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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 경주양동마을(慶州良洞마을) 건축유산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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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및산행

2021. 12. 2.









유네스코 세계유산 경주양동마을(慶州良洞마을) 건축유산 탐방

(2021/11/06 현재)


동해안 해파랑길 주변 해안가 도로를 따라 간성에서 울산까지 종단 여행
3일차로 먼저 월성 원자력 발전소 부지에 있는 신라 제4대 석탈해왕탄강유허와
신라 30대 경주 문무대왕릉, 이견대(利見臺),경주감은사지(慶州感恩寺址) ,
울산 장생포고래박물관(長生浦--博物館) ,처용암(處容岩),간절곶(艮絶串) 을
살펴 보고 경주쪽으로 올라 가면서 신라 제42대 경주흥덕왕릉(慶州興德王陵)
다음으로 방문한 유네스코 세계유산 경주양동마을(慶州良洞마을)
건축유산 탐방 전경 입니다

경주 양동마을(慶州 良洞마을)은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북쪽
설창산에 둘러싸여 있는 유서 깊은 양반 집성촌으로 1984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국가민속문화재 제189호로 지정되었고,

2010년 7월 31일 브라질 브라질리아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
제 34차 회의에서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201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협약 선포 40주년 기념 세계
최고의 모범 유산(The Best Model Case)로 선정되었다.

한국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되고 규모가 크며,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조선시대 양반 씨족마을로 문묘 종사와 종묘 배향을 동시에 이룬 재상이자
성리학자요 영남학파의 선구자가 되신 회재 이언적 선생을 배출한 6대 국반(國班)
여주이씨 (광산 김씨, 반남 박씨, 은진 송씨, 덕수 이씨, 진보 이씨가 6대 국반)와

이조판서와 우참찬을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된 우재 손중돈 선생을 배출한
명문 도반(道班) 경주손씨 양성이 서로 협동하고 경쟁하며 600여년의 역사를
이어왔다. 영남 남인의 구심점 역할을 하면서 문과 31명 포함 과거 급제자가
총 116명에 달했으며, 이밖에도 수많은 학자와 충절대의 명장, 독립운동가를
배출하면서 그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경주 양동마을(慶州良洞마을)


▶양동마을 소개


양동마을은 1984년 12월 20일 마을 전체가 국가지정문화재(중요민속자료 제189호)로 지정되었다. 경주시 북쪽 설창산에 둘러싸여 있는 경주손씨와 여강이씨 종가가 500여년 동안 전통을 잇는 유서 깊은 반촌 마을이다.


전통 민속마을 중 가장 큰 규모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반촌으로 특이하게 손(孫), 이(李) 양성이 서로 협조하며 500여년의 역사를 이어온 전통문화 보존 및 볼거리,역사적인 내용 등에서 가장 가치가 있는 마을이다.

전국에 8개소의 전통민속마을이 있으나, 마을의 규모, 보존상태, 문화재의 수와 전통성,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때묻지 않은 향토성 등에서 어느 곳보다 훌륭하고 볼거리가 많아 1992년 영국의 찰스 황태자도 이 곳을 방문했다.


한국 최대 규모의 대표적 조선시대 동성취락으로 수많은 조선시대의 상류주택을 포함하여 500년이 넘는 고색창연한 54호의 고와가(古瓦家)와 이를 에워싸고 있는 고즈넉한 110여 호의 초가로 이루어져 있다. 양반가옥은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낮은 지대에는 하인들의 주택이 양반가옥을 에워싸고 있다.


경주손씨와 여강이씨의 양 가문에 의해 형성된 토성마을로 우재 손중돈선생, 회재 이언적선생을 비롯하여 명공(名公)과 석학을 많이 배출하였다.


마을은 경주시에서 동북방으로 20km쯤 떨어져 있으며, 마을의 뒷배경이자 주산인 설창산의 문장봉에서 산등성이가 뻗어내려 네줄기로 갈라진 등선과 골짜기가 물(勿)자형의 지세를 이루고 있다. 내곡, 물봉골, 거림 하촌의 4골짜기와 물봉 동산과 수졸당 뒷동산의 두 산등성이, 그리고 물봉골을 넘어 갈구덕으로 마을이 구성되어 있다.


