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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와 두 사람 - 김정희와 이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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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글사진

2021. 4. 3.

[ 세한도와 두 사람 ]
             
 ● 김정희와 이상적

1944년 여름, 태평양 전쟁은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일본은 이미 패색이 짙었고 일본 본토를 폭격 사정권에 둔 미군은 무차별 폭격을 퍼부었다. 수시로 공습 사이렌이 울리고 미군기 습격을 알리는 다급한 목소리가 일본인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하던 전쟁 통에 한 조선인이 일본의 수도 동경을 방문했다. 나이 마흔 둘의 서예가이자 미술품 수집가 손재형이었다. 목적지는 도쿄 우에노의 후지스카 지카시(藤塚隣)의 집이었다. 후지스카와 손재형은 구면이었다.

“결국 또 그 얘기를 하러 온 건가요?”

후지스카는 얼굴을 굳히고 물었다. 그러자 손재형은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제게 세한도(歲寒圖)를 팔아 주십시오.”

후지스카의 얼굴이 더욱 결연해졌다. 경성제국대학 교수를 지낸 그는 추사 김정희 매니아로 유명했고 일본으로 건너올 때 세한도를 비롯한 추사의 작품들을 가지고 왔었다. 그런데 그 중 가장 값지고도 사연 있는 작품, 자신도 아까워서 1년에 몇 번 들여다보지 않을 세한도를 달라니. 후지스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조선에 있을 때부터 세한도를 팔라고 조르던 이 조선인이 일본까지 찾아와서 내 집 문지방을 넘다니. 후지스카는 단호하게 잘라 버렸다.

“절대로 안 되오. 그냥 돌아가시오.”

손재형은 의외로 선선히 물러나는 듯 했다. 아쉬운 표정으로 일어나 하직 인사를 올리기에 웬일인가 싶었는데 손재형은 엷은 미소를 띄우면서 말을 이었다. “내일 뵙겠습니다.”
.
그러나 ‘내일’은 쉼 없이 계속됐다. 손재형은 하루도 빠짐없이 후지스카를 방문했고 녹음기처럼 말을 되풀이했다. “세한도를 주십시오, 세한도는 조선에 있어야 합니다. ” 그렇게 100여일 동안 손재형은 후지스카를 찾아왔고 머리를 숙였다. “세한도를 주십시오. 돈은 원하는 대로 드리겠습니다.”

마음이 누그러진 후지스카는 이미 자신의 몸이 쇠약하니 죽은 뒤 유언을 통해 당신에게 인도하마 한 발 물러섰으나 손재형은 막무가내였다. 그는 눈물까지 뚝뚝 흘리며 세한도를 자신에게 팔아 달라고 두 손을 바닥에 짚었다. 마침내 후지스카 치카시가 졌다. 댓가도 없이 세한도를 손재형에게 넘긴 것이다.

“선비가 아끼던 것을 어찌 값으로 따질 수 있으리. 돈은 됐소. 보존만 잘 해 주시오.” .

후지스카가 조금만 더 결심을 늦추었더라면 우리는 영원히 세한도를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세한도를 양도한 직후 미군의 폭격으로 후지스카의 집이 불타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후지스카 치카시는 아들에게 “조선의 보물은 조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유언을 남겼고 그 아들은 2006년 사망하기 전 아버지가 모았던 추사 친필 글씨 26점, 추사와 관련된 서화류 70여 점 등 1만여 점을 과천시에 기증하면서 현금 200만 엔까지 더해 왔다. 손재형의 정성에 대한 감동이 그 아들 대에까지 이어진 것이리라.

세한도를 손에 넣은 손재형의 기쁨으로 돌아가보자. 조심스럽게 그림을 펼치는 그의 눈은 그림을 비출 듯이 빛났고, 온전히 드러난 세한도 앞에서 다시금 가슴은 심하게 고동쳤다. 겨울 칼바람이 쓸고 지나간 듯 황량한 여백에 얹힌 허름하고 구멍 뚫린 집 한 채, 그러나 엄동설한의 칼바람에 흔들림 없이 섰고, 그 가지에 달린 잎들도 무성하고 싱싱한 소나무와 잣나무 4그루.

