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의 여행이야기

"백운"의 Daum Column입니다...

평해손씨(平海孫氏) 문정공 諱 순효(舜孝)-2021년 시향(時享) 에서

댓글 0

문화답사

2021. 11. 25.









평해손씨(平海孫氏) 문정공 諱 순효(舜孝)-2021년 시향(時享) 에서

(2021/11/14 현재)


충주시 산척면에 있는 평해손씨(平海孫氏) 충주 입향 1세조인 유례(有禮)공의 손이며
밀(密)의 아들인 문정공 물재 손순효 (세종 9년:1427~연산군 3년:1497)의 2021년
시향(時享) 모습입니다.문정공 물재 손순효 (세종 9년:1427~연산군 3년:1497)는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자(字)는 경보(敬甫)이며 호는 물재(勿齋), 또는 칠휴거사(七休居士) 입니다.
단종때 급제하여 세조때 장령을 거쳐 성종때는 형조참의에 특진되었고 강원도 관찰사
등을 역임 하다가 벼슬이 좌참찬에까지 올랐습니다.성종 16년(1485)에 임사홍을
두둔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었다가 뒤에 돌아와서 판중추부사를 지냈습니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시,서,화에 능했으며, 죽은 후 문정이라 시호했고
평해의 운암서원에 배향했으며 충주시 산척면 천등산 송강리 杏亭(杏亭)부락
뒷산에 묘소(墓所)가 있으며, 극암(克菴) 이창신(李昌臣)이 찬한
신도비(神道碑)가 있습니다.


 

  ■ 문정공 사적(文貞公事蹟)

  公의 諱는 순효(舜孝)요, 字는 경보(敬甫)요, 號는 물제(勿齊)요, 혹운칠휴(惑云七休)라. 성화기해년(成化己亥年)에 문정공(文貞公)이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서 평해(平海)에 순시(巡視)하여 선조(先祖)의 세계(世系)를 써서 군청벽상(郡廳壁上)에 달게 하여 자손(子孫)으로 하여금 그 본말(本末)을 알아 잊지 않게 하였다. 그리고 그 감회(感懷)를 글로 짓기를 『슬프다 우리 종족(宗族)이 내외원근(內外遠近) 각지(各地)에 흩어져 서로 오고감이 어려운데 나 자신(自身)이 국명(國命)으로 금의(錦衣)를 입고 두 번이나 평해(平海)를 찾으니 감회(感懷)깊고 영광(榮光)스럽도다. 처음 기묘년(己卯年)에 도사(都事)로서 本 고향(故鄕)을 찾았을때는 일족(一族) 어른들이 울진 망양정(蔚珍望洋亭)까지 분주히 나와 환영(歡迎)하여 보살펴주니 어찌 성대(盛大)하고 감사(感謝)한 일이 아니리요. 이제 벼슬이 올라 관찰사(觀察使[知事])로서 오게 됨에 평해월송정(平海月松亭)은 옛날과 같이 락락(落落)하나 一族 어른들은 벌써 돌아가신 이가 많도다. 아 - 슬프다. 또 뒷날에는 어떻게 變하리오. 江과 山은 옛 모습이로되 사람은 먼저 마음뿐으로 변천(變遷)도 그지없다. 추억(追憶)하고 사모(思慕)하고 바라보아도 무심(無心)한 새들은 대숲에서 우짖을 뿐이로다.』라고 하셨다.

 

成宗때 칠휴선생(七休先生)이 경상감사(慶尙監司)가 되어 영천읍(永川邑)에 포은사당(圃隱祠堂)을 지나게 되어 마침 말을 타고 취(醉)하여 졸고 계실 때 꿈에 의희(依稀)하게 한 노인(老人)이 『나는 포은(圃隱)이요 집이 허물어져 비바람을 가릴 수 없으니 도와줄 뜻이 없나요』 할새 놀라 깨니 꿈도 이상하므로 새로 그 사당(祠堂)을 짓게 하고 사당벽(祠堂壁)에 글쓰시되 『옛 문천상(文天祥)의 행적(行蹟)과 충성스런 그대의 마음이 서로 通하고 비슷하여 한 몸을 헛되이 하고 임금을 爲하니 천만세(千萬世)에 경앙(敬仰)하여 마지않는 바이로다. 고금(古今)으로 이를 탐하여 분주하는데 오직 그대는 義를 세워 그 절개(節介)가 청상백설(淸霜白雪)에 송백(松栢)이 창창(蒼蒼)함과 같도다. 이에 집 한간을 세워 풍우(風雨)를 막게 하니 그대의 靈이 평안(平安)함이여 나의 마음 또한  평안하도다.』라고 하셨다.