아름다운 자연 환경 속에 수백년 된 기와집과 나지막한 토담으로 이어지며, 통감속편(국보 283), 무첨당(보물 411), 향단(보물, 412), 관가정(보물 442), 손소영정(보물 1216), 협주명현 십초시(보물 1926호)를 비롯하여 서백당(중요민속자료 23) 등 중요민속자료 12점과, 손소선생 분재기(경북유형문화재 14) 등 도지정문화재 7점이 있다.


와가와 초가 등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지며 전통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또한 아름다운 풍경과 낮은 토담길 사이를 걸으며 긴 역사의 향기를 넉넉하게 감상할 수 있다. 유교 전통문화와 관습 등을 체험할 수 있는 교육프로그램이 있어 아름다운 우리 예절과 전통문화를 직접 체험할 수 있다.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경주손씨 대종가가 5백년 동안 종통을 잇는 유서 깊은 민속 마을로 고색창연한 고옥마다 역사의 향기가 배어 있다. 대향조는 손소이다. 원래 양동리는 풍덕류씨가 살던 곳이었다. 손소가 25세때 류씨 집안의 복하란 분의 딸과 결혼했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이 부락에 터를 잡게 되었다.


큰 아들은 백돈. 그러나 그에게는 후사가 없어 둘째 아들 중돈이 종통을 이었다. 그가 바로 조선 명현의 한 분으로 청백리에 오른 愚齊선생이다. 이로써 경주손씨는 양동에 토착기반을 견고하게 다질 수 있었다. 여기에 우재선생의 여동생 손씨부인이 여주이씨 이번과 결혼 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중 장남이 동방오현의 한분인 문원공 회재 이언적선생이다.


이래서 양동은 경주손씨와 여강이씨의 전통적인 토성마을이 됐다. 대종가는 마을 동쪽 산등성이에 지붕을 드리우고 있다. 조선조 5백년 동안의 영화를 말해주는 듯 우뚝 선 가옥이다.


▶이언적[李彦迪] 1491(성종 22)∼1553(명종 8)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性理學者)로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 자계옹(紫溪翁). 관향은 여강(驪江). 성종 22년 경주 양좌촌(慶州 良佐村)에서 태어났다. 생원(生員) 번(蕃)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경주손씨(慶州孫氏)로 계천군(鷄川君) 소(昭)의 딸이다.

연산(燕山) 8년에 구사재(舅四宰) 손중돈(孫仲暾)에게 취학(就學)하여 성리학을 익히고 늘 산사( 山寺)에 거처하면서 독서(讀書)에 열중(熱中)하였다.


중종(中宗) 9년(1514) 문과에 급제, 천관랑(天官郞)을 비롯한 인동현감(仁同 縣監)·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밀양부사( 密陽府使) 등을 거쳐 동 25년(1530) 사간(司諫)에 이르렀다.


당시 김안로(金安老)의 거용(擧用)에 극력 반대하다가 심언광(沈彦光) 등의 모략(謀略)으로 물러났다. 동 32년 김안로(金安老) 일파가 쫓겨난 뒤 종부시 첨정(宗簿寺僉正)과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하였다. 전주부윤(全州府尹)으로 있을 때 선정(善政)을 베풀어 명성(名聲)이 자자(藉藉)하였다.


수천언(數千言)의 상소(上疏)를 올려 국가 대본(國家大本)과 정치 강령(政治綱領)을 논하여 왕의 찬탄을 받고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특가(特加)되어 예조참판(禮曹參判)과 우참찬(右參贊)을 역임하고 인종(仁宗) 1년(1545) 의정부 좌찬성(議政府 左贊成)이 되었다.


이듬 해 권신(權臣) 윤원형(尹元衡)의 미움을 사서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壁書事件)으로 모함(謀陷)하여 강계(江界)에 천적(遷謫)되었다. 적소(謫所)에서 그의 절필(絶筆)인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29권을 집필중(執筆中) 완성하지 못하고 63세를 일기로써 타계(他界)하였는데,


1568년 선조 즉위시(宣祖 卽位時) 시임(時任) 좌의정 이명(左議政 李蓂)의 초계 주청(初啓奏請)으로 신원 복권(伸寃 復權)되어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追贈)되고 다음 해 문원(文元)이라 증시(贈諡)되었다.


