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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씨시조 손순(孫順)의 효행을 포상한 신라 제42대 경주흥덕왕릉(慶州興德王陵)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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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및산행

2021. 12. 2.









손씨시조 손순(孫順)의 효행을 포상한 신라 제42대
경주흥덕왕릉(慶州興德王陵) 탐방


(2021/11/06 현재)


동해안 해파랑길 주변 해안가 도로를 따라 간성에서 울산까지 종단 여행
3일차로 먼저 월성 원자력 발전소 부지에 있는 신라 제4대 석탈해왕탄강유허와
신라 30대 경주 문무대왕릉, 이견대(利見臺),경주감은사지(慶州感恩寺址) ,
울산 장생포고래박물관(長生浦--博物館) ,처용암(處容岩),간절곶(艮絶串) 을
살펴 보고 경주쪽으로 가면서 방문한 안강읍 육통리에 ,손씨시조 손순(孫順)의
효행을 포상한 바 있는 , 신라 제42대 경주흥덕왕릉(慶州興德王陵)
탐방 전경 입니다

흥덕왕(興德王, 777년[1] ~ 836년 12월, 재위 : 826년 10월 ~ 836년 12월)은
신라의 제42대 왕이다. 성은 김(金)이고, 초명은 수종(秀宗), 수승(秀升)[2]이며,
즉위 후에 경휘(景徽)로 개명하였다.

아버지는 원성왕의 장남인 혜충태자(惠忠太子)이며, 어머니는 성목태후 김씨
(聖穆太后 金氏)이다. 소성왕과 헌덕왕의 친동생이다. 왕비는 소성왕의 딸
장화부인(章和夫人, 정목왕후로 추존)이다. 헌덕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며 청해진(淸海鎭)과 당성진(唐城鎭)을 설치하여 해적의 침탈을 막고
안으로는 백성들의 사치를 법으로 규제하였다.

809년 동복 형 헌덕왕과 함께 정변을 일으켜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
헌덕왕을 지지하여 이찬이 되었고, 819년 2월 또 다른 동복형제인 상대등
김숭빈(金崇斌)이 사망하자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헌덕왕에게는
김장렴(金張廉)과 김헌장(金憲章) 등의 왕자들이 존재하였고 이들을
당나라에 입조시킨 기록이 남아있으나, 헌덕왕은 822년 봄 정월, 후사가
없음을 이유로 동생 수종을 태자로 책봉하였다.
826년 10월, 헌덕왕이 죽자 즉위하였다.

흥덕왕릉은 몇 가지 이유에서 주목받는 왕릉이다. 우선 경주에 산재한
신라왕릉 가운데 무열왕릉과 더불어주인이 명확한 왕릉이라는 점이다.
귀부의 비편에서 ‘흥덕’이라는 글자가 나왔다. 신라왕릉으로는 유일한 부부합장릉
이란 점도 관심이다.『삼국유사』 ‘왕력’편에 “안강 북쪽 비화양에 있으니
왕비 창화부인과 합장하였다(陵在安康北比火壤 與妃昌花合葬)”로 기록되어 있다.

능이 거의 완벽한 상태로 보존돼 있다는 점도 눈에 띈다. 원형 봉토분으로
지름 20.8m, 높이 6m이다. 무덤밑에는 둘레돌을 배치했다. 둘레돌은 먼저
바닥에 기단 역할을 하는 돌을 1단 깔고 그 위에 넓적한 면석을세웠다.
면석 사이에는 기둥 역할을 하는 탱석을 끼워 넣었는데, 각 탱석에는
방향에 따라 12지신상을 조각하였다. 무덤의 주위 네 모서리에는 각각
돌사자를 한 마리씩 배치하였고, 앞쪽의 왼쪽과 오른쪽에 문인석·무인석을
각 1쌍씩 배치하였다.

흥덕왕은 재위기간(826~836)이 그리 길지 않다.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기록물은 적지 않다. 많이 알려진 내용으로는 828년에 전남 완도에 청해진
(淸海鎭)을 설치하게 하고 장보고 (張保皐)를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에
임명하여 해상권을 장악하였으며,

또한 828년에 김대렴(金大廉)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가져온 차(茶)
종자를 지리산에 심어 재배하도록 하였다. 835년에는 김유신을 흥무대왕
(興武大王)으로 추봉하였다. 아울러 동년 손씨시조 손순(孫順)의 효행을
축하하여 효자 순에게 집 한 채를 주고 해마다 쌀 50석을 내려
편히 노모를 봉양토록 하라"고 영을 내렸다.


■경주 흥덕왕릉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흥덕왕릉(興德王陵)은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에 있는, 신라 제42대 흥덕왕의 무덤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0호로 지정되었다.
 
▶개요
 
신라 제42대 흥덕왕(興德王 재위 826∼836)의 무덤으로 무덤제도가 잘 갖추어진 왕릉이다. 흥덕왕의 본명은 김수종金秀宗(경휘景徽)이며, 제41대 헌덕왕의 아우이다. 장보고로 하여금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서해를 방어하게 하였고, 당으로부터 가져온 차(茶) 종자를 지리산에 심어 재배하도록 하였다.
 
