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의 여행이야기

"백운"의 Daum Column입니다...

경주 낭산(狼山) 소재 신라 제27대 경주선덕여왕릉(慶州善德女王陵) 탐방

댓글 0

여행및산행

2021. 12. 2.









경주 낭산(狼山) 소재 신라 제27대 경주선덕여왕릉(慶州善德女王陵) 탐방

(2021/11/07 현재)


동해안 해파랑길 주변 해안가 도로를 따라 간성에서 울산까지 종단 여행
4일차로 유네스코 세계유산 경주 토함산(吐含山) 석굴암石窟庵) 탐방후
방문한 경주 낭산(狼山) 소재 신라 제27대 경주선덕여왕릉(慶州善德女王陵)
탐방 전경 입니다.

선덕여왕릉(善德女王陵)은 경북 경주시 보문동 산79-2번지 낭산(狼山) 정상에
있다. 선덕여왕은 아들이 없던 진평왕(재위 579∼632)의 딸로서 성골이라는
특수한 신라 왕족의식에 의해 여왕이 되었으며,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덕만(德曼)이다.
진평왕(眞平王)의 장녀이며, 어머니는 마야부인(摩耶夫人)이다.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죽자 화백회의(和白會議)에서 그를 왕위에 추대하고, ‘성조황고(聖祖皇姑)’란
호를 올렸다고 한다.

즉, 선덕여왕(善德女王)이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성골(聖骨)’이라는 특수한
왕족 의식이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즉위하던 해인 632년에 대신 을제(乙祭)에게
국정을 총괄하게 하고, 전국에 관원을 파견해 백성들을 진휼(賑恤)했으며,
뒷날 태종 무열왕이 된 김춘추와 명장 김유신 같은 영웅호걸을 거느리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데 기초를 닦아 놓았다

633년에는 주(州)·군(郡)의 조세를 1년간 면제해 주는 등 일련의 시책으로
민심을 수습하였다. 그리고 634년에 분황사(芬皇寺), 635년에는 영묘사(靈廟寺)를
세웠다. 그러나 여성왕이라는 약점 때문에 왕권이 불안하여 재위 말년에
비담, 염종의 난이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사망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여왕이 죽거든 부처의 나라인 도리천에 묻어 달라고 하였으나
신하들이 이해를 못하자 여왕이 직접 도리천이 낭산(狼山) 정상이라 알려주었다.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한 후 낭산에 사천왕사를 지었고, 낭산의 정상이
도리천이라 한 여왕의 뜻을 알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경주 선덕여왕릉 (慶州 善德女王陵) 


-종 목 사적  제182호 
-지정(등록)일 1969.08.27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보문동 산79-2번지 



신라 최초의 여왕이자 27대 왕인 선덕여왕(재위 632∼647)의 무덤이다. 높이 6.8m, 지름 23.6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으로, 밑둘레에 자연석을 이용하여 2∼3단의 둘레돌을 쌓았다.


선덕여왕은 아들이 없던 진평왕(재위 579∼632)의 딸로서 성골이라는 특수한 신라 왕족의식에 의해 여왕이 되었다. 첨성대와 분황사, 황룡사 9층탑 등을 세웠으며, 김유신, 김춘추와 더불어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았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여왕이 죽거든 부처의 나라인 도리천에 묻어 달라고 하였으나 신하들이 이해를 못하자 여왕이 직접 도리천이 낭산(狼山) 정상이라 알려 주었다.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한 후 낭산에 사천왕사를 지었고, 낭산의 정상이 도리천이라 한 여왕의 뜻을 알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신라선덕여왕릉 → 경주 선덕여왕릉)으로 명칭 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선덕여왕(善德女王) -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

    ?∼647(선덕여왕 16).