추사 김정희의 필법과 화법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이 귀물이 돌아왔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해방 조선에 퍼졌고 많은 이들이 그림을 보기를 원했다. 그 가운데 손재형은 당대의 석학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정인보와 이시영, 그리고 오세창에게 세한도를 보이고 이들로부터 발문을 받는다.

이 세 명의 발문은 세한도에 바쳐진 마지막 배관기(拜觀記) 즉, ‘절하면서 보았던 기록’이다. 그 앞에는 한때 그림을 소장했던 김석준과 청나라의 명사 16명이 세한도를 보고 남긴 감상들이 줄줄이 붙여져 있었다. 그래서 세한도를 다 펼치면 길이는 무려 14미터에 달한다.

물론 이 길디 긴 화폭에 처음으로 글씨를 쓴 이는 김정희 본인이다. ‘세한도’(歲寒圖)라고 예서체로 쓴 제목 옆으로 ‘우선시상(藕船是賞)이라고 쓰여 있다.

이 우선(藕船)은 이상적 (李尙迪, 1803~1865)이라는 이의 호(號)다. 즉 “이상적은 이 그림을 감상하시라.”는 제목이면서 이 세한도가 이상적을 위해 그려졌다는 김정희 본인의 선언이다. 그럼 이상적은 어떤 이유로 세한도의 주인공이 됐던 것일까. 추사 김정희로부터 그 사연을 풀어가 보자.

추사 김정희는 경주 김씨다. 경주 김씨라면 영조의 후비인 정순왕후 김씨의 집안으로 세도를 부렸으나 정조 이후 등장한 안동 김씨 세력에 의해 밀려나는 집안이다. 그러나 김정희가 과거에 급제할 때만 해도 조정에서 축하를 보내올 만큼 위세 높은 가문이었다.

김정희 역시 젊어서부터 천재 소리를 들었으며 총명한 만큼이나 지적인 욕구에 그득한 사람이었다. 10대 때 북학파의 태두라 할 박제가의 제자가 되어 스승이 교유한다는 청나라 지식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호기심을 키우던 그에게는 간절한 꿈이 하나 있었다. 청나라에 들어가 스승 박제가처럼 쟁쟁한 청나라 학자들을 만나는 일이었다. 그의 심경을 노래한 시가 남아 있다.

“홀연 한 생각 일으켜
(慨然起別思)
사해에서 널리 지기를 맺고 싶네
(四海結知己)
만약 마음 맞는 사람을 얻게 된다면
(如得契心人)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도 있겠네
(可以爲一死)
하늘 아래 명사가 많다 하니
(日下多名士)
부럽기 그지 없어라
(艶羡不自已)”

1801년 네 번째로 북경을 방문하게 되는 박제가는 제자가 지은 시를 청나라 학자 조강에게 보였다. 요즘 이런 아이가 내 밑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네 하며 어깨도 족히 으쓱거렸으리라. 타는 목마름으로 연행(燕行), 즉 북경을 가 보고 싶어하던 김정희에게 기회가 왔다. 아버지 김노경이 청나라에 가는 사신으로 뽑힌 것이다. 김정희는 사신 수행원으로 자원하여 압록강을 넘는다.(1809) 김정희의 나이 24살이었다.

북경은 완전히 신천지였다. 고루한 성리학에 사로잡혀 행여 다른 생각이라도 할라치면 사문난적 (성리학에서, 교리를 어지럽히고 사상에 어긋나는 언행을 하는 사람)으로 몰리기 일쑤였던 조선 선비 사회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볼 것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았다.

