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예수

재휘애비.溢空 2014. 4. 2. 16:50

<맺는말>

2천 500여 년 전 그리고 2천 년 전에, 동양의 강대국이었던 중국과 약소국 이스라엘에서 나타난 걸출한 두 인물, 공자와 예수는 동양과 서양 역사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오면서 아직도 인류 문명사에 강력한 정신적 깨침을 주고 있다. 칼 야스퍼스도 지적한 것처럼 인류 역사의 무대에 지금까지 수많은 성현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지만 공자와 예수, 석가와 소크라테스만큼 위대한 영향을 미친 성인도 드물 것이다. 무하마드가 이슬람을 창시하여 새로운 문명의 한 축을 이어가고 있지만 각각의 독특한 정신적 가르침을 생각하면, 무하마드는 예수처럼 동일한 하나님을 믿었다는 점에서 사상사적으로 볼 때 크게 다를 바 없다.

황하문명을 축으로 발전한 중국이라는 거대한 국가의 한자문화에는 글자 하나하나에 깊은 뜻이 담겨 있는 만큼, 그 고전적 가르침도 깊어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시경>, <서경>, <역경>등에서 이미 인간의 도리와 처세방법이 잘 나타나 있고, 이러한 정신적 유산을 바탕으로 공자는 당대의 정치 문화적 혼란상을 극복하고 주대(周代)의 문화와 예절을 되살려 천명(天命)을 중시하는 덕치주의(德治主義)를 실현하고자 했다. 예수 또한 오리엔트 문명권의 한 변방국가인 척박한 사막의 땅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로마의 정치적 지배와 종교지도자의 부정부패에 이중적으로 시달리는 민중들을 항하여 "하나님"이라는 절대신관(神觀)에 입각하여 진리와 사랑을 바탕으로 해방의 복음을 외쳤다.

공자가 천명에 따른 덕치주의를 추구했다면 예수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정의와 평화의 나라가 실현되기를 바랐다. 이들 모두 '하늘의 뜻(天意)'을 바탕으로 한 이상적 국가 공동체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공자는 50세에 천명을 깨달았고 예수는 30세에 '하늘의 뜻'을 깨달았다. 공자는 춘추말기의 혼란한 시대에 제자들과 함께 열국을 주유하면서 자기의 이상과 사명을 실현하고자 유랑하며 유세하였고, 예수는 갈릴리를 중심으로 유대와 사마리아 일대 등지에서 제자들과 더불어 민중들에게 천국복음을 전했다. 이들의 가르침에 대한 반응은 각기 다양했다. 공자는 주로 지도자들을 향하여 인(仁), 의(義), 예(禮), 지(知), 신(信), 공(恭), 서(恕), 정(政) 등을 외쳤고, 그러한 정신적 자세로 백성을 지도하길 원했다. 지도자가 바로서야 백성이 스스로 따라 온다는 것이다. 반면에 예수는 제자와 추종하는 민중들을 대상으로 아가페 사랑과 용서, 치유, 기도, 믿음 등을 가르쳤다. 특히 마음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다는 등, 복 있는 사람에 대한 정의와 함께 원수사랑 등을 가르치는 산상수훈을 통해 드러나는 주옥같은 가르침은 지금도 인류사에 길이 남는 교훈이 아닐 수 없다. 공자 자신이 따뜻함(溫), 어짐(良), 검소함(儉), 공손함(恭), 겸양(讓)의 인품을 지니고, 군자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상세히 가르쳤던 것처럼 예수도 '온유와 겸손'의 태도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섬김의 모범을 보이면서 제자의 도리를 가르쳤다.

본서는 이러한 공자와 예수의 인격과 각자의 사명의식에 따른 사상적 실천을 <논어>와<복음서>를 중심으로 고찰해보았다. 공자는 군자(君子)를 이상으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성도(聖徒)의 도리를 중심으로, 각각 그들의 이상적 삶의 모범을 제시하고 가르쳤다. 공자가<논어>에서 제시한 군자의 이상을 예수가 팔복이나 산상수훈을 통해 제시했던 '성도'의 자세와 모습에 비교해 보았던 것이다. 한편으로 공자의 모든 사상적 근원은 하늘의 도(道)에 있었다. 그 도를 그리스도교적 입장에서 비교해 보면 로고스에 해당한다. 공자에게서 도는 인간의 품성에 천부적으로 내재하는 것으로서, 구체적인 모습이 인, 의, 예, 지, 신 등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모습을 예수의 아가페, 진리, 믿음, 등의 사상과 비교 고찰해 보았던 것이다.

공자의 도는 덕으로 구현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고, 그 덕을 닦음으로써(修己), 점차 이웃을 편안하게 하는(修己安人), 그리고 결국에는 백성을 모두 편안하게 하는(修己安百姓)에 이르는 정치적 지도력에까지 덕이 미칠 것을 희망했다. 필자는 공자가 말하는 온갖 다양한 덕목을 비움(虛-修德), 나눔(施-進德), 사귐(交-成德)이라는 3가지 차원에서 요약 정리해 보았다. 공자의 비움은 비어있는 것 같지만 알짬이 있는 '실약허(實若虛)'라는 말에서, 나눔은 널리 베풀고 대중을 구제하는 '박시제중(博施濟衆)'이라는 말에서 드러나고, 사귐은 "공경하면서도 잘못함이 없고, 공손하면서 예의를 갖추면 사해 모든 사람이 형제(敬而無失, 恭而有禮, 四海兄弟)"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두루 널리 사랑하되 편당을 짓지 않고(周而不比), 공경과 예를 갖추고 믿음으로써 서로 사귐을 이루기를 원했다.

예수에게서 비움(케노우, kenou)은 그의 탄생에서부터 분명해진다. 나눔(디아코니아, diakonia)는 오병이어에서, 사귐(코이노니아, konia)은 서로-사귐이라는 형제애로써의 하나님 나라의 가족공동체를 이루고자 했다. 유가의 사상체계가 천(天), 지(地), 인(人)에서 드러나듯이 예수의 사상 또한 하늘, 땅, 사람의 차원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천은 인간에게 모든 덕을 부여하는 근원이자 인간이 그 모든 행실을 검증 받아야 하는 거울이기도 하다. 공자와 예수모두 그래서 하늘의 뜻(天意)과 천명을 중시했고, 그들은 각각의 소명의식과 자신의 사명을 완수 할 수 있었다. 땅은 하늘의 뜻이 실현되는 장소였다. 공자는 가장 이상적 국가형태를 요, 순 시대와 주나라의 문물로 생각하고 그 시대의 문화를 회복하기 위해 힘썼다.

예수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비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랑과 용서 자유와 평화의 복음을 선포하였다. 악제와 불의를 향하는 자들에게는 회개와 경고의 메시지를 선포했고, 눌린 자와 소외된 자를 향해서는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했다. 공자와 예수는 모두 하늘, 땅, 사람 앞에 거리낌 없는 대자유인으로서의 멋진 풍류객(風流客)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 풍류의 모습은 진(眞), 선(善), 미(美)의 형태로 나타났다. 진리의 입각해서는 그 어떤 것에도 양보가 없이 당당했으며, 선을 행함에 있어서는 자신의 목숨도 아끼지 않고 베푸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더 없는 풍류의 모습은 역시 탁월한 미학(美學)적 감수성에 있었다. 공자가 일찍이 <시경>에 대한 공부를 통해 시학(詩學)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면서 제자들에게 훈육하고 가르친 것처럼 예수 또한 시적 상상력을 가지고 "나는 새와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면서 하늘 아버지의 도우심을 믿으라는 것에서나, 천국의 비유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비유는 가히 뛰어난 시인이 아니고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감수성을 지녔다고 아니 할 수 없다.

공자와 예수는 모두 시적 감수성뿐만 아니라 방랑객의 기질도 유사했다. 그들의 전도(傳道) 유세(遊說)가 그렇고, 영접하는 곳에서는 머물며 가르침을 베풀었지만 영접하지 않는 곳에서는 먼지까지도 털고 나왔다. 그들의 유랑여행은 물론 가난한 길이었다. 하늘을 이불삼고 "대나무 한 그릇의 밥과 표주박의 물 한 그릇에 끼니를 때우고, 팔베개를 하고 자도 군자가 가는 곳에 어찌 누추함이 있겠는가"하는 공자의 정신이 그렇고, "여행을 위해 두벌 옷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는 예수의 교훈도 그렇다. 시와 음악으로 풍류를 읊어도 도에 지나치거나 어긋남이 없이 절도(節度)에 맞는 중도적 삼을 취했고, 하늘을 공경하며 인간을 존중하는 예절을 지켰으니 "시로 흥기하고, 예에서 일어서며, 풍류에서 인생을 완성한다(興於詩, 立於禮, 成於樂)"는 예술적 삶을 살았던 것이다. 더 나아가 "뜻을 도에 두고, 덕에 거하며, 인에 의지하여, 예술에서 노닌다(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遊於藝)"는 도와 예술의 실천적 풍류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공자와 예수의 궁극적 이상은 사해형제와 하나님나라의 가족이었다. 그러기에 이들이 그 뜻을 실현하기위해 짊어진 사명은 막중하고 무거웠다. 선비(士)가 가는 뜻과 길은 넓고도 굳세며(弘毅), 그 임무가 막중하여 길이 멀다(任重而道遠). 사도바울이 말했던 것처럼 그들은 "푯대를 향하여" 달려갔던 사람들이었다. 공자와 예수 모두 그들의 제자들을 통하여 자신들이 못다 이룬 과업을 이루기를 바라면서 배움과 가르침을 즐겨하며 선한 도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수사선도(守死善道)'의 정신으로 살신성인(殺身成仁)의 길을 갔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다. 하늘이 부여한 바탕(性), 곧 영성(靈性)은 근본 하나이지만 시대와 역사와 문화적 풍토가 달라 각기 그 전수받은 내용과 풍습이 다르니, 공자가 말한 '바탕은 서로 가까운데, 습관이 서로 멀다(性相近, 習相遠)'는 것을 생각해보게 한다. 공자와 예수모두 하늘에서 부여받은(天命) 성(性) 곧, 영성을 바탕으로 그 성을 따라(率性) 삶을 살았다는 점에서 이들은 또 한 번 만나게 된다.

