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의 여행이야기

"백운"의 Daum Column입니다...

백선엽과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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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2. 31.

공산주의자나 국내 좌파들이 역사상 가장 싫어하는 인물로 

이승만과 백선엽 그리고 박정희를 거론합니다. 오늘은 왜 

그들이 백선엽과 박정희를 철천지원수로 생각하는지를 살펴

보겠습니다. 

두 분은 유사점이 많습니다. 우선 일제 하에서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일제의 만주군관학교를 나와 일본군 중위로 해방을

맞아 다시 국군으로 시작하여 장군이 되었고,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수성가한 점 그리고 백선엽은 박정희의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해주었고, 박정희는 대통령이 되어 백선엽을 대우

해주었습니다.

그러면 좌파들은 왜 두 분을 철천지 원수로 삼고 있는지에 대

하여 그 자료를 보내드림니다.

 

백선엽 과 박정희(17-1)

1. 비슷한 인생 역정
 
   백선엽(1920년생)과 박정희(1917년생)는 經歷面에서 共通點이 아주 많다.
 
 ① 두 사람은 보통학교(현 초등학교) 敎師 出身이다.
    평남 강서 출신인 백선엽은 평양사범학교를, 경북 구미출신인 박정희는 대
    구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이 두 사범학교는 당시 서울의 경성사범학교와 함
    께 3大 師範學校로 꼽힌 名門으로 이들은 秀才였다.
 
 ② 두 사람은 사범학교를 마치고 敎師로 있다가 軍에 入門했다.
    백선엽은 만주 봉천(현 심양)에 있던 봉천군관학교 9기로, 박정희는 신경(현
    장춘)에 있던 신경군관학교 2기로 입교했다. 백선엽의 ‘봉천 9기’는 박정희의
    1기 선배인 ‘신경 1기’와 같은 셈인데, 나이가 적은 백선엽이 박정희보다 군
    관학교 입교가 빠른 데는 이유가 있다.
    박정희는 사범학교 졸업 후 ‘의무복무기간’을 다 마치고 입교한 반면 백선
    엽은 도중에 입교했기 때문입니다.
 
 ③ ‘親日軍人’이라는 지적이다.
    두 사람 모두 ‘만주군관학교’ 출신이었던 만큼(박정희는 본과 2년은 日本 陸
    士를 다님) 둘 다 만주군에서 복무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이 때의 경력이 이
    들 두 사람에겐 두고두고 치명적인 오점이 된 셈이다.
    박정희는 만주군 보병 8단(연대급)에서 부관으로 근무하다가, 1942년 만주국
    군 소위로 임관한 백선엽은 간도특설대에 배속돼 근무하다 해방을 맞았다.
 
 ④ 해방 당시 두 사람의 계급은 모두 중위였다.
 
 ⑤ 두 사람의 만주군 경력과 관련해 비난이 심한 쪽은 박정희보다는 백선엽
    쪽이다. ‘간도특설대’ 근무 경력 때문이다.
 
 ⑥ 해방 후 패잔병의 몰골로 귀국한 두 사람은 이후 韓國軍에서 다시 만났
    다. 여기서도 백선엽이 빨랐다.
    백선엽은 해방되던 해 12월 미군정이 설립한 軍事英語學校 1期生으로 입교
    해 이듬해 2월 임관하였다. 반면 해방 후 중국 북경에서 ‘해방 후 光復軍’에

 

 

백선엽 과 박정희(17-2)

    잠시 몸담았던 박정희는 해방 이듬해 5월 귀국해 고향에서 빈둥거리다가 그
    해 9월 뒤늦게 조선경비사관학교(陸士 전신) 2기생으로 입교했다. 3개월 단
    기 과정을 마치고 그해 12월 박정희가 한국군 소위로 임관할 무렵 백선엽
    은 국방경비대 5연대장을 맡고 있었다.
 
 ⑦ 두 사람이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박정희의 좌익활동 때문이다.
    1948년에 발생한 ‘여순사건’을 계기로 군부내 숙군(肅軍) 바람이 휘몰아쳤는
    데, 여기에 박정희가 걸려든 것이다. 박정희는 남로당에 가입해 군부내 조직
    책을 맡고 있었다. 결국 그는 군사재판에 회부돼 處刑 위기에 몰렸을 때 그
    를 구명해준 사람이 바로 백선엽이었다.
    당시 백선엽은 육군 정보국장(대령)으로 있으면서 숙군 총책임자였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박정희는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육군 소령으로
    다시 군에 복귀하였고, 백선엽은 1師團長으로 전투를 지휘하였습니다.
    현역으로 복귀한 박정희는 1953년 11월 준장으로 승진, 장군이 되었으며 2
    년 뒤 55년 7월 5師團長으로 나가면서 ‘은인’ 백선엽을 다시 만났다. 당시
    백선엽은 육참총장을 마치고 1軍司令官을 맡고 있었는데, 5師團이 1군 예하
    에 있었다.
 