우선 김정희는 청나라 당대의 대학자 완원과 사제관계를 맺는다. 김정희의 아호는 72가지에 달하는데 그 가운데 완당(阮黨)이라는 호는 완원의 제자임을 뜻하는 것이다. 또 당시 금석학의 1인자였던 옹방강의 초대를 받아 그가 모으고 보유했던 진귀한 자료를 직접 대면했을 때 김정희는 그야말로 새 세상을 본 느낌이었다.

이 신선한 만남을 통한 에너지 때문이었을까. 그는 조선 곳곳에 널린 옛 비문들을 통한 과거 여행에 나서게 된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북한산 비봉 정상에 오랫 동안 방치돼 왔던 진흥왕 순수비의 발견이었다. 김정희는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서 새 땅을 굽어보던 신라 진흥왕의 웅혼한 흔적을 천 삼백년만에 밝혀 냈다. 그는 이후 각지를 방문하며 문무왕비, 무장사비 등 옛 비문들을 연속 발견했고 그 비문을 탁본으로 떠 청나라에 보냈다.

당시 청나라의 중심 학문은 옛 문헌의 정밀한 고증을 지상과제로 삼는 고증학이었던 바, 김정희가 보내온 탁본은 대단한 화제를 모았고 김정희는 일약 청나라에서 그 이름을 드날리는 몇 안되는 조선 사람이 된다. 굳이 비유하자면 ‘한류 스타’ 였던 셈이다. 김정희의 동생 김명희가 청나라에 갔을 때 청나라 사람들이 형의 이름에 경의를 표하는 것을 보고 놀란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청나라에서 돌아온 후 김정희는 서른 네 살에 문과에 급제하고 승승장구한다. 하지만 1830년, 추사 나이 마흔 다섯에 그의 탄탄대로에는 결정적으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다. 윤상도라는 이의 옥사에 아버지 김노경이 연루돼 고금도로 유배된 것이다. 집안의 기둥이 부러지는 충격이었고 아버지는 유배지에서 돌아온 후 머지않아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김정희 가문에 대한 임금의 신뢰는 여전히 높아서 김정희는 이후로도 벼슬살이를 했고 1840년 그의 나이 쉰 네 살에 다시금 중국에 사신으로 갈 기회를 얻는다. 머리는 반백이었으나 김정희의 가슴은 또 한 번 싯푸르게 젊어졌을 것이다.

무려 30년만의 기회 아닌가. 과거를 더듬으며 만날 사람을 꼽고 사행길에 얻어야 할 책들을 정리해 보며 설레는 북경행을 기다리던 그에게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10년 전 아버지를 옭아맸던 윤상도 사건의 책임론이 또 다시 불거지면서 그만 귀양길에 오르고 만 것이다.

드넓은 세상 북경은 커녕 제주도에서도 가장 험한 고장이라는 대정에서 김정희는 귀양살이 를 하게 된다. 세도 가문에서 자라 탄탄대로를 걸었던 김정희에게 귀양살이는 큰 고통이었다. 입도 까다로웠는지 먼 귀양지로 음식을 보내 달라고 통사정하는 편지를 집에 보내곤 했는데 내용을 들여다보면 슬그머니 웃음이 나온다.

“기껏 해서 보낸 반찬거리는 마른 것 외에는 모두 상해서 먹을 길이 없소...... 서울에서 보낸 김치는 소금을 잔뜩 친 것이라 좀 맛이 이상하긴 해도 참고 먹소.....어란(魚卵)같은 것이나 그 즈음에서 얻기 쉬운 게 있으면 좀 보내 주시오.”

그런데 입에 선 음식, 불편한 잠자리, 타지 사람들의 텃세만큼이나 김정희를 괴롭힌 것은 고립감이었다. 한때 산지사방을 누비고 수천 리 밖 중국인 학자들과 함께 호흡하며 “문하에 3천명”이라고 하여 훗날의 흥선대원군 이하응부터 숱한 선비들과 중인들까지 교유하던 김정희가 졸지에 궁벽한 섬의 가시 울타리 속에 갇혀 버렸다.