이제 이들의 영성을 바탕으로 동양과 서양의 각기 새로운 문화와 영성이 꽃피었으니 우리는 하나의 씨알-영성에서 동양과 서양의 꽃을 보게 되는 셈이다. 이제 지구는 하나의 간격으로 좁혀졌다. 바다와 육지가 한 지붕아래 펼쳐져 있다. 동양에서 피어난 공자의 꽃과 서양에서 피어난 예수의 영성의 꽃을 보면서 나비가 된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어떤 꽃을 과연 새롭게 피어야 할까? 상생 공존하는 사랑과 평화의 꽃동산을 이루어 보면 어떨까?

 
 
 

공자&예수

재휘애비.溢空 2014. 4. 2. 16:49

(3) 공자와 예수의 풍류(樂)정신

공자와 예수가 풍류객(風流客)이었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보기에 따라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과연 풍류객이 아니었다고 어떻게 부정 할 수 있을까? 공자가 시(詩)와 음악을 즐겼고 예수 또한 시인(詩人)으로서 선사(禪師) 못지않았다. <논어>에 의하면 공자는 구구절절이 예와 악을 말했고 시와 음악을 즐겼다. 예수는 <복음서> 곳곳에서 선문답(禪問答) 같은 대화를 나누면서 세속적인 집착과 욕망에서 초연 할 것을 말했다. 공자도 한 때는 제도적 정치권에서 정치를 행사하기도 했지만 나라가 도(道)를 버리고 혼탁해 질 때는 정사를 떠나 열국을 주유하면서 13년간의 유랑생활을 하기도 했다. 예수는 비록 30세라는 젊은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광야와 사막에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며 '하늘의 뜻'을 깨닫고는 그 길로 갈릴리 주변 농촌을 떠돌며 민중을 교화하기 시작했다.

일찍이 <시경>과 <서경>등의 고전을 두루 섭렵한 공자는 시(詩) 300수를 한 마디로 요약하여, '사무사(思無邪)'라고 이르면서, 인간 행동의 출발점을 삿됨이 없는 '순수함'에서 찾았던 것이다. 예수 또한 천국입성의 가장 기본적인 자질로 어린아이 같은 '동심(童心)'을 강조했다. 순수와 동심의 세계는 낭만적 풍류객들이 지니는 공통적 특징이다. 그런 점에서 공자와 예수는 낭만주의자였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공자가 주나라의 찬란한 문화와 예악(禮樂)을 찬탄하고 기렸던 것처럼, 예수 또한 도래할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낭만적 세계를 그의 시적 은유 속에서 이미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는 이미 자연 속에서, "들에 핀 백합화와 공중에 나는 새"를 하나님이 기르시는 것을 보고 내일을 걱정하지 말고 두려움 없는 오늘의 즐거운 하루를 살라고 권하고 있다(마태6:26-28). 합리주의적 이성(理性)은 분명히 내일을 위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염려해야 하지만 예수는, "내일 일은 내일 염려 할 것이요, 한 낱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다(마태6:34)."고 말한다.

이는 "하늘의 덕이 내게 있으니, 환퇴라는 사람이 나를 어찌 해치겠는가?"라고 했던 공자의 배짱이나, 빌라도의 법정에서 "진리가 내게 있으니", 무엇을 두려워 하리요? 하며 떳떳이 서 있는 예수의 자태에서도 진리 앞에 비굴해지지 않는 멋지고 당당한 풍류객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신라시대의 화랑도들이 풍류를 즐기면서도 조국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것처럼, 풍류객이라 해서 도피적이고 연약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위험이나 속박 앞에서 더욱 '자유로울 수 있는' 정신이야 말로 풍류 정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자나 예수는 시대적 제약을 뛰어 넘어 그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비판적인 이상적 자유정신을 사회 속에 혹은 공동체 속에 불어 넣고자 했다.

미혼 청년으로서의 예수는 결혼과 가정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에 있었지만, 당시의 유대 풍토와 정치 사회적 배경은 예수가 그렇게 자유롭게 활동 할 수 있을만한 여유롭고 낭만적인 분위기는 결코 아니었다. 이는 공자의 시대상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이들 두 정치-종교적 사상가들은 어떻게 낭만적 분위기 속에서 시대를 개척하고 이끌어 가고자 했는지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이들이 각기 주장했던 그 호탕한 낭만적 풍류정신을 <논어>와 <복음서> 속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공자는 인생을 풍류(樂)에서 완성하고자 했다. 이것은 그가 "시(詩)에서 흥기하고, 예(禮)에서 일어서며, 풍류(樂)에서 완성된다(興於詩, 立於禮, 成於樂. 태백/8)."고 했던 짧은 말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서 '성어악(成於樂)'이라고 했을 때, '악(樂)'은 일차적으로 음악을 말 할 수 있으나, 음악 속에는 이미 시(詩)가 내포 되어 있고, 그 속에 감미롭고 멋있는 조화가 깃들어 있으니, 풍류로 해석해도 틀리지 않는다. 공자에게서 예악(禮樂)의 정신은 나라를 형성하는 기초가 됨과 동시에 완성의 경지다. 공자는 예악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예절(禮節)이다, 예절이다 말하지만 어디 옥(玉)과 비단(帛)만을 말하겠는가? 음악이다, 음악이다, 말하지만 어디 종(鐘)과 북(鼓)만을 말하는 것이겠는가(禮云禮云, 玉帛云乎哉, 樂云樂云, 鐘鼓云乎哉. 양화/11)?"

이 말의 뜻은 예절에는 옥(玉)과 비단이 필요하지만 다만 그것은 형식에 불과한 것이요, 내면에 공경하는 바가 있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고, 음악에는 종(鐘)과 북이 필요하지만 그것 자체보다는 소리의 조화를 중시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공자가 말하는 예악은 '공경'과 '조화로움'이라고 요약하여 말 할 수 있다. 예가 없으면, 나라가 서지 못하고 조화로운 음악과 풍류가 없으면 그 나라의 문화가 뒤떨어진 것으로 예술적 인생과 국가의 완성작이 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공자의 풍류정신은 <논어> 곳곳에서 드러나지만 우선 첫 편에서 학문하는 기쁨과 벗과의 만남에서도 드러난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학이/1)?" 배우는 기쁨도 좋지만 벗과의 사귐은 큰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공자에게서는 배움을 통한 앎(知)이 참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단순히 알고 있다는 '지식(知識)' 그것보다는 지식이나 도리를 좋아하는 것(好)만 못하고, 그것을 좋아하는 것보다는 즐거워하는 것(樂)이 더 낫다(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옹야/18)는 것이 공자의 지론이다. 인식도 중요하지만 인식을 넘어선 가치 있는 존재의 차원에 더욱 중요성을 두고 있다. 인식이 시작이라면 존재는 완성인 셈이다. 그러기에 인생은 무엇보다 즐거움이 있어야 할 것이다. 즐거움 없는 인생을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다. 즐거움은 꼭 부유한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공자는 "가난하지만 즐거워하며 사는 자(貧而樂.)"를 "가난하지만 아첨하지 않는 자(貧而無諂)" 보다 더 훌륭하다고 생각했다(학이/15).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잘 표현해 주고 있는 다음과 같은 공자의 고백 한 단면을 들어보자.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며 팔을 베개 삼아 누워도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다. 의롭지 않은 부귀는 나에게 뜬 구름과 같다(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 술이/15)."

참으로 풍류도의 모범을 잘 보여주고 있다. 가난해도 불의한 재물을 탐하지 않고, 거친 밥반찬으로도 즐거워 할 줄 아는 자는 과연 얼마나 될까? 공자는 그의 제자 안회도 "한 대나무 그릇의 밥을 먹고 표주박으로 물을 마시며, 누추한 거리에 살면서, 사람들이 견디기 어려워하는 그 근심 중에도 즐거워하는 일을 그치지 않았다(回也不改其樂. 옹야/9)."고 칭찬한다. 고난 중에도 즐거워 할 수 있는 자가 진정한 풍류인일 것이다. 그런 사람을 두고 우리는 "풍류로 근심을 잊는 사람(樂以忘憂. 술이/18)"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즐거워하는 일에도 종류가 있다. 무엇을 즐기며 살라는 말인가? 즐기는데도 유익한 것이 있고 해로운 것이 있다고 공자는 충고한다. 그 이롭고 해로움이 어디 한두 가지 이겠는가마는 공자는 각각 세 가지의 이로움과 해로움을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즐거워하는 데는 유익한 것이 세 가지가 있고, 즐거워하는데 해로운 것이 세 가지가 있다. 예악(禮樂)의 절도를 따르기를 즐거워하고, 다른 사람의 선한 것을 말하기 즐거워하며, 현명한 벗을 많이 사귀는 것을 즐거워하면 유익하다. 교만하게 즐기기를 좋아하고, 편히 놀고먹는 것을 즐기며, 향락에 빠지는 것을 즐겨하면 손해가 된다(益者三樂, 損者三樂, 樂節禮樂, 樂道人之善, 樂多賢友 益矣. 樂驕樂, 樂佚遊, 樂宴樂, 損矣. 계씨/5)."

