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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동영상]청일전쟁 & 러일전쟁 & 을사늑약 & 일본의 국권침탈 관련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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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2. 1.





●KBS 다큐1 - 한반도 운명의 격전 1편, 동아시아 뒤집히다-청일전쟁  (2015.7.30 방송)

https://youtu.be/aXiN1EqBwTk



●KBS 다큐1 - 한반도 운명의격전 2편, 끝나지 않은 패권-러일전쟁 (2015.7.31 방송)

https://youtu.be/wa7REgu87ug



●KBS스페셜 을사늑약 100년, 그때 일본이 탄생했다 : 1편 러일전쟁 (2005년 9월24일 방송)
https://youtu.be/n0Zk4p8jORQ



●KBS스페셜 을사늑약 100년, 그때 일본이 탄생했다 : 2편 메이지의 유산(2005년 9월25일 방송)


https://youtu.be/OCs8U7YE094




●KBS 국권침탈 100년 특별기획 한국과 일본 1부 인연  (2010.8.14 방송)

https://youtu.be/7J6-X8zAp0w



●KBS 국권침탈 100년 특별기획 한국과 일본 2부 적대 (2010.8.21 방송)

https://youtu.be/p6G0tFY4wOk



●KBS 국권침탈 100년 특별기획 한국과 일본 3부 공존 (2010.8.22 방송)

https://youtu.be/Swev9XGP1jA



●KBS 국권침탈 100년 특별기획 한국과 일본 4부 변화9(2010.8.28 방송)

https://youtu.be/8EaGYKXmIY4



●KBS 국권침탈 100년 특별기획 한국과 일본 5부 대결 (2010.8.29 방송)

https://youtu.be/MkWs-AiaLXc


<참고>


KBS 다큐1 - 광복70년 기획 한반도 운명의 격전 2부작
1편 동아시아 뒤집히다-청일전쟁’ (2015.7.30 방송)
http://history.kbs.co.kr/


120여 년 전, 동아시아 침략전쟁이 시작된다.
아시아의 섬나라, 일본이 중국에 이어 러시아와 전쟁을 벌인 것이다.
전쟁의 명분은 조선의 자주독립과 동양의 평화, 참으로 이상한 친절이었다.
조선은 개전과 더불어 치열한 격전장이 되었고, 종전과 더불어 일본의 영향아래
완전히 놓이게 되었다. 대한민국 광복 70년을 맞이하여,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지었던
100여 년 전의 격전, 청일전쟁을 재조명해본다.


▪ 동학, 봉기하다
1894년 전북 고부, 전봉준의 주도로 동학군이 봉기한다. 봉기의 목적은 보국안민.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조선을 지키고, 조선 왕조의 부정부패를 바로잡는 것이다. 동학군은 파죽지세로 전주성까지 진입한다. 이에 위협을 느낀 조선 정부는 청에게 원군을 요청한다. 청군이 조선에 들어오자 일본도 거류민 보호를 목적으로 조선에 진출한다. 일본, 중국, 조선의 동학군. 대치된 세 국가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 청일전쟁은 경복궁에서 시작됐다!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은 경복궁을 습격한다. 조선의 궁궐수비대가 먼저 일본군에게 공격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일본의 치밀한 계획에 의한 도발이었다. 일청전사 초안에는 경복궁 습격 사건의 전개 과정이 자세히 나와 있다. 일본은 청나라와 개전하려는 명분을 얻고자 했다. 경복궁을 습격하여 조선정부로부터 청군을 조선의 영토 밖으로 쫓아내 달라는 부탁을 받아내는 데 성공한 일본. 드디어 청일전쟁 시작의 구실이 생긴 것이다.