2. 종북 좌파들이 두 사람을 철천지원수로 증오하는 이유
 
 ① 백선엽
    첫째, 국군창설 후 군내 준동하는 南勞黨을 일망타진하고, 좌파들이 철천지
      원수로 여기는 朴正熙를 救命해줬다.
    둘째, 다부동전투에서 낙동강 방어선을 결사적으로 방어하여 赤化統一을 沮
      止(저지)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셋째, 38선 돌파 후 평양에 선봉入城하여 공산주의자 우상 金日成 執務室까
      지 占領하였다.
    넷째, 1951년 白野戰司令部를 창설하여 지리산에 준동하는 공비무리의 숨통
      을 끊어놓는 등 공산도배들에게 치명적인 철퇴를 내려, 그들의 야욕을 분
      쇄했기 때문이다.
    다섯째, 間島特設隊 복무
      東北抗日聯軍은 중국 공산당 지도하에 만주국의 지역에 설치한 반일유격
      대로 1936년에 성립되었다. 1940년 일제는 간도특설대를 설치해 동북항일

 

 

백선엽 과 박정희(17-3)

      연군에 대한 토벌을 강화하자, 김일성을 포함한 대부분은 1941년 소련 영
      내로 쫓겨가 소련군 88교도여단에 편입되었다. 백선엽이 간도특설대에 근
      무한 것은 그로부터 2년이 지난 후인 1943년부터였지만, 좌파들은 백선엽
      이 간도특설대에 근무한 것 그 자체만을 가지고 증오하고 있다.
 
 ② 박정희
    첫째, 박정희는 여순반란사건 때 지난 날 左翼에 일시 참여했던 과오를 뉘
      우치고 右派로 전향했다. 그리고 좌익을 발본색원하는 데 기여했다.
    둘째, 박정희의 5.16 혁명은 북한이 연방제 통일을 화두로 해서 대한민국
      내 親北社會主義 陣營과 연계하여 統一의 結實을 보려했던 그들의 對南戰
      略 흐름을 끊어버렸다.
    셋째, 박정희는 집권한 후 ‘反共’을 主要 國家政策으로 제시했다.
      中央情報部를 만들어 對共搜査의 전선을 정비했다. 이후 친북좌익세력이
      줄줄이 잡혀가 수난을 받았다.
    넷째는 親日軍人(친일파)라는 것이다.
      日本 陸士를 졸업하고 日本 皇軍에 근무했다.
 
3. 백선엽의 軍生活  
 
 ① 해방 전      
   o 出生 : 1920년 11월 23일, 평안남도 강서군 덕흥리
   o 평양사범학교 졸업(1940년 3월)후 보통학교 敎師 복무 중
   o 만주국 봉천군관학교에 입학, 1941년 12월에 졸업하고 소위 임관
 
 ② 해방 후
 
   o 1945년 解放과 동시 고향으로 귀국하여 민족지도자 조만식 선생의 비서로
     서 조국봉사의 길을 찾았으나, 북한은 소련군에 의해 共産化되어가는 상황
     을 인식하고 南韓으로 脫出.
 
   o 1946년 2월 26일, 國防警備隊에 입대하여 국군 中尉로 임관, 창군의 성업
     에 동참. 부산에 5聯隊를 중대부터 대대를 거처 연대까지 조기에 진급을
     거듭하며 창설하였다.    

 

 

백선엽 과 박정희(17-4)

  o 1948년 4월에는 중령으로서 서울에 있는 국방부 전신인 통위부의 정보국
     장으로서 국군 내 남로당 大肅軍(대숙군)을 주도, 이 때 重刑을 선고 받은
     박정희 소령을 구출하였고, 재임 중 대령으로 진급.
 
   o 1949년 7월 22일에는 전남광주지역에 주둔한 5師團長으로 영전하여 여순반
     란사건의 반군 패잔병과 지역 남로당 유격대 등으로 후방을 교란하는 빨치
     산을 소탕하여 新生 大韓民國의 安定에 공헌했다.
 
 ③ 6·25 前後
 
   o 1950년 4월 23일, 수색에 사령부가 위치했던 1師團長으로 부임한 지 2개월
     만에 6.25전쟁의 기습남침을 받아 조직적으로 지연작전을 전개하였고, 낙동
     강 방어선인 다부동전투에서 북한군 3개 사단의 필사적인 공격을 악전고
     투 끝에 격퇴하여,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을 가능하게 하였다.
 
   o 지연작전 중인 7월 27일 상주부근에서 준장으로 진급하였고, 北進 中에는
     최강의 미군사단에 앞서 평양을 先占한 쾌거를 이룩한 바 있다. 1.4후퇴 뒤
     재반격 시는 서울을 선봉으로 탈환하였다.
 
   o 1951년 4월 7일, 국군제1군단장 이던 김백일 장군의 항공기 추락사 고로 순
     국하는 바람에 소장진급과 동시 강릉 第1軍團長으로 부임하였다.
     이 때 1군단은 3군단이 현리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대패 후 해체되어 한국
     군의 유일한 전투군단이였다.  
 
   o 1951년 11월 16일, 밴프리트 8군사령관의 건의로 白野戰戰鬪司令部를 긴급
     편성하게 되었다. 이 군단급 특수부대는 낙동강전선 패잔병 과 남로당 지
     역당 조직 및 여순 반란군 잔존 공비들이 후방 치안을 유린하는 것을 소탕
     하기 위하여 남원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12월 2일부터 1월 말까지 빨치산
     사살 5천8백 명 포로 5천7백 명의 전과를 거두었고 작전 중인 1월 12일 한
     국군 두 번째 중장으로 진급하였다.
 
   o 1952년 4월 5일, 第2軍團을 창설하여 예하에 한국군 최초로 포병단을 편성
     하고 3개 사단을 지휘 하며 두 번째 軍團長 職을 수행하게 되었다.    

