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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씨 시조 문효공 손순(孫順)-2021년 시향(時享)에서-(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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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답사

2021. 11. 13.









손씨 시조 문효공 손순(孫順)-2021년 시향(時享)에서-(1/2)

(2021/11/07 현재)


2021년 11월07일 경주시 건천읍 모량리 효자릉 현지에서 있었던
손씨 시조 문효공 손순(孫順)의 2021년도 묘제 행사 모습 입니다. 금번 행사
에서는 코로나 19 방역 관계로 손씨 시조 문효공 유적 보존회 집행부 위주로
간소하게 헌관을 분정 평해파에서 초헌관 손승복, 경주파에서 아헌관 손충호,
밀양파에서 종헌관 손상규 등이 묘제 행사를 진행 하였습니다.

경주시 건천읍 모량리에 묘소가 있는 문효공 손순(孫順)은 신라 흥덕왕 때 효자로
이름 높았던 신라 건국 초기 사로6촌(斯盧六村) 가운데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의
촌장인 구례마(俱禮馬)의 후손 입니다   


손상규 손씨시조 문효공 유적보존회 회장의 제향(祭享) 진행 안내 입니다 




집례(執禮)의 제향(祭享) 개시 안내 입니다 


제헌관 및 집사원의 관수세수(?水?水) 입니다


초헌관의 제수진설 확인과 분향 강신례등 진행 입니다 




초헌관(初獻官)의 초헌례(初獻禮) 진행 입니다



대축(大祝)의 축문 낭독 입니다. 






■  시조 문효공(文孝公) 사적

  공의 휘는 순(順)이요 자는 사구(士久)이니 신라 모량부(牟梁部) 사람으로 태자사인(太子舍人) 휘 학산(鶴山)의 아드님이다. 우잠(牛岑)태수 백영발(白永發)의 따님과 결혼하여 취향산(醉鄕山) 아래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이 가난하여 처와 더불어 품팔이로 노모를 봉양하였는데, 어린 아이가 매양 노모의 밥을 빼앗아 먹었다. 공은 탄식하며 처 백씨에게 이르기를, “내 힘을 다해 나무하여 간신히 노모를 봉양하는데 무지한 아이가 매양 빼앗아 먹으니,  아이는 다시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봉양하기 어렵다.  아이를 묻어버리고 봉양을 다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다.  처가 말하기를, "지아비의 뜻이 그러한데 어찌 그 효심을 어기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아이를 업고 취향산 북쪽에 이르렀다.  공이 땅을 파서 무릎 깊이가 되자 파묻으려 하니 처가 말하기를, “깊이 파야 할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공이 “그렇다”하고 다시금 한 자 남진 파는데 홀연 연장 끝에서 ‘쨍그렁’하는 소리가 났다. 공은 이상히 여기고 좌우로 둘러 파 보니 어떤 매끄럽고 둥근 물건이 하나 있었다.  안아서 들어 내니 곧 석종(石鐘)이었다.  그 형상이 매우 기이하여 공이 시험삼아 쳐 보니 소리가 우렁차서 사랑스러웠다. 처가 말하기를, “아이를 파묻으려다 이상한 물건을 얻으니 아마도 이 아이의 복일 듯합니다.  파묻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공은 그렇겠다고 여기고 아이와 종을 가지고 돌아와서, 들보에다 걸어놓고 치니 그 소리가 왕궁에까지 들렸다. 왕이 좌우 신하게 묻기를, “서쪽 교외에 종소리가 들리는데 맑고 이상하다.  찾아보도록 하라.”고 하였다.  좌우 신하들이 찾아서 공의 집에 이르렀다.  공은 종을 가지고 갔다.  왕이 사람을 시켜 쳐 보게 하고서 묻기를, “어떻게 이것을 얻었는가” 하였다.  공은 그 연유를 갖추어 고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기특하고 이상하다.  옛날 곽거(郭巨)가 자식을 묻으려다가 하늘이 금솥(金釜)을 주었는데, 이제 손순(孫順)이 아이를 묻으려다 땅에서 석종(石鐘)이 나왔으니, 너 또한 곽거와 같은 사람이다.”라고 하고는 악부(樂府)에 보관하게 하고 공에게 집 한 채를 하사하고 해마다 쌀50섬을 지급하고 벼슬에 올려 임용하였으니, 곧 신라 흥덕왕(興德王) 10년 을묘년(835)이었다.  뒤에 월성군(月城君)으로 책봉되고 시호를 문효(文孝)라 하였으며, 묘는 모량촌 앞 삼십왕릉 아래에 있으니 사람들이 효자릉(孝子陵)이라 한다.