-신라 제27대 국왕(재위: 632∼647).
-별     칭  덕만(德曼), 덕만공주(德曼公主), 선덕왕(善德王),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
-관련 사건 비담과 염종의 난, 칠숙의 난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덕만(德曼)이다. 진평왕(眞平王)의 장녀이며, 어머니는 마야부인(摩耶夫人)이다.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和白會議)에서 그를 왕위에 추대하고, ‘성조황고(聖祖皇姑)’란 호를 올렸다고 한다. 즉, 선덕여왕(善德女王)이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성골(聖骨)’이라는 특수한 왕족 의식이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즉위하던 해인 632년에 대신 을제(乙祭)에게 국정을 총괄하게 하고, 전국에 관원을 파견해 백성들을 진휼(賑恤)했으며, 633년에는 주(州)·군(郡)의 조세를 1년간 면제해 주는 등 일련의 시책으로 민심을 수습하였다. 그리고 634년에 분황사(芬皇寺), 635년에는 영묘사(靈廟寺)를 세웠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634년에 인평(仁平)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중고(中古) 왕실의 자주성을 견지하고자 하였다. 다만 즉위 이후 거의 매년 당나라에 조공 사신을 파견함으로써 당나라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기도 하였다. 이것은 고구려와 백제의 신라에 대한 공격이 빈번해짐에 따라 당나라와 연합함으로써 국가를 보존하려는 자구책의 일환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
신라는 642년부터 본격적으로 고구려와 백제의 침공을 받았다. 그 해에 신라는 백제 의자왕의 침공을 받아 서쪽 변경에 있는 40여 성을 빼앗겼으며, 신라의 한강 방면 거점인 당항성(黨項城: 지금의 南陽)도 고구려·백제의 침공을 받았다. 또한 백제 장군 윤충(允忠)의 침공으로 낙동강 방면의 거점인 대야성(大耶城: 지금의 경상남도 陜川)이 함락당하였다.


이와 같은 국가적 위기에 직면한 선덕여왕은 김유신(金庾信)을 압량주(押梁州: 지금의 경상북도 慶山) 군주(軍主)로 임명해 백제의 공격을 방어하는 한편, 643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구원을 요청하였다.


또한 당나라에서 유학하던 자장(慈藏)에게 귀국요청을 하였다. 자장은 귀국 후 선덕여왕과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아가며 정치권에 깊숙이 개입하여 활발한 정치적 활동을 수행해 나갔다. 자장은 불교사상을 왕권강화책으로 적극 활용함으로써 여왕의 권위와 통치력에 새로운 위상을 정립시켰다. 그 권위의 상징물로 호국 중심 사찰인 황룡사(皇龍寺)에 선덕여왕 14년(645)황룡사구층목탑(皇龍寺九層木塔)을 건립하였다. 황룡사구층목탑은 높이 80m에 달하는 거대한 불탑이었다. 또한 자장은 신라가 과거세부터 불교와 인연이 깊은 ‘유연불국토(有緣佛國土)’이며 강원도 오대산을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상주처로 설정해 신라 불국토사상(佛國土思想)과 호국사상을 일치시켜 불력과 통합된 정치력으로 신라 왕실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다.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당 태종(太宗)은 신라 사신에게 “여왕이 통치하기 때문에 권위가 없어 고구려·백제 양국의 침범을 받게 되었다”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한편 고구려에 대해서는 644년에 사신을 파견해 외교적 견제를 가했으나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이를 거부하였다.


그런데 당 태종이 지적한 여왕 통치의 문제점은 신라 정계에 파문을 일으켜 647년 1월에는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과 염종(廉宗) 등 진골(眞骨) 귀족들이 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구실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이 이를 진압했으며, 여왕은 이 내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재위 16년 만에 죽었다. 시호(諡號)를 선덕이라 하고, 낭산(狼山)에 장사 지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비담의 난과 선덕왕대 정치운영」(주보돈,이기백선생고희기념 한국사학논총』상-고대편·고려시대편-, 1994)
「신라 선덕왕대의 정국동향과 비담의 난」(정용숙,『이기백선생고희기념한국사학논총』상-고대편·고려시대편-)
「한국 고대 여성의 지위」(김두진, 『한국사시민강좌』15, 1994)
「‘선덕여왕지기삼사’조 설화의 연구」(강재철, 『동양학』21,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1991)
「신라 내물왕계의 혈연의식」(이기동, 『신라골품제사회와 화랑도』, 일조각, 1984)
「자장의 불교사상에 대한 재검토-신라불교 초기계율의 의의-」(신종원, 『한국사연구』39, 1982)
「상대등고」(이기백, 『신라정치사회사연구』, 1974)
「新羅政治體制の變遷過程-門閥貴族の集團支配と專制王權-」(井上秀雄,『古代史講座』4, 學生社, 1962)