주변엔 온통 밭갈이하는 농부와 고기잡이 외에는 모르는 어민, 깐깐한 군관들뿐이었다. 학문을 논할 상대는커녕 천자문을 뗀 사람도 없었다. 입이 있으되 할 말이 없고, 할 말은 있어도 얘기 나눌 사람이 없는 막막한 유배객은 반찬 투정 외에 할 일도 없지 않았을까.

귀양 온지 몇 해가 흘러 1843년의 어느날,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배가 들어왔는데 김정희에게 짐이 부쳐져 왔다는 것이다. 몸을 일으켜 짐꾼들을 맞은 김정희의 눈은 커지고 언성은 떨려 나왔다. “아니 이게 무엇인가.”

짐은 모두 책이었다. 짐꾼들은 볼멘 소리로 대답했다. “까막눈인 소인들이 뭔지 알 턱이 있습니까요. 한양 사역원(司譯院- 통역관 교육 및 업무를 맡아보던 기관)에서 보낸 겁니다요. 귀한 것이니 바닷물이나 바람에 상하지 않게 하라 어찌나 신신당부하시던지 저희도 신경이 곤두섰습니다요.”

사역원 소리를 듣자마자 김정희의 입에서는 이름 하나가 튀어나왔다. “오오 우선!(藕船)” 책을 보낸 이는 우선 이상적이었다. 그리고 수레의 책은 추사가 오래 전부터 탐해 마지 않던 <만학집>(晩學集)과 <대운산방문고>(大雲山房文庫)였다.

이 책들을 구하기 위해 스승으로 섬겼던 청나라 학자 완원의 아들에게까지 기별하여 간청했으나 구하기 어렵다는 회답에 실망을 금하지 못했던 책들이었다. 그런데 그 책들이 조선 땅 삼천리를 가로지르고 거친 파도를 넘어 제주도에서도 가장 험하다는 대정 땅 귀양지에 떡 하니 도착한 것이다.

이상적만이 줄 수 있었던 선물이었다. 추사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책들을 더듬었다. 손가락 끝에서 제자이자 문우(文友)라 할 이상적과의 추억이 따뜻하게 묻어났다.

1830년 겨울, 김정희의 아버지 김노경이 고금도로 귀양을 갔던 해였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 있던 김정희의 집에 한 역관이 찾아온다. 당대의 유능한 역관이었을 뿐만 아니라 임금 헌종이 그의 시를 애송했다 할 만큼 시인으로서도 출중했으며 중국 친구들이 앞장서서 그 문집을 낼 정도의 인재였으나 항상 추사에게 머리 숙이고 가르침을 청하던 이상적이었다. 그때 이상적은 부친의 귀양에 상심해 있던 추사에게 이런 시로 위로를 전한다.

“아침 햇살 흐릿한 성곽 너머로
눈 서리 뒤엉킨 드넓은 들판
지독한 추위는 풀리지 않고
남은 겨울을 옥죄고 있다.
모래 길 찾으면서 걸어가는데
얼음은 돌멩이와 뒤섞여 있고
빈 강의 찬 가운은 눈을 찌르며
드넓은 유리 빙판 덮어버린다.
주막 깃발 나부끼는 깊은 마을엔
고깃배 얼어붙어 멀리 갈 수 없지만
파교로 매화를 찾아나서면
시인을 만날 수도 있을 듯하다.
그 옛날 왕휘지는 친구 찾아 나섰다가
부질없이 섬계에서 배를 돌려 왔었지.
저기 저 한겨울의 나뭇가지 위로는
바람 속에 까치가 맴돌고 있다.”

이 시의 마지막 부분을 보자. 왕휘지라는 이는 명필로 유명한 왕희지의 아들이다. 그는 어느날 섬계라는 곳에 사는 친구를 보고 싶어서 밤새 노를 저어 갔다. 그런데 새벽이 밝아오고 친구의 집 근처에 이르자 돌연 배를 돌렸다. 이유는 “흥이 나지 않는다.”는 것. 친구가 보고파서 밤새 노를 저어 갔지만, 막상 당도하고 보니 그럴 기분이 사라져서 배를 돌렸다는 고사(故事)를 인용한 것이다.