세 가지 유익한 즐거움을 요약해 보면 예악(禮樂)의 정신, 이웃의 선함에 대한 칭찬, 현명한 벗과의 사귐이다. 그러한 즐거움 대신에 교만, 방탕, 향락에 빠지는 즐거움은 결국 해가 된다는 것이다. 우선 예악의 즐거움이 유익하다 했는데, 공자는 제(齊)나라에 갔을 때, 순임금 때부터 전해 오던 음악인 소(韶)를 듣고 석 달 동안이나 고기 맛을 잊을 정도로 음악에 심취한 적이 있다. 그리하여 공자는 "음악이 이런 경지에 이를 줄은 미처 몰랐다(不圖爲樂之至於斯也. 술이/13)."고 고백한다. 그리하여 공자는 순임금의 음악인 이 소(韶)의 소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지극히 아름답고, 지극히 선하다(盡美矣, 又盡善也)." 그야말로 음악의 진선미(眞善美)를 극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소리가 아름답다고 할 때의 '미(美)'를 주자(朱子)는 "풍류의 소리와 모양이 성대한 모습"이라고 해석한다. 그런데 이 순임금의 소(韶)에 비하여, 무왕(武王)의 음악인 "무(武)는 지극히 아름답지만 지극히 선하지는 못하다(謂武, 盡美矣, 未盡善也. 팔일/25)."고 평한다.

공자가 이들 음악을 평가 할 수 있는 것은 공자가 그만큼 음악과 풍류에 깊은 조예가 있음을 말해준다. 공자가 여러 나라를 주유하면서 그의 사상을 펼치고자 했으나 여의치 못하여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 온 뒤에 본격적으로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면서 유가(儒家)의 경전들을 정리 편찬하였고, 노나라의 음악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평한다. "위(衛)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 온 뒤에야, 음악이 바르게 되어 아(雅)와 송(頌)이 각각 제 자리를 찾았다(吾自衛反魯然後, 樂正, 雅頌, 各得其所. 자한/14)." 아(雅)는 <시경>의 '소아(小雅)'와 '대아(大雅)'를 가리키고, 송(頌)은 주송(周頌), 노송(魯頌), 상송(商頌) 등의 노래로서 모두 명곡에 해당하는 시들이다. 한번은 공자가 노나라의 음악을 관장하는 악관(樂官)인 태사(大師)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음악은 배울만한 것이다. 처음 시작 할 때에는 여러 소리가 화합을 이루는 듯하고, 이어서 소리가 풀리면서 조화를 이루며, 소리가 분명해지면서 끊임이 없이 이어져 한 곡이 완성된다(樂其可知, 始作翕如也, 從之純如也, 교如也, 繹如也, 以成. 팔일/23)."

공자가 음악의 아름다움과 조화를 말한 것이지만, 이는 인생의 멋과 조화를 풍미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야말로 이러한 예술적 정신은 공자가 늘 강조하는 모든 사상을 핵심으로 갈파한 다음의 말에서 잘 드러난다. "도(道)에 뜻을 두고, 덕(德)에 거하며, 인(仁)에 의지하여, 예술(藝)적으로 산다(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游於藝. 술이/6)." 무턱대고 예술적 즐거움에만 빠져 산다는 것이 아니라, 도와 덕 그리고 사랑에 기초하여 살면서 예술적 삶을 만끽한다는 뜻이다. 노니는 것에도 기준이 있다는 주장이다. 공자의 이 같은 풍류정신은 철저히 인(仁)을 바탕으로 한 것이므로 결코 방자한 놀음이 아님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사람이 어질지 못하면 예(禮)가 무슨 소용이며, 사람이 어질지 못하면 음악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人而不仁如禮何, 人而不仁 如樂何. 팔일/3)?"라는 공자의 주장이 이를 뒷받침한다. 사실 "어질지 못한 사람은 즐거움도 오래 누리지 못하는 법(不仁者, 不可以長處樂. 이인/2)."이다.

공자가 말한 세 가지 유익한 즐거움 중에서 두 번째는 다른 사람의 선함을 칭찬해 주는 일이라고 했다. 맹자도 "즐거운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선함을 취하였다(樂取於人以爲善, 孟子/公孫丑 上)."는 유사한 말을 하고 있다. 풍류객은 남의 단점을 보고 비난하기 보다는 남의 장점을 즐겨 말해주는 사람이다. 그리고 세 번째 유익한 즐거움이란 바로 '현명한 벗과의 사귐'이다. 많은 벗이 있지만 얼마나 현명한 사람이 많은지 찾아보기 힘들다. 현명한 사람도 많지 않지만 그 현명한 사람과 사귐을 가지는 일은 더욱 유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풍류객들은 멋진 도반(道伴)이 있다. 공자는 훌륭한 제자들과 도반이 되었고, 예수도 그의 제자들과 도반으로서의 풍류를 누렸다. 공자의 곁에는 덕행에 뛰어난 안연(顔淵), 민자건(閔子騫), 염백우(염伯牛), 중궁(仲弓)과 언어에 재간을 보인 재아(宰我), 자공(子貢)이 있었고, 정사에는 염유(염有)와 자로(子路), 문학에는 자유(子游)와 자하(子夏)가 각기 재능을 보임으로써(선진/2), 공자의 기쁨이 되었다(선진/12). 예수에게도 12제자가 있었지만 그 중에도 특히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가장 가까이에서 예수의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었던 제자요 도반이었다. 예수는 즐겨 자기와 함께 하는 자들을 향하여 '친구'라고 불렀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자고로 풍류객은 진선미(眞善美)를 예찬하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공자와 예수도 물론 그랬다. 그들은 진리를 위해 일생을 걸고 투쟁하며 살았고, 선의 도리를 펼치기 위해 '선인지도(善人之道)'를 늘 강조했다. 공자의 제자 자장(子張)이 '착한 사람의 도'를 물었을 때, 공자는 "성현의 가르침과 행적을 밟지 않고는 역시 높은 경지에 들어 갈 수 없다(不踐跡, 亦不入於室. 선진/19)."고 말했다. 그만큼 공자 스스로 선(善)의 실천을 성현의 자취에서 찾을 만큼 높은 수준의 덕성을 연마하고 실천했던 것이다. 공자는 자신이 늘 걱정했던 것 4가지를 말하는데, 예컨대 "덕(德)을 닦지 못하는 것, 배움을 강구하지 못하는 것, 의를 듣고도 실행하지 못하는 것, 선하지 못한 것을 고치지 못하는 것(德之不修, 學之不講, 聞義不能徙, 不善不能改. 술이/3)"을 말하는 가운데서 '선함'을 고치지 못하는 것을 늘 염려했다. 덕(德)을 수련하고 학문(學)을 연마하며 의(義)를 지키고 선함(善)을 유지하는 것, 이것을 공자는 강조했다는 이야기다.

공자는 착한 사람의 통치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리하여 그는 "선한사람(善人)이 나라를 백 년 동안 다스리면 잔인한 사람을 교화시켜 사형시키는 일을 없앨 수 있다(善人 爲邦百年, 亦可以勝殘去殺矣.)"는 말에 공감을 표하기도 했다(자로/11). 그는 또 "선한 사람이 칠 년 동안 백성을 가르치면 전쟁에 나아가게 할 수도 있다(善人 敎民七年, 亦可以卽戎矣. 자로/29)."라고 말할 정도로 선인(善人)의 통치는 감화력이 크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것은 물론 선한 사람의 감화력은 백성이 목숨을 내어 줄 정도로 크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지, 전쟁을 조장하려는 말이 아님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실로 '선함'은 공자의 중심 사상인 '지(知), 인(仁), 용(勇)을 모두 포괄하고 거기에 예(禮)를 갖춤으로써 얻어지는 최종적인 덕목에 해당한다. 공자는 이 선(善)을 예(禮)와 결부시켜 다음과 같이 논한다. "지혜로 맡은 일을 마치고, 인(仁)으로 그것을 능히 지키며, 장엄한 용기로 백성들에게 임하더라도 예(禮)로써 백성들을 움직이지 않으면 선하지 못한 것이다(知及之, 仁能守之, 莊以리之, 動之不以禮, 未善也. 위령공/32)."

그런가 하면 공자는 미(美)에 대한 풍부한 감성으로 소리(音)와 빛(色)과 언어(詩)에 깊은 조예를 보였다. 이미 앞서 보았듯이 순임금의 음악인 소(韶)에서 '지극히 아름답고, 지극히 선함'을 느꼈거니와, "공자가 평소에 늘 말하는 것은 <시경>과 <서경>과 예(禮)를 실천하는 것(子所雅言, 詩書執禮. 술이/17)."이었다는 점을 보아서도 시(詩) 정신으로 살았던 것을 볼 수 있다. 실제로 공자는 자기의 아들 백어(伯魚)에게도 "시(詩)를 공부했느냐(學詩)?"고 묻고, 아직 배우지 못했다고 하자, "시를 공부하지 않으면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다(不學詩 無以言. 계씨/13)."라고 충고한다. 또 아들 백어에게 한번은 더욱 구체적으로 <시경>에 나오는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을 배웠느냐고 묻고, "그것을 모르면 담장만 정면으로 쳐다볼 뿐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서있는 것과 같다(人而不爲周南召南, 其猶正牆面而立也與. 양화/10)."고 했다. 공자는 언어의 미학(美學)을 중시했던 까닭이다. 공자는 제자들을 향하여서도 "너희들은 어찌하여 시를 배우지 않느냐?"라고 하면서, 시 공부의 유익함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시는 감흥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사물을 잘 관찰 할 수 있으며,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고, 이치에 어긋나지 않게 원망할 수 있으며, 가까이는 어버이를 섬기고, 멀리는 임금을 섬기며, 새와 짐승과 나무와 풀의 이름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된다(詩 可以興, 可以觀, 可以群, 可以怨, 邇之事父, 遠之事君, 多識於鳥獸草木之名. 양화/9)."

