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해손씨(平海孫氏) 중시조 고려 중서문하성 평장사(平章事)
기성후(箕城候) 손인량(孫仁亮) 공의 2021년 가을 시향(時享) 전경 입니다.
공은 1269년 (고려 원종 10년) 임연(林衍)의 난을 당하여 나라를 도와
훈공을 세운 공신으로 나라에서 기성후(箕城候)에 봉하였으며, 벼슬은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습니다.
■ 평장사공 사적비문(平章事公 事蹟碑文) - 휘 인량(諱 仁亮)
참사(參事)인 孫君 일효(日孝)와 전참위계오보(前參尉啓五甫)가 세보(世譜) 한권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孫氏의 득성(得姓)은 新羅 모량부대수촌장(牟梁部大樹村長)으로 新羅 흥덕 王朝에 諱 순(順)이 계셨는데 孝性이 至極하여 석종(石鍾)을 얻은 일이 있었으니 實로 우리 孫氏의 비조(鼻祖)이십니다. 傳하여 諱 익담(翼淡)은 평해군(平海君)에 封해서 平海에 적(籍)을 두었으니 平海 孫氏의 始祖이다. 여러 代를 傳하여 諱 인량(仁亮)은 高麗元宗時에 평장사(平章事)로 재관(在官)하고 元宗 十年 己巳年에 (西紀 1269年) 림연(林衍)의 亂을 토벌(討伐)하여 기성후(箕城候)에 封하니 公을 안장(安葬)한곳이 平海 南쪽 교현(橋峴) 자좌(子坐)이다. 세구영원(世久遼遠)하여 數次의 병화로 儀物이 없어지고 床石만이 現存하여 幾百年이 지나면서 영원(永遠)히 잊지 않고 만세(萬世)에 있을 자리에 공손히 흙 한줌이라도 덮어 保存하려는 어려움을 염려(念慮)치 않으랴. 이에 제종(諸宗)이 모의(謀議)하여 성심을 모아 돌을 갈아 신도(神道)로 호위석(護衛石)을 세우고 장차 오래 보존인위(保存引爲)하여 기문(記文을 원(願)하니 여왈, 이는 큰 글이니 대필(代筆)을 쓴 연후(然後)에 찬양할 일이므로 만일(萬一) 먼저 제서(題署)하는 것이 道理가 아니랴 하고 사양(辭讓)하였으나 불획(不獲)이라.
상고(想考)할 때 신라이래(新羅以來)로 孫氏는 대족(大族)으로 크게 合하여 충효세덕(忠孝世德)하고 선세(先世)의 순행(純行)을 이어 가사(家事)를 닦고, 타처제솔(他處諸率)에도 도움을 꾀하고 거슬려도 宗社를 믿어 안전(安全)하고 생령(生靈)의 은혜(恩惠)를 입어 사력(史歷)에 빛나니 오히려 천세(千歲)에 感하여 흥기(興起)치 않으리. 公의 德과 홍업(鴻業)으로 당세에 우뚝하고 後世에 傳하여 정란(靖亂)의 지절(志節)이 여기에 그치지 말것이며 其外 모두 밝으나 세차(世次)에 소목(昭穆)이 缺하여 작질(爵秩)에 先後가 무계(無階)하니 애석(哀惜)하도다. 문헌(文獻)이 부족(不足)한 탓이라. 配는 平海黃氏로 종무(宗茂)의 女이니 한학사(漢學士) 諱 낙지(洛之)의 后이다. 生3男하니 曰, 득직(得直), 득수(得壽), 득부(得富)로 1男의 子孫이 기천(幾千)이라. 한빗돌에 得富의 玄孫을 새기니 순효(舜孝)라. 號는 물재(勿齋)인데 문장학행(文章學行)으로 성종조(成宗朝) 명신으로 이상(貳相)에 오르고 各派 學文과 벼슬이 代代로 다하지 못하였으나 뿌리가 곧으면 잎이 무성(茂盛)하고 원류(源流)가 크면 물은 멀리 흐르는 것이 당연하므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가르치는 者 말 없을것이러니와 이번 귀종 제군(諸君)들의 추모(追慕)하는 성심(誠心)이 可孝한 나라의 服式이라. 銘曰,