이 능은 원형 봉토분으로 지름 20.8m, 높이 6m이다. 비교적 커다란 둥근 봉토분으로 무덤 밑에는 둘레돌을 배치하여 무덤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둘레돌은 먼저 바닥에 기단 역할을 하는 돌을 1단 깔고 그 위에 넓적한 면석을 세웠다. 면석 사이에는 기둥 역할을 하는 탱석을 끼워 넣었는데, 각 탱석에는 방향에 따라 12지신상을 조각하였다. 탱석과 면석 위에는 다시 갑석을 올려 마무리 하였다.
 
무덤의 주위 4모서리에는 각각 돌사자를 한마리씩 배치하였고, 앞쪽의 왼쪽과 오른쪽에 문인석·무인석을 각 1쌍씩 배치하였다. 무덤의 앞 왼쪽에는 비석을 세웠는데, 지금은 비석을 받쳤던 귀부만 손상된 채 남아있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무덤의 위치가 이 무덤과 대체로 일치하고, 왕릉 주위에서 ‘흥덕’이라는 글자가 쓰여진 금석문이 발견되어 이 무덤이 흥덕왕의 무덤이라는 것을 뒷받침해 주고있다. 전체적인 배치와 장식물의 양식으로 볼 때 성덕왕릉과 원성왕릉의 형식을 많이 본따고 있다.
 
 
 
 ●경주흥덕왕릉(慶州興德王陵)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문화재 지정 사적 제30호
-건립   시기 통일신라시대
-면        적  6만 1,983㎡
-소   재  지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산42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에 있는 신라 제42대 흥덕왕의 능.사적 제30호. 지정면적 6만 1,983㎡. 무덤의 지름은 20.8m, 높이는 6m이다. 흥덕왕의 성은 김씨, 이름은 수종(秀宗)이라 하였다. 제41대 헌덕왕의 아우이며, 왕비는 장화부인(章和夫人)이다.
 
826년에 왕이 되어 836년에 승하할 때까지 10년간 재위하였다. 승하 뒤 먼저 죽은 장화부인의 무덤에 합장하였다고 하는 기록에 따라 이 무덤으로 비정되고 있다.
 
무덤의 외부모습은 비교적 큰 둥근 봉토분으로, 무덤 밑둘레를 따라 병풍처럼 다듬은 판석(板石)을 사용하여 무덤 보호석을 마련하였고, 판석 사이사이에 탱석(撐石)을 끼워 판석을 고정시키고, 아울러 각 탱석에는 방향에 따라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하였다.
 
판석과 탱석 위에는 갑석(甲石)을 올려 보호석을 마무리하였다. 호석 밑둘레를 따라 일정한 간격을 띄워 방사형으로 깐돌[敷石]을 깔았고 주변을 따라 돌난간을 세웠으나 난간기둥은 많이 없어졌다. 난간기둥에는 위아래에 둥글게 구멍을 뚫어 기둥돌을 끼웠으나 지금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무덤의 네 모서리에는 각각 돌사자를 한 마리씩 배치하였고 전방의 좌우에는 문인석(文人石)과 무인석(武人石)을 각 1쌍씩 배치하였으며 무덤의 전방좌측에는 능에 관한 돌비[石碑]를 세웠던 받침돌인 귀부(龜趺)가 남아 있으나 손상이 심하고 비신(碑身)과 그 위에 얹어놓은 이수(螭首)는 없어졌다. 표식물의 양식 및 배치로 보아 신라 제33대 성덕왕릉과 제38대 원성왕릉을 많이 모방하였다.
 
 
 ●경주 흥덕왕릉 - 대한민국구석구석
 
-위          치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육통길 190-30 (안강읍) 부근
-문화재 지정  사적 제30호(1963.01.21 지정)
 
 
신라 역대 왕릉 중에서 규모가 크고 형식이 완전히 갖추어진 대표적 왕릉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왕비와 합장한 것으로 되어 있어, 봉분(封墳)의 규모가 비교적 크다. 봉분 밑에는 판석(板石)을 세워 둘레돌[護石]을 삼고, 판석과 판석 사이에 탱주(伸)를 세워 판석을 고정하였으며, 위에 갑석(甲石)을 얹었고 탱석에 각각 방향을 따라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하였다. 둘레돌의 주변에 방사형으로 박석을 깔고, 그 주위에 난간을 돌렸다.
 
 난간 기둥에는 상·하 2개의 둥근 구멍을 뚫어 관석(貫石)을 끼우게 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하나도 없다. 봉분 4귀퉁이에는 각각 돌사자 1구씩을 배치하였고, 그 전방의 좌우에는 문인석(文人石)과 무인석(武人石) 각 1쌍이 배치되었다. 또, 능 전방의 왼쪽에는 능비를 세웠던 귀부(龜趺)가 있으나 손상되었고, 비신(碑身)과 이수(首)는 망실되었다. 
 