이건 무슨 뜻일까. 어쩌면 이상적 역시 불안했는지도 모른다. 추사의 부친 김노경이 절해고도로 유배된 사건은 뒷날 그 사건의 중심 인물 윤상도가 능지처참을 당할 만큼 심각한 사건이었다. 이렇듯 역모에 필적하는 사건에 휘말린 이의 가족을 찾아 위로한다는 것은 그 자신에게도 대단한 부담일 수 밖에 없었다.

누군가에게 역모 또는 그에 준하는 혐의가 씌워질 경우, 그 친구들도 의심의 시선을 받고 불운한 경우 의금부에 끌려 들어가 형틀에 묶이는 경우가 다반사이던 시절이었다. 이상적은 가는 길에도 여러 번 발길을 돌릴까 말까 망설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상적은 왕휘지가 아니었다.

한편 김정희는 생애 가장 혹독한 겨울을 맞이하고 있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누구도 찾기 어려운, 외로워서 괴로운 겨울을. 그 지긋지긋한 겨울 끝, 입춘 즈음 이상적은 봄처럼 찾아왔다. “얼마나 상심이 크십니까.”

경사(慶事)에는 빠져도 상갓집은 빼놓지 말라는 말이 있다. 어려울 때 손잡아 주는 벗은 기쁠 때 축배를 든 친구보다 열 배는 더 기억에 남는다. 김정희 또한 감격했다. 더구나 이상적은 역관으로서 북경을 막 다녀온 참이었다. 여독도 풀리지 않은 몸으로 한겨울 바람을 헤치고 자신을 찾아 항상 가슴에 담고 있던 북경의 새 소식을 도란도란 전해 주는 이상적이 김정희에게 어떻게 보였을까.

김정희의 가슴에는 이상적의 이름과 얼굴이 깊숙이 박힌다. 그로부터 또 10년. 이번엔 10년 전 자신의 아버지처럼 국토의 끝 제주도에 귀양 와서 처참함을 곱씹던 김정희에게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피가 살아 흐르는 듯한 이상적의 선물이 당도한 것이다. 김정희가 어떻게든 구하려고 애썼던 바로 그 책들이었다.

일생에 두 번째이자 마지막이 될 북경행 기회를 허무하게 잃어버렸던 김정희에 대한 이상적의 위로였으리라. 김정희는 책장을 넘기면서 거듭 눈가를 닦아야 했다. 그 귀한 책장에 눈물 자국을 남길 수는 없었다. 고맙네 상적이..... 감사하네 우선.

다산 정약용과도 인연이 있었던 차(茶)의 명인 초의 선사를 비롯하여 몇몇 제자들은 바다를 건너 김정희를 만나러 오기까지 했으나 김정희의 마음은 이상적에게로 쏠리고 있었다. 다른 손님들이 어찌 반갑고 고맙지 않을까마는 자신의 속을 가장 잘 알아주고 가려운 데를 긁고 허전한 곳을 채운 것은 이상적의 마음씀씀이였던 것이다.

“이 은혜를 어찌 갚을꼬.”

늘 이 한탄을 입에 물고 살던 김정희는 여느 날보다도 정성스럽게 먹을 갈고 종이를 편다. 귀양지 오막살이에 들이치는 바닷바람은 뭇 사람들의 살을 베어내며 귓전을 울렸으나 추사의 마음은 바람의 시퍼런 살기에도 아랑곳없이 제풀에 푸르른 소나무처럼 꼿꼿했다.

“오늘 이 마음을 담으리라.”

