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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 경주 토함산(吐含山) 석굴암石窟庵)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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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및산행

2021. 12. 2.









유네스코 세계유산 경주 토함산(吐含山) 석굴암石窟庵) 탐방

(2021/11/07 현재)


동해안 해파랑길 주변 해안가 도로를 따라 간성에서 울산까지 종단 여행
4일차로 유네스코 세계유산 경주 토함산(吐含山) 석굴암石窟庵) 탐방
전경 입니다.

경주석굴암 석굴(慶州 石窟庵 石窟)은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의 토함산
중턱(진현동 891)에 있는 석굴(石窟)로서 국보 24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석굴암은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록되었다.

신라 경덕왕 10년(751년), 당시 51세였던 김대성이 만들기 시작했고 20여년 후
혜공왕 10년(774)에 완성되었다. 신라의 건축과 조형미술이 반영되어 있다.
석굴암의 원래 이름은 '석불사(石佛寺)'였으나, '석굴', '조가절' 등의 이름을
거쳐 일제강점기 이후로 석굴암으로 불리고 있다.

경덕왕은 신라 중기의 임금으로 그의 재위기간(742∼765) 동안 신라의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이루게 되는데, 석굴암 외에도 불국사, 다보탑, 석가탑,
황룡사종 등 많은 문화재들이 이때 만들어졌다.

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조각했으나
지금은 38구만이 남아있다.

석굴암 석굴의 구조는 입구인 직사각형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이 복도 역할을 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360여 개의
넙적한 돌로 원형 주실의 천장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이다.

석굴암 석굴의 입구에 해당하는 전실에는 좌우로 4구(軀)씩 팔부신장상을
두고 있고, 통로 좌우 입구에는 금강역사상을 조각하였으며, 좁은 통로에는
좌우로 2구씩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원형의 주실 입구에는 좌우로 8각의 돌기둥을 세우고, 주실 안에는
본존불이 중심에서 약간 뒤쪽에 안치되어 있다.

주실의 벽면에는 입구에서부터 천부상 2구, 보살상 2구, 나한상 10구가
채워지고, 본존불 뒷면 둥근 벽에는 석굴 안에서 가장 정교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서 있다.

《삼국유사》에 김대성이 현생의 부모를 위한 불국사와 함께 전생의
부모를 위한 석불사를 세웠다 하며, 일제강점기, 1912년부터 1915년까지
3년간 걸쳐 일제에 의한 대규모 보수공사가 있었으며, 해방 이후 혼란한
사회 속에서 방치되어 오다가1961년부터 1963년까지 2년간
문화재관리국의 주도로 보수공사가 진행되었다




■석굴암-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경상북도 군위군에 있는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제2석굴암),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동에 있는 보문사 석굴암도 있다.

경주 석굴암 석굴(慶州 石窟庵 石窟)은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의 토함산 중턱(진현동 891)에 있는 석굴(石窟)로서 국보 24호로 지정되어 있다.[1] 신라 경덕왕 10년(751년), 당시 51세였던 김대성이 만들기 시작했고 20여년 후 완성되었다. 신라의 건축과 조형미술이 반영되어 있다. 석굴암의 원래 이름은 '석불사(石佛寺)'였으나, '석굴', '조가절' 등의 이름을 거쳐 일제강점기 이후로 석굴암으로 불리고 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석굴이며, 1913년 이후로 일제가 수차례 해체·조립·수리하기 전까지는 원형을 유지하였다. 현재는 부실 복원에 따른 습도 문제로 유리벽으로 막아 보존되고 있다.


석굴암은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적인 가치와 독특한 건축미를 인정받아 불국사와 함께 1995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역사



《삼국유사》에 김대성이 현생의 부모를 위한 불국사와 함께 전생의 부모를 위한 석불사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서[2] 불국사와 가까운 위치에 있는 점을 참작하여 석불사가 현재의 석굴암으로 여겨지고 있다. 석불사에는 신림(神琳)·표훈(表訓)의 두 성사(聖師)를 각각 청하여 거주하게 하였다 한다.