 

 

백선엽 과 박정희(17-5)

  o 1952년 7월 23일, 이종찬 육군참모총장이 부산 정치파동으로 해임 후 32세
     에 육군참모총장으로 보임되었다.
     총장 재임 중 무엇보다 우리국군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 은 미국 아이젠
     하워 대통령 당선자가 한국방문시 한국군 20개 師團 편성 안을 건의하여
     즉석 同意를 받아냈던 일이였다. 또 한국군의 숙원이던 師團 마다 포병
     사령부를 편성하여 막강한 화력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o 1953년 1월 31일, 대한민국 최초로 大將으로 진급하였다(33세).
 
   o 1953년 5월 미육군참모총장 초청으로 방미하여 계획에 없던 아이젠하워 대
     통령을 예방하여 韓美相互防衛條約 체결을 제안함으로서 경이적인 한국방
     위 초석을 굳건히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 하였다.  
 
 ④ 休戰 後
 
   o 1954년 2월 14일, 휴전 후 전방 방어지역을 미군으로부터 한국군이 인수하
     기 위하여 4개 군단, 16개 사단으로 편성 된 세계최대 野戰軍을 창설하
     여 최초의 司令官 職을 맡게 되었다.
 
   o 1957년 5월18일, 39개월간 第1野戰軍 司令部의 기틀을 닦아 놓은 후 두 번
     째 陸軍參謀總長으로 다시 보임되었다.
     미 육군 참모총장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국군 현대화계획을 아이젠
     하워 대통령에게 설명하고 신형전차 도입, 포병화력 증강, 공수부대 창설,
     F-86 전투기 도입, 구축함 도입, 방공유도탄부대 편성 등 약속을 받아냈다.
 
   o 이 때 박정희 준장의 少將 진급시 탈락위기를 구제하였다.
 
   o 1959년 2월 23일, 연합참모본부 총장으로 임명되어 1년 3개월 간 최후의
     군보직을 마치고, 1960년 5월 31일, 國家의 巨木이자 救國의 英雄으로서 군
     후배들과 국민들에게 영원히 각인되며 만 40세로 전역하였다.
 
      ※ 근거자료 : 故 백선엽 장군 1주기 및 명예원수 추대식에서 소개된 내용
                                 공동회장 이석복  2021.07.12  명예원수 추대는 안됨

 

 

백선엽 과 박정희(17-6)

4. 박정희의 파란만장한 軍生活
 
 ✲ 解放 前 ✲
 
 ① 출생
   o 1917.11.14. 경북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에서 박성빈·백남의 부부의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o 박정희의 일생은 출생부터가 사투였다. 임신사실을 안 어머니가 그를 끈
     질기게 지우려고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늙은 나이에 딸과 동시에 아이
     를 가진 것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했다.
 
 ② 초등학교 시절
 
   o 어려운 가정형편
     아버지 박성빈은 몰락 양반 가문출신으로 가정일에 무관심했다(한량기질).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어머니는 셋째형 박상희와 박정희를 구미보통학교에
     입학시켰다.
 
   o 학교성적은
     전과목이 고루 우수했고, 암기력이 좋아 산수·역사·지리 등은 언제나 만점
     이었다.
 
 ③ 대구사범 꼴찌 학생
 
   o 박정희는 1932.4∼1937.3월 까지 大邱師範學校를 다녔다. 구미보통학교에서
     대구사범학교에 간 것은 박정희가 처음이었다.
     입학성적은 100명 중 51등이었지만, 사범학교 시절의 성적은 꼴찌권을 맴
     돌았다. 성적이 좋지 않아 매달 7원씩 나오는 官費를 받을 수 없었다.
 
   o 이 무렵 일본은 만주사변(1931)을 일으킨 후 大陸侵略을 위해 혈안이 되었
     다. 일본의 대륙침략의 야욕은 사범학교 교육에도 영향을 미쳐 사범학교
     학생들은 구보, 사격, 검도, 총검술, 구령, 제식훈련 등의 基礎 軍事訓練을
     받아야 했다. 박정희는 나팔, 육상에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교련시간에는

 

 

백선엽 과 박정희(17-7)

     소대장을 맡을 정도로 군사분야에 소질을 보였다.
 
   o 이런 분위기속에서 박정희는 皇民化가 목적인 학교 교육에는 별 관심을 두
     지 않았지만, 日本 軍事文化의 실질을 배우는 데는 열성적이었다.
 