由緖깊은 우리 孫氏는 배달 겨레의 고유종족(古有宗族)으로서 그 시원始原을 아득한 상고시대(上古時代)에서 발(發)한다.<<삼국유사 三國遺事>>를 비롯한 여러 고기(古記)에 의하면 진한(辰韓)땅에 옛부터 육촌(六村)이 있었는데, 그 중 무산대수촌장(茂山大樹村長)은 구례마(俱禮馬)였었다. 이 분의 조상(祖上)께서 처음에 이산(伊山)에서 내려오셨으니 이가 바로 손씨(孫氏)의 선조(先祖)라고 하였다. 檀紀 2277년에 구례마(俱禮馬)께서 다른 촌장(村長)들과 합의(合議)하여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서라벌(徐羅伐)이 초대왕으로 추대(推戴)함으로써 新羅 개국에 큰 功을 세우셨다. 유리 이사금(儒理 尼師今) 9년 육촌(六寸)에 姓氏를 내리실 때 우리 祖上들은 孫氏로 사성(賜姓)됨으로서 삼한명문(三韓名門)으로 꾸준히 번성해 왔다. 흥덕왕(興德王)때에 문효공(文孝公) 諱 순(順)께서 땅에서 석종(石鍾)을 나오게한 출천지대효(出天之大孝)로 월성군(月城君)에 封해졌으니 우리 宗門의 큰 자랑이요, 온 겨레의 사표(師表)라하겠다. 예부터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으로 칭송 받아온 한민족(韓民族)은 특히 인륜도덕(人倫道德)의 근원인 효행(孝行)을 숭상해 왔다. 우리 孫氏의 시조이신 월성군(月城君)의 지극한 효행은 <<삼국유사 三國遺事>>등 여러 고서(古書와 <<삼강행실 三綱行實>> 및 <<오륜행실도 五倫行實圖>>에 소상히 실려 있어 山河와 더불어 영원히 빛날것이니 그 血統을 이어받은 우리들은 孝道 정신을 종훈(宗訓)으로 받들어 그 실천(實踐)에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월성군(月城君)께서 우잠태수(牛岑太守 )백영발(白永發)의 따님을 夫人으로 맞아 두 아들을 두었으니 장자는 이부상서(吏部尙書) 諱 부(富)요, 차자는 병부상서(兵部尙書) 諱 수(秀)이다. 맞집의 諱 부(富)께서 세 아들을 훌륭히 길렀으니 장남 諱 익감(翼減)은 응천군(凝川君)이요, 차남 諱 익담(翼淡)은 평해군(平海君)이며, 3남 익원(翼洹)은 경주군(慶州君이니 이로써 밀양(密陽) 평해(平海) 경주(慶州)의 3파로 득관(得貫)하여 정립(鼎立)하게 되었다. 우리 평해 손씨(平海孫氏)는 입향조(入鄕祖)이신 평해군(平海君) 휘 익담(翼淡)이래 날로 번창을 거듭해 오다가 고려 원종(元宗) 때에 역신(逆臣) 임연(林衍)의 亂을 平定하는데 대훈(大勳)을 세움으로써 중서문하성평장사(中書門下省平章事)로 기성후(箕城侯)에 封해지신 諱 인량(仁亮)대에 이르러 그 성가(聲價)가 온 천하를 진동하였다. 기성후(箕城侯)의 위대하신 공적을 살펴보면 고려(高宗)때에 저 무도(無道)한 元의 침공으로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조정은 강화도(江華島)로 천도하여 항거하였으나 끝내 역부족(力不足)으로 굴복하고 말았다. 이러한 누란(累卵)의 국난속에서도 근 일세기(一世紀)에 달하는 최충헌(崔忠獻) 일족의 전횡(專橫)으로 국정(國政)은 문란이 극에 達하였다. 이때 천민 출신의 권신(權臣) 김준(金俊)이 최씨(崔氏) 일파를 도륙(屠戮)하고 실권을 장악하였으나 그 역시 부정부패와 전자발호(專恣跋扈)가 극심하여 민심이 이탈(離脫)함으로 마침내 동지(同志)이던 무신 임연(林衍)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이렇게 정권을 잡은 임연(林衍)은 차츰 역심(逆心)이 발동하여 개경(開京) 환도를 반대하고 상감을 유폐(幽閉)한 후 왕제(王弟) 안경공(安慶公) 창(淐)을 새 임금으로 옹립하는등 온갖 횡포를 자행하였다. 