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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악의 군주 인조 & 戀慕했던 昭顯世子를 죽인 仁祖의 後宮「趙貴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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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7. 9.

   조선 최악의 군주 인조

 

선조는 적자를 얻지 못하자 왕세자 책봉을 미루고 있던 중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전란을 수습하지 않고 피란을 가면서 서자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여 전란수습의 책임을 맡기고 중국으로 망명하려 합니다.

광해군은 어린나이에도 전란을 잘 수습하여 전쟁을 끝냅니다. 전쟁이 끝나자 선조는 나이어린 인목왕후를 맞아들여 적자인 영창대군을 낳자, 이번에는 왕세자 자리를 적자인 영창대군으로 교체하려고 합니다.

선조가 병들어 죽게되자 영창대군이 너무 어려(3) 광해군에게 왕위를 넘겨줍니다.

 

광해군이 즉위하여 왕노릇을 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인목대비가 서인들과 짜고 왕의 자리를 영창대군으로 교체하려다 광해군에 의해 영창대군은 죽임을 당하고 자신은 유폐를 당합니다.

 

그러자 인목대비는 서인들과 짜고 쿠데타(인조반정)을 일으키지요. 인조는 큰아버지인 광해군의 왕위를 빼앗은 것입니다.

 

하지만 인조는 무능하여 청나라에 항복(병자호란)하고 소현세자 부부와 손자들까지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고 나라를 엉망으로 만듭니다.

 

어쩌면 촛불혁명이란 쿠데타를 일으켜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는 현 정권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戀慕했던 昭顯世子를 죽인 仁祖의 後宮「趙貴人」

o王后는 간택되는 순간부터 悲劇的인 運命이 始作되는 경우가 있다.  
 특히 繼妃가 되어 王이 월등하게 나이가 많을 때는 더욱 그렇다.

  王에게는 오레 前 王后나 後宮들에게서 낳은 王子나 公主들이 있기 마
  련이고, 本人의 意圖와 關係없이 치열한 宮中 暗鬪에 휘말리게 된다.
 
o莊烈王后 趙氏와 趙歸人

  장렬왕후 조씨가 仁祖와 婚禮를 올릴 때 그녀는 15歲였고, 仁祖는 44歲
  였다. 仁祖의 첫 번째 夫人인 仁烈王后 韓氏는 죽었으나 仁祖에게는 총
  애하는 趙貴人이 있었다. 
  趙貴人은 30代의 원숙한 나이인데다가 仁祖反正의 主役인 영의정 金自點(김
  자점)과 結託하여 權勢를 한 손에 쥐고 휘두르고 있었다.
 
o첫날밤을 지낸 후부터, 仁祖는 趙貴人의 모함으로 莊烈王后 趙氏를
  한번도 찾아주지 않았다. 中殿을 이간질하여 王의 접근을 차단했다.
  尙宮들이 趙貴人을 處罰해야 한다고 간청했지만, 莊烈王后는 친정아버지의
   當付대로 숨을 죽이고 지낼 뿐이었다. 仁祖의 寵愛를 받고 있는 趙貴人을 건
  드리면 오히려 죽음을 당하기 때문이었다.
 
o趙貴人의 모함

 ․中殿이 중풍을 앓고 있다고 이간질하여 仁祖의 접근을 못하게 한다.
 ․평소에 戀慕했던 昭顯世子를 자신이 仁祖의 後宮이 되어, 昭顯世子 夫
   婦가 淸나라 人質生活을 끝내고 歸國하자 모함을 하여 仁祖로 하여금     
죽이게 하였다.

 ․자기 所生을 世子로 책봉하려고 鳳林大君(효종)을 謀陷(모함)하였다.
 ․仁祖가 총애하는 後宮과 宮女들은 모두 謀陷하여 죽여 버린다.
 
o趙貴人의 종말

  趙貴人의 謀陷으로 自身의 아들과 며느리, 孫子까지 悲慘한 죽음으로
  몰아넣은 仁祖는 3年 후인 1649년(인조27) 5월에 殞命(운명)했다.
  世子 鳳林大君이 寶位에 올라 孝宗이 되자 趙貴人의 時代는 幕을 내
  렸다. 金自點의 逆謀事件이 일어나면서 趙貴人이 賜死되었던 것이다.  


1. 趙氏, 王妃로 揀擇(간택)되다
 
 o王后는 揀擇되는 순간부터 悲劇的인 運命이 始作되는 경우가 있
   다.
   특히 繼妃가 되어 王이 월등하게 나이가 많을 때는 더욱 그렇다.
   王에게는 으레 前 王后나 後宮들에게서 낳은 王子나 公主들이 있기
   마련이고 本人의 意圖與否와 관계없이 치열한 宮中 暗鬪에 휘말리
   게 된다.
   여인네들끼리 寵愛(총애)를 다투는 일도 버거운 일이지만 黨派 싸
   움이나 朝廷 大臣들의 權力 鬪爭에 휘말리게 되면 親庭까지 滅門을
   당하게 되어 平生을 눈물과 恨을 씹으면서 살아야 한다.
 
 o王后의 삶은 결코 榮華로운 삶이 아니다.
   조선시대 女人들의 삶이 一夫多妻制로 인하여 歪曲(왜곡)되어 있듯
   이 君王들의 아내 또한 마찬가지였다. 王后들은 揀擇이 되면 初婚
   이지만 王들은 再婚, 三婚이 많아 할아버지와 손녀딸, 아버지와 딸
   같은 경우도 종종 있었다.
 
 o繼妃 간택
 
  ․正妃 仁烈王后 韓氏는 綾陽君과 結婚하여, 1623년 綾陽君(인조)이
   王位에 오르자 王妃에 책봉되었다. 이후 슬하에 昭顯, 鳳林 등 4男
   을 낳고 1635년 세상을 떴다.
 