 ④ 교사 박정희
 
   o 1937년 3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박정희는 문경공립보통학교 敎師로 부
     임했다(당시 20세).
     제자들은 박정희가 民族意識을 일깨워 주는 교육을 자주 하였다고 증언했
     다. 조선어 시간에 태극기에 대해 가르쳐주거나, 복도에 보초 학생을 세워
     놓고 몰래 우리나라 歷史를 가르쳐 주었다는 것이다.
 
    o 이 무렵 박정희는 하숙을 했다. 이미 결혼을 해서 딸을 한 명 둔 몸이었지
     만, 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있었다.
 
    o 제자 정순옥은 “내 눈에 비친 박 선생님은 절대로 교사로 평생을 보낼 분
     이 아니었다. 못 다루는 악기가 없었고, 못하는 운동도 없었으며, 하여튼
     매력있는 남자였다”고 회상했다.
 
    o 박정희의 하숙방에는 나폴레옹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박정희는 아이들에
     게 이순신을 비롯한 偉人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너희도 이와 같은 훌륭
     한 사람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o 그는 새벽 4∼5시면 어김없이 일어나서 마을을 내려다보며 나팔을 불었
     다. 마을 사람들은 그의 나팔 소리에 맞춰 하루를 시작했다.
 
   o 1938년 무렵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입학시험을 치를 준비를 하고 있었
     다. 박정희는 “아이들에게 나중에 봐라, 대장이 될란다”라고 말하곤 했다.
 
 ⑤ 만주로 가다
 
   o 박정희와 함께 문경에서 교사생활을 했던 유증선은 훗날 박정희가 만주군  

 

 

백선엽 과 박정희(17-8)

     관학교에 가게된 과정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저는 아무래도 軍人이 되어야겠습니다. 제 성격이 군인 기질인데 문제는 日       
本 陸士에 가기에는 나이가 많다는 것입니다. 만주군관학교는 덜 엄격하지

     만, 역시 나이가 걸립니다. 이후 박정희는 고향에 내려가 형님의 도움을 받
     아 호적 나이를 한 살 낮추고 왔습니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둘이 머
     리를 맞대고 고민하던 차에 내가 만주군관학교에서 환영을 받을 행동을 하
     자며 ‘血書’를 제안했습니다. 박정희는 지체없이 ‘진충보국 멸사봉공’이라는
     혈서를 써서 만주로 보냈고, 그것이 만주지역 신문에 보도되었습니다.”
 
   o 혈서가 만주 신문에 나게 도와준 것은 대구사범 교련 주임이던 아리카와
     대좌(대령)로 보인다.
     당시 박정희는 만주에 가서 아리카와 대좌를 만났고, 만주군관 입학자격을
     얻게 된다.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후 김종신 청와대 공보비서관이 “각하는 왜 만주에
     가셨습니까?” 하고 묻자 박정희는 “긴 칼 차고 싶어서 갔지”하고 대답했다.
 
   o 1939년 10월 박정희는 만주국 陸軍軍官學校 시험을 치렀고, 이듬해 4월 제
     2기생으로 입교했다. 240명 합격자 가운데 15等이었다(당시 23세).
 
   o 칠순의 어머니가 박정희의 옷자락을 붙들고 “늙은 어미를 두고 왜 그 먼
     곳에 가려 하느냐”고 했다. 어머니의 눈물을 뒤로 하고 박정희는 기차에 올
     랐다.
 
 ⑥ 만주군관학교
 
   o 만주군관학교는 4년제 일본 육사와 달리 예과 과정인 2년제였다. 만주군관
     학교 제2기생은 만주계 240명, 일본계 240명으로 모두 480명이었다. 조선인
     은 11명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만주계에 소속되었다. 박정희의 조선인 동기
     생 중에 5·16 군사혁명을 저지하려 한 이한림 장군이 있다.
 
   o 박정희 동기인 이한림 장군은 회고록에서
    “가끔 둘이 만나면 조국의 비통한 현실을 개탄하면서 같이 울기도 하고, 결
     심을 밝히기도 했다. 특히 나에게 감명을 준 것은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  

 

 

백선엽 과 박정희(17-9)

     는 그 불굴의 정신이었다”고 말했다. 박정희는 개인의 울분과 한을 강한 육
     체단련과 精神武裝을 통해 극복해 나갔다. 군관학교 2년간 검도, 유도, 승
     마, 교련은 물론 모든 학과목에서 특출한 실력을 발휘했다.  
 
   o 1942년 3월 23일 만주군관학교 졸업 때 박정희는 우등상장을 받은 5명에
     명단을 올렸다. 사범학교 꼴찌 출신이 만주군관학교 수석졸업생으로서 만
     주국 황제의 금시계를 상으로 받았을 뿐 아니라, 日本 陸士에 進學할 수 있
     는 特典을 갖게 된 것이다.
 
