.


이에 세조의 전제권 강화에 불만을 품은 유학자들이 세조를 왕위에서 몰아내고 폐위된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을 도모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사육신의 단종복위계획으로 나타났다. 단종복위의 명분은 세조의 불의와 찬탈에 대한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이와 같이 정치운영론을 둘러싼 신권과 국왕권의 대립·갈등이었다.


집현전 출신의 유학자가 참여한 이 계획은 성삼문·박팽년·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가 중심이 되어 진행했다.

이들은 집현전을 모의 장소로 정하고 여러 차례 의론한 결과, 1456년(세조 2) 6월 창덕궁에서 명나라의 사신을 맞이하는 자리를 이용하여 세조를 살해하고 단종을 복위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한명회의 주장으로 연회 절차의 변동이 있게 되자 거사가 미루어지게 되었다. 이때 단종의 복위운동에 참여한 김질(金礩)이 장인인 정창손에게 알렸고, 정창손은 다시 세조에게 알렸다. 세조는 이들을 잡아들였고 거사는 실패했다.


주모자인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는 모두 처형당했다. 이들을 사육신으로 명명한 것은 남효온이 지은 〈추강집 秋江集〉에 나오는 육신전(六臣傳)에 의한 것이다. → 계유정난, 세조찬위


한편 〈조선왕조실록〉과 〈추강집〉의 기록이 달라 육신(六臣)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개·성삼문·박팽년·하위지·유성원·박중림·권자신·김문기·성승·유응부·박쟁·송석동·최득지·최치지·윤영손·박기년·박대년 등 17인이 반역을 꾀했으며, 주모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김문기 순으로 6인 만이 기록되어 있다. 김문기는 도진무로서 박팽년과 모의할 때 군 동원의 책임을 맡았다고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사료에 따라 김문기를 현창(顯彰)하고 서울특별시 동작구에 있는 사육신묘에 김문기의 가묘(假墓)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종래의 사육신 구성은 변경되지 않았다.



 

■사육신공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사육신 공원(死六臣公園)은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에 있는 묘와 그 외 사육신비 등이 안장된 공원이다. 본래 이곳에 있던 박팽년·성삼문·유응부·이개의 묘에, 하위지·유성원·김문기의 가묘를 새로 조성하였다.


●사육신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1445년)으로부터 왕위를 빼앗고, 왕이 되자 이에 불복하고 단종 복위에 힘 쓰다 목숨을 잃은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에 추가로 김문기를 현창하여 모신 곳이다. 이들은 단종 3년(1455년)에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분개하여 단종의 복위를 노리던 중, 1456년 6월 명나라 사신의 환송연에서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成勝)과 유응부가 세조 일파를 처단하기로 계획하였으나, 이 사실이 사전에 누설되어 실패하였다. 이들의 계획이 좌절되자 거사 동지이며 집현전 출신인 김질(金礩) 등이 세조에게 단종복위 계획을 밀고하여 연루자들이 모두 붙잡혔다.

 

성삼문은 시뻘겋게 달군 쇠로 다리를 꿰고 팔을 잘라내는 잔혹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세조를 ‘전하’라 하지 않고 ‘나리’라 불렀으며, 나머지 사람들도 진상을 자백하면 용서한다는 말을 거부하고 형벌을 받았다.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이개는 단근질로 죽음을 당하였고, 하위지는 참살 당하였다. 유성원은 잡히기 전에 자기 집에서 아내와 함께 자살하였고, 김문기(金文起)도 사지를 찢기는 참혹한 형벌을 받아 사망하였다. 이밖에 사육신의 가족으로 남자인 경우는 모두 죽음을 당하였고, 여자의 경우는 남의 노비로 끌려가는 등 70여명이 모반 혐의로 화를 입었다


●사육신묘


조선 세조 2년(1456) 조선의 6대 임금인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목숨을 바친 박팽년·성삼문·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 6명의 신하 즉 사육신(死六臣)을 모신 곳이다.

 

이들은 단종 3년(1455)에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뒤의 세조)이 왕위를 빼앗고 단종을 몰아내자 이에 분개하여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참혹한 최후를 맞았다.

 

사육신의 충성심과 장렬한 의기를 추모하기 위해 숙종 7년(1681)에 이곳에 서원을 세우고, 정조 6년(1782)에는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우는 비)를 세워 두었다.