●선덕여왕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신라 선덕여왕(新羅 善德女王)-신라의 제27대 국왕



-본명 김덕만(金德曼)
-재위 632년 ~ 647년
-종교 불교
-부군 음갈문왕
-부왕 신라 진평왕
-모후 마야부인
-이전 왕 진평왕
-다음 왕 진덕여왕


선덕여왕(善德女王, ? ~ 647년 2월 17일 (음력 1월 8일)) 또는 선덕왕(善德王)[1]은 신라의 제27대 군주(재위: 632년~647년)이며, 한국사에서 최초의 여왕으로 알려져 있다. 성은 김(金), 휘는 덕만(德曼)이다. 진평왕과 마야부인(摩耶夫人)의 장녀이며 태종무열왕의 6촌 누나이자 큰이모이다.



632년부터 647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632년 을제와 김용춘이 잠시 순차적으로 대리청정하여 국정을 담당했고 같은 해 632년부터 647년 붕어할 때까지 친정하였다



◈생애


《삼국사기》에는 진평왕의 장녀, 《삼국유사》에는 형제자매 서열에 관한 기록 없이 진평왕의 딸로 기록하였다.

진평왕이 아들 없이 죽자, 화백회의는 진평왕의 왕녀인 덕만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고, 겸하여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존호를 올렸다. 《삼국유사》 왕력(王曆) 편은 「김씨 성골의 남자가 다하였으므로 여왕이 왕으로 선 것이다(金氏聖骨男盡故女王立王)」고 밝히고 있다.[2] 또한 덕만이 즉위하기 1년 전인 건복 48년(631년)에 칠숙과 석품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곧 진압되었다.[3]


즉위한 해인 건복 49년(632년)에 을제로 하여금 국정을 총괄케 하고, 각지에 관리를 파견하여 홀아비, 홀어미, 고아, 독거노인 등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돕게 하였으며, 당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건복 50년(633년) 정월에는 스스로 신궁에 제사를 올리고 여러 주 · 군의 조세를 1년간 감해 주었다. 또한 8월에 백제가 서쪽 변경을 침공했다.


여왕은 즉위 3년째인 건복 51년(634년)부터 인평(仁平)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이 해에 분황사(芬皇寺)가 완공되었다. 인평 2년(635년) 겨울에는 이찬 수품(水品)과 용수(龍樹)를 시켜 각지의 민심을 위로하게 하였다. 또한 당으로부터 주국 낙랑군공 신라왕(柱國樂浪郡公新羅王)에 봉해지기도 했다.


인평 3년(636년) 정월에는 수품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3월에 병이 나자 이를 기양하기 위해 황룡사(皇龍寺)에서 큰 법회를 열었다(《삼국사기》). 같은 해, 자장법사가 불법을 배우기 위해 당으로 들어갔다.


인평 3년(636년) 5월에 백제 장군 우소가 여근곡에 쳐들어오자 알천, 필탄 두 장군을 보내 이를 무찔렀다.


인평 5년(638년) 10월에는 고구려가 칠중성을 공격해 왔고, 다시 대장군 알천을 파견해 이를 격퇴하고 불안한 민심을 달랬다. 인평 6년(639년), 북부 국경을 방비하기 위해 하슬라(荷瑟羅)를 북소경(北小京)으로 삼고 사찬 진주(眞珠)를 보내 지키게 하였다. 인평 7년(640년)에는 귀족 자제들을 유학생으로서 당의 국자감에 입학하게 하고, 인평 9년(642년) 정월에 다시 당에 조공하였다. 7월에 백제의 의자왕이 이끄는 군사들이 신라의 서쪽 40여 개 성을 함락시키고, 여기에 고구려까지 당과의 외교 거점이었던 당항성을 공격해오자 당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11월에 백제가 대야성을 함락시켰고, 이찬 품석(品釋) 등이 죽었다. 왕은 패배를 만회하고자 자신의 조카이자 김품석의 장인인 이찬 김춘추를 고구려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보장왕은 신라를 구원해주기는커녕 김춘추를 감금 하였다. 이를 안 여왕이 김유신을 보내 한강 북부까지 진격하니 보장왕은 김춘추를 풀어 주었다.