 ⑦ 日本 陸士 卒業과 少尉 임관
 
   o 1942년 10월, 박정희는 일본 육사 본과 3학년에 留學生隊로 편입하여 교
     육을 받았다. 이 무렵 중국을 넘어 아시아를 제패하려는 일본의 군국주의
     는 최고조로 치닫고 있었다.
     1943년 일본 육사는 전쟁터에서 사망한 초급장교를 보충하기 위해 신입생
     을 2000名으로 늘렸다. 이 당시 배출된 초급장교 중 3분의 1이 가미카제특
     공대가 되어 전사했다.  
 
   o 1944년 4월 일본 육사를 졸업한 박정희는 소위로 임관했고, 견습 후 그해
     7월 소속부대를 배치받아 소대장을 맡았다.
     박정희가 배치받은 만주군 8團(단: 연대)은 주로 중국인으로 구성되었으며,
     단장도 당제영이라는 중국인이었다. 8단의 주요 임무는 모택동 산하의 팔
     로군 제17단을 방어, 토벌하는 것이었다.
 
 ⑧ 光復軍과 평진대대
 
   o 박정희는 1945년 7월 중위로 진급했다.
     8월 9일 소련이 2차대전에 참전하면서 만주지역 정세가 복잡하게 돌아갔
     다. 8월 17일에 중국 방송을 통해 일본군이 항복한 사실을 알았다.
     일본군이 항복한 사실이 알려지자 8단의 중국인 단장 당제영은 박정희와
     신현준, 이주일 등 조선인 장교 4명을 일본인 장교들과 함께 무장해제시켰
     다.

 

 

 

백선엽 과 박정희(17-10)

 o 光復軍 평진대대
    이들 4명은 일단 光復軍에 들어가기로 했다. 만주군·일본군 출신 장병들로
    편성된 약200명의 북경 광복군은 광복군 제3지대 駐(주)평진대대로 불렸다.
    박정희는 평진대대에 있으면서 우리 민족끼리는 좌·우익으로 갈려 싸우고,
    중국과의 관계를 놓고는 親장개석파와 親모택동파로 나뉘어 주도권 다툼을
    벌이는 모습에 절망했다.
 
 ✲ 해방 후 ✲
 
 ① 초라한 歸國, 陸士 入敎
 
   o 부산을 통해 귀국한 박정희는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고향 구미에서 4개월을 허송세월하며 보낸 후, 그는 천직인 軍人의 길을 걷
     기로 결심한다.
 
   o 1946년 9월 24일 조선경비사관학교 第2期生으로 입학했다.
     만주군관학교· 일본 육사에 이어 세 번째의 士官學校였다. 입시경쟁률은 2
     대1이었다. 당시 입학생은 263명으로 중국·만주·일본군에서 장교로 근무한
     자가 35명에 이르렀다.
 
   o 박정희는 29세였다. 나이나 경력면에서 최고참에 속했지만, 박정희는 자기
     보다 나이가 8∼9세나 어린 중대장 밑에서 교육훈련을 불평없이 잘 받았
     다.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입학한 박정희는 사범학교에서 5년, 만주군관학교와
     日本 陸士에서 4년, 조선경비사관학교에서 3개월 등 정통 엘리트 將校敎育
     만 10年을 받은 셈이다.
     만주군과 일본군의 군복을 입었던 수많은 장교들은 신생독립국을 향한 준
     비와 창군 과정에서 훌륭한 자원이었다.
 
   o 1946년 1월 미군정은 남조선국방경비대를 창설하고 태릉에서 1개 대대 병
     력의 聯隊를 발족시켰다. 이어 5연대(부산), 7연대(충북), 4연대(전남), 6연
     대(대구), 3연대(전북), 2연대(대전), 8연대(춘천)가 각각 창설되었다. 5월 1
     일에는 국방경비사관학교가 문을 열었다.

 

 

백선엽 과 박정희(17-11)

     당시 미군정청은 사상의 자유를 이유로 입대자의 전력을 문제 삼지 않았
     다. 그러다 보니 국방경비대는 좌우익이 뒤섞인 상태가 되었다. 이런 모순
     은 훗날 결국 터져 나와 肅軍(숙군)의 계기가 된다. 사관학교를 졸업한 박
     정희는 춘천 8연대의 소대장으로 부임했다.
 
 ② 兄 박상희의 죽음과 남로당 가입  
 
   o 1946년 10월 1일 좌익세력의 주도로 대구폭동이 일어났다.
     폭도들은 쌀배급 반대와 박헌영 체포령을 취소하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박정희의 셋째 兄 박상희는 당시 ‘건국준비위원회 구미지부장’을 맡고 있
     다가 구미 폭동 진압과정에서 경찰에 살해되었다.
 
   o 박상희는 박정희가 교사를 그만두고 만주군관학교에 가는 것을 못마땅
     해했다. 해방 후에는 理念的인 路線 差異로 박정희와 갈등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박상희는 집안의 기둥이었고, 이런 형을 박정희는 크게 존경하고 있
     었다.
 