선조 6년, 경주 옥산서원(玉山書院)에 제향되고, 광해군(光海君) 2년(1610) 문묘(文廟)에 종향(從享)되었다. 그의 주리(主理) 학설은 퇴계(退溪)의 사상에 영향을 주었으며,28세 때에 선배학자(先輩學者)인 손숙동(孫叔暾)과 망기당(忘機堂) 조한보(曺漢輔)와의 수삼차(數三次)에 걸친 무극(無極)·태극(太極)에 관하여 벌린 논쟁(論爭)에 뛰어 든 것은 조선 초유(初有)의 대논쟁(大論爭)이라 한다.


후에 율곡(栗谷)은 선생을 한훤당(寒暄堂)· 일두(一두)· 정암(靜庵)과 함께 동방사현(東方 四賢)으로 추모(追慕)하였다.

저서로서는 봉선잡의(奉先雜儀)·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진수팔규(進修八規)·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속 대학혹문(續 大學或問) 등이 있다.



▶대표가옥


◈서백당(書百堂)-중요민속자료 제23호


안골 중심의 산중턱에 자리잡은 규모와 격식을 갖춘 대가옥으로 양민공(襄敏公) 손소(孫昭, 1433~1484)공이 성종 15년(1454년)에 지은 월성(月城) 손씨(孫氏)의 종가이다.  서백당(書百堂) 또는 송첨이라 부르며, 서백당(書百堂)은 하루에 참을 인(認)자를 백번 쓴다는 뜻이며 근래에 와서 굳어진 당호(堂號)이다. 一자형의 행랑채와 ㅁ 자형의 몸체가 전후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행랑채는 정면 8칸 측면 1칸으로서 오른쪽 단에 광을 두고 바로 그 옆에 대문간이 자리잡고 있다.


◈무첨당(無?堂)-보물 제411호


회재 이언적 선생의 부친인 성균생원 이번(李蕃)공이 살던 집으로 1460년경에 지은 여강 이씨(驪江 李氏)의 종가로써, 별당의 기능을 중요시한 간결하고 세련된 솜씨의 주택이다. 무첨당(無?堂) 해 은 이언적 선생의 다섯 손자 중 맏손자인 이의윤(李宜潤)공의 호이며 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한다는 뜻이다. 오른쪽 벽에는 대원군이 집권 전에 이곳을 방문해 썼다는 죽필(竹筆)인 좌해금서(左海琴書)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영남(左海)의 풍류(琴)와 학문(書)’이라는 뜻이다.  물봉골 남향받이 언덕에 자리한 여강 이씨들의 대종가를 구성하고 있는 안채, 별당채, 사당채 중에서 별당건물이 무첨당이다.


◈향단(香壇)-보물 제412호


낮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는 이 집은 興字型으로 지은 건물로 앞쪽에 세워진 향나무 한 그루가 상징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데 외견상으로 보아 무척이나 화려하고 과시적이다. 특히 마당을 앞에 둔 사랑채는 두 개의 나란한 지붕을 연결하여 풍판을 정면으로 향하도록 한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다.  一자형 평면구조로 몸채를 사이에 두고 좌측에 안채, 우측에 사랑채를 두고 행랑채도 일자형 몸채와 거의 연접해 있어 거의 한 동(棟)처럼 보이는 집약된 평면을 이루고 있다. 또 안마당도 극히 폐쇠적으로 안채의 부엌의 아래층은 헛간모양으로 흙바닥이고 위층은 마루를 놓았으며 벽채 대신 가는 살대들을 수직으로 촘촘히 세워 일반주택들과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다.


◈관가정(觀稼亭)-보물 제442호


관가정(觀稼亭)이란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보듯이 자손들이 커가는 모습을 본다는 뜻 마을 입구 좌측의 언덕에 동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본 주택은 청백리이자 조선 성종(1469-1494)으로부터 중종(1506-1544)조에 걸친 명신 우재(愚齎) 손중돈(孫仲暾 1463-1529)선생이 손소 공으로부터 분가하여 살던 집이나, 현재는 사람이 살지 않고 비어 있다. 격식을 갖추어 간결하게 지은 우수한 주택건축으로 한 눈에 들어오는 형산강과 경주를 품어 안는 경관이 일품이다. 관가정(觀稼亭)이란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보듯이 자손들이 커가는 모습을 본다는 뜻이다. 특히 아래쪽에 배치된 하인들의 거처인 가립집(초가)4~5채가 잘 보존되고 있는 모습을 볼수 있는데, 지금은 손씨 후손들이 살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의 가치


양동마을은 한국인 지배계급 양반의 삶의 공간의 원형과 정신유산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것을 높이 평가받았다.