이 표식물(表飾物)의 양식을 보면 봉분 밑의 둘레돌이나 십이지신상의 조각은 원성왕릉의 형식을 따랐고, 돌사자의 배치는 성덕왕릉의 형식을 취하였으며, 문인석 ·무인석의 배치는 성덕왕릉 또는 원성왕릉의 형식과 같다. 흥덕왕은 임금이 된 첫해에 왕비인 장화부인(章和夫人)이 죽었는데, 11년 동안 죽은 장화부인만 생각하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왕이 장화부인의 무덤에 합장하기를 유언하여 흥덕왕릉에 합장하였다고 하며, 능의 주변에서 ‘興德’이라 새겨진 비석의 파편이 발견되었다.
 
* 면적 6만 5460㎡, 지름 20.8m, 높이 6m
 
 
 
■흥덕왕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흥덕왕(興德王, 777년[1] ~ 836년 12월, 재위 : 826년 10월 ~ 836년 12월)은 신라의 제42대 왕이다. 성은 김(金)이고, 초명은 수종(秀宗), 수승(秀升)[2]이며, 즉위 후에 경휘(景徽)로 개명하였다.
 
아버지는 원성왕의 장남인 혜충태자(惠忠太子)이며, 어머니는 성목태후 김씨(聖穆太后 金氏)이다. 소성왕과 헌덕왕의 친동생이다. 왕비는 소성왕의 딸 장화부인(章和夫人, 정목왕후로 추존)이다. 헌덕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며 청해진(淸海鎭)과 당성진(唐城鎭)을 설치하여 해적의 침탈을 막고 안으로는 백성들의 사치를 법으로 규제하였다.
 
<생애>
 
▶즉위 이전
 
809년 동복 형 헌덕왕과 함께 정변을 일으켜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 헌덕왕을 지지하여 이찬이 되었고, 819년 2월 또 다른 동복형제인 상대등 김숭빈(金崇斌)이 사망하자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헌덕왕에게는 김장렴(金張廉)과 김헌장(金憲章) 등의 왕자들이 존재하였고 이들을 당나라에 입조시킨 기록이 남아있으나[2], 헌덕왕은 822년 봄 정월, 후사가 없음을 이유로 동생 수종을 태자로 책봉하였다.[3] 826년 10월, 헌덕왕이 죽자 즉위하였다.
 
▶치세
 
827년 봄 정월, 왕이 몸소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당나라 문종(文宗)이 헌덕왕의 붕어(崩御) 소식을 듣고, 조회를 폐지하고 지절사(持節使)로 조문하도록 하였다. 왕을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위 사지절대도독 계림주제군사 겸 지절충영해군사 신라왕으로 책봉하였다.
 
828년 4월 장보고(張保皐)를 청해진 대사(淸海鎭大使)로 삼았다. 장보고는 당나라 서주(徐州)에 들어가 군중소장(軍中小將)이 되었다. 후에 귀국하여 흥덕왕을 알현하고, 군사 1만 명으로 청해진(淸海鎭)을 지키게 되었다.[2] 
 
겨울 12월,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돌아온 사신 대렴(大廉)이 차나무 종자를 가지고 왔기에 왕이 지리산(地理山)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여왕(善德女王) 때부터 있었으나 이때에 와서 크게 유행하였다.[2]
 
830년 여름 4월, 왕의 건강이 좋지 않아서 기도를 드리고, 이어 승려 150명에게 도첩을 주었다.
 
831년 2월, 왕자 김능유(金能儒)와 승려 아홉 명을 당나라에 보냈으나 7월 귀국 길에 바다에 빠져 죽었다.
 
832년 봄과 여름에 가물어 땅이 붉게 탔다. 왕은 정전에 나가지 않고 음식을 줄였으며, 중앙과 지방의 죄수들을 사면하였다. 가을 7월에야 비가 내렸다. 8월, 흉년이 들어 도적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10월, 임금이 사람을 파견하여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833년 봄, 나라 안에 큰 기근이 들었다. 여름 4월, 시조묘에 참배하였다. 이 해에 전염병으로 죽은 백성이 많았다.[4]
 
834년 9월, 왕이 서형산(西兄山) 아래에 행차하여 크게 군대를 사열하고, 무평문(武平門)에서 활쏘기를 관람하였다. 10월, 남쪽 지방의 주와 군을 두루 돌아보았다. 노인과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노인들을 찾아 위문하고, 곡식과 베를 형편에 따라 차등을 두어 내려주었다.
 
835년 봄 2월, 아찬 김균정(金均貞)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시중 우징이, 그의 아버지 균정이 재상으로 조정에 들어갔기 때문에 사직할 것을 요청하였으므로, 대아찬 김명(金明)을 시중으로 삼았다. 김유신(金庾信)을 추봉(追封)하여 흥무왕(興武王)이라 하였다.[5]
 
836년 12월, 왕이 붕어(崩御)하자 시호를 흥덕(興德)이라 하였다. 조정에서는 왕의 유언에 따라 장화왕비(章和王妃)의 능에 합장하였다. 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사촌동생인 균정(均貞)과 균정의 조카 제륭(悌隆)이 왕위를 두고 다투었다.[5]
 
▶사치금지령
 
834년 교지를 내려 귀족의 사치를 규탄하고 골품제도에 따라 계급 별 복색(服色)·거기(車騎)·기용(器用)·옥사(屋舍) 등의 규정을 한층 강화하여 신분의 구분을 엄히 하였다.[6]
 
“사람은 나이에 따라 손위와 손아래의 구분이 있고, 지위에도 높고 낮음이 있어서, 법의 규정이 같지 않으며 의복도 다른 법이다.
 