그 뒤로는 기록에 등장하지 않다가 조선 중기 이후로 중수하거나 방문한 기록이 남아 있고, 정선은 그림을 남기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때의 보수공사


일제강점기, 1912년부터 1915년까지 3년간 걸쳐 일제에 의한 대규모 보수공사가 있었다. 첫 번째 수복때 석굴암은 붕괴 직전의 상태였다. 천장이 새서 불상에 직접 비를 맞고, 주변의 불상의 배치도 불분명했으며 전체의 반이상이 돌과 흙에 파묻혀 있었고 그 틈새마다 잡초와 넝쿨, 이끼가 덮여 있었다.



최초의 보수 후에 비가 새는 것이 발견됐고, 그 후의 보수에 콘크리트가 사용되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의 복원공사는 석굴암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고 건축원리에 대한 이해가 없는 채로 콘크리트를 덮어버렸기 때문에 외면상 수리는 되었지만, 석굴암을 복원불가능한 형태로 파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본존불 아래, 석굴내 지하수가 모여 밖으로 배출되는 수로장치는 일본에는 없는 독특한 장치로, 일본인들이 이것을 막아버렸기 때문에 지하수로 차가워진 돌에 수분이 맺히는 현상이 발생했다.


▶해방 이후 보수공사

해방 이후 혼란한 사회 속에서 방치되어 오다가 석굴암은 말라붙은 새똥과 이끼, 곰팡이가 피고 말았다. 1961년부터 1963년까지 2년간 문화재관리국의 주도로 보수공사가 진행되었다. 일제가 바른 시멘트로 인해 습도와 온도 유지가 어려워지고, 내부에 맺힌 물이 시멘트를 녹여 결과적으로 화강암으로 된 조각상들을 침식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기존의 시멘트 구조물 위에 약간의 공간을 두고 그 위에 돔을 덮었다.



그리고 이때 외부 습기를 차단하기 위해 유리로 봉인하고, 습기제거장치를 설치했다. 하지만, 이렇게 밀폐된 공간 속에 관람객들이 배출한 이산화탄소와 이물질이 갇혀 화강암을 손상시키는 점이 지적되었다.


1961년부터 1963년까지 목조에 기와를 덮은 전실이 설치되었다. 이것이 석굴암의 통풍을 막는 요소라고 지적되고 있다. 그래도 문제점이 해결되지 않자 1966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기계공학과 김효경 교수는 석굴암 우측에 환풍기를 설치했다.


1970년부터 또 다시 앞지붕을 짓고 입구에 유리로 설치해 실내의 습도가 항상 조절되고 있지만, 일반인은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매년 석가탄신일에만 석굴암 내부까지 공개된다.

▶구조



방형 전실(前室)을 지나 통로를 지나면 원형 굴이 나타난다. 천장은 돔형으로 밖에서 보면 그 위에 흙을 덮은 모양이다. 너비는 좌우 약 6.7미터, 전후 약 6.6미터, 입구의 넓이 3.35미터로, 치밀한 건축적 계산 하에 설계되어 만들어졌다.

▶본존불



석굴암 본존불인 석가여래좌상(釋迦如來坐像)은 흰 화강석에 조각한 것으로, 높이 약 3.4미터의 거대한 불상이다. 석굴 중앙의 연화좌(蓮花座) 위에 부좌(趺坐)하였고, 수법이 정교하며 장중웅려(莊重雄麗)한 기상이 넘치는 매우 보기 드문 걸작이다.


얼굴과 어깨를 드러낸 옷의 주름에 생동감이 있어 불상 전체에 생명감이 넘친다. 깊은 명상에 잠긴 듯 가늘게 뜬 눈과, 엷은 미소를 띤 붉은 입술, 풍만한 얼굴은 근엄하면서도 자비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 오른손은 무릎에 걸친 채 검지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항마촉지인(降摩觸地印)을 하였고, 왼손은 선정인(禪定印)을 하고 있다.