그리고 김정희는 필치 하나, 획 하나에 눈과 손과 정신을 쏟아부으며 한 폭의 그림을 그려 나간다. 그는 평소 “문자향 서권기(文字香 書卷氣)”라는 표현을 즐겨 썼다. 문자의 향기와 서책의 기운이라는 뜻이다. 즉 책을 많이 읽고 교양을 쌓으면 그것이 그림과 글씨에서 드러난다는 뜻이었다. “평생 열 개의 벼루를 밑창 내고, 천 자루의 붓을 몽당붓으로 만들었네.”라고 자랑했던 김정희는 필생의 붓놀림으로 <세한도>를 창조한다. 그림으로는 모자랐던가 보다. 김정희는 다시 손목을 바로 하고 한 자 한 자 써 내려갔다.

“그대가 지난해에 계복(桂馥)의 만학집(晩學集)과 운경(惲敬)의 대운산방문고(大雲山房文藁) 두 책을 부쳐주고, 올해 또 하장령(賀長齡)이 편찬한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120권을 보내주니 이는 모두 세상에 흔한 일이 아니다. 천만리 먼 곳에서 사온 것이고 여러 해에 걸쳐서 얻은 것이니, 일시에 가능했던 일도 아니었다.”

(去年以晩學大雲二書寄來 今年又以藕耕文編寄來 此皆非世之常有 購之千萬里之遠 積有年而得之 非一時之事也)

사람들은 누구나 선물 받는 것을 기꺼워하지만 정말로 기쁠 때는 그 선물에 담긴 정성을 헤아릴 수 있을 때다. 이 사람이 나를 위해 얼마나 노고를 들였는지, 내가 이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를 깨달을 때 선물은 한낱 물건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잇는 다리가 되고 평생 잊지 못할 우정의 징표가 된다. 김정희는 귀한 책을 받아서가 아니라 그를 찾느라 발이 부르트고 귀를 세우고 적잖은 값을 치렀을 이상적을 헤아리고 있었다.

“지금 세상은 온통 권세와 이득을 좇는 풍조가 휩쓸고 있다. 그런 풍조 속에서 서책을 구하는 일에 마음을 쓰고 힘들이기를 그 같이 하고서도 그대의 이권을 보살펴줄 사람에게 주지 않고, 바다멀리 초췌하게 시들어 있는 사람에게 보내는 것을 마치 세상에서 잇속을 좇듯이 하였구나”

(且世之滔滔 惟權利之是趍 爲之費心費力如此 而不以歸之權利 乃歸之海外蕉萃枯槁之人 如世之趨權利者)

조금 추우면 양지를 찾고 약간이라도 더워지면 그늘을 찾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를 이루어도 정승이 죽으면 찾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세상 인심이다. 잘나가는 역관에 문재를 갖추고 학문도 깊었던 이상적이라면 얼마든 고관대작과 어울리고 그들에게 귀한 책들을 바치며 자신의 입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장식용’으로 책을 구입하는 사람은 많거니와 당시는 어쨌건 책을 읽어야 행세를 하는 시대였다. 하지만 이상적은 그를 ‘바다 멀리 초췌하게 시든’ 사람에게 ‘잇속을 좇듯이’ 보낸 것이다. 글이 더해갈수록 추사의 마음도 격해졌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된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 수 있다’고 하셨다. 소나무, 잣나무는 본래 사계절 없이 잎이 지지 않는다. 추운 계절이 오기 전에도 같은 소나무, 잣나무요, 추위가 닥친 후에도 여전히 같은 소나무, 잣나무다. .

그런데도 성인(공자)께서는 굳이 추위가 닥친 다음의 그것을 가리켜 말씀하셨다. 이제 그대가 나를 대하는 처신을 돌이켜보면, 그 전이라고 더 잘한 것도 없지만, 그 후라고 전만큼 못한 일도 없었다. 예전의 그대에 대해서는 따로 일컬을 것이 없지만, 그 후에 그대가 보여준 태도는 역시 성인에게서도 일컬음을 받을 만한 것이 아닌가? 성인이 특히 추운 계절의 소나무, 잣나무를 말씀하신 것은 다만 시들지 않는 나무의 굳센 정절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역시 추운 계절이라는 그 시절에 대하여 따로 마음에 느끼신 점이 있었던 것이다.”