<始祖 文孝公 事蹟 >

  公諱順 字士久 新羅牟梁部人 太子舍人 諱鶴山子也 娶牛岑太守永發女焉 居醉鄕山下 父歿家貧 與妻傭作以養老母 有小兒 每奪母食 公歎之謂妻白氏曰 吾竭力樵採艱辛養母 而無知兒子 每每奪之 兒可復得 母難再養 莫若埋兒 以終孝養.  妻曰 夫志如此 安能違其孝心耶.   乃負兒 至醉鄕山北郊 公掘地沒膝 將欲埋之 妻曰 深掘可也 公曰諾 遂更掘尺餘 忽於?端有?然之聲 公異之 左右排掘 有一物?滑而圓 抱而出之 卽石鐘也 其形甚奇 公試撞之 其聲?容可愛 妻曰 欲埋兒而得異物 殆兒之福也 不可埋也.  公以爲然 將兒與鐘而歸 懸於樑而撞之 聲聞于王宮 王謂左右曰 西郊有鐘聲淸遠異常可尋得之.  左右尋至公家 公以鐘往焉.   王 令人撞之而問曰 何以得此 公俱告所由 王曰 [奇乎異哉 昔郭巨埋子 天賜金釜 今孫順埋兒 地出石鐘爾 亦郭巨之類也.]  乃命藏之樂府 賜公宅一區 歲給米五十石 超拜陞爵秩 卽新羅興德王十年 乙卯 歲也.  後封月城君 諡文孝 墓在牟梁村前 三十三陵下 人稱孝子陵.

 



■  신라효자 문효공 손순 지묘

신라효자 문효공 손순 묘갈명 병서 

진한의 6부촌장이 신라시조왕을 추대 하였으니 대수부촌장 구례마는 그 중의 한분이시다.  유리왕조에 이르러 손씨로 사성을 받앗으니 동방의 손씨는 이로부터 시발 하였다. 그 후에 흥덕왕때 휘는 순이요 시호는 문효가 계셨으니 태자사인 휘 학산의 아드님이시다.  우잠태수 백영발의 따님과 결혼하였다.  천성이 지극하고 효성이 있어 양친을 봉양함에 극진하지 않은 적이 없더니 부친께서 작고하신후 가세가 빈한하여 품팔이를 하여 편모를 봉양하던바 어린 아들이 매양 어머님의 밥을 뺏앗아 먹는지라 공이 난처히 생각하여 아내에게 이르기를 아이는 다시 얻을 수 있으나 어머님은 다시 얻어 봉양할 수 없도다 하며 아이를 묻기로 합의하고 이에 어린 아이를 업고 취향산 북쪽에 들어가서 땅을 파던중 홀연히 금석의 소리가 나므로 꺼내어 보니 석종이었다. 부부가 놀래고 또 괴이하여 서로 이르기를 이 물건을 얻은 것은 이 아이의 복에 비롯된 것이니 아이를 묻을 수 없다고 하며 아이는 업고 종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대들보에 종을 매달고 치니 그 종소리가 왕궁에 들린지라 왕께서 신하를 불러 살피게 한바 그 사유를 보고 받은 왕이 가로되 옛날 곽거는 아들을 묻으려다가 금부를 하늘에서 주셨다더니 이제 손순은 아들을 묻으려다가 석종을 땅에서 얻었으니 효로서 천지를 감동시켰음이 예와 이제가 부합되도다. 하며 이에 명하여 종을 악부에 소장하게 하고 공에게 가택 일구와 년급미 50석과 비단 2필을 하사 하였으니 곧 흥덕왕 10년 을묘 년이라 이러한 사실이 삼국유사와 고려사의 효행록,  이조의 삼강행실록, 여지승람 등에 기재되어 있다. 공의 자손이 팔도에 분거하여 그 수효는 혜아릴수 없으나 명공거경이 족보에 등재함이 끊이지 않으며 시호를 봉하고 공훈업적이 사기에 서로 이어 기재되고 있으며 문장과 덕행이 열조에 밝게 나타나 있다. 그러나 년대가 이미 오래되고 병화가 여러 차례 겪는 동안에 공의 분묘가 적실한 곳을 알지 못하여 향화를 받들지 못하니 후손으로서 통한함이  밤과 낮으로 깊이 간절하였다. 단기4279년 을유 조국 광복 후에 국내의 고적과 문화를 발현함에 심혈을 경주하게 되어 각지에 사는 후손들이 여러 차례 회합을 갖고 서로 상의하기를 문효공의 묘소에 관하여는 족보에 기재하여 있으니 이르기를 모량30릉 아래에 있다. 하고  또는 지방의 노인들이 예부터 전해오는 말이 여기가 효자릉이라, 이른다고 하는 터인즉 실로 이는 선조의 영령이 계셔서 하늘의 감응으로 효를 하라고 전해오고 있으리라 하다. 비인즉 조금도 의심하고 염려할 바가 아니리라. 의론을 정한 뒤 7년만인 정미에 묘 수호보존회를 결성하여 비로소 향화를 받들기 시작하였다. 을축년에 대전에 거주하는 44세손 기철이 장차 비갈을 묘소 아래에 세우고자 공의 사적과 중간의 경과기록을 가지고와 재주 없는 나에게 비명을 청하여 가로되 우리 시조의 묘비가 비록 늦었으나 이제라도 나타내고자 그대에게 수고로움을 구한다 하니 나의 보잘것없는 것을 돌이켜 보면 이를 감당하여 기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신라 초에 대수부도 시조 왕을 추대하였고 문효공은 대수부의 후손이며 나도 또한 시조왕의 후손인즉 어찌 감복의 의리가 없겠는가.  이에 그 사적과 경과기록에 근거하여 서의 명을 지으니 가로대

