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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정치권력사 - 23. 고종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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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락 유머 다큐

2022. 6. 21.

[ 고려 정치권력사 - 23. 고종편 ]

(고종의 묘인 강화 홍릉. 사진출처는 오마이뉴스)

고려의 23대 군주인 고종의 휘는 철이며 초휘는 진이었다. 강종이 훙어하자 1213년 음력 8월에 왕위에 올랐다. 고려의 역대 제왕들 중 가장 재위기간이 긴데 무려 46년이다. 덕분에 최충헌-최이(우)-최항-최의로 이어졌던 4대에 걸친 최씨집안의 집권과 쇄락을 모두 목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근 30년 가까이 이어진 여몽전쟁으로 재위기간의 절반 이상을 강화도에서 보내야 했으며 전 국토는 그야말로 아작이 났다. 누군가는 고종을 풍운의 임금이라 평하던데, 틀린 말도 아니지만 필자 생각에는 시간을 벗삼아 꾸역꾸역 재위를 지킨 평범한 보통이의 이미지가 더 강하다. 아무튼 오랜 재위기간 덕분에 본 포스팅은 엄청 길어질 것 같다. 특히 여몽전쟁이 있으니... 휴~ 큰 숨 한번 몰아쉬고 시작한다. ^^

1. 대요수국(후요)과의 전쟁

고종이 즉위할 때 최충헌의 권세는 거의 피크를 찍고 있었다. 왕을 두명이나 갈아치워가며 정권을 유지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최충헌이 이사를 하자 호위하는 병사가 몇리에 걸쳐 길을 메웠고 재상을 포함한 많은 벼슬아치들이 그를 수행했다고 한다. 왕씨의 고려가 아니라 최씨의 고려라 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일본의 쇼군 같다고나 할까?

최충헌의 권세가 나날이 그 세를 더하고 있을 때 동아시아의 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강종편에 소개하였으니 참고하고... 고종 3년인 1216년 음력 8월에 거란의 일족인 후요가 고려를 침공해 왔다. 고려사 기록에 의하면 고종 6년인 1219년 정월까지 전쟁은 계속되는데 당시의 정세나 후요의 군세 그리고 공격빈도 등을 감안해 볼 때 금나라와 몽고의 공격에 밀린 후요가 고려의 북부지역에 눌러앉기 위해 침공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후요의 침공에 고려의 초기 대응은 속수무책이었다. 고려사 기록에는 개전 초기 몇몇 소규모 전과가 기록되어 있으나 전체적인 전선은 크게 뒤로 후퇴하였으며 북계의 여러 고을이 동시다발적으로 침공을 당했다. 고려의 초기 패전은 물론 최충헌의 전횡 때문이었으며 두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최충헌의 방심과 정보력의 부재였다. 고려사 최충헌 반역열전에는 최충헌이 변방에서 급보가 올라오면 "어찌 사소한 일로 역마를 귀찮게 하고 조정을 놀라게 하는가?"하고 꾸짖으며 보고한 사람들을 죄다 유배보냈다고 한다. 그러자 변방의 장수들이 두세 성을 함락시킬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런 다음에 급보를 보내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는 것. 무슨 양치기 소년 우화를 읽는 것도 아니고 실제 역사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니 실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ㅡㅡ 아마도 최충헌은 초기 후요의 침공을 늘상 있어왔던 변방 지역의 노략질 정도로 여겼던 듯 하다. 이 말은 몽고의 발호로 강성했던 금나라의 국운이 기울고 있던 당시의 정세를 몰랐다는 것과 동치이며 더욱이 오랜 수탈로 인해 변경의 백성들이 후요군에 동조할 가능성을 아예 생각지도 않았다는 소리와 같다. 실제 후요군은 양수척과 같은 고려의 천민집단을 길잡이로 삼았으며 최충헌이 이 소식을 듣고 애첩 자운선 등을 내치고서야 내부 동조세력을 잠재울 수 있었다. 둘째, 사병의 정예화와 관군의 몰락이다. 당시 최충헌은 도방을 통해 자신을 호위하기 위한 대규모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고려사 기록에 의하면 용맹한 자들은 모두 최충헌 부자의 문객들인 반면 관군은 약골로 아무 쓸모가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문객들 가운데 관군으로 종군하겠다고 청하는 사람이 있으며 곧바로 유배를 보냈다고 하니 그 실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가고 남음이 있다. 이후 후요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는 조충의 열전을 보면 후요군을 막기 위해 경도(개경) 주민 가운데 종군할 수 있는 사람은 모조리 군대에 편입시키고 승려까지 징발하여 그 수가 수만에 이르렀으나 날래고 용맹한 자들은 모두 최충헌 부자의 문객이어서 관군은 모두 늙고 병약한 병사들이라 원수였던 정숙첨이 맥이 풀려 버렸다고 한다. ㅡㅡ 여기서 한가지 의문점이 드는 것이 집권자인 최충헌에게도 한가닥 양심이란게 있을 것인데 전쟁 상황에 어째서 사병을 관군에 편입시키지 않았던 것일까? 고종 4년인 1217년 후요군은 개경 근처에까지 이르렀는데 도성이 혼란을 틈을 타 흥왕사, 홍원사, 경복사 등 도성 인근 사찰의 승려들이 최충헌을 암살하려 한 사건이 발생한다. 원인은 최충헌 측근이었던 낭장 김덕명이 사찰의 재산을 갈취하고 승려들에게 횡포를 부렸기 때문인데 신변에 위협을 느낀 최충헌은 사병을 동원해 승려들을 숙청, 참수당한 승려의 수가 거의 8백여명에 이르러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그 시체 때문에 사람들이 몇 달 동안이나 지나다니지 못했다고 한다. 독재자의 숙명이라고나 할까? 최충헌 역시 반대세력에 의한 쿠데타나 암살모의에 항상 떨었던 것이다. 후요군의 침략으로 고려의 운명이 바람 앞에 등불인데 집권자라는 사람이 반대파 숙청이나 하고 앉아 있으니... 이게 당시 고려의 민낯이었다. 사병을 관군에 편입시키지 않은 최충헌의 이러한 행보는 여몽전쟁 기간 최충헌의 뒤를 이어 집권한 그의 후손들에게도 그대로 전해진다. 당시 세계 최강의 강군이 몽고군이었다고는 하나 백성들이 몽고군에게 도륙당하고 전 국토가 초토화된 책임으로부터 최씨 집권자들이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도 하늘이 아직 고려를 버리지 않았는지 구국의 영웅이 등장하는데 바로 김취려와 조충이다. 김취려는 정통 무관이고 조충은 한림학사 출신의 문관이었는데 문무의 능력을 겸하였다고 하여 상장군의 지위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들의 고려사 열전에는 한결같이 관대하고 온화했지만 군율을 엄히 세워 군사를 통솔했다고 적고 있다. 특히 훗날 참전하는 몽고의 장수 카치운은 김취려와 조충의 인품에 감복해 이들과 의형제를 맺을 정도였다. 고려사 김취려 열전에는 카치운이 김취려와 조충을 만나 술을 마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몽고의 풍습으로 술을 마시면서도 정중히 손님대접을 하는 조충의 모습에 카치운이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그 장면만 보면 몽고가 왜 고려를 침략하는지 의아할 정도. 후요군은 총 2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했는데 김취려, 조충을 비롯한 고려 맹장들의 활약으로 초반의 부진을 딛고 점차 전황을 회복시켜 나간다. 2차 침공 당시 태조탄(지금의 평안북도 박천군)에서 비를 만나 추격을 쉬는 사이 후요군의 기습을 허용하여 참패를 당하고 임진강을 넘어 개성 북쪽 금교역까지 후요군이 도달하는 등 부침이 있었지만 1218년 3월에 조충이 서북면병마사가 되고, 병으로 한동안 전장을 이탈했던 김취려가 전장에 복귀하면서 전세를 역전되기 시작한다. 후요군은 고려군의 병참선을 끊고자 하였지만 박의린 장군에게 패배했고 이후 수만의 기병을 이용한 반격도 실패로 돌아가자 강동성(지금의 평양 인근)에 들어가 농성에 들어간다.

패퇴하여 농성에 들어갔다고는 하나 당시 강동성에 주둔한 후요군의 군세는 제법 대단했던 모양이다. 하긴 코너에 몰린 쥐에 형국이니 그럴 수 밖에... 1218년 음력 9월에 농성에 들어간 후요군을 12월에 이르기까지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 새로운 변수가 등장하는데 바로 몽고군의 참전이다. 칭기즈칸은 거란병(후요)이 고려에 도망한지 3년이나 되었는데 아직도 쓸어없애지 못하고 있다 하면서 몽고군 1만과 동진군 2만을 파병했다. 사전에 고려와의 협의가 없었던 일방적인 파병이었으며 동진군의 경우 전쟁기간 후요군과는 별개로 고려를 침탈한 적이 있었던 관계로 고려 조정의 고민은 깊었다. 몽고군은 화, 맹, 순, 덕의 네 성을 깨드리고 진격하여 강동성으로 향했는데 큰눈을 만나 보급길이 막히자 고려 조정에 군량을 요구하였다. 고려 조정은 고민 끝에 군량을 지원한다. 1219년 정월에 몽고의 카치운, 동진의 완안자연, 고려의 조충, 김취려가 강동성을 포위하자 후요군은 농성을 풀고 항복했다. 이 때 후요군의 지도부는 서로가 죽고 죽이는 개막장 상태였다고 한다. 몽고군은 후요 토벌의 공을 내세워 고려에 형제지국의 예와 매년 공물의 제공을 요구하였다. 이후 몽고는 매년 사신을 파견해와 공물을 요구하는데 그 정도가 과해 종국에는 여몽전쟁의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게 된다.

앞서 언급했지만 개경 주변 사찰 승려들의 최충헌 암살모의 사건 외에도 대요수국과의 전쟁 와중에 전라도 전주와 서경에서 반란사건이 일어났다. 사서의 기록을 살펴보면 이 역시 무신정권기간 내내 이어진 농민항쟁의 성격과 유사하다. 이러한 크고 작은 반란사건은 이후로도 끊임없이 이어진다. 한마디로 고려의 상황이 정상이 아니였다는 소리다. 그러나 최충헌의 권력은 자신을 넘어 세습되는 정도에까지 이르게 된다.