이것은 한 마디로 공자의 시학(詩學)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시학>에서 시인과 역사가를 비교하며, 역사가는 지난 과거의 특정 사실에 중점을 둔다면 시인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포함하는 인간의 보편성에 초점을 둔다고 했던 것과 같이, 공자의 시학 또한 인간의 제반 사항에 대한 보편적 문제에까지 통찰하는 지혜를 제공해 주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공자에게서 시는 단지 시적 감흥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혜안과, 인간들 사이 혹은 자연과의 구체적인 사귐의 문제까지도 도움을 주는 유익함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공자는 또한 '이인위미(里仁爲美. 이인/1)'라 하여 어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 또한 아름다운 공동체임을 노래한다. 어진 사람들만이 풍류를 함께 오래도록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이인/2). 미(美)는 덕(德)이 뒷받침 될 때 빛을 발한다. 공자가 아름다움을 칭송하기는 했지만 덕(德)이 따르지 않는 아름다움은 볼품이 없다고 말한다. "만일 주공과 같이 아름다운 재능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교만하고 인색하다면 그 나머지는 볼 것이 없다(如有周公之才之美, 使驕且吝, 其餘不足觀也已. 태백/11)." 그리고 아름다움은 단점보다는 장점을 계발하는 데서 더 아름다워진다. 군자는 실로 "아름다움을 남의 이끌어 주되, 남의 나쁜 점을 이루어 주지 않는다(君子 成人之美, 不成人之惡. 안연/16)."는 공자의 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풍류(樂)에는 절도가 필요한 법이다. 공자는 <시경>의 [주남(周南)]에 첫 번째 나오는 시편인 '관저(關雎)'의 말을 인용하면서, "즐거우면서도 지나치지 않고, 슬퍼도 마음을 상하게 하지는 않는다(樂而不淫, 哀而不傷. 팔일/20)."고 말한다. 즐거움과 슬픔도 몸이 상할 정도로 정도에 지나치지 않고 적절한 중도(中道)가 필요한 법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른바 무엇에나 '중정화평(中正和平)'하는 정신이 풍류의 기상이 될 것이다. 그러기에 공자가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했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知者樂水, 仁者樂山. 옹야/21)"고 했던 것도 물에게서 그 흐름을 보고 지혜를 얻으며, 산을 통해 그 고요함을 보고 지혜롭고 어진 자들이 풍류의 멋과 기상을 키웠던 것을 알 수 있다. 동(動)과 정(靜)에서 동정을 살피고 지혜롭고 자비롭게 인생을 대처하는 능력이야 말로 풍류객의 기질이 아닐까?

이제 우리는 예수의 풍류정신을 살펴볼 차례다. 예수는 풍부한 감성과 탁월한 시적 상상력을 지니고 있었다. 슐라이엘마허(Schleiermacher)라는 독일의 낭만주의적 경향의 신학자가 '종교'를 '절대 의존 감정'이라는 말로 표현 했듯이, 예수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절대 의존 감정에 있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예수가 하늘의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의존 감정이 없었다면, 그는 그렇게 가난하고 척박한 상황 속에서 자신을 죽음으로 내 몰면서까지 과단성 있게 '천국 복음'을 외치며 유랑의 삶을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절대 의존 감정'이라고 말 할 때, 우리는 세 가지 단어에 주목해야 한다. '절대'라는 말과 '의존'이라는 말, 그리고 '감정'이라는 말이다. 신앙의 세계는 절대의 세계다. 예수가 진정한 풍류객일 수 있었던 것도, 공자가 철저하게 '하늘의 도'와 '천명(天命)'을 믿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존재와 세계를 절대적으로 믿었던 데서 가능했다. 그리고 예수는 그러한 절대적 신뢰관계 속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는 순간까지 '진리'되신 하나님을 '의존'했다. 뿐만 아니라, 예수의 정신세계는 합리적 이성 보다는 어쩌면 초이성적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인간-사랑이라는 휴머니즘에 입각하여 사랑을 실천한 감성의 사람이었음을 부인 할 수 없다.

예수는 하나님을 믿는 절대적 신뢰 속에서 풍부한 상상력을 지닌 소유자였다. 그가 말하는 여러 가지 비유들은 모두 상상력의 소산이다. 마태복음 13장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천국의 비유들은 그 어느 시인도 추종하기 힘든 탁월한 문학적 비유를 제시하고 있다. 네 가지 종류의 땅에 떨어진 씨를 비유하는 '씨뿌리는 비유"의 예를 하나 들어보자.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 때,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태13:3-9)."

이러한 비유 외에도 앞서 말한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라든가, 가라지의 비유, 감추어진 보화의 비유 등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말해주고 있다. 모두 "비유가 아니면 말하지 아니하였다(마태13:34)."고 마태가 말하는 것처럼, 예수의 이 같은 상상력은 자신에게 부여되었다고 믿은바 사명을 완수함에 있어서 탁월한 시적 정서를 가지고 현재와 미래의 일을 통찰하는 예지가 탁월했기 때문이라고도 말 할 수 있다.

예수는 풍류객이 지녀야 할 시적 상상력뿐만 아니라 방랑자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서른 살의 청년 예수의 공적인 생애 대부분은 유랑하는 설교자의 삶이었다. 그가 서른이 되기 전까지는 오히려 더욱 많은 방랑의 삶이었는지도 모른다. 지정학적으로 유대와 사마리아와 광야 그리고 갈릴리 등지를 거쳐 광활한 지역을 방랑걸식하며 걸어 다녔다. 예수는 열두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여행을 떠날 때에 갖추어야 할 자세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다(마태10:10)."

평화의 복음을 전하면서 입은 옷 하나로 방랑 걸식하라는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어떤 성이나 마을을 가던지, 그 중에서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다음 장소로 떠나기까지 그곳에서 일시적으로 체류하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일행을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평안을 빌어주고 배척하는 자들의 집에서는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마태10:14)."고 말한다. 주면 얻어먹고 복음을 전하고, 안주면 그만으로 돌아섰다. 전형적인 풍류가 아니가? 예수는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복음의 선포에 분명하고 확신에 찬 의지가 있었다. 그 복음의 내용은 물론 '새 계명'에서 언급 되듯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 된다. 그 사랑의 복음, 혹은 '천국 비밀'을 전하는 길에, 밥 한 그릇 혹은 냉수 한 그릇 대접해 주지 않는 사람에게는 두 번 다시 말할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뜻이다. 사실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제 멀리 있거나 특수한 성소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영접하는 자들의 마음(가슴)에서 피어나는 것이었다.

언젠가 예수는 예루살렘과 가버나움이라는 지점의 중간쯤에 위치한 에발산 기슭의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 우물가에 앉게 되었고, 그의 제자들은 음식을 사러 동네로 들어갔다. 이 때 한 여인이 우물가로 다가와서 대뜸 예수가 예언자인줄 알고 "하나님을 어디서 예배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 이 때,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자여, 내말을 믿으라. 이 산(그리심)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라.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靈)과 진리(眞理)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지금이 이때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 지니라(요한3:3-26)."

예수가 이렇게 말한 뜻은 이스라엘의 남북 분열 이후 사마리아와 유대 지방 사람간의 오래된 지역감정이 있었고, 그들 각각의 성소(聖所)가 따로 있었으며 자기들의 성소가 참된 예배처라고 서로 다투고 있을 때였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에 성소를 지었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이 진정한 유일 성소로 주장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이 여인의 질문 속에서 한 마디 말로 일축하여 성소의 문제를 지역적으로나 건축물에 제한을 두지 않고 영혼이 거하는 마음이 성소라는 사실을 밝힌다. 이제 하나님을 만나는 곳은 마음이다. "네 마음이 곧 성전"이라는 뜻이다. 마음이 진정한 처소이기 때문에 고정 된 장소는 의미가 축소되거나 상실 되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무주처열반(無住處涅磐)이다. 하나님을 마음에 모신 예수는 온 땅을 두루 다니며, 진정한 천국의 장소가 어디인지를 유랑하며 설파 했던 것이다. 이것이 예수가 유랑하는 설교자가 되게 된 결정적인 이유다. 이로써 예수에게는 기존의 오래된 지역감정을 무너뜨릴 수 있었고, 유대인들이 거리끼는 '이방의 도시' 사마리아에 가서도 천국의 복음을 외치고 다녔던 것이다.

예수가 보기에 화려한 궁전과 높은 성벽은 오히려 하나님을 떠나게 하거나 그곳에 가두고 있었고, 하나님을 자기들 위주로 고문시키고 있는 현장이나 다름없었다. 예수는 이러한 성전과 성벽에 대한 깊은 회의와 반감이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예수가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있다고 강도 높게 비판 했던 것(마태21:13)이나, 성전에서 채찍을 들었던 예수의 모습에서 당대의 종교적 타락이 얼마나 심했던 것인가를 알게 해 준다(마태21:12-17). 이는 제사장들의 타락상에 대한 예언자적 분노이기도 했다.