하늘이 대효를 내셨으니

어버이를 위하여 아들을 묻으려 했네.

땅에서 석종이 나왔으니 

이로써 그 효가 나타났도다.

임금이 쌀과 가옥을 주시니

또한 어버이 보응에 도움이 되었네.

신라와 고려를 지나 계속하여

좋은 명예는 썩지 아니하였네.

이는 한갓 역사의 기록 뿐 아니라

나무꾼과 목동까지도 입으로 칭송하네.

이곳을 지나는 자 허리를 굽힐 것이요

이를 듣는 자 우러러 흠모하리라



단 기  4 3 1 9 년  병 인  2 월   일

숭 덕 전    참 봉   박 희 봉   근 찬 밀 양 영 운 공 파      경 식   근 서 밀 양 진 사 공 파      기 철   근 수



<新羅孝子 文孝公 孫順墓碣銘幷序 >

辰韓六部村長 推戴新羅始祖王 大樹部村長 俱禮馬其一也 而至儒理王朝 賜姓孫 東方孫氏 自此始焉 後憲德王時 有諱順諡文孝 太子舍人 諱學山之子也 娶牛岑太守 白永發之女 而天性至孝 養親無不用其極 父歿家勢貧寒 傭作以養母 有兒每奪母食 公難之謂妻曰 兒可復得 母難再養 乃負兒入醉鄕山北 掘地將埋之 忽(金+堅)然有聲視之 乃石鍾也 夫妻驚怪相語曰得物殆兒之福也 不可埋也 遂負兒携鍾而歸 懸於樑撞之 聲聞王宮 使人審之 具奏其由 王曰 昔郭巨(묻을)예子 天賜金釜 今孫順埋子 地出石鍾 孝之所感 前後同符 乃命藏鍾於樂府 賜公宅牟梁一區 歲給粳米五十石 帛二匹卽 興德王十年乙卯也 事且載於三國遺事 麗史之孝行錄 李朝之三綱行實錄 輿地勝覽等書 公之子孫 分居八域者 其麗不億而名公巨卿 譜不絶書 封諡勳業 史載相承 文章德行 昭著列朝 然而年代己久 兵(병선)선累經 公之墳墓 未知的地 香火未奉 後承之痛恨 晝宵深切矣 檀紀四千二百七十八年 乙酉光復後 國內古蹟 文化發現 傾心各地 姓孫累次 會合相議曰 文孝公墓所 譜牒記載云 在牟梁三十陵之下 且地方古老 相傳之說 此孝子陵云謂則 實是先祖英靈不泯 應爲孝傳乎口 碑則小無疑慮耳 定論後 七年丁未 墓守護保存會結成 始奉香火 而歲丙寅 大田居住 四十四世孫 基喆 將竪碣以表阡 袖公事蹟及中間經記 請銘於不(어리석을)영曰 吾祖之碣 雖云晩矣 今可以顯示 願(구할)요惠於吾子 顧玆膚淺 不敢當是寄然而新羅之初 大樹部推戴始祖王 文孝公大樹部之后也 余亦始祖王之后則豈無感服之義耶 遂依其事蹟與經紀而(余+又)之銘曰

天生大孝  爲親埋兒  地出石鍾  以彰其孝 王賜米屋  又助報應  羅麗以降  不朽令名  非徒竹帛  樵牧口頌  過者必式  聞者欽仰

檀紀  四千三百 十九年  丙寅 二月 日

崇德殿  參奉    朴熙鳳  謹撰 密陽  嶺雲公派    敬植  謹書 密陽  進士公派    基喆  謹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