2. 최충헌의 죽음과 2대 집권자 최이(우)

후요군을 물리친 조충 등이 개선하자 최충헌은 조충 등을 시기해 영아례(개선하는 장군을 맞이하는 군대 의식)를 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개인적으로 잔치를 벌여 장군들의 노고를 치하했으며 그 비용을 백관들로부터 거둬들였다고 한다. 한마디로 전쟁에 승리한 조충 등을 정치적으로 경계했다는 말이다. 이때가 고종 6년인 1219년이다. 이해에 최충헌이 죽는데, 죽는 순간까지 권력자로서의 음험한 본성을 감추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죽음이 다가옴을 감지한 최충헌은 짐짓 너그러움을 표현하기도 했다. 죄수들을 사면하고 유배된 사람들을 석방하는데, 이때 교동현에 있던 희종이 개경에 돌아온다. 최충헌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 중 맏이인 최이(우)와 둘째인 최향이 후계자의 자리를 두고 경쟁하고 있었던 듯 하다. 물론 이러한 사실을 최충헌은 알고 있었지만 최이(우)에게 권력을 이양하고자 "병이 낫지 않을 경우 내부로부터 변란이 일어날까 염려스러우니 너는 다시 오지 말라."고 일렀다. 자신의 병을 핑계로 최이를 꾀어 제거할 음모를 미연에 방지한 것인데 최충헌의 주도면밀함에 혀를 내두르게 되면서도 자식의 문병까지 막아야 하는 것이 권력자의 운명이라면 굳이 권력을 잡고 애써 유지해야 할 이유가 뭔지 일종의 회의감이 들기도 한다. 죽음이 문턱에 이르렀음을 느끼자 최충헌은 악공들을 불러 하루종일 음악을 연주하게 한 뒤 그 음악을 들으면서 죽었다. 고려사는 백관들이 모두 상복을 입고 장례에 참석했으며 마치 국왕의 장례와 같았다고 전하고 있다.

최충헌이란 인물을 평할 때 꼭 빠지지 않는 의문 중에 하나가 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누렸으면서 왜 스스로 왕위에 오르지 않았냐는 점이다. 여기에 대해 필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신화가 아닌 한 왕건, 이성계 같은 창업군주들은 전장에서 잔뼈가 굵으며 자신의 존재를 일반 민중들 사이에 각인시키며 왕위에 올랐다. 반면 최충헌은 지배층 내부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집권했기 때문에 그가 왕이 되어야 할 정치적 명분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비록 권력의 정도가 비정상적일 정도로 거대했다고는 하지만 최충헌 역시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었기에 자신이 왕위에 오른다 한들 지배층은 물론 민중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왕위에 오르지 않아도 하루걸러 반란과 농민항쟁이 일어나고 있던 시기인데 그 마지막 책임을 온전히 자기가 짊어지는 것은 최충헌도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아무튼 최충헌이 죽자 최씨 무신정권의 2대 집권자 최이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최이의 원래 이름은 우였는데 훗날 이로 개명했다. 권력을 물려받은 최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경쟁자였던 동생 최향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최향을 지지했던 최주문, 지윤심, 유송절, 김덕명은 최충헌 문병을 핑계로 최이를 죽이려고 했는데 아버지 최충헌의 유언에 따라 문병을 가지않고 의심하던 최이가 김덕명의 배반으로 사태를 온전히 파악하고 나머지 세사람을 유배보내거나 죽여버렸다. 그럼 다음 동생 최향과 그 측근들을 홍주(지금의 충남 홍성군 홍성읍) 등지로 유배시켰는데 최향이 불만을 품고 홍주에서 불량배를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최향의 반란은 제법 큰 사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향은 홍주의 지방관들을 죽여버리고 유배지에 있던 자신의 측근들을 불러모았으며 인근 고을에 격문을 보내 원군을 내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이에 최이는 채송년 등을 파견하여 진압에 나서고 이내 진압되어 최향은 바위 벼랑에서 떨어져 석굴에 몸을 숨겨야 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추격군이 당도하자 스스로 목을 찔러 죽은 척을 하였지만 들켜서 옥에 수감되었는데 옥중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잔당들이 거의가 처형된 것을 감안하면 최향 역시 최이에 의해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과정에서 무고나 죄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모두 죽였으므로 최이 역시 집권초기 최충헌의 공포정치를 이어갔다고 보는 것이 가하다.

최이가 아버지 최충헌과 다른 점이 있다면 무신정권 아래에서 신음하던 문신들의 위상을 크게 끌어올린 점이다. 물론 최충헌 역시 이전의 무신 집권자들에 비해 문신들을 우대하긴 했지만 최이의 경우는 아예 정방이라 불렸던 조직을 신설하고 여기에 문신들을 소속시켜 인사권을 행사했다. 한마디로 세습된 권력을 무력을 동반한 공포정치에만 의존해 지킨 것이 아니라 시스템화 해서 문신들 중 친위세력을 길러내 지켰다는 말이다. 그러나 정방 역시 최씨집안의 권력강화 도구에 불과했으므로 그 근원적 한계는 여전히 노정하고 있었다. 참고로 정방은 문신들의 조직이라 무신정권이 끝난 이후로도 존속한다. 권문세족이 지배층의 주류가 되었을 때는 오히려 신진세력의 진출을 막는 도구로 활용된다.

최이가 문신들을 우대하자 무신들의 반발이 있었다. 상장군 최유공, 추밀원부사 오수기, 장군 김계봉, 낭장 고수겸 등이 문신들을 모조리 죽여버리려는 음모를 꾸몄는데 음모가 탄로나자 최이를 암살하려 했고 최이는 이들 모두를 죽이거나 유배보내는 것으로 숙청했다. 상장군 노지정, 대장군 금휘, 김희제가 점술가였던 주연지와 모의하여 희종을 복위시키려 했는데 사전에 최이에게 발각되어 모조리 바다에 빠뜨려 죽임을 당했다. 희종은 다시 강화로 유배길을 떠나야 했다. 무신들의 음모 외에도 장장 30년에 이르는 최이의 집권기간동안 반란과 농민항쟁은 꾸준히 일어났다. 일일이 확인해서 여기에 적어놓기 힘들 정도로... 쉽게 말해 최이의 집권기간 역시 최충헌의 집권기랑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고려의 백성들에게는 최씨 집안의 공포정치보다 훨씬 큰 시련이 닥쳐오고 있었으니 바로 9차례에 걸친 몽고의 침략이었다.

3. 1차 ~ 4차 여몽전쟁

(1) 사건의 발단

강동성 전투 이후 고려와 몽고는 형제지국이 되고 고려는 몽고에 매년 공물을 바쳤어야 했는데, 당시 몽고의 확장세를 봤을 때 고려를 침략하기 위한 사전단계에 불과했음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고려도 몽고의 이같은 움직임을 심상치 않게 보고 있었음은 사서 곳곳에서 드러난다. 고종 8년인 1221년에 몽고에서 사신이 왔는데 최이는 그대로 돌려보내놓고는 남도의 군사를 동원해 북방의 성을 수축하고 방비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일부 반대의 목소리가 있었으나 최이는 그대로 밀어붙였다. 당시 칭기즈칸은 호라즘 원정을 시작한 상태였기 때문에 몽고의 내정은 그의 막내동생인 테무게 옷치긴이 담당하고 있었는데, 결과론적인 이야기이지만 몽고와의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선 당시가 절대적인 준비기간이었으므로 국방의 측면에만 국한해서 본다면 최이의 결정은 옳은 것이었다. 그러나 북방의 대비는 단발성 사건에 그쳤고, 최이는 이웃집 백여 채를 허물어 격구장을 만들어놓고 별초들의 격구경기 관람에 여념이 없었다. 혹자들은 격구가 군사훈련의 일환이니 몽고전에 대한 대비라고 주장하나 별초가 최씨 집안의 사병일 뿐 고려의 국방에 도움된 바 없으니 변명꺼리라 할 수는 없다.

고종 12년인 1225년 정월에 고려에 사신으로 와 막대한 공물을 요구하던 몽고의 사신 저고여가 귀환하던 도중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몽고는 당연히 고려가 한 짓이라 주장했지만 고려는 금나라의 소행이라 했다. 저고여 피살사건은 현재에 이르러서도 미제 사건인데 학계에서는 몽고 자작극설, 고려 범행설, 금나라(우가하) 범행설, 동진 범행설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필자는 갠적으로 금나라 범행설에 약간의 지지를 더 보내는 편이다. ^^ 누가 죽였든 결론은 몽고와 고려의 국교단절!! 이제 전쟁은 시간문제가 되었다.

(2) 1차 침공

하지만 전쟁은 바로 일어나지 않았다. 몽고의 1차 침략은 그러부터 6년 뒤인 고종 18년(1231년)에 일어나는데 무엇보다 서하 원정 중에 칭기즈칸이 사망한 것(1227년)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고종 18년인 1231년 음력 8월에 오고타이칸의 명을 받은 살리타이가 고려를 침공한다. 드디어 여몽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살리타이는 철주(지금의 평북 철산군), 황주(지금의 황해북도 황주군), 봉주(지금의 황해북도 봉산군) 등을 함락시키며 개경으로 남하했다. 고려군은 귀주와 서경 등지에서 분전했으나 안북성에서 대집성이 삽질(?)하다가 대패하여 전세를 뒤집는데 실패했고 음력 12월 초하루에는 개경의 4개문이 몽고군에게 포위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고종과 최우는 막대한 공물을 바치고 회안군 왕정을 적진에 보내면서 몽고와 화친을 맺는다. 몽고군은 이듬해인 1232년 정월에 철군한다. 몽고군이 휩쓸고 간 지역은 그야말로 초토화가 되었다. 사서에는 여몽전쟁 기간 중 몽고군의 살육과 약탈에 대해 눈을 의심케 할 정도의 기록들이 많이 남아있다. 1차 침공 당시 평주(지금의 황해북도 평산군)를 점령한 몽고군이 '주의 관리들을 죽이고 성을 도륙한 다음 민가를 모조리 불태우니, 닭과 개마저도 씨가 말라버렸다'는 기록이 있다. ㅡㅡ 혹자는 약탈경제에 기반한 몽고군의 전통적인 습성과 고대 전쟁의 특수성이라며 쉴드 아닌 쉴드를 치려 하던데 초토화의 당사자였던 고려 민중의 입장에서 볼 때 망말에 가까운 개소리다.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전략과 전술을 통해 유라시아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몽고군이라고 해도 그들의 무자비한 살육과 약탈은 흑역사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가. 귀주성 전투