첫째, 양동마을은 한국의 씨족마을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조선 전기 씨족마을 형성기의 전형 중 하나인 처가입향 유형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둘째, 양동마을은 전통적인 풍수의 원칙을 잘 지키고 있으며, 한국 씨족마을 입지의 전형 중 하나인 산기슭 입지의 대표적이고 우수한 사례이다.


셋째, 양동마을은 생산영역, 생활영역, 의식영역으로 구성되는 한국 씨족마을의 전통적인 공간구성을 기능적이고 경관적으로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는 매우 드문 사례이다.


넷째, 양동마을은 조선시대의 가장 시기가 이르고 뛰어난 살림집, 정사, 정자, 서원 등의 건축물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는 유일한 사례이다.


다섯째, 양동마을은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학술적, 문화적 성과물인 고문헌과 예술작품을 보관하고, 전통적인 가정의례와 특징적인 무형의 마을 행사를 오늘날까지 유지하고 있는 가장 훌륭한 사례이다. [1]



▶지리 및 환경



경주시 시내에서 동북방으로 20km쯤 떨어져 있다. 이 마을은 씨족마을의 대표적 사례인데, 씨족마을은 성씨를 매개로 하는 부계의 혈연집단이 대를 이어 한 곳에 정착해 이뤄진 정주 형태다. 조선 전기 이후 재산과 제사의 장자 상속이 강화되면서 나타나게 된다. 하나 혹은 두 성씨의 양반이 마을주민의 다수를 차지하면서 의사결정의 주도권을 가지는데 벼농사를 경제적 기반으로 삼는다. 양동마을은 조선 전기 씨족마을 형성기의 한 가지 전형, 즉 혼인으로 처가에 들어와 살면서 자리를 잡는 처가입향의 경우다.

양동마을은 풍수의 길지에 입지했다.


마을의 뒷배경이자 주산인 설창산의 문장봉에서 산등성이가 뻗어 내려 네줄기로 갈라진 능선과 골짜기가 여럿 나란히 있는 ‘勿(물)’자 형의 형국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 마을은 조선시대 유명한 지리지인 택리지에서 길지로 언급됐으며 조선의 풍수에서‘삼남의 사대길지’에 포함됐다. 이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많은데 일예로 勿자의 아랫부분에 획 하나를 더하면 血자가 된다하여 일제가 계획한 마을 안으로의 철도통과를 우회시켰고, 남향의 양동초등학교 건물을 동향으로 돌려 앉혔다.


내곡, 물봉골, 거림 하촌의 4골짜기와 물봉 동산과 수졸당 뒷동산의 두 산등성이, 그리고 물봉골을 넘어 갈구덕으로 마을이 구성되어 있다.마을의 진입로 쪽은 경사가 급한 산에 시선이 차단되고, 골짜기 밖에서는 마을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아 마을 입구에서는 그 규모를 짐작하기가 어렵고, 고가들도 접근해야만 볼 수 있다.


양동마을의 가옥과 건물들은 이와 같은 지형에 잘 조화돼 자연과 일체화된 경관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지형의 경사에 기대어 집의 자리를 잡고, 집에서 바라보이는 조망점을 풍수의 원칙에 따라 조정한 결과이다. 아름답고 매력적인 자연환경과 집들이 잘 조화를 이루어 정감어린 모습으로 다가오고, 숲속의 산새소리에 젖어드는 안온한 분위기가 양동마을의 큰 특징이다.