 

1955년에는 사육신비를 세우기도 하였고, 이후 묘역을 확장하여 새롭게 정비하여 충효사상을 기리고자 하였다. 원래의 묘역에는 박팽년·성삼문·유응부·이개의 묘만 있었으나 후에 하위지·유성원·김문기의 묘도 만들어 함께 모시고 있다.

 


■사육신묘(死六臣墓)-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사육신묘(死六臣墓)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 사육신묘지공원에 있는 조선시대의 사육신(死六臣)을 모신 곳이다. 1972년 5월 25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었다


●개요

 

조선 세조 2년(1456) 조선의 6대 임금인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목숨을 바친 박팽년·성삼문·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 6명의 신하 즉 사육신(死六臣)을 모신 곳이다.

 

이들은 단종 3년(1455)에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뒤의 세조)이 왕위를 빼앗고 단종을 몰아내자 이에 분개하여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참혹한 최후를 맞았다.

 

사육신의 충성심과 장렬한 의기를 추모하기 위해 숙종 7년(1681)에 이곳에 서원을 세우고, 정조 6년(1782)에는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우는 비)를 세워 두었다.

 

1955년에는 사육신비를 세우기도 하였고, 이후 묘역을 확장하여 새롭게 정비하여 충효사상을 기리고자 하였다. 원래의 묘역에는 박팽년·성삼문·유응부·이개의 묘만 있었으나 후에 하위지·유성원·김문기의 묘도 만들어 함께 모시고 있다


●조성경위

 

사육신의 충성심과 장렬한 의기를 추모하고자 숙종 7년(1681년)에 민절서원을 세웠고, 정조 6년(1782년)에는 신도비가 세워져 전해오다가, 1955년 5월에 육각의 사육신비를 세웠다. 1978년 서울특별시에서는 이들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영혼을 위로하고 그 정신을 널리 현창하고자 3,240평이었던 묘역을 9,370평으로 확장하고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의절사(義節祠), 불이문(不二門), 홍살문, 비각(碑閣)을 새로 지어 충효사상의 실천도량으로 정화하였다.

 

입구에 홍살문이 있고, 그 안 좌우로 신도비와 1955년에 세운 육각비가, 불이문을 들어서면 의절사가 있으며, 각종 편의시설도 구비되어 있다.[1] 오전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개방하고 있다. 매년 10월 9일에 위패를 모시고 추모제향을 올린다.

 

현재 이곳에 여섯이 아닌 일곱 분의 묘가 조성되어 있는 경위는 다음과 같다. 세조 2년 단종복위사건 가담자들의 참혹한 죽음 이후, 어느 스님[2]이 성승·박팽년·유응부·성삼문·이개 다섯 분의 시신을 현재의 위치에 모셨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2년 6월 병오년 기록에는 성삼문·하위지·이개·유성원·김문기·박팽년을 비롯한 성승·유응부 등의 이름이 보이고, 남효온이 지은 《육신전》(六臣傳)에는 성삼문·박팽년·이개·유성원·하위지·유응부를 ‘사육신’이라 하였다. 그 후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성승의 묘를 찾을 수 없어 네 분의 묘만 있었으나, 여전히 사육신묘라 불렸다.

 

이리하여 서울특별시가 사육신묘 일대를 성역화하면서 육신에 대한 논란을 조정하였는데, 그 결과로 사육신묘에는 일곱 분의 묘가 모셔지게 되었다. 즉 본래 이곳에 있던 박팽년·성삼문·유응부·이개의 묘에, 하위지·유성원·김문기의 가묘(假墓)를 새로이 만든 것이다. 의절사 내의 위패와 마찬가지로 그 뒷편의 묘소는 동쪽으로부터 김문기·박팽년·유응부·이개·유성원·성삼문·하위지 순서로 모셔져 있다.

 

<참고>


◈사육신(死六臣)-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25865


◈사육신(死六臣)-한국사 인물 열전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47XXXXXXh099



◈유용 서울시의회 기획경제위원장, 563주년 사육신 추모제향 참석

입력 : 2019-10-10 10:44 | 수정 : 2019-10-10 10:45



https://go.seoul.co.kr/news/newsView.php?id=20191010500029&wlog_tag3=daum


◈사육신 순의 563주년 추모대제 시민문화행사 개최-Break News
- 제1회 전국 초·중·고 백일장 역사문화 축제도 열려 -
   전병협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9/10/09 [23:06]

 출처 : 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683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