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의 여행이야기

"백운"의 Daum Column입니다...

평해손씨 중시조 기성후 손인량(孫仁亮) - 2020년 시향(時享)에서-(3/3)

댓글 0

문화답사

2020. 11. 22.









평해손씨 중시조 기성후 손인량(孫仁亮) - 2020년 시향(時享)에서-(3/3)

(2020/11/20 현재)


평해손씨(平海孫氏) 중시조 고려 중서문하성 평장사(平章事)
기성후(箕城候) 손인량(孫仁亮) 공의 2020년 가을 시향(時享) 전경 입니다.
공은 1269년 (고려 원종 10년) 임연(林衍)의 난을 당하여 나라를 도와
훈공을 세운 공신으로 나라에서 기성후(箕城候)에 봉하였으며, 벼슬은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습니다. 


  


 ■ 평장사공 사적비문(平章事公 事蹟碑文) - 휘 인량(諱 仁亮)


참사(參事)인 孫君 일효(日孝)와 전참위계오보(前參尉啓五甫)가 세보(世譜) 한권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孫氏의 득성(得姓)은 新羅 모량부대수촌장(牟梁部大樹村長)으로 新羅 흥덕 王朝에 諱 순(順)이 계셨는데 孝性이 至極하여 석종(石鍾)을 얻은 일이 있었으니 實로 우리 孫氏의 비조(鼻祖)이십니다. 傳하여 諱 익담(翼淡)은 평해군(平海君)에 封해서 平海에 적(籍)을 두었으니 平海 孫氏의 始祖이다. 여러 代를 傳하여 諱 인량(仁亮)은 高麗元宗時에 평장사(平章事)로 재관(在官)하고 元宗 十年 己巳年에 (西紀 1269年) 림연(林衍)의 亂을 토벌(討伐)하여 기성후(箕城候)에 封하니 公을 안장(安葬)한곳이 平海 南쪽 교현(橋峴) 자좌(子坐)이다. 세구영원(世久遼遠)하여 數次의 병화로 儀物이 없어지고 床石만이 現存하여 幾百年이 지나면서 영원(永遠)히 잊지 않고 만세(萬世)에 있을 자리에 공손히 흙 한줌이라도 덮어 保存하려는 어려움을 염려(念慮)치 않으랴. 이에 제종(諸宗)이 모의(謀議)하여 성심을 모아 돌을 갈아 신도(神道)로 호위석(護衛石)을 세우고 장차 오래 보존인위(保存引爲)하여 기문(記文을 원(願)하니 여왈, 이는 큰 글이니 대필(代筆)을 쓴 연후(然後)에 찬양할 일이므로 만일(萬一) 먼저 제서(題署)하는 것이 道理가 아니랴 하고 사양(辭讓)하였으나 불획(不獲)이라.

 상고(想考)할 때 신라이래(新羅以來)로 孫氏는 대족(大族)으로 크게 合하여 충효세덕(忠孝世德)하고 선세(先世)의 순행(純行)을 이어 가사(家事)를 닦고, 타처제솔(他處諸率)에도 도움을 꾀하고 거슬려도 宗社를 믿어 안전(安全)하고 생령(生靈)의 은혜(恩惠)를 입어 사력(史歷)에 빛나니 오히려 천세(千歲)에 感하여 흥기(興起)치 않으리. 公의 德과 홍업(鴻業)으로 당세에 우뚝하고 後世에 傳하여 정란(靖亂)의 지절(志節)이 여기에 그치지 말것이며 其外 모두 밝으나 세차(世次)에 소목(昭穆)이 缺하여 작질(爵秩)에 先後가 무계(無階)하니 애석(哀惜)하도다. 문헌(文獻)이 부족(不足)한 탓이라. 配는 平海黃氏로 종무(宗茂)의 女이니 한학사(漢學士) 諱 낙지(洛之)의 后이다. 生3男하니 曰, 득직(得直), 득수(得壽), 득부(得富)로 1男의 子孫이 기천(幾千)이라. 한빗돌에 得富의 玄孫을 새기니 순효(舜孝)라. 號는 물재(勿齋)인데 문장학행(文章學行)으로 성종조(成宗朝) 명신으로 이상(貳相)에 오르고 各派 學文과 벼슬이 代代로 다하지 못하였으나 뿌리가 곧으면 잎이 무성(茂盛)하고 원류(源流)가 크면 물은 멀리 흐르는 것이 당연하므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가르치는 者 말 없을것이러니와 이번 귀종 제군(諸君)들의 추모(追慕)하는 성심(誠心)이 可孝한 나라의 服式이라. 銘曰,