   o 박상희, 폭동지도자로 사살되다
     해방 전 박상희는 조선·동아일보의 구미지국장 겸 주재기자로 활동하고 있
     었다. 해방이 되자 그는 마을 청년들을 규합해 ‘건국준비위원회 구미지부장’
     을 맡았다. 대구 폭동이 일어나자 박상희가 구미지역 폭동세력의 지도자가
     되었다. 박상희는 군중을 이끌고 선산경찰서를 습격했다. 그는 흥분한 군중
     의 폭도화를 막음으로써 유지들로부터도 신임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대구 등지에서 경찰이 무참하게 살해당하는 장면을 본 경찰은 구미
     폭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폭도들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진압과정에서 박상희는 경찰의 총탄을 맞고 사망했다. 그의 나이 42세였다.
 
   o 兄의 죽음은 박정희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박정희는 兄을 죽음으로 내몬
     우익 경찰과 그들의 배후로 생각한 美軍에 대해 증오심을 품었다. 이때
     박정희는 사상적 방황을 하다가 울분에 찬 마음으로 좌익으로 기울게
     된다.
 
   o 증언에 의하면 박정희는 1947년 5월 이전에 南勞黨에 加入한 것으로 보

 

 

백선엽 과 박정희(17-12)

     인다(당시 춘천 8연대의 소대장). 존경했던 兄의 죽음으로 心情的으로 좌
     익으로 기운 박정희에게 형의 친구와 만주군 시절의 좌익 인맥들이 접
     근해 왔다.
     박정희는 형이 알고 지내던 황태성·이재복 등 경북 인민위원회 지도부와
     연결되면서 이들을 통해 남로당 가입 권유를 받았다.
     이재복은 군대 내의 남로당 조직을 관리하는 군사부의 책임자였다. 남로당
     가입으로 박정희는 인생 최대의 시련을 맞게 된다.
 
 ③ 여순반란, 백선엽과 김창룡  
 
   o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 중이던 국군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수천명의 사상자가 났다. 여순반란은 갓 창설한 군대 내에 남로당 세력이

     조직적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의미했다.
 
   o 여순반란과 함께 시작된 숙군의 칼날은 박정희를 피해가지 않았다.
     박정희는 남로당 가입혐의로 1948년 11월 11일 체포되어 남산 기슭 헌병대
     영창에 수감됐다. 박정희를 조사한 이는 1연대 정보주임 김창룡 소령이다.
     그는 군내 좌익 색출 검거를 주도하는 저승사자 같은 인물이었다.
 
   o 박정희는 체포되는 순간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며 수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그는 여순반란 진압시 토벌사령부의 정보장교로 근무하면서 확실한 국군
     장교로서 행동을 했지만, 숙군 분위기에서 남로당 가입을 피해 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박정희는 자신이 알고 있는 남로당 조직원(세포)을 털어 놓았다. 당시 박정
     희의 진술서를 본 박정희 사관학교 동기 김안일은 “박정희가 理念的 共産
     主義者가 아니고, 人間關係와 復讐心에 얽혀서 南勞黨에 들어간 感傷的 共
     産主義者라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o 혹독한 고문이 이어졌다. 당시 숙군 수사 총책임자는 육본 정보국장이던
     백선엽 대령이었다.
     백선엽은 숙군수사를 총괄하고 있던 육본 정보국 특무과 김안일 소령의 건
     의를 받아들여 박정희를 면담했다. 백선엽이 박정희를 면담하기까지 관련

 

 

백선엽 과 박정희(17-13)

     된 인물이 여럿 있지만, 당시 항공사관학교 김정렬 校長의 救命運動이 큰
     영향을 미쳤다. 김정렬은 자신이 신임하던 박원석 대위가 박정희의 세포조
     직으로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박원석을 살리기 위해 그 윗선인 박정희
     의 구명운동에 나선 것이다. 박원석은 박정희가 고문에 못이겨 세포조직이
     라고 허위자백한 인물이다.  
 
   o 백선엽을 만난 박정희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애원조로 말했다.
     백선엽은 무심코 “도와드리지요”하고 대답했다.
     훗날 백선엽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분이 살아난 것은 간단합니다. 저와
     직접 대면했기 때문입니다. 제 앞에 있던 그분의 측은한 모습, 거기에 저의
     마음이 움직인 것입니다.”  
 
 ④ 이현란, 용산시절
 
   o 1947년 가을, 박정희가 연애에 빠졌다. 상대는 이현란이라는 여성으로 북한
     공산체제에 환멸을 느껴 월남한 여자였다. 박정희는 이해 9월 2일 대위로
     진급해 조선경비사관학교 중대장으로 부임해 서울에 와 있었다.
     열렬한 구애 끝에 박정희는 1948년 초 이현란과 약혼을 하고 용산 관사에
     서 동거에 들어갔다. 이 당시 이미 박정희는 남로당과 연결돼 있었다.
 
   o 이현란은 박정희 체포 당시의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떨릴 정도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북에서
     빨갱이들의 망동에 시달리다 왔는데 빨갱이 마누라라니..... 1950년 2월에 이
     현란이 가출을 했다. 박정희는 사방을 찿아 헤맸지만 결국 썰렁한 관사에
     혼자 남게 됐다. 이때 박정희 나이 33세였다.  
 
   o 한 해 앞선 1949년 여름에는 한평생 고생만 하던 어머니도 세상을 떠났
     다.
     형 박상희에 이어 막내까지 남로당원으로 끌려가자 박정희 어머니는 그 충
     격에 몸져 누웠다 세상을 등진 것이다.
     이 무렵 박정희는 군에서 파면되고, 생활은 어렵고, 아내는 가출하고, 어머
     니는 세상을 떠나고, 친구들에게는 배신자로 낙인 찍힌 상태였다. 박정희  

 

 

 

백선엽 과 박정희(17-14)

     생애 최고로 비참한 시기였다.
 