풍속이 점점 각박해지고, 백성들이 다투어 사치와 호화를 일삼고, 진기한 외래품만을 좋아한 나머지 도리어 순박한 우리의 것을 싫어하니,
 
예절은 곧잘 분수에 넘치는 폐단에 빠지고 풍속이 파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삼가 옛 법전에 따라 명확하게 법령을 선포하노니, 만일 일부러 이를 어기면 진실로 그에 맞는 형벌을 내릴 것이다.”
 
▶흥덕왕과 앵무새
 
흥덕왕이 즉위하고 두 달이 지난 826년 12월, 왕비인 장화부인(章和夫人)이 죽자 왕이 몹시 슬퍼하였다. 군신들이 새로운 왕비를 책봉할 것을 진언하였지만 왕은 "쌍쌍인 새도 자기의 짝을 잃으면 슬퍼하는데, 하물며 좋은 배필을 잃고 나서 어찌하여 무정하게도 다시 부인을 얻겠는가?" 하며 후비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시녀들도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왕의 좌우에 내시 두 사람만을 심부름꾼으로 머물게 하였다. 장화부인을 정목왕후(定穆王后)로 추존하였다.[2]
 
《삼국유사》에도 흥덕왕이 왕비를 잃은 슬픔을 한 쌍의 새에 비유한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7] 흥덕왕이 왕위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당나라에 사신 갔던 사람이 앵무새 한 쌍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암놈이 죽었고, 홀로 된 숫놈은 슬프게 울기를 그치지 않았다. 왕이 사람을 시켜 앵무새 앞에 거울을 걸어놓게 하였다. 그러자 앵무새는 거울 속에 비친 상이 자기 짝인 줄로만 알고 그 거울을 쪼아대었다. 그러다 곧 그림자라는 것을 알고는 슬피 울다 죽었다. 왕이 노래를 지었다고 하는데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7]
 
▶흥덕왕릉 비편
 
경상북도 경주시에 위치한 흥덕왕과 왕비 장화부인의 합장릉인 흥덕왕릉(興德王陵)은 기록과 비편을 통해 무덤의 피장자가 흥덕왕임을 알 수 있게 되었는데, 흥덕왕릉비편의 내용 중 "壽六十是日也(왕의 수명은 육십이다)"라는 내용을 통해 흥덕왕의 출생 연도를 비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밖에도 "太祖星漢…卄四代孫(태조 성한왕의 24대손)" 과 같은 내용을 통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의 역사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문무왕릉비(文武王陵碑), 태종무열왕의 차남인 김인문(金仁問)의 묘지명, 진철대사탑비문(眞澈大師塔碑文),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 및 석관(原州 興法寺址 眞空大師塔 및 石棺)과 같은 금석문에만 등장하는 신라의 시조로 여겨지는 태조(太祖) 성한(星漢)이라는 이름이 흥덕왕릉비에도 등장한다.
 
신라김씨 선원세계상에는 그가 알지의 21세손, 세한 또는 성한의 20세손이 되나, 당대의 기록인 흥덕왕릉비문에는 그가 성한의 24세손으로 되어 있다.
 
▶가계
 
-조부 : 원성왕(元聖王, ? ~798년) - 신라 제38대 왕
-조모 : 숙정부인 김씨(淑貞夫人) - 각간 김신술(神述)의 딸
-아버지 : 혜충태자(惠忠太子, ? ~ 791년) - 혜충왕(惠忠王)으로 추존
-어머니 : 성목태후 김씨(聖穆太后 金氏, 생몰년 미상)
-왕비 : 정목왕후 김씨(定穆王后 金氏, 장화부인, ? ~ 826년) - 소성왕의 딸
 
 
 
■흥덕왕[興德王수종(秀宗), 경휘(景暉)]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시대 고대/남북국/통일신라
-사망 836년(흥덕왕 11) 12월
-경력 시중(侍中: 804년), 신라 제42대 국왕(재위: 826∼836년)
-관련 사건 청해진 설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42대(재위:826~836) 왕.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수종(秀宗) 또는 경휘(景暉)·수승(秀升)이다. 헌덕왕(憲德王)의 동생으로, 아버지는 원성왕(元聖王)의 큰 아들인 혜충태자(惠忠太子)인겸(仁謙)이며, 어머니는 성목태후 김씨(聖穆太后 金氏)이다. 할머니는 각간(角干) 신술(神述)의 딸인 숙정부인(淑貞夫人金氏)이다. 비(妃)는 소성왕(昭聖王)의 딸인 장화부인 김씨(章和夫人金氏)로 즉위한 해에 죽으니 정목왕후(定穆王后)로 추봉되었다.
 
