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 (땅과 소통하기)

어린왕자 2009. 9. 14. 15:42

  당당한 할머니


8. 31.(월)

오전에 동네 물탱크를 청소했다. 지하수를 끌어올려 저장했다가 각 가정으로 나누어 보내는 탱크였다. 설치하고 3~4년간 청소를 하지 않아, 탱크벽에 물이끼나 잔흙이 잔뜩 붙어 있었다. 변산공동체는 이 물탱크를 쓰지 않으나, 이장님 말로는 마을회의 때 김희정 대표가 자진해서 청소를 하겠다고 나섰다고 한다. 젊은 사람들 아니면 청소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고려한 것일 게다. 청소를 다 마치는데 오후 1시까지 4시간 이상이 걸렸다.


오후에는 보리출판사에서 온 여직원들 4명과 함께 개울가로 가 여학생 기숙사 짓는데 쓸 돌을 줍고, 돌아오는 길에 수수를 베었다. 보리출판사 직원들은 입사를 하게 되면, 의무적으로 변산공동체에 와서 일주일간 일을 해야 한다고 했다.


9. 1.(화)

오전에 동부, 녹두를 따고, 땅콩과 수수가 같이 심어져 있는 밭 이랑의 풀을 베었다. 오후에도 계속 땅콩․수수밭 풀베기를 하였는데, 보리출판사 직원 한 명의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일을 해본 적이 없다고 하는데 나중에는 나를 추월할 정도였다. 풀 속에서 계속 달려드는 모기가 여간 성가시지 않았다. 햇볕도 뜨거웠다. 이런 땐 막걸리 한 잔이 그만이다.


그늘에 모여 참으로 떡과 막걸리, 맥주를 들었다. 우리가 일하던 곳 바로 옆에서는 허리가 굽은 할머니 한 분이 400평은 족히 되는 밭이 거름을 펴고 있었다. 삽으로 퍼 먼 곳까지 날라 폈다. 전날에도 그 일을 하셨다. 전날에 언제 그것을 다 하시나 싶었는데, 오늘 보니 어느새 거의 다 하셨다.


맥주 한 잔 하시라며 할머니를 불렀다. 잠시 후에 할머니가 오셨다. 손에는 방금 캐낸 더덕이 잔뜩 들려 있었다. 할머니가 거름을 펴던 밭 바로 옆이 더덕밭이었다. 그냥 와서 맥주를 마시기가 미안해서였을까, 맥주 한 잔에 비해 더덕이 너무 많았다. 할머니는 한 잔 마시더니 굉장히 시원해 하셨다. 가만히 보니, 할머니가 귀고리를 하셨다. 내가 연세를 여쭤보았다. 할머니 자세히 말씀은 안하시고 웃으시면서 “아직 일할 만큼 나이 먹었어.”라고 하신다. 그러고는 한참동안 할머니가 지으신 더덕자랑을 하셨다. 내가 보기에는 일흔이 훌쩍 넘은 나이신데, 그 연세에도 자신의 노동으로 당당하게 살아가시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다. 멀리서 허리가 굽은 채 삽으로 거름을 펴는 것을 보고는 불쌍하게만 생각되었는데, 가까이서 할머니의 당당한 모습을 보니, 괜시리 내가 위축되었다.


어찌 되었든, 그늘 아래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참으로 술 한 잔 하는 기분이 너무 좋았다. 바로 그것이 사람사는 세상이라고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