▶형성사


양동마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 정확한 문헌기록은 없다. 그러나 한편 청동기 시대 묘제의 하나인 석관묘가 마을의 안산인 성주산 정상 구릉지의 100여기가 정도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으나 고고학자들의 보고로 보아 기원전 4세기부터 사람의 거주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또 이웃 마을 안계리에 고분군(古墳群)이 있었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이미 삼국시대인 4~5세기경에 상당한 세력을 가진 족장급에 속하는 유력자가 살았던 것으로 추측되고 또 일본인 역사 학자인 善生助永氏의 자료와 1970년 문화재관리국에 의한 안계리 고분군(安溪里古墳群) 발굴 자료에 의하면 현재 마을의 주민생활은 신라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고려에서 조선초기에 이르기까지는 오씨(吳氏). 아산 장씨(牙山 蔣氏)가 작은 마을을 이루었다고 하나 확인할 만한 자료는 없다.


경북 지방 고문서집성(영남대 발간)에 의하면 여강 이씨(驪江 또는 驪州 李氏)인 이광호(李光浩)가 이 마을에 거주하였으며, 그의 손서(孫壻)가 된 풍덕 류씨(豊德 柳氏) 류복하(柳復河)가 처가에 들어와 살았고, 이어서 양민공(襄敏公) 손소공이 540여년 전 류복하의 무남독녀와 결혼한 후 청송 안덕에서 처가인 양동으로 이주하여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아 이곳에서 살게 되었고, 후에 공신이 되어 고관의 반열에 올랐다.


또, 이광호의 재종증손(再從曾孫)으로 성종의 총애를 받던 성균생원 찬성공(贊成公) 이번(李蕃)이 손소의 7남매 가운데 장녀와 결혼하여 영일(迎日)에서 이곳으로 옮겨와서 살고 이들의 맏아들이자 동방5현의 한 분인 문원공 회재 이언적(文元公 晦齋 李彦迪 1491-1553)선생이 배출되면서 손씨, 이씨 두 씨족에 의해 오늘과 같은 양동마을이 형성되었다.


양동민속마을이 외손마을이라 불리는 것도 이러한 연유이며 조선초기까지만 해도 실제 남자가 처가를 따라 가서 사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 풍덕 류씨의 후손은 절손되어 외손인 손씨 문중에서 제향을 받들고 있다고 한다.



▶학문과 인물



양동의 전통문화 중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바로 학문과 교육의 전통으로 오늘날까지 수많은 인물을 배출해 왔다는 점이다.

양동마을의 입향 초기 선조들은 국가와 유림에서 인정하는 불천위로 추대되었기 때문에 마을의 씨족적 결속이 강화, 현대까지 그 맥을 이어올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 영남지방을 순찰하거나 여행하는 선비들에게 이 마을은 주요 방문지 중 하나였다. 흥선대원군도 이 마을을 방문하였다.


조선 중기부터 조선사회와 중앙정계를 지배한 사림들 중에서 매우 앞선 시기인 세조5년(1459년)에 이 마을의 손소공이 문과에 급제하고 중앙정치 무대에 진출하여 이시애의 난을 진압할 때 공을 세워 공신이 되고, 이어서 그의 둘째 아들인 손중돈 선생이 성종 20년(148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판서, 우참찬 등 40여년 동안 요직을 두루 거치고 청백리에 올랐다.


대유학자이자 경세가인 문원공 회재 이언적 선생은 성리학의 이기철학을 이황에 앞서 최초로 이론적 체계를 세우고 조선조 성리학의 기초를 다짐으로서 영남학파의 창시자가 되어 이황에게 영향을 주는 등 해동부자라 불리어 지고 동방5현의 한분으로 추앙을 받으면서 문묘와 종묘에 종사되어 공자와 역대 임금의 위패와 함께 모셔지는 영광을 누렸다. 전국의 향교와 20여 개소의 서원에 배향이되기도 했다.


손씨, 이씨를 합쳐서 문과 26명, 무과 14명, 사마 76명으로 과거 급제자가 총116명이나 되고, 음직은 부지기수였을 정도로 많은 인물이 배출됨으로써 전국에서 가장 이름난 양반마을로 알려지게 되었다.