난세에 영웅이 등장하는 법이다. 몽고군의 1차 침공 당시 그들의 압도적인 군세와 전투력에 조충의 아들이었던 조숙창 등은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했지만 서북면병마사로 귀주(지금의 평북 구성시)에 있던 박서, 정주(지금의 평북 의주군 고성) 분도대장이었던 김경손 등은 몽고군에께 끝까지 저항했다. 특히 김경손의 활약이 두드러졌는데 사서의 기록을 살펴보면 마치 척준경의 부활을 보는 듯 하다. 정주에서 결사대 열 두명과 함께 성문을 열고 나가 몽고군과 맞서던 김경손은 성안의 사람들이 성을 버리고 도망가자 천신만고 끝에 귀주성으로 오게 된다. 그리고 서북면병마사 박서의 명에 의해 귀주성 남쪽을 담당하게 되는데 김경손은 몽고의 대군이 몰려오자 성밖에 나가 선봉에 서서 전쟁의 화신처럼 싸웠다.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김경손은 열두명의 결사대와 여러 성의 별초들을 거느리고 출전했는데 결사항전 명령에도 열두명의 결사대 외에는 땅에 엎드린 채 명령에 불복하자 모두 성안으로 돌려보내고 오로지 열두명의 결사대만을 거느리고 싸움에 임하였다고 한다. 날아온 화살이 김경손의 팔뚝에 맞아 피가 철철 흘러내렸지만 북을 치며 독전을 멈추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 치열했을 전장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 하다. 마침내 몽고군이 퇴각하자 김경손은 성으로 돌아오고 박서는 김경손과 마주 절하며 펑펑 울었다고 한다. 마치 예종 때 여진과의 영주성 전투 당시 소드마스터급 전투력을 선보인 척준경을 맞이하며 보여준 윤관의 모습~ ^^ 이후 이어진 수성전에서도 김경손의 활약은 계속된다. 적의 포탄이 김경손의 머리 위를 지나 뒤에 있던 군졸에게 명중해 군졸의 전신이 산산조각이 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김경손은 자리를 지키며 끝까지 항전, 끝내는 몽고군이 물러나게 만들었다. 철군하던 몽고군이 "이렇게 작은 성이 대군을 맞아 싸우는 것을 보니, 하늘이 돕는 것이지 사람의 힘은 아니다"며 혀를 내둘렀다고 하니 김경손의 활약은 가히 역대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귀주성 전투에서 서북면병마사 박서의 활약도 김경손 못지 않았다. 고려서 박서 열전을 보면 몽고군은 누차와 대포차 등 온갖 공성무기를 동원하여 성을 공격했는데 박서는 쇠물을 붓고 진흙을 던져 적의 화공을 막아내는 등 완벽한 대응으로 몽고군의 공격을 분쇄했다. 박서와 김경손의 활약으로 귀주성은 몽고의 1차 침공 기간 내내 몽고에 함락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개경이 포위되면서 고려가 몽고와 강화를 맺게 되자 고려 조정은 박서에게 항복을 권유했는데 박서는 이를 거부했다. 이에 살리타이가 군사를 보내 구름다리로 성을 공격하자 박서는 큰 칼날이 장착된 대우포를 이용, 이마져도 분쇄해버렸다. 고종이 감찰어사 민희 등을 시켜 항복을 권유하니 마침내 박서가 항복하는데 뒤이어 몽고사신이 항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박서를 죽이려 하자 최이가 글을 보내 박서를 달래고 박서는 사직하여 고향으로 돌아간다.

영화로 만들어도 좋을 만큼 빛나는 전공을 세운 김경손과 박서... 필자는 사서에서 이들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고려의 내제된 군사력에 대해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도방의 예에서 보듯이 당시 무신정권은 정예병을 사병화함으로써 고려 정규군의 전투력이 크게 약화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지만 막상 전쟁이 발발하면 숨은 진주처럼 곳곳에 등장하는 전투력 만렙의 장군들과 이들을 도와 기적을 밥먹듯 일구어 내는 고려 백성들의 전투력은 국뽕 한사발 거나하게 들이킨냥 자부심으로 들끓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들의 승리는 전투일 뿐 전쟁에서 고려는 졌고 앞서 이들을 발굴하고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전쟁에 대비케 하는 것은 중앙정부의 책임일 터, 자신들의 호위호식과 권력보존에만 집중했던 무신 집권자들에 대한 원망과 아쉬움이 항상 진하게 남는다. 이같은 역사는 현재도 반복되고 있다. 현재의 정국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 같으나... 여기서는 그냥 넘어간다...

나. 안북성 전투

보통 동아시아 각국의 사서에는 패전에 대한 기록이 상세히 기록되지 않는다. 되레 승리의 역사로 뒤바뀌어 기록되기도 하는데 고려사에 기록된 안북성 전투는 패전의 역사 임에도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몽고의 1차 침공 당시 전체적인 전황을 좌우했던 중요한 전투였기 때문이다. 귀주에서 박서와 김경손이 처절한 항전을 계속하고 있을 때 중앙군인 3군(중군, 좌군, 우군)은 안북성(지금의 평남 안주군)에 주둔하는데 그 규모가 3만에 이르렀다. 몽고군이 성을 포위하자 북계병마사 대장군 채송년은 성안에서 수성전에 임하려고 했다. 그러나 후군진주 대집성이 억지를 부려 결국 성밖에 진을 펼치는데, 막상 성밖 응전을 주장했던 대집성은 성안으로 돌아와 머물렀다. ㅡㅡ 양군이 맞붙자 기병이 주력인 몽고군은 모두 말에서 내려 대오를 맞추는 기망행위를 벌리는데, 이를 보고 고려군이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숨겨둔 기병으로 고려군의 우군을 기습한다. 보병전으로 착각하게 만든 후 적들이 대비하느라 혼란한 틈을 타 기병으로 공격하는 전형적인 몽고군의 전술에 걸려든 셈이다. 빗발치는 화살에 구원에 나선 중군까지 흔들리고 몽고군은 기세를 타고 고려군을 공격, 고려군은 절반을 넘는 사상자를 내며 대패한다. 중앙군이 대패했으니 전선은 크게 뒤로 물려지고 곧이어 개경이 포위된 것이다. 만약 채송년의 말대로 수성전에 돌입했다면 결과는 어땠을까? 전략적으로 몽고군이 우회하여 개경포위에 들어가고 그들이 거쳐간 지역은 초토화 되었을 가능성이 크긴 하지만 일부 병력이 귀주성에 발이 묶인 상태에서 몽고군 본대가 고려군과 맞서고 있었던 만큼 개경 포위가 불가능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몽고의 1차 침공은 훌륭히 막아낼 수 있었지 않았을까? 물론 이는 아주 결과론적인 이야기다. 1차 침공을 막아냈다 한들 금나라를 치고 있었던 몽고군 주력 20만이 복수를 위해 고려로 말머리를 돌렸다면 더 큰 피해가 고려에 닥쳤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당시 금나라는 패망 직전이었으므로 몽고군 주력을 잡아둘만한 그런 처지가 아니었다.

참고로 고려군 패전의 일등공신 대집성은... 아무 일없이 그냥 넘어간다... 과부였던 그의 딸이 예뻤기에 집권자 최이랑 재혼에 성공한 덕분으로... ㅡㅡ

대표적인 두 전투만을 기록했는데 이 외에도 동선역 전투, 자모산성 전투, 충주성 전투 등 고려가 항전에 성공한 전투가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상술하지 않는다. 다만 충주성 전투의 경우 첨언하자면, 몽고군이 침공하자 관리들은 다 도망가고 오로지 양민과 노비들이 싸워 몽고군을 막아냈다. 전투 후 돌아온 관리들이 은그릇 등 몽고군이 약탈해 간 재물이 사라졌다 하여 이들을 처형하려 했는데 여기에 빡친 양민과 노비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런 일 지금도 흔히 일어난다. 높고 대단한 사람입네 평소에 들먹이던 인간들... 막상 위기가 닥치면 꽁무니부터 내빼는 일순위 작자들이다. 이런 X같은 인간들에게 절대 표주면 안된다. ㅡㅡ

(3) 2차 침공

고려사에는 몽고의 1차 침공 후 강화가 맺어진 근간에 몽고에게 보내는 다수 서신의 내용이 담겨 있는데 한마디로 "우리 가진 거 없다. 좀 봐달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는 다른 말로 최이가 강화조건을 제대로 이행할 마음이 없었다는 걸 보여준다.(당시 고려의 사정으로 감당이 불감당인 공물수준이긴 햇다.) 더불어 최이는 윤린, 박문의 등의 주장에 동조하여 강화도로 천도할 것을 결심하는데 천도에 반대하는 신료들도 제법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세충이란 자가 대표적인데, 재추회의에 뛰어들어가 천도에 반대하지만 그에게 돌아온건 참형이었다. ㅡㅡ 기록에 의하면 고종도 강화천도를 탐탁지 않게 생각한 듯 하다. 그러나 고종에게는 최이를 억누를만한 힘이 없었다. 최이의 강압에 못이긴 고종이 드디어 1232년 음력 6월 을유일에 강화로 옮겨가는데 마침 장마철이라 진흙이 발목까지 빠져서 인마가 쓰러지고 지체높은 집안의 부녀자들이 맨발로 업고 이고 하며 이동할 정도였다고 한다. 역사에서 외침에 의한 군주의 파천은 언제나 처참하기 이를데 없다.

고려가 강화로 천도한 사실을 모를 리 없는 몽고는 1차 침공 철군 후 7개월만인 1232년 음력 8월에 재침하는데 이것이 2차 침공이다.

가. 고려의 이완용, 매국노 홍복원

몽고는 1차 침공 후 감시자의 임무를 부여한 다루가치를 서경과 개경 등에 배치하는데 이 다루가치들의 횡포가 정말 장난 아니었다. 이에 민희와 같은 고려의 강경파들은 다루가치를 암살할 음모를 꾸미는데, 당시 서경낭장이었던 홍복원은 1차 침공 당시 초토화된 평주의 예를 들어 여론을 선동시켜 반란을 일으키게 한다. 이후 살리타이가 2차 침공해오자 서경성을 들어 순순히 항복했는데, 1차 침공 때도 점령당하지 않았던 서경의 개전 초기 함락은 고려에 있어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이후 몽고군은 홍복원을 길잡이로 세워 개경과 남경(지금의 서울)을 순식간에 점령해버렸다.