 ⑤ 전투정보과 文官 박정희, 6·25 전야  
 
   o 한차례 지옥 문턱을 다녀왔지만, 군내 남로당 숙청사건은 박정희가 확
     실한 사상적 정체성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남로당에 연루되어 군에서 파면을 당했지만, 육군 정보국의 비공식 문
     관으로 계속 근무할 수 있었다. 이는 그를 구명한 백선엽 등의 배려가 큰
     탓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박정희가 워낙 탁월한 군인이었으며, 군사정보
     전문가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무렵 박정희는 김종필을 포함한
     육사8기생 엘리트 장교들과 만나게 된다. 이들이 바로 5·16을 기획하고 실
     행한 핵심 세력들이다. 박정희는 육사 8기생들의 두터운 신망을 받았다.
 
   o 육사8기생 이영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作戰과 情報에 대해서 경험이 없었던 저희들의 눈에 박정희 그분은 하나의
     경이였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형님 같기도 하고, 아버지 같은 느낌도 들
     었습니다. 업무에서는 엄격한 분이 술자리에서는 상하관계를 의식하지 않
     고 소탈하게 우리를 대해주셨습니다.”
 
   o 1949년 하반기부터 더욱 심해진 북한과 남한 내 빨치산의 활동은 박정
     희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었다.
     1949년 12월 17일 작성된 육군본부 전투정보과의 ‘연말종합 적정판단서’는
     박정희가 쓴 보고서다.
     판단의 결론은 “1950년 봄을 계기로 하여 적정의 급진적인 변화가 예기된
     다. 북괴는 전 기능을 동원하여 전쟁 준비를 갖추고 나면 38도선 일대에
     걸쳐 전면 공격을 취할 기도를 갖고 있다고 판단된다.”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1976년 6월 25일 일기에 이 보고서를 언급하며 “우리는 남침징후
     를 6개월 전에 예측했었다. 육본 정보국에서는 적의 남침 가능성이 농후하
     다는 것을 군 수뇌부에 누차 보고하였다. 그러나 이 판단서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o 6·25가 발발하자 이 報告書의 正確性은 8期生 內에서 박정희의 신뢰감
     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백선엽 과 박정희(17-15)

     6·25 직전 박정희는 자신을 심문했던 장교들을 상대로 복직 탄원서를 받으
     러 다닐 정도로 그의 軍內 位置가 호전되었다.
 
 ✲ 6·25 이후 軍으로 복직 ✲
 
   o 정보국 文官으로 활동하며 복직신청서를 넣어 놓은 상태였지만, 복직은
     예상보다 빨리 이루어졌다. 6·25가 발발했기 때문이다.  
      6·25는 민족의 비극이었지만, 박정희 個人에게는 새로운 機會를 가져다 주
     었다. 6·25가 일어났을 때 그는 어머니 제사를 위해 고향에 내려가 있었다.
     박정희는 부대를 떠나기에 앞서 김종필·이영근 중위를 불러 “상황이 심상
     치않으니 무슨 일이 있으면 구미경찰서를 통해 연락을 해달라”고 당부해
     놓았다.
 
   o 적이 공격을 개시했다는 전보를 받은 박정희는 신속하게 복귀했다.
     오후 2시경 집을 떠나 도보로 구미로 향했다. 25일 야간 북행열차에 몸을
     실은 박정희는 27일 오전 7시경 용산역에 도착했다. 곧바로 용산 육군본부
     지하 벙커의 상황실로 복귀했지만, 이미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을 탈출한 상
     황이었다. 28일부터는 서울이 적의 공격을 받았다.
 
   o 박정희는 28일밤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넌 후 걸어서 陸本의 집결지
     인 시흥에 도착했다. 육본은 28일 오후 시흥에서 水原으로 옮겼다. 정보국
     소속의 김종필 중위가 수원의 임시정보국 건물에 들어서니 박정희가 정문
     에 서서 자기들을 맞아 주고 있었다. 김종필은 “저분은 역시 북으로 가지
     않으셨구나!” 하며 안도했다.
 
   o 당시 장도영 정보국장은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6월 30일 오전 수원국민학교에 임시로 설치된 정보국에 나갔더니 박정희
     문관과 장병들이 무사히 와 있었다. 28일 새벽에 적군이 서울에 진입한 상
     황에서 그는 다르게 행동할 수도 있었지 않았겠는가? 나는 이때부터 그에
     대한 思想的 疑心을 버렸다.”
 
   o 박정희의 복직
     6·25는 군 내에서 박정희에 대한 思想的 疑心을 解消시키는 契機가 되었

 

 

백선엽 과 박정희(17-16)

     다. 장도영은 이때 박정희가 낡은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고 말했다. 복직하
     지 않은 문관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장도영은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에게 박
     정희의 복직을 정식으로 건의했다. 1950년 7월 14일 박정희는 소령 계급을
     달고 육군본부 전투정보과장에 임명되었다.
 