 ․이후 趙貴人은 仁祖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딸
   을 하나 낳았다. 이에 大臣들은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
  “총애하던 後宮이 아들을 낳으면 늙어가는 王을 재촉하여 世子를 廢
   하고 자신의 아들을 世子로 封하려고 피바람을 부를 수 있사옵니
   다.” 하며 父王의 再婚을 재촉하고 있었다.
 
 ․이에 趙貴人은 속이 울컥거렸지만, 夫王께 속과 다른 말을 했다.


  “전하, 小妾은 그저 殿下의 承恩을 받는 것만으로 足하옵니다. 殿下
   께서 새 中殿을 맞이하시더라도 저를 잊지 않고 찿아주신다면 더
   큰 恩惠는 없을 것이옵니다.”
   賢淑한 女人의 標本 같은 내 말에 夫王은 감격했다.
 
 ․王은 ‘繼妃揀擇’을 命했다. 예조는 전국에 禁婚令을 내렸다.
   예상한 대로 어느 누구도 揀擇單子를 내놓지 않았다. 夫王의 나이 
   44세였다. 이미 장성한 昭顯世子에 大君이 둘이나 있으니, 繼妃가 
   되어 王子를 낳아봤자 世子가 된다는 希望도 없었다. 게다가 父王
   이 趙淑媛(조귀인)이라는 後宮에 빠져 지낸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
   은 다 알고 있었다.
   
 o莊烈王后 趙氏(존호: 자의대비)
   우여곡절 끝에 仁川府使 趙昌遠의 딸이 繼妃로 결정되었다. 莊烈王
   后 趙氏였다.
   장렬왕후 조씨가 仁祖와 婚禮를 올릴 때 그녀는 15歲였고, 仁祖는
   44歲였다. 仁祖의 첫 번째 부인인 仁烈王后 韓氏는 죽었으나 仁祖
   에게는 총애하는 昭容 趙氏가 있었다. 
   조소용은 30代의 원숙한 나이인데다가 仁祖反正의 主役 金自點과 
   結託하여 權勢를 한 손에 쥐고 휘두르고 있었다.

    ※ 金自點은 조선 중기의 文臣(1588~1651). 仁祖反正 때에 功을 세워 領議政에
       이르렀다. 孝宗이 즉위한 후 파직 당하자, 이에 앙심을 품고 조선이 北伐을
       계획하고 있음을 淸나라에 밀고하여 逆謀罪로 處刑되었다.
 
 
 o아버지의 當付 ―“네가 王子를 낳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莊烈王后 趙氏의 親庭아버지 趙昌遠은 그녀가 仁祖의 繼妃로 揀
    擇되자 이렇게 말했다.
   “國母의 자리가 삼가고 삼가야 하는 자리다. 이미 世子가 있으니
    네가 王子를 낳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조창원은 딸이 王子들의 權力鬪爭에 휘말리지 않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光海君과 永昌大君의 對立으로 인해 反正이 일어나 王이 된 仁祖
    였다. 前代의 悲劇이 딸에게 되풀이되지 않기를 조창원은 바란 것
    이다.
 
  ․조창원은 1592년(선조25)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10세의 나이로 아
    버지를 따라 從軍한 뒤에 進士試에 合格하고, 후에 別座와 義禁府
    都事 등을 지냈다.
    光海君의 亂政이 심해지고 아버지 조존성이 獄事에 연루되어 禍를
    당하자 官職을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가 아버지를 奉養했다.
    仁祖反正後 형조좌랑․직산현감․여산군수를 거쳐 仁川府使로 在
    職하고 있을 때 딸이 王后로 간택되었다.
   “德으로 宮中을 다스리고 참고 또 참아야 한다. 명심하겠느냐?”
 
  ․조창원은 딸이 王妃로 揀擇되자 기쁨과 안쓰러움이 交叉하는 눈
    빛으로 살폈다.
    莊烈王后 趙氏는 한나라의 國母로 뽑힐 정도로 絶世美人이었다.
    조창원에게는 어여쁜 딸을 國王에게 시집보내는 것이 茫茫大海로
    조각배를 태워 보내는 것처럼 危殆롭게 생각되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조씨가 다소곳이 대답했다.
   “대궐은 무서운 곳이다. 네가 살고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後宮들에      
게도 미움을 받아서는 안 된다.”

