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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정치권력사 - 24. 원종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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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6. 21.

[ 고려 정치권력사 - 24. 원종편 ]

고려 제24대 임금인 원종은 고종과 안혜왕후의 맏아들로써 초휘는 전이었으나 뒤에 식으로, 다시 정으로 바꾸었다. 고종 22년인 1235년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9차 침공을 단행한 몽고에 강화를 청하기 위하여 1259년에 표를 가지고 몽고에 입조했다. 여기서 쿠빌라이와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게 되면서 고려 역사의 물줄기가 바뀌게 된다.

요동치는 몽고의 정세

1258년 몽고의 몽케 칸은 대대적으로 남송을 침략했다. 몽케 칸은 친정을 감행했는데 그는 주력을 이끌고 사천으로 들어갔고 그의 동생인 쿠빌라이는 악주(지금의 호북성 무한시), 수부타이의 아들인 우량카다이는 운남에서 담주(지금의 호남성 장사시)로 치고 들어갔다. 몽케가 사천을 휩쓴 후 장강을 따라 동진하다가 쿠빌라이와 우량카다이와 조우한 뒤 남송을 한번에 집어삼킬 계획을 세웠던 것. 몽케가 성도를 함락할 때까지만 해도 그의 작전은 순항하는 듯 했다. 그러나 남송의 명장 맹공의 부장이었던 왕견과 장각이 지키고 있던 합주 조어성(지금의 사천성 중경시)에 이르러 강력한 저항에 발이 묶이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조어성 전투다.

몽케는 조어성을 구원하려는 남송의 지원군을 차단하고 성을 포위하여 항복을 받아내려 했지만 조어성은 물자가 풍부한데다 왕견 등의 적극적 전술구사로 5개월 이상 점령에 실패했다. 김경손의 귀주성 전투랑 비슷하다고나 할까? ^^ 그러다 몽케가 직접 전선시찰에 나섰는데 이를 본 남송군이 포사격을 실시, 몽케가 전사하고 만다.(일부 사서의 기록에는 몽케가 병사했다고 기록하고 있음. 1259년 음력 7월) 몽케 칸이 전사하자 몽고군은 철군을 단행하고 남송은 그 생명을 연장하게 되었는데, 몽케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몽고는 내분에 휩싸이게 되었다.

당시 몽고의 수도 카라코룸에는 몽케 칸의 막내동생 아리크부카가 있었는데, 그의 형들인 쿠빌라이는 악주 전선에, 훌레구는 페르시아 전선에 있었다. 그는 형들이 없는 틈을 타 쿠릴타이를 열고 몽고 귀족들의 지지를 획득하여 대칸의 자리에 추대되었다. 그러자 북중국 일대에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던 쿠빌라이가 반발하여 지금의 내몽골 자치구 시린궈러 맹의 정란 기인 개평부에서 독자적인 쿠릴타이를 개최, 대칸을 자칭하였다. 대칸의 자리를 두고 내전이 시작된 것. 이때가 1260년 3월인데 이보다 앞서 쿠빌라이가 개평부로 회군하고 있던 와중에 고려에서 입조한 원종(당시 태자)과 만나게 된 것이다.

원종이 쿠빌라이와 대면한 사건을 두고 원종이 심사숙고 끝에 쿠빌라이를 선택한 것이라는 주장이 많다. 그 근거는 고려사에 몽케 칸의 사망 이후 제후들이 누구 편에 붙어야 할 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왕이 '마침내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험로를 통과해 양주와 초주의 교외에 이르러 쿠빌라이를 만났다고 적혔기 때문이다. 고려사절요에서는 원종의 고민에 대해 특별한 언급이 없다. 다만 '헌종(몽케 칸)이 죽었는데 아리발가(아리크부카)가 북방에서 군사로 항거하고 있어서 인심이 걱정하고 의심하여 좇을 곳을 알지 못하였다'고 하였으니 카라코롬으로 향하는 와중에 몽케 칸의 사망소식을 듣고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만약 원종이 정말로 쿠빌라이를 선택할 심산이었다면 가지고 간 표문을 바쳤어야 했는데 사서에는 표문을 바쳤다는 기록이 없다. 따라서 몽케 칸의 사망소식에 황망해 하던 중 회군하던 쿠빌라이와 동선이 겹쳤고 우연히 조우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긴 원종의 비상한 선택이든 우연한 만남이든 원인이 중요한 건 아니었다. 고려 태자와 유력한 몽고 대권주자의 만남은 그 자체로 상호간에 던져주는 정치적 함의가 매우 컸다. 특히 쿠빌라이의 입장에선 대칸의 자리를 두고 아리크부카와의 내전을 목전에 두고 있는 상태였으므로 20여년간 항쟁을 이어가고 있던 고려가 자신에게 귀순하는 형국을 만들어내는 건 자신에게 대외적으로 매우 긍정적으로 작용할 요소였다. 쿠빌라이는 원종에게 번왕의 예로서 대우했다.