석가모니가 큰 깨달음을 얻어 모든 악마의 방해와 유혹을 물리친 승리의 순간, 즉 깨달음을 얻은 모습을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성도상 이라고 한다.

▶십일면관음보살상



본존불 바로 뒤의 벽 한가운데에 반육각(半六刻)한 십일면관음보살상(十一面觀音菩薩像)이 있다. 이 상은 다른 조각품보다 유난히 입체감이 강조되어 있다. 약간 웃음을 띤 표정과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천의, 섬세한 손가락과 발가락, 우아하게 높이 설치된 연화좌가 특징이다.

▶팔부신장



전실을 들어서면 양쪽 벽에 팔부신장(八部神將)이 있으나 내부의 것에 비해 그 수법의 정교함이 덜하다.

▶인왕상



통로 입구 양 옆에는 인왕(仁王) 혹은 금강역사 한 쌍이 석굴 입구를 지키고 있다. 불법을 수호하는 한쌍의 수문장으로서 상체의 근육이 발달한 용맹스런 모습을 하고 있는데 금강으로 만든 방망이를 들고 있다하여 금강역사라 칭했다.

▶사천왕상



입구 통로, 즉 비도(扉道)의 좌우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이 각 2개씩 반육각 되어있다.

▶천부상



통로 입구에는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이 있다.

▶보살상



천부상 옆에는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있다.

▶10대제자상



석굴 벽면에 십나한(十羅漢)상이 없다.

▶감실상



10대제자상 위로 벽의 윗부분에는 10개의 불감(佛龕)을 만들어 그 속에 작은 부조상을 하나씩 안치하였다. 그 중에는 1체의 유마거사상(維摩居士像)과 7체의 보살상이 있다. 두개는 대한제국 때 일본인이 반출해서 지금은 조명이 설치되어 있다.

▶천장 및 기타



천장은 돔형으로 되었고 중심에는 연판(蓮瓣)을 새긴 둥글고 깨진 돌로 눌러 놓았는데, 그 교묘한 구조와 우아한 조각은 놀랄 만하다. 그리고 이 석굴암 옆에 보면 굴이 있는데, 이 굴에서 문무왕릉과 연결되는 길이 있다.


내부에서는 보존을 위해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다.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동의 보문사에도 경주의 석굴암과 비슷한 석굴암이 있다. 서울의 석굴암은 1970년부터 1972년까지 2년간 만들었으며 경주의 석굴암보다 약간 작다. 경주의 석굴암은 문이 1개인데 서울의 석굴암은 문이 3개이며 팔부신장(八部神將)은 생략되었다고 한다.

▶설화



석불(石佛)을 장차 조각하고자 큰 돌을 다듬어 감개(龕蓋)를 만들 때 갑자기 돌이 세 조각으로 갈라져서 분통이 터져 잠깐 잠이 들었는데, 그날 밤 천신(天神)이 내려와 만들어 놓고 갔다는 전설이 있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내용이며, 실제로 원형 연화 광배는 세 부분으로 갈라져 있다.

▶평가



석굴암은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은 인도 간다라 미술 양식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석굴암은 그 구조가 기묘할 뿐만 아니라 본존 및 벽면 조상의 비범한 기술로 보아 신라 시대 예술을 대표할 만한 것이며, 중국에서도 산을 파내어 만든 석굴은 있으나 석굴암과 같은 것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서울대학교 이주형 교수는 석굴암이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얀 석굴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바미얀 석굴과 석굴암은 공통적으로 원형 평면 위에 배치가 되어 있고 돔형 천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네모반듯한 전실과, 안쪽 벽에 부조로 새겨진 상, 그리고 위쪽으로 감실이 있고 그 안에 보살상이 있는 점 등이 똑같다.
그리고 이 교수는 바미얀 석불의 원류가 돔 형태의 로마 판테온이라고 주장했다.[3]

▶논란



문화재로서의 원형을 파악하지 않은 상태에서 훼손되었기 때문에, 그 본래의 모습에 대한 논란이 있다.[4]
광창 - 석굴암 본존불 앞쪽 천장에 조명을 위한 구멍이 있었다는 주장이다.
비어 있는 감실 - 비어 있는 2개의 감실에도 불상이 있었는데 반출되었다는 주장이다.
목조건물 - 석굴암 굴 앞에 목조건물이 세워져 있었다는 주장이다.
채색 - 석불에 채색을 했었다는 주장이다.