 
  ․조창원은 장차 國母가 되는 딸에게 當付하고 또 當付했다.
    15세의 어린 少女는 아버지가 왜 이런 當付를 하는지 理解할 수 
    없었다. 그女는 아직도 父母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야 할 어린
    少女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세상에 더없이 尊貴한 身分이 되었다는 것과 한 男
    子의 아내가 된다는 사실을 희미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녀는 至嚴한 宮中과 역대 王后들의 榮枯盛衰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王의 新婦가 될 준비를 했다.


 o婚禮式
 
  ․1638년(인조 16) 12월 3일. 仁祖는 莊烈王后 趙氏를 맞이하는 親迎
    禮를 행하고 同牢宴(동뢰연: 신랑 신부가 술잔을 나누어 마시는 혼인
    의식, 실제로는 첫날밤을 의미한다)을 거행했다.
    15歲의 趙氏가 44歲의 仁祖를 맞아 첫날밤을 보낸 것이다.
 
  ․仁祖는 中年 男子였고 趙氏는 어리디 어린 少女였다. 이렇게 첫날
    밤을 보낸 趙氏는 이튿날 아침부터 內命婦의 가장 높은 어른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內命婦의 500名에 이르는 宮女들과 150名에 이르는 內官들이 모
    두 그女의 管轄 下에 있었다. 宮안의 權力이 급속하게 그녀에게로
    쏠렸다.

     ※ 莊烈王后 趙氏
       인조의 正妃 인렬왕후가 죽자 3년 뒤인 1638년 15세의 어린나이로 仁祖와
       嘉禮(가례)를 올렸다.
 
 o늙은 尙宮들, 莊烈王后 趙氏에게 趙昭容을 處罰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仁祖의 寵愛를 받고 있는 물여우 같은 趙昭容이
   眼下無人으로 궁궐을 휩쓸고 있었다. 趙氏는 親庭아버지 조창원의
   當付를 잊지 않았다.
  “마마, 趙昭容을 그냥 두면 宮闕에 큰 禍가 미칠것입니다. 嚴히 罰하
   소서.”
   늙은 尙宮들이 莊烈王后 趙氏에게 趙昭容을 處罰하라고 요구했다.
  “趙昭容은 殿下께서 寵愛하는 宮人이오. 내 어찌 그녀를 罰하여 殿     
下의 근심을 만들겠소?”

   莊烈王后 趙氏는 오히려 趙昭容의 첩지를 올려 貴人으로 만들어 주
   었다.
 
    ※ 옛 女人의 身分을 보여주는 첩지  
       첩지는 조선시대 부녀자가 예장할 때 머리위에 얹어 장식하던 머리 장식품
       으로 3㎝ 너비의 가체 중간에 천을대고 그 위에 첩지를 얹어서 고정시켜 가


       리마 위에 올려놓고 다리를 좌우 귀뒤로 돌려 쪽머리에 고정시키는 것이다.
       가체금지령 이후 쪽진 머리를 하게 되면서부터 사용되었다고 전해진다.
       용첩지, 봉황첩지는 황후와 왕비가 사용하였고 개구리 첩지는 내외 명부가
       당의를 입고 사용하였다.
       장식품인 첩지가 그 사람의 身分을 나타내기도 하였는데 尙宮은 銀製 개구리,
      貞敬夫人은 鍍金개구리, 貞夫人은 머리부분만 도금한 개구리를 썼다.

       英祖때 가채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목이 부러져 죽은 사람이 있어서 가채를
       금지했었대. 그랬더니 궁중 여인네들 머리가 너무 허전하여, 첩지가 생긴것
       인데, 집안이 좋거나 높은 여인네들만 할 수 있는 것이다.
 
 
 
2. 宮女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趙貴人의 弄奸(농간)
 
 o趙貴人은 풋내기 어린 소녀인 莊烈王后 趙氏를 謀害하려다가 그
   녀가 첩지를 올려 주자 방향을 바꾸었다.
   하루는 趙貴人이 울면서 仁祖에게 李尙宮이 여종 애향을 시켜 자신
   을 咀呪(저주)했다고 아뢰었다. 그러나 사실은 趙貴人이 李尙宮이 
   仁祖의 寵愛를 받을까봐 두려워하여 謀陷(모함)한 것이었다.
   仁祖는 즉시 내수사에서 李尙宮과 애향을 調査하라고 令을 내렸다.
   결국 李尙宮과 애향은 혹독한 고문을 당하여 죽고 말았다. 이에 三
   司에서 일제히 아뢰었다.