기성후(箕城侯)께서는 이런 불충무도(不忠無道)한 임연(林衍)의 난을 평정하고 원종(元宗)을 다시 王으로 복위(復位)시켜 종사(宗社)를 안정시켰으며 개경(開京)으로 환도하는데 큰 공훈을 세우셨으니 國家民族과 종사(宗社)를 위한 후(侯)의 충의(忠義)는 日月과 더불어 깊이 그 빛을 발(發할것이다. 시조 월성군(月城君)으로부터 20세이신 기성후(箕城侯)께서는 평해황씨(平海黃氏) 종무(宗茂)의 따님을 배필로 맞아 세 아들을 두었으니 장남은 이부상서(吏部尙書) 諱 득직(得直)인데 그의 장자 예부상서(禮部尙書) 諱 휴(休)는 정충공파(貞忠公派)의 파조(派祖)이고, 차자 諱 영(英)은 불이공파(不二公派)의 파조(派祖)로써 兄弟가 함께 고려말의 충절(忠節)로 이름이 높았다. 후(侯)의 차남은 검교문하시중(檢敎門下侍中) 諱 득수(得壽)인데 그의 장자인 호장(戶長 )諱 번(蕃)은 동정공파(同正公派)의 파조(派祖)이고, 차남 조(肇)는 녹정공파(祿井公派)의 파조(派祖)이며, 3자 諱 상(尙)은 부곡파(副谷派)의 파조(派祖)이다. 또 후(侯)의 3남은 판도판서(判圖判書) 諱 득부(得富)인데 그의 아들은 증 가선대부(贈 嘉善大夫 )형조참판(刑曹參判) 諱 영(永)이고, 손자는 증 정헌대부(贈 正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 諱 유례(有禮)이며, 그의 3남은 증 숭정대부(贈 崇政大夫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 )諱 밀(密)인데 그의 장자 諱 인효(仁孝)는 진사공파(進士公派)의 파조(派祖)이다. 또 그의 4자 諱 성효(成孝)는 판결사공파(判決事公派)의 파조(派祖)이다. 문정공 諱 순효(舜孝) 號 물재(勿齋)께서는 諱 밀(密)의 次子로써 어려서부터 총명신이(聰明神異)하였는데 자라서는 성리학(性理學)에 그 조예가 심오하였으며, 특히 <<중용中庸>>과 <<주역周易>>에 통달하였다. 단종(端宗) 1년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중시(重試)를 거쳐 응교(應敎) 전한(典翰 )부제(副提)도승지(都承旨) 대사헌(大司憲)과 강원(江原 )경기(京畿 )경상도(慶尙道)의 관찰사(觀察使) 및 공조(工曹) 형조(刑曹) 병조(兵曹)의 판서(判書)등 여러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문장(文章)과 시(詩) 그리고 글씨와 그림에도 능했던 公은 숭조효친(崇祖孝親)과 위국충성(爲國忠誠)에도 뛰어났는데 평생을 오로지 청백(淸白)으로 일관하였다. 자헌(資憲)을 거쳐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오른 公은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에 세자이사(世子貳師)를 겸하였는데 그 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서 궤장(几杖)을 하사받았으며, 향년 71세였다. 公의 장남 諱 준(濬)은 통진현감공파(通津懸監公波)의 파조(派祖)요, 차남 諱 주(澍)는 희질공파(僖質公派)의 파조(派祖)이며, 4남 諱 호(浩)는 가평공파(加平公派)의 파조(派祖)이고, 5남 諱 부(溥)는 옥강공파(玉江公派)의 파조(派祖이다. 