김윤후 장군에 의해 살리타이가 저격당하면서 2차 침공이 마무리되나 홍복원은 투항한 고려인으로서 고려의 신하이지만 몽고측의 입장에서 전후문제를 처리하는 책임자가 된다. ㅡㅡ 그러다 마침내 고종 20년인 1233년에 서경에서 필현보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최이가 민희 등을 시켜 가병 3천을 파병해 토벌에 나서자 반란은 곧 진압되었고 필현보는 체포되어 개경의 큰 거리에서 허리를 베어 죽이는 극형을 당한다. 그러나 홍복원은 원나라로 도망하고 오히려 동경(지금의 중국 심양)총관이 되어 원나라에 투항한 고려 백성들을 다스리는 지위에 올랐다. 홍복원은 끊임없이 고려를 모함했는데 오죽하면 최이가 반란 때 체포했던 홍복원의 아버지 홍대순과 동생 홍백수에게 벼슬을 내릴 정도였다. 홍복원은 고려를 공격해야 한다는 둥 고려가 얕보고 있다는 둥 원나라 조정에 온갖 참소를 자행했다. 이런 홍복원을 보고 당시 사람들은 '주인보고 짖는 개'라 하였다고 고려사절요는 전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 영녕공 왕준이 원나라에 인질로 있을 때 홍복원과 왕준의 사이가 틀어지는 일이 발생한다. 처음에 둘의 사이는 좋았으나 원나라 헌종의 신임을 얻어 왕준이 홍복원의 권한을 잠식해 들어가자 홍복원이 앙심을 품게 된 것인데 홍복원은 나무인형을 가지고 왕준을 저주하다 원나라 헌종(몽케 칸)에게 이 사실을 들키고 만다. 거짓해명으로 위기를 벗어나나 싶어지만 이번에는 왕준의 처에게 사실을 들키는데 문제는 왕준의 처가 원나라 황족이었다는 거. 대노한 왕준의 처가 다시 사실을 헌종에게 아뢰고 헌종은 홍복원을 때려죽일 것을 명하는데 홍복원은 황제의 칙사가 데려온 장사들에게 발로 차여 죽었다. ㅡㅡ;;;

기가 막힌 것은 홍복원의 아들들. 홍복원의 아들들은 아비의 죽음이 고려 때문이라 여겨 아비보다 더 매국하는 일에 열을 올렸다. 아마도 고려와 원나라 사이에 마찰이 생길수록 자신들의 입지가 공고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 듯. 원나라 세조 때 부친의 지위를 이어받으며 일정정도 권세를 회복한 홍복원의 아들 홍다구는 고려와 원나라가 일본을 점령하러 갈 때까지 고려를 오가며 무던히도 고려를 괴롭혔다. 반면 홍복원의 또다른 아들 홍군상은 "영녕공을 원망할지언정 나라를 배반할 수는 없다"고 하여 고려를 도왔다고 한다. 매국노 집안에서 그나마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 있었던 셈.

나. 처인성 전투

이야기가 잠시 옆길로 샜다. 다시 몽고의 2차 침공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1232년 10월 개경을 점령한 살리타이는 강화도 직접 공격여부를 고민하다가 반대로 배를 불살라 버리고 고립작전을 펼쳐 강화도의 고려 정부를 고사시키려 했는데 이를 위해 개경 이남으로 남하하기 시작한다. 11월에 한양산성을 점령하고 경기도 광주에 도착한 살리타이는 광주성 목사 이세화로부터 뜻밖의 저항을 받게 된다. 1차 침공 때 귀주성에서 고전한 살리타이는 광주성 점령에 실패하자 주력을 강화 쪽으로 돌리고 자신은 일부 병력만을 데리고 지금의 용인지역으로 우회하는데 이곳에서 마주한 성이 처인성이었다.

처인성은 둘레가 그 규모가 매우 작은 토성으로 천민들의 주거지인 부곡이었다. 굳이 점령하지 않아도 되는 작은 토성을 살리타이가 왜 공격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한데 많은 이들이 처인성에 일대의 군량창고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무튼 살리타이는 500여기의 기병을 직접 차출하여 처인성을 포위하고 공격에 들어간다. 당시 처인성 안에는 승려 김윤후를 비롯한 100여명의 승려들과 다수의 부곡민이 있었는데 몽고군에 맞서 싸우기로 결정하고 김윤후를 지도자로 선출한다. 이에 김윤후는 주요 공략지 중 하나인 동문 밖 근거리에 사수 수십명을 매복시키는데 하늘의 운이 닿았는지 매복지점으로 살리타이가 접근하다가 화살을 맞고 바로 전사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를 두고 일부 밀덕들은 현대판 저격전술의 완벽한 구현이라며 극찬하기도 하는데 아예 틀린 말도 아니어서 애초에 처인성을 만만히 보고 병력을 너무 분산시킨 살리타이의 실책과 몽고군답지 않게 정찰활동을 게을리 한 결과를 김윤후가 적절히 파고 든 것이었다. 졸지에 사령관을 잃은 몽고군은 큰 혼란에 빠졌으며 이 틈을 놓치지 않고 김윤후는 성문을 열고 나와 몽고군을 대파했다. 사령관의 전사가 익숙치 않았던 몽고군은 당황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부원수 테케가 고려 조정과 강화를 체결하고 다시 철군한다.

고종이 김윤후의 전공을 치하하고 상장군의 벼슬을 내리자 김윤후가 끝끝내 사양하자 직급이 낮은 섭랑장으로 바꿔 임명했다. 훗날 충주산성방호별감이 된 김윤후는 몽고의 5차 침공 때 충주성 전투에서 또다시 큰 전공을 세우게 된다. 역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이다. 고려에 있어 그 솟아날 구멍이 바로 김윤후 였던 셈이다.

(4) 3차 침공

살리타이의 전사를 명분으로 고종 22년인 1235년 윤7월에 몽고군이 제3차 침공을 개시한다. 몽고 3차 침공의 특징은 몽고군이 부대를 분산하여 다양한 지역에서 동시에 전투를 벌였다는 점인데 덕분에 몽고군 본대와 고려의 중앙군이 대회전을 벌리는 경우는 없었다. 물론 이전 침공에서도 본대 행군 방향의 주변으로 약탈과 살육이 있었지만 3차 침공부터는 이러한 양태가 더욱 본격화되었기 때문에 몽고군에 의한 피해가 전 국토로 확장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3차 침공은 여타의 침공에 비해 침공기간이 압도적으로 길어 고려의 백성들은 근 4년을 몽고군에게 시달려야 했다. 이 과정에서 경주의 황룡사가 전소되고 황룡사 대종이 약탈되는 등 우리 문화재에 대한 무차별적 파괴행위가 있었다.

사서에는 윤7월에 몽고군이 침략했는데 9월에 안동, 경주, 용진(지금의 강원도 원주), 해평(지금의 구미시 해평면) 등의 지명이 보이는 것으로 봐서 몽고군의 진격속도가 엄청나게 빨랐음을 알 수 있다. 몽고군의 진격속도 만큼이나 전 국토의 초토화 속도도 빨랐음은 물론이다. 강화에 들어앉은 최이도 전 국토가 몽고군에 아작이 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최이의 도방에 소속되어 있던 이유정이란 자가 몽고군과 싸우겠다고 자청하는지라 군사 160명을 딸려 파견하기도 하는데, 결과는... 해평 전투에서 전멸당했다. ㅡㅡ;;;

전국 각지에서 벌어진 개별전투에서는 패전도 있었지만 승전도 많았다. 우리측 사서에는 승전의 기록이 더 많이 적혀있다. ^^;;; 물론 전체적인 전황을 바꾸는 것에는 역부족이었지만... 우리측 승전기록 중에 많은 사학자들이 그나마 3차 침공을 마무리할 수 있었던 승전으로 꼽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죽주성 전투다. 죽주는 지금의 경기도 안성으로 '안성맞춤'이란 말이 있듯 과거 안성은 사통팔달의 교통요지 중 최고의 요지였기 때문이다.

가. 죽주 전투

당시 죽주방호별감으로서 죽주방어에 책임을 지고 있던 사람이 송문주 장군인데, 송문주 장군은 1차 침공 당시 귀주 전투에 참가했던 인물로 몽고의 공성전에 대해 익히 알고 있던 장군이었다. 고려사 송문주 열전에는 '항상 적군의 작전을 훤히 알아 차리고 군사들에게 "오늘은 적이 반드시 어떠어떠한 기계를 설치할 것이니 우리는 무슨무슨 기계를 준비하여 대응해야 한다."고 일렀다. 적이 과연 그 말과 같이 공격해 왔으므로 성 안의 사람들의 모두 그의 귀신같은 선경지명에 감탄했다'고 적고 있다. 더불어 귀주 전투의 또다른 영웅 박서 장군이 귀향하여 머문 곳이 죽주라는 점도 영향을 미쳤던 듯 하다.

몽고군은 죽주성에 쳐들어와 항복을 권유하자 송문주 장군은 적극적인 항전에 들어간다. 몽고군이 화포로 공격해 사면의 성문이 다 부서졌지만 송문주 장군은 성안에서 포로 마주 공격하는 이른바 '대포병사격'을 개시하여 몽고군의 성안 침탈을 방어했으며, 사람기름(?? 사서에 사람기름이라고 적혀 있어서 그대로 적었지만 어떤 기름인지 모르겠다. 만약 상상하는 것이 맞다면... 으으~ ㅡㅡ;;;)을 활용한 화공에서는 성문을 열고 한꺼번에 돌격해 적의 공격을 분쇄해 버렸다. 소위 말하는 선제원점타격인 셈~ 몽고군은 보름 동안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성을 공격했지만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자 공격용 무기들을 모두 불태우고 가버렸다고 사서는 전하고 있다.

죽주 전투의 승리요인은 뭐니뭐니 해도 귀주 전투에서의 전투경험을 바탕으로 한 송문주 장군의 기가 막힌 대응전술에 있었다. 만약 고려가 송문주 장군과 같은 승전한 장군들의 경험을 공유하고 전 군영에 전파할 수 있었다면 여몽전쟁의 판세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결과론적인 아쉬움에 지나지 않겠지만 여몽전쟁 기간 중 고려 백성의 고통이 너무나 컸기에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 아쉬움이다...