예수를 유랑하는 풍류객이 되게 하였던 또 하나의 가능성은 광활한 광야를 배경으로 한 유목민의 정신적 풍토였을 것이다. 족장 아브라함으로부터 본격적으로 확산되는 유목민의 삶의 전통을 예수도 이어 받았고, 예수의 탄생 자체도 예루살렘 성 내의 어디가 아니라, 베들레헴의 마구간으로서 유목민의 광야와 연결점이 있는 곳이다. 예수는 어릴 적에 나사렛에 있는 예배당을 정기적으로 다니며 예배를 드렸으나 마을을 떠난 후, 방랑 설교자와 기적을 행하는 자로서 소문이 난 후에 고향을 방문할 정도로 유랑 생활을 지속했다(마태13:53-58). 예수가 고향에 돌아와서 훌륭한 설교를 할 때에, 그들은 "이 사람이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고 하면서 배척했다. 그러나 정작 예수는 자기 고향과 집에서는 배척을 받았지만, 배척하는 그들을 향하여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은 곳이 없다(마태13:57)."고 말한다.

유랑하는 설교자였지만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았던 예수의 매력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이었을까? 예수는 더 이상 자기의 가족과 고향에 자기의 정체성을 가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앞에서 보았듯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관점에서 가족의 개념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모두가 '어머니요 형제자매'라고 말함으로써 공동체의 지평을 확대 시킨다.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자는 어디를 가든 누구나 하나님의 동등한 자녀요, 새로운 가족이 된다. 그 가운데는 직업과 신분의 차별이 와해되고 평등 공동체가 실현되는 것이었다. 더 이상 족보나 혈통 출신 지역과 신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자신의 혈통적 아버지인 요셉을 더 이상 아버지라 칭하기보다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더욱 중시했던 까닭도 사막과 광야에서 시험을 받고 유랑하던 예수가 어느 날 새롭게 인식한 "하늘" 아버지에 대한 깨달음이 더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늘"을 체험하고 "하늘 아버지"를 체험한 예수는 "하늘 아버지의 뜻"을 전해야겠다는 사명감에 불탔고, 그 사명감은 제자들을 불러 모으기에 충분한 열정으로 불탔다.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도 하나님이 입히시는데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다.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라고 하는 희망의 메시지와, 마음이 낮고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천국 복음의 가르침 또한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반면에 종교와 정치를 권력과 압제의 수단으로 일삼는 자들을 향해서는 "돌들이 소리 지르며" 너희의 불의를 고발할 것이라고 비판한다. 이미 앞에서 본바와 같이 성전을 통해 매매와 이익의 수단으로 삼는 자들, 그리고 종교를 빙자한 정치 권력자들에게는 분노의 불을 뿜어댄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마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태10:34)."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라.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겠는가(누가12:49)."

예수의 의도는 분명해 졌다. 불의를 폭로하고 정의를 회복하려는 것이었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고 사랑과 용서를 통한 화해의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복음이 전달되어지고 수용 되어질 때는 형제자매로서 하나님 나라의 한 가족이 되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화(禍)가 있으리라고 혹독한 욕을 퍼부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마태12:34)"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아! ...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태23:29-33)."

예수의 분노와 비난은 이러한 한두 가지 예를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 할 것이다. 복음서 곳곳에서 외식하고 압제하는 무리들에 대하여 예수는 분노에 찬 격한 음성으로 가식된 종교-정치 지도자들을 비판하다.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는 내게 와서 나의 멍에를 메고 배우라"고 했던 예수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분노에 찬 경고를 목청껏 외쳤던 이유가 무엇일까? 사랑과 관용을 강조하며 용서와 화해를 주장하던 예수가 분노에 찬 경고를 거듭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다. 거짓을 버리고 돌아서라는 것이다. 진실 되게 살라는 단 한 가지 이유였다. 예수에게서 하나님은 진리다. 진리 앞에 거짓이 용납되지 않는다. 드러나는 위선을 폭로하고, 검을 주어 치유하고, 불을 질러 태움으로써 모두가 거듭난 '하나님나라'의 광장으로 나아오라는 선포다.

예수가 위대했던 까닭도 스스로 모범을 보였듯이 자신을 높이는 자를 낮추려 했고, 낮아진 자를 높여 주고자 했기 때문이다. 삶을 통해 보여준 것처럼 진리(眞)와 선함(善)과 숭고한 뜻으로 아름다운(美) 매력을 갖춘 예수는 이스라엘의 종교-정치적 혼란 속에서 믿음(信)과 소망(望)과 사랑(愛)을 심어 주면서, 새로운 대안 공동체로서의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사랑과 평화의 풍류객이었다. "하늘의 뜻"을 따라 살려고 했던 예수가 공자를 만날 수 있는 접점도, "하늘"의 도(道)를 따라 살고자 하던 공자의 덕치(德治)주의적 열망과 동일했다는 점이다. 그들 모두 제자들과 함께 스스로 무욕(無欲)의 비움(虛)과 나눔(施) 그리고 평화로운 공동체적 사귐(交)의 모범이 되었다는 점뿐만 아니라, 정의로운 땅의 질서와 인간다운 삶의 행복을 위하여 부끄러움 없이 바람처럼 자유로운 정신으로 살았다는 점에서도 이들은 서로 멋진 풍류객으로서의 만남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공자&예수

재휘애비.溢空 2014. 4. 2. 16:48

(2) 공자와 예수의 땅(地)의 정치학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한 신정정치(神政政治)를 꿈꾸었다면, 공자는 하늘이 부여한 덕(德)을 실현하기 위한 덕치주의(德治主義)를 꿈꾸었다. 덕치주의는 법(法)으로 다스리는 법치주의와 다르다. 법으로 다스리는 법치주의에 비해 공자는 덕치주의의 이상과 그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백성을 정치적 강령으로 인도하고 형벌로 다스린다면 백성이 형벌을 면하려고만 하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백성을 덕으로 인도하고 예(禮)로 다스린다면 백성들은 부끄러워 할 줄도 알고 또한 잘못도 바로 잡는다(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위정/3)." 형벌을 위주로 하는 법치보다는 도덕적 감화력에 호소하는 덕치의 실현을 말하면서 하늘이 부여한 덕을 따라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옳을 뿐만 아니라 법치보다 그 효과도 뛰어나다고 말한다.

덕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덕망 있는 지도자는 마치 북극성과 같다고 공자는 비유하여 말하기도 한다. "덕으로 하는 정치를 비유하자면, 북극성이 제 자리에 있음으로써 모든 별이 그를 향하는 것과 같다(爲政以德, 譬如北辰, 居其所而衆星共之. 위정/1)." 북극성이 제자리에 있다는 것은 그 만큼 자신의 자리를 잃지 않고 도리를 지킨다는 뜻이다. 공자가 제(齊)나라에 갔을 때, 제경공(齊景公, 기원전547-490즉위)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君君臣臣父父子子. 안연/11)." 사실 제경공은 당시에 임금의 도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각자 자신이 처한 위치와 상황에 따른 인륜(人倫)의 도리를 지키는 것이 마치 북극성이 제자리에 있는 이치와도 같을 것이다. 이 말은 자신의 도리를 바르게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각각이 처한 위치에 따라 그에 해당되는 정사(政事)가 있음을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직위에 있지 않으면 그 직위에 해당하는 정사를 꾀하지 말아야 한다(不在其位, 不謀其政. 태백/14, 헌문/27)." 각각의 분수에 맞는 일을 도모함으로써 자신의 도리를 바르게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공자의 사상은 '정명론(正名論)'이라고 잘 알려져 있다. 예컨대 이를 명분론(名分論)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각자의 이름(名)에 걸 맞는 알맞은 직책을 바르게 수행 할 것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공자의 제자 가운데 정사(政事)에 밝은 자로(子路)가 공자에게 여쭈기를, "위(衛)나라의 임금이 선생님을 모시고 정치를 한다면 장차 무엇을 먼저 하시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러자 공자는 "반드시 명분을 바로 잡겠다(必也正名乎. 자로/3)."고 했다. 이 말에 자로는 공자가 세상 물정을 잘 모르신다고 판단하고 그런 것이 무슨 효과가 있겠느냐고 대든다. 그러나 공자는 자로의 어리석음을 꾸짖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명분이 바로서지 못하면 말이 순리(順理)에 맞지도 않고, 말이 순리에 맞지 않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와 음악이 흥성해지지 못하고, 예와 음악이 흥성해지지 못하면 형벌이 적절하지 못하며, 형벌이 적절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살아 갈 수가 없다(名不正則言不順, 言不順則事不成, 事不成則禮樂不興, 禮樂不興則刑罰不中, 刑罰不中則民無所措手足. 자로/3)." 이러한 명분론은 이름과 직책에 알맞은 역할을 각각 바르게 수행함으로써 백성 전체가 잘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역설한 것이다.

한번은 이욕(利慾)에 빠져 있던 노나라의 계강자(季康子)가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물었을 때, "정치는 바르게 하는 것이다(政者 正也. 안연/17)."라고 대답했던 것도 앞서 말한 '정명론'과 같은 맥락이다. 사람이 바르지 못한 것을 바르게 하는 것이 정치라는 뜻이다. 계강자가 다시 나라에 도둑이 많은 것을 걱정하여 대책을 물었을 때도, 공자는 계강자의 바르지 못함을 책망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실로 선생께서 탐욕을 내지않는다면 비록 상을 준다 해도 백성들은 도둑질 하지 않을 것입니다(苟子之不欲, 雖賞之不竊. 안연/18)." 계강자의 질문은 형벌로 도적을 다스리고자 하는 법치주의 정신을 드러내고 있는 반면에, 공자는 먼저 도덕적 양심으로 솔선하여 스스로 바르게 함으로써 백성들이 모범을 따르게 하는 덕치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공자가 지도자를 향하여, "그 자신이 올바르면 백성들은 명령하지 않아도 행하고, 그 자신이 바르지 않으면 명령을 내린다 할지라도 따르지 않는다(其身正 不令而行, 其身不正 雖令不從. 자로/6)."고 했던 말과 같다. 또한 공자가 "진실로 자기 자신을 바르게 한다면 정치를 하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그 자신이 바르게 하지 못하면서 남을 어떻게 바르게 할 수 있겠는가(苟正其身矣, 於從政乎, 何有. 不能正其身, 如正人 何. 자로/13)."라고 했던 말과도 같은 이치다. 이렇게 지도자는 스스로 바르게 함으로써 백성들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덕망이 있어야 한다. "백성들이 지도자를 믿을 수 없으면 나라가 서지 못한다(民無信而不立. 안연/7)."고 한 공자의 말이 이를 뒷받침한다.