김정희는 이상적을 두고 “성인에게도 일컬음을 받을 만하다.”라고 극찬하며 감사해 하며 그림 속의 소나무와 잣나무를 이상적의 일관된 선의에 비겼다. 하지만 동시에 이는 자신에 대한 다짐이기도 했다. 비록 만물이 숨을 죽이고 흰눈이 세상을 덮은 겨울이라 하더라도 온 세상의 한켠에서 푸르름을 잃지 않으리라는 선비로서, 귀양객으로서, 그리고 자존심 드높은 지식인으로서의 결의가 세한도에는 담겨 있었다. 소나무와 잣나무가 각각 두 그루인 이유다.

즉 세한도의 주인공은 이상적이면서 김정희였다. 세한도를 창조한 것은 김정희였으나 그 원천을 제공한 것은 이상적이었고, 이상적에게 감사한 만큼 김정희는 자신을 가다듬었다. 이상적의 배려와 김정희의 감응이 희대의 걸작을 창조해 낸 것이다. 이윽고 김정희는 왼쪽 하단에 붉은색, 즉 한 조각 붉은 마음을 드러내듯 장무상망(長毋想忘)의 낙관을 찍는다. “오랫 동안 잊지 마세나.”

바다를 건너와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한 장의 종이, 그에 담긴 글과 그림 앞에서 이상적은 몸을 떨며 감격한다. 그의 답신이다. “세한도 한 폭을 엎드려 읽으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그다지도 제 분수에 넘치는 칭찬을 하셨습니까. 아! 제가 어떤 사람이기에 권세와 이득을 따르지 않고 도도히 흐르는 세파 속에서 초연히 빠져나올 수 있겠습니까. 다만 구구한 작은 마음으로 스스로 하지 않을 수 없어 그렇게 했을 뿐입니다”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오주석 저)

.그러면서 자신이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음을, 십수년 전 망설임을 무릅쓰고 중죄로 귀양간 유배객의 아들을 위로하던 날부터 김정희가 원하던 책을 찾느라 중국인들의 짜증을 무릅쓰고 제발 구해 달라 간청하던 기억, 마침내 책을 구했을 때 혼자 방안에서 환호하면서 “스승님 여기 그 책들이 있습니다.” 하며 하릴없이 외쳐대던 밤, “소금기 먹지 않게 각별히 유의하게” 하며 웃돈을 더 얹어 주며 빈틈없이 제주 대정의 유배객 김정희에게 전하라 당부하던 순간을 되새겼으리라.

그 하나 하나가 울컥울컥 움찔움찔거리며 마음을 찌르는 가운데 기나긴 인연 자락 위로 솟은 꽃봉우리 앞에서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을 것이다. 더하여 이상적은 그 감격에 겨워 눈물만 흘릴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편지에 이렇게 덧붙인다.

“이번 걸음에 이 그림을 갖고 연경에 가서 표구하여 옛 지기(知己) 분들에게 보이고 시문을 청할까 하옵니다.”

그는 중국을 제집 드나들듯 하던 역관이었다. 30여년 전 스물 네 살의 청년 김정희의 북경행이 그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를 물리게 들었고 그 추억을 다시 갖기 어려운 추사의 아쉬움을 자기 일처럼 몸에 둘렀던 사람이었다. 젊은 날의 김정희를 알아주고 격려하고 시를 나눴던 ‘옛 지기’들에게, '조선의 김정희‘를 알음알음 공유하던 사람들에게 세한도를 보이고 시문을 청한다는 것은 곧 수천 리 바다와 육지를 넘어 늘그막의 김정희와 북경의 옛 친구들을 이어 보겠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세한도는 한 장의 그림을 넘어 나라의 경계를 넘어 사람들을 잇는 다리가 되고, 김정희 혼자만의 작품이 아니라 당당한 문사였던 이상적, 그리고 청나라의 쟁쟁한 선비들의 글이 더해진 희대의 보물로 다시 태어난다.