    ※ 三司에서 궁녀 애향의 배후를 밝히라고 주장한 것은 사건을 조사하여 趙
       貴人의 犯行을 밝히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仁祖는 내명부의 일이라며 이
       상궁까지 처형하고 말았다. 李尙宮은 인조의 승은까지 입었으나 趙貴人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것이다.
 
 
 o莊烈王后 趙氏는 內命婦에서 가장 높은 王后였으나 이에 關與하
   지 않았다. 
   그녀는 친정아버지 조창원의 당부대로 숨을 죽이고 지낼 뿐이었다.
   仁祖의 총애를 받고 있는 趙貴人을 건드리면 오히려 죽음을 당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21세가 되었으나 궁중의 암투를 다스릴 수가 없었고, 구중
   궁궐에서 仁祖가 寢殿을 찾아 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세월을 보냈
   다. 그러나 仁祖는 좀처럼 王后의 침전인 中宮殿으로 걸음을 하지 
   않았다. 중궁전은 밤이나 낮이나 적막할 뿐이었다.
 
 o趙貴人, 莊烈王后 趙氏를 모함
  “殿下께서는 언제나 나를 찾아오실까?”
   莊烈王后 趙氏는 매일같이 단장을 하고 仁祖를 기다렸다. 仁祖에게
   는 여러 명의 女子들이 있었으나 그녀에게는 仁祖가 유일한 男子였
   다.
   벌이 찾아오지 않아도 꽃은 저절로 피어난다. 莊烈王后 趙氏는 20
   歲가 넘으면서 꽃처럼 피어나기 시작했다. 莊烈王后 趙氏의 容貌가 
   나날이 아름다위지기 시작하자 趙貴人은 危機感을 느꼈고 仁祖가 
   中宮殿을 찾을까봐 모함했다.
  “中殿은 中風을 앓고 있습니다.”
  “中殿이 그런 病이 있는 줄은 내 몰랐구나.”
 
 o仁祖는 趙貴人이 謀陷을 하자 더욱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趙貴人이 어찌 그런 謀陷을 한다는 말인가?
   莊烈王后 趙氏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絶望感을 느꼈다. 그러
   나 趙貴人을 결코 罰하지 않았고 낮빛 한번 흐리지 않았다.
   仁祖마저 그녀의 어진 성품을 보고 감탄했는데 그녀가 죽은 뒤 쓰
   여진 誌文(죽은 사람의 이름과 행적 따위를 기록한 글)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莊烈王后 趙氏는 이 정도로 性品이 어질고 溫順했다. 결코 趙貴人
   과 妬忌(투기)를 다툴 만한 女人이 아니었던 것이다.
 
 
3. 아들을 의심했던 非情한 父王, 仁祖
 
 o昭顯世子(소현세자)의 歸國
   1645년(인조 24) 丙子胡亂 이후 심양에 인질로 끌려가 있던 昭顯世


   子가 돌아왔다. 昭顯世子가 돌아오면서 大闕과 朝廷에는 미묘한 공
   기가 감돌았다.
   三田渡의 恥辱을 겪은 朝鮮은 淸나라에 대해 절치부심하고 있었다.     
淸나라에 降伏을 했으나 主戰派가 朝廷에서 得勢하고 있었다.

   비록 人質이었으나 淸나라에서 오랫동안 지낸 昭顯世子는 朝鮮의
   北伐政策이 危險하고 現實性이 없다고 보았다. 그는 淸나라에 있을
   때 朝廷에 書翰(서한)을 보내면서 朝鮮이 淸國과 戰爭을 하려는 것
   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여 淸나라에 이를 갈고 있던 朝廷에 찬
   물을 끼얹었다.
 
 o仁祖는 昭顯世子가 오랑캐가 되었다고 非難했다.
   사실 仁祖가 昭顯世子를 非難했던 理由는 그가 8년 동안 人質生活
   을 하면서 淸 朝廷과 密接한 關係를 맺고 있어서 王位를 빼앗길지
   도 모른다는 危機感 때문이었다.
   金自點과 대립하던 심기원의 역모 사건에서 昭顯世子를 擁立하고 
   仁祖를 退位시키려 했다는 告變이 나오자 仁祖의 疑心은 더욱 커졌
   다.
 
 o昭顯世子의 죽음
   昭顯世子는 귀국한 지 두 달만에 학질에 걸려 누웠다. 어의 이형익
   이 치료를 했으나 사흘만에 숨지고 말았다.
   인조의 후궁 趙貴人은 전일부터 世子, 世子嬪과 서로 좋지 않았던
   터라 밤낮으로 임금 앞에서 참소하여 世子夫婦를 謀陷했다.
   한때 昭顯世子를 戀慕했던 女人이 主治醫 이형익을 시켜 昭顯世子
   를 죽인 것이다.
    ※ 世子는 죽었는데,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왔다.
      「인조실록」의 기록으로 인조의 소현세자 독살설이 제기된 배경이다. 하지
       만 진실은 알 수가 없다. 조귀인은 소현세자가 귀국한다는 소문을 듣고 곧
       바로 이형익을 왕의 주치의로 앉혔다.
       소현세자에게 침을 놓았던 주치의 이형익이 조씨의 外家에 자주 왕래하는 
       바람에 趙氏의 生母 한옥과 추잡한 소문이 돌았다는 기록도 있다.
 