▪ 예상치 못한 일본의 압승!
전쟁은 해전으로 시작됐다. 아산 앞 풍도에서 일본함대가 청의 함대를 침몰시키며 일본은 승리를 거둔다. 안성천에서의 첫 육상전투와 이어지는 평양전투에서도 일본은 대승을 거둔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압승이었다. 이후 압록강 하구에서 청나라 북양함대와 일본의 연합함대가 맞붙는다. 황해해전, 전 세계 해군이 주목한 세계최초의 근대식 해전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일본 연합함대의 진형과 전술을 전 세계 해군이 참고하게 된다. 이제 중국 대륙도 황해해전의 승리로 제해권을 장악한 일본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 청일전쟁은 한청일 전쟁이다!
일본이 승승장구하던 그 때, 동학군이 다시 봉기한다.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전쟁을 벌인 것이 동학군의 재봉기 원인이었다. 수만 명의 동학군들은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게 된다. 우금치를 돌파하면 공주를 지나 서울로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군의 수는 불과 200명이었지만, 동학군은 처참하게 패배한다. 죽창과 화승총으로 무장한 동학군은 일본군의 신식 무기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우금치 전투 이후 일본군은 동학군을 학살하기에 이른다. 학살된 동학군은 5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에는 청일전쟁이 한청일전쟁으로 기록되어 있던 문서도 있다. 이유는 무엇일까?


▪ 청일전쟁과 조선의 독립?
청일전쟁 직후, 시모노세키에서 청나라와 일본은 강화조약을 맺는다. 이 조약의 1조가 명시하고 있는 것은 바로 조선은 완전한 자주독립국이라는 것이다. 조선은 원래 그 누구의 식민지도 아니었다. 왜 청나라와 일본과의 전쟁에서 조선독립이 쟁점이 된 것일까? 일본은 조선에 대한 청의 영향력을 완전히 배제하고자 했다. 독립이 아닌 독립이었다. 청나라로부터 조선을 떼어놓은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한다. 청일전쟁으로 자신감을 얻은 일본은 1945년 항복을 선언하기 전까지 한반도와 아시아를 무대로 50년 전쟁을 벌이게 된다.




KBS 다큐1 - 광복70년 기획 한반도 운명의 격전 2부작
2편 끝나지 않은 패권 - 러일전쟁 (2015.7.31 방송)
http://history.kbs.co.kr/


▪ 최초의 세계대전, 러일전쟁
 세계0차대전이라 불리는 러일전쟁은 러시아와 일본, 두 나라만의 전쟁이 아니었다. 전쟁의 무대 뒤에는 이들 두 나라를 부추겼던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들이 있었다. 이들은 왜 자신들의 영토도 아닌 만주와 한반도를 전장으로 삼아 전쟁을 벌였던 것일까. 20세기 세계사의 흐름을 전쟁의 세기로 이끌었고, 한반도의 운명을 바꿔놓은 러일전쟁. 그것은 동아시아 패권을 놓고 벌어진 최초의 세계대전이었다.


▪ 아시아의 작은 나라, 거대강국 러시아를 쓰러뜨리다!
1904년 2월 8일, 일본의 선제공격으로 러일전쟁이 발발한다. 아시아의 작은 섬나라 일본이 선전포고도 없이 세계 최강국 러시아를 상대로 맞붙은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과는 달리 일본의 승리였다. 일본은 강국 러시아를 상대로 어떻게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을까. 전장에서의 전술뿐만 아니라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한 외교전술, 그리고 러시아 내부 분열 공작에 이르기까지 거대 강국 러시아를 쓰러뜨리기 위해 전방위적으로 치밀하게 계획하고 준비해나갔던 일본의 전략전술을 파헤쳐본다.


▪ 외교 정책의 한계, 무너진 조선
일본의 대륙침략정책과 러시아의 남하정책이 한반도를 놓고 충돌을 벌이는 동안 조선은 외세 의존적 외교정책만을 펼쳐나갔다. 급기야 러일전쟁 발발 18일 전, 전운이 감도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조선 정부가 택한 것은 전시중립선언이었다. 이에 대해 대부분의 열강들이 전시중립선언을 승인하는 답을 보내왔다. 그러나 끝내 화답하지 않은 나라가 있었다. 바로 미국이었다. 과연 미국은 왜 이 같은 태도를 취했던 것일까. 당시 열강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상황에서 조선 정부가 취했던 외세 의존적 외교가 지닌 한계점을 살펴본다.