이로써 자랑스런 우리 평해 손씨(平海 孫氏)는 11개파로 분파하여 근심지무(根深枝茂)의 장관을 이루면서 날로 번성을 거듭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종친중(宗親中)에서도 가장 맞집인 김천파(金川派)는 시조 문효공(文孝公)으로부터 같은 계통으로 내려오다가 제9세 상호군 (上護軍) 諱 현(賢)의 장남 諱 완(琓)의 후손들이니 主로 한반도의 북부에 거주하면서 번창해왔다. 自古로 많은 人材를 배출한 김천파(金川派)는 연종(連宗) 사종(嗣宗) 흥종(興宗)희종(希宗) 연종(연宗)의 5개파로 분파(分派)하여 내려왔는데 옛날에는 길이 멀어서, 오늘날에는 남북(南北)이 분단되어 서로 왕래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이번에 시 거대한 종사(宗事)를 계기로 서로 만나 그리던 회포(懷抱)를 풀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에 또 있으랴.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 평해손씨(平海 孫氏)는 시조이신 문효공(文孝公)이 지극한 효성(孝誠)과 기성후(箕城侯)의 숭고한 애국정신 그리고 문정공(文貞公)의 청백(淸白)한 선비의 긍지를 거울삼아 청기지(靑氣地)와 더불어 영원 무궁토록 번성을 거듭할 것이다. 보본숭조(報本崇祖)의 정신이 뛰어나 성태(成泰) 대종회장(大宗會長)이 백방으로 노력하여 이 거창한 비석을 세우고 흩어졌던 족친들을 규합하여 돈목(敦睦)의 순풍(淳風)을 더욱 진작시키니 무엇보다도 반가운 장거(壯擧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뒷 산위에 모셔진 평장사공(平章事公)께서 만고불멸(萬古不滅)의 대공훈(大功勳을 세우시고 기성후(箕城侯)에 봉(封)해져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으신 전통 깊은 이 고장에 충효(忠孝)의 동산을 조성하고 현충비(顯忠碑)를 세우는 뜻은 천만세(千萬世) 후손들과 모든 국민들의 교훈으로 삼고자 함이니 저 유구의 흐름 동해(東海)의 물결과 창공(蒼空)에 높이 솟은 백암(白巖)의 영봉(靈峰)이 우리의 앞길을 축복하는도다. 이어서 찬(讚)하기를
시조님의 출천지효(出天之孝) 日月과 같고,
기성후(箕城侯)의 위국충성(爲國忠誠) 태산(泰山)과 같네.
문정공(文貞公)의 청백정신(淸白精神) 선비의 거울,
그 핏줄 이어받이 더욱 빛내리
입향조(入鄕祖)인 평해군(平海君)이 터전을 잡고
평해(平海) 충주(忠州) 열한개파 번성도하다.
금천파(金川派)의 다섯줄기 한데 모이니
영원히 번창하다 평해손씨(平海孫氏)여
檀紀 四三二0年 丁卯 九月 九日
十八世孫 錫佑 謹撰
慶州后人 鄭雲在 謹書
▶ 정충공 사적(貞忠公 事蹟)
公의 휘는 휴(休)이요. 호는 정충(貞忠)이다. 高祖는 국겸(國謙)이요. 증조(曾祖)는 휘가 보화(普化)며, 조(祖)는 평장사(平章事 )휘 인량 (仁亮)이고 考는 이부상서(吏部尙書) 휘 득직(得直)이다. 公이 지정년간(至正年間 1342 - 1368 年)에 出生하여 官이 예부상서(禮部尙書)까지 올랐으나 이조혁명(李朝革命)이 되자 정충고절(貞忠孤節)로 불사2군(不事二君)의 도리(道理)로 여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