참고로 쿠빌라이는 아리크부카와 내전에 들어가 최종적으로 승리하며 5대 대칸의 자리에 공식적으로 올랐다. 특히 1261년 시무토노르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카라코룸 봉쇄에 들어가 아리크부카를 압박했고 1264년 8월에 아리크부카의 항복을 받아냈다.

즉위와 김준의 제거

원종은 1260년 음력 3월에 귀국해 4월에 즉위했다. 고종은 1259년 음력 6월에 죽었는데 사이 약 10개월의 기간은 고종의 유언에 따라 태손인 왕심(훗날 충렬왕)이 대리청정 하였다. 이 시기 큰 기근이 들어 관리와 백성들 중 아사자가 속출하고, 범을 맨손으로 잡은 자가 시의(侍醫 : 어의)에 임명되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다. 1260년 음력 8월에 쿠빌라이가 조서를 보내오는데 여기에 소위 말하는 불개토풍(不改土風)의 내용이 처음 나온다. 그 내용은 의관을 바꾸지 말며 다루가치를 귀국시키는 등 고려의 풍속을 유지케하고 자주적 통치를 허락하는 것들이었다. 수험국사를 하는 분들 사이에 불개토풍이랑 세조구제(世祖舊制)를 구분해야 하니마니 논란이 많은데 세조구제는 충렬왕 때 쿠빌라이의 약속을 재확인 받은 걸 뜻하는 말일 뿐이다. 역사를 봄에 있어 본질에 접근하려는 노력보다 지엽적인 차이를 물어 점수의 차이를 두려는 의도... 정말 극혐한다. ㅡㅡ

이후 사서의 기록을 보면 개경환도를 미루고 육사(六事)를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 하여 쿠빌라이가 원종을 책망하는 조서를 수차례 보내오는데, 흔히들 원종이 태자 때 쿠빌라이를 직접 대면한 사건에 미루어 둘 사이를 아주 친밀했을 거라 생각하지만, 조서의 뉘앙스로만 보면 원수도 이런 원수가 없다는 식이다. ㅡㅡ;;; 여기서 육사란 몽고가 점령국에 요구했던 공통된 조건들을 말하는데, 납질(볼모를 보내는 것), 공호수적(호구수를 보고하는 것), 설역(역참을 설치하는 것), 조군(파병하는 것), 수량(식량을 지원하는 것), 치다루가치(다루가치를 받아들이는 것)가 그 내용이다. 고려는 현실적 준비가 미흡하다는 이유로 개경환도와 육사의 완전한 실행을 계속 미루었는데, 실상 그 내용을 보면 일부러 몽고의 요구를 뭉개버렸다기 보단 실제로 전후복구에 너무 허덕여서 몽고의 요구를 수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쿠빌라이와 원종의 중간에서 고려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고려를 계속 쪼아야 한다고 쿠빌라이를 부추긴 인물들이 있는데 자진해서 몽고에 투항하여 몽고의 관료가 된 홍복원, 조이 같은 매국노들이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개가 되어 일본인보다 더 조선을 수탈한 매국노들이 있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지금은 없을 것 같지? 천만에~ 우리가 신경쓰지 않아서 그렇지 공공연하게 매국노의 언행을 일삼는 인간들 생각외로 많다. 가끔씩 본성을 감추지 못하고 튀어나올 때가 있는데 그런 인간들 유심히 잘 봐둬야 한다. ㅡㅡ