흥덕왕(興德王)은 일련의 정치개혁을 시도하였으며, 특히 복색(服色)·거기(車騎)·기용(器用)·옥사(屋舍) 등의 골품제(骨品制) 규정을 한층 강화하여 신분의 구분을 엄히 하였다. 아울러 김헌창(金憲昌)의 난(亂) 진압에 공을 세운 김유신(金庾信)의 후손들을 우대해 주었고, 청해진(淸海鎭)·당성진(唐城鎭)을 설치하여 해적의 침탈을 막는 등 내치의 안정에 힘썼다.
 
▶생애 / 활동사항
 
흥덕왕의 정치적 입장은 대체로 헌덕왕과 비슷하였다. 804년(애장왕 5) 시중(侍中)에 임명된 것으로 미뤄볼 때, 언승(彦昇: 뒤의 헌덕왕)과 함께 애장왕(哀莊王)대의 개혁정치를 주도했다고 생각된다. 809년 언승이 애장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는데 공을 세웠고, 헌덕왕대의 정치에 깊이 관여하였다. 819년(헌덕왕 11) 상대등(上大等)에 임명되었고, 822년에는 부군(副君)이 되어 월지궁(月池宮)에 들어감으로써 왕위계승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즉위하면서 흥덕왕은 애장왕대로부터 이어지는 일련의 정치개혁을 시도하였다. 827년(흥덕왕 2)에 명활전(明活典)을 설치하였다. 혹은 그것이 914년(신덕왕 3)에 설치되었다는 설도 있다. 829년에는 원곡양전(源谷羊典)을 설치했으며, 집사부(執事部)를 집사성(執事省)으로 고쳤다. 이 때의 개혁은 귀족세력의 억제와 왕권강화를 위한 것이었으며, 헌덕왕대의 김헌창(金憲昌)의 난(亂)을 마무리짓는 조처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흥덕왕대의 개혁은 이에 그치지 않고 834년에 모든 관등(官等)에 따른 복색·거기·기용·옥사 등의 규정을 반포하였다. 이 규정은 왕이 당시 사치풍조를 금지시키기 위해 발표한 것이지만, 귀족들의 요구에 의해 골품(骨品) 간의 계층구별을 더욱 엄격히 하고자 취해진 조치였다. 특히, 이 규정의 내용은 진골(眞骨)과 육두품(六頭品)을 비롯한 여하의 귀족이나 평민과의 차별을 더 뚜렷이 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골세력에 대한 배려를 깊이 깔고 있다. 
 
복색·거기·기용·옥사 등 규정의 전반적인 내용을 볼 때, 육두품·오두품·사두품, 평민 사이에는 상당한 출입이 허용되고 있는데 반해 왕과 진골, 그리고 진골과 육두품 사이에는 엄격한 구분이 존재하고 있다. 즉 이들 규정의 가장 중요한 점은 왕과 진골, 진골과 육두품 사이의 준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흥덕왕의 개혁은 행정기구의 한식(漢式) 개편과 물리적인 힘에 의한 귀족세력의 억제, 그리고 그를 통한 왕권의 전제화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이 풍속규제 정책 역시 그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이와 아울러 835년에 김유신을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하였다. 이는 김헌창의 난 평정에 공을 인정받은 김유신 후손들의 현실적인 세력을 배경으로 취해진 조처였다. 그 밖의 치적으로 변방에 진(鎭)을 설치한 것과 불교에 대한 장려를 들 수 있다.
 
우선 828년에 궁복(弓福: 장보고)이 중국 당나라의 서주(徐州)에서 소장(小將)으로 활약하다가 귀국하였으므로 1만명의 병졸로써 지금의 완도(莞島)에 청해진을 설치하게 하고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에 임명하였다. 다음해에는 당은군(唐恩郡)에 당성진을 설치하였다. 청해진은 서해안에 횡행하는 해적(海賊)을 퇴치하기 위해 장보고가 청원하여 진을 설치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청해진과 당성진의 설치는 해적의 퇴치와 아울러 노예무역을 중심으로 한 교역활동을 통하여 그 경제력을 확대시키고 있던 서남해변의 지방호족(地方豪族) 세력을 억압하기 위한 조처였다. 즉 헌덕왕 14년(822년)에 일어난 김헌창의 난에 가담한 지방호족 세력의 거점지역이 이들 진이 설치된 서남부 지역이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827년에는 승려 구덕(丘德)이 당나라로부터 경전을 가지고 들어왔으며, 830년에는 도승(度僧) 150명을 허가해주었다.
 
한편, 828년에는 김대렴(金大廉)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가져온 차(茶) 종자를 흥덕왕이 지리산에 심게 하여 무성하게 되었다. 흥덕왕은 앵무새에 대한 노래를 지었다고 하나 현재 그 가사는 전하지 않는다.
 
836년 12월에 승하하였다. 장지(葬地)는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강서면 육통리에 있는 장화왕비와 합장된 흥덕왕릉(興德王陵)이다.
 