 
 o鳳林大君이 世子로 책봉
   昭顯世子가 갑자기 죽자 조정에서는 後嗣(후사)를 삼는 일이 쟁점
   으로 떠 올랐다. 이 대목에서 趙貴人이 벌인 活動은 눈부신 것이었
   다. 그녀는 世子嬪 姜氏와의 사이가 나빠 元孫이 世孫이 되는 것을 
   극력 反對했다. 그리고 결국 많은 大臣들이 反對를 했음에도 불구
   하고 元孫 代身 인조의 둘째 아들 鳳林大君이 世子로 책봉되었다.
    ※ 世子嬪 姜氏는 昭顯世子가 돌연한 죽음을 맞고 元孫이 世孫으로 책봉되지 
       못하자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 趙貴人 소생의 翁主를 孫子며느리로 맞아들인 金自點이 政權을 獨占하고
       조귀인은 金自點의 支援으로 權勢가 대단했다.
 
 
 o昭顯世子의 죽음으로 대궐이 어수선했으나 莊烈王后 趙氏는 여
   전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仁祖는 몸이 아픈데도 昭顯世子의 殯所(빈소)를 찾아가 哭(곡)을 했
   다. 莊烈王后 趙氏도 昭顯世子의 殯所를 찾았다.
   昭顯世子가 오랫동안 심양에 볼모로 잡혀 있었기 때문에 그의 얼굴
   을 본 것은 불과 두 달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莊
   烈王后 趙氏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4. 姜嬪, 毒殺의 主謀者로 몰려 賜死당하다
 
 o趙貴人의 弄奸으로 仁祖는 莊烈王后 趙氏를 홀대
   莊烈王后 趙氏는 世子嬪 姜氏를 慰勞해 주고 싶었다. 그녀가 仁祖
   와 趙貴人에게 反抗할수록 죽음을 재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趙貴
   人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고 있어서 그녀를 도울 수가 없었
   다.
   莊烈王后 趙氏의 處地도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趙貴人의 弄奸으
   로 仁祖는 莊烈王后 趙氏를 홀대했다. 仁祖의 홀대로 아이를 낳지 
   못하자 그녀는 病이 들기까지 했다.


 
 o姜嬪에게 禁足令을 내리다
   昭顯世子가 毒殺되었다는 風聞이 나돌자 世子嬪 姜氏는 피눈물을
   흘렸다. 昭顯世子가 毒殺되었다는 證據를 찾을 수 없는데도 그녀는
   趙貴人을 맹렬하게 비난했다. 그러자 仁祖는 대노하여 姜嬪에게 禁
   足令을 내리고 다른 전각의 궁녀들이 내왕하는 것조차 엄금했다.
 
 o趙貴人의 陰謀
   趙貴人은 姜嬪의 목숨을 끊어야 자신이 안전할 수 있다는 것을 알
   고 있었다. 昭顯世子가 죽은 지 1년 후 그녀는 다시 陰謀를 꾸미기
   시작했다. 이 때 仁祖가 먹으려고 하는 전복구이에서 毒이 발견되
   었다. 인조가 三政丞과 6曹判書를 불러 청천벽력 같은 備忘記를 내
   렸다.
   1646년(인조 24) 2월 3일의 일이었다.
  “毒藥을 넣은 것은 姜嬪의 짓일 것이다. 義禁府에 命하여 빨리 처리
   하게 하여라.”
   세자빈 姜氏는 귀인 조씨에 의해 소현세자를 毒殺하고, 나아가 仁
   祖까지 毒殺하려 했다는 誣告(무고)를 받아 賜死되었다.
   ※ 領議政 김류가 姜嬪이 仁祖를 毒殺하려고 했다는 仁祖의 備忘記를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大臣들도 일제히 反對했다. 三司도 姜嬪의 處罰을 反對하였
      다. 그리고 三司의 諫言들이 仁祖의 處事에 不滿을 품고 줄줄이 辭退했다.
 
 
 o姜嬪, 억울하게 賜藥을 받고 죽다
 「인조실록」의 기록이다. 姜嬪의 獄事는 수많은 大臣들이 反對하는
   데도 鞫問이 계속되어 宮女들은 혹독한 拷問을 당하면서 죽어 갔
   다. 姜嬪의 오라버니인 강문성과 강문명도 체포되어 곤장을 맞다가
   죽었다. 강빈의 옥사를 반대하는 대신들은 파직되거나 유배를 갔다.    
 昭顯世子嬪 姜氏는 마침내 폐출되어 옛날의 집에서 賜死되었다.

   이렇게 昭顯世子는 毒殺을 당하고 姜嬪은 억울하게 賜藥을 받고 죽
   었다.
 


    ※ 昭顯世子 夫婦의 죽음은 仁祖의 疑心이 決定的인 原因이었다. 그는 昭顯
       世子 夫婦가 淸나라를 등에 업고 자신을 廢黜(폐출)시킬까봐 不安에 떨다가 
       자식을 죽게 만들었다. 소현세자의 세 아들은 濟州島로 流配를 가게 되었고
       얼마 후 죽었다.
    ※ 세자빈 姜氏는 死後 72년인 1718년(숙종 44년)에 無嫌疑를 인정받아 `민회
       (愍懷)'라는 시호로 復權되었다.
 