 

 저기 보인 그 가성(佳城)은 동해(東海)의 빛이요

                  첨피가성동해지양瞻彼佳城東海之陽)

 맑은 정기(精氣) 고운 종(種) 소리에 룡(龍)은 오르고 봉(鳳)은 날으네

                 숙기유종룡비봉상(淑氣攸種룡飛鳳翔)

 오직 公의 정령(精靈)인가? 희탕(戱蕩)한 방양(방羊)이라.

                 유공정령우상우상(유公精靈于상于祥)

 창성(昌盛)한후 빛은 먼 훗날에 다할것이다.

                 이창궐후유원미광(以昌厥後愈遠彌光)

 

          고려후 521년 임자 10月 21日 입

                  종사랑 전 교원 부여 장선 근찬

                                      응모 근서

(註) 고려후 521년 : 서기西紀 1912년

 

 

 

  평장사 사적 (平章事  事蹟 ) 碑文 - 원문


 손군참사(孫君參事) 일효(日孝)와 전참위계오보(前參尉啓五甫 )가 지기가승일통(持基家乘一通)하여 래언우여왈손지득성(來言于余曰孫之得姓)이 출자신라모량부촌장이흥덕왕시(出自新羅牟粱部大樹村長而興德王時)에 유휘순(有諱順)하여 이효저(以孝著)라.유석종지이(有石種之異)하니 체위오성지비조야(爲吾姓之鼻祖也)오. 재전이휘익담(再傳而諱翼淡)하여 봉평해군(封平海君)하여 인적평해(因籍平海)하니 평해손지시차(平海孫之始此)라 우루이비휘인량(又屢傳而至諱仁亮)하여 재려조 원종시(在麗朝 元宗時)하여 이대훈로봉기성후(以大勳勞封算城侯)하여  관 평장사 (官 平章事)하고 십년기사(拾年己巳)에  토림연지란(討林衍之亂) 이대훈로봉기성후(以大勳勞封算城侯)하니 公의 의이지장(衣履之藏)이 재 평해군 남교현 자좌지원(在 平海君 南橋峴 子坐之原)이라 세기료원(世旣療遠)에 루경병화(屢京兵火)하여 의물지설민몰태진(儀物之設泯沒殆盡)이오 지일상석(只一床石)이 광존지령(廣存至令)하니 약인순기년(若因循幾年)하여 불사소이영원지방칙만세재전(不思所以永遠之方則萬世在前)에 성공일배지토 역난보기무우(誠恐一坏之土 亦難保其無虞)세 원모제종(爰謀諸宗)하야 구재벌석(鳩財伐石)하여 용위수도(用衛隧道) 하여 장욕수지무궁기구 이존존자유명(將欲垂之無窮其久 而存存者惟銘)이니 원구기명(願求其銘)허노이다.여왈차(余曰此)는 대문자(大文字)라 필대수필이후(必大手筆而後)에 서기찬양기만일이선야(庶幾讚揚其萬一而선也) 난 비기인(非其人)이라 사지불확(辭之不확)일세 근계손씨(謹稽孫氏)자신려이래(自新麗以來)로 위잠영대족(爲簪纓大族) 하여 선연혁섭(蟬연赫燮)하여 세독충효(世篤忠孝)하며 조승선세순지지행(早承先世純至之行) 하여 수지어가(修之於家)하고 이지어군(移之於君)에 극찬가모(克贊嘉謀)하고 졸정극역(卒定劇逆)에 종사뢰안(宗社賴安)하며 택피생령(澤被生靈)에 공렬(功烈)이 병연어사책(炳然於史策)하니 천재지하(天載之下)에 상유이관감이흥기언(尙有以觀感而興起焉)이라 부이공지준덕흥업(夫以公之駿德흥業)으로 위위어당시(위위於當時)하고 가전어후세자의불지차이정난일절지외(可傳於後世者宜不止此而靖難一節之外)에 타무소쇄황(他無所기晃)하며 지어세차지소목문결(至於世次之昭穆聞缺)과 작질지후선무계(爵秩之後先無階)하니 석호(석乎)라 기문헌부족징야(其文獻不足徵也)로다. 配는 평해황씨(平海黃氏)니 종무지녀(宗茂之女)요 한학사휘락지후(漢學士諱洛之後)라. 生3男하니 왈 득직 득수 득부(曰 得直 得壽 得富) 일남(一男)의 손(孫)은 금위기천백인(今爲幾千百人)이라 일편지석(一片之石)에 소불능승기이득부지현손왈순효(所不能勝記而得富之玄孫曰舜孝) 호물재(號勿齋)니 이문장학행(以文章學行)으로 위전조성묘명신(爲前朝成廟名臣)하여 위지이상(爲至貳相)하여 사승(嗣承)이 진진(振振)하고 각파지명신홍유(各派之名紳洪儒)가 역벌부지(亦伐不之)하니 인(人)이 개근고이지무(盖根固而枝茂)하고 원대이류장(原大而流長)은 이지당여(理之當歟)적 강자계숙(降自季叔)으로 반본복시(反本復始)에 훈강지자료료(訓講之者廖廖)하니 금자귀종제군자추모지성(今자貴宗諸君子追慕之誠)이 족가 위일국지금식(足可 爲一國之衿式)일세 명왈(銘曰). 첨파가성(瞻파佳城)은 동해지양(東海之陽)이라. 숙기유종(淑氣攸鍾)에 용비봉상(龍飛鳳翔)이라 유공정령(維公精靈)이 우상우상(于徜于상)이라 이창궐후(以昌厥後)하여 유원미(愈遠彌)로다.