결과론적으로 봤을 때 몽고의 요구대로 개경환도를 하고 몽고와 연합하여 삼별초의 난도 진압했기 때문에 일부 사람들이 원종을 친몽정책을 선택한 군주로 단정적인 표현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필자가 봤을 때 이는 한계가 있는 표현이다. 원종은 쿠빌라이의 요구에 따라 태자는 물론 자신까지 몽고에 입조한 군주이지만 친원파들이 몽고의 의복을 입자고 강권했을 때 내눈에 흙이 들어가지 전까진 못하겠다고 버틴, 지극히 현실주의자다운 모습을 보인 군주였다. 반면 집권자 김준의 경우는 달랐다. 애초에 지지기반이 반몽을 주장하는 무신집단이었던데다가 원종이 현실주의를 택할수록 몽고의 힘을 업고 입지가 커지기 때문에 자신의 권력에는 방해가 될 수밖에 없없다. 김준은 최의를 암살한 무오정변 이후 8개월만에 얼굴마담이라 할 수 있는 문신 유경을 탄핵하여 권력독점의 기반을 다졌고 원종 7년인 1265년에 시중의 자리와 해양후라는 작위를 얻었다. 이맘때가 김준 권력의 정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후 원종과의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하는데 앞서 언급한 이유로 인해 예정된 결과였다 말할 수 있다. 사서에는 김준이 시중이 된 이후 전횡을 휘두르며 원종을 무시하는 듯한 에피소드가 몇몇 소개되어 있다. 김준이 타락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후세의 사가들이 지적한 것이라 볼 수 있는데 결정적인 것은 몽고가 고려를 통해 일본을 침략하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었다. 1266년 쿠빌라이 칸은 고려에 조서를 보내 일본에 사신을 보낼 것을 종용한다.(사서에 의하면 쿠빌라이에게 일본정복의 바람을 넣은 것은 매국노 조이였다. ㅡㅡ;;) 몽고의 정복사를 통해 익히 알려져 있듯이 일본을 침탈하려는 사전정지 작업인 셈. 당시 고려도 몽고의 의도를 눈치채고 있었고 이것이 고려수탈의 또다른 명분이 될 것이라는 것 역시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고려는 풍랑이 거세고 기존에 왕래가 없었다는 점을 들어 차일피일 미룬다. 그러자 분노한 쿠빌라이가 1268년 송나라를 치기 위한 군사와 전함의 준비를 명하며 그 실정을 김준이 직접 입조하여 보고하라는 조문을 보내온다. 이에 김준은 사신을 죽이고 멀리 떨어진 바닷섬으로 들어가자고 원종에게 간하는데 원종이 이를 수용할 리 만무했다. 원종의 완강한 거부에 김준은 수하였던 차송우 등과 상의하여 독단적으로 원종을 폐위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사신을 죽일 계획을 세우나 엄수안의 충고를 들은 김충(김준의 아우인 김승준)이 제지하여 미수에 그치게 된다. 김준의 반역사실을 원종이 몰랐을 리 없다. 원종은 당시 김준과 사이가 벌어진 임연에게 김준을 제거할 것을 부추켰다. 사서에는 임연이 김준의 아들과 토지문제로 싸운 일, 임연의 처가 노비를 죽인 일 등으로 인해 김준과 원한을 지게 되었다고 나오는데 김준을 아버지로 불렀다는 임연이 그깟 일로 배를 갈아탈 결심을 하였는가 하는 점에는 의문이 있다. 필자 생각에는 아마도 김준의 후계구도를 둘러싸고 김준의 친자들과 권력다툼이 있었고 점차 밀려나는 형국이 되자 위기를 느끼고 원종의 김준제거 지시에 따르게 되지 않았나 싶다.