“김정희는 바다 넘어 뛰어난 영재, 일찍부터 그 명성이 높았네. 명성은 훼손되어 갈곳도 없고 세상의 그물에 걸려들었네. 도도하게 흘러가는 세속을 보니 선비의 맑은 정신 누가 알겠는가. 이 풍진 세상 한탄하다가 일찍이 어린 친구 알게 되었네. 높은 의리 돈독하기는 항상 같았고 겨울에도 그 맹세 흐트러짐 없었으니, 소나무와 잣나무를 닮아서인지 타고난 성품은 곧고 단단하네. 시들지 않는 그림을 그려 두터운 그 정에 보답하였다네.” (청나라 학자 반증위의 발문)

"우선이 김추사 선생이 그린 세한도를 보여 주며 제명을 부탁했다. 급히 율시 두 수를 짓고, 추사 선생과 마음으로나마 교유하기를 그린다. 언제쯤이나 얼굴을 뵐 수 있을까 생각하니 더욱 슬플 따름이다. (청나라 학자 장요손의 발문)

이런 식으로 세한도에는 열 여섯 명의 청나라 사람들의 글이 더해졌다. 조선의 바다에 외로이 뜬 섬 제주도의 궁벽진 초가에서 그려진 세한도의 사연과 품격은 북경의 학자들을 감동시켰고 세월이 흐른 뒤에는 어느 일본인의 마음까지 사로잡아 일본으로까지 건너갔다가 지극한 정성을 들인 끝에 되돌아오는 파란 많은 보물로 남는다.

이상적의 따뜻한 마음이 아니었더라면 세한도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또 김정희의 곧은 품성과 천재적인 재능이 없었다면 세한도는 결코 그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더하여 이상적이 아니었다면 세한도는 북경까지 먼길을 나서 청나라 학자들의 찬미를 받는 영광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며, 아울러 한 시대의 획을 그은 천재 추사 김정희였기에 이상적으로 하여금 그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바로 이상적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황량한 벌판에 고고히 서 있는 소나무와 잣나무. 꺾이거나 낙엽지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스승님의 의연한 자태. 그것은 그 어떤 세파에도 굴하지 않으며 누구의 험구에도 변명하지 않고 당당히 버티고 있는 일편단심의 자태입니다.”

다시 <세한도>가 해방된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로 돌아가 보자. 앞서 말했듯 손재형은 세 명의 명사에게 세한도를 보이고 배관기를 청했다. 이시영, 정인보, 오세창. 그 가운데 오세창의 경우 감회는 더욱 충만하였을 것이다. 오세창은 역관 가문 출신이었다. 그리고 그 아버지 오경석이 바로 이상적의 제자였던 것이다. 아버지의 사부의 사부 김정희가, 아버지의 사부 이상적이 함께 그려내고 완성했다 할 세한도 앞에서 오세창은 과연 어떤 심경이었을까. 오세창은 이런 표현으로 그 마음을 표현한다.

“마치 황천에 갔던 친구를 다시 일으켜 악수하는 심정이다. (譬如起黃泉之親朋 而握手焉)” 아마도 그 순간 황천에서 시를 나누고 있을 우선 이상적과 추사 김정희도 몸을 일으키며 함께 웃었으리라. “스승님. 세한도가 제 있을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렇군. 참으로 다행한 일이네. 자네가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읊조린 시가 기억나는군. ‘평생에 나를 알아준 건 수묵화였네. 흰 꽃심의 난꽃과 추운 시절의 소나무’ (知己平生存水墨 素心蘭又歲寒松) 이제 추운 시절은 끝내고 저 소나무들도 따스한 날들을 맞이해야 하지 않겠는가.”

- 김형민저 《역사를 만든 최고의 짝》
도서출판 "다른' 중에서 -

      - 옮겨온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