 
 
●신라왕릉(新羅王陵) - 다음백과
 
[요약] 경주 시내에는 거대한 봉분을 갖춘 고분들이 분포하고 있으며 경주분지를 둘러싼 주변의 산기슭에도 고분군이 있다. 그러나 이 고분군들 가운데 왕릉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은 56명의 신라왕 가운데 35기에 불과하며 왕릉의 피장자를 정확히 가려줄 수 있는 자료도 매우 희박해 무열왕릉·선덕여왕릉·흥덕왕릉을 제외하고는 그 피장자가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발굴된 바 있는 금관총·금령총·서봉총·천마총·황남대총 등은 왕릉으로 추정되고 있어 그 연구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왕릉의 입지는 크게 3시기로 변천하고 있는데 변천하는 요인은 국가의 성장에 따라 인구가 증가하고 자연적 조건이 달랴졌기 때문이다. 각 시기에 따라 왕릉의 구조와 껴묻거리(부장품)의 내용 등 묘제가 달라지고 있다.
 
 
경주 시내에는 대능원을 중심으로 하여 거대한 봉분을 갖춘 고분들이 분포하고 있으며 경주분지를 둘러싼 주변의 산기슭에도 고분군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 고분군들 가운데 왕릉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은 56명의 신라왕 가운데 35기에 불과하며 왕릉의 피장자를 정확히 가려줄 수 있는 자료도 매우 희박해 무열왕릉·선덕여왕릉·흥덕왕릉을 제외하고는 그 피장자가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발굴된 바 있는 금관총·금령총·서봉총·천마총·황남대총 등은 왕릉으로 추정되고 있어 그 연구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왕릉의 입지는 문헌기록을 통하여 살펴볼 수 있는데, 크게 3시기로 변천하고 있다.
 
제1기는 경주의 평지에 왕릉이 축조되는 시기로서 지증왕대까지이다. 제2기는 경주의 평지에서 주변의 산기슭으로 옮겨간 시기이다. 선도산·낭산·남산의 서북쪽과 동쪽 기슭, 명활산 기슭에 왕릉이 조영되고 있다. 대체로 법흥왕부터 경덕왕대까지의 왕릉이 여기에 포함된다. 제3기는 제2기보다 경주분지에서 좀 더 멀리 떨어진 외곽에 왕릉이 조영된다. 이 시기의 왕릉은 경주분지로 흘러드는 하천유역의 산기슭에 군집분이 아닌 단독분의 형태로 존재하며, 풍수지리적 조건을 갖춘 지형을 선택하고 있다. 
 
이렇듯 왕릉의 입지적 조건이 변천하고 있는 요인은, 국가의 성장에 따른 인구의 증가와 자연적 조건을 들 수 있다. 즉 경주는 충적평야이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분지 형태로서 하천과 계곡이 발달해 있어 묘지 선정의 제약요인이 되었다. 그리고 중국 왕릉제도의 영향과 풍수지리설의 도입을 들 수 있다. 즉 제3기의 왕릉에는 당(唐)의 왕릉제도를 받아들여 문무인석·사자석 등이 갖추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왕릉의 구조도 변천되어 갔는데, 가장 이른 시기의 왕릉은 조양동유적이 시사하듯이 덧널무덤[土壙木槨墓]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평지의 지상 혹은 지하에 덧널을 설치한 다음 그 주변과 위로 돌을 쌓고 다시 그 바깥에 점토를 입혀 축조한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 출현하고 있다. 돌무지덧널무덤은 제1기에 출현한 묘제로서 마립간 시기의 대표적인 왕릉구조이다. 또 왕릉으로서의 돌무지덧널무덤은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껴묻거리도 호화롭고 풍부하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제2기의 왕릉구조는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 되는데, 고구려 묘제의 영향을 받아 출현한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묘제의 변화는 법흥왕 때 율령의 반포와 깊은 관련이 있다. 돌방무덤은 내부구조에 있어서 약간의 변형이 따르지만 제3기까지 계승되었다. 
 
신라왕릉은 신분과 시기에 따라 규모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돌무지덧널무덤의 규모가 가장 크며 그이후의 굴식돌방무덤은 점차 작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라왕릉은 제1기부터 자연석으로 된 둘레돌[護石]이 봉분 주위에 배치되었는데, 제3기에 와서는 판석에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하는 양식으로 완성된다. 신라왕릉은 당시 왕권의 상징이며 그 문화수용의 면모를 시사해주기도 한
 
 
 
●[삼국유사 오디세이] 12. 흥덕왕릉
 
  = =먼저 떠난 왕비 그리워 한 곳에 묻힌 '신라시대 로맨티스트'==
 
 
흥덕왕릉은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어래산 기슭, 능골에 있다. 육통은 원당 못밑 존당 학지 거리동 능골 등 6개 자연부락의 중심에 자리한 마을이고 능골은 흥덕왕릉이 있는 고을이다.
 