본존불의 존명에 대한 논의들이 있다.[5]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여래불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연등불
미륵불



https://ko.wikipedia.org/wiki/%EC%84%9D%EA%B5%B4%EC%95%94



●경주 석굴암 석굴(경주 석굴암 석굴)-다음백과


불국사의 부속암자로, 국보 제24호이다. 창건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751년 재상 김대성이 전세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불사를, 현세의 부모를 위해서는 불국사를 짓기 시작하여, 774년 신라 왕실에서 완성했다고 한다.



석굴의 구조는 전방후원식으로, 장방형의 전실과 원형 주실 그리고 그 사이를 이어주는 비도로 되어 있다. 주실의 가운데 높은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는 본존불의 두광은 사람이 전실의 중간쯤 와야 광배의 중앙에 부처의 머리가 놓이고 상의 크기나 몸체의 비례감이 알맞게 보이도록 고안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3차에 걸쳐 보수되면서 많이 손상되었다. 1962~64년에 대대적으로 수리되어 석굴의 구조 및 불상들의 위치가 어느 정도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국보 제24호. 대한불교조계종 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부속암자이다. 창건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했다. 〈삼국유사〉 권5 대성효이세부모조에 의하면 751년(경덕왕 10) 재상 김대성이 발원하여 전세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불사를, 현세의 부모를 위해서는 불국사를 짓기 시작했으나 774년 김대성이 죽자 신라 왕실에서 완성했다고 한다. 따라서 경주 석굴암 석굴은 김대성 개인이 창건했다기보다는 신라 왕실의 염원에 의해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경주 석굴암 석굴은 여러 개의 판석과 다듬은 돌로 궁륭천장 석실의 비례와 균형을 유지하면서 역학적으로 축조한 인공석굴이라는 점에서 인도나 중국 등 다른 나라에서는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렵다. 석굴의 구조는 전방후원식으로, 장방형의 전실과 원형 주실 그리고 그 사이를 이어주는 비도로 되어 있다.


주실의 가운데 높은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는 본존불의 두광은 뒷벽에 연화무늬로 조각되어 있는데, 예배하는 사람이 전실의 중간쯤 와야 광배의 중앙에 부처의 머리가 놓이고 상의 크기나 몸체의 비례감이 알맞게 보이도록 고안되어 있다.


석굴암 내의 조각상들은 부처가 설법을 할 때 거느리고 다니는 여러 권속들로, 본존불상을 중심으로 보살상·천부상·제자상 등이 조각되어 있다. 즉 석굴암의 불상은 여러 불·보살·천부상 등이 모여 하나의 작은 불국토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불국사고금창기 佛國寺古今創記〉에 의하면 1703년(숙종 29)에는 종열(從悅)이, 1758년(영조 34)에는 대겸(大謙)이 경주 석굴암 석굴을 중수했다고 한다. 조선 말기에 울산병사 조예상(趙禮相)에 의해서 크게 중수되었으며 그뒤 일제강점기에 1913~15, 1917, 1920~23년 3차에 걸쳐 보수되면서 원래의 모습이 많이 손상되었다.


일본인들의 잘못된 보수는 1962~64년에 정부지원 아래 대대적으로 수리되어 석굴의 구조 및 불상들의 위치가 어느 정도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그러나 건축학적인 면에서는 앞으로 문헌자료와 함께 중수과정에 대한 철저한 검토가 이루어져야만 창건 당시의 경주 석굴암 석굴 모습을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석굴암불상군



즉 본존불을 중심으로 범천구, 제석천 2구, 보살 3구, 나한 10구, 감실보살 8구, 사천왕 4구, 인왕 2구, 팔부신중 8구가 배치되어 있다. 우선 전실에 들어서면 양쪽으로 갑옷을 입고 암좌 위에 서 있는 4구의 팔부신중상(169~186cm)이 있다. 원래는 불교 이전부터 인도에 있었던 신으로 불교에 수용되어 불법을 수호하는 신장상으로 변한 것으로 부처가 설법할 때 항상 따라다니는 천부상이다.