김준의 암살장면은 아주 극적이다. 그만큼 사서에 아주 디테일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소리다. 임연이 큰 몽둥이를 궤짝에 담아 궁중에 숨겨두고 거사일을 원종이 몽고사신 탈타아를 전송하는 1268년 음력 12월 병신일로 정했는데 마침 김준이 원종을 호종하지 않아 실행하지 못하였다. 이튿날에도 김준이 출근하지 않자 환관 김경이 왕명을 내세워 김준을 불렀다. 그 사이 김준의 처족인 또다른 환관 박문기가 암살모의를 눈치채고 입궐하는 김준에게 알리려하였으나 옹위하는 사람이 많아 알리는 알리는데 실패했다. 암살을 막고자 호위병을 늘렸을 터 되레 많은 호위병으로 인해 죽게되다니 정말 아이러니다. ^^;;; 편전에 이른 김준을 환자 최은이 왕의 몸이 불편하다 하여 정당(왕의 당상)에 불러올렸는데 초(궁궐에 있는 관노)안 김상을 시켜 숨겨놨던 몽둥이로 내려치고 뒤이어 김준의 목을 쳤다. 이어 들어온 김준의 동생 김충이 핏자국을 보고 뛰쳐나가려 했지만 환관 김자정의 동생 김자후가 죽였으며 김준의 수하들이 들이닥치려 했지만 김자정이 왕명임을 앞세워 그들을 밀어냈다. 사서에 묘사된 사건의 진행과정을 살펴보건데 암살이 사전에 아주 치밀하게 계획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직접 암살을 실행한 이들로 다수의 환관들이 등장함을 미루어보아 원종이 암살모의단계부터 깊숙히 관여했음을 알 수 있다.

무신정권의 종말과 개경환도

아무튼 김준이 암살됨에 따라 그의 일족과 수하들은 임연에 의해 단박에 씨가 마르게 된다. 그리고 임연이 정권을 잡았는데 임연은 김준과는 다른 집권자였을까? 물론 그렇지 않았다. 원종이 김준을 제거하려 했던 근원적인 목표는 개경환도를 통한 완전한 왕정복고를 달성하는데 있었지만 임연은 무신으로서 김준이 지녔던 권력을 자신에게 온전히 이양시키는데 그 목표가 있었으므로 대몽고정책에 있어서는 김준의 입장과 동일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다시 말해 원종에게 임연은 정치적 필요에 의해 쓰다버릴 도구에 불과했다는 걸 의미하며, 개경환도를 둘러싼 원종과 임연의 대립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둘 중 먼저 칼을 빼든 것은 임연이었다. 김준을 살해한 이듬해인 1269년 음력 6월에 김준 살해 당시 행동대장이며 원종의 측권이었던 환관 김경과 최은을 죽이고 친왕파 장수들을 유배보낸 뒤 삼별초 등을 동원하여 원종을 별궁에 유폐하고 원종의 동생인 안경공 왕창을 옹립했다. 왕창은 뒷날 영종이라는 시호까지 받았는데 당시에는 정식 왕으로 인정하는 사람들도 있었던 모양이다.

임연은 왕창의 옹립에 대해 몽고에 원종이 병에 걸려 위중하기에 왕창에게 왕위를 맡겼다고 거짓으로 상주했다. 당시 태자(훗날 충렬왕)는 몽고에 입조해 있었는데 귀국길에 원종이 유폐당했음을 알고 되돌아가 쿠빌라이 칸에게 해당사실을 알렸다. 보고를 들은 쿠빌라이는 모든 걸 반신반의 했다. 그러던 중 서북면병마사영에 기간으로 있던 최탄 등이 원종의 복위와 임연의 처형을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켜 서경을 중심으로 서북면일대의 땅을 들어 몽고에 투항하는 일이 일어났다. 뜻은 알겠는데 그렇다고 땅을 들어 타국에 투항이라니... ㅡㅡ 이에 쿠빌라이는 동녕부를 설치하고 자비령을 경계로 그 이북지역에 대한 직접 통치를 선포하며 총관으로 최탄을 임명한다. 그리고는 원종과 왕창, 임연의 직접 입조를 명하고 두련가국왕(칭기즈칸의 4대 공신 중 한명인 무칼리의 증손으로 당시 북경과 요동의 상서성을 관장했다.)에게 출병을 준비시켰다.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임연은 원종을 다시 복위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5개월 남짓의 왕창의 짧은 재위는 마무리되었다.

원종이 복위되었지만 임연이 바로 실권한 것은 아니다. 복위한 원종은 쿠빌라이 명에 따라 1269년 음력 12월에 몽고에 입조했는데 원종은 임연의 지시대로 자신의 병 때문에 잠시 왕창에게 국사를 맡겼노라 이야기 했다. 그러나 쿠빌라이는 원종을 호종한 태자와 시중 이장용, 그리고 임연의 아들 임유간을 대질심문하여 진실을 알게 되었다. 쿠빌라이는 임유간을 하옥하고 임연의 입조를 압박하는 조서를 고려에 보냈다. 1270년 음력 2월 원종이 귀국길에 오르자 몽고의 처벌을 두려워한 임연이 근심하다 등창이 발병하여 죽어버렸다. ㅡㅡ;;; (급작스러운 죽음이라 조금 어이없다. 필자 생각에는 대책을 강구하지 못한 임연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게 아닌가 상상해본다)