탐욕을 드러내는 계강자와 대비하여 볼 때, 기상이 높고 덕망이 높은 성군(聖君)으로서의 순(舜)임금과 우(禹)임금을 높이 기리며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위대하도다! 순임금과 우임금께서는 천하를 소유하시고도 거기에 사사로이 관여하지 않으셨도다(巍巍乎, 舜禹之有天下也而不與焉. 태백/18)." 공자는 순임금과 우임금을 덕치주의의 이상적 인물로 존숭하여 그들의 무욕(無欲)의 통치방식의 높은 도량을 칭송하고 있다. 그러나 공자는 이들보다 더 존귀한 덕을 지닌 자로서 그들보다 앞선 요(堯)임금을 들고 있다. "위대하도다! 요의 임금 되심이여! 높고 높음이 오직 저 하늘뿐인데, 오직 요임금만이 이를 본받았도다. 넓고 넓어서 백성들이 무어라 형용하지 못하는구나. 높고 높도다! 그가 이룬 공적이여! 찬란하도다! 그 빛나는 문화여(大哉, 堯之爲君也. 巍巍乎唯天 爲大 唯堯則之 蕩蕩乎民無能名焉. 巍巍乎其有成功也. 煥乎其有文章. 태백/19)!"

요, 순, 우로 이어지는 성군(聖君)의 정치는 모두 도량이 넓은 무위(無爲)의 덕치를 실현 했던 것으로 공자는 이를 높이 칭송하고 있다. 특히 무위의 덕치를 실현한 순임금에 대한 공자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인위적으로 하지 않고 무위로 나라를 다스린 분은 순임금이로다! 어떻게 하셨던가? 몸을 공손히 하고 바르게 임금의 자리를 지키셨다(無爲而治者, 其舜也與. 夫何爲哉, 恭己正南面而已矣. 위령공/4)." 무위로 다스리는 '무위이치(無爲而治)'는 사실 노자의 전속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데 공자도 요, 순 임금에게는 무위의 정치를 실현한 분으로 높이 평가하면서 그분들의 덕치가 다시 재현되기를 늘 사모하고 있다.

참으로 임금이 임금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노나라 정공(定公)이 정치의 어려움을 알았던지 한마디 말로 나라를 흥하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공자에게 물었을 때, 공자의 답은 의외였다. "만일 임금 노릇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안다면, 한마디 말로 나라를 일으키는 것도 기약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如知爲君之難也, 不幾乎一言而興邦乎. 자로/15)?" 나라의 흥망성쇠가 임금의 역할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을 공자는 말해주고자 했고, 임금의 말이 선한지 악한지의 여부에 따라 국운의 성쇠가 달려 있음을 말하고 있다.

지도자의 통치 기술은 말에만 있지 않다. 말에 따른 행동의 일치가 중요하며, 무엇보다 민심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하여 가까이 있는 자들로부터 신임을 얻어야 한다. 초나라의 현령인 섭공(葉公)이 정치를 물어 왔을 때도, 공자는 "가까이 있는 자들을 기뻐하게 하고, 멀리 있는 자들은 찾아오게 하는 것입니다(近者說, 遠者來. 자로/16)."라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정치에는 서두르거나 작은 이익에 집착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 제자 자하(子夏)가 노나라 거보라는 고을의 읍재(邑宰)가 되어 공자에게 정치를 물었을 때, 공자는 "속히 성과를 보려고 하지 말고, 작은 이익을 추구하지 말라(無欲速, 無見小利. 자로/17)."고 했다. 이는 자하가 정치에 입문했지만 자칫 잘못하여 속히 성과를 보려고 졸속행정을 하는 경우와 소소한 이익에 집착하여 큰 뜻을 놓칠까 염려하여 일렀던 말이다.

제자 자장이 어떻게 정치에 종사해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공자는 그 덕치의 예를 구체적으로 요약해서 말해주고 있다. 이른바 '다섯 가지 아름다운 덕을 높이고, 네 가지 악한 일을 물리치면 정치에 종사 할 수 있다(尊五美, 屛四惡, 斯可以從政矣.)."는 것이다. 그 다섯 가지 미덕은 "군자가 은혜를 베풀되 낭비하지 않고, 수고롭게 일을 시키더라도 원망을 사지 않으며, 뜻을 이루려 하면서도 탐욕하지 않으며, 넉넉하면서도 교만하지 않으며, 위엄이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은 것이다(君子惠而不費, 勞而不怨, 欲而不貪, 泰而不驕, 威而不猛.)" 그리고 네 가지 악한 일은 다음과 같다. "가르쳐 주지도 않고 잘못했다고 죽이는 것을 학정이라고 하고, 미리 주의를 주지도 않고서 성과만 바라는 것을 포악하다고 하며, 명령을 내리는 것은 게을리 하면서 기일을 재촉하는 것을 해친다고 하고, 고르게 나누어 주어야 하는데도 출납을 인색하게 하는 것을 옹졸한 벼슬아치라고 한다(不敎而殺 謂之虐, 不戒視成 謂之暴, 慢令致期 謂之賊, 猶之與人也 出納之吝 謂之有司. 요왈/2)." 이렇게 공자는 소위 5가지 미덕과 4가지 악덕을 구분하여 설명하면서 자장에게 정치적 미덕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혀주고 있다. 이는 요순임금 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선왕(先王)들의 아름다운 덕치를 존숭하여 요약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에서 고대의 덕치주의와 달리 법치주의가 처음 성문화된 시점은 기원전 536년 정(鄭)나라의 자산(子産)이 재상에 취임하면서 법률을 제정하고 법조문을 청동기에 새긴 것을 기점으로 한다. 조세를 국고에 납부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법률의 제정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이후 법제도가 강화되고 춘추(春秋)시대 말기 법치주의가 위세를 떨칠 때 공자는 이러한 정치제도에 대한 비판적 발언을 하면서 덕치주의를 주창하며 나섰던 것이다. 사실 덕치주의는 도시 국가의 주요 부족내의 부족자치주의를 기초로 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노자(老子)가 말하는 '소국과민(小國寡民)'의 이상적 정치형태일수도 있다. 그런데 공자가 말하는 덕치주의는 개인이 집단에 예속당하는 허술한 덕치주의가 아니라, 개인의 양심을 바탕으로 하는 덕치주의였다. 이른바 각자가 자신의 양심에 입각해서 예의를 지키며 각자의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이 공자가 말하는 이상적 덕치였던 것이다.

노(魯)나라의 임금 정공(定公)이 공자에게 임금이 신하를 부리는 도리와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방법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임금은 예(禮)로써 신하를 대하고 신하는 충(忠)으로써 임금을 섬겨야 합니다(君使臣以禮, 臣事君以忠. 팔일/19)." 이는 윗사람과 아랫사람 사이의 상호간에 예절과 충심으로 대 할 것을 말한 것이다.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함부로 대하기 쉽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속이기 쉽다. 그러니 예절과 충심, 곧 진심이 덕치의 기본이 된다는 뜻이다. 공자는 국가 제도의 기본적인 법 자체를 부정하기 보다는 법이 있어도 그보다 이전에 양심에 따른 진심과 예의를 통하여 조화로운 법적 질서가 잡혀가기를 희망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현실정치에서 이러한 덕치를 바르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지도자의 등용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노나라의 애공(哀公)이 공자에게 어떻게 하면 백성이 복종할 수 있겠는지를 물었다. 이에 대해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직한 사람을 등용하고 그릇된 사람을 쓰지 않으면 백성들이 따르고, 그릇된 사람을 등용하고 정직한 사람을 쓰지 않으면 백성들이 따르지 않습니다(擧直錯諸枉則民服, 擧枉錯諸直則民不服. 위정/19)." 공자가 이렇게 말한 까닭은 애공이 교활한 자를 등용하고 정직한 자를 배제했기 때문이다. 정치, 곧 덕치에 있어서 지도자나 관리자는 반드시 정직해야 하며 그럴 때 반드시 백성이 따르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정치에 있어서 정직 곧 진실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정치적 인물을 등용함에 있어서 정직과 함께 중요한 덕목은 어진 인재를 등용해야 함은 말할 필요가 없다. 제자 중궁(仲弓)이 계씨(季氏) 집안의 가신(家臣)이 되어 공자에게 정치를 물어 왔을 때에 공자는 다음과 같이 이른다. "먼저 직무를 맡은 자에게 일을 분담시키고, 사소한 잘못은 용서해 주며, 어질고 현명한 인재를 등용하라(先有司, 赦小過, 擧賢才. 자로/2)."