  서읍령(西泣領)은 경북영해부(慶北寧海府)에서 40里 되는 곳에 있는 嶺인데 모든 사람이 모두 영접(迎接) 전송(餞送)하는 곳이더라. 옛부터 傳해오기를 관원(官員)들이 이 嶺을 처음 넘을 때는 반드시 흉사(凶事)가 있다고 하는지라 문정공(文貞公)이 경상감사(慶尙監事)가 되어 순시차(巡視次)로 이 서읍령(西泣嶺)에 이르러 나무를 깎아 詩를 쓰고 고개 이름을 파괴현(破怪峴사스럽고괴상한것을 깨드리는 고개)이라고 고치다. 그 뒤에 권오복(權五福 ) 號는 수헌(수軒)이라는 분이 이 일을 칭송(稱頌)하여 詩를 지었으며 至今까지 듣는 이로 하여금 미신(迷信)을 깨트리고 여러 사람을 편히하는데 힘쓰신 덕행(德行)에 감읍(感泣)하더라.

 

청구산천기 (靑구山川記)

 

 

  ■ 물재개현시 여즙화산호만세 개중경중수능회(勿齎改峴詩 汝楫華山呼萬歲 箇中輕重誰能會)
      아장륜명위군망 백일조연조량정 (我將綸命慰郡망 白日昭然照兩情)

 

公은 항상(恒尙) 덕행(德行)과 예의(禮儀)를 숭상하시고 집에 계실 때 담백(淡백)한 생활(生活)을 하시고 자제(子弟)들에게 훈계(訓戒)하시기를 우리 집이 빈곤(貧困)하고 한미(寒微)한데서 일어나서 傳해 내려오는 보물(寶物)은 없으나 오직 『청백(淸白)』으로써 傳해옴이 實로 다행(多幸)한 일이로다. 청백 2자(淸白二字)는 우리 집 전래(傳來)의 심법(心法)이니라 하셨다. 후일(後日)에 子孫이 출세(出世)한 것이 모두 이 청백(淸白)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로다.

 

연산군(燕山君)이 세자(世子)로 있을 때 도리(道理)에 맞지 않는 좋지 못한 행동이 많으므로 公이 밤에 일부러 술취한체하고 용상(龍床)을 어루만지며 성종대왕(成宗大王)의 귀에 입을 대고 이 자리가 『이 자리가 가히 아깝습니다.』 라고 아뢰고 취해서 넘어지셨다. 그때에 좌우신하(左右臣下)들이 임금에게 龍床은 임금아니면 오르지 못할 聖스러운데를 함부로 오르며 더욱이 임금의 귀에 대고 말하는 것은 무엄(無嚴)한 일이니 벌로 다스리시오 하고 아뢸새 성종(成宗)께서 『孫貳相(손정승)이 나를 爲하여 술취한 김에 한 일이니 말할 것 없다.』 하여도 모든 臣下가 굳이 청하여 마지않으므로 한강(漢江)에서 귀양하여 3日後에 곧 노래를 지어 불러들여다 더 높은 정승을 시키려 하였으나 뒷날 연산(燕山)이 임금이 되었을 때 폐립(廢立)이 있을까 하여 못하였다. 이 자리가 아깝다 함은 연산(燕山)이 임금 자격이 없음을 말하는 것으로 나중에 成宗이 돌아가심에 목멱산(木覓山)에 올라 통곡하고 미친체하니 燕山이 정말 미친줄로 알고 해(害)하지 않았다고 한다.


公은 어렸을 때에 어머님이 병환(病患)이 위중하여 어느 날 어머님이 살구를 잡숫고 싶다 하실 새 마침 집에 아무도 없을 때라 공이 어린 몸으로 정성이 지극하여 뒷동산 살구를 많이 갖다 드렸으니 그 말을 듣고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살구를 얻었는지 그 기적(寄蹟)에 경탄(驚嘆)하더라.