 
5. 趙貴人의 沒落과 불붙는 禮訟論爭
 
 o鳳林大君, 莊烈王后 趙氏를 恭敬
   莊烈王后 趙氏는 世子가 된 鳳林大君이 問安을 드리러 오자 趙貴人
   의 罪를 다스려야 한다고 말했다. 모든 것을 조용히 지켜보면서 인
   내하고 있었으나 이제는 더 이상 좌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母后께서는 모른 체하십시오.”鳳林大君이 조용히 아뢰었다.
 “母后께서는 항상 저를 保護해 주셨습니다. 소자는 결코 그 恩惠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 한 때 趙貴人의 魔手가 鳳林大君에게까지 뻗쳤으나 莊烈王后 趙氏가 막아
       주었다. 鳳林大君은 莊烈王后 趙氏의 人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o趙貴人의 沒落
   자신의 아들과 며느리, 손자까지 비참한 죽음으로 몰아넣은 仁祖는
   이로부터 3年 후인 1649년(인조27) 5월에 殞命(운명)했다.
   世子 鳳林大君이 寶位에 올라 孝宗이 되자 趙貴人의 時代는 幕을 
   내렸다. 金自點의 逆謀事件이 일어나면서 趙貴人이 賜死되었던
   것이다.
 
    ※ 金自點은 仁祖反正을 일으켜 功臣이 되었을 때 趙貴人을 양딸로 삼고 仁祖
       에게 後宮으로 바쳐 누구보다도 많은 權勢를 누렸다.
       그러나 仁祖가 죽자 權勢를 잃을 것을 두려워한 金自點은 趙貴人의 아들 숭
       선군을 옹립하려는 逆謀를 꾸미다가 발각되었다.
    ※ 趙貴人은 正妃와 王 사이를 離間질하는데 그치지 않고 莊烈王后를 慶德宮
       (별궁)에 유폐까지 시킨다. 그렇게 仁祖에게 莊烈王后의 存在는 無視되었다.


       仁祖가 세상을 떠나려하자 臨終을 國母인 莊烈王后가 지켜야 함에도 趙貴人
       이 그 자리에 있을 정도였다.
       뒤늦게 달려온 世子(효종)가 法道에 어긋난 행동을 보고 莊烈王后를 모셔오
       라고 命하여 世子 덕분에 莊烈王后는 男便의 臨終을 지키고 權威를 찾을 수 
       있었다.
 
 
 “이렇게 죽을 것을 어찌 모질게 사람들을 죽였단 말인가?”
   趙貴人으로 因해 항상 不安하게 살아야 했던 莊烈王后 趙氏는 그녀
   가 賜死되자 허망하여 눈물을 흘렸다.
   莊烈王后 趙氏는 비로소 安定된 生活을 할 수 있었으나 남편조차
   없는 그녀의 삶은 쓸쓸하기만 했다. 그녀는 孝宗에 이어 현종, 肅宗
   까지 3代의 大妃로서 조용하고 고적한 삶을 살다가 65세를 일기로
   恨많은 생을 접었다.
 
 o불붙는 禮訟論爭
   역사의 소용돌이는 老年을 맞은 후에도 莊烈王后 趙氏를 그냥 내버
   려두지 않았다. 北伐政策을 강력하게 추진하던 孝宗이 재위 10년 
   만에 昇遐하자 그녀의 服喪問題가 대두되어 1次 禮訟論爭이 벌어
   졌다.
 
    ※ 王이 죽었기 때문에 莊烈王后 趙氏가 喪服을 입어야 했는데, 西人의 거두
       宋時烈은 1年을, 南人의 영수 허목은 3년동안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팽팽
       하게 맞섰다. 결국 송시열의 기년설이 채택되어 1차 예송논쟁은 막을 내렸
       다.
 
   1674년에는 孝宗의 夫人인 仁宣王后가 죽자 南人들은 기년설을 주
   장하고, 西人들은 대공설(9개월)을 주장했다. 이때는 南人이 禮訟論
   爭에서 승리하여 宋時烈이 귀양을 갔다가 사사되는 등 그녀의 服喪
   問題가 또 다시 온 나라를 뒤흔들었다.
 
 조선역사상 最惡의 評價를 받는 仁祖
 


 o卽位 과정
   인조는 宣祖의 다섯째아들이자 인빈 소생인 정원군의 맏아들 능양
   군이다. 光海君의 庶조카이고, 仁穆大妃의 庶孫子인 셈이다. 1615년
   막내동생 능창군이 光海君에 의해 죽자 逆謀를 도모, 1623년 3월
   西人 勢力과 함께 武力 靖難을 일으켜 조선 第16代 王으로 登極했
   다. 이때 그의 나이 29세였다.
 
 o李适의 亂과 三田渡의 恥辱― 조선 경제 파탄
   反正에 성공한 仁祖는 그동안 득세했던 大北派 人事들에게 肅淸을
   단행하고, 親明事大主義를 표명하며 정국의 안정을 도모하려 했으
   나 李适의 亂, 淸의 侵入 등으로 엄청난 混亂을 겪고 결국 淸과 君
   臣關係를 맺는 등 三田渡의 恥辱을 당한다. 이후 조선의 經濟는 破
   綻지경에 이르고 민간은 굶주림에 허덕인다.
 
 o武力 政變으로 光海君을 폐출시킨 綾陽君(능양군)
 
  ․宣祖의 禪位 敎旨를 받지 못하고 仁穆大妃의 언문교지로 가까스로
    王位에 오른 光海君은 登極하자 곧 자신의 不安定한 立地를 强化
    하기 위해 일련의 王權强化策을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임해군을 비롯하여 영창대군, 능창군 등 王位를 威脅
    하는 人物들과 그들을 떠받치고 있던 小北派와 西人, 南人 勢力을 
    차례로 除去하기 시작했다.
 