죽주 전투 외에도 대흥현(지금의 충남 예산군) 등지에서 고려군이 크게 승리했지만 앞서 언급했듯 전체적인 전황을 뒤집기에는 역부족이라 고종 고려 조정은 고종 26년인 1239년에 고종의 몽고 입조 등을 조건으로 몽고와 다시한번 강화를 체결한다. 몽고의 3차 침공 당시 전라도 담양에서 이연년 형제가 백제부흥을 명분으로 농민항쟁을 일으켰는데 귀주 전투의 영웅 김경손 장군에 의해 진압되었으며 동진의 군사가 국경을 침범하는 등 몽고군 이외에도 크고 작은 내우외환이 연속하여 일어났다. 때문에 궁지에 몰린 고려가 임시방편으로 고종의 몽고 입조를 약속했을 뿐 애초에 지킬 마음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더불어 최이 역시 강화도를 개경처럼 꾸미는 일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다만 이 시기 팔만대장경의 제작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그나마의 위안이라 하겠다.

(5) 4차 침공

몽고의 4차 침공은 고종 34년인 1247년에 있었다. 여타의 다른 침공에 비해 사이의 기간이 상대적으로 길었던 편인데, 여기에는 몽고 내부의 사정이 있었다. 여기서 당시 몽고를 비롯한 고려 주변국의 정세를 간략하게 살펴보자

가.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

몽고는 3차 침공 직전이 1234년에 금나라를 멸망시켰다. 당시 금나라 정복에는 몽고군 외에도 금나라의 핍박에 고생하던 남송의 군대도 연합되어 있었는데, 맹공이 이끄는 남송의 군대는 금나라 멸망 직후 잠시나마 무주공산이던 화베이 지역을 수복하는데 성공한다. 이것이 바로 남송 이종 때 있었던 일로 그 유명한 '단평의 입락'이다. 단평의 입락은 고토의 회복이라는 남송의 최대숙원이었지만 당시 몽고를 이끌던 오고타이 칸의 분노를 사게 되고 오고타이는 쿠릴타이의 결정을 거쳐 1235년 2월에 남송 침공을 단행한다. 이 때 만주일대에는 금나라와 동진(동하)의 잔존세력들이 군벌형태로 남아있었는데 이들을 완전히 진압하고 남송과 연합할 가능성이 있는 고려를 제압하기 위해 탕우타이를 사령관으로 하는 일단의 몽고군이 고려를 침공하니 이것이 앞서 설명한 3차 침공이다. 이 지점에서 사학계에서는 몽고가 진정으로 고려를 정복할 의사가 있었느냐는 의문을 두고 여러 학설들이 대립중이다. 필자 역시 조금 더 지지를 보내는 학설이 있으나 여기서는 각설하고 그냥 넘어간다.

몽고와 남송의 전쟁은 초반 파죽지세로 몽고가 승전을 가져가나 1237년 이후 남송의 맹장 맹공이 등양 전투, 대오채 전투 등에서 눈부신 전공을 올리며 연전연승, 무려 20년 후인 1257년까지 몽고군을 방어하여 백중세, 아니 사천 등 일부 북송의 영토를 회복하는 등, 우세한 전황을 이어갔다. 또한 1236년부터는 몽고의 맹장 바투를 필두로 유럽원정이 시작되는데 1241년에는 오스트리아 빈 앞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그 해에 오고타이 칸이 급성 심장마비로 사망하면서 바투가 철군을 단행하게 된다. 이 모든 상황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몽고가 고려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

오고타이 칸의 사망 후 오고타이의 6번째 부인이자 귀위크 칸의 어머니인 퇴레게네 카툰의 노력으로 대칸에 즉위한 귀위크는 1247년 차일피일 고종의 몽고 입조를 미루고 있는 고려에 군대를 다시 보내니 이것이 바로 몽고의 4차 침공이다.

나. 김방경의 등장

4차 침공은 앞선 침공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서의 기록이 적은 편이다. 오로지 위도에서 방어한 김방경의 이야기가 있을 뿐인데 위도는 대녕강과 청천강 하류가 합류하는 곳에 있는 섬이다. 사서의 기록으로는 1247년 음력 7월에 몽고군이 내려왔으며 강화도 바로 위인 염주(지금의 황해남도 연안군)에 진을 친 것으로 나와 있다. 아마도 국경을 넘은 이후 엄청난 속도로 남하한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속도가 가능했던 이유는 한 해 전인 1246년 겨울에 수달을 잡는다는 구실로 몽고인 400명이 수안현(지금의 황해북도 수안군)까지 내려와 샅샅이 정찰했기 때문이라고 사서는 전하고 있다. 또한 3차 침공 때 맺은 강화로 인해 고려가 방심했다는 이야기도 함께 사서에 실려있다. 생각건데, 몽고의 4차 침공은 약탈 보다는 고종의 입조를 목표로 강화도를 압박하기 위함인 것 같다. 당시 몽고군의 지휘관은 아무칸이라는 자였는데 남하하면서 몇몇 지역을 공격했을 것이고 대부분은 무방비 상태로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위도 같은 지역에서는 저항이 있었으나 전략적 목표가 강화압박이었던 만큼 바로 우회하여 염주로 내달렸을 가능성이 크다.

고려사 김방경의 열전을 보면 상세한 전투기록이 나와있는 것은 아니며 위도에 모인 여러 성의 백성들을 잘 이끌어 정착에 성공했다는 내용이다. 강화도를 비롯해 몽고군의 공격을 피해 섬이나 산간오지로 피난한 사람들에게 모범케이스를 선보인 셈~ 이후 김방경은 삼별초의 진압과 일본정벌준비에 많은 공을 세운다. 김방경은 평소 강직한 성품을 바탕으로 여몽전쟁 이후 위기의 고려를 관리해 나간 능력있는 재상이었다. 하지만 당시 고려의 형평상 그가 공을 세운 일들은 모두 몽고의 이해와 요구에 부합하는 일들이었으니 이 부분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릴 수밖에 없다. 실제 김방경은 고려에 대한 몽고의 지나친 요구를 막아내어 고려 백성들의 생존을 지켰지만 몽고의 지배라는 당시 고려사회의 근본모순에는 순응했기에 역사를 반전시킬 순 없었다. 역사는 모순을 깨고자 하는 이들에 의해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위난의 시기 백성의 생존 만큼이나 중요한 건 없다. 일종의 역사의 딜레마라 하여야 하나? 필자 나름 개인적 생각이 있지만... 각설하고 넘어가자.

몽고의 4차 침공은 귀위크 칸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1248년 음력 3월에 마무리된다. 여기에는 조금은 황당한(?) 비사가 있는데 원사를 참고하여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몽고의 2대 대칸인 오고타이의 맏아들인 귀위크는 서방원정에 참전했는데 당시 서방원정군의 총사령관은 주치(칭기즈칸의 장남)의 둘째아들 바투였다. 둘은 원정 과정에서 갈등을 빚었고 오고타이는 귀위크를 소환하여 책임을 물으려했다. 그런데 오고타이가 심장마비로 급사하면서 상황이 급변하고 먼저 몽고에 도착해 있던 귀위크는 어머니 퇴레게네 카툰의 노력으로 대칸에 즉위하게 된다. 물론 여기에는 칭기즈칸의 아들로 생존하고 있었던 차가타이가 귀위크를 지지한 것에 힘입은 바 컸다. 대칸에 즉위한 귀위크는 1248년에 잠재적 위협인물인 바투를 몽고로 소환하였는데 바투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그가 지휘하던 부대를 유럽에 잔존시키지 않고 모조리 몰아 귀환했다. 이에 귀위크 역시 군대를 몰아 서진한다. 바로 내전이 일어날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 실제 내전이 일어났다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몽고의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여기서 또한번의 변수가 발생하는데 행군 도중 귀위크가 급사해버린 것이다. 지나친 음주로 인한 건강 악화 때문이라는 설이 있지만 귀위크의 정확한 사망원인은 알 수가 없다. 아무튼 귀위크의 죽음으로 내전은 발생하지 않았다. 귀위크 즉위 당시 귀위크는 자신의 후손으로만 대칸의 자리를 이어간다는 다짐을 몽고의 왕공들에게 받았지만 바투는 칭기즈칸의 4남이었던 툴루이의 장남 몽케를 옹립하려 했고 오고타이계를 지지하던 몽고의 왕공들을 힘으로 제압한 후 몽케를 몽고의 4대 대칸으로 즉위시켰다. 이러한 몽고의 복잡한 내부사정으로 고려는 4차 침공이라는 거대한 파고를 넘어설 수 있었다...

4. 최이의 죽음과 최항의 집권

몽고의 4차 침공이 끝난 다음해인 고종 36년(1249년)에 고려에서도 몽고만큼이나 큰 정치적 이변이 일어나니 집권자 최이가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근래 최이에 대해서 그가 정치적으로 노련했다는 점과 대몽항쟁 의지가 높았다는 점을 들어 긍적적 평가를 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그가 책임있는 고려의 집권자로서 대몽항쟁 시기 무참히 살육된 내륙의 고려 백성들을 위해 제대로 한 일이 없다는 점은 그 어떤 변명으로도 씻을 수 없는 죄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자신과 집안의 정권유지에만 혈안이 된 무신 집권자로서 일부 사안에 있어 긍정적 통치가 있었다 한들 그 한계를 명백히 노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최이에게는 적자가 없고 총애하던 기생 서련방과의 사이에서 만종과 만전 두 아들을 두었다. 최이는 원래 김경손의 형인 김약선을 사위로 맞아 그에게 병권을 이양하려 했다. 그러나 김약선이 최이만을 위한 행정기관이자 권력기구였던 진양부 내의 처녀들을 망월루와 모란방에 모아놓고 음란한 짓을 저지르자 최이의 딸이 최이에게 비구니가 되겠다며 이 사실을 고해바쳤고 분노한 최이가 김약선을 유배보내고 망월루와 모란방을 부숴버렸다. 그런데 김약선의 처도 만만치가 않은 여자여서 남자 종과 간통하다고 김약선에게 들켰고 자신의 과오를 감추고자 최이에게 다른 사건으로 남편을 참소하기에 이른다. 이에 최이는 김약선을 죽여버리는데 한참 뒤에 무고임을 안 최이는 김약선을 복권시키고 자기 딸과의 부녀의 연을 끓어버렸다. 신문 가십란에나 실릴 것 같은 이같은 일련의 사건은 사실 김약선의 딸이 태자비가 되면서 권력이 지나치게 거대해지자 이를 경계한 최이가 사전에 김약선을 제거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최충헌이나 최이나 잠재적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하는 건 매한가지였다...