인평 10년(643년) 정월에도 당에 토산품을 바쳤다. 9월에 당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으나 당 태종은 이를 거절하였고, 인평 11년(644년) 정월에 신라는 다시 당에 조공을 바쳤다. 이에 당 태종이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공격을 멈추라고 종용하였다. 이에 연개소문은 「일전에 고구려와 수나라가 전쟁을 벌일 때 그 틈을 타서 신라가 빼앗아간 우리의 영토 500리를 돌려주기 전에는 싸움을 멈출 수 없다」며 거절하였다. 9월에 왕은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삼고 백제를 공격하여 일곱 성을 빼앗았다.


인평 12년(645년) 정월에도 당에 조공을 바쳤다. 백제와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자장법사의 건의로 여왕은 3월에 황룡사탑을 세웠다. 5월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하자 군사 3만을 파견하여 이를 도왔다. 그러나 그 사이에 백제에게 일곱 성을 빼앗겼다. 11월에는 비담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재위 마지막 해인 647년 정월, 상대등 비담이 염종(廉宗)과 함께 “여자 군주는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女主不能善理)”는 기치를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월성에 진을 치고 김유신을 파견하여 비담을 상대하게 하였다.



그러나 반란 와중인 정월 8일에 여왕은 승하하였다. 시호를 ‘선덕’이라 하였고, 일전에 예언한 것처럼 낭산에 장사 지냈다.
 
◈평가


선덕여왕은 재위 초반 민생의 안정에 주력하여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도록 하는 구휼정책을 활발히 추진하였으며, 첨성대를 건립하여 농사에 도움이 되게 하였다. 그녀가 백성들을 얼마나 인자하게 아끼고 사랑했는지는 지귀(志鬼)의 설화에서도 알 수 있다.


당시 선덕여왕을 흠모하는 백성들이 많았는데 지귀는 그 중에서도 특히 흠모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선덕여왕이 영묘사를 행차할 때 그녀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선덕여왕이 이를 보고 그의 가슴 위에 자신의 팔찌를 놓고 떠났다. 지귀가 잠이 깨어 이를 알고는 마음에서 불이 나고 감동하여 영묘사(靈廟寺)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또한 불교 또한 널리 장려하여 분황사, 영묘사 등 절을 많이 건립하고 불경을 연구시켜 불교의 일대 부흥을 가져왔다. 특히 선덕여왕은 웅대한 호국의 의지가 담긴 거대한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웠다. 황룡사 9층 목탑은 높이 80m의 거대한 탑으로 이를 모두 9층으로 한 뜻은 이웃의 9적을 물리쳐서 복속시키기 위해 나라 이름을 새겨넣은 것이다.


그러나 김부식의 사론은 이와 사뭇 다르다. 그는 “신라는 여자를 세워 왕위에 있게 하였으니, 진실로 어지러운 세상의 일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하겠다.”라며 왕의 치세를 혹평하였다. 이덕일은 이를 유교적 가치를 갖고 있던 김부식의 차별적 선입견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4] 하지만 선덕여왕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더 있다. 예를 들어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 왕이 황룡사에 탑을 구축하였는데, 참으로 많은 돈을 썼다. 이러한대도 나라가 망하지 않았으니, 어찌 다행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하였다. 또한 김춘추가 당에게 굴욕적인 외교 (아들 김법민을 볼모로 보내는 등)를 한 것을 조종했다는 점이나 백제 무왕이나 의자왕이 침공을 하여 1백여개의 성이 함락되었는데도 잘 막지 못하였다는 점이 비판을 받기도 한다.


◈왕이 미리 안 세 가지


《삼국유사》 선덕여왕조에는 선덕여왕이 미리 깨달은 일 세가지(지기삼사(知幾三事))가 수록되어 있다.[5]

▣당 태종의 모란 꽃


즉위년인 632년, 당 태종은 빨강, 자주, 하얀색의 모란 그림과 그 씨앗을 선물로 보냈다. 왕은 이를 보고 "이 꽃은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씨앗을 심어보니 과연 그랬다. 훗날 신하들이 이 일을 물어보니 왕은 "꽃 그림에 나비가 없었다. 이는 남편이 없는 나를 희롱한 것이다."라고 답했다. 일연은 이 고사를 소개한 뒤, 당 태종이 신라에 세 여왕(선덕, 진덕, 진성)이 있을 것으로 짐작한 점도 함께 칭찬하고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이 일이 진평왕 말년에 벌어진 일로 묘사되어 있다.