▶건축유산


마을 전체 구성은 ‘농경지-거주지-유보지’로 나타난다. 농경지는 생산공간, 거주지는 생활공간, 유보지는 의식공간이 된다. 경작지와 생활지를 나누는 마을 입구에는 대개 외부세계로부터의 시각적 차폐를 위한 인공의 조림과 지형적 장치가 마련된다. 양동마을은 격식이 높은 살림집, 사당, 정자, 정사, 서원, 서당 등 역사적인 건축물들을 전국에서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


마을 내의 노거수는 600여년의 오랜 역사를 증명해준다. 입향기인 15~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건축물들이 남아있다. 17세기 이후 국가에서 편찬한 지리지나 지도에 두 마을의 이름과 옥산서원 등이 기재된 사실에서 당대에도 이미 이 두 마을이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마을의 종가인 서백당은 15세기에 건립됐다. 이 종가는 한국 주거건축 역사상 가장 오래된 예에 속한다. 마을 내의 다른 건축물들도 17세기 이후에 지어진 것들로 수백 년에 걸친 마을의 역사를 잘 보여주고 있다. 양동마을에서 보물로 지정된 가옥은 4건(향단, 관가정, 무첨당, 독락당)이다. 민속자료로 지정된 건축물은 은 12건이다. 유교건축 중에서 옥산서원은 각각 사적으로 지정돼 있다.



 ●경주양동마을(慶州良洞─ ,양동민속마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문화재 지정 중요민속문화재 제189호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중요민속자료 제189호. 이 마을은 조선시대 초기에 입향(入鄕)한 이래 지금까지 대대로 살아온 월성손씨(月城孫氏)와 여강이씨(驪江李氏)가 양대문벌을 이루어 그들의 동족집단마을로 계승하여 왔다.


먼저 입향한 손씨는 이씨의 외가로서, 손·이 양씨는 지금까지도 상호통혼을 통하여 인척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마을의 대소사에 협동해오고 있는데, 이따금 갈등과 분쟁을 야기시키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마을은 경주시내에서 동북방으로 16㎞쯤 떨어져 있으며 넓은 평야에 임한 거꾸로 勿자형 산곡이 경주에서 흘러드는 형산강을 서남방 역수(逆水)로 안은 지형이다. 이 역수 지형이 마을의 끊임없는 부의 원천이라 믿어지고 있다.


마을의 서편에는 실제로 부의 상징인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고 그 대부분의 지주가 과거에는 손·이 양씨였으므로 ‘역수의 부’는 관념이 아닌 현실이었던 것이다.


이 마을 앞을 흐르는 형산강(兄山江)은 옛날에는 수량도 많고 바닥도 깊어서 포항 쪽의 고깃배들이 일상 내왕하였기 때문에 해산물의 공급이 불편 없이 이루어졌었다고 한다. 지금은 수량도 줄고 바닥도 높아져서 어선의 내왕이 불가능하다.

마을의 형성과정에 대하여 전승되어 온 이야기에 의하면 양동은 역대로 ‘외손이 마을’이라 불렸다고 한다. 즉, 고려시대에는 오태사(吳太師)에서 장태사(蔣太師)로, 조선시대에는 유복하(柳復河)에서 손소(孫昭)로, 다시 이번(李蕃)으로 계속해서 외손 쪽으로 계승되어 왔다고 한다.


일설에는 신라시대에 아산장씨(牙山蔣氏)가 처음 이 마을에 들어와 5, 6호의 작은 마을을 형성하였고, 그 때부터 양좌촌(良佐村)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근거가 분명한 입향조는 손소인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손소는 1459년(세조 5) 문과에 급제하였고, 1467년 함경도 길주이시애(李施愛)의 난 평정에 공을 세워 공신이 되었다.


뒤에 안동부사와 진주목사를 지냈으며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에 장인인 유복하의 상속자로 이 마을에 들어와 지금의 월성 손씨 종가를 지었다고 전한다. 현재 풍덕 유씨의 후손은 절손되어 외손인 손씨 문중에서 제향을 받들고 있다.

한편, 손소의 딸은 여강 이씨번에게 출가하여 두 아들을 두었으며, 그 맏이가 동국18현(東國十八賢)의 한 사람으로 문묘에 배향되고 있는 이언적(李彦迪)이다. 그는 외가인 손씨 대종가에서 출생하였다고 하며, 10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외삼촌인 손중돈(孫仲暾)에게 훈도를 받았다고 한다.


이언적은 양산·김해·상주 등 외삼촌의 임지로 따라다니면서 수학을 하였으며 24세에는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러한 이언적의 수학과정을 두고 ‘학문연원수수설(學門淵源授受說)’을 낳게 하였다.