흥덕왕은 왕비 장화부인을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1,200년 세월 지나도록 이름을 떨쳤다. 왕비가 죽은뒤 암컷을 잃은 수컷 앵무새를 보면서 시를 썼다. 시는 전해지지 않으나 『삼국사기』는 ‘왕이 왕비를 그리워하여 못내 잊지 못하고 서운해하면서 즐거움을 멀리하였다’고 기록한다. 시녀들을 가까이하지 않았고 내시가 드나들며 심부름을 했다. 죽어서는 왕비와 합장해 저 세상까지 사랑을 이어가려 했다. 
 
『삼국유사』 ‘흥덕왕 앵무’편은 왕의 순애보를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했다. ‘흥덕왕이 즉위하고 얼마 안 돼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사람이 앵무새 한 쌍을 왕에게 바쳤다. 오래지 않아 암컷이 죽고 수컷만 남았다. 홀로수컷은 슬피 울며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왕이 새 앞에 거울을 가져다 두게 했다. 새는 거울 속의 그림자가제 짝인 줄 알고 거울을 쪼다가 그것에 제 그림자임을 알고 슬피 울다가 죽었다. 왕이 노래를 지었으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이게 끝이다. 짧은 글은 긴 여운을 남겼다. 사람들은 왕의 순애보에 감동했다. 흥덕왕의애끓는 사랑을 소재로 시를 쓰고 에세이를 지었다. 흥덕왕을 ‘신라시대의 로맨티스트’라고 하기도 하고 이들부부를 일컬어 ‘천년의 사랑’이라고도 했다.
 
흥덕왕을 로맨티스트로 여기는 이들은 막상 흥덕왕릉 앞 안내표지판을 보고 놀랄지 모르겠다. 안내 표지판글이 그렇게 로맨틱하지 않다. “이 능은 신라 제42대 흥덕왕을 모신 곳이다. 흥덕왕은 형인 헌덕왕과 함께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중략) 흥덕왕이 죽은 후 먼저 세상을 뜬 장화부인 능에 합장하였다고 하며, 발견된 능의 비석 조각에 ‘흥덕’이라는 글자가 있어 흥덕왕릉으로 확인하였다”
 
표지판은 ‘흥덕왕은 형인 헌덕왕과 조카 애장왕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고 설명한다. 흥덕왕 김수종은 42대왕, 헌덕왕 김언승은 41대 왕으로 형제간이다. 조카 애장왕 김청명은 40대 왕인데 39대 소성왕 김준옹의아들이다. 소성왕과 흥덕왕 헌덕왕은 형제간이다. 소성왕이 집권 1년 반 만에 죽자 13세의 애장왕이 왕이됐다. 삼촌 김언승이 섭정을 하고 김수종이 뒤를 받쳤는데 애장왕이 성인이 되면서 친정체제를 구축하려했다. 불안해진 삼촌들이 조카를 죽이고 조카 뒤를 이어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며 왕위에 오른 것이다.삼촌들은 애장왕만 죽인 게 아니다. 애장왕의 동생인 체명까지 죽였다. 체명은 삼촌들의 쿠데타에 맞서끝까지 싸우다 죽었다. 충격적인 사실은 흥덕왕의 부인인 장화 부인이 애장왕과 체명의 누나라는 사실이다. 장화부인은 남편이자 삼촌인 흥덕왕이 두 동생을 살해하고 왕위를 탈취하는 현장을 두 눈 뜨고 지켜봐야 했다. 이쯤 되면 흥덕왕이 장화부인을 끔찍이 사랑했다는 대목에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그 사건이 일어난 지 17년 후인 826년 10월 남편이 왕위에 올랐고 2개월 뒤에 장화부인이 죽었다. 역사책은 장화부인의 죽음에 대해 말이 없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왕은 장화부인의 무덤을 안강읍 육통리 현재의 흥덕왕릉으로 정하고 자신이 죽으면 그 자리에 합장을 하라고 하명했다. 자기가 묻힐 자리를미리 정해둔 것이다. 왕은 왜 왕궁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안강을 신후지지로 택했을까. 조카를 죽이고왕위를 찬탈했다는 죄의식 때문에 열성조들이 묻혀 있는 중심지를 피했던 것은 아닐까. 하여튼 흥덕왕은 사람들이 떠받들고 있는 만큼 대단한 로맨티스트는 아닌 것이 확실하다.
 
흥덕왕의 거사는 골육상쟁의 피비린내 나는 정쟁의 신호탄이 됐다. 이제 원성왕계의 왕족 중에서 힘이있는 사람은 누구든 들고 일어나 왕이 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흥덕왕이 죽자 사촌 동생 김균정과 다른사촌동생 김헌정의 아들 제융이 왕좌를 놓고 싸웠다. 제융이 김균정을 죽이고 왕이 됐다. 43대 희강왕이다. 희강왕을 도와 싸웠던 김명이 또 희강왕을 죽이고 44대 민애왕에 올랐다. 희강왕과 김명은 6촌 형제이며 처남 매부 간이다. 45대 신무왕은 민애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이들도 혈족이다. 이렇듯 39대소성왕 때부터 박씨인 53대 신덕왕이 왕위에 오를 때까지 113년 동안 원성왕계에서 14명의 왕이 배출됐다. 나라가 망국의 길로 치닫는데 흥덕왕이 상당한 기여를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런 골육상쟁 속에서 왕비들은 마음의 상처를 크게 입었다. 앞서 말한 대로 흥덕왕비 장화부인은 남편이 두 동생을 죽이자 엄청난 충격 속에 빠졌을 것이다. 문목부인은 동생 김명(민애왕)이 남편 희강왕을죽이는 현장을 지켜봐야 했고 조명부인 역시 남편 김균정이 동생 김명의 손에 살해당하는 참변을 겪었다. 시간이 지나서는 자신의 아들 김우징(신무왕)이 동생 김명을 죽이고 왕좌를 차지하는 광경을 목도했다.
 