▪ 한반도를 둘러싼 일본과 열강들의 밀약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5년 뒤 한국을 병합하는 데 성공한다. 과연 일본은 왜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직후, 한국 병합을 곧바로 단행하지 않았던 것일까. 평화회담으로 유명한 포츠머스강화조약을 통해 일본은 러시아 측으로부터 한 푼의 배상금도 받지는 못했지만, 대신 청일전쟁 이후 지상과제였던 한국에 대한 보호권은 확실히 보장받았다. 그러나 문제는 보호의 내용이었다. 열강이 승인한 일본의 한국 보호란 한국의 독립까지 훼손해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니었다. 이에 일본은 치밀한 전략을 세워나갔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미국와 영국을 상대로 한 이해관계를 이용한 비밀 외교전이었다. 100여 년 전 한반도를 놓고 일본과 열강들 간에 어떤 일들이 벌어진 것일까. 그 비화를 추적해본다.


▪ 러일전쟁, 그 후 110년...
한반도의 운명을 바꿔놓은 러일전쟁. 이후 동아시아에서 평화는 사라졌다. 일본의 군국주의적 야심은 더욱더 커져만 갔고, 반세기동안 일본의 세력 확장을 위한 전쟁은 계속되었다. 일본의 침략전쟁은 다른 나라에 엄청난 재난을 가져다주었고, 결국 자신 역시 패망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로부터 70여 년이 흐른 지금, 일본은 전쟁을 영구히 포기하겠다고 밝힌 평화헌법을 개정해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다. 과연 역사는 반복될 것인가.




오늘의 일본은 이미 1세기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도 일본인의 정신적 좌표는 ‘메이지의 영광’에 있다. 그리고 오늘의 일본을 만든 선택, 러일전쟁.
제국주의 열강의 시장쟁탈전 속에서 일본은 어떻게 반식민지 상태에서 탈출하여 제국이 되었을까?
(2005년 9월24일 방송)


1. 포츠머스 미국 뉴햄프셔주 포츠머스시. 한국과 일본에게 ‘주권상실’과 ‘국민의 전쟁’으로 각인되어진 러일전쟁의 상반된 기억은 이곳에서 시작됐다. 2005년 8월 포츠머스에서는 100년 전의 한 사건을 기념하는 대규모 행사가 열렸다. 장기간의 전쟁으로 인해 교착상태에 빠져있던 러일 양국은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중재로 평화조약을 체결한다. 포츠머스 회담으로 일본은 드디어 제국주의의 대열에 합류하였지만 동시에 한국은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기고 만다.


2. 시베리아 프로젝트를 저지하라
 일본의 한국지배는 메이지 초기부터 끊임없이 제기되어온 정한론(征韓論)의 성과물이었다. 일본에게 있어 극동으로 뻗어오는 열강의 압력에 대한 최소의 방어선은 바로 ‘이익선(조선)’이었다. 그러나 부동항을 얻으려는 러시아의 야욕이 시베리아횡단철도로 구체화되면서 일본열도는 공포에 휩싸이게 되었다. 급기야 시베리아횡단철도 기공식을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던 중 일본을 방문한 러시아황태자 니콜라이 2세에 대한 테러가 발생하면서, 한국을 사이에 둔 러일간에 점차 긴장감이 고조됐다.


3. 백곰을 쓰러뜨리다.
마침내 일본은 만주에 대한 러시아의 지배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서로 인정 하자는 ‘만한교환론(滿韓交換論)’이라는 최후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일본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운명의 그날. 1904년 2월 8일, 인천과 뤼순항에 일본의 기습공격이 감행되었다. 당시 어느 누구도 조그만 섬나라 일본이 대국 러시아와 전쟁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었다. 일본의 뒤에는 영국과 미국이 있었던 것이다.


