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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월미도(月尾島) 월미산공원 둘레길 산행-(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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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답사

2020. 11. 11.









인천 월미도(月尾島) 월미산공원 둘레길 산행-(1/2)

(2020/11/08 현재)


인천 월미도(月尾島) 월미문화의 거리 탐방 전경 입니다.
월미도는 월미도(月尾島), 어을미도(漁乙未島·於乙味島), 어미도(於味島),
얼미도(突尾島)·얼도(突島)·월성(月星) 등이 있다. 한때 제물도(濟物島)라
부른 적도 있다. ‘얼’이라는 글자는 ‘얼다’ 곧 ‘사랑하다’, ‘어르다’의
의미이고, ‘미’는 ‘물[水]’를 의미하기에 결국 ‘물이 섞이는[어르는·
휘감아 도는] 섬’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한말에는 ‘Rose Island’로
외국에 알려지기도 하였다.

본래 인천도호부 관할이었으나 1653년(효종 4) 용종진이 설치된 후
그에 편입되었다. 월미도에는 조선 후기 임금의 임시 거처인 행궁이
설치되었고, 행궁은 존속기간 내내 영종진 관할이었다. 월미도 행궁은
대체로 18세기 전반까지는 유지된 듯하다.

총독정치가 시작되면서 월미도를 풍치지구(風致地區)로 지정하고
월미도 중턱에 순환도로를 축조하였다. 철도국은 목욕탕을 개설하고
일본 요정인 용궁각(龍宮閣), 호텔, 동물원, 하계야영 캠프촌 등을
만들어 임해유원지로서 명소가 되었다.

1922년 석축제도를 축조하여 월미도는 육속화되어 섬으로서의 역할이 끝났다.
그리고 1920년대 후반부터 15년간 전성기를 누리던 월미도는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하고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시설이 초토화되었다.

월미도는 인천개항을 전후하여 외세의 각축장이 되었는데, 일제강점기에는
한때 군사기지로, 6·25사변 때에는 인천상륙작전의 전초기지로,
그 뒤 미군용지로 이용된 일도 있었다.

2001년 6월 26일 문화관광부가 월미관광특구 지정의 일환으로 월미도 문화의
거리내 친수공간 확장과 월미산을 개방하기로 하였다.
1980년 이후 관광지가 조성되어 각종 위락시설과 해수욕장·호텔이 갖추어져 있다.
1989년부터 꾸며진 문화의 거리에는 문화행사인 월미축제로 시민의 문화의식
고취와 지방예술문화 창달에 기여하고 있으며, 인근의 놀이공원과 함께
각광을 받는 곳이다.

2001년 6월 월미도 문화의 거리가 조성되었고, 거리의 길이는 770m, 폭은 20m이다.
이 거리의 끝지점에 바다로 난 길이 있다. 문화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오른쪽으로는 바닷가, 왼쪽으로는 카페와 횟집이 즐비하다. 이 곳에서 매년
‘월미관광문화축제’가 열리고 있다. 월미관광문화축제 중에 풍어제, 인천근해
갯가 노래, 뱃노래, 은율탈춤, 국악제 등 전통적인 춤과 노래를 즐길 수 있다. 


 

■월미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월미도(月尾島, 영어: Wolmido, Wolmi Island, Wolmido Island, Roze Island)는 월미산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긴 삼각형 모양을 이루었으나 지금은 간척되어 육지가 된 인천 앞바다의 육계도이다.

월미도는 면적이 0.7 km2밖에 되지 않는 작은 섬이었지만 제물포(지금의 인천항)가 항구 역할을 제대로 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월미도가 제물포 앞에 딱 버티고 서서, 파도와 바람으로부터 제물포에 정박한 배들을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병자호란 때 몽골 기마병이 바람처럼 달려와 강화도로 피난하는 길을 막아버려 남한산성으로 피신해야만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이 1656년(효종 7)에 제 2의 피난길을 개척할 때 기착지로서 월미도에 월미행궁이 지어지기도 했다.[2]:14-20

 

월미도를 지나지 않고서는 인천항을 통해 서울로 갈 수 없었기 때문에 월미도는 개화기부터 한국전쟁 때까지, 외국 군대에게 점령되어 군사 요충지로 쓰이는 운명을 맞아야만 했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 때는 한양으로 들어가는 뱃길을 찾으러 인천에 접근한 이양선들이 입항 전 한 차례 머무르는 섬이었으며,[2]:30

 

일·청·러가 조차 경쟁을 벌일 때는 조정의 허락도 없이 일제 해군의 석탄 창고가 설치되는 수모를 겪었다.[2]:126 러일 전쟁의 첫 포성이 울린 제물포 해전은 월미도 앞바다(월미해협)에서 벌어졌고, 일제가 승리하고 나서는 병참기지화되었다.[2]:152

 

 

 1920년대 후반-1930년대 일제 강점기에는 일제가 소위 '조선 제일의 유원지'라는 명목으로 월미조탕을 비롯한 유원지, 숙박시설을 지어 부유한 자들에게만 호화로운 인공낙원을 제공하였다.[2]:163-174[3]

 

한국전쟁의 판도를 뒤바꾼 인천상륙작전 당시에는 미군에게서 네이팜탄 폭격을 당하고 인천으로 가는 길을 터 주게 되었다. 이 폭격으로 약 120가구 600여 명이 살던 마을이 불바다가 되고 월미도민 100여 명과 월미도에 파견된 육지의 노무자 상당수가 죽었다.[2]:220-245 전쟁이 끝나고 피란에서 돌아온 월미도민들은 월미도로 귀향하여 사라진 마을을 재건하려 하였으나, 휴전 후에 미군부대가 계속 주둔해서, 미군 부대가 물러가자마자 바로 한국군이 들어와 해군 기지를 세워서, 국방부와 인천시가 도민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월미도를 사고팔아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도민들은 '귀향대책위원회'를 꾸려 배상과 귀향을 요구하였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는 국가가 월미도민들에게 배상을 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1989년 7월 문화의 거리가 조성된 이래 인천 바닷가의 유명 관광지 중 하나[4]로 떠올랐다. 썰물 때도 갯벌이 드러나지 않아 언제나 바닷물을 볼 수 있다. 월미산에 둘레길이 조성되고, 한국전통정원, 전통문화체험관, 한국이민사박물관 등이 설립된 데다가, 다양한 놀이동산까지 들어서면서, 월미도는 인천 명소의 위상을 되찾고 있다.[5][6]


<참고>


●월미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https://ko.wikipedia.org/wiki/%EC%9B%94%EB%AF%B8%EB%8F%84

 

●월미도(月尾島)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40981


●월미도(月尾島)- 다음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17a0380a


● 월미도 - 대한민국 구석구석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52XXXX127585

 

●착공 11년만에”…인천 ‘월미바다열차’ 개통


http://www.kgmaeil.net/news/articleView.html?idxno=222735

 

●월미바다열차, 개통 한 달 '폭발적 인기'…주변 상권도 활성화-이뉴스투데이

https://www.enews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47806

 


●인천 상륙 작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https://ko.wikipedia.org/wiki/%EC%9D%B8%EC%B2%9C_%EC%83%81%EB%A5%99_%EC%9E%91%EC%A0%84

 

●[인천상륙작전 66주년 KFN스페셜] 작전명 '크로마이트(CHROMITE)'

https://youtu.be/Y-Ovgoy9WME

 

●인천 역사여행! 인천상륙작전 첫 상륙지 '월미도'


http://boomup.chosun.com/site/data/html_dir/2016/10/12/2016101201283.html?korea_sec

 


●월미도에서 사라진 마을... 미군은 왜 다 죽였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17322

 

 

●[만파식적] 월미도-서울경제

 https://www.sedaily.com/NewsVIew/1VN5A6ANV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