한편 김약선이 아직 최이의 후계자로 주목받던 시절에 최이는 자신의 서자들이 반란을 일으킬까봐 모두 승려가 되게 했는데 이 녀석들이 개망나니였던지라 고리대를 돌리고, 다른 사람의 처를 강간하고, 지방관들을 업수이 여기는 등 승려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짓들을 일삼고 다녔다. 보다못한 형부상서 박훤과 경상도 순문사 송국첨이 최이에게 해결을 요구하자 최이가 잠시 만종과 만전의 문도들을 잡아들이고 백성들에게 빼앗은 재물들을 돌려주었다. 그러나 개경에 온 만종과 만전은 동복누이까지 앞세워 최이에게 억울함을 호소했고 최이는 부자간을 이간시켰다하여 박훤을 유배보내고 송국첨을 좌천시켜버렸다. ㅡㅡ 또한 만전을 환속시킨 다음 이름을 최항으로 바꾸게 하는데 이 사람이 바로 최씨 무신정권 3대 집권자 최항이다. 최이가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꾸었는지에 대해서는 사서의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일련 사건 진행과정 중 김약선이 후계자 후보에서 탈락하게 되자 최이가 마음을 달리 먹었고 나름의 기준으로 만전(최항)을 선택했을거라 추정할 뿐이다.

권력을 승계한 최항은 세금을 감면하고 세금징수를 위해 파견한 교정수획원을 불러들이는 등 잠시 사람들의 환심을 사는 정책을 시행하나 '그 아비에 그 자식이라' 곧 자신의 권력유지에 장애가 될 만한 인사들을 숙청하기 시작한다. 이런 최항의 숙청에 어이없게 죽어나간 사람들 중에는 몽고의 1차 침공 당시 구국의 영웅이었던 김경손 장군도 있었다. ㅡㅡ 최항이 그의 아버지 최이와 비교하여 다른 점이 있다면 귀가 얇아 참소에 잘 넘어갔다는 것인데 오죽하면 고려사 반역열전 최항 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최항이 참소에 잘 넘어갔기 때문에 개인적인 감정을 가진 자들마다 아무개가 변란을 꾸민다고 무고하고서 상을 잘 타 먹었는데, 막상 국문해보면 아무 증거가 나타나지 않았다' ㅡㅡ 조정이 이런 상태인데 몽고에 대한 대비가 잘 되었을리 만무하다. 아니나다를까 고종 40년인 1253년 음력 7월에 몽고군이 5차 침공을 단행해 왔다.

5. 5차 ~ 7차 여몽전쟁

(1) 5차 침공

몽고의 5차 침공 명분으로 4차 침공의 결과로 약속된 고종의 몽고 입조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을 내세웠다. 고려는 고종의 노환을 핑계로 입조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는데 몽케 칸의 즉위로 후계문제가 정리되자 고려의 약속이행을 강하게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고려사 기록을 보면 7월에 몽고군이 압록강을 넘었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다음달인 8월에 그 척후 3백기가 전주성 남쪽에 도달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5차 침공 역시 어마어마한 속도전이었던 것이다. 몽고군은 10월초까지 동주(철원), 춘주(춘천), 양주(양양) 등을 점령하고 초토화시켰다. 특히 춘주의 성민들은 거의 도륙을 당했다고 한다. ㅡㅡ 그래도 몽고군의 공격을 끝끝내 막아낸 지역도 있었으니 바로 충주성이며, 이곳엔 2차 침공 당시 고려를 구한 김윤후 장군이 있었다. 김윤후 장군은 포위를 당한 채 70여일이나 버텼는데 군량이 떨어지자 관노의 호적을 불태우고 노획한 말과 소를 나누어주자 사람들이 죽기를 맹세하고 싸웠다고 한다. 이에 몽고군이 점차 기세가 꺾여 포위를 풀었으며 더 이상 남하하지 못했다. 당시 몽고군의 사령관은 칭기즈칸의 동생 카사르의 장남인 야쿠였는데 충주에서 병에 걸렸다고 사서는 전하고 있다. 아마도 충주성의 끈질긴 항전으로 점령이 어렵게 되자 그 책임을 피하기 위해 칭병했을 가능성이 높다. 야쿠는 아무칸, 홍복원 등을 충주성에 남겨둔 후 귀국길에 오르는데, 이때 고려는 이미 고종이 태자를 보내 항복할 것을 논의하고 있었으며 고종이 직접 강화를 나와 승천부(지금의 개풍군)에서 몽고사신을 만나 강화를 요청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야쿠의 귀국길은 강화협상을 가속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셈. 고려는 고종의 출도와 입조를 수차례 요구받았으나 고종의 둘째아들인 안경공 창을 인질로 보내는 것으로 협상을 마무리하여 몽고군을 되돌려보낼 수 있었다. 이때가 5차 침공 이듬해인 1254년 음력 정월이다.

고려의 인질로 몽고에 가게 된 안경공 왕창은 몽케 칸을 만나게 되며 이 자리에서 3차 침공 당시 고종의 아들이라 속여 인질로 보내졌던 영녕공 왕준을 만나게 된다. 덕분에 영녕공 왕준이 고종의 친자가 아님이 뽀록나버렸다. ^^;;; 몽케 칸은 고려가 자신을 속였다하여 과거 고려가 올린 표문까지 다시 끄집어 내어 거짓말임을 입증하려 하지만 표문에도 친자(親子)가 아닌 애자(愛子)로 적혀있어 사건이 우야무야 되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그만큼 당시 고려는 소위 6사라 불렸던 몽고의 요구사항을 온힘을 다해 미루고 있었다. 하지만 몽고에 바보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번엔 최항이 고종을 모시고 나와 항복하라며 아주 구체적으로 개경환도를 요구하는데...

(2) 6차 침공

고종 41년인 1254년 음력 7월에 쟈릴타이를 원수로 하는 5천의 몽고군이 압록강을 건넜다. 직전에 고종은 승천부까지 나가 몽고의 사신을 맞는 등 침공을 막기 위한 성의를 보였으나 몽고의 요구가 완벽하게 이행되지 않았기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5차 침공 당시 쟈릴타이는 "고려의 군신과 백성이 육지로 나오면 모조리 몽고식으로 머리를 깎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국왕을 데리고 귀국하겠다. 만일 한 가지라도 좇지 않으면 절대 철군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만큼 강경론자가 쟈릴타이였다.

우리측 사서의 기록에는 개별전투에 대한 승리기록만을 전하고 있다. 특히 다이철소 전투의 경우 처인성 전투와 마찬가지로 향리인 지씨와 어씨의 지휘로 천민들이 몽고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기적을 선보였다. 덕분에 다인철소가 익안현으로 승격하고 천민들이 모두 면천되는 보상을 받는다. 그러나 쟈릴타이는 공격이 저항으로 막히면 바로 우회하며 지속적으로 남하했고 그해 12월에 고려가 사신으로 보낸 최린이 쟈릴타이를 만난 곳은 지금의 경남 합천과 산청 일대였으니 당시 한반도 남부가 쑥대밭으로 변했을 거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고려사 기록에는 '이 해에 몽고군에 포로가 된 남녀가 무려 20만 6천 8백여 명이었으며, 살육당한 자는 셀 수조차 없었다. 그들이 휩쓸고 간 곳은 다 잿더미가 되어버렸으니 몽고의 침략이 벌어진 이후 이때보다 더 심한 적이 없었다.'고 적고 있다... ㅠㅠ

쟈릴타이는 몽케 칸의 명으로 1254년 12월에 철군한다. 사서의 기록만으론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고려가 몽케 칸과 직접 협상을 시도하면서 철군의 명이 떨어진 듯 하다. 그러나 이는 고려의 완전한 항복을 유도하기 위한 몽고의 전략이었으며 1255년 부터 시작되는 7차 침공부터는 사실상 몽고군이 고려에 장기 주둔하는 형태의 전쟁이 진행된다. 6차 침공의 결과에서 보듯이 몽케 칸은 고려에 대한 압박수단으로 무자비한 살육과 약탈을 기본방침으로 정했으며 순간순간 벌어지는 협상의 결과에 따라 몽고군은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했다. 그 과정에서 내륙의 백성들이 겪었을 엄청난 고초는 굳히 설명할 필요가 없을 듯... 하지만 강화경(강화도) 안의 최항은 그의 아버지 최이처럼 잔치를 열며 딴 세상에 있는 것처럼 살았다. 다음은 고종 42년(1255년) 음력 2월과 3월에 있는 기사다.

2월 갑신일 : 최항이 술과 음식을 왕에게 바치자, 왕이 태자와 종친들을 불러 내전에서 잔치를 열고 밤새도록 풍악을 울리며 놀았다. 당시 많은 백성들이 굶어 죽는 형편인데도 왕은 권신에게 눌려 어쩔 수 없이 잔치를 열었던 것이다.

3월 병오일 : 각 도 관할의 고을에서 산성과 섬으로 들어가 수비에 임하고 있던 사람들을 모두 육지로 나오게 했다. 당시 공산성(대구 팔공산)애 함께 들어가 있던 각 고을 사람들 가운데 식량이 떨어진 먼 지역민들은 굶어 죽는 자가 속출했다. 노약자의 시체가 골짜기를 메웠고, 심지어는 어린애를 나무에 매놓고 떠나는 자까지 있었다.

필자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속에서 천불이 올라온다... ㅠㅠ

(3) 7차 침공

고종 42년인 1255년 9월에 쟈릴타이는 몽고에 인질로 있던 영녕공과 매국노 홍복원 등을 대동하고 다시 남하했다. 고려사 세가 고종 43년(1256년) 음력 10월의 기사를 보면 '을묘년(고종 42년) 8월 이후 15개월 만에 병란이 끝난 것이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당시 사람들은 7차 침공을 6차 침공의 연속선 상에서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7차 침공의 특징이라면 몽고군이 배를 제작하여 본격전으로 해전을 벌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고려사 세가 고종 42년 음력 12월 기사에 '몽고군이 배를 건조해 조도를 침공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는 기사가 보이는데 아마도 강화도에 대한 직접 침공을 준비하며 고려조정을 압박하려는 수단으로 활용했을 것이다.