4. 무엇을 위한 전쟁인가
일본은 러시아에 승리하여 부와 권력을 얻었으며 열강의 하나가 되었다.
국가와 사회의 목표가 그대로 개인의 목표가 되었던 메이지 시대. 메이지의 최대 성공으로 꼽혔던 러일전쟁의 승리와 포츠머스 조약체결은 그러나 정작 국민들에 의해 부정당하고 만다. 전후보상이 국민들의 기대치에 훨씬 못 미치자 곳곳에서 격렬한 폭동이 일어났다. 1년여의 전쟁으로 일본국민들에게 남은 것은 가족의 빈자리와, 천문학적인 물가와 치솟을대로 치솟은 세금통지서였다. 이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로 자신감이 팽배한 일본의 지도자들에 의해 일본 국민들을 또다시 전쟁의 한가운데 놓이게 된다. 대외적 위상은 높였지만 정작 국민들은 만족시키지 못했던 러일전쟁.
과연 그것은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는가


오늘의 일본은 이미 1세기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도 일본인의 정신적 좌표는 ‘메이지의 영광’에 있다. 그리고 오늘의 일본을 만든 선택, 러일전쟁.
제국주의 열강의 시장쟁탈전 속에서 일본은 어떻게 반식민지 상태에서 탈출하여
제국이 되었을까? (2005년 9월25일 방송)


1. 흑선을 끌고 온 피스메이커
2005년 7월 16일. 요코스카시 쿠리야마에서는 쿠리야마 페리축제가 성황리에 개최됐다. 이 축제는 검은 흑선을 끌고 왔던 페리함대에 의해 이뤄진 일본의 개국을 기리는 축제였다. 페리는 스스로를 ‘피스메이커(평화의 중재자)’로 일컬으며 일본의 개항을 요구했다. 시꺼먼 연기를 내뿜는 군함을 끌고 왔던 피스메이커를 은인으로 여기는 나라 일본. 여기에 오늘날 일본을 들여다볼 수 있는 열쇠가 있다.


2. 660일간의 세계일주 - 이와쿠라 사절단
미국에 뒤이어 일본은 러시아, 영국, 프랑스 등 세계열강과 불평등 조약을 맺게 된다. 외세의 압력에 나약했던 막부정권을 뒤집고 메이지유신에 성공한 신정부는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조약개정과 신문물의 습득을 목표로 한 대규모 사절단을 구미와 유럽에 파견하기로 한 것이다. 국내의 안정보다 신문물 배우기를 선택했던 일본.
신열강 미국과 유럽의 관문 영국에서 이와쿠라 사절단의 흔적을 되짚어봄으로써 1년 10개월에 이르는 메이지 신정부의 ‘빅딜’, 그 시작과 끝을 조명한다.


3. 문명개화로 탈아입구를!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입구’와 이와쿠라 사절단의 귀국으로 메이지정부의 문명개화 노력에 더욱 박차가 가해지게 되었다. 열강의 선진문물을 체험하고 조급해진 일본의 지도자들은 급기야 일본의 장관과 같은 수준의 급여를 주며 ‘오야토이(御雇:정부가 고용한 외국인 기술자)’를 초빙하기 시작했다. 정부와 재계의 유착, 정부주도의 주입식 교육, 그리고 일본의 급성장에 밑거름이 되었던 수많은 이름 모를 공녀(工女)들… 일본의 탈아입구는 마침내 성공한 것인가.


4. 2005년, 메이지의 유산
1974년 신문에 연재된 이래로 일본의 경영리더들에게 매년 필독서의 첫 순위로 꼽히는 작품이 있다. 바로 시바 료타로의 『언덕위의 구름』이다. 러일전쟁을 승리를 이끌었던 두 형제의 이야기를 그린 이것은 일본인들에게 메이지와 러일전쟁의 성공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마쓰야마 시의 한 마을. 이 마을은 현재 메이지 시대를 보여주는 일종의 박물관으로 대대적인 개조가 진행중이다. 그 테마는 바로 『언덕위의 구름』. 마을조성을 위한 공채에는 12억 엔에 가까운 돈이 모집됐다. 일본인들에게 메이지는 어떤 의미인지, 오늘날 일본인에게 남아있는 메이지의 유산은 과연 무엇인지 살펴본다.



※청일 전쟁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https://ko.wikipedia.org/wiki/%EC%B2%AD%EC%9D%BC_%EC%A0%84%EC%9F%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