고려후(高麗後) 521年 임자(壬子) 10月 21日生

종사랑전교원부여(從仕郞前敎員扶餘)

장선(張善) 근찬(謹撰)

응모근서(應謀謹書)

 


 

 고려평장사기성후인량현충비문(高麗平章事箕城侯仁亮顯忠碑文)


由緖깊은 우리 孫氏는 배달 겨레의 고유종족(古有宗族)으로서 그 시원始原을 아득한 상고시대(上古時代)에서 발(發)한다.<<삼국유사 三國遺事>>를 비롯한 여러 고기(古記)에 의하면 진한(辰韓)땅에 옛부터 육촌(六村)이 있었는데, 그 중 무산대수촌장(茂山大樹村長)은 구례마(俱禮馬)였었다. 이 분의 조상(祖上)께서 처음에 이산(伊山)에서 내려오셨으니 이가 바로 손씨(孫氏)의 선조(先祖)라고 하였다. 檀紀 2277년에 구례마(俱禮馬)께서 다른 촌장(村長)들과 합의(合議)하여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서라벌(徐羅伐)이 초대왕으로 추대(推戴)함으로써 新羅 개국에 큰 功을 세우셨다. 유리 이사금(儒理 尼師今) 9년 육촌(六寸)에 姓氏를 내리실 때 우리 祖上들은 孫氏로 사성(賜姓)됨으로서 삼한명문(三韓名門)으로 꾸준히 번성해 왔다. 흥덕왕(興德王)때에 문효공(文孝公) 諱 순(順)께서 땅에서 석종(石鍾)을 나오게한 출천지대효(出天之大孝)로 월성군(月城君)에 封해졌으니 우리 宗門의 큰 자랑이요, 온 겨레의 사표(師表)라하겠다. 예부터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으로 칭송 받아온 한민족(韓民族)은 특히 인륜도덕(人倫道德)의 근원인 효행(孝行)을 숭상해 왔다. 우리 孫氏의 시조이신 월성군(月城君)의 지극한 효행은 <<삼국유사 三國遺事>>등 여러 고서(古書와 <<삼강행실 三綱行實>> 및 <<오륜행실도 五倫行實圖>>에 소상히 실려 있어 山河와 더불어 영원히 빛날것이니 그 血統을 이어받은 우리들은 孝道 정신을 종훈(宗訓)으로 받들어 그 실천(實踐)에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월성군(月城君)께서 우잠태수(牛岑太守 )백영발(白永發)의 따님을 夫人으로 맞아 두 아들을 두었으니 장자는 이부상서(吏部尙書) 諱 부(富)요, 차자는 병부상서(兵部尙書) 諱 수(秀)이다. 맞집의 諱 부(富)께서 세 아들을 훌륭히 길렀으니 장남 諱 익감(翼減)은 응천군(凝川君)이요, 차남 諱 익담(翼淡)은 평해군(平海君)이며, 3남 익원(翼洹)은 경주군(慶州君이니 이로써 밀양(密陽) 평해(平海) 경주(慶州)의 3파로 득관(得貫)하여 정립(鼎立)하게 되었다. 우리 평해 손씨(平海孫氏)는 입향조(入鄕祖)이신 평해군(平海君) 휘 익담(翼淡)이래 날로 번창을 거듭해 오다가 고려 원종(元宗) 때에 역신(逆臣) 임연(林衍)의 亂을 平定하는데 대훈(大勳)을 세움으로써 중서문하성평장사(中書門下省平章事)로 기성후(箕城侯)에 封해지신 諱 인량(仁亮)대에 이르러 그 성가(聲價)가 온 천하를 진동하였다. 기성후(箕城侯)의 위대하신 공적을 살펴보면 고려(高宗)때에 저 무도(無道)한 元의 침공으로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조정은 강화도(江華島)로 천도하여 항거하였으나 끝내 역부족(力不足)으로 굴복하고 말았다. 