7차 침공 당시에도 개별전투에 대한 고려군의 승전기록은 많다. 계속 반복되는 문제지만 개별전투의 전과를 전체적인 전황의 우세로 이어갈 수 있는 전략이 부재했고 여기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강화도에 있는 최항을 비롯한 고려조정에 있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설명 안해도 알겠지? ^^;;;

주목할 만한 전투를 꼽자면 입암산성 전투. 전라도 영광까지 진군한 몽고군을 공격하기 위해 인근 섬에 주둔해 있던 이광과 송군비는 작전을 세우지만 몽고군이 먼저 간파하고 수비에 들어가자 이광은 섬으로 돌아가고 송군비는 입암산성(전남 장성과 전북 정읍에 걸쳐 있는 산성)에 들어가게 된다. 당시 산성 안 장정들은 모두 몽고군에 투항해버려 성 안에는 어린애와 노인들만 있었는데 송군비는 일부러 노약자 및 몇 사람들을 성 밖으로 내보냈다. 이를 본 몽고군이 성안의 식량이 떨어졌다고 오판하고 성 아래로 몰려왔는데 이 틈을 타 송군비가 정예군을 이끌고 기습, 몽고군을 패퇴시켰다. 살상한 적군이 많았으며 몽고의 관인(官人) 네 명도 사로잡은 걸로 봐서 제법 큰 승리였다고 판단된다. 혹자는 노약자를 전투의 수단으로 삼았으니 송군비의 잘못이라고 강하게 비판하나 필자의 생각으론 송양지인의 우를 범하는 비판일 뿐이다.

해양(지금의 광주광역시)의 무등산 꼭대기에 진을 치고 전라도 일대를 약탈하고 있던 쟈릴타이에게 1256년 음력 9월에 몽케 칸이 철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전에 고려는 김수강이라는 자를 사신으로 보냈는데 기적적으로 협상에 성공한 것. 쟈릴타이가 10월에 철군하면서 7차 침공은 마무리된다.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7차 침공 당시 고종 대신 태자의 몽고 입조라는 말이 처음 보이는데 아마도 몽고가 고령의 고종이 장거리 이동이 불가하다는 고려의 항변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물론 고려는 태자의 몽고입조를 차일피일 미뤘고 또 이것이 빌미가 돼 몽고군은 8차, 9차 침공을 단행한다. ㅡㅡ

6. 최항의 죽음과 최의의 집권, 그리고 몽고의 8차 ~ 9차 침공

고종 44년인 1257년 연초에 고려 조정은 몽고가 해마다 전란을 일으키니 아무리 힘껏 섬겨도 이득이 없다고 의견을 모은 후, 봄철마다 정기적으로 보내는 공납을 중지하기로 결정했다. 갑작스레 왜 이런 결정에 이르게 되었는지 의문이긴 한데, 전 국토의 초토화와 오랜 가뭄으로 고종의 식사에 반찬가짓수를 줄여야 할 형편이었다고 하니 아마도 현실적인 판단이 공납중지의 근거가 되지 않았나 추정해본다.

음력 4월에 강원도 원주에서 일어난 안열의 반란을 진압한 직후인 윤4월에 최항이 갑자기 병으로 죽었다. 고려든 몽고든 왜이리 급작스레 죽는 사람이 많은지. ㅋ 고려사 반역열전 최항편에는 그가 병을 무릅쓰고 후원의 작은 정자에 올라 시 한수 짓고는 급사했다고 한다. 시의 내용은? 뭐 그냥 인생무상을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 최항은 애초 승려로 있을 때 송서의 여종과 사통하여 최의를 낳았는데, 본처와의 사이에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최의가 최항의 뒤를 이어 고려의 집권자가 되었다. 최충헌 이후 4대째 권력세습니 완성된 것이다.

최의은 용모가 멋졌고 두 손에는 은은한 금빛이 있었다고 한다. 반면 몸이 뚱뚱해 최후의 순간에 제대로 도망조차 못할 정도였다고 하는데 요즘의 외모기준과는 달라 와닿는 느낌은 없다. 성격은 말이 없고 수줍음이 많은 반면 그다지 영리하지 못해 측근들의 발호를 제어하지 못했다. 더불어 자신이나 자신의 아버지 최항이 모두 폐기 천출의 소생이었으므로 출신에 대해 험담한다는 참소가 올라오기만 하면 모두 죽였버렸다고 한다. 어미의 신분에 대한 콤플렉스가 제법 강했던 듯...

그 애비에 그 아들이라 최항이 죽자 최항의 애첩 심경을 바로 후실로 들이는 역대급 패륜을 저지르며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최의는 사재를 털어 백성을 구율하고 왕실에 헌납하는 등 선심을 배푸나 이것은 교정별감 취임기념 쇼에 불과했을 뿐 얼마 지나지 않아 강화수확사를 통해 백성들의 재물들을 수탈해 백성들의 큰 원성을 샀다. 또한 인사에 완전 실패하여 용렬하고 경박하며 재물을 탐하는 자들로 조정을 채우니 참소당할까 두려워 측근들조차 내부에서 불만이 팽배해져갔다. 그도 그럴 것이 최충헌이나 최이는 정변을 통해 집권에 성공했고 최항은 젊은 시절 승려로 개경 밖에서 살았지만 최의는 온실 속의 화초마냥 어렸을 때부터 극단의 보호아래 살았을 것이므로 현실판단 능력이 떨어지는 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1) 8차 침공

집권 후 한달이 채 지나지 않은 1257년 5월에 몽고가 8차 침공을 단행한다. 이유가 어찌되었던 연초에 공납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으니 예정된 수순이었다. 8차 침공에서 몽고의 선봉은 직산(지금의 충남 천안시 직산읍)까지 침범하는데 고려는 김수강을 다시 몽고에 파견하고 태자를 입조시키는 문제에 대해 지난한 논의를 이어간다. 8차 침공까지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는 못하지만 사서의 기록을 보면 점차적으로 태자의 입조를 수용하는 분위기가 퍼져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고려의 저항도 점점 그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그런데 몽고의 철군은 생각지 못한 곳에서 결정된다. 1258년부터 몽케 칸은 남송을 대대적으로 침공하는데 김수강이 몽고에 갔을 무렵 몽케 칸은 몽고군의 주력을 이끌고 사천의 성도로 이동 중이었다. 원사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맘때가 그 유명한 조어성 전투가 일어나기 직전인 것이다. 고려사절요의 기록에 의하면 김수강은 몽케 칸을 행영(行營)에서 만나 회군하여 주기를 지성으로 빌었다고 한다. 7차 침공 때도 넓은 견문과 침착한 대응으로 몽케 칸을 설득하는데 성공한 김수강... 고려사 열전에는 7차 침공 당시 몽케 칸이 김수강의 언변에 설득되어 말하길 김수강이야말로 진정한 사신이라며 칭찬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지성으로 빌었다고 하니 김수강이 겪었을 인고의 마음이 현재에도 느껴지는 듯 하다. ㅜㅜ 아무튼 당시 몽케 칸은 주된 관심사는 남송이었기 때문에 김수강의 철군요구를 다시한번 수용하고 쟈릴타이에게 회군을 명한다. 이때가 1257년 음력 10월이었다.

(2) 암살되는 최의, 김준의 등장

이듬해인 고종 45년(1258년)에 고려의 정치가 다시한번 격동에 휩싸이는 대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최의가 암살된 것. 최의의 암살사건을 설명하려면 김준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 듯 하다.

김윤성이란 자가 있었다. 그는 노비였는데 원래 주인을 배반하고 최충헌의 노비로 들어가 아들 김인준(후에 김준으로 개명)과 김승준을 낳았다. 이 중 김준이 어렸을 적부터 여러 재능을 보였는데 훗날 송길유 등의 추천으로 최이의 측근으로 활동하게 된다. 김준에 대한 최이의 신임은 제법 컸던 것으로 보인다. 김준이 최이의 애첩 안심과 간통하다가 들켰는데 지금의 경남 고성으로 몇년간 유배되었다가 돌아오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최이가 죽고 최항이 집권할 당시 상장군 주숙이 야별초와 내외도방을 거느리고 정권을 국왕에게 되돌리려는 움직임을 보였는데 이때 김준은 최씨가의 가노 70여 명과 함께 최항 편에 섬으로써 주숙의 의도를 사전에 봉쇄시켰다. 덕분에 최항의 권력승계가 쉽게 완성되고 최항은 김준을 크게 신임하여 별장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최항의 아들 최의는 달랐다. 최의는 최양백과 유능만을 신임하고 김준은 멀리 했다. 그러다 송길유가 극심한 부정부패로 탄핵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김준은 자신을 천거한 송길유에 대한 의리로 탄핵보고서를 최의에게 전하지 말아달라는 청탁을 유경과 유능에게 하게 되는데 이러한 사실을 최의의 외삼촌 거성원발에게 들켜버리고 만다. 거성원발을 통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최의는 크게 노하여 유경, 유능, 김준 형제를 호되게 꾸짖고는 이후로 만나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최의의 신임을 완전히 상실한 김준은 자신이 무고로 하루아침에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갖게 되었는데 마침내는 유경, 임연 등과 모의하여 최의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김준의 맏아들 김대재가 자신이 장인인 최양백을 거사에 끌어들이고자 거사계획을 알렸고 최양백은 사위의 기대와는 달리 이 사실을 최의에게 일러바쳤다. 그러나 최양백의 밀고를 아는 또다른 한명이 있었으니 바로 최양백의 딸인 김대재의 처였다. 김대재의 처는 이 사실을 남편에게 고했다. 김대재는 김준에게 거사를 앞당겨야 한다고 말했고 최의가 김준을 토벌하고자 한 전날 밤에 거사를 일으켜 최의를 암살했다.(무오정변)

드라마에나 나올뻔 한(아... 실제 드라마에 나왔구나. ㅋ) 뒤빡에 뒤빡치기가 난무한 가운데 최의는 죽었고 그렇게 60년 최씨정권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김준은 자신의 거사를 최의에게 고변한 사돈 최양백을 횃불로 입을 지진 후 참수했다. ㅡㅡ;;; 거사가 일어나고 김준의 야별초 등이 최의의 집에 들이닥치자 최의의 외삼촌인 거성원발은 최의를 업고 달아나려 했으나 최의가 너무 살찌고 무거워 불가능했다고 한다. 거성원발은 장사였다는데 장사가 업지 못할 정도면... 다이어트 합시다!!! ^^;;; 그래서 최의를 다락방에 숨기고 단신으로 문을 막아섰지만 이내 뚫렸고 자신은 담을 넘어 강기슭으로 도망갔지만 김준의 군사들에게 잡혀 죽었다. 다락방에 숨어있던 최의 역시 군사들에게 끌려나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김준, 유경 등이 거사사실을 고종에게 고하자 고종은 "경들이 나를 위해 엄청난 공을 세웠소."라고 추켜세우며 눈물을 비 오듯이 흘렸다고 한다. 영원할 것 같았을 최씨정권의 종말을 보는 고종의 심정은 어땠을까? 쏟아졌을 눈물의 의미는 공감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무오정변 이듬해인 1259년 2월, 고려사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왕이 종친과 재추들에게 잔치를 베푸는 자리에서 두 번이나 손을 들어 신하들에게 보이면서,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다들 박수를 치며 흥을 돋우라고 말했다. 술자리가 끝났는데도 왕은 크게 즐거워했고 신하들은 박수를 치며 뛰노느라 온 몸을 땀으로 적셨으며 저녁이 되어서야 겨우 마쳤다.' 잔치를 열었다는 수많은 기록 중에 고종이 저토록 즐거워한 기록은 없다...