 
 
흥덕왕릉은 몇 가지 이유에서 주목받는 왕릉이다. 우선 경주에 산재한 신라왕릉 가운데 무열왕릉과 더불어주인이 명확한 왕릉이라는 점이다. 귀부의 비편에서 ‘흥덕’이라는 글자가 나왔다. 신라왕릉으로는 유일한부부합장릉이란 점도 관심이다.『삼국유사』 ‘왕력’편에 “안강 북쪽 비화양에 있으니 왕비 창화부인과 합장하였다(陵在安康北比火壤 與妃昌花合葬)”로 기록되어 있다.
 
 
능이 거의 완벽한 상태로 보존돼 있다는 점도 눈에 띈다. 원형 봉토분으로 지름 20.8m, 높이 6m이다. 무덤밑에는 둘레돌을 배치했다. 둘레돌은 먼저 바닥에 기단 역할을 하는 돌을 1단 깔고 그 위에 넓적한 면석을세웠다. 면석 사이에는 기둥 역할을 하는 탱석을 끼워 넣었는데, 각 탱석에는 방향에 따라 12지신상을 조각하였다. 무덤의 주위 네 모서리에는 각각 돌사자를 한 마리씩 배치하였고, 앞쪽의 왼쪽과 오른쪽에 문인석·무인석을 각 1쌍씩 배치하였다.
 
 
 
흥덕왕릉이 세인들의 관심을 끄는 또 다른 소재는 소나무 숲이다. 새벽 안개가 짙은 봄·가을에 멋진 풍경을제공한다. 전국에서 사진작가들이 안개에 뒤덮인 소나무를 촬영하기 위해 몰려든다. 빽빽이 들어선 소나무는 굽어지고 비틀어져 멋진 그림을 연출한다. 흥덕왕이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을 벌였기 때문이었을까,새벽에 보는 소나무는 섬뜩하다. 칼을 빼 들고 잠복하는 자객 같기도 하고 지옥문을 지키는 케로베로스 같기도 했다.
 
 
사진가 김배근은 15년째 사시사철 흥덕왕릉 소나무 숲을 촬영해 오고 있다. 그의 사진 한 장을 얻었다.여름 이른 아침에 햇살이 비치는 소나무숲이다. “흥덕왕릉의 소나무는 저마다 마음대로 굽어 있다. 안개가 짙은 새벽에는 제각기 다른 춤을 추는 듯한데 그게 매력이지만 한겨울에는 따뜻한 빛이 굽은 소나무를 파고들며 붉게 물들이는 광경도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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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ㅣ 승인 2020.08.27 ㅣ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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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경주 흥덕왕릉 - 대한민국구석구석
 
 
 
 ●경주흥덕왕릉(慶州興德王陵)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주 흥덕왕릉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흥덕왕릉 - 나무위키
 
 
 
 
 ●흥덕왕릉비(興德王陵碑)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흥덕왕[興德王수종(秀宗), 경휘(景暉)]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흥덕왕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신라왕릉(新羅王陵) - 다음백과
 
 
 
 ●신라왕릉 - 나무위키
 
 
 
●『삼국유사 오데세이』 Ⅲ - ▣흥덕왕릉
 
 
 
 ●[삼국유사 오디세이] 12. 흥덕왕릉
 
 
 
 ●경주 신라왕릉 둘러보기 興德王陵(흥덕왕릉)
 
 
 
 ●경주 산책 - 흥덕왕릉(동영상)
 
 
 ●신라 흥덕왕릉,경주 흥덕왕릉, 흥덕왕릉 소나무, 흥덕왕릉 솔숲, 흥덕왕릉 솔향을 찾아서..(동영상)
 
 
 ●소나무가 지키는 안식처 경주 흥덕왕릉(동영상)
 
 
 
 ●천년세월 넘어 하동 차나무 흥덕왕릉 안착 - 하동신문
 
 
 
 ●[금석문으로 만나는 경북의 역사 문화] 5. 통일신라의 명필 요극일이 쓴 흥덕왕릉비 - 경북일보
 
 
 
 ●[오색인문학] 소나무숲 둘러싼 왕릉엔 1,200년 된 茶 향기가··· - 서울경제
 
 
 
 ●하늘도 감동한 손순(孫順)의 효성 - 경주관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