공이 강원감사(江原監司)로 계실 때 한재(旱災)가 심심하여 농작(農作)이 말아닌 형편이고 도민들의 걱정이 형언하기 어려운 정도였으므로 동헌(東軒) 뜰에 제단(祭壇)을 모으시고 기우제(祈雨祭)를 올릴새 하늘에 홀연(忽然)히 검은 구름이 일고 패연(沛然)히 큰 비가 쏟아지니 공이 감탄(感嘆)하여 뜰에 서서 들어가시지 않으므로 여러 사람들이 권(勸)하였으나 듣지 않으시고 『우리 道民을 爲하여 하늘이 기쁜 비를 내리시니 이 어찌 고맙지 않으리 어찌 단비를 피(避)하리요』하시고 관복(官服)이 온통 젖는 것도 모르고 비를 맞으므로 도민들이 애민덕행(愛民德行)을 앙모감읍(仰慕感泣)하더라.


公이 애주과음(愛酒過飮) 하시와 每日 표취(表醉)하시므로 成宗께서 술이 과하면 섭생(攝生)에 좋지 못하며 정사(政事)에도 지장(支章)이 있을 터이니 今後는 이 술잔으로 一日에 一盃씩만 하라고 분부(吩咐)하시고 銀잔을 주셨다. 하루는 중국(中國)에 국서(國書)를 급히 보낼 일이 있어 그것을 作成하도록  公을 부르니 公이 주기(酒氣)가 있는지라 成宗께서 일일일배(一日一盃)를 하라 하였는데 어찌된 일인고 하시매 公이 一日 一盃를 이행(履行한다고 주(奏)하니 그러면 그 술잔을 가져오라 하시어 그 잔을 보니 잔이 매우 큰지라 연고를 물으니 臣의 주량(酒量)이 그 잔으로 도저(度底)히 견디기 어려우므로 銀잔을 쳐 늘려서 크게 했다고 奏하니 成宗께서 술잔에 대한 것은 고사(姑捨)하고 國書를  걱정할 새 公이 정색(正色)하여 臣이 비록 酒氣가 있아오나 能히 쓰겠으니 臣에게 命하여 주시오 하실 새 임금이 許하시고 公이 國書를 쓰시니 문장 내용(文章內容)이 웅장호활(雄壯浩闊)하고 자획(字劃)이 정연(整然)하고 주옥(珠玉)같으니 임금이 感嘆하시고 차후(此後)는 일일기배(一日幾盃)라도 酒量대로 하라고 하셨다 한다.  


  ■ 명신석총 출충주읍지(名臣碩塚 出忠州邑誌)

 

  字 경포(敬浦),  號 칠휴거사(七休居士) 평해인 손밀(平海人孫密)의 子로 세종 정미(世宗丁未 1427년)에 중원군 산척면 원목리 응평부락(中原郡山尺面院目里鷹坪部落)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총혜(聰惠)가 특이(特異)하여 6, 7歲에 能히 소학(小學)에 通하고 장성(長成)함에 마음을 성리학(性理學)에 두어 언어진퇴(言語進退)가 예의(禮儀)에 벗어남이 없으며 수학중(修學中)에 경복(敬服)치 않는 者 없었다. 文宗 원년(1451년) 생원시(生員試)에 第1位로 합격(合格) 端宗 元年 癸酉에 文科 第 2 位로 발탁(拔擢)되어 무공랑 도창부승(務功郞度昌府丞)에 제수(除授)되었다. 이시(履試)에 合格하여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되었고 부모(父母) 상(喪)을 연속(連續) 당하여 복(服)을 맞이고 전한집의(典翰執義)를 평수상청(坪授上靑)하여 시정(時政) 17事를 논(論)하여 成宗께서 이를 가납(嘉納)하시어 형조참의(刑曹叅議)에 임명(任命)되었으나 公事를 그르쳐 상호군(上護軍)으로 좌전(左轉)되어 남산하(南山下)에 초정(草亭)을 짓고 蓮꽃을 심어 후학(後學)들을 교회(敎誨)하여 자약(自若)하였다.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로 재기용(再起用)되어 동부승지 도승지 강원도 관찰사(同副承旨都丞旨江原道觀察使)로 승진(陞進)하였다. 成宗 中宮 尹氏 廢位에 증언(拯言)으로 상소(上疏)하였고 후 호조참판(戶曹叅判), 형조참판(刑曹叅判)을 전수(轉授)하고 賀正使로 연경(燕京)에 갔다 돌아와 工曹叅判에 제명(除命), 이어서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가 되었다가 공조참판에 다시 任命되시어 명에 의하여 충서(忠恕)의 詩를 제진(製進)하니 傳하는 바에 依하면 이 詩를 보면 성의간공(誠意懇功)하므로 내 甚히 이를 가상(嘉償)히 여긴다하고 正憲에 昇進시키었다. 정희왕후(貞喜王后)가 온양행소(溫陽幸所)에서 승하(昇遐)하여 순효(舜孝)는 경사(京師)에서 재관(梓官)을 봉송(奉送)하고주야(晝夜)로 달려가 험로(險路)를 만나면 울면서 스스로 부만(扶挽)하여 전진(前進)하니 군민(軍民)이 사력(死力)을 다하여 기일(期日)에 도착(到着)할 수 있었다. 대사헌좌참찬(大司憲左叅贊)을 전명(轉命)하고 임사홍 사건(任士洪事件)을 효론(効論)타가 王의 노염(怒念)을 받아 경상감사(慶尙監事)로 나가게 되었다. 추락(墜落)은 되었으나 政事는 청간(淸簡)을 숭상(崇尙)하고 충신효자(忠臣孝子)의 정여(旌閭)를 만나면 必히 하마(下馬)하였다. 다시 좌찬성(左贊成)으로 들어가 판중추(判中樞)가 되었으나 病으로 辭任하려하니 왕이 윤허(允許)치 않았다.