무오정변을 일으킨 자들의 명분은 왕정의 복고였다. 때문에 이전의 무신 집권자들과는 달리 무오정변 직후에는 고종의 입김이 상대적으로 크게 작용했던 듯 하다. 고려사 열전 최온편을 보자. 최온은 김준 등이 무오정변을 계획할 때 함께 의논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아들 견룡행수 최문본은 뜻이 달라 김준 등의 계획을 편지로 최의에게 고변했다. 무오정변이 성공한 후 유경, 김준 등은 최문본을 처형하려 했는데, 고종은 대의를 모르는 자들일 뿐이라 하여 유배 정도로 마무리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유경 등이 계속하여 처형을 주장하자 "꼭 죽여야 한다면 무엇하러 나에게 다시 보고하랴? 경들 마음대로 하도록 하라!"하며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바렸다. 그러자 유경 등이 땅에 엎드려 사죄한 뒤 결국 최문본을 섬으로 유배보냈다고 한다. 생각해보라. 이전 무신 집권자들이었다면 저러한 일이 상상이나 가능했겠는가? 물론 여기에는 무오정변의 결과로 탄생한 유경, 김준 등의 정권이 비슷한 세력 규모를 가진, 소위 위사공신(무오정변의 공신)들의 집단지도체제 때문이라는 원인이 있다. 집단지도체제인 만큼 고종의 의중은 그들 사이의 힘의 균형에 미묘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이전의 무신집권자들처럼 대놓고 왕을 무시하기란 힘들었을 것이다. 더불어 주요 위사공신 중 한 명인 유경이 문신인 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집단지도체제란 말은 지도자간 필연적으로 권력쟁탈전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과 동치이다. 이후의 역사에서 유경과 김준이 차례로 권좌에서 내려오기도 하지만 현대사에서도 이러한 예는 너무나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역시 권력은 그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법인 모양이다...

정권을 잡은 김준 등은 최의의 재산을 몰수해 분배하고 최의가 외면한 구휼사업을 진행한다. 이때가 고종 45년인 1258년 4월이었는데 무오정변이 일어나고 약 한달이 되는 시점이었다. 그런데 이때 몽고가 9차 침공을 단행한다.

(3) 9차 침공

8차 침공 이후 역시나 고려가 태자의 입조를 차일피일 미루자 1258년 4월에 몽고는 9차 침공을 단행한다. 9차 침공 역시 그 이전의 침공 양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종과 태자의 입조를 요구하면서 군대를 분할해 전국 각지를 살육과 침탈로 휘젖고 다니는 것... 고려도 마찬가지다. 몇몇 지역의 전투에서 승리하기는 하나 고려 조정은 강화도에서 나올 생각이 없고 그 사이 내륙의 백성들은 죽어나가는 것... 이 말은 정권을 잡은 무오정변의 세력들 역시 대몽관계에 있어서는 최씨 집권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뜻이다. 아니 한술 더 떴는지도 모르겠다. 실제 개경환도는 원종 11년인 1270년에 가서야 이루어지며, 이 사이 김준은 한 때 제주도 천도까지 고려하고 있었으니까... 아무튼 9차 침공까지 당한 고려의 저항력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었다. 1258년의 고려사 마시막 기사는 '이 해에 각 도의 곡식을 모조리 몽고군에게 약탈당했다.'이니 당시 고려 백성의 참담함은 형언이 어려울 것 같다...

9차 침공에 있어 눈에 띠는 전투기록은 한계성 전투다. 1259년 2월에 조휘 등이 이끄는 반란군이 몽고군을 이끌고 와 한계성을 공격했는데 방호별감 안홍민이 야별초를 거느리고 나가 전부 섬멸한 전투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승패가 아니라 조휘라는 인물이다. 조휘는 원래 용진현(지금의 강원도 문천시)에 살고 있었는데 당시 동북면병마사 신집평이 몽고군의 공격을 방어한다는 이유로 화주(지금의 함경남도 영흥) 일대의 백성들을 섬으로 옮기게 하는 입보정책을 과도하게 추진하자 여기에 앙심을 품고 정주(지금의 함경남도 금야군)사람 탁청 등과 모의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을 일으킨 조휘는 신집평과 화주부사 김선보 등을 죽였으며 고성(지금의 강원도 고성군) 등을 공격해 노략질을 일삼았다. 그리고는 몽고에 투항하는데 문제는 자신의 영향권 안에 있던 화주 이북의 땅을 들어 몽고에 바쳐버렸던 것! 이때가 1258년 음력 12월의 일이었다. 고려의 입장에서 보면 매국노도 이런 매국노가 없었을 것이다. 아니다. 홍복원이 있었군... ㅡㅡ;;; 몽고는 화주에, 우리가 국사시간에 지겹도록 들었던, 쌍성총관부를 설치하고 직접 통치에 들어간다. 초대 쌍성총관이 조휘이며 조휘의 후손들이 총관의 자리를 대를 이어 세습했다. 쌍성총관부는 약 100년 후 공민왕이 무력으로 4대 총관인 조소생을 패배시키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조휘 같은 인물이 현 시대에 없을 것 같지? 나라 팔아 개인의 영달을 노리는 인간들 엄청 많다. 드러나지 않을 뿐이지... ㅡㅡ

고종 46년인 1259년 3월에 고려와 몽고 사이에 드디어 강화협상이 체결된다. 조건은 역시나 태자의 몽고 입조! 5월에 입조하느냐 4월에 입조하느냐를 두고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지만 음력 4월 갑오일에 태자 왕전이 몽케 칸에게 바치는 표문을 들고 몽고로 향했다. 이로써 1231년 음력 8월부터 시작된 여몽전쟁이 근 30년만에 끝을 맺었다. 혹자들은 비록 고려가 항복하는 것으로 전쟁이 마무리되었지만 당시 세계최강이던 몽고군을 상대로 많은 전투에서 승리했고 장기간 항전을 이어나갔다는 점, 훗날 삼별초의 난까지 대몽항쟁을 이어갔다는 점을 들어 긍정적인 역사로 평가한다. 또한 혹자는 전란기간 수많은 고려 백성이 도륙당하고 전 국토가 초토화되었지만 최씨 무신정권은 강화에 틀어박혀 정권유지에만 관심을 가졌을 뿐 제대로 된 대책을 내놓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의 흑역사라고 주장한다. 두 주장 모두 타당한 면이 있다. 핵심은 역사를 통해 우리가 지금 현재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고찰해보는 것이 아닐까? 중국이 성장해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면서 우리나라의 정세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각에서는 미국과 함께 반중국 전선에 굳건히 서자고 주장한다. 또한 일각에서는 안보의 위협이 가중되고 중국의 견제로 인한 경제피해는 우리나라 국민과 기업이 짊어져야 하니 전면적인 대립각을 세우는 것에는 반대한다. 출범한지 한달이 안된 윤석렬 정부는 어떤 스탠스를 취해갈까? 필자 생각하는 바 있지만... 이 역시 각설하고 독자들에게 여운을 남기고자 한다...

7. 고종의 붕어. 길었던 46년간의 재위

태자 왕전이 몽고로 떠난 1259년 음력 4월에 고종의 병세가 위중하게 되었다. 고종은 궁궐을 나와 유경의 집에서 머물렀는데 몽고에 들어간 태자 왕전이 자신의 입조를 모르고 고려로 출병하려던 몽고군을 막고 몽고사신이 강화도의 외성과 내성을 허무는 등 몇몇 사건이 있었다. 음력 6월 임인일에 고종이 향년 68세의 나이로 붕어했다. 고종이 붕어하자 김준은 고종의 둘째아들인 안경공 왕창을 보위에 세우려했다. 그러나 조정의 반대와 고종의 유언이 공개되면서 김준의 시도는 무산된다. 김준은 왜 그랬을까? 사서에 뚜렷한 기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김준 역시 앞선 무신 집권자들처럼 왕을 새롭게 세움으로써 자신의 권력기반을 다지고 그 세를 더욱 확장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씨 무신정권을 끝장내기는 하였으나 김준 역시 무신정권으로 인해 확립된 체제를 옹호하고 그 혜택을 보려하였기에 모순의 담지자로서 고려 사회의 개혁을 시도할 것이라는 기대는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었다.

고종은 유언에서 태자 왕전이 귀국할 때까지 태손(훗날 충렬왕)으로 하여금 국정을 대신하게 하였다. 고종은 46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재위하였지만 최씨 무신정권의 거수기로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고려사에 이제현이 논평하길 '고종이 수치를 묵묵히 견디어 내었기에 그 왕위를 보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정권이 왕실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하였다. 한마디로 끈질기게 버텨온 것만으로도 공덕이라는 것이다. 하긴 4대에 걸친 최씨 집안의 집권자들을 모두 보았으며, 9번에 걸친 몽고의 침략을 모두 겪었으니 왕으로써 이만한 인고의 세월을 견뎌낸 이도 없으리라. 때문에 필자는 앞선 명종과는 달리 제대로 된 업적이 없다 한들 고종을 박하게 평가하진 못하겠다. 인간적으로 동정이 앞서는 그런 왕이 고려의 고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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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고종편이 끝났다. 길었던 재위기간 만큼 글도 무지 길었다. 줄인다고 줄였는데... ^^;;; 이제 고려는 본격적인 몽고의 간섭기에 돌입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