그 이름은 천·용·야차·건달바·아수라·가루라·긴나라·마후라가로 알려져 있으나 경전에 따라 약간씩 다르다. 이 가운데 머리에 용관을 쓴 용, 사자관을 쓴 건달바, 3개의 얼굴과 6개의 팔을 가진 아수라는 쉽게 확인할 수 있으나 나머지 상들은 구별이 어려워 정확한 명칭을 붙이기가 어렵다. 더욱이 입구 양쪽에 있는 각각 2구의 팔부신중은 굴 안의 상들과 비교해 조각수법이 현저하게 떨어져 후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전실에서 원형주실 입구 양쪽에 있는 인왕상은 문지기의 역할을 하는 천부상이다. 상반신은 옷을 걸치지 않고 근육을 자랑하며 바람에 날리는 천의와 치맛자락이 특징적이다. 또한 번뇌와 망상을 깨뜨린다는 상징적인 무기인 금강저를 들고 있어 금강역사라고도 부른다. 주실로 들어가는 비도 양쪽에는 각각 2구의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모두 갑옷을 입고 손에는 칼이나 창을 들고 악귀를 밟고 서 있다.


이 상들은 불법과 불국토를 사방에서 수호하는 호법신장상이다. 손에 탑을 들고 있는 상은 북방의 다문천으로 석굴암에서는 오른쪽 안쪽에 위치해 있으므로 그 옆의 상은 동방의 지국천이다. 왼쪽 입구쪽의 상은 남방의 증장천, 그 안쪽의 상은 서방의 광목천으로 확인된다.



본존상이 모셔져 있는 원형의 주실 벽에는 15구의 부조상이 있고 벽 위에는 10개의 감실이 있는데 이 가운데 2곳은 비어 있고 나머지에는 8구의 보살좌상(86~95cm)이 있다. 우선 입구쪽에서 가까운 벽부터 보면, 양쪽의 처음 두 상은 범천과 제석천(213cm)으로 원래는 인도 아리안계의 브라마(Brahma)와 인드라(Indra) 신으로 불교에 귀의하여 불법수호와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천부상이다.

범천은 오른손에 번뇌를 털어내고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불자를 들고 있으며, 왼손에는 번뇌를 씻어준다는 물병인 정병을 들고 있다. 제석천은 무복을 입고 손에는 금강저를 들고 있으며 머리에 쓴 높은 관이나 늘어진 옷주름선과 천의 표현은 정교하면서도 부드러워 마치 회화적인 표현을 보는 듯 섬세하다. 이 두 천부상 옆에는 조그만 잔을 들고 서 있는 상과 길고 네모난 지물을 들고 서 있는 보살상이 있는데 그 명칭은 학자에 따라 의견이 다르다.


길고 네모난 물건을 들고 있는 상은 지혜제일의 문수보살(198cm)로 경권을 들고 있으며, 그 반대편 상은 문수보살과 짝을 이루고 부처를 보좌하며 보살행을 실천하는 보현보살(198cm)로 추정된다. 부드러운 천의자락은 바람에 나부끼듯 가벼운 느낌을 주며 영락장식과 군의의 늘어진 주름이 서로 겹치면서도 입체감과 부드러운 조형미를 보여준다. 보살상 다음에는 양쪽으로 5인의 나한상(213~218cm)이 각기 다양한 자세로 지물을 들고 서 있는데 10대 제자를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제자들의 명칭은 경전을 통해서 알 수 있으나 석굴에 표현된 상들과 관련하여 각각의 상에 이름을 붙이기는 어렵다.