 ✲ 육영수와 박정희 ✲
 
   o 박정희는 6·25기간 육군본부를 따라 대구와 부산으로 옮겨 다녔다. 당시 박
     정희는 나이 33세에 외롭게 살고 있었다. 박정희가 부산에 머물 때 같은
     정보과에 근무하고 있던 송재천 소위가 자신의 이모 딸인 육영수를 만나
     볼 것을 권했다. 육영수는 부모님을 따라 부산에서 피란생활 중이었다.
 
   o 훗날 육영수는 박정희의 첫인상을 이렇게 말했다.
    “맛선 보던 날 군화를 벗고 계시는 뒷모습이 말할 수 없이 든든해 보였어요.
     사람은 얼굴로는 남을 속일 수 있지만 뒷모습은 속이지 못하는 법이거든
     요.” 박정희도 육영수에 대해 인생 배필로서 확신을 가졌다.
 
   o 1950년 9월 15일 박정희는 중령으로 진급했다. UN군이 인천상륙작전을 감
     행하여 전황이 호전되자, 박정희· 육영수 커플은 짬짬이 데이트를 했다.
 
   o 약혼했지만, 육영수 아버지 육종관은 박정희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박정희가 육영수보다 8살이나 많고, 한번 결혼한 적도 있으며, 전쟁 통에
     장래가 불투명한 軍人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육종관은 옥천의 갑부로 양
     반 집안이지만, 박정희는 내세울 것이 없는 가난한 농부집안 출신이었다.
 
   o 하지만 그 무엇도 박정희·육영수 사이의 사랑을 갈라놓을 수는 없었다.
     1950년 12월 12일 대구 계산동 천주교 성당에서 결혼식이 열렸다. 육영수
     아버지 육종관은 끝내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o 육영수는 박정희를 깍듯하게 대했으며, 정성을 다해 내조했다. 이런 육영수
     를 박정희는 누구보다 사랑했으며, 고마워하고, 존경하고 또 의지했다.
 
     ※ 자료근거 : 탄생 100주년으로 돌아보는 박정희 100장면

 

 

백선엽 과 박정희(17-17)

5. 참고사항
 
 ① 백선엽의 출생과 성장 과정
  o 1921년 일제강점기 평남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에서 아버지 백윤상과 어머
    니 방효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7살 때 아버지를 여이고 홀어머니 아래에
    서 동생들과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o 군인이 되기를 희망하였으나, 어려운 가정환경으로 인하여 평양사범학교로
    진학하였다.
  o 1939년 3월, 졸업후 교직에 종사하다가, 군인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만주국
    봉천군관학교에 입교한다.
  o 1941. 봉천군관학교를 제9기로 졸업하고 만주군 소위로 임관했다.
  o 1943년 2월, 간도특설대로 전근하여 3년간 복무했다. 간도특설대는 1938년
     12월에 독립군 소탕을 위해 창설된 기구였다.
 
 ② 백선엽과 박정희의 軍生活 비교
   o 백선엽은 “6·25전쟁의 時空에서 가장 빛났던 별”이었다.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미군과의 협조와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을 받아 고속
     승진하였다. 그리고 위기에 처한 박정희를 救해주었다.  
   o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특전으로 日本 陸士 3
     학년으로 편입하여 졸업하였고 해방후에는 大韓民國 陸士 2期生으로 졸업
     하여 군인으로서 최고의 엘리트였음에도 실수로 인해 남로당에 가입한 죄
     로 위기에 처해 백선엽의 도움으로 어렵게 군생활을 하였다.
   o 백선엽은 “軍은 政治의 바람을 타서는 안된다”는 원칙주의자였다.
     이승만 정권이 부패하여 4·19가 벌어지기 며칠전 정국이 혼란한 틈을 타서
     당시 대한민국 육군을 이끄는 참모총장인 백선엽에게 CIA 한국지부장(피
     어드 실바)가 찿아와 “백장군, 나서지 않으시겠습니까?” 하고 말할 때에
     도 답변을 안해주었다.
   o 박정희는 국가·사회질서가 어지럽게 되자 과감히 군사혁명을 일으켜 이를
     바로 잡고,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 냄으로써 우리나라를 빈곤국에서 일약
     개발도상국으로 올라서는 발판을 세워놓았다. 그리고 백선엽에 대해 최고
     의 예우를 해주었다.
     ※ 朴正熙 大統領에 대한 世界의 政治家와 碩學들의 評價는 대단하다.

<출처> 과천시 노인복지관 박점수 강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