“우재(愚齋)의 학문이 회재(晦齋)에게 전수되었다.”고 하는 손씨 측의 주장과 아니라고 부정하는 이씨 측의 상반된 주장이 두 가문 사이에 있어 온 갈등의 원천이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대립관계는 마을내의 몇 개의 정자나 일반 살림집의 배치에서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이 마을의 집들은 ㅁ자형이 기본형으로, 거꾸로 勿자형으로 뻗은 구릉의 능선이나 중허리에 배열되어 있다. 그 배치가 듬성하고 능선마다 우거진 숲이 있어 접근해야만 모습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1979년의 보고서에는 대종가일수록 높은 곳에 위치하고 그 아래로는 직계 또는 방계손들의 집자리가 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 마을의 가옥 중에서 보물로 지정된 가옥은 보물 제411호인 무첨당(16세기 창건)과 보물 제442호인 관가정(16세기 창건), 보물 제412호인 향단(16세기 창건)이 있다.


중요민속자료로는 월성손동만씨가옥(15세기 창건, 제23호), 양동낙선당(1540년경 창건, 제73호), 양동이원봉가옥(1840년경 창건, 제74호), 양동 이원용가옥(1730년경 창건, 제75호), 양동이동기가옥(1780년경 창건, 제76호), 양동이희태가옥(1730년경 창건, 제77호), 양동수졸당(1616년경 창건, 제78호), 양동이향정(1695년 창건, 제79호), 양동수운정(1582년 창건, 제80호), 양동심수정 (1560년경 창건, 제81호), 양동안락정(1780년 창건, 제82호), 양동강학당(1870년경 창건, 제83호) 등이 지정되어 있다.

이들 외에도 200여 년 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가옥들이 약 15채 가량 있다. 이 집들은 대부분 ㅁ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는데 정자는 ㄱ자형, 서당은 一자형을 보이고 있다.


주택의 건축규모는 대략 50평 내외이고 방은 10개 내외이다. 대지 안에 사당을 모신 대종가와 파종가는 4가구이다. 이들 대규모 주택들에는 원래 한 집안에 데리고 있는 노비들의 주거처인 행랑채와 외거노비들이 사는 초가인 ‘가랍집’을 3, 4채씩 거느리고 있었다.


광복 때까지만 하여도 가랍집이 40여 호가 있었으나 지금은 대부분 철거되어 텃밭으로 변하였고, 이따금 잔존하는 초가는 이미 거주자가 바뀌었으므로 과거의 상대적 신분관계는 해소된 셈이다. 이 마을 각 종손·파손들의 정자는 여름 동안 일곱 번의 놀이를 행하여온 특색이 있다.


정자는 5월 그믐에 개장되고 보신탕 등 음식과 시창으로 양로·위안의 예를 갖추었다고 한다. 절후로 보면 유두·초복·중복·말복·칠석·입추·처서 등이다. 지금 친족간의 협동과 유대는 주민들의 빈번한 도시 진출 때문에 점차 감소되는 상황이다.

상조계는 손·이 타성바지 등 문중이나 파손별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 협동의 비중은 상례·혼례·제례·회갑·생신·돌·백일 등의 순으로 나타내고 있다. 손·이 양씨의 계조직은 인근 경주·포항·대구 뿐 아니라 부산·서울 등 전국적으로 조직을 갖추고 있어 동족간의 단합을 유지하고 있다.


1819년 《양좌동초안 良佐洞草案》에 기록된 양동의 호수는 91호였으나 1973년에는 165호, 1979년에는 151호로 증가와 완만한 감소를 보여왔다.


손·이 양씨의 호구관계는 1973년에는 손씨 28호, 이씨 88호, 1979년에는 손씨 16호, 이씨 80호로 이씨들의 호수가 많다. 그러나 인근의 강동면과 경주시 전체를 본다면 손씨 후손들이 더 많다고 한다. 현재 월성 손씨의 종손인 손동만(孫東滿)은 손소의 19대손이고, 여강 이씨의 종손인 이인식은 이언적의 15대손이다.