 

成宗이 昇遐하니 불식월록(不食月錄) 燕山君 2年 71歲가 되었으므로 辭任하려 하였으나 允許치 않고 批答으로 几杖을 하사(下賜)하였다. 연산군 정사(燕山君丁巳) 3月 23日에 병졸(病卒)하니 문정(文貞)이란 諡號가 내리었다. 舜孝는 천자영매(天資英邁)하고 금반여락(襟反여落)하여 처사(處事)함에 상명(詳明)하고 일을 논하고 건의(建議)함에는 忠孝를 爲主로 하였다. 사람을 對하고 사물(事物)을 接함에 화기유연(和氣油然)하고 늠호(凜乎)하여 犯치 못할 点이 있었다. 깊이 이성(理性)의 근원(根源)을 탐구(探究)하고 특히 용학(庸學)과 이경(易經)에 정통(精通)하였다. 文章을 짓는데 붓을 들면 成文되어 풍행류수(風行流水)와 같다. 일찍이 子弟를 경계(警戒)함에 내 집은 초야(草野)에서 일어섰다. 전가(傳家)의 유물(由物)이 없으니 청백(淸白)을 傳하면 足하다. 집에서 치산(致産)을 하지 않고 다만 말 한 匹이 있을 따름이라. 의복(衣服), 음식(飮食), 거처(居處)에 화려(華麗와 사리(奢移)를 버리고 객이 오면 초두(樵豆)에 술뿐이었으니 현귀(顯貴)하여도 활허청한(활虛淸閑)의 좌야시(左野時)와 같으니 時人이 선풍유골(仙風遺骨)이라고 칭찬(稱讚)하였다.(人物考) 문집(文集)이 많이 있고 평해운암서원(平海雲巖書院)에 향배(享配)되었으며 중원군 산척면 천등산하 송강리 행정부락 임좌(中原郡山尺面天登山下松江里杏亭部落壬坐)에 墓가 있으며 극암 이창신 찬(克菴李昌臣撰)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이 있다.

 

▶묘갈비문(墓碣碑文)
숭정대부 의정부 우찬성 겸 세자이사 동지춘추관사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판중추부사 시문정공7휴손공순효경보지묘

(崇政大夫議禁府右贊成兼 世子貳師同知春秋舘事判義禁府事 五衛都摠府都摠管判中樞府事 諡文貞公七休 孫公舜孝敬甫之墓)

 

법치 정사(法治丁巳) 3月 23日 卒
단기 4292年(己亥) 2월 5일 印刷
 충청북도 중원군 교육구청 발행(忠淸北道 中原郡 敎育區廳 發行)

 중원군수 김상현(中原郡守 金相顯) 저(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