각 나한상들은 사색하는 듯한 얼굴표정에서 수행자의 모습을 느낄 수 있으며 몸체와 가사의 주름처리는 다른 조각상들과 마찬가지이다. 이 10대 제자 사이로 뒷벽 정면에는 정교한 조각수법으로 마치 회화작품과 같이 섬세하게 표현된 십일면관음보살상(218cm)이 있다. 관음보살상은 보살들 중에서 자비를 상징하는데 그 자비를 베푸는 대상에 따라 구제와 교화하는 방법이 다양하며 보살이 지닌 여러 감응력을 상징하기 위해 여러 개의 얼굴과 팔로 표현된다. 이 십일면관음보살상은 그 표현이 정교하고 조각기술이 완벽해 석굴암 불상뿐 아니라 통일신라시대 불상 양식의 정수를 대표한다.


주실의 윗벽 감실에 있는 8구의 상들은 모두 좌상이며 입체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그중 나한과 같이 승려머리를 한 상은 저 세상에 태어난 중생의 정토왕생을 위해 노력하는 지장보살로, 현존하는 최초의 지장보살상으로 추정된다. 머리에 쓴 보관에 아미타화불이 있는 상은 관음보살상, 뒷벽 중앙의 양쪽에서 서로 마주보고 대담하는 상은 왼쪽이 유마힐거사, 오른쪽이 문수보살로 확인되나 나머지 상들은 그 명칭을 알 수 없다.



석굴암의 여러 상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상은 원형주실의 본존불상(326cm)으로 주변 모든 상들의 구심체이다. 대좌까지 합쳐 약 500cm나 되는 큰 상이며 신체의 비례가 알맞고 각 부분이 부드럽고 세련된 솜씨로 조각되어 마치 살아 숨쉬는 듯한 부처의 형상을 하고 있다. 본존불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으로 법의를 걸쳤으며 두 다리는 결가부좌의 자세로 앉아 있다.

오른손은 땅을 가리키고 왼손은 모아진 두 다리의 중앙에 놓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데, 이는 부처가 깨달음을 얻는 순간을 상징하는 것이다. 간략한 옷주름 표현은 상 전체의 단순한 조형성을 강조해주며 몸 전체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긴장감과 신비한 종교성이 어우러져 예배하는 사람의 마음을 경건하게 만드는 종교예술의 진수를 보여준다.

이 본존의 명칭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수인에 의해 인간세상에 태어나 득도한 석가모니불이라는 설과 부석사 무량수전 항마촉지인의 본존불이 아미타불인 것처럼 이 석굴암 본존불도 김대성을 비롯한 신라 왕실의 정토왕생을 바라는 의미에서 조성되었으므로 아미타불이라는 의견도 있다.


최근에는 불국사가 화엄종의 사찰이고 8세기 중엽 화엄종이 유행함에 따라 석굴암의 본존은 〈화엄경〉에 나오는 첫 장면을 나타낸 것으로, 보리수 밑에서 깨달은 석가모니가 부처의 형상으로 여러 대중과 보살들에게 그 깨달음의 황홀함을 보여주면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통해 〈화엄경〉을 설하는 장면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항마촉지인의 부처 모습은 석가모니불뿐 아니라 모든 부처가 깨닫는 과정에서 반드시 거치는 단계를 상징하는 손 모양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석굴암의 본존과 같은 항마촉지인의 불좌상 형식은 이후 통일신라 후기 및 고려시대까지 크게 유행했으며 오늘날까지도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 석굴암 불상조각은 정교하고 완숙한 조각기술과 신라인의 미적 감성이 반영되어 이루어진 이상적인 불상으로 8세기 통일신라시대 불교조각의 절정기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 당시 중국·일본과 더불어 동아시아의 불교미술에 보이는 국제적인 성격의 불교 조각양식 형성에 통일신라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을 증명해주는 예이다.→ 불국사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b12s0018b





 
●경주 석굴암 석굴 (慶州 石窟庵 石窟) - 문화재청
 
-지정(등록)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불국로 873-243, 석굴암 (진현동)
-시           대 통일신라시대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대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으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렀다. 경덕왕은 신라 중기의 임금으로 그의 재위기간(742∼765) 동안 신라의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이루게 되는데, 석굴암 외에도 불국사, 다보탑, 삼층석탑, 황룡사종 등 많은 문화재들이 이때 만들어졌다.
 