정치에 있어서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는 위정자의 근면성과 성실성이다. 한번은 위(衛)나라 출신의 제자 자장(子張)이 정치를 물었을 때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위정자의 지위에 거할 때 게으름이 없어야 하고, 정사를 시행함에 있어서는 진실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居之無倦, 行之以忠. 안연/14)." 정치는 백성의 삶의 질을 좌우하는 것인 만큼, 태만하여 정사를 소홀히 해서도 안 되지만, 정사를 행함에서는 무엇보다 정직성을 기반으로 하여 충실히 업무를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로(子路)가 정치에 관하여 물었을 때도, 공자는 "솔선수범하고 열심히 일하라(先之勞之)"고 했다. 그러자 다시 더욱 구체적인 내용을 묻자,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無倦. 자로/1)."는 말로 일축했다. 공자가 일생동안 얼마나 열정적으로 학문과 수련을 중시하면서 정치적 덕치가 실현되기를 열망하고 가르쳤는지 잘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덕치주의의 실현을 꿈꾸던 공자의 정치적 유랑생활을 잠시 되돌아보자. 공자는 자신의 나라인 노나라에서 노환공(魯桓公)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맹손씨(孟孫氏), 숙손씨(叔孫氏), 계손씨(季孫氏)라는 세 가문, 즉 삼환씨(三桓氏)로 불리는 세 씨족이 노나라의 군주를 꼭두각시처럼 조종하면서 국정을 좌지우지 할 때, 이들 삼환 세력을 반대하여 36세쯤 되던 해인 기원전 517년에 노나라를 떠나 제(齊)나라로 망명했다. 제나라에서 정치와 경제 그리고 음악 등의 여러 문물을 익히면서도, 제나라 또한 전씨(田氏)가 임금을 흔들 정도의 기세로 독재 권력을 휘두르자 공자는 환멸을 느끼고 다시 기원전 509년경 노나라로 돌아갔다.

공자는 노나라와 제나라의 이러한 상황을 두고 한탄하면서, 두 나라 모두 왕도(王道)의 정치를 버리고 패도(覇道) 정치를 일삼았기 때문에, 그 옛날 주공(周公)이 노나라를 다스리고, 태공이 제나라를 다스리던 시절을 회고하면서, 지금의 제나라의 풍속은 위세가 노나라보다 강한 것 같아도 선왕(先王)의 도가 완전히 무너졌음을 한탄하였다. 그래도 노나라는 훌륭한 임금이 나오지 않아서 형세는 제나라보다 약해 보여도 선왕의 도가 조금은 남아 있다고 본 것이다. 그리하여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제나라가 한번 변하면 노나라에 이르고, 노나라가 한번 변하면 도(道)에 이를 것이다(齊一變, 至於魯, 魯一變, 至於道. 옹야/22)." 공자는 여전히 노나라와 제나라 모두 선대의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도에 따른 덕치를 회복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때 공자는 이미 불혹(不惑)의 나이를 넘긴 44세경이었고, 그 때는 공자의 학식과 인품이 드높아 초기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제자 중에 가장 연장자인 자로(子路)가 35세였으며, 민자(閔子)는 29세, 백우(伯牛)는 27세, 유약(有若)은 31세로서 공자의 초기 제자단이 이 무렵에 형성 되었다. 공자의 제자들은 신흥 선비(士) 계급에 속하는 자들이 대부분으로서 교육을 받은 제자들은 귀족의 가신(家臣)이 되거나 관료로서 벼슬살이를 하였는데, 공자는 이들에게 단순한 직업교육이 아닌 인격을 수양하는 학문을 가장 우선시하여 가르쳤고, 그 인격적 덕성에 힘입어 살아 갈 것을 역설했다. 공자는 제자들을 교육하면서도 노나라의 개혁 운동에 열성이었는데, 특히 노나라의 임금을 무시하고 국정을 뒤흔드는 삼환 가문의 타도를 위해 노력했다. 그리하여 국가의 정권을 군주의 손에 돌려주고 그가 바라던 이상적인 덕치를 실행하는 것이 공자의 희망이었다. 그러한 개혁운동은 공자가 기원전 499년에 대사구(大司寇)라는 최고 재판관이 된 후 외교관을 겸임하면서 계손씨와 숙손씨는 세력을 약화시키는데 성공 했으나 맹손씨의 세력을 약화시키는데 실패함으로써, 그의 계획은 성공의 목전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개혁이 실패로 돌아가자 기원전 497년에 공자는 다시 다른 나라로 유랑의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웃한 위(衛)나라를 위시하여 남쪽의 송(宋), 정(鄭), 진(陳), 채(蔡) 등의 여러 나라를 전전하며 죽을 고비를 세 차례나 넘기는 등 많은 수난을 겪으며 13년간의 외유(外遊)를 마치고 기원전 484년에 다시 노나라로 귀국한다. 앞서 살펴 본바와 같이 환퇴(桓퇴)에게 습격을 받아 목숨을 잃을 뻔 했던 일이나(桓퇴其如予何. 술이/22), 진(陳)나라와 채(蔡)나라의 국경에서 양식이 떨어져 7일간이나 굶주리던 일, 그리고 위(衛)에서 진(陳)나라로 가던 도중에 광(匡)이라는 땅에서 마을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을 뻔 했던 일(匡人 其如予何. 자한/5; 子畏於匡. 선진/22)이 그것이다.

공자가 13년간의 외국 생활로 고난을 겪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는 이미 노나라에서 대법관과 외교관의 자격을 성공적으로 수행 했던 인물인 만큼 타국에서는 임금들도 공자의 학식과 견문을 듣고자 초대하고 환대했다. 그때마다 공자는 그들에게 덕치의 실현의 필요성을 힘주어 강조했다. 공자는 군주의 힘을 되살리고 날뛰는 호족의 세력을 타도하는 것이 우선적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임금들은 공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을지라도 대부분의 호족들은 공자의 이상적인 덕치주의에 반기를 들었다. 결국 공자 자신은 하늘의 사명과 덕을 부여받아 세상을 평화의 나라로 개혁해야 함을 굳게 믿고 용맹하게 정진했으나, 한계에 부딪치고 말았고, 어느덧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젊은 제자 안회도 30세가 넘었으며, 자로는 60세가 됨으로써 13년의 외유를 마치고 기원전 484년에 귀국하자 공자 자신의 나이는 어느덧 69세가 되었다. 그 후 5년간 그는 제자들을 교육하며 <시경>과 <서경>등 고전을 정리하고 편찬하는 일에 전념하다가 기원전 479년 74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공자의 덕치주의의 이상은 당대에서 실현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의 교육적 가치는 길이 오늘날도 깊은 영향을 주고도 남는다.

이제 우리는 예수의 정치학을 살펴 볼 차례다. 예수의 정치학은 우선 평화를 위한 정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 평화는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비는 기도 속에서 진행되는 것이었다. 평화의 건설을 위한 유일한 무기와 방편은 비폭력적 아가페 사랑이었다. 그러기에 2천 년 전의 이스라엘 땅 갈릴리의 예수는 그의 탄생일을 기념하면서 오늘도 세계 역사에 평화주의의 실현자로 강하게 기억되고 있다. 특히 로마의 정치적 지배와 폭력 속에서 예수는 평화를 외치다 죽었지만, 일개 민족의 단순한 정치적 해방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인간의 근원적 해방과 평화를 위해 압제의 모든 수단에 저항했던 것이다. 인간의 근원적 자유를 압제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율법이든 관습이든 정치적 권력이든 그 어느 것에도 '진리'의 이름으로 서슴없이 저항했다. 그런 점에서 예수는 동시대의 규범적 틀을 넘어선 진보적 인간 해방가이자 개혁자로서의 정치적 소외자이기도 했다.

그 이유는 예수의 행동 윤리가 당시 어떤 정파나 정치적 계급과 집단에 예속되거나 혹은 그들의 지지를 받는 것이 아니었고, 오직 그 자신이 믿고 설정한 '하나님 나라'의 윤리에 입각하여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천국운동의 일환으로서 예수는 나름대로의 정치적 평화운동을 실현했던 것이다. 그러한 예수의 천국-정치 운동은 산상수훈에서 그 내용들이 집약적으로 잘 표현되고 있다. 이점은 이미 앞에서 '군자와 성도'의 길이라는 장에서 살펴 본바있다. 예컨대 예수는 재물의 축적이나 사회적 제도의 존속과 건설에는 무관심하고 오직, 천국의 예언자로서 어느 곳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으로 새로운 종말론적 평화적 공동체를 추구해 간다. 대부분의 예수의 추종자들은 사회적으로 제도적인 혜택을 많이 받지 못하는 소외 계층이었다. 어부, 농부, 나환자, 중풍병자, 귀신들린 자등이었다. 예수는 이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천국 공동체를 형성해 갔는데, 그 모양은 마치 '새로운 형태의 가족 공동체'와 같은 것이었다.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덕치주의에 입각한 국가의 정치적 개혁을 꿈꾸었던 것과는 달리, 예수와 그의 초기 제자들은 정치적 변혁 보다는 새로운 대안 공동체로서의 천국-공동체를 형성해 가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공자나 예수 모두 '하늘의 뜻(天意)'을 따라 그 덕목을 실천하고자 했던 점에서는 동일하다. '하늘의 뜻'을 따르는 길에는 자기-비움이라는 엄격한 수련이 요구 되었다. 예수의 제자 중 일부는 종래의 직업이나 자신의 가족마저 떠나고, 급기야 소유마저도 포기하면서 방랑 걸식하는 새로운 형태의 유랑 공동체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결속된 주된 이유는 임박하게 도래하리라고 믿었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신념 때문이었다.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나라'는 "좋은 진주들을 찾는 장사꾼과 비슷하다. 갑진 진주를 발견하면 가진 것을 팔아 그것을 샀던 것"이다(마태13:44-46). 이는 마치 가난한 날품팔이가 밭에 묻힌 보물을 발견하는 것과 같이 신기하고 기쁜 일이며, 보석 장사꾼이 갑진 진주를 발견하는 것과 같은 새로운 기쁨과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나라'란 과연 무엇인가? 공자에게 비유하자면 요순시대와 같은 찬란한 문화와 덕치가 실현 되는 그런 사회 이상의 이상 국가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그냥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침노하는 자'의 몫이다. 그 침노는 곧 쟁취다. 쟁취를 위해서는 희생적 대가가 필요하다. 소위 공자가 말하는 군자와 성인(聖人)으로서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수에게서는 제자도의 길이다. 제자도의 교육을 받아야 하나님 나라 건설의 역량 있는 일군이 될 수 있다. 공자에게서 잘 훈련 받은 제자가 정치에서도 훌륭한 재능을 발휘 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예수가 가르친 제자의 길은 힘든 것 같지만 사실은 가벼웠다. 예수는 이렇게 추종자들을 초대한다.