원종은 몽고에 입조하기 전 자신이 없는 동안 자신의 셋째아들인 순안후 왕종에게 국사를 맡겼다. 임연이 죽자 왕종은 임연의 또다른 아들 임유무에게 아버지를 대신케 했다. 그때까지도 고려조정에는 임연의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는 방증이다. 귀국길에 오른 원종은 조정에 사람을 먼저 보내 개경환도를 명령한다. 이보다 앞서 원종은 쿠빌라이에게 청병하여 개경주둔을 부탁했는데 아마도 임유무의 저항을 짐작하고 미리 대비하려 했던 게 아닌가 생각한다. 원종의 개경환도를 명을 받은 임유무는 은퇴한 재추들까지 동원하여 조정의 뜻으로 환도에 반대하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무신정권 절정기와 비교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로 종말에 다다른 무신정권 파워의 한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임유무는 야별초를 지방에 파견하는 등 독자적으로 왕명을 거부하려 하는데 이번에는 지방관들이 임유무에 반기를 들고 원종의 편에 서기 시작했다. 그만큼 몽고의 전쟁에 지칠대로 지쳐있었다는 뜻이리라. 결국 내부에서조차 반발이 분출하게 되고 임유무가 원로무신인 이응렬과 송군비에게만 의지하는 것에 불만을 품은 홍문계, 송송례 등이 반란을 일으켜 임유무를 처형시켜버렸다. 고려사절요에는 원종이 이분성이란 자를 통해 홍문계를 회유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써 무신정변 이후 약 100년간 지속되었던 무신정권이 마침내 그 막을 내렸다. 무신정권기의 폐단이야 앞서 누차 언급했으므로 중언할 필요는 없겠으나 희종을 제외하고 무신집권자들에게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던 명종, 신종, 강종, 고종과 달리, 비록 몽고의 힘을 빌렸다는 한계는 있겠으나, 원종은 주도적으로 무신정권의 청산에 앞장섰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삼별초의 난

필자가 어렸을 때만 해도 삼별초의 난은 외세에 저항한 항쟁의 대명사로 평가되어졌다. 소위 민족주의사관에 근간한 평가인데 근래에 들어서는 이러한 천편일률적인 평가가 많이 사그러든 것 같다. 한마디로 거품이 걷힌 것. 특히 여몽전쟁 기간 강화에 틀어박힌 무신집권자들에 비해 내륙의 고려백성들은 그야말로 도륙을 당한 점이 부각되면서 삼별초의 난이 진정으로 민족항쟁이었는지, 무신정권 잔존세력들의 마지막 발악에 불과한 것인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와는 별개로 근래에는 삼별초의 난에 많은 노비들이 참여한 점을 들어 신분해방운동의 일환으로 보는 새로운 해석도 등장했다. 이 모든 논쟁은 현재진행형이다. 한번씩들 생각해 보는 것도 괜찮을 듯~

삼별초의 근원에 대해서는 고려사절요에 명쾌하게 기록되어 있는 바, 기록을 옮겨놓는 것으로 대신한다.

장군 김지저(金之?)를 강화에 보내어 삼별초를 파하였다(해체하게 하였다). 과거에 최우(崔瑀)가 도성 안에 도둑이 많으므로 용사들을 모아 밤마다 돌아다니며 폭력을 금하게 하고, 인하여 야별초라 이름하였다. 도둑이 여러 도에서 일어나므로 야별초를 나누어 보내어 잡게 했었는데, 그 군사가 너무 많으므로 드디어 나누어 좌ㆍ우별초를 만들었다. 또 국인(國人)으로서 몽고로부터 도망하여 돌아온 자로, 일부(一部)를 만들어서 신의군(神義軍)이라고 이름하였으니 이것이 '삼별초'이다. 권신이 국정을 잡자, 삼별초로 조아(爪牙, 손톱과 어금니. 매우 쓸모있는 사람이나 물건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를 만들어서 그 녹봉을 후하게 주고, 혹은 사사 은혜를 베풀며 또 죄인의 재산을 적몰하여 주었으므로, 권신의 턱짓에 따라 앞을 다투어 힘을 다하였으니, 김준이 최의(崔?)를 죽일 때와 임연이 김준을 죽일 때와 송례가 유무를 죽일 때에 모두 삼별초의 힘에 의뢰하였다. 왕이 다시 옛 서울에 도읍하니 삼별초가 도리어 의심하여 배반할 마음을 품었으므로 파한 것이다. 지저가 명부를 취하여 돌아오니 삼별초들이 그 명부로 상국 조정에 아뢸까 두려워하여 더욱 반역할 마음을 품었다.(고려사절요 제18권 원종 순효대왕 경오 11년 5월)