  ․仁祖反正(1623)
    급기야 1618년 仁穆大妃마저 尊稱을 廢하고 西宮에 幽閉시키자
    그동안 光海君에게 不滿을 품고 逆謀를 도모하고 있던 勢力들은
    이 事件을 名分으로 武力 政變을 일으켜 光海君을 廢位시킨다.
    이것이 1623년 3월 12일 밤에 일어난 仁祖反正이다.
 

 o능양군이 反正을 도모하게 된 原因
 
  ․인조반정을 주도했던 인물은 능양군이었다. 능양군은 광해군의 배
    다른 조카이자 1615년 ‘신경희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 王으로 추
    대되었다는 죄목으로 죽은 능창군의 친형이다.
    여기서 그가 反正을 도모하게 된 직접적 원인이 光海君에 의한
    동생 능창군의 죽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본질적인 원인은 光海君과 仁嬪金氏의 關係에
    서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宣祖는 仁嬪 金氏와 그녀의 所生들을 寵愛했다. 그래서 한때 정철
    이 建儲問題를 제기했을 때 宣祖는 光海君을 反對하고 仁嬪 所生
    인 신성군을 지목했다.
    하지만 선조의 바람은 大臣들의 反對로 무산되었다. 大臣들은 신
    성군이 아직 어려서 국사를 논할 입장이 못 된다면서 人品과 學識
    이 뛰어난 光海君이 적임자라고 주장했다.
    宣祖와 大臣들의 이 같은 견해차이로 한동안 世子 책봉이 미루어
    지다가 壬辰倭亂을 당하자 宣祖는 할수없이 大臣들의 主張에 따라 
    光海君을 世子로 앉혔다.
 
  ․仁嬪 金氏를 비롯한 그女의 所生들은 이것이 不滿이었다.
    때문에 光海君이 登極한 이후에도 호시탐탐 王位를 노리게 되었는
    데, 光海君으로서는 당연히 이들이 負擔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신성군은 이미 죽고 없었지만, 그 이외에도 仁嬪 所生의 아들은 
    셋이나 있었다.
    특히 신성군의 동복 아우인 정원군의 아들 능창군은 그들 중에서
    도 가장 威脅的인 存在였다. 왜냐하면 능창군은 신성군의 양자로 
    입적된 상태인데다가 사람들로부터 君王의 資質을 갖고 태어난 인
    물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같은 世人들의 評은 임해군과 永昌大君을 除去해 王權安定을 도
    모했던 光海君과 大北派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고, ‘신경희 事件’
    이 일어나자 능창군을 그들과 연루시켜 유배시키고 끝내는 죽여버
    렸다.

    ※ ‘신경희 事件’
        당시 17살이던 능창君은 수안군수 신경희 등이 획책하는 謀叛에 추대되었
        다 하여 流配되었다가 賜死되었다.
 
  ․이때부터 능창군의 맏형 능양군은 光海君과 大北勢力으로부터 被
    害를 입은 人物들과 접촉하면서 武力 政變을 推進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618년 仁穆大妃 幽閉事件이 일어나자 이를 名分으로 逆
    謀에 대한 구체적인 작업에 착수했다.
 
 o反正의 과정
 
  ․능양군과 함께 武力政變을 도모한 人物들은 西人勢力이었다.
    西人은 政治, 外交的 次元에서 철저하게 大北派와 大峙했다.
    大北派가 明과 後金 사이에서 中立外交 路線을 걷고 있던 반면에,
    西人은 철저한 對明 事大主義 路線을 고수하고 있었다.
    또 西人勢力은 정치적으로 宣祖의 遺命을 받들어 永昌大君을 支持
    하고 仁穆大妃를 따르고 있었다. 이는 永昌大君을 죽이고 仁穆大
    妃를 幽閉시킨 大北派와는 완전히 相反된 것이었다.
 
  ․大北派의 西人勢力 除去
    결국 大北派와 西人의 對決은 不可避한 것이었고, 光海君 역시 西
    人의 剔抉(척결) 없이는 自身의 安全을 確信할 수 없었다.
    그래서 大北派는 永昌大君을 廢黜했던 癸丑獄事 때 西人의 中心 
    人物들을 政界에서 내몰았고, 이후 仁穆大妃 幽閉事件 때에 남아
    있던 대부분의 西人勢力도 死刑당하거나 流配되었다.
 
  ․政界에서 밀려난 西人勢力은 逆謀를 計劃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政界에서 밀려난 西人勢力은 逆謀를 計劃해
    이미 능창군의 죽음으로 역모를 꿈꾸고 있던 능양군을 王으로 추
    대하기로 결정했다.
 