이러한 누란(累卵)의 국난속에서도 근 일세기(一世紀)에 달하는 최충헌(崔忠獻) 일족의 전횡(專橫)으로 국정(國政)은 문란이 극에 達하였다. 이때 천민 출신의 권신(權臣) 김준(金俊)이 최씨(崔氏) 일파를 도륙(屠戮)하고 실권을 장악하였으나 그 역시 부정부패와 전자발호(專恣跋扈)가 극심하여 민심이 이탈(離脫)함으로 마침내 동지(同志)이던 무신 임연(林衍)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이렇게 정권을 잡은 임연(林衍)은 차츰 역심(逆心)이 발동하여 개경(開京) 환도를 반대하고 상감을 유폐(幽閉)한 후 왕제(王弟) 안경공(安慶公) 창(淐)을 새 임금으로 옹립하는등 온갖 횡포를 자행하였다. 기성후(箕城侯)께서는 이런 불충무도(不忠無道)한 임연(林衍)의 난을 평정하고 원종(元宗)을 다시 王으로 복위(復位)시켜 종사(宗社)를 안정시켰으며 개경(開京)으로 환도하는데 큰 공훈을 세우셨으니 國家民族과 종사(宗社)를 위한 후(侯)의 충의(忠義)는 日月과 더불어 깊이 그 빛을 발(發할것이다. 시조 월성군(月城君)으로부터 20세이신 기성후(箕城侯)께서는 평해황씨(平海黃氏) 종무(宗茂)의 따님을 배필로 맞아 세 아들을 두었으니 장남은 이부상서(吏部尙書) 諱 득직(得直)인데 그의 장자 예부상서(禮部尙書) 諱 휴(休)는 정충공파(貞忠公派)의 파조(派祖)이고, 차자 諱 영(英)은 불이공파(不二公派)의 파조(派祖)로써 兄弟가 함께 고려말의 충절(忠節)로 이름이 높았다. 후(侯)의 차남은 검교문하시중(檢敎門下侍中) 諱 득수(得壽)인데 그의 장자인 호장(戶長 )諱 번(蕃)은 동정공파(同正公派)의 파조(派祖)이고, 차남 조(肇)는 녹정공파(祿井公派)의 파조(派祖)이며, 3자 諱 상(尙)은 부곡파(副谷派)의 파조(派祖)이다. 또 후(侯)의 3남은 판도판서(判圖判書) 諱 득부(得富)인데 그의 아들은 증 가선대부(贈 嘉善大夫 )형조참판(刑曹參判) 諱 영(永)이고, 손자는 증 정헌대부(贈 正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 諱 유례(有禮)이며, 그의 3남은 증 숭정대부(贈 崇政大夫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 )諱 밀(密)인데 그의 장자 諱 인효(仁孝)는 진사공파(進士公派)의 파조(派祖)이다. 또 그의 4자 諱 성효(成孝)는 판결사공파(判決事公派)의 파조(派祖)이다. 문정공 諱 순효(舜孝) 號 물재(勿齋)께서는 諱 밀(密)의 次子로써 어려서부터 총명신이(聰明神異)하였는데 자라서는 성리학(性理學)에 그 조예가 심오하였으며, 특히 <<중용中庸>>과 <<주역周易>>에 통달하였다. 단종(端宗) 1년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중시(重試)를 거쳐 응교(應敎) 전한(典翰 )부제(副提)도승지(都承旨) 대사헌(大司憲)과 강원(江原 )경기(京畿 )경상도(慶尙道)의 관찰사(觀察使) 및 공조(工曹) 형조(刑曹) 병조(兵曹)의 판서(判書)등 여러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문장(文章)과 시(詩) 그리고 글씨와 그림에도 능했던 公은 숭조효친(崇祖孝親)과 위국충성(爲國忠誠)에도 뛰어났는데 평생을 오로지 청백(淸白)으로 일관하였다. 