상기 기록을 읽어보면, 삼별초 스스로가 자신들은 권신의 행동대원으로서만 존재가치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러다 왕정이 복고되자 불안하여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원종은 왜 삼별초를 관군 내지 친위군으로 흡수할 노력을 하지 않았을까? 무신정권을 탈각시키는 과정에서 제법 주도면밀한 모습을 보여줬던 원종이었음을 상기해볼 때 아쉬운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원종이 삼별초를 이끌고 대몽전쟁에 나서지 않았더라도 최소한 반란과 진압과정에서 야기된 고려백성들의 고통은 방지할 수 있었을테니 말이다. 물론 이는 아주 결과론적이 평가일 수 있다. 누가 뭐래도 당시 삼별초는 최정예화된 무력을 보유한 집단이었으므로 원종이 삼별초를 흡수하는 것을 몽고가 내버려뒀을 리 만무한데다가 배신에 배신을 거듭한 삼별초를 원종이 신뢰하기란 애초에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을테다.

삼별초가 강화도, 진도,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겨가며 항쟁을 지속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삼별초의 지도자로 익히 알려진 배중손은 현종의 후손인 승화후 왕온을 왕으로 옹립하고 그때까지 개경으로 돌아가지 못한 신료들로 조정을 구성했는데 이 과정에서 합류를 거부한 신료들이 죽음을 당했다. 대몽항쟁이라는 필사의 신념으로 똘똘 뭉친 집단은 아니었단 말이다. 배중손이 강화도에서 난을 일으킨 것은 1270년 음력 6월이었는데 8월에 진도로 그 근거지를 옮겼다. 그리고 11월에 제주도를 함락했다. 항쟁초기부터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다음의 근거지를 물색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당시 삼별초 토벌의 책임을 진 이는 몽고의 4차 침공 때 위도방어에 성공한 전공이 있는 김방경이었다. 사서의 기록을 살펴보면 그는 원칙론에 입각한 전형적인 무신이자 현실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한 양신(良臣)이었다. 김방경은 진도수복전 초기 홍기 등의 무고로 소환되거나 연합군인 몽고군의 연계작전 미비로 죽을 고비에 이르는 등 어려움에 처했으나 이듬해인 1271년 음력 5월에 드디어 진도 공략에 성공하고 삼별초가 내세웠던 왕, 승화후 왕온을 죽였다.(고려사절요에는 영녕공 왕준의 동모형이 왕온이라 준이 온을 살리려 했으나 홍다구가 진도에 먼저 입성하여 왕온과 그의 아들 왕환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배중손은 전사했으며 김통정이 잔여세력을 이끌고 제주도에 입성하였다.