  ․능양군과 함께 逆謀를 圖謀한 代表的인 人物은 이귀, 김자점,
    김류, 최명길, 이괄 등이었다. 이들 모두는 이이, 성혼의 문하였다.
    이 역모에 군사를 동원하기로 한 사람은 이귀와 김류, 이괄 세
    사람이었다.
    이귀는 당시 평산부사로 재직중이었고, 이괄은 함경도 병마사에
    제수되어 임지로 떠나야 할 입장이었다. 그리고 김류는 강계부사
    를 역임한바 있으나 대간의 탄핵을 받아 政界에서 쫓겨난 상태였
    다.
    이들 세 사람 중 이귀와 김류는 오래전부터 逆謀를 함께 圖謀해온
    인물이었고, 이괄은 김류와 교분이 깊던 효성령 별장 신경진에 의
    해 거사에 합류한 상태였다.
 
 o反正의 成功
 
  ․김류가 총 지휘를 맡은 叛亂軍은 창의문을 향해 진격했다. 이에 鎭壓軍은
    문을 굳게 닫고 궁을 수비했지만, 반란군은 곧 창의문을 뚫고 창덕궁에
    도달하였다. 창의문 안에는 이미 능양군이 자신의 수하들을 거느리고 그
    들을 맞이하기 위해 나와 있었다. 반란군은 돈화문에 이르러 불을 질러
    승리를 알렸다.
 
  ․光海君은 그제서야 叛亂軍이 大闕을 占據했음을 알고 몇 명의 수하들을
    거느리고 재빨리 宮을 빠져 나갔다. 이렇게 해서 叛亂軍은 쉽게 接受해버
    렸다.
 
 
 三田渡의 恥辱(치욕)
 
o1637. 1. 30, 仁祖는 降伏 儀式을 거행하기 위해 山城을 나섰다.
  남색 군복을 입고 세자, 대신, 승지 등 500여 명의 신료들과 함께
  南漢山城의 西門을 나서 三田渡로 향했다. 國王 一行이 수항단(受降
  壇, 항복을 받기 위해 청병이 설치한 가건물) 1리 지점에 도착하자


  淸 太宗이 자리에서 일어나 朝鮮 國王을 기다렸다.
 
o仁祖는 말에서 내려 단 아래로 나아가 壇上을 향해 삼배구고두(三
  拜九叩頭)의 예를 올렸다.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女眞族이 天子를 배알할 때 
  행하는 의식이었다. 조선이 개국한 지 244년째 되는 해였다.
  조선 국왕이 예를 마치고 大國에 對抗한 罪를 容恕해 줄 것을 청하
  자 太宗은 조선 국왕을 容恕한다는 조칙을 내렸다.
  그리고 조선 국왕을 자신의 좌측 상석에 앉도록 했다.
  모든 제후 중에 가장 우선한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이는 조선인의 반감을 최소화하려는 외교적 책략이었다.
 
o降服儀式이 끝난 후 國王은 소파진(所波津)을 경유해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
  당시 사공은 모두 죽고 빈 배 두 척만이 있었는데, 신료들은 서로
  건너려고 다투며 왕의 옷을 잡아당기기까지 하면서 배에 올랐다.
  국왕이 건넌 뒤에, 청 태종이 뒤따라 말을 타고 달려와 얕은 여울로
  군사들을 건너게 하고, 상전(桑田)에 나아가 진을 치게 했다. 그리고
  용골대를 시켜 군병을 이끌고 행차를 호위하게 했다.
  용골대는 길의 좌우를 끼고 국왕을 인도했다.
 
o사로잡힌 婦女子들이 바라보고 울부짖으며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했는데,
  길을 끼고 울며 부르짖는 자가 1萬名을 헤아렸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서울에 당도해 창경궁 양화당으로 나아
  갔다.
 
o1627년 丁卯胡亂과 1636년 丙子胡亂 後의 강렬한 反淸 意識은 壬
  辰倭亂 後의 反日 意識과 脈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自尊心의 損傷은 물론이거니와 敗戰 後에 받아야 하는 여러 가지 屈
  辱的 措處들은 이런 感情을 더욱더 부채질했다.


  더구나 화이론(華夷論)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던 당시 조선인에 있어
  서 오랑캐는 그야말로 멸시의 대상이었다.
  그런 오랑캐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용서를 빈 것이다.
  더욱이 이제까지 우위를 점하던 국제 관계가 이제는 거꾸로 바뀌게    되었다.
  조공을 받던 위치에서 租貢을 바쳐야 하는 位置로 轉落한 것이다.
  다시 한 번 自尊心이 損傷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힘없는 문화가 택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길은 心理的 
  補償이었다.
  애초에는 北伐을 위해 軍制를 改編하는 등 雪辱의 날을 기약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現實을 認定하고 現實을 營爲하는 방향으로 나아가
  게 되었다.
  더욱이 經濟的 侵奪을 통해 朝鮮을 制御하려는 淸의 意圖는 適中해
  더욱더 復讐와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