▣여근곡의 백제군

왕은 즉위 4년인 635년, 영묘사(靈廟寺)를 세운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겨울날, 영묘사 옥문지(玉門池)에 개구리가 사나흘 동안 운 일이 있었다. 이에 왕은 각간 알천(閼川), 필탄(弼呑)에게 병사 2천을 주어 서라벌 서쪽 부산(富山) 아래 여근곡(女根谷)을 습격하게 하였다. 여근곡에는 백제 장수 우소(?召)가 매복해 있었는데, 알천과 필탄은 이를 쳐서 모두 죽였다.



훗날 신하들이 이 일을 물어보니 왕은 "개구리가 심히 우는 모습은 병사의 모습이요, 옥문이란 여자의 음부를 가리킨다. 여자는 음이고, 그 빛은 백색인데, 이는 서쪽을 뜻한다. 또한 남근이 여근에 들어가면 죽는 법이니 그래서 쉽게 잡을 수 있었다."라고 답하였다.
삼국사기에서는 옥문지에서 개구리가 운 때가 즉위 5년인 636년 5월로 기록하고 있다.

▣왕의 승하와 도리천


어느날 왕이 신하들을 불러 "내가 죽으면 도리천(?利天)에 장사지내도록 하라. 이는 낭산(狼山) 남쪽에 있다."고 하였다. 이후 왕이 죽은 뒤 신하들은 왕을 낭산 남쪽에 장사지냈다. 이후 문무왕 대에 이르러 선덕여왕의 무덤 아래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웠다. 이는 불경에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이 있다'는 내용이 실현된 것이었다.



기타 일화


삼국유사 탑상 편에 따르면, 자장법사가 왕에게 황룡사 9층 목탑 건설을 진언한 때는 643년이었다.(삼국사기에서는 645년) 이에 왕은 김용춘을 시켜 백제에서 기술자 2백 명을 맞아들여 탑을 지었다. 탑의 기둥을 세울 때, 백제 장인 아비지는 백제 멸망의 꿈을 꾸어 일을 멈추었다. 그때 노승 한 명, 장사 한 명이 나타나 기둥을 세우고 사라졌다. 이에 아비지는 마음을 고쳐먹고 탑을 완성했다.

삼국유사 신주 편에 따르면, 하루는 여왕이 병이 깊어 홍륜사의 법척법사를 불러 치료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에 밀본법사를 불러 침실 밖에서 경을 읽게 하였다. 경을 다 읽고 밀본은 막대기를 들어 침실 안으로 던졌다. 이에 늙은 여우 한 마리와 법척이 찔려 뜰 아래로 쓰러졌다. 이에 왕의 병이 당장 나았다.


◈가계



부왕: 진평왕(眞平王)
모후: 마야부인(摩耶夫人)
숙부: 진정 갈문왕(眞正葛文王)
숙부: 진안 갈문왕([6] 眞安葛文王)

사촌: 진덕여왕(진안 갈문왕과 월명부인([1])의 딸)
동생: 천명공주(天明公主)
동생: 선화공주(善花公主)[7]
동생: 천화공주(天花公主) - 등장이 《화랑세기》에 한함 (화랑세기가 위서로 판정되면서 그 존재의 진위여부가 불분명)
제부,남편: 김용춘

조카: 김춘추(태종 무열왕)


남편(삼국유사의 기록)

음갈문왕(飮葛文王): 삼국유사에 따르면 선덕여왕 재위 초에 당 태종이 모란꽃 그림을 보내 여왕을 희롱하였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음갈문왕은 선덕여왕 재위 1년 이후에 혼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일부에서는 음갈문왕과 선덕여왕이 사실혼 관계였거나, 음갈문왕이 일찍 죽은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한편 '음'은 '반'(飯)의 잘못일 수도 있다.[8]


남편(필사본 화랑세기의 기록)



김용춘(金龍春): 진지왕의 장남(화랑세기에서는 차남)으로 여왕의 당숙이 된다. 여왕의 언니(필사본 화랑세기에 따름) 천명공주와 결혼하여 제부가 되기도 한다.