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조각했으나 지금은 38구만이 남아있다.
 
석굴암 석굴의 구조는 입구인 직사각형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이 복도 역할을 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360여 개의 넓적한 돌로 원형 주실의 천장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이다.
 
석굴암 석굴의 입구에 해당하는 전실에는 좌우로 4구(軀)씩 팔부신장상을 두고 있고, 통로 좌우 입구에는 금강역사상을 조각하였으며, 좁은 통로에는 좌우로 2구씩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원형의 주실 입구에는 좌우로 8각의 돌기둥을 세우고, 주실 안에는 본존불이 중심에서 약간 뒤쪽에 안치되어 있다. 주실의 벽면에는 입구에서부터 천부상 2구, 보살상 2구, 나한상 10구가 채워지고, 본존불 뒷면 둥근 벽에는 석굴 안에서 가장 정교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서 있다.
 
원숙한 조각 기법과 사실적인 표현으로 완벽하게 형상화된 본존불, 얼굴과 온몸이 화려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 용맹스런 인왕상, 위엄있는 모습의 사천왕상, 유연하고 우아한 모습의 각종 보살상, 저마다 개성있는 표현을 하고 있는 나한상 등 이곳에 만들어진 모든 조각품들은 동아시아 불교조각에서 최고의 걸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특히 주실 안에 모시고 있는 본존불의 고요한 모습은 석굴 전체에서 풍기는 은밀한 분위기 속에서 신비로움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의 본존불은 내면에 깊고 숭고한 마음을 간직한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모든 중생들에게 자비로움이 저절로 전해질 듯 하다.
 
석굴암 석굴은 신라 불교예술의 전성기에 이룩된 최고 걸작으로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어 더욱 돋보인다. 석굴암 석굴은 국보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석굴암은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재되었다.
 
한편, 현재 석굴암은 내부 전면 공개 관람 시 항온항습 등의 문제가 우려되어 1976년부터 유리벽을 통한 외부관람을 실시하고 있다.
 
<참고>
 
●석굴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세계문화유산 석굴암-홈페이지
 
 
 
●경주 석굴암 석굴 (慶州 石窟庵 石窟) - 문화재청
 
 
 
●경주 석굴암 석굴(慶州石窟庵石窟)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주 석굴암 - 대한민국구석구석
 
 
 
●석굴암 - 나무위키
 
 
 
●경주 석굴암 석굴(慶州石窟庵石窟) - 다음백과
 
 
 
●석굴암 - 문화체육관광부
 
 
 
●신라인의 불국토, 석굴암 - 논술로 만나는 우리역사
 
 
 
●석굴암불상군 - 다음백과
 
 
 
<동영상>
 
◈ [국립중앙박물관] 세계문화유산 석굴암(National Museum of Korea Seokguram Grotto, World Heritage Site)
 
 
 
◈100 Icons of Korean Culture Ep91C02 Seokguram Grotto
 
 
 
◈석굴암 구조-디지탈 재현 | Documentary
 
 
 
◈[문화유산 코리아] 세계 유일 인조석굴, 신라의 과학기술과 예술의 집대성 EBS
 
 
 
◈천년의 신비 석굴암
 
 
 
◈[UHD다큐] 석굴암과 로마 판테온은 어떻게 쌍둥이처럼 닮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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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 YTN 사이언스
 
 
 
◈경술국치 100년 석굴암 100년의 진실
 
 
 
◈한국의 세계유산 시리즈 - 석굴암 (클레이 애니메이션)
 
 
 
◈KBS 역사스페셜 – 발견! 100년 전의 사진 석굴암 원형 찾았다 / KBS 20020202 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