이 마을은 아직도 유색(儒色)이 짙은 것이 하나의 특색이다. 과거 마을 전승으로서도 동제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 세시행사로도 삼복 후의 머슴놀이인 호미씻이와 2, 3년에 한번씩 행하여지던 정월보름, 추석 전후의 줄다리기 등이 고작이었던 것도 하나의 특색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경주 양동마을 -대한민국 구석구석 


-위치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길 93 (강동면) 

-문화재 지정 중요민속문화재 제189호(1984년 12월 24일 지정),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2010년 7월 31일 지정) 


양동 민속마을은 조선시대 전통문화와 자연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한국 최대 규모의 마을로, 월성 손 씨와 여강 이 씨에 의해 형성되었다. 국보, 보물, 민속자료 등 많은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어 마을 전체가 문화재(중요민속자료 제189호)로 지정되었는데, 마을의 규모 및 보존상태, 문화재의 수와 전통성,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때 묻지 않은 향토성 등 볼거리가 많아 1993년 영국의 찰스황태자도 이곳을 방문한 바 있다.


양동마을의 자연환경을 살펴보면 마을의 뒷배경이자 주산인 설창산의 문장봉에서 산등성이가 뻗어 내려 네줄기로 갈라진 능선과 골짜기가 물(勿)자형의 지세를 이루고 있는데, 이런 골짜기와 능선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을 포함하여 500여년의 전통의 향기를 품은 총 160여호의 고가옥과 초가집들이 우거진 숲과 함께 펼쳐져 있다. 또한 옛 명문대가의 영광스러운 자취와 선조들의 삶이 배어있는 200년 이상된 고가 54호가 보존되어 있어 조선 중기 이후의 다양하고 특색있는 우리나라 전통가옥 구조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사전에 마을의 배치와 답사 코스를 파악하고 문화재의 소재를 확인한 후 답사하는 것이 좋다. 단, 마을을 둘러볼 때는 집안에 살고 있는 분들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배려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2010년 7월 31일 안동 하회마을과 경주 양동마을이 '한국의 역사마을'로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두 마을의 등재로 한국의 세계유산은 석굴암ㆍ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 종묘(이상 1995), 창덕궁, 수원 화성(1997), 경주역사유적지구, 고창ㆍ화순ㆍ강화 고인돌 유적(이상 2000), 그리고 제주 화산섬과 용암 동굴(2007), 조선왕릉(2009)에 이어 통산 10번째 세계유산을 보유하게 됐다.


* 양동마을의 문화재


1) 국보 1점 - 통감속편 (通鑑續編, 283호)


2) 보물 4점 - 무첨당 (無添當, 411호), 향단(香壇, 412호), 관가정 (觀稼亭, 442호), 손소영정(孫昭影幀, 1216호)


3) 중요민속자료 12점 - 서백당 (書百當, 23호), 낙선당 (樂善當, 73호),사호당 (沙湖當, 74호), 상춘헌 (賞春軒, 75호),근암고택 (謹庵古宅, 76호), 두곡고택 (杜谷古宅, 77호),수졸당 (守拙當, 78호), 이향정 (二香亭, 79호), 수운정 (水雲亭, 80호), 심수정 (心水亭, 81호),안락정 (安樂亭, 82호), 강학당 (講學堂, 83호)


4) 경상북도 지정문화재 7점


* 유형문화재 - 적개공신논상록권 (敵愾功臣論賞錄券, 13호)손소선생분재기 (孫昭先生分財記, 14호)
* 기념물 - 양동의 향나무 (8호)
* 민속자료 - 대성헌 (對聖軒, 34호)
* 문화재자료 - 손종로정충비각 (孫宗老旌忠碑閣, 261호)
* 향토문화재 - 경산서당 (景山書堂), 두곡영당 (杜谷影堂)



※경주 양동마을 홈페이지

http://yangdong.invil.org/index.html




<참고>

●경북 경주 양동마을 - 홈페이지



●경주 양동마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경주양동마을(慶州良洞─)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양동마을 - 다음백과



●경주 양동마을 송첨 종택[慶州良洞─松簷宗宅,월성손동만씨가옥(月城孫東滿氏家屋), 송첨(松詹), 서백당(書百堂)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주 양동마을 - 대한민국구석구석



●경주 양동 관가정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경주 양동 향단(慶州良洞香壇)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주 양동 무첨당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