"지치고 짓눌린 여러분 다 내게로 오시오. 그러면 내가 여러분을 쉬게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우시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사실 나의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습니다(마태11:28-30)."

예수의 멍에와 안식은 유대주의의 풍속과 구약성서가 말하는 율법적인 '계약의 멍에'가 아니고 온유와 겸손을 토대로 한 '자유와 사랑의 멍에'였다. 온유와 겸손을 토대로 한 예수의 이 가벼운 가르침은 마치 공자의 성품이 '온유하고(溫), 어질고(良), 검소하고(儉), 공손하고(恭), 겸손(讓)했던 인품을 토대로 제자들에게 감화를 주었던 것과 인격적 측면에서 흡사하다. 사랑을 토대로 한 쉽고 가벼운 멍에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가르쳤던 예수의 정신은 공자가 자신의 도(道)는 오직 한 가지를 꿰뚫고 있다고 했을 때의 '일이관지(一以貫之)'가 '충(忠)과 서(恕)'라고 했던 것처럼, 진실과 사랑에 기초한 용서의 미학이 예수와도 상통하는 일면이 있다. 어쨌거나 예수는 사랑과 온유 그리고 겸손이라는 인격적 미덕을 가지고 자신을 추종하는 공동체에게 감화를 주고, 그토록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대망하던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이 땅에서 착수해 가고자 했던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분명하고도 과감했다. 그의 공동체들은 적어도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가 땅의 정치를 외친 중요한 대목이다. 예수가 하늘나라 곧 천국을 선포했다 할지라도,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선결과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사람은 이 땅에서, '정의와 평화'가 실현되게 하기 위해,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외친다.

"여러분은 세상의 소금입니다. 소금이 싱겁게 된다면 무엇으로 짜게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데도 쓸데가 없어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빛입니다. 산위에 자리 잡은 도시는 숨겨져 있을 수 없습니다. 등불을 켜서 그것을 상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놓습니다. 그래야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비칩니다. 이처럼 여러분의 빛이 사람 앞에 비치어 그들이 여러분의 좋은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를 찬양하도록 하시오(마태5:13-16)."

산위에 있는 도시처럼, 등경 위에 있는 등불처럼 예수의 제자와 청중들은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어야 했고, 세상의 부패상을 예방하고 치유하는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했다. 예수의 정치학은 바로 소금의 치유력과 빛의 인도에 있었다. 소금이 음식 속에서 제 맛을 내게 하는 것과 같이 예수의 제자들은 세상 속으로 파급되어 소금으로서의 가치를 톡톡히 해 내야한다는 논리다. 그러므로 예수의 정치학은 땅의 정치학이면서 동시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착한 행실의 결과에 대한 영광을 돌리라는 점에서, 하늘의 정치와 맞닿아 있다. 그러므로 예수의 정치학은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늘-땅의 정치학인 셈이다. 예수가 전한 "소금과 빛'의 정치학은 천국의 비유에서 말하고 있듯이, '누룩'처럼 번져가고 '겨자씨'처럼 자라가는 은밀한 성장에 있다.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하자면,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다(누가13:20-21)."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된다(마가4:30-32)."

누룩과 겨자씨는 처음 출발의 규모가 작다. 작지만 점점 커져서 나중에는 그 영향력이 전체에 미치게 된다. 예수가 말하는 이 같은 '지상천국'의 실현은 노자나 공자가 말하는 '소국과민'의 이상(理想) 국가에 비유가 가능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 공동체 그 자체를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 시 할 수는 없고 다만 이상적 모범을 보여 줄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는 그의 생애기간 동안 완전한 형태의 '지상천국'을 실현하지는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땅에서의 미완성의 하나님의 나라는 그가 죽은 이후에 보내지는 '성령'에게 역할이 이행 된다. 이 성령을 받은 제자단들에 의해 다시 초대교회가 형성 되면서 비움-나눔-사귐이라는 '원시공동체'의 모델을 보여주게 된다. 그러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하늘의 뜻'을 땅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대안적 공동체였지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완전한 공동체적 이상은 종말 그 이후의 새로운 천국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사는 예수가 살아 있을 당시에 예수가 꿈꾸고 실행 했던 공동체의 의지를 주목해 보자는 것이다. 예수의 관심사는 수많은 개인의 총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참된 이스라엘'의 회복에 있었다. 그것은 마치 공자가 춘추전국시대의 혼란기를 맞이하는 과정에서 주(周)나라의 문물과 도덕이 회복되기를 꿈꾸었던 것처럼, 예수도 무너진 정의와 평화가 실현 되도록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염원하는 '이스라엘'의 회복이었던 것이다. 이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있었고, 상심과 좌절 속에 민심은 흩어져 있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을 뜻하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새로운 공동체의 출현이 절실했고, 예수의 제자단은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제자를 중심으로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온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존재로 나섰다. 거기에 집권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거세게 반기를 들고 예수 공동체를 핍박했던 것이다.

예수가 구상했던 '참 이스라엘' 공동체는 보복행위가 다시는 없고, 지배구조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평등 공동체였다. 이러한 예수의 윤리는 사회와 세상 전체에 그대로 현실적으로 적용 될 수 없는 것이기에 오직 그 뜻을 추종하는 작은 공동체로부터 출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그 공동체는 누룩이 되고 겨자씨가 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가 역설했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초기 공동체는 그가 십자가에 죽은 이후에 몇몇 제자들과 사도 바울 등의 역할로 원시 그리스도의 교회를 탄생시킴으로써 세상 속의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우주적 보편적 교회 공동체로 거듭 발전한다. 그러나 지난 2천년의 교회의 역사는 유무상통하는 이상적 원시 공동체의 모습을 계승하지 못하고 점차 본의를 상실해 갔던 것을 역사를 통해서 잘 알고 있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의 일그러진 모습으로 세간의 비난을 받고 있는 것도 초대 교회 공동체의 이상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공동체를 통해 세상을 변혁하고자 했던 예수의 정치학이 처음에 일시적으로 성공을 거두는 듯 했으나, 역사의 흐름과 더불어 그 본의는 점점 멀어져 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외형적으로 보이는 교회를 통하여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인 교회-공동체를 통해 오히려 예수의 해방의 정치학은 되살아나고 있다. 예수의 정치적 영성이 아직도 살아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신학적 논의에서는 예수가 정치적 인물이었던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일부 부정적인 입장을 보여 왔지만, 근래에 이르러서는 해방신학이 잘 말해주듯이 예수야말로 정치적인 혁명가였다고 말 할 정도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의 정치적 역할도 있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예수의 모든 공동체적 활동 자체 어느 하나도 정치적인 것이 아님이 없다. 왜냐하면 예수는 처음부터 기존의 사회 질서와는 전혀 다른 대안적 공동체로서의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종말론적인 의식을 가지고 사회와 제도들을 개혁하면서 삶의 질을 바꾸고자 하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공자가 그러한 개혁의 꿈을 주나라를 모델로 했다면, 예수는 자신의 믿음과 상상력 속에서 그려낸 '하나님의 나라'를 모델로 했기 때문이다.

예수가 상상하며 그려내는 하나님의 나라는 '알곡은 곳간에 거두어들이지만,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지고(누가3:17),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며 포로 된 자를 자유하게 하는 곳이며(누가4:18), 비폭력적 평화가 실현되는 나라요, 용서와 화해가 있는 나라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나라에 무조건 들어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쭉정이가 되어서는 안 되며, 용서를 모르는 인간이 되어서도 안 된다. 남에게 용서를 받기 위해서라도 먼저 남을 용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한 알의 밀알처럼, 묵묵히 자기를 희생하면서. 사랑 때문에 예수 자신이 십자가에 죽었던 것처럼. 그런 점에서 예수의 정치학은 결국 사랑의 정치학이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

공자가 인(仁)의 정치학을 펼쳤다면, 예수도 사랑의 정치학으로 일생을 마감했다.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도 예수의 새 계명에서 드러나듯이, '서로-사랑'이었다. 일방적인 사랑은 불완전하다. 모두 함께하는 '서로'의 사랑, 이것이 불완전한 지구촌 한 구석을 밝히는 작은 등불이 될 것이다. 공자나 예수 모두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염원하는 마음으로 욕심을 비우고 가난한 마음이 되어 가진 재능을 서로 나누며, 거룩한 공동체적 사귐을 통해 이상적 국가, 곧 지상천국을 실현하고자 열망했다는 점에서 서로 상통한다. 차이점이 있다면 공자는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식으로 정치 지도자들의 마음 자세를 강조했다면, 예수는 가망성이 보이지 않는 타락하고 완고한 지도자들보다는 주변에 있는 민중들을 교화하고 훈련함으로써 새로운 대안적 공동체를 마련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공자가 위로부터의 혁명을 통한 하향식 접근 방식을 택했다면, 예수는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통한 상향식 접근법이었다고도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자와 예수, 그들은 무엇보다 그들 스스로 온유하고 겸손한 미덕을 갖춘 자들로서 제자들을 가르쳤고, 하늘과 인간에 대한 공경을 중심으로 목숨이 다할 때까지 정의와 평화 그리고 자비의 나라를 만들고자 힘썼던 것이다.