진도에서 패배하기는 했으나 삼별초의 군세가 크게 꺽인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고려사절요에는 제주로 퇴각할 당시 삼별초인 유존혁이 점거하고 있던 남해현에서 80여 척의 배를 이끌고 김통정을 따라갔다고 적고 있는데 이를 미루어 보아 당시 삼별초는 진도 뿐만 아니라 남, 서해안 주요 섬을 점거하고 상당수의 병력을 배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진도수복전 이듬해인 1272년은 제주에 근거한 삼별초가 남, 서해안을 수시로 침공하여 약탈을 자행한 일이 많았는데 특히 조운선 상당수가 삼별초에 의해 납치되었다. 한마디로 1272년 연간에는 재해권이 온전히 삼별초에게 있었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리라. 고려사는 삼별초의 노략질로 해안지역이 텅 비게 되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제주 삼별초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전은 1273년 음력 4월에 개시되었다. 고려사 김방경 열전에 따르면 김방경, 힌두, 홍다구 등이 이끄는 여몽연합군은 1만여명에 달했는데 풍랑이 심해 전라도 함선 160척만으로 추자도까지 출진하였다고 한다. 각 도에서 전함을 공출했고 전라도 함선만 160척이라고 했으니 원래 전체 함대의 규모는 아주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서는 토벌군이 계속된 풍랑으로 인해 제주도까지 떠밀려 도착했다고 전하고 있으며, 상륙까지 어렵게 되자 김방경이 탄식했다고 한다. 그러나 마침 풍랑이 잦아들었고 함덕포(지금의 제주시 조천면 함덕리)에 상륙한 토벌군은 김방경, 고세화, 나유 등의 활약으로 삼별초 진압에 성공하였다. 김통정은 잔당 70여명을 이끌고 산 속으로 은신했지만 곧 자결로써 생을 마감하였다. 이렇게 하여 삼별초의 난은 마무리되었다. 삼별초의 난 이후 몽고는 제주에 탐라국초토사를 두었는데 충렬왕 때 탐라총관부로 개편되었다. 몽고의 간섭기 때 몽고가 직접 통치했던 3곳의 총관부, 즉, 쌍성총관부, 동녕부, 탐라총관부가 실질적으로 원종 때 완성된 셈이다.

토벌에 큰 공을 세운 김방경은 고려의 시중 자리에 올랐으며 음력 7월에 몽고에 입조하여 쿠빌라이로부터도 큰 상을 받았다. 한편 현재에 이르러 다양한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잔존한 삼별초가 오키나와로 갔다거나 일본 규슈로 진출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나름 합리적 근거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필자 생각으로는 정치사적으로 큰 의미는 없어 보인다. 제주도까지 가는 것도 풍랑 때문에 떠밀려 가는 판국에 오키나와까지 도착했다는 사실 자체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일인지 모르겠으나 제주도를 끝으로 대몽항쟁이라는 명분을 상실했으니 정치사적으로는 오키나와 등에 도착한 삼별초들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 따져보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일본원정준비와 부마국

삼별초의 난이 제압된 이듬해인 1274년부터는 일본 원정을 목표로 한 몽고의 본격적인 고려 수탈이 시작되었다. 이에 앞서 쿠빌라이는 1271년에 수도를 대도(북경)로 옮기고 나라 이름은 대원이라 하였으므로 여기서도 이후부터는 몽고를 원이라 지칭하겠다. 당시의 국제정세를 잠시 살펴보면, 원은 1273년 1월에 5년동안 끈질기게 저항하던 남송의 양양성을 드디어 점령했다. 역사적으로도 매우 유명한 양양 공방전이 바로 이것인데, 그로부터 3년 뒤인 1276년 정월에 남송의 수도 임안이 점령되었다. 다시말해 1274년은 남송이 멸망하기 직전의 시기라 보면 된다. 원은 남송 다음의 점령지로 일본을 노리고 있었고 원정을 위한 모든 준비와 부담을 고려에 지우려 했던 것이다. 원은 고려에게 전함 3백척의 건조를 명령하고 감독조선관 및 군민총관으로 홍다구 임명했다. 앞서 고종편에서 언급한 적도 있지만 매국노 홍복원의 아들인 홍다구는 그 아비보다 더 악질이어서 오랜 전쟁으로 신음 중인 고려의 사정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고려를 수탈했다. ㅡㅡ 고려사는 홍다구가 마치 번개나 우레처럼 기한을 재촉해 백성들이 크게 고통을 겪었다고 적고 있으니 그의 만행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또한 원은 양양 공방전 이후 군을 새로이 편성하면서 그들의 처로 삼을 여자들을 고려에서 조달하려 했다. ㅡㅡ;;; 원은 초욱이란 자를 고려에 파견해 남편 없는 부녀자 140명을 요구했는데 초욱 역시 그 독촉이 심했다. 고려조정은 결혼도감이란 관청을 설치해 민간의 독녀, 역적의 처, 파계승의 딸을 찾아 겨우 그 수를 채웠는데 이로 인해 백성들의 원성이 크게 일었다. 고려사 기록에는 통곡소리가 하늘을 진동하고 보는 사람마다 슬피 흐느꼈다 하는데, 기록을 읽는 후세들에게 마져 그 슬픔이 가슴에 밀려온다. 고려의 공녀송출은 이후로도 약 80년 동안 지속되었다.