흠반(欽飯): 여왕의 친척이다. 여왕의 숙부인 백반, 국반과 같은 항렬인 것으로 보아 선덕여왕의 숙부뻘로 추정된다.
을제(乙祭): 신라의 대신으로, 여왕 재위 초 국정을 담당했다.


◈관련 작품(드라마)



《삼국기》(KBS, 1992년~1993년, 배우:김혜정)
《연개소문》(SBS, 2006년~2007년, 배우:배미자)
《선덕여왕》(MBC, 2009년~2009년, 배우:이요원, 남지현)
《대왕의 꿈》(KBS, 2012년~2013년, 배우:홍은희, 박주미, 선주아)



◈주석


1.↑ 삼국사기 상의 표현
2.↑ 삼국유사 권 제1 왕력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2011년 12월 25일에 확인.
3.↑ 삼국사기 진평왕 53년조
4.↑ 《여인열전》/이덕일 지음/김영사
5.↑ 직지프로젝트 삼국유사 선덕여왕조
6.↑ http://koreandb.nate.com/history/people/detail?sn=13003
7.↑ 삼국유사에 따르면, 백제 무왕의 왕후로 백제 의자왕의 어머니가 된다. 그러나 삼국사기에서는 그녀의 존재가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공주의 실존 여부에 대해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다. 게다가 2009년 3월 발견된 미륵사지 석탑의 사리봉안기에 무왕의 왕후가 '좌평 사택적덕의 딸'임을 의심케 하는 구절이 있어 논쟁이 다시금 격화되었다.
8.↑ [Why] 김유신과 연인사이?… 선덕여왕의 세가지 미스터리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신라의 역대 국왕


▣신라 상대(B.C. 57년 ~ A.D. 654년)
 
(1) 혁거세 거서간 ·(2) 남해 차차웅 ·(3) 유리 이사금 ·(4) 탈해 이사금 ·(5) 파사 이사금 ·(6) 지마 이사금 ·(7) 일성 이사금 ·(8) 아달라 이사금 ·(9) 벌휴 이사금 ·(10) 내해 이사금 ·(11) 조분 이사금 ·(12) 첨해 이사금 ·(13) 미추 이사금 ·(14) 유례 이사금 ·(15) 기림 이사금 ·(16) 흘해 이사금 ·(17) 내물 마립간 ·(18) 실성 마립간 ·(19) 눌지 마립간 ·(20) 자비 마립간 ·(21) 소지 마립간 ·(22) 지증왕 ·(23) 법흥왕 ·(24) 진흥왕 ·(25) 진지왕 ·(26) 진평왕 ·(27) 선덕여왕 ·(28) 진덕여왕 ·
 
▣신라 중대(654년 ~ 780년)

 
(29) 태종무열왕 ·(30) 문무왕 ·(31) 신문왕 ·(32) 효소왕 ·(33) 성덕왕 ·(34) 효성왕 ·(35) 경덕왕 ·(36) 혜공왕
·
▣신라 하대(780년 ~ 935년)



(37) 선덕왕 ·(38) 원성왕 ·(39) 소성왕 ·(40) 애장왕 ·(41) 헌덕왕 ·(42) 흥덕왕 ·(43) 희강왕 ·(44) 민애왕 ·(45) 신무왕 ·(46) 문성왕 ·(47) 헌안왕 ·(48) 경문왕 ·(49) 헌강왕 ·(50) 정강왕 ·(51) 진성여왕 ·(52) 효공왕 ·(53) 신덕왕 ·(54) 경명왕 ·(55) 경애왕 ·(56) 경순왕 ·


<참고>
 
●경주선덕여왕릉(慶州善德女王陵)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주 선덕여왕릉 - 대한민국구석구석
 
 
 
●선덕여왕릉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경주 선덕여왕릉 (慶州 善德女王陵) - 문화재청
 
 
 
●선덕여왕릉 - 경주문화관광
 
 
●선덕여왕릉 - 나무위키
 
 
 
●선덕여왕 - 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