자헌(資憲)을 거쳐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오른 公은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에 세자이사(世子貳師)를 겸하였는데 그 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서 궤장(几杖)을 하사받았으며, 향년 71세였다. 公의 장남 諱 준(濬)은 통진현감공파(通津懸監公波)의 파조(派祖)요, 차남 諱 주(澍)는 희질공파(僖質公派)의 파조(派祖)이며, 4남 諱 호(浩)는 가평공파(加平公派)의 파조(派祖)이고, 5남 諱 부(溥)는 옥강공파(玉江公派)의 파조(派祖이다. 이로써 자랑스런 우리 평해 손씨(平海 孫氏)는 11개파로 분파하여 근심지무(根深枝茂)의 장관을 이루면서 날로 번성을 거듭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종친중(宗親中)에서도 가장 맞집인 김천파(金川派)는 시조 문효공(文孝公)으로부터 같은 계통으로 내려오다가 제9세 상호군 (上護軍) 諱 현(賢)의 장남 諱 완(琓)의 후손들이니 主로 한반도의 북부에 거주하면서 번창해왔다. 自古로 많은 人材를 배출한 김천파(金川派)는 연종(連宗) 사종(嗣宗) 흥종(興宗)희종(希宗) 연종(연宗)의 5개파로 분파(分派)하여 내려왔는데 옛날에는 길이 멀어서, 오늘날에는 남북(南北)이 분단되어 서로 왕래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이번에 시 거대한 종사(宗事)를 계기로 서로 만나 그리던 회포(懷抱)를 풀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에 또 있으랴.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 평해손씨(平海 孫氏)는 시조이신 문효공(文孝公)이 지극한 효성(孝誠)과 기성후(箕城侯)의 숭고한 애국정신 그리고 문정공(文貞公)의 청백(淸白)한 선비의 긍지를 거울삼아 청기지(靑氣地)와 더불어 영원 무궁토록 번성을 거듭할 것이다. 보본숭조(報本崇祖)의 정신이 뛰어나 성태(成泰) 대종회장(大宗會長)이 백방으로 노력하여 이 거창한 비석을 세우고 흩어졌던 족친들을 규합하여 돈목(敦睦)의 순풍(淳風)을 더욱 진작시키니 무엇보다도 반가운 장거(壯擧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뒷 산위에 모셔진 평장사공(平章事公)께서 만고불멸(萬古不滅)의 대공훈(大功勳을 세우시고 기성후(箕城侯)에 봉(封)해져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으신 전통 깊은 이 고장에 충효(忠孝)의 동산을 조성하고 현충비(顯忠碑)를 세우는 뜻은 천만세(千萬世) 후손들과 모든 국민들의 교훈으로 삼고자 함이니 저 유구의 흐름 동해(東海)의 물결과 창공(蒼空)에 높이 솟은 백암(白巖)의 영봉(靈峰)이 우리의 앞길을 축복하는도다. 이어서 찬(讚)하기를

  

  시조님의 출천지효(出天之孝) 日月과 같고,

  기성후(箕城侯)의 위국충성(爲國忠誠) 태산(泰山)과 같네.

  문정공(文貞公)의 청백정신(淸白精神) 선비의 거울,

  그 핏줄 이어받이 더욱 빛내리

  입향조(入鄕祖)인 평해군(平海君)이 터전을 잡고

  평해(平海) 충주(忠州) 열한개파 번성도하다.

  금천파(金川派)의 다섯줄기 한데 모이니

  영원히 번창하다 평해손씨(平海孫氏)여

                                                   


檀紀 四三二0年 丁卯 九月 九日

十八世孫 錫佑 謹

慶州后人 鄭雲在 謹書

   

▶ 정충공 사적(貞忠公 事蹟)

  

  公의 휘는 휴()이요. 호는 정충(貞忠)이다. 高祖는 국겸(國謙)이요. 증조(曾祖)는 휘가 보화(普化)며, 조()는 평장사(平章事 )휘 인량 (仁亮)이고 考는 이부상서(吏部尙書) 휘 득직(得直)이다. 公이 지정년간(至正年間 1342 - 1368 年)에 出生하여 官이 예부상서(禮部尙書)까지 올랐으나 이조혁명(李朝革命)이 되자 정충고절(貞忠孤節)로 불사2군(不事二君)의 도리(道理)로 여생을 마쳤다.

 


▶ 불이공 사적(不二公 事蹟)

 

公의 諱는 영(英)이요 號는 불이(不二)이다 고려조(高麗朝) 평장사 봉 기성군 (平章事 封箕城君)  諱 인량(仁亮)의 孫이며 考는 諱가 득직(得直)으로 官이 이부상서(吏部尙書)다. 公은 高麗朝에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역임(歷任)하였으나 이조혁명(李朝革命)으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굳은 의지(意志)로 출사거절(出仕拒絶)하고 향리평해(鄕里平海)로 돌아가 여생(餘生)을 보내었다. 生一男에 린(麟)이고 시생(是生)에 근(根)이다.


▶ 동정공 사적(同正公 事蹟)


  公의 휘는 번(蕃)이요. 평장사(平章事) 휘 인량(仁亮)의 孫이요. 검교문하시중(檢敎門下侍中) 휘 득수(得壽)의 長子이니 高麗 忠定王 3年 辛卯(1351年)에 出生하여 조등문과(早登文科)하여 공민왕(恭愍王) 21년 壬子(1372年)에 호장(戶長)에 오르고 정무의 충직함과 문명(文名)이 날로 높았으나 李氏革命 으로 불사2군(不事二君)의 충의(忠義)로 불취(不就)하고 산천(山川)을 벗삼아 여생을 마쳤다. 丁酉(1417 年)에 卒하니 享年이 67이요. 配는 정부인(貞夫人) 경주이씨(慶州李氏)로서 生 1男인데 계조(繼祚)이고 孫은 무용(務龍)이다.

 

록정공 사적(祿井公 事蹟)


  公의 諱는 조(肇)요. 호는 록정(祿井)이다. 箕城君 諱 인량(仁亮)의 孫이요. 검교문하시중(檢敎門下侍中) 諱 득수(得壽) 의 子이니 이조혁명(李朝革命)때 숨어서 록정(祿井)하여 운류풍월(雲流諷月)로 세월(歲月)을 보내니 동방(東方)의 청절(淸節)이라 하였다.


▶ 부곡공 사적(富谷公 事蹟)

  

  公의 諱는 상(尙)이요. 號는 부곡(富谷)이니 箕城君 諱 仁亮의 孫이며 검교문하시중(檢敎門下侍中) 諱 得壽의 子이다. 이조혁명(李朝革命)대 富谷으로 피하여 주야(晝夜)로 울면서 슬픈 나날을 보내니 향인(鄕人)들이 우러러 보았다. 평생(平生)토록 지조(志操)를 굴하지 않으니 그의 충절(忠節)을 미루어 짐작케 한다.


▶ 직랑공 사적(直郞公 事蹟)


  公의 諱는 永이요.  기성군(箕城君) 諱 인량(仁亮)의 孫이요. 元나라 인종연우(仁宗延祐) 5年 (西紀 1318年)에 出生하여 고려(高麗) 충숙왕(忠肅王)때 진사(進士)로서 관()은 도관직랑(都官直郞)으로 있었다. 이조(李朝)에 들어와 증 가정대부(贈 嘉靖大夫) 형조참판(刑曹叅判)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요 셋째 손()인 밀()은 官이 장사랑(將士郞)으로 수(守) 정선군수(旌善郡守)하고 2男인 순효(舜孝)의 貴로 증 숭록대부의정부좌찬성(贈 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증하다.


(註) 진사괴(進士魁): 진사시(進士試)에서 으뜸으로 합격(合格)함. 괴(魁)는 으뜸으로 장원(壯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