1274년 음력 5월에 태자 심(충렬왕)이 제국대장공주와 결혼하였다. 제국대장공주는 고려사 기록에는 쿠빌라이의 막내딸로 기록되어 있는데 원사의 기록이 불분명하여 쿠빌라이의 정식황후의 딸이냐 아니냐를 두고는 논란이 있다. 고려사 기록을 기준으로 할 때 충렬왕의 혼인 이야기는, 원종이 임연에 의해 폐위되었다가 복위한 후 원에 입조하면서 원의 도당에 올린 글에서 처음 등장한다.(1270년) 그러나 한해 전 기록인 원종 10년(1269년) 음력 11월 기사에 원의 사신 흑적이 임연에게 이르기를 "지금 왕태자께서 이미 황제의 따님과 약혼하셨으니~"라는 말이 있어 그 이전부터 사실상 혼인 이야기는 오고 간 것으로 보인다. 일설에 의하면 원종이 태자시절 쿠빌라이를 처음 만났을 때 이미 혼인 이야기가 있었다고 말하나 필자는 사료에서 해당사실을 찾지 못했다. 아무튼 원종은 1270년 이후 틈날 때마다 태자 심의 혼인을 요청했고 1274년 음력 5월에 드디어 원에서 태자 심과 제국대장공주의 혼인이 성사되었다. 고려의 입장에서야 부마국이 되는 것은 정치적으로 상당한 입지를 확보하는 것이라 일부의 반대가 있다고 하더라도 전략적으로 추진될 수 있는 일이겠으나 원의 입장에서는 왜 하필 고려를 부마국으로 선택했는지에 대해서 의문이 남는 것이 사실이다. 고려가 그만큼 당시 국제정치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을까? 한가지 추정해볼 수 있는 것은 당시는 원의 남송 점령이 눈앞에 이른 시기였는데 남송의 저항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아 최종 승리가 연단위로 딜레이 되고 있는 시점이었으므로 고려가 송과 연합하여 다시 대몽항쟁을 시작할 경우 원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골치아픈 상황에 놓이게 되는지라 부마국의 지위를 통해 고려를 더욱 묶어두려는 방책이 아니었을까 하는 점이다. 실제 쿠빌라이는 송의 선박이 고려에 정박한 일을 두고 원종을 여러해에 걸쳐 제대로 보고하지 아니하였다는 이유로 갈궜다. ㅡㅡ;;; 또한 혼인 이후의 역사지만 남송이 수도 임안을 뺏긴 이후에도 1279년 3월 애산전투까지 함선을 타고 저항을 계속 하였기 때문에 원의 우려도 전혀 근거없지는 않았다. 아무튼 태자 심의 혼인으로 고려는 공식적으로 원의 부마국이 되었다. 그러나 부마국이라 해서 고려백성의 부담이 줄어드는 건 아니어서 여전히 원의 수탈에 신음해야 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앞서 언급한 일본원정준비와 공녀차출이었다...

나오며

1274년 음력 5월에 일본원정을 위한 원의 정동군 1만5천이 고려에 진주했다. 6월에는 크고작은 선백 9백척이 준비되었음을 알리는 표문이 원에 상주되었다. 그런데 이때 원종이 병이 들어 사망했다. 보통 왕이 병이 들면 몇 달에 걸쳐 투병기간의 기록이 사서에 남기 마련인데 원종은 병이 들어 사면령을 반포했다는 기사가 나온 후 얼마지나지 않아 사망기사가 나온다. 아마도 급작스런 병사였던 것 같다.

원종은 100여년간 지속되어온 무신정권의 끝을 본 임금으로 앞서 언급했지만 무신정권의 몰락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이전의 왕들과 분명 차이가 있는 군주였다. 그러나 무신정권을 무너뜨임에 있어 원의 힘을 빌렸기에 그 한계 역시 분명했으며 여몽전쟁이 끝났음에도 원의 수탈로부터 고려백성을 구제해내지 못했다. 물론 여기에는 당시 원의 기세가 최고조에 달했던 국제정세의 영향을 고려해야만 한다.

원종은 고려가 자체적으로 묘호를 올린 최후의 임금이며 이후 충렬왕부터는 원의 제후국으로서 독자적인 묘호를 사용하지 못했다. 다음